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무에서 유를 만든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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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2   |  발행일 2019-10-22 제31면   |  수정 2020-09-08
[CEO 칼럼] 무에서 유를 만든다?

요즘처럼 살림이 쪼들릴 때는 희망인지 격려인지 모르지만 심심찮게 듣는 말이 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자.” 듣기는 자주 듣는데 얼른 감이 오지 않는다. 그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선언적인 말일 뿐인가?

충북 옥천에 사는 노완수씨는 그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이다. 약 2만3천100㎡(7천평) 규모의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노씨가 그토록 유명한 것은 특별한 재료도 없이 못 만드는 것이 없는 ‘뭐든지 박사’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농기구는 설계도를 그릴 것도 없이 이것저것 끼워 맞춰 무엇이든지 만든다는 것. 영화 트랜스포머에서나 나올법한 제초기는 가까이 가서보면, 고물 경운기에 청소기 손잡이를 이용해 만든 햇볕을 막아주는 차양막을 얹고, 4방향 전자조정 제초용 칼날을 붙인 것이다. 칡 세척과 칡즙 추출을 일관공정으로 해내는 기계, 자동식 깨 분리기, 유압식 장작 패는 기계 등 무엇이든지 노씨의 손만 거쳐 가면 모든 쓰레기가 기발한 아이디어로 재탄생된다.

2014년 9월19일 미국 뉴욕증시 상장 당시 시가 총액이 2천314억달러(한화 241조원)로 전 세계 유수의 IT 기업을 제쳤던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 밝힌 자신의 성공비결 3가지. 돈이 없어서 아이디어에 매달리고 혁신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이 없어서 기술자들을 존중해야만 했다. 아무런 계획이 없어서 시장의 환경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은퇴했지만 그의 ‘3無 철학’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스위스에 사는 가진 것 없는 디자이너였던 다니엘과 마커스 프라이탁 형제가 트럭운송 중 비가 오면 짐을 덮는 타폴린 수지 커버를 오려 만든 프라이탁 브랜드 가방도 마찬가지다. 폐기물 커버를 고가의 패션 가방으로 둔갑시키는 아이디어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들이 무슨 재료를 쓰는지 아는 입장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일단 그 가격에 놀랄 것이다.

6·25 당시 서귀포에 피란한 화가 이중섭이 찌든 가난 속에 캔버스와 물감조차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아내와 아이들이 그리워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은박지화는 지금은 이중섭 화백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 화단에 진출하기 위해 홍익대 교수직을 과감히 던지고 한국을 떠난 김환기 화백은 5년이 넘는 긴 뉴욕생활에도 무명을 못 벗어나고 돈은 떨어져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캔버스 살돈을 아끼기 위해 시작한 신문 활자 위에 점을 찍어 표현한 점화는 그의 대표작이 된다.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인 화가의 작품은 이중섭 화백의 은박지화와 김환기 화백의 점화뿐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모 평론가가 두 화백의 삶을 조명하여 ‘위대한 가난’이라 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생겨나나 그 유(有)는 무(無)에서 생겨난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글이다. 깊은 밤 저 너머에 세상을 밝힐 아침의 씨앗이 커가고 있고, 추운 겨울의 들판에 따뜻한 봄 세상을 뒤덮을 생명의 씨앗이 움츠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무와 유의 상생원리를 뜻하고 있다. 목표달성에 필요한 돈이나 사람 혹은 도구가 없는 열악한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희망의 단초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 현재 환경의 열악함과 궁핍함이 실행 포기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를 분석해보면 무를 유로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사고방식(mindset)이 있다. 먼저 자신은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절박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이루어보려는 강력한 열정과 이 열정이 이끌어내는 창의가 없음을 메우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이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것은 최소 투자 혹은 투자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기대 이상의 이익을 거둔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어 하는 지역 기업인들이 좀 더 기운내길 기대하고 마음으로 응원한다.

권업 (대구테크노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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