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벨지안 랩소디’ (빈센트 발 감독·2014·벨기에)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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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4   |  발행일 2019-10-04 제42면   |  수정 2020-09-08
밝고 화사한 벨기에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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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과 초콜릿, 맥주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바로 벨기에다. 감자튀김과 스머프, 오드리 헵번의 나라이기도 하다. ‘벨지안 랩소디’는 친근한 듯,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나라 벨기에산 뮤지컬이다. 밝고 화사한 색감, 매력적인 멜로디, 아기자기한 벨기에의 풍광과 정서가 듬뿍 담긴 영화다. 브라스밴드 연주, 특히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트럼펫 연주가 마음을 적신다.

브라스밴드 팀인 세실리아와 아반트 처럼 벨기에지만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네덜란드어를 쓰는 세실리아 팀과 불어를 쓰는 아반트 팀. 두 팀은 유럽 타이틀매치에 나갈 벨기에 대표를 뽑는 대회에서 공동우승을 한다. 하지만 대회 당일 세실리아 팀의 트럼펫 주자가 갑자기 숨을 거두자, 세실리아는 아반트 팀의 솔리스트를 섭외하느라 열을 올린다. 세실리아 팀 지휘자의 딸이자 매니저인 엘카는 아반트의 천재 솔리스트 위그를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다. 팀 스폰서의 아들과 결혼을 앞둔 엘카는 위그와의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린다. 세실리아와 아반트는 우여곡절 끝에 유럽 타이틀매치에 참가한다. 하지만 앙숙인 이들은 다시 난관에 부딪히고, 연주도 못한 채 대회에서 쫓겨나게 된다.

뮤지컬 코미디라는 장르답게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소박하고 따뜻하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벨기에의 골목과 집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코믹한 전개 속에 담긴 매력적인 연주와 노래와 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조금은 낯설고 한가로운 벨기에 감성이 듬뿍 담긴, 마치 와플처럼 바삭하고 촉촉한 영화다. 한 끼 밥이 아니라, 오후의 티타임에 어울리는 간식이나 디저트 같은 영화다. 이 영화의 감독 빈센트 발은 그림자 아티스트로도 유명하다. 일상에서 보는 사물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기발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검색을 해보면 코믹하고 기발한 그의 작품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그만큼 재치있고 감각적인 감독이다. 천재 솔리스트로 나온 아르튀르 뒤퐁은 ‘엘리제궁의 요리사’를 비롯한 프랑스 영화에도 출연해 익숙한 얼굴이다.

밝고 화사한 뮤지컬이라 즐겁게 보긴 했는데, 결말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주인공이 우승하는 할리우드식 결말에 너무 익숙해있기 때문일까. 결론(스포일러라 죄송하지만)은 두 팀 다 탈락이다. 유럽 타이틀매치에 벨기에 대표로 나간 두 팀은 연주도 제대로 못해보고 퇴장당하는 신세가 된다. “벨기에는 유럽의 수치”라는 말까지 들으며. 하지만 이들은 브뤼셀 거리를 행진하며 연주를 한다. 공연장이 아닌 거리에서 신나게 연주하는 이들의 모습은 유쾌하고 멋지다. 마치 인생예찬 같다.

영화를 보고나서 문득 얼마 전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받은 생각이 났다. 영화 에세이집 ‘영화의 심장소리’Ⅰ, Ⅱ를 냈던 곳이다. 서울 강남의 가장 ‘핫한’ 책방에서 강의를 하도록 추천했다는 것이다. 더럭 겁부터 났지만, 용기 내어 하겠다고 했다. 강의안을 보낸 지 꽤 되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아무래도 잘린 모양이다. 물론 기분이 썩 좋진 않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이 위로가 되었다. 우승 트로피는 없지만 툴툴 털고 일어나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은 경쟁과 순위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 방 먹이는 것 같다. 곱씹어볼수록 중요한 인생의 지혜가 들어있다. “목적지에 닿아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앤드류 매튜스의 말처럼. 잘나가는 강남의 책방에서 강의를 하지 못하면 어떤가. 영화를 보고나서 친구들과 마음을 주고받는 내 모습이 마치 거리에서 연주를 하는 이들처럼 기쁘고 행복하다면 말이다. 며칠 전에는 함께 영화를 보는 친구가 깊이 묻어둔 속내를 이야기하며 울기도 했다. 이야기를 다 하고난 친구는 한결 씩씩해진 얼굴로 필리핀 어린이들을 위한 봉사를 하러 떠났다.

“난 해피엔딩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 여정을 믿는다.” 배우 조지 클루니의 말이다. 중요한 건 과정이고, 지금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준 선물이다.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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