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허필의 ‘묘길상도(妙吉祥圖)’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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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5   |  발행일 2019-10-25 제39면   |  수정 2020-09-08
맑은 가을날, 구절초처럼 해맑은 얼굴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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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필, ‘묘길상도’(부분), 종이에 먹, 27.5X95.9㎝, 175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가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작품으로 남긴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산과 관동팔경이 대표적인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중국의 ‘소상팔경도’가 고려시대에 전해진 후 조선시대에는 ‘관동팔경도’가 유행했다. 관동팔경은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으로, 동해안을 따라 연결된 경치가 빼어난 명소들이다.

여행에서 본 진귀한 풍경은 누구나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한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화가는 작품으로, 일반인들은 가슴에 담아 오래 간직한다. 조선 후기에는 실제 풍경을 보고 느낀 감동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인기를 끌었다. 연객(烟客) 허필(許, 1709~1768)은 진경산수를 그리되 자신만의 기법으로 남종화풍의 산수화를 남겼다. 그의 ‘묘길상도(妙吉祥圖)’는 실경을 보고 느낀 바를 화폭에 담은 작품이다. 먹의 농담을 맑게 표현하여 청아한 기운이 감돈다. 그곳에 가보지 않아도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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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필은 양천(陽川)허씨 22대손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은 학식이 높았다. 남인은 서인과 당쟁의 분열 속에서 위기가 찾아오고, 1728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가문은 몰락하였다. 선친이 경기도 안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허필은 더 이상 정계에 입문할 수 없었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동료들과 유대관계를 맺으며, 평생 유람을 통해 그림을 그리면서 시를 지었다.

안산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중심으로 남인·소론계의 문예활동의 근거지였다. 정치에 몰락한 당대 유명한 문인들이 모여서 문화집단을 이루었다. 허필은 이들과 긴밀한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문학과 그림을 숙성시켰다. 그 중 ‘예원의 총수’로 불린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의 친분은 대단하였다. 허필은 강세황의 그림 20점에 평을 남긴 후 ‘연객평화첩(烟客評畵帖)’을 엮었다. 작품 비평가이자 화가인 강세황이 허필에게 작품 평을 허락한 것은 서로의 믿음이 돈독했기 때문이다.

문우인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허필의 지명(誌銘)에 “그의 시는 그 사람과 같아서 진실함이 극에 달하면 기이함을 수시로 드러내었고, 그의 글씨와 그의 그림은 모두 그의 시와 같았다”고 한다. 문인 임희성(任希聖, 1712~1783)은 “곤륜산의 옥과 형산의 금이 온 세상의 보배이듯이 양천 허씨 가문에는 역시 이 사람이라네”라고 하였다. 허필은 벗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시단과 화단을 이끈 중심인물의 한 명이었다.

그는 1744년 강원도 통천군의 총석정 유람을 시작으로 관동지역을 여행하였다. 경북 울진, 강원도 삼척의 죽서루 등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관동팔경도병’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1759년 강세황과 황해도 개성을 두루 여행하며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허필은 평생 유람과 시회를 통해 풍류를 즐기면서 그림 활동을 하였다.

‘묘길상’은 마하연을 지나 내금강 쪽으로 깊이 들어간 곳에 있다. 원래는 돌에 부처의 좌상이 새겨진 것인데, 허필은 그대로 그리지 않고 서 있는 승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묘길상도’를 보면 마치 바위 속에 자신이 부처가 되어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세상풍파를 잊은 듯한 표정이 구절초처럼 맑다. 애댄 승려는 세상에 올 때 그대로의 모습이다. 늘어진 장삼은 고난의 현실을 감싸주듯 넉넉하다. 석등은 탑으로 변형시켜 부처의 가피가 깃든 성지(聖地)임을 알린다. 탑 위에는 고매한 학 한 쌍이 있다.

그림 왼쪽 위에는 “일찍이 태악(泰岳)에서 묘길상을 보았는데, 바위를 갈라 불상을 조성했으니 대가의 수법이다(曾於泰岳, 見妙吉祥, 斷巖爲佛, 自是乃家法)”라고 적혀 있고, 호 연객 아래 인장이 있다. ‘묘길상도’는 1744년 총석정 유람 후, 감명 깊게 본 묘길상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 왼쪽에 첨부한 별지에는 51세(1759)에 강세황과 개성을 여행할 당시 남태제를 방문한 사실을 적고 있다. 또한 오언사(吳彦思)에게 ‘묘길상도’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란 많은 삶처럼 사물을 파격적으로 해석하여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을 갖고 그림을 그렸다. 사물의 고유한 성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 탁월했다. 오히려 불행한 삶이 평생 전국을 유람하며 벗과 함께 시화를 즐길 수 있었다. 강세황과 더불어 안산의 문화를 꽃피우고 시인이며 화가, 그림 비평가로 조선 후기의 예술을 탄탄하게 다졌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인생은 맛이 없다. 부족한 삶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허필은 그렇게 시와 그림을 남겼다. 높아진 가을 하늘과 함께 곳곳에서 축제가 풍성하다. 축제에 참가하여 사진으로 자신만의 ‘묘길상도’를 찍어보자.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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