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8> 은거한 선비의 정자 ‘연당리 경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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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4   |  발행일 2019-10-04 제11면   |  수정 2021-06-21 17:56
마을 전체 정원 삼은 정자, 그 연못엔 상서로운 흰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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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인 서석지에서 바라본 영양 경정. 입암면 연당리를 평생 거쳐로 삼은 정영방은 16년에 걸쳐 수직사, 주일재, 경정, 서석지로 이루어진 자신의 별서정원을 완성했다. 정영방의 내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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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당리 고샅길에 들어서면 서석지 담장 넘어 400년 이상 수령의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정영방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에 선바위(立岩)가 솟아 있다. 그 모습이 기이하고 특별해 면의 이름은 ‘입암’이다. 선바위 맞은편에는 거대한 석벽이 뱃머리처럼 치솟았는데,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끝 비단처럼 아름다운 벼랑이라 ‘자금병(紫錦屛)’이라 불린다. 그 아래로 반변천과 청기천(靑杞川, 또는 동천) 두 물줄기가 만난다. 그곳에는 옛날 남이장군의 전설이 서려있어 남이포라 부른다. 그로부터 청기천을 따라 한두 굽이를 거슬러 오르면 자양산의 완만한 기슭에 등을 기대고 멀리 나월산(蘿月山)을 바라보는 연당리가 있다. 본래 이름은 생부동(生部洞)이었고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아 ‘돌배기’라고도 불렀다. 마을 이름이 연당리가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 그곳으로 들어와 은거한 동래정씨(東萊鄭氏)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때부터다.

경전 통달하고 시 능했던 석문 정영방
광해군 시절 되자 생부동으로 와 은거
서석지에 연꽃 핀 후 연당리로 바뀌어

계획만 10년…주거공간·서재 등 세워
별서정원의 흰 돌들 자연 모습 그대로
드러난 60여개 중 19개엔 이름도 지어
와룡암 뜻 ‘알아주는 이 있으면 가겠다’


#1. 서석지와 정영방

석문 정영방은 홍문관(弘文館) 시독(侍讀)을 지낸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1577년 예천군 용문면에서 태어났다. 선조 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벼슬을 버리고 예천에서 강학으로 소일할 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경전에 통달하고 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정영방은 선조 38년인 1605년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광해군 시절을 맞아 은둔을 택하게 된다. 스승인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겼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영방이 연당리를 평생의 거처로 삼은 것은 1600년경이라 한다. 이후 그는 1610년부터 연당리에 초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 정원 계획을 세웠다. 계획만 10년, 그는 1620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원공사를 시작해 인조 14년인 1636년에 주거공간인 수직사(守直舍), 서재인 주일재(主一齋), 정자인 경정(敬亭), 그리고 연못인 서석지(瑞石池)로 이루어진 자신의 별서정원을 완성했다.

그는 마을 들입에 솟아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를 석문이라 이름 짓고 외원이라 하고 자신의 별서정원을 내원이라 했다. 마을 전체를 자신의 정원으로 삼은 것이다. 통칭 서석지로 불리는 정영방의 내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정영방 이후 서석지에 연꽃이 피니 마을은 연당리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마을은 동래정씨 세거지가 되었다.

상서로운 돌의 연못, 서석지. 정영방은 흰 돌이 많이 나는 마을의 자연을 그대로 활용해 연못을 만들었다. 암반 위에 연못을 조성하고 기괴한 형상의 암반을 그대로 정원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경영잡영, 서석지’에 이렇게 썼다.

‘서석지의 돌은 속에는 무늬가 있고 밖은 흰데,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져 있다(중략). 마치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군자와 같고 덕과 의를 쌓으며 저절로 귀함과 실속이 있으니 가히 상서롭다 일컫지 않겠는가.’

서석지는 그러한 연못을 중심으로 서쪽에 경정, 북쪽에 주일재, 경정의 배면에 수직사를 배치했으며 사면을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 담장으로 둘렀다. 연당리 고샅길에 들어서면 서석지의 담장 너머로 솟아오른 엄청난 은행나무를 가장 먼저 만난다. 400년 넘게 이곳에 서 있는 나무는 정영방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그로부터 좌측으로 담장을 따라가면 서석지의 사주문이 있다. 문은 남쪽에 위치하나 동향으로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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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방의 서재인 주일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주일은 ‘한 가지 뜻을 받든다’는 뜻이다.
#2. 경정과 주일재 

 

서석지의 사주문에 들어서면 곧바로 경정의 왼쪽 얼굴이 보인다. 정자인 경정은 손님을 맞고 제자를 가르치던 공간이었다. 경정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에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2칸 대청을 열고 좌우측에 방을 두었다. 전면 반 칸은 툇마루를 놓고 계자난간을 둘러 연못을 완상하도록 하였는데, 누기둥 밖으로 마루를 연장하여 측면에서 보면 거의 1칸에 가까운 규모다. 대청의 배면에는 두 짝 여닫이 판문을 달았고 전면에는 네 짝 여닫이 들문을 달았다. 온돌방은 전면과 측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대청 쪽에 네 짝 여닫이 들문을 달아 방과 대청을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경정의 기단은 얇은 자연석으로 쌓고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다. 전면의 툇마루에는 방형의 주초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고, 나머지는 자연석 주초에 사각기둥을 세웠다. 전면의 처마도리와 대청의 대들보 두 곳에 ‘경정’ 편액이 걸려 있다. 마루에 앉아 서석지를 바라보면 정자는 물위에 선 듯하다. 처음에는 낮은 담 너머로 멀리 1㎞ 넘게 세상이 보였다고 하나 지금은 불쑥 자란 나무들이 병풍으로 섰다.

주일재는 정영방의 서재로 경정보다 먼저 지었다고 한다. 주일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좌측 1칸은 마루, 우측 2칸은 온돌방이며 전면에 쪽마루를 내었다. 마루간은 전면이 열려 있으며 측면과 배면에 두 짝 여닫이 판문을 달고 판벽을 두었다. 온돌방에는 전면과 마루 쪽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으며 측면에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배면에는 반침을 달고 외여닫이문을 두 개 달아 수납공간으로 사용했다.

‘주일’이란 ‘한 가지 뜻을 받든다’는 뜻이다. 유학자들에게 있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敬)’이었고 그것은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었다. 정영방은 자신의 정원에 은거하며 평생 ‘경’을 받들었다 한다.

#3. 경을 받드는 서석의 마음

연못은 마당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북쪽에는 네모난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서재인 주일재에서 서석지를 바라보면 사우단의 수목들이 연지를 가린다. 주일재의 마루는 사우단과 경정을 향해 열려 있으니 흔들림 없는 지조와 다짐이 엿보인다.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읍청거(淸渠)’를,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인 ‘토예거(吐穢渠)’를 내었다.

읍청거는 ‘맑은 물이 뜨는 도랑’이라는 뜻이며, 토예거는 ‘더러움을 토해낸다’는 뜻이다. 읍청거는 연못의 수면과 낙차가 있다. 물은 떨어지면서 작은 폭포가 되어 귀를 울리고 눈을 즐겁게 한다.

토예거는 높이가 연못의 희망 수위에 맞추어져 있어 수위가 높아지면 자연히 배수가 된다. 물은 주일재 뒤 도랑에서 흘러들어 왔었다. 그러나 도로가 포장되면서 콘크리트 하수관이 매설되자 암거수로가 차단되어 물길이 끊어졌다. 그렇지만 연못에는 물이 고여 있다. 신기하게도 사우단 아래와 연못 안 돌들 사이 서너 곳에서 지하수가 솟아난다고 한다.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들은 ‘서석군’으로 원래 땅이 품고 있던 것들이다. 물 위로 드러난 돌은 60여개, 잠긴 돌은 30여개라 하는데, 이 서석들 중 19개에는 이름이 있다.

신선이 노니는 선유석, 선계로 가는 다리 통진교, 바둑판같은 기평석, 바둑구경하다가 도끼자루 썩는다는 난가암, 읍청거로 들어온 물을 갈라 퍼지게 하는 분수석, 용이 누워 있는 모양의 와룡암, 구름이 떠 있는 듯한 상운석, 명예를 절로 끌어들이는 상경석, 나비와 희롱하는 희접암, 꽃과 향초 같은 화예석, 갓끈 씻기 알맞은 탁영반, 고운 눈이 흩날리는 쇄설강, 학이 구름을 머금은 봉운석, 낚싯줄을 드리울 만한 수륜석, 물고기 형상의 어상석, 물결 사이에 떨어진 별 같은 낙성석,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관란석, 하늘과 어우러지는 촛불바위 조천촉, 옥으로 만든 자 같은 바위 옥계척. 각양각색의 이름만큼 뜻도 흥미롭다.

서석들 중 와룡암은 제갈양의 별명인 와룡 선생을 빗댄 것이라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은거하였으나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뜻이란다. 서석지에 담긴 모든 세계는 이 정원의 주인이 품고 있었던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철학과 욕망을 엿보게 한다.

정영방은 또 서석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백옥의 계단을 낳고, 땅은 청동의 거울을 바쳤고, 흐리지 않는 물은 담담하게 일렁이지 않아, 바야흐로 적막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욕망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가 시인이었음은 분명 참이다. 그리고 그는 순수하면서도 우직한 서석과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주남철, 한국건축사, 2006. 박경자, 한국의 정원, 2015. 허균, 이갑철, 한국의 누와 정, 2009.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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