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부터 대구경북 신년교례회 주최, 전국 언론사 첫 전용비행기로 호외 뿌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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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1   |  발행일 2019-10-11 제35면   |  수정 2019-10-11
영남일보 히든스토리
타계 3년전 백범이 보낸 신년호 휘호
55년∼80년 미스경북선발대회 인기
한국가요사 신지평 연 서라벌가요제

1946년 신년호에 기념비적 휘호가 실리게 된다. 바로 백범 김구가 암살 당하기 3년전 영남일보 측에 보내온 신년호 관련 휘호였다. ‘민족정기를 선양해 달라’는 의미를 담았다. ‘신년교례회’의 신지평도 영남일보가 열어갔다. 59년부터 대구경북 신년교례회는 영남일보가 대구시·대구상공회의소와 공동주최했다. 66년까지는 중앙국민학교, 이후는 고려예식장에서 치러졌다. 500~1천명의 인사가 운집했다.

영남일보의 사세는 56~72년 내외방직 사주인 이순희 사장 시절 절정을 맞는다. 그때 전국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영남일보 로고가 새겨진 전용 비행기를 소유하게 된다. 61년 강판용 업무국장과 배금곤 상무가 쌍발 전용기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는데, 영남일보 50년사보에 수록돼 있다. 전용기는 호외 등을 뿌릴 때 사용했다고 한다.

영남일보 최초의 연재소설은 ‘산정무한’이란 수필로 유명한 정비석의 ‘여성전선’이다. 이 소설은 훗날 영화로 제작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남일보는 창간 다음해인 1946년 3월4일부터 ‘광복된 조국의 정치사회적 안정의 기초는 경제의 발전에서 비롯된다’는 인식 아래 경제지인 영남경제신문 창간호를 발간, 구독자에게 무료로 배부했다. 하지만 제반 여건이 성숙되지 못해 창간 5개월 만에 폐간한다.

영남일보는 특히 문화·예술적 인프라를 확산시키기 위해 독자문예와 독자논단을 활성화시켰다. 이 과정에 이색적인 원고 하나를 받게 된다. 58년 7월10일자 독자 투고 시(詩)인데 당시 해인사의 한 암자에 머물고 있던 법정 스님이 ‘청명’이란 제목의 시를 투고한 것이다.

영남일보의 이색 사업 중 하나는 ‘미스경북선발대회’. 55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80년까지 지속됐다. 이 과정에 ‘미스영남일보’도 탄생됐다. 65~66년에는 리틀미스경북선발대회도 병행한다. 72~73년 두 차례는 미스경북선발대회 파견 미스동해선발대회를 영남일보 포항지사 주최로 포항시공관에서 개회한다. 시민회관, 아시아극장, 경북체육관 등이 대회장으로 사용됐다. 곽규석, 뽀빠이 이상룡 등이 메인사회자로 초대받았고 영화배우 신성일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특히 영남일보의 첫 여성 편집국장이 된 전경화(2014년 작고)는 이 사업의 최대 공로자였다. ‘미스코리아 산파역’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미인을 찾아 동서남북을 종횡무진했다.

한때 ‘미스경북=미스코리아’란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이 대회 입상 미인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대구한국일보 사업이 돼버렸다.

이와 함께 영남일보는 한국 가요사의 신지평도 열었다. 바로 67년부터 시작된 ‘서라벌가요대상’이다. 그해 11월2일 만경관에서 열린 대회에는 갓 데뷔한 이미자와 패티김, 김세레나가 한복차림의 이순희 사장과 기념촬영을 했다. 특히 배호는 영남일보 가요제 대상 수상으로 전국구 가수로 급성장하게 된다. 실제 그의 공전의 히트곡인 ‘돌아가는 삼각지’가 발표된 해가 바로 서라벌가요제가 시작된 해이다. 배호는 성광고 출신인 작곡가 배상태를 통해 ‘안개낀 장춘단공원’까지 지원받아 대가수 반열에 든다. 배호는 이후 ‘영남일보에 대한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술회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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