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아저씨를 위한 ‘개’ 사용설명서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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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0   |  발행일 2019-10-10 제30면   |  수정 2020-09-08
국어문법 벗어나는 신조어
정말·너무 대체표현에 사용
한국어사전 등재는 부정적
컴퓨터상의 언어 영향 짐작
감정 강조 욕구 등 만족시켜
[우리말과 한국문학] 아저씨를 위한 ‘개’ 사용설명서
김진웅 (경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강의실을 벗어나는 순간 학생들의 언어는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이동한다. 복도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학생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난 학기에 우연히 들은 학생들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너 대학원 갔다며?”

“응.”

“너 그 이야기 아나? 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고.”

이 대화를 들으며 슬며시 웃음 짓다가 문득 “그렇다면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는 나는 교도관인 셈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의 진짜 속마음이 친구들 간의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의 진짜 언어는 강의실보다는 복도에 존재한다. 학생들이 복도에서 나누는 잡담을 대부분 흘려듣게 마련이지만 지난 몇 해 동안 반복적으로 들리는 특이한 표현은 필자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나, 그 영화 개 좋아.”

“정말 개 부럽더라.”

아, 이 ‘개’는 정녕 무엇이란 말이냐? 국어학 연구자로서 나름대로 정리한 몇 가지 분석은 다음과 같다. 일단 ‘개’는 기존의 국어 문법을 벗어나는 신조어이다. ‘개’를 명사(포유류에 속하는 동물)로 분석할 수도 접두사(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말. 예: 개망신)로 분석할 수도 없다. 굳이 품사를 따지자면 부사에 가까우며, 의미적으로는 ‘정말’이나 ‘너무’를 대체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지던 중에 문득 떠오른 표현은 ‘왕’이었다. “나, 그 영화 왕 좋아”라든가 “정말 왕 부럽더라”라는 표현이 폭발적으로 사용되던 한 시절이 있었다. 90년대에 주병진씨와 노사연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왕’을 포함한 여러 가지 표현을 처음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것은 재미있는 연구주제가 아니겠는가?

필자에게는 매우 실망스럽게도 부지런한 국어학자들은 이 흥미로운 주제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들은 필자가 아이디어 수준에서 고민했던 여러 문제를 이미 완성된 학술논문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었다. 여러 가지 논쟁적인 주제들이 ‘개’와 관련해서 다루어졌으나 필자가 주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사나 어근, 접사 등을 부사와 유사하게 사용하는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왕’ ‘짱’ ‘개’ ‘핵’ ‘초’ ‘완전’ 등의 다양한 신조어들이 유사한 맥락(‘정말’이나 ‘너무’로 대체가 가능한)에서 사용되었거나 사용되고 있다. ‘개’ 자체는 새로운 표현임이 분명하나 이를 만들어 내는 방식은 과거에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사적으로 쓰이는 ‘개’는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한국어에 완전히 안착할 수 있을까?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필자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학술적으로 ‘개’라는 표현은 2009년에 청소년들의 언어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보고된다. 이 표현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과정에서는 컴퓨터상의 언어 사용, 즉 통신 언어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이 된다. 컴퓨터상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너무’나 ‘정말’ 대신에 ‘개’를 사용하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나’의 감정을 강조하고자 하는 욕구, ‘나’의 감정을 차별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표현이 바로 ‘개’인 것이다. 필자 같은 아저씨가 “개 심심해”라고 중얼거리는 순간에 청소년들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신조어를 개발해 낼 것이다.

김진웅 (경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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