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숙의 전통음식이야기] 숭늉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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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6   |  발행일 2019-10-16 제30면   |  수정 2020-09-08
20191016
숭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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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음식전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국민의 음료는 숭늉이다. 지금은 식사 후 커피나 차를 마시거나 디저트로 과일 등을 먹지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숭늉을 마셔야 식사를 끝낸 것으로 알았다. 식사 후 숭늉을 마시지 않으면 밥 먹은 것 같지도 않고 속도 더부룩해 숭늉을 마셔야 소화도 되는 것 같았다.

숭늉은 우리나라 고유의 밥 짓는 법과 부엌 구조와도 관계가 깊다. 부뚜막 아궁이와 온돌이 같이 붙어 있고 고정식이므로 솥 씻기가 번거롭다. 따라서 솥의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이면 숭늉도 마실 수 있고 솥 씻는 방법도 되기에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차로 느끼한 맛을 제거하듯 짜고 매운 반찬이 많은 한국 음식을 먹고 나면 산성이 높아지는데 포도당이 녹아있는 숭늉은 산성을 알칼리성으로 중화시켜 주면서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숭늉이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 말 같지만 한자어인 숙랭(熟冷)에서 나왔다. “냉한 것을 데워준다.” 즉, 속이 냉해진 것을 데워 뱃속을 따뜻하게 한다는 뜻이다. ‘임원경제지’에서는 숭늉을 숙수(熟水)라 하였고 중국 북송시대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에도 숙수를 이근몰(泥根沒:익은물)이라 표현했다. 12세기초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고려도령’에 “고려인들은 신기하게도 숭늉을 갖고 다니며 마신다”고 했고, “고려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물 그릇은 위가 뾰족하고 바닥이 평평한데 그릇 속에는 숭늉을 담는다. 나라의 관리나 귀족들은 언제나 시중 드는 자를 시켜 숭늉 그릇을 들고 따라 다니게 했다”고 숭늉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했다. 숙종 때 청나라를 다녀온 김창업은 ‘연행일기’에 식사 후에 숭늉을 구해마시고 속이 편해졌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기록하였고, 정조 때 서유문이 쓴 ‘무오연행록’에 소화가 안 돼 고생하다가 숭늉을 먹고 간신히 소화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구한말 유길준은 서유견문에 “우리네가 숭늉 마시듯이 서양인들은 커피를 마신다”고 하였다.

성종실록에는 ‘熟冷差備 各色掌 綿布五疋(숙랭차비 각색장 면포5필)’이란 말이 나온다. 인수대비가 오랜 병고 끝에 무사히 완쾌되었다. 병수발에 동원된 50여명에 임금이 직접 그동안 노고에 대한 포상을 하는데 특이한 직책이 하나 있었다. “숭늉을 담당하는 임시 고용한 시녀에게 면포 5필을 하사하노라.” 궁에서 숭늉 잘 끓이기로 소문난 여자아이를 차출하여 숭늉을 끓이게 해 인수대비의 병 회복에 큰 도움을 줬다하여 엄청나게 큰 상을 주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룡성특수식료공장’‘만청산 연구원’이 공동으로 분말 숭늉으로 김일성의 큰 호평을 받았고 김정일은 연구사들에게는 훈장, 책임자는 노력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5g씩 포장하여 고위층에 보급되고 있다. 옛날 먹거리마저 태부족이던 시절 주린 배를 채우고 나면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이 배를 부르게 해 서민에게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요즘엔 숭늉이 항산화 작용과 산성체질을 알칼리성으로 중화시켜 지방분해 효능이 있어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 받고 있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이 생각나는 때다.<전통음식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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