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7] ‘신건설’ 사건과 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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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2   |  발행일 2019-10-02 제13면   |  수정 2019-10-02
카프 복귀도 잠시…‘극단 신건설’ 사건 휘말려 징역 2년 선고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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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이라 불리는 ‘신건설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도 재판 과정을 연일 비중있게 다룰 만큼 전국적인 이슈였다. 김유영도 신건설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 카프의 외곽단체 극단 신건설

1933년 말에 구인회(九人會)를 나간 김유영은 카프로 돌아갔다. 그의 복귀 소식은 1934년 5월2일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영화제작연구소’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김유영이 ‘조선영화제작연구소’의 감독부와 각본부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1930년 4월에 카프를 탈퇴하였으니 약 4년 만이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유영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큰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극단 신건설’ 사건이었다.

신건설은 1932년 8월 서울 숭일동에서 창립된 극단이었다. 당시 프로연극(프롤레타리아연극)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합류하였으며 ‘정당한 프롤레타리아 연극 건설’과 ‘좌익 극단의 불성실성을 극복한 공연 활동’ 등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극단 설립의 주역이 다른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주춤하다가 재정비를 거쳐 1933년 1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프로연극계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을 망라했기 때문에 명실공히 프로연극인들의 결집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극단 멤버의 대부분이 카프의 맹원이었다. 1934년 2월에는 카프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카프 연극부에 가맹되기까지 했다.


1932년 창립 ‘신건설’카프 연극부 가맹
‘서부전선 이상없다’ 무대에 올려 주목
‘금산독서회’ 사건 계기 日帝 검거선풍
김유영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 법정에
공산주의 사상 전향 선택의 순간 맞아


다시 문을 연 이후에도 이런저런 사건으로 시끄럽던 신건설은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1933년 11월23일 ‘서부전선 이상 없다’ 공연에 들어갔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 소설가 레마르크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다. 신건설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김유영이 프로영화 제작 시에 절감했던 일제의 검열 문제를 똑같이 한계로 느낀 때문이었다. 즉 검열을 피하기 위해 원작이 가진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극장에서 합법적으로 공연된 1930년대 최초의 프로연극으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도 주의 깊게 다뤄졌다.

-이 극본은 이미 상해, 동경 등지에서 상연되어 기록적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조선에서는 아직 본 적 없는 5막16장에 달하는 많은 장수, 현대연극의 모든 요소를 가입한 새로운 연출과 무대장치, 대규모의 조명효과, 백여 명의 등장인원 등 조선 연극사상 신기록을 세우게 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배경은 다르지만 당시의 일본과 여러 면에서 비교된 까닭이었다. 이에 노동자와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면서 뜨거운 열기 속에 공연이 진행되었다. 지방공연도 계획이 되었다. 하지만 왕십리에서 올린 몇 차례 공연 이후로 무대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전북 금산에서 독서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2. 극단 신건설과 금산독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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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신건설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공연 소식을 다룬 1935년 6월29일자 동아일보. 신건설은 독일 소설가 레마르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언론에서는 ‘새로운 연출과 무대장치, 대규모 조명효과, 등장인원 수 등 조선 연극사상 신기록을 세울 것’이라고 극찬했다.

1934년 5월, 경성 선린상업학교 3학년 조권형이 수학여행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가던 중 고향인 전북 금산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조권형은 고향 친구들을 만나 권유했다.

“내가 친구들하고 함께 활동하는 독서회가 있어. 일반 과학서적을 돌려가며 읽고 있지. 금산에서도 이런 모임을 만드는 게 어때? 우리 독서회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서적도 교환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를 알게 된 금산경찰서가 득달같이 조권형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조권형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이자 신건설 관계자인 정병창과 조용림 등에게서 지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신건설의 배후에 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뭔가 수상하다고 여긴 금산경찰서는 곧 사건 전체를 전북경찰서로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점에 전북경찰서가 진행하고 있던 수사가 ‘전북공산당 재건운동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북경찰서는 ‘금산독서회’와 ‘신건설’을 공산당 재건운동의 세포조직으로 받아들였다.

공산당은 일제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사상과 공산주의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다. 전북경찰서는 신건설뿐만 아니라 카프에 관련된 이들까지 죄다 검거해 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유영도 불과 얼마 전부터 카프 관계자였다.

#3. 치안유지법의 족쇄

1934년 8월26일, 결국 김유영도 검거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인 28일에 전북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김유영은 카프의 별동대인 ‘조선영화제작연구소’를 만들어 대중에게 ‘주의’를 표현하는 영화를 제작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리고 이는 예심 과정에서 더 구체적으로 풀이되었다. 카프 가입과 이동식소형극장 조직이었다. ‘신건설 사건 예심 종결서’에는 이렇게 적시되었다.

-카프와 이동식소형극장은 궁극적으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인 결사이다. 따라서 김유영이 그런 결사에 가입하고 그런 결사를 조직한 행위는 모두 치안유지법 제1조 제2항에 저촉되며, 카프 가입과 이동식소형극장 조직은 연속 범행이므로 형법 제55조에 저촉된다-

김유영이 저촉했다는 치안유지법은 1925년에 일제가 제정한 법률 제46호로 천황제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활동을 단속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법률이 미치는 범위가 실로 광대했다.

치안유지법은 본디 1923년에 일어났던 관동대지진 이후 혼란해진 사회를 수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아울러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확산되고 있던 공산주의 사상을 통제하고, 1925년에 시행된 보통선거제로 인해 활성화된 정치 운동에 대응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 법은 조선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과 사할린 등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런데 이 치안유지법의 제1조를 보면 “국체(國體)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그 사정을 알고도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일본의 국체라 하면 천황제였다. 즉 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자본주의적 국가질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노동운동을 비롯한 그 방면의 활동가와 운동가들이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28년 4월, 일제는 치안유지법 가운데 ‘국체 변혁 도모’와 ‘사유재산 부인’에 대한 조항을 분리하였다. 이 가운데 국체 변혁 도모에 대해서는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처벌 규정을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 국체 변혁 도모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독립운동 탄압이었다. 독립운동은 제국의 영토를 축소하려는 시도이니 이는 곧 천황 통치권의 축소를 야기하는 것이고 따라서 국체 변혁을 도모한 행위라는 결론이었다. 아울러 사유재산 부인은 당연히 사회주의운동을 처벌하는 데 이용되었다. 바로 이 치안유지법에 김유영이 걸려든 것이다.

#4. 구형, 선고 그리고 전향

검거되고 1년4개월이 지난 1935년 10월28일, 김유영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유영은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나는 문예에도 예술에도 실천적 이론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영화 기술자로서 활동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공판 때는 법정에서 아내 최정희와 맞닥뜨렸다. 이미 어긋난 사이였음에도 김유영은 철렁했다. 당시 최정희는 신건설과 카프, 어디와도 관련이 없었지만 수감된 상황이었다. 재판장이 김유영과 최정희에게 “사상이 일치해 결혼한 것 아니냐”고 물었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최정희는 곧 풀려났고 김유영은 1935년 11월25일에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치안유지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된 피고인들이 공산주의사상을 버리거나 포기하겠다고 전향을 서약할 경우에 형의 집행을 유예해주는 전향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신건설 사건의 피고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거의 모두가 전향을 서약하기에 이르렀다. 김유영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김유영은 이미 벗어날 길 없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의 국력은 나날이 강대해지고 있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그 힘이 대내외에 드러난 터이기도 했다. 만주사변이란 1931년에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대해 감행한 침략전쟁이었다. 이를 통해 1932년 3월1일에 괴뢰 만주국(滿州國)을 세워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에 중국이 국제연맹에 호소함에 따라 국제연맹이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도 모자라 1933년 3월에는 아예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을 정도로 일제는 안하무인이었다.

“결국 일제에 대한 굴복과 독립에 대한 절망만 남은 것인가.”

김유영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프로연극운동의 방향 전환, 극단 신건설, 이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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