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소극적 교육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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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7 07:53  |  수정 2020-09-09 14:24  |  발행일 2019-10-07 제17면

‘장자’ ‘서무귀(徐無鬼)’에는 황제가 구자산(具茨山)으로 대외(大)라는 지인(至人)을 만나러 간 이야기가 있다. 대외는 만나지 못하고 작은 목동을 만난 황제는 그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묻는다. 목동은 “대저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이란 말을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저 말을 해치는 것을 제거하는 일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황제는 목동에게 큰 절을 하고 그를 ‘하늘의 스승(天師)’이라고 부른 뒤 물러났다고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 속에 물론 교육도 포함된다. 무엇을 가르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생을 해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주입하는 ‘적극적 교육(Positive Education)’과 대비하여 이런 교육을 ‘소극적 교육(Negative Educ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소극적 교육에도 두 종류가 있다. 가르치고 주입하는 대신 학생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품성을 개발하고 발현시키는 소극적 교육이 있고, 목동이 말하는 것과 같이 다만 학생의 천성을 해치는 환경을 제거해주는 소극적 교육이 있다. 전자를 유위(有爲)의 소극적 교육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무위(無爲)의 소극적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학의 교육은 유위의 소극적 교육이다. 유학은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인의(仁義)의 본성을 개발하고 발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맹자’ ‘공손추’에는 ‘물망(勿忘) 물조장(勿助長)’이라는 말이 있다. 잊어서도 안 되고 조장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또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알고 싶어 안달하지 않으면 열어줄 수 없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줄 수 없다. 한 모퉁이를 예로 들어주었는데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지 못하면 다시 일러주지 않노라”고 하여 교육에서 학습자의 자발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다. 이 모두 인의를 발현시키기 위한 유위의 교육이다.

‘장자’의 서무귀는 다르다. 서무귀가 위나라 무후(武侯)를 만났을 때 무후는 서무귀에서 “나는 백성을 사랑하고 또 의를 위해 전쟁을 그만두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물었다. 이에 서무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시초입니다. 또 의(義)를 위해 전쟁을 그만두는 것은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는 근원이 됩니다. 대저 훌륭한 일을 하겠다는 것부터가 악의 바탕이 됩니다. 임금님께서 인의(仁義)를 실천하려고 함은 결국 자기 명성에 구애되어 거짓된 짓을 하는 겁니다. 명성을 얻으려는 유위의 마음이 거짓된 형체가 되고, 그것이 모양을 갖추면 자랑하게 되며, 자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변란이 있을 때 남과 싸우게 됩니다.”

서무귀는 눈이 사물을 볼 때 밝으면 위태롭고, 귀가 소리를 들을 때 밝으면 위태로우며, 마음이 지혜로우면 역시 위태롭다고 한다. 모두 본심에서 벗어나 보고, 듣고, 헤아리기 때문이다. 무위(無爲)란 눈에 비치는 대로 사물을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들으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되 결국 모두 본심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장자가 추구하는 지인(至人)은 총명과 지혜와 용기를 버리고 천지자연과 하나가 되어 대자유를 누리는 자이다. 총명과 지혜와 용기는 간직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위태로운 법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총명과 지혜와 용기를 자신의 보물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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