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칼레와 구미

  • 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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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4   |  발행일 2019-10-24 제31면   |  수정 2019-10-24
[영남타워] 칼레와 구미
변종현 경북부장

‘칼레의 시민’은 사실 우아한 거짓이었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보고 있는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칼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일화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 군대에 포위 당한 도시를 구하기 위해 부자, 시장, 귀족, 법률가 등 시민을 대표한 6명이 목숨을 자발적으로 내놓았다는 게 요지다. 유감스럽게도 이 얘기는 15세기 애국주의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의해 미화되고 과장됐다는 게 정설로 굳어졌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들의 ‘헌신’은 항복의 뜻을 표현한 형식적인 의례였다는 것. 다만 이들이 저잣거리 ‘일반시민’이 아니라 중세의 ‘좀 더 가진 자’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애국주의 미명하에 일화가 부풀리고 왜곡됐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좀 더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고픈 가지지 못한 자들의 바람은 아니었을까. 전쟁 후 500년이 흐른 1884~1889년 ‘칼레의 시민’은 오귀스트 로댕의 손에 의해 청동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영웅’을 기대했던 시민의 바람과는 달리 동상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회적 책임 사이, 딜레마에 빠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입술을 꽉 물어 일그러진 표정,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은 곧 시민의 거부감을 불렀다. 동상이 재조명되며 칼레시청 앞에 다시 설치되기까지는 50여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칼레에, 어찌됐건 여섯 시민이 있다면 구미엔 ‘왕산 일가’가 있다.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는 구미 임은리 출신의 개항기 의병이자 독립운동가다. 일제 침략으로 국권을 강탈 당하자 의병을 모집해 13도 창의군을 창설하고, 1907년엔 일제 심장부인 조선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선발대 300명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더욱 놀라운 건 3대에 걸쳐 선생 일가 14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가문이란 점이다. 칼레의 가진 자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숭엄함이 있다. 그러함에도 이들을 기리는 동상은 왜 빛을 보지 못하고 창고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야 하는 걸까.

구미시가 지난 21일 허위 선생 추모제를 열었다. 선생이 순국한 지 111년 만이다. 칼레의 시민 동상이 칼레시의 상징이 되기까지 500년 이상 걸린 것을 감안하면 위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미의 수치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111년간의 수치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구미 산동면에 조성된 광장과 누각 명칭이 정리되지 않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왕산 일가 3대 14인의 동상도 여전히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장세용 구미시장의 결단을 어렵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란 게 있다. 왕산은 구미의 위대한 유산이다. 왕산광장과 왕산루, 그리고 왕산 일가 동상은 구미의 정신이 될 것이다.

왕산과 관련해 구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TK가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갖고 있는 일말의 기대감마저 사라지게 하고 있다. 장 시장의 이해하기 어려운 광장·누각 명칭 변경도 그렇지만 추모제 행사에 민주당 소속 구미시의원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구미시민의 따가운 눈총은 둘째 치고 진보진영을 자처하기 스스로 민망하지 않은가. 정파적 이해를 달리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시의 정신을 바로세우는 일에 소홀한 점은 용납하기 힘들다. 언론계 한 선배는 TK의 진보인사들이 지나치게 뾰족하다는 지적을 한다. 마치 그 끝이 송곳과 같아서 상대를 아프게만 한다는 얘기다.

‘조국 사태’ 이후 지역민심이 더욱 편향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보진영도 결국 TK사람이다. 지금처럼 해선 TK를 품을 수 없다. 창 끝을 갈아 더욱 날카롭게 할 게 아니라 둥글게 하라. 이어령 선생은 일찍이 TK정서를 TK정신으로 대치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정치적 당파성을 띠고 있는 TK정서로는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TK진보진영도 TK정서와 맞설 게 아니라 TK정신을 품어야 한다. 항일, 반독재, 선비, 더 나아가 새마을운동까지 품은 TK정신으로 돌아갈 때 TK진보진영의 미래도 열린다. 장 시장이 26일 박정희 추모제에서 초헌관을 맡기로 한 것은 의미 있다. 개구리는 계절의 순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땅속에서 동면을 한다. 변종현 경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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