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광장을 통해 민주주의가 생성된다면, 지금의 혼란이 자기 발전에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어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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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8   |  발행일 2019-10-18 제39면   |  수정 2020-09-08
[노태맹의 철학편지] 광장을 통해 민주주의가 생성된다면, 지금의 혼란이 자기 발전에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어
[노태맹의 철학편지] 광장을 통해 민주주의가 생성된다면, 지금의 혼란이 자기 발전에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어

요즘 대규모 인원동원을 통한 극한 대결 국면을 ‘광장 정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실종이고 국가의 분열이며 결국에는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일부 언론은 학자들의 입을 빌려 우려스럽게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이 상황들을 주시하고 싶다. 물론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의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탐구해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지가 아니라 구름 위를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 짧은 글은 프랑스 철학자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에 대한 이야기부터 언급해보자.

첫 번째 질문. 저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그들이 한편에서 진보를 대변하거나 또 한편에서 보수를 대변한다는 이분법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동일하게 대중을 표상한다. 그런데 대중은 근본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발리바르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시민들의 자연권을 다수자의 역량으로 정의하면서도 대중에게 국가를 구성하는 기능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대중이 가진 양면성을 보여 주고 있다. ‘대중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이는 주권적 대중이 자신들의 정념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주는,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게 해 주는 제도적 메커니즘을 단번에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존재한다.’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는 최상의 정치이지만 대중의 어리석음을 기원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아.

두 번째 질문. 광장은 늘 옹호되어야 하는가.

발리바르는 ‘나는 결코 국가 권위에 대한 불복종 및 그 내용이나 입안 조건들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법률들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시민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의 사멸을 요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를 정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이 함축하는 개인주의는 정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불복종에 대한 이런 필수적인 준거가 없이는, 그리고 심지어 이처럼 불복종에 의지함으로써 생겨나는 위험을 주기적으로 감수하지 않고서는 시민성과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고 말해.

의회 민주주의라는 대의제(이것도 중요한 정치제도이지만)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직접적인 불복종도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이어서 지금의 어떠한 광장 정치도 옹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광장의 정치는 광장에서 정치가 형성된다는 것이지, 형성된 정치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야. 광장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도 용납되어야 한다. 반대 이야기의 상대에게 빨갱이나 수구 꼴통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반정치적이지.

세 번째 질문. 광장의 정치가 배제의 정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발리바르의 이야기를 좀 길게 인용해보자. ‘지배와 폭력의 관계가 치유할 수 없을 만큼 각인된 세계와 역사 속에서 정치의 가능성은 본질적으로 저항의 실천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저항은 단지 기성 질서에 대한 반대와 정의의 옹호 같은 부정적 의미의 저항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 주체성과 집합적 연대가 형성되는 장소라는 적극적 의미의 저항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극단적 폭력이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판했어.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폭력의 현상학은 개인이 생존해 있는 한 개인성은 억압불가능한 최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에 의거해 있지. 스피노자는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 항상 이미 다른 개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화라는 관념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흥미롭다’고 말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혹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태생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고, 그 관계 속에서 정치를 발명해 내어야 한다는 거지. 정치에서 광장만 강조되는 것은 무모한 것이겠이지만 광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민주주의가 생성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의 혼란이 우리 사회의 자기 발전에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문제는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자기 운동이 노동과 정치에 강제해왔던 역사의 기억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 노동이 가지는 시민의 저항적 측면을 봉쇄함으로써 권리를 주장하고 구성하는 집단적 행위로서의 파업과 저항이라는 관념을 억누르고, 그것은 결국 자유를 향한 국민적 정치의지를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지.

어쨌던 태형아, 나는 네가 민주주의, 정치, 광장, 노동, 개인, 자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공부했으면 좋겠구나.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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