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사람의 사람에 대한 연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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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5   |  발행일 2019-10-15 제31면   |  수정 2020-09-08
[CEO 칼럼] 사람의 사람에 대한 연대
김재경 <사>커뮤니티와 경제소장

출장이 잦은 탓에 고속도로 휴게소를 자주 들른다. 4~5년 전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휴게소에 혼밥식탁이 독서실처럼 가지런히 배치돼 있는 것을 보고 색다르게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고속도로 휴게소식당 한 쪽면에 혼밥식탁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도 신경쓸 필요없는 독서실형 책상식탁은 편리해 보였다. 도심카페에서도 창가방향으로 거리 풍경을 혼자 편히 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탁자가 배치되어 있는 것은 이제 일반적인 풍경이다.

때때로 혼자 있는 것도 필요하고, 생각복잡한 사회에서 자기만의 침잠하는 공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삶이 개별화, 고립화, 디지털화되면서 사람 심성에 공동체의식이 설자리를 잃고 있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살아가기가 벅찬 탓일 게다. 그래서인지 이웃에 대한 호기심은 있을지언정, 관심과 배려는 부족해 보인다. 전철안이 떠나가도록 울려대는 휴대폰 소리와 큰 통화소리, 상점입구에서 뒷사람이 오든 말든 아랑곳없이 들어가는 모습, 뒷사람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고 있어도 고맙다는 눈인사 없이 모른 척 들어가는 것도 흔하다. 사람이 넘어져도 쳐다보질 않는다. 공동체적 규범이 사라지고, 사회 구석구석이 멍들고 있음을 본다. 자기방어에만 열중하고 남의 약점을 드러내는 흠집내기에 몰두한다. 상식은 주눅들고 이성은 쪼그라든다.

우리가 공존을 선택한 이유는 공존을 통한 삶이 혼자사는 삶보다 유익하다고 해서 선택한 것인데, 우리 모두가 관계성에 기초한 연결되는 존재라는 본질을 잊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사회의 일원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동시대인과 뗄 수 없는 관계성속에 살게 된다. 나를 존재하게 한 가족부터 음식, 옷, 집, 의료, 언어, 교육, 문화 등의 영역에서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노동하고 성취한 것으로 인해 내가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좋든 싫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린 이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으며 연대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성은 인간사의 숙명일진대, 아쉬울 것이 없으니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 사랑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놓친다.

모든 것을 지갑만 열면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의식을 상실하고 있다. 돈으로 나의 모든 필요를 상품과 서비스의 형태로 구입할 수 있고, 돈만 주면 언제라도 낯선 사람으로부터 유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회다. 게다가 친밀한 관계나 선물교환도 더 많이 지불하면 ‘정성 가득한 모습으로 포장’된다. 지불능력에 따라 관계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착각’속에 관계 역시 차등적으로 상품화된다. 정성이 지불된 상품을 더 비싼 가격으로 사고 팔면서 개인간의 끈끈한 관계보다 시장과 거래만 남는 개인화된 사회로 자연스레 옮겨온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회문제의 결과와 책임은 모두 개인으로 귀결되고 있다. 사람사이의 연대와 책임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모든 것이 너의 책임’이라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만이 거론된다. 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각자도생’의 시장과 형해화된 사회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서로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공동체와 공동의 규범은 설자리가 없다.

그러나 개인탓을 넘어선 사회문제는 여전히 많다. 얼마 전 우리 모두 아파했던 김용균씨 사고나 택배배달 노동자들의 사고, OECD국가 삶의 질 지표에서 늘 바닥에 머물게 만든 자살률, 독거노인들의 고독사, 새터민가족들의 죽음 등등의 주변화된 사회적 약자층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는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다. ‘좋은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꾸준한 궁리와 개선, 공동체, 개인들의 노력이 치열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조금씩 풀릴 수 있는 난제들이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눈감을 수는 없다. 칸트는 “당신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해야 하니까”라고 도덕감정을 부추겼다. 어머니들이 우릴 키운 보살핌의 윤리를 바탕에 깔고 인내심있게 계속 돌아보며 가야 한다. 김재경 <사>커뮤니티와 경제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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