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15] 추현동 박씨효자각과 백호서당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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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2   |  발행일 2019-10-22 제13면   |  수정 2020-03-13
효자각, 박충국 4형제의 지극한 효행 기리기 위해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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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진보면 추현리 마을 어귀에 위치한 추현동 박씨효자비. 돌비석 받침돌인 귀부가 통상적인 거북모양에서 벗어나 해학적인 느낌을 준다. 박씨효자비는 우애가 깊을뿐더러 효심마저 지극했던 박충국·용국·준국·흥국 4형제의 효행을 기리고자 고종 때 건립됐다(왼쪽). 조선 숙종 때 학자 이휘일을 기리기 위해 1757년 세워진 백호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두른 모습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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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서당 현판은 이휘일의 동생 갈암 이현일이 직접 썼다고 한다.


1984년 안동 임하댐이 착공됐다. 낙동강 중하류부와 남동해안지역의 장기적인 용수수급 대책과 홍수피해 방지 및 탈석유 에너지 정책에 부응하는 수력에너지의 개발을 위해서였다. 1992년 댐이 완공됐고 3개 군 6개 면 41개 마을이 수몰됐다. 이에 앞서 1986년 안동 임하댐 수몰지역 지표조사와 관련해 청송지역 수몰지구내에 있던 문화재지정조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우리가 보존하고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렇게 우리 곁에 남게 된 것이 ‘추현동 박씨 효자각’과 ‘백호서당’이다.


◆박씨효자각
부모 생전 봉양·병구완 정성 칭송 자자
고종 교지 내려 임하댐 수몰지역 내 세워
1989년 청송 추현동 자리로 이건 보존
효자각으론 최초 경북도문화재로 지정

◆백호서당
반변천 내려다보이는 세장리 벼랑 위치
조선 숙종때 학자 이휘일 기리는 서당
모친은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임하댐 수몰지역에 편입되자 70m 옮겨


#1. 경북도문화재자료 제180호 추현동 박씨효자각

청송 진보에서 안동으로 가는 국도 변에 붉은 문의 효자각이 있다. 진보면 추현리 마을 어귀에 자리해 ‘청송추현동박씨효자각(靑松楸峴洞朴氏孝子閣)’이라 한다. 비각은 자연석 주초 위에 원주를 세운 정면 1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기와집이며, 기와를 올린 토석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각 안에는 1기의 비가 있다. 비신의 크기는 가로 40㎝, 세로 115㎝, 두께 25㎝이며, 비 전면에는 ‘사효자밀양박충국용국준국흥국지려(四孝子密陽朴忠國龍國俊國興國之閭)’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박충국 형제의 효행을 기리고자 고종 때 건립한 비각이다. 사람들은 이를 사효자정려각(四孝子旌閭閣)이라고 부른다.

박충국은 진보면 기곡 사람이다. 그는 조선 순조 8년인 1808년에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가난으로 글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효성만은 타고나서 네살 때부터 밖에서 과일이나 고기를 얻으면 먹지 않고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때때로 부모님이 병환이 나면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밤을 지새웠다. 그에게는 세 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효성이 지극했다. 집은 가난했지만 형제는 힘을 모아 맛있는 음식을 구해 부모를 봉양했다.

그의 나이 열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됐다. 박충국은 원근 각지를 다니며 의원을 찾아 묻고 약을 구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했다. 그러나 이어 어머니가 병들었다. 그와 형제들은 백방으로 다니면서 의원을 찾고 영약을 구했지만 어머니의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어머니는 강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박충국은 기뻐하며 강으로 뛰어갔지만 꽁꽁 얼어붙은 강은 칠흑같이 어둡기만 했다. 그는 미친 듯이 캄캄한 빙판 위를 밤이 새도록 헤맸지만 언 강에서 고기가 얻어질 리 없었다.

이윽고 동녘이 밝아왔다. 온 강은 얼음뿐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고기가 살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얼음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차디찬 얼음 속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물속의 물고기를 잡아 우리 어머니 병을 고치게 해주소서.’ 바로 그때 ‘쩡’하고 얼음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얼음위로 튀어 올랐다. 그는 잉어를 달여 어머니께 드렸지만 이미 때가 늦어 약효를 보기도 전에 어머니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고 비통한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이러한 와중에 아버지마저 큰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아버지 병구완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영약도 소용없었다.

옅은 숨소리를 내며 죽은 듯이 눈감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뜨며 잉어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는 단숨에 강으로 뛰어갔다. 강물은 소나기로 넘쳐흘렀고 붉은 흙탕물이 강바닥에 가득했다. 그는 울며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애원했다. ‘잉어 한 마리만 저에게 주시어 저의 아버지 병을 고치게 하소서.’ 그러자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 큰 잉어 한 마리가 붉은 물결을 가르며 강가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잉어를 잡아 안으니 잉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께 잉어를 달여 드리니 병은 차도를 보였고 이웃의 모든 사람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아버지가 꿩고기를 원하면 산과 들을 헤매며 꿩을 잡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꿩이 날아 들어왔다. 아버지의 종기에 올빼미 기름이 필요하자 올빼미 한 마리가 날아와 들보에 앉았다. 아버지의 기력을 돋우기 위해 고기를 잡으려 하자 큰 자라가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백세가 넘게 장수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아버지 병간호로 몸져눕게 됐다. 병석에서도 아버지 보살피기에 정성을 다하다 결국 세상을 떠나니 온 가족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들 옆에서 ‘충국아’하고 부르니 ‘아버지, 충국이 여기 살아 있습니다. 안심하소서’하며 죽었던 사람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식구들에게 ‘나는 백세가 넘은 아버지를 두고 가는 불효자식이니 나 대신 부모를 잘 봉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고종 10년인 1873년, 그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남은 아우들은 형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모시는 데 온갖 정성을 다했다.

박씨 형제들의 효행은 원근에 알려지게 되었고 유림에서는 크게 칭찬하며 나라에 알리니 고종은 1891년 박씨 형제들에게 ‘사효동시정려’의 교지를 내렸다. 효자각은 원래 임하댐 수몰지역 내에 있었다. 옮기는 데 많은 경비가 소요될 것 같지 않았지만 사실 박씨 형제의 후손들은 여전히 넉넉지 못했다고 한다. 조사단은 효자각이 문화재로 지정돼 옮길 수 있도록 애썼다. 효는 가정을 지키는 근원이지 않은가. 결국 박씨 4형제의 효자각은 1986년 12월11일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80호로 지정됐다. 효자각으로서는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그리고 1989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해 보존되고 있다.

#2.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백호서당

진보면의 북서 끝에 세장리가 있다. 마을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하천이 흐르는데 이 물길은 남쪽으로 내려가 반변천에 합류해 남하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안동 임하호로 흘러들어간다.

백호서당은 푸른 반변천이 내려다보이는 세장리의 벼랑 위에 자리한다. 현재의 위치는 원래의 서당 자리가 아니다. 서당은 임하댐의 건설로 수몰지에 편입되자 70m 정도 자리를 이동시킨 것이다. 먼 비봉산의 밑동까지 보이는 대단히 너른 시야를 가진 자리다. 백호는 잣나무와 호수를 뜻한다. 처음 건립될 때 주변에 잣나무들이 무성했고 반변천의 물줄기가 호수처럼 보였다고 한다.

백호서당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을 기리기 위한 서당이다. 이휘일은 영남학파의 학자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한 이다. 아버지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동생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다. 어머니는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 장계향(張桂香)으로 여중군자로 칭송받았던 ‘음식디미방’의 저자다.

서당은 이휘일 사후 그를 따르던 많은 지방 유림이 건의하고 당시의 청송현감 조명협(曺命協)이 발의해 진보 향중(鄕中)에서 영조 때인 1757년 건립했다.

백호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반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으로 열었고 좌우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현판은 이휘일의 동생인 갈암 이현일의 친필이라고 한다.

대청의 뒷문 속으로 비봉산하의 마을과 들이 펼쳐진다. 이휘일에게 자연은 이상적인 공간 혹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에게 자연은 농민의 땀과 삶이 담긴 노동의 공간이었다. ‘가을에 곡식 보니 좋기도 좋구나/ 내 힘으로 이룬 것이 먹어도 맛있구나/ 이 밖에 천사만종(千駟萬種)을 부러워 무엇하리오.’

그는 순수한 우리말로 사계절 노동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백호서당은 추현리 효자각에 이어 1986년 12월11일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81호로 지정됐고, 1989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사효자실록. 청송군지. 문화유적분포지도. 청송의 전통건축물. 청송문화재대관.
공동기획지원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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