[호국의 성지 상주 .9] 6·25전쟁 화령장전투<상>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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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30   |  발행일 2019-09-30 제12면   |  수정 2019-09-30
북한군 상주 진출 저지 전략적 요충…상곡리 전투서 적 250명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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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화서면 상현리에 위치한 화령장 전투지. 6·25전쟁 당시 국군 제17연대와 제1사단은 화령장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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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장 전투 무공수훈자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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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장 전투지에 전시돼 있는 탱크의 오른쪽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화령장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전적비를 만날 수 있다.

상주 북부에 위치한 화령장은 6·25전쟁 당시 매우 중요한 격전지였다. 전쟁 초기 최단시간 내 남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과 방어선 구축 등 전열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국군이 서로 빼앗길 수 없었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화령장이었다. 특히 국군은 이곳에서의 값진 승리를 통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를 정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북한군이 화령을 통과해 상주를 점령하게 되면 함창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던 제6사단의 퇴로는 물론, 미군 주력부대의 퇴로까지 함께 차단될 상황이었던 터라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호국의 성지 상주’ 9·10편에서는 6·25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화령장 전투에 대해 다룬다.

북한군 전쟁 초기 소백산맥 돌파 혈안
15사단 주력 상주 거쳐 김천진출 노려
저지 못하면 국군 6사단 등 퇴로 차단

적군 남하 정보 입수한 제17연대 1대대
상곡리 매복 후 기습공격 혁혁한 전과
주민들도 정보 제공·잔적 소탕 큰 역할

#1. 소백산맥을 뚫어라 vs 소백산맥을 지켜라

6·25전쟁 발발 사흘 뒤인 1950년 6월28일,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에 남진을 거듭했고, 궁지에 몰린 국군은 7월3일 한강교를 폭파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은 한강방어선 전투를 시작으로 미군(유엔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한 지연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때 충북지역은 진천·청주·음성·괴산 등을 포함한 중서부지역과 충주·제천·단양 등을 포함한 중동부지역으로 나눠 지연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국군 제1군단은 청주, 수도사단은 진천, 제1사단은 음성, 제2사단은 증평, 제6사단은 충주, 제8사단은 제천·단양에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위치한 중서부지역은 미호천·금강·한강 등이 남쪽과 서쪽으로 흘러 방어에 유리하다는 지형 상의 특징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서부지역에서는 6월29일부터 7월13일까지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제1사단·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2사단과 제2군단 예하의 제15사단을 상대로 공방을 벌였다.

그 중에서 격전 중 격전이 진천에서 벌어진 ‘봉화산 전투’와 ‘문안산 전투’였다. 7월9일 전후로 벌어진 두 전투에서 북한군은 집중 포화를 퍼부었고, 이로 인해 진지가 파괴되고 사상자가 속출한 국군은 두 지역을 북한군의 수중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군은 포기하지 않고 재정비 후 결사 항전한 끝에 곧 회복했다. 모두 화령 코앞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화령은 보은~상주 간 25번 도로와 괴산~상주 간 977번 도로가 만나는 전략적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후 7월14일에 대구로 이동한 육군본부는 전투력을 회복하고 미군과 협동작전으로 지연전을 실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리고 작전명령 제57호, 즉 ‘전선조정 및 부대 재편성 계획’을 각 부대에 하달했다. 아울러 제1군단 사령부를 의령으로, 제1사단을 춘양으로 이동시킨 데 이어 제2사단을 해편하는 등 부대 재배치를 서둘렀다. 이에 따라 각 부대들은 이동과 동시에 재편성에 들어갔다.

북한군은 북한군대로 소백산맥을 돌파하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제15사단의 주력이 상주를 관통해 김천으로 진출해 대전에서 전투중인 미군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격멸시킨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로써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하기 전에 대전~김천~대구~부산까지를 최단시간 내에 점령하겠다는 목적이었다. 북한군 제15사단은 1개 연대를 괴산~송면리~화령 축선에 은밀하게 투입했다.

#2. 폭풍전야의 상주

북한군이 화령을 통과해 상주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 함창지역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는 국군 제6사단의 퇴로는 물론, 경부 축선에서 작전하고 있는 미군 주력부대의 퇴로까지 함께 차단될 상황이라는 건 육군본부에서도 파악하는 바였다. 이에 본부는 적정 수집을 위해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정보대를 따로 화령으로 파견했다.

이 중 제2군단 정보대에 속한 대원들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화북면 광정리 사람 이재선씨가 나타났다.

“갈령 북쪽 화북면 일대에 북한군이 침입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리려고 화북지서에 갔더니 아무도 없길래 화서지서가 있는 화령으로 가는 중입니다.”

대원들이 발 빠르게 확인해보니 실제 적이 갈령을 넘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육군본부는 즉각 대처에 나섰다.

“제17연대를 7월16일부로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한다. 제17연대는 함창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제17연대는 한꺼번에 움직일 형편이 아니었다. 당시 제1대대는 앞선 진천 ‘문안산 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보고 보은으로 철수해 병력을 보충하고 있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청주 전투’에서 철수 중인 까닭이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제1대대를 차량으로 먼저 출동시키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집결되는 대로 뒤따르도록 하였다.

이로써 보은에서 출발한 제17연대 제1대대가 보은과 상주 사이의 25번 도로를 따라 행군해 화령 중간 지점인 관기리를 지나던 무렵이었다. 뒤를 쫓아온 제1군단 작전참모가 주의를 주었다.

“첩보에 의하면 적이 괴산에서 갈령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이미 화령을 지나갔을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여 행군하라.”

아니나 다를까, 제1대대가 화령을 막 지나던 17일 오전 7시경, 한 노인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차량 행렬을 저지시켰다.

“나는 중달리에 사는 엄봉림이라고 합니다. 어젯밤에 북한군이 밤새도록 우리 마을을 지나 괴산에서 상달리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상주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니 이 길은 위험천만입니다.”

지휘부는 확실함을 기하기 위해 화서지서로 향했다.

“엄씨의 말이 맞소. 지금도 군인, 경찰, 청년단으로 구성된 정보팀이 적이 지나간 통로를 계속 감시하고 있는 중이오.”

제1대대는 행군을 멈추고 화령초등에 집결했다. 잘못하면 적의 행군대열 중간에 끼어 포위될 위험이 있느니 만큼, 우선은 정찰부터 하고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폭풍전야였다.

#3. 화령장전투의 시작, 상곡리 전투

제1대대는 이장 김종렬씨를 비롯한 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식사와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이관수 대대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경계병과 함께 청년단장(대한청년단 화령단부 회장) 김기령씨의 안내를 따라 상곡리로 나아갔다.

그러던 오전 11시경이었다. 중달리에서 상곡교 일대를 정찰하던 일행 앞에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바로 붙잡아 확인하니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에 속한 전령이었다. 그를 통해 상주 점령이 연대의 임무라는 것, 이미 1개 대대가 상주 방면으로 침투했다는 것, 아울러 후속부대가 계속해서 남하할 예정이라는 것 등을 알아냈다. 아울러 부대의 병력 규모까지도 파악했다. 작전이 기민하게 세워졌다.

“적의 뒤를 따라 추격할 것이 아니라 적의 휴식 예정지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한다.”

이에 제1대대 부대원들은 즉시 상곡리로 이동해 하천 위쪽의 3분 능선에 자리를 잡은 후 본격적인 전투준비를 시작했다. 오후 3시경에 진지구축과 위장 등을 완료한 데 이어 공용화기에 대한 탄약 분배를 서둘렀다.

긴장감으로 입술이 마르는 가운데 오후 4시가 되자 갈령 쪽에서 북한군이 나타났다. 오전에 사로잡은 전령의 소속부대인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였다. 맨 앞에 도보 부대가 자리하고 각종 포와 탄약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40여대의 우마차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곧 행군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갔다. 선발대대가 별 탈 없이 지나갔기에 경계를 푼 것이다. 제1대대는 적의 움직임을 낱낱이 관찰하면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시간은 어느덧 오후 7시30분을 가리켰다. 흩어져 있던 북한군 병사들이 식사를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무방비상태였다.

“사격 개시.”

적색오성신호탄을 신호로 400여정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나갔다. 박격포와 기관총도 쉴 새 없이 발사되었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북한군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곳곳에 쓰러졌다. 수십 필의 말과 소들이 포성에 놀라 날뛰며 내지르는 비명까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러는 새 날이 어두워졌다.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지휘부는 잔적에 대한 소탕작전을 다음 날 아침으로 미루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데 집중했다.

18일의 해는 곧 떠올랐다. 오전 2시에서 3시 사이에 화령에 도착한 제2대대와 제3대대도 기민하게 이동했다. 제2대대는 대기에 들어가고, 제3대대는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북한군 1개 대대를 격멸하는 데 투입되었다가 제2군단이 조치 중인 것을 알고 다시 상곡리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는 동안 제1대대는 상곡리 일대에 남아있는 적에 대한 소탕을 완료했다. 사살 250명, 포로 30명, 박격포 20문, 대전차포 7문, 소총 1천200정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한 대승이었다.

용케 살아서 인근 산속으로 도망간 잔적 소탕에선 주민들이 공을 세웠다. 이 작전에 직접 참여한 청년단 총무 김수용씨의 경우에는 자신의 집을 상주경찰서 화령파견대의 거점으로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을 트럭으로 안전한 곳에 피란시켰고 전투에 필요한 보급품 지원에도 앞장섰다.

이처럼 상곡리 전투는 결정적 제보에서부터 잔적소탕에 이르기까지 주민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전투였다. 하지만 혁혁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화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상곡리에서 날아간 불꽃이 바로 옆 동관리에 옮아붙은 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한국전쟁과 화령장 전투, 상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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