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베갯모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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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8   |  발행일 2019-10-18 제39면   |  수정 2020-09-08
베갯속 들여온 국화향 취해…호접몽 꾸는 행복한 가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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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문 베갯모.

가을밤의 소슬함은 몸과 마음에 서늘한 기운을 준다. 그래서 그 빈 공간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포근한 솜이불의 깃을 다듬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운치있게 그 서늘한 공간을 향기롭게 채워주는 것은 국화향이다.

그 국화는 가을 한 낮 맑고 투명한 푸른 하늘색과 흰 구름이 양떼처럼 몰려다니던 하늘과 새털처럼 가볍게 흩어지던 구름을 머금기도 하였고, 맑은 새벽이슬로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높이 나르며 노래하던 새들의 노랫소리도 한 소절 머금고 있을 것이다. 그 꽃잎들을 따서 찌고 말려서 잠자는 머리맡 베개에 넣어두고 자는 일은 이 가을 최고의 기쁨일 것이다. 여름에 손바느질 해 둔 고운 모시나 흰 면천에 레이스 한줄 얹으면 그 고운 자태와 향 때문에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이 가을의 아름다운 노래를 담은 국화향을 베갯속으로 들여와 잠을 청하노라면 선유침(仙遊枕)이 따로 없는 행복한 가을밤이 된다.

옛 선비의 글 속에서 수놓은 베개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다정한 대화가 정겹게 느껴지는 시 한수가 있어 찾아본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핀 국화
꽃잎 찌고 말려 베갯속 가득 채워
수 놓은 고운꽃·향기에 청하는 잠

인생의 길목서 지치기도 할 딸 위해
노란 황국 따 흰 모시주머니 바느질
환한 향기로 위로하는 엄마의 마음

枕和兒作(수침화아작-아이가 지은 ‘수놓은 베개’ 시에 화답하다.) -정유길

閑花黃白交相締(한화황백교상체) 들꽃들을 황백으로 수를 잘도 놓았는데

聞自秋娘指下開(문자추낭지하개) 어여쁜 아가씨 솜씨로 만든 것이라 하네

枕得濃香成一夢(침득농향성일몽) 베개의 그 꽃 짙은 향기로 잠 잘 오거니

柒園胡蝶好飛來(칠원호접호비래) 나비 곱게 나는 장자의 호접몽을 꾸겠네.

짐작해 보건대 이제 글을 배운 10세 정도의 아들이 쓴 시의 운자에 맞추어 아버지가 화답 시를 내었다. 아쉽게도 아들이 쓴 시의 전문은 알 수가 없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1588)은 16세에 생원, 17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24세에 알성 문과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뒤 29세 때는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원접사 등을 거쳐 67세에 우의정이 되었던 분이다. 아들인 수죽(水竹) 정창연(鄭昌衍) 또한 좌의정을 지냈다.

이처럼 이 시는 특이하게도 우의정까지 지낸 분이 조선의 여인이 수 놓은 베개 또는 퇴침(退枕)을 소재로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의 ‘자수 배갯모’를 소재로 쓴 귀한 작품이다. 정성을 다해 놓았을 아름다운 ‘들꽃 베갯머리 자수’를 노래한 것이다. 시 제목의 ‘수( )’는 ‘수(繡)’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베갯수를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시를 짓고 화답하는 정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황백의 색상은 자수베갯모에서 주로 국화수를 놓을 때 사용하던 색상이기 때문에 국화수를 놓은 베갯모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작자는 자수를 놓은 주인공을 ‘추랑(秋娘)’이라고 특정했다. 그런데 추랑은 옛날 미인이었던 사추랑(謝秋娘)·두추랑(杜秋娘)을 이른다. 수를 잘 놓는 규중(閨中)의 아낙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늙어서 파리해진 여자’를 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미녀, 기녀를 가리킨다. 그래서 여기서는 ‘어여쁜 아가씨’로 풀이했다. 시속의 ‘호접몽’은 중국의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를 말한다. 아들에게 향기로운 국화향에 취해 호접몽을 꾸고 잠 잘 들겠다고 하며 선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시를 읽는 내 마음에도 따뜻하게 젖어온다.

이 가을이 다 스러지기 전에 아이의 손을 잡고 노란 황국을 따서 흰 모시 주머니 바느질하여 베갯속을 채워 주어야겠다. 인생의 긴 길목에서 지쳤을 때 어느 날 환한 향기로 다시 일어서게 하는 추억 하나쯤 갈피에 끼워 넣어주고 싶은 간절한 엄마의 마음이다.

내년에는 봄부터 빈터에 황국을 심어 놓고 가을을 기다려 슬그머니 아이의 손을 이끌어 가을을 맞이해 보고 싶다. 제 몸 부러져 꺾이면서 그 손끝부터 향기를 진하게 전해주는 국화향에 몸서리치며 어쩌면 나부터 눈물자국 번진 가슴을 향기로 지워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번쯤 효율성 대신 느린 시계로 긴장을 느슨하게 하고, 스마트폰 대신 손바느질로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시간에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향기로 채워가지 않을까. 그 시간들을, 그 기회들을 슬그머니 놓고 가는 부끄러운 선물처럼 어른들이 만들어 준다면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마음이 다 소진되기 전에 서둘러야 할 가을 채비들이다.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

중국 북송(北宋) 때의 사신인 서긍(徐兢·1091~1153)이 고려(高麗)의 수도 개성(開城)을 다녀가면서 쓴 책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도 향초(香草)로 만든 베개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수침(繡枕)의 형태는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든 뒤 그 속을 향초(香草)로 채웠다. 양쪽 끝을 금색 마구리에 실로 수놓은 꽃이 있는 것으로 마무리 했는데, 그 무늬가 아주 정교하였다. 또 붉은 비단으로 장식한 것은 연잎 형상과도 같았다. 삼절(三節)에게도 제공되었는데, 그 제도가 같았다.”

이 글은 ‘수침’의 역사가 유구함을 보여주는 자료다. ‘삼절(三節)’이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이외의 관원들을 상·중·하 삼절(三節)로 나눈 것을 말한다. 수침이 우리 역사서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종 19년(1882년) 2월20일이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가 “신(臣)이 미처 사직하기도 전에 관례(冠禮)를 행하게 되니, 다시 신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아 유소(諭召)를 거듭 내리셨고, 첨가하여 비단과 호피(虎皮)를 내려주셨으며, 분에 넘치는 수를 놓은 베개(繡枕)와 흉배(胸背)를 함께 내리셨습니다”라는 내용이다.

우리는 수침에 대한 다음 페이지를 어떻게 써가야 할까. 왕의 하사품에서부터 혼례의 중요한 물품이었고 규방의 예술이었을 뿐 아니라 일상의 시가 되었던 한 올의 자수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어가야 할까.

지난 겨울, 딸아이와 떠난 네팔의 여행길에서 만난 한 장면이 떠오른다. 먼지 덮인 나뭇잎들이 녹색의 기미를 겨우 보여주는 산 아래 마을이었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집안과 집밖의 경계조차 없는 마당에서 우물만큼 커다란 빨간 통 안에 몇 개의 실꾸러미를 풀어놓고 뜨개질을 하고 있던 장면이다. 빨간색의 실타래가 끊임없이 통 안을 구르는 동안 여인의 손 끝에서는 자그마한 형태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그 속에 있었다. 효율과 비효율성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저울질 당하는 현실에서 바느질과 자수는 그 아스라한 경계의 지점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 경계야말로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보여 줄 것이다.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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