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市 승격 70년, 포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다 .3] 호국정신의 고장 <中> 항일의병활동과 3·1운동

  • 박종진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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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7   |  발행일 2019-10-07 제12면   |  수정 2019-10-07
영남권 대표 의병 ‘산남의진’130여 차례 항전에 700여명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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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북구 죽장면 입암서원 인근에 세워진 ‘산남의병 전투지’ 안내판. 1907년 9월 산남의진은 입암서원 인근에서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새벽까지 치러진 전투에서 산남의진은 의병장 정용기와 손영각, 이한구 등 수십명의 의병들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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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남구 장기면 장기초등 운동장 한편에 세워져 있는 장헌문 의병장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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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북구 죽장면 입암리 서포중학교 뒤편 언덕에는 포항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산남의진’의 발상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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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남구 장기면 마현리에 위치한 충효관 2층에는 구한말 장기의진의 결성과 의병활동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

포항의 역사는 호국(護國) 정신과 맞닿아 있다. 고대로부터 해방(海防)의 군사지역으로 나라와 겨레를 지키는 역할을 해왔다.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오로지 ‘구국일념’의 의지로 호국을 실천한 곳이 바로 포항이다. 특히 일제의 국권침탈 과정과 강점기, 포항의 호국정신은 더욱 빛을 발했다. 장기·흥해·죽장·청하 등 포항지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또한 경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3·1 운동이 시작돼 만세물결이 다른 지역으로 번져나가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포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다 3편, 호국정신의 고장 中’에서는 포항 항일운동에 대해 다룬다.

을미사변 이후 청하·흥해·죽장서 의병
산남의진 부서장 17명중 7명 포항출신
흥해 등 산악 거점으로 日 수비대 교란
장기의진도 순사주재소 습격 등 큰 활약
3·1운동 경북도내 가장 먼저 시작 자부심


#1. 을미사변·단발령과 의병 봉기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일제의 침략행위는 한층 강화됐다.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모자라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개화를 구실로 침략전쟁을 본격화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는 ‘친러정책’을 폈고, 일제는 이를 주도한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르렀다. 을미사변(1895년, 고종 32)이다.

일제는 곧바로 친일내각을 구성한 뒤 단발령과 복제개편 등이 포함된 을미개혁(3차 갑오개혁)을 시행했다. 이는 조선 민중의 배일감정에 불을 지폈다. 황후시해와 단발령에 분노한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켰고, 갑오 농민항쟁 이후 흩어져 칩거하던 동학군 잔여세력도 힘을 더했다. 의병 항쟁은 3·1운동 직전인 1909년 말까지 이어졌다.

포항에서도 창의(倡義)가 잇따랐다. 지역 출신으로 전기의병 활동을 한 대표적인 인물은 최세윤이다. 흥해면 학림(鶴林)출신인 그는 1894년 동학농민군에도 참여했다. 최세윤은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단행되자 격렬한 어조의 격문(檄文)을 만들어 지역민의 입진(入陣)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같은 고을의 장상홍(張相弘), 정래의(鄭來儀), 이우정(李寓楨) 등과 함께 의병 수백명을 모집해 김도화(金道和)가 이끄는 안동의진에 합류했다. 당시 안동은 의병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지역이었다. 김도화는 최세윤의 능력을 높이 사 아장(亞將)의 직책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 상주 함창 전투에서 활약한 최세윤은 고종의 권고에 따라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한 무렵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같은해 5월 하순경 정래의 등과 함께 동해안 일대에서 계속 항쟁하는 김도현(金道鉉) 진영에 합세해 항쟁에 힘을 보탰다.

1896년 단오절에는 기계 인비(仁庇)에서 ‘경주의진’이 결성됐다. 당시 기계는 경주에 속한 고을이었던 터라 경주의진으로 이름 지어졌다. 하지만 참여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포항의진과 다름없었다. 경주도소모장 이채구는 신광, 참모장 이준구와 이종흡은 기계, 참모장 장상홍과 이우정은 흥해 출신이었다. 그 외 의사들 중 죽장, 안강, 강동 출신도 다수 포함됐다. 장상홍은 최세윤과 함께 상주 함창전투를 치렀으며, 의성 의흥전투·청송 안덕전투·의성 비봉산 전투에도 참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경주의진은 경주성 북문을 공격해 일본군을 쫓아내고, 청송전투에서도 한차례 승전보를 울렸다. 경주의진이 결성된 때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해산하던 시기였다. 당시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 ‘사생결단’을 하고 봉기했음을 의미한다.

이밖에도 연일 출신인 신태주(申泰周)가 흥해에서 기병하고, 청하에서 김진규(金鎭奎)가 같은 고을의 이순창(李淳昌), 이창모(李昌模), 이도상(李燾相), 이기철(李基轍)과 함께 거의했다. 이하정(李廈禎)과 김송몽(金松夢), 정천녀(鄭千汝), 서초간(徐初干), 김인수(金仁守)도 흥해에서 거병하고, 윤면익(尹冕翼)이 죽장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영일만 일대는 그야말로 의병 행렬로 가득찼다. 포항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2. 영남권 대표 의병부대 ‘산남·장기의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국권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은 한층 고조됐다. 이후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운동은 전국적인 항일저항 운동으로 치달았다. 당시 경상도의 의병활동도 매우 활발했는데 대표적인 진영이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산남의진은 을사늑약 직후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천에서 거의해 주로 영일·영천·청송 등지에서 활동했다.

산남(山南)은 조령(鳥嶺) 이남의 영남지방을 이른다. 의진의 발원은 영천이었으나 구성원은 포항 출신이 많았다. 의진 본부의 부서장 17명 중 포항 출신은 중군장 이한구(죽장), 소모장 정순기(흥해), 도총장 이종곤(기계), 도포장 백남신(죽장), 좌익장 정치우(오천), 우익장 정래의(흥해), 장영수위 최기보(죽장) 등 7명으로 전체의 41.2%에 달했다.

특히 포항권 활동책임자인 최세윤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야전군사령관이나 다름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의진에서 큰 직책을 맡지 못한 것은 물론, 본부에서 별다른 활동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정용기, 정환직에 이어 제3대 의병대장에 취임한 사실을 보면 의진에서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당시 포항권에선 흥해의 최세윤·정래의·조성목·김창수, 청하의 이규상·오수희·김찬묵·김상규, 기계의 이종곤·김태환·김학이, 죽장의 안수원·임병호·김순도, 영일·장기의 김인호·박경화 등이 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다.

최세윤이 의병장에 오른 뒤 산남의진의 주된 근거지에 남동대산(南東大山, 현 경주 양북면 일대)이 추가된다. 초기 근거지인 북동대산(北東大山)과 보현산(普賢山)에서 활동무대가 흥해를 중심으로 한 포항으로 이동되는 양상을 띈 것이다. 이는 영일만을 중심으로 하는 포항이 한말 의병활동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산남의진은 주로 장기, 흥해, 청하, 영덕, 죽장, 경주, 청송, 영천, 군위, 의성 등으로 연결되는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교란시켰다. 활동기간 130여 차례에 걸쳐 항전을 치르고, 700여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영남권 의병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특히 산남의진은 다른 의진과 달리 장기간 활동을 이어간 것이 특징이다. 통상 의진의 장이 붙잡히거나 사망하면 조직이 와해된 데 반해 산남의진은 새로운 대장을 추대해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남다른 호국의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임이 분명하다.

산남의진과 더불어 포항의 장기의진도 큰 활약을 했다. 의병장 장헌문은 김재홍(金載洪), 김종호(金宗號), 김복선(金福善), 이태이(李太伊), 정만춘(鄭萬春), 최봉학(崔鳳鶴), 이무범(李武範), 최용이(崔用伊), 장치일(張致一) 등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모아 의진을 결성했다. 장기의진은 경주와 인근지역에서 일제에 항전함으로써 산남의진과 공동전선을 이뤄 지역의병의 위세를 드높였다. 양 의진은 중첩된 지역에서 활동한 만큼 정보를 교환하고, 연합작전을 구사하는 등 긴밀한 공조를 벌였다. 실제 1908년 1월 산남·장기의진은 합동으로 장기순사주재소를 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항일투쟁에 참가한 공훈을 인정받아 애국장·애족장·건국포장·독립장 표창을 받은 포항지역 인물만 36명에 이른다.

#3. 포항을 뒤덮은 만세물결

항일의병의 거점이었던 포항은 경북(대구 제외)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3월8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계가 주도했다.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장로 송문수와 영흥학교 교감 최경성, 교사 장운환, 집사 이봉학, 교인 이기춘 등이 3월2일경부터 대구와 보조를 맞춰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3월11일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주동자들이 독립만세 시위 혐의자로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고 11일 수백명의 군중이 자발적으로 장터에 운집해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날 만세운동은 일본 군경에 의해 강제해산됐지만, 다음에도 또 다시 만세물결이 이어졌다. 12일 포항교회 신도 수백명이 교회에 모였다가 시가지로 나와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이 합세해 그 규모만 1천여명에 달했다.

1919년 3월15일자 매일신보는 포항의 3·1운동에 대해 “11일부터 12일에 이르기까지 형세가 불안하고 지금도 소요가 일어날 염려가 있으므로 경찰서원과 헌병이 출동해 해산케 하고 10일 오후 12시 북본정 예수교 학교(영흥학교)에 60여명이(중략) 학교 서편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후략)”라는 내용의 기사로 포항의 소식을 전했다.

3월22일에는 청하·송라에서도 독립을 염원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송라면 대전리 예수교 교회 영수인 윤영복, 오용간 등이 22일 장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장에 있던 군중들이 호응했다. 이날 20여명의 대표자가 체포되자, 대전리 마을 주민들은 3월27일 다시 두곡숲 속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목놓아 불렀다. 이어 4월1일 연일·동해·장기·오천·대송·달전 등 각 면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특히 포항은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지역으로 3·1운동의 의미가 남다르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포항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집중 관리했다. 그만큼 일본의 경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삼엄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포항인들은 스스로 국권회복을 위해 당당히 일제에 맞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같은 호국정신은 포항의 정체성으로 후손들에게 영원한 자부심과 긍지로 빛나고 있다.

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포항시사, 1권 제2편. 포항을 빛낸 포항인물, 포항문화원. 포항의 독립운동사, 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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