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추암 촛대바위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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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5   |  발행일 2019-10-25 제37면   |  수정 2020-09-08
바다에서 솟아올라 역사의 횃불같은 성스러운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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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고의 해돋이 명소인 강원도 동해시 추암 촛대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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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섬이 장관을 이룬 추암 출렁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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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대 서쪽에 있는 해암정. 이곳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이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데, 가을 햇볕과 바람에 마음을 싣고 떠난다. 가만히 맑디맑은 하늘을 쳐다보면 거기 바다가 보이기도 하고, 가을은 영원한 추억으로 출렁거린다. 초등학교 1학년 가을운동회 때 펄럭이던 만국기와 태극기 아래, 애면글면 달리던 시간의 질주는 노년의 가을에 주저앉아 한 숨을 고르고 있다. 이제 가을은 슬픈 동화가 되었다. 도토리가 잔뜩 떨어져도 그걸 먹을 다람쥐는 사라지고, 물질의 단맛에 푹 빠진 현대인은 단풍을 보면서도 가을의 영혼을 알지 못 한다. 가을 여행은 지금이라도 흘러간 애먼 그리움을 찾아가는 회상이 되어야 할 거다. 그 유년의 시간을 걸러내면서 나는 가을에서 경험한 단풍같은 영혼들을 다시 확인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원한 추억으로 출렁거리는 가을
크고 작은 바위섬이 장관 이루는 추암
애국가 첫 소절 배경 등장 해돋이 명소
해안 절벽·기암괴석으로 수려한 석림
할미바위, 다정히 선 형제바위도 눈길

해암정에 닿으니 유년의 시절로 역주행
발길닿는 출렁다리 아래 물결치는 바다
아득한 기억에서 살아나는 가버린 나날
아름다운 조각공원도 새롭게 클로즈업



거기 강원도 동해시 최남단에 위치한 추암으로 걸어가면서, 떼를 지어 가는 관광객 속에서 나는 더 고립되는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나브로 인파에 휩쓸려 해변으로 간다. 밥 딜런(Bob Dylan)의 ‘Blowing in the wind’를 들으며 걷는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인간은 사람이라 불리는 걸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야/ 모래 속에서 잠들 수 있을까…” 정말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고 있다. 황홀하다.

추암에 도착한다. 자연경관이 매우 수려한 곳이다. 해안절벽과 함께 석림이 기암괴석으로 아름답다.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동해의 거세고 맑은 물이 바위에 밀려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나도 파도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환시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의 일생이란 게 저 파도처럼 밀려와 바위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포말과 무엇이 다를까. 촛대 바위를 찾는다. 애국가 첫 소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들려오면서 그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촛대바위는 하늘을 향한 채 한국인의 정신을 옴니암니 형상화하고 있다. 그 하늘과 바다, 땅이 하나로 우주의 시공이 되어 우리의 혈맥과 민족혼을 만들고 이어온 성스러운 역사의 횃불이 촛대바위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최고의 아침 해돋이 장소로 여기 추암을 꼽고, 조선(朝鮮)이라는 국명도 역시 해돋이의 신비를 의미하고 있다. 촛대바위의 경관과 주위의 바위 군을 곱게 흘겨본다. 추암과 촛대바위가 왜 애국가 첫 소절 배경에 나오는가를 느낀다.

조선시대 도체찰사로 있던 한명회가 이곳의 자연절경에 감탄하여 능파대(미인의 걸음걸이)라 부르기도 했다. 수려한 경치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아슴아슴한 가을바람이 나의 얼굴을 스친다. 촛대바위는 원래 두 개 였는데, 그 중 하나가 숙종 7년(1681) 5월11일 지진이 났을 때 중간 부분 10척가량이 부서져 나갔다고 한다. 파손된 바위는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시선을 드니 먼 바다가 아즐하다. 바다와 하늘이 눈썹에 파란 경련을 일으킨다. 이 아름다운 배경이 슬픈 얼굴이 되어 돌아보는 것 같다. 나의 메말라 버린 영혼이 곰비임비 풍요로워진다.

이제 나는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인간은 오만해질수록 영성의 경적 음을 듣지 못하게 된다. 인간의 콧대가 높아질수록 자연은 저물어 가는 저녁처럼 낮아지고 어두워질 뿐이다. 동해바다 아름다운 가을은, 사랑을 하면서 그게 사랑인 줄 몰랐던 소녀의 슬픈 눈처럼 비감스럽다.

할미바위도 본다. 바위 두 개가 형제처럼 다정하게 서 있는 형제 바위에도 눈길을 보낸다. 바위를 의인화하는 것을, 푸른 즙액처럼 짜면서 해암정으로 걷는다. 가을 바다는 내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파문을 담아 물결을 이루기도 한다. 석림은 아름다운 바위 숲이다. 시간의 여울을 거쳐 돌의 뼈대를 세우고 있는 환상의 경관이다. 그 무한한 파도에 씻기면서, 제 얼굴을 다듬어온 바위의 성스러운 자태에서 불현듯 영원의 오롯함이 묻어난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해암정에 닿는다. 고려 공민왕 때, 삼척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명도산에 와서 살면서 지은 정자다. 삼척심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뒤로 지붕보다 조금 높은 바위산이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일대 장관이라 한다. 그냥 아름답다는 감정에, 나의 내면이 가라앉아 버린다. 이런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나의 영혼은 왜 자꾸 유년의 추억으로 역주행하는 것일까. 그 옆집 순이의 슬픈 눈망울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잠시 가을은 입안에서 묵주를 굴린다.

해변 돌출부 두 곳을 이은 출렁다리로 우벅주벅 간다. 많은 관광객이 출렁다리를 오가고 있다. 길이 72m 폭 2.5m의 다리이다. 주변의 석림과 드넓은 동해바다의 비경을 볼 수 있다. 추암 해변과 석림 동해는 참으로 위대했다.

이제 가슴에서 맴돌던 바람을 놓아 보내고 어디로 흘러가버린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써야겠다. 발자국마다 출렁이는 그 시간의 완성을 위해 악보를 단맛으로 채워야겠다. 출렁다리 아래로 물결치는 바다. 그 잔잔한 바다에 나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그렇게 빨리 가버리는 것이 가을만이 아님을 저 바다에 누워 중얼거리고 싶다. 어딘가로 가버린 그 옆집 순이의 슬픈 눈망울이 파도치는 저 바다, 그리운 바다. 그 바다에서 시를 쓰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라져 버리는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겠다. 이제 영원을 찾으려고 하지 말자.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 사라지는 것을 사랑하자.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저 파도가 어째서 저렇게 끝없이 밀려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나의 일기에 불멸을 적는다는 것이 시답잖다.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들. 그 존재의 끝과 순이의 눈망울, 사라졌지만 추억에 남아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두 다리의 정강이뼈를 사랑해야겠다.

내 어릴 적 가버린 나날이여. 그렇게 돌아오지 않고 아득한 기억에서 야릇하게 살아나는 가버린 나날이여. 어디선가 바다 바람이 자꾸 불어온다. 흘러가버린 길이 너무 멀어 보인다. 손에 아무것도 쥘 수 없다. 손목의 파란 정맥이 드러난다. 시간은 그렇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럭저럭 출렁다리를 다 건너고 데크 따라 추암 근린공원으로 걷는다.

아직도 추암바다의 잔영이 눈꺼풀에서 파르르 떨리는데, 조각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새롭게 클로즈업 된다. 각가지 조형미를 상징으로 한 조각들이 존재의 영원함을 품고 있다. 돌과 감정이 뒤섞인 아름다운 조각에 나를 파묻고 싶다. 이제 내 시에 등장하는 알량한 형용사들이 마지막으로 눈감은 가을이다. 귀 부리에 알 수 없는 방울소리가 들리고 환청은 의문투성이의 삶에 더욱 귀 기울이게 한다.

나에게 사랑을 주던 그 스킨십들이 영혼을 퍼올리는 두레박이었음을. 나에게 위안을 주던 여행의 종점도 영혼을 만나는 것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처음에는 몰랐다. 그렇게 길을 걸으면서 산과 바다를 보고, 바람과 물을 느끼면서도 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렇게 여행길에서 문득 나는 나를 만나고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내면에 끝없이 울리는 방울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호루라기 소리가 되기도 하고, 어디서도 사랑은 마치 들불처럼 타고 있었다. 어쩌다 잠시 허무의 늪에 빠져도 그것마저 꿈속처럼 아름다웠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가을과 저 바다와 추암의 신비 안에서 쉬고 싶다. 머무는 것과 떠나는 것은 동의어다. 휴식은 한 때의 스러지는 불꽃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출발의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저쪽에 주차장이 보인다. 가을과 바다는 늘 가슴 뛰게 한다. “나의 가슴이 요로코롬 뛰어분디 어째스까.”

시인·대구힐링트레킹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 대우여행사 이사
☞문의: 추암 관광안내소. (033)530-2801

☞내비 주소 : 강원도 동해시 촛대 바위길 6

☞트레킹 코스 : 추암해변 - 촛대바위 - 해암정 - 출렁다리 - 추암 근린공원

☞주위볼거리 : (가)북평 민속장 (나)동해 러시아 대게 마을 (다)만경대 (라)천곡 황금 박쥐 동굴 (마)무릉계곡 (바)바다열차 (사)묵호등대·논골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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