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10> 신구리 부용재와 기암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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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31   |  발행일 2019-10-31 제13면   |  수정 2021-06-21 17:59
벼슬 마다하고, 자연을 벗 삼아…유유자적한 삶을 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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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입암면 신구리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김세보의 재실 부용재. 한성판윤을 지낸 김세보는 연산군 시절 벼슬을 버리고 영양으로 내려와 부용재와 신락당을 짓고 일생 은거하는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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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재 위쪽에는 김종환의 정자인 기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김세보의 9세손인 김종환은 일찍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어진 스승과 벗을 찾아 세상을 주유했다고 한다. 3칸 규모의 초가집이었던 기암정은 1889년에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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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재 마당의 오른쪽 담장 아래에는 시멘트로 만든 작은 연못과 일월지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진보에서 영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입암면 신구리(新邱里)가 있다. 일월산이 남쪽으로 달려 이 마을 앞에서 부용봉(芙蓉峯)으로 우뚝하고, 일월산 동쪽에서 흘러온 반변천이 이 마을 앞에서‘S’자 형태로 굽이치는 경치 빼어난 곳이다. 신구리의 남쪽 고구령재를 따라 자연마을인 조기리(釣汽里)가 자리하는데 중종반정 이후 김해김씨 김세보(金世輔)가 개척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기’라고 했다는데 이후 마을 앞 천에 물고기가 많고 또한 낚시꾼들이 많아 조기리가 되었다 한다. 김세보는 이곳에서 시를 짓고 글을 읽으며 일생 은거하는 삶을 살았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부용봉을 멀찍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땅, 호쾌하거나 장대한 풍경이 손 가까이 닿는 자리는 아니다. 훗날 그의 후손이 이곳을 ‘비록 상쾌하고 시원한 정취는 없지만 그윽하고 조용하여 학문을 닦을 만한 곳’이라 하였는데 실로 그들의 터전은 오늘도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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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정 마당 대문 옆에는 김종환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회화나무가 서 있다.

◆부용재

연산군 때 입향한 김세보의 재실
솟을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비정형 편액 윤보선 대통령 친필
부지 좁아 후손들이 현위치 중건

◆기암정
부용재 위쪽…김세보 9세손 정자
스승·벗과 교유하며 학문 닦아
초가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중건
툇마루 상부에 ‘기암정기’ 걸려


 

#1. 김세보의 부용재

사람 사는 분위기가 물씬 나는 평범한 마을이다. 마당 넓은 작은 집에 대문 없는 집이 허다하고 알록달록 색 입힌 현대의 건물도 나란하다. 입암로 큰길에서 몇 달음이면 마을 뒷산에 닿는데 그 앞에 거창하지 않은 솟을대문과 멋진 향나무가 토담 위로 고개 내민 김세보의 재실 부용재(芙蓉齋)가 있다.

김세보의 자는 고우(故佑), 호는 부용재로 세조 14년인 1468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현감(縣監)을 지낸 김영순(金永純)이다. 김세보는 성종 15년인 1484년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청요직을 거쳐 벼슬이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재직 중 연산군에게 여러 번 간언하였던 그는 결국 벼슬을 버리고 영양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일월산에 숨어 살며 농사짓고 소 치고 나무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웃 사람들이 그가 높은 벼슬을 한 선비임을 몰랐을 만큼 철저한 은거였다. 때문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고 유배되는 동안 그는 화를 면했다.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조정에서는 그를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일월산에서 입암면의 부용봉 아래로 거처를 옮겨 부용재와 신락당(新樂堂)을 짓고 일생 은거하는 삶을 살았다.

부용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플라스틱 기와를 올린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 대청방을 두고 양쪽은 온돌방으로 구성했으며 정면에 반 칸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방에는 사분합문을 달아 방과 마루의 기능을 겸하게 하였다. 온돌방은 툇마루 쪽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하게 했다. 부용재의 마당 바닥과 기단 및 기단바닥은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으며, 툇기둥의 주춧돌은 다듬은 화강석을 놓았고 나머지는 자연석이다. 기둥은 정면 툇기둥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다. 처마도리에 부용재 편액이 걸려있는데 정형적이지 않은 곡선을 가진 편액이다. 편액 글씨는 우리나라의 4대 대통령이었던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이 썼다.

부용재 전체는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데 전면에는 기와를 얹은 토석담에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웠고 나머지는 시멘트블록 담장으로 둘렀다. 솟을대문은 대문간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두었다. 방의 정면에는 각각 벼락닫이 창을 달았고 마당 쪽으로는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흥해(興海) 배동환(裵東煥)이 지은 ‘부용재기’에 의하면 부용재는 1930년경에 중건되었다. 원래 김세보가 은거하며 부용재를 지은 곳은 지형이 험하고 부지가 협소한 곳이었다고 한다. 후손들은 모두가 모이기 좋은 넉넉한 자리에 부용재를 중건하기로 뜻을 모았고 그것이 지금의 자리다.

마당의 오른쪽 담장 아래 수돗가 곁에는 시멘트로 만든 사각의 작은 연못이 있고 ‘일월지(日月池)’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비석의 우측면에 ‘신미년 8월’이라고 음각돼 있는 것을 보아 193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세보의 옛 부용재에 연못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용재는 1978년에 다시 한 번 중건되었으며 김세보를 기리는 재실 이외에 문중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후손들이 모이는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2. 김종환의 기암정

부용재 위쪽에 김세보의 9세손인 김종환(金鍾煥)의 정자 기암정(沂巖亭)이 자리한다. 김종환은 영조 때인 1768년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순조 때인 1828에 태어났다고도 하는 등 기록이 분명치 않다.

그는 일찍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어진 스승과 벗을 찾아 세상을 주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한가롭게 살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후배들에게는 배움을 권장했다 한다.

기암정은 김종환이 50세 무렵에 지은 정자다. 처음에는 3칸 규모의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기암정은 고종 26년인 1889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원래는 정자 주위에 토석담장을 두르고 솟을대문을 세웠으나 최근에 솟을대문을 허물고 시멘트블록 담장으로 고쳐 쌓았다.

기암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에 반 칸의 툇마루를 두었고 가운데 대청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방의 정면에는 네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배면에는 두 짝 우리판문을 달았다. 좌우 온돌방에는 정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각 측벽에는 벼락닫이 창을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되어있고 기단 상부는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으며, 기단 위 주초는 자연석이다. 기둥은 전면 툇기둥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다. 처마도리에 기암정 편액이 걸려 있고 툇마루 상부에 기암정기가 걸려 있다.

기암정은 마을 뒷산 기슭의 큰 바위와 대숲에 기대어 자리한다. 마당의 대문 옆에는 150년 된 회화나무가 무성히 솟아 있다. 나무는 김종환이 심은 것이라 한다. 현재 기암정 마당은 부분적으로 파헤쳐져 있다. 몇 그루 크고 작은 나무들의 단정한 모양새를 보면 원래 단아하게 조경된 마당이었던 듯하다.

김종환은 조근용(趙根容), 김덕운(金德運), 김진호(金鎭祜), 류건흠(柳健欽) 등과 교유하며 넘치도록 많은 글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글들을 새겨서 걸지 않은 것은 스스로 거처하는 곳을 사치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형식적인 것을 좇지 않았고 다만 여러 아름다운 정경을 읊고 완상하고자 할 뿐이었다.

‘기암정기’에 ‘비록 상쾌하고 시원한 정취는 없지만 그윽하고 조용하여 학문을 닦을 만한 곳’이라는 내용이 있다. 들리는 것은 바람에 서걱대는 댓잎 소리뿐, 그윽함 조용함은 현대에도 이어져 있다. 대문 없는 문간으로부터 마을 안길이 흘러내려가고 오래된 회화나무 둥치 너머로 부용재의 뒷모습이 보인다. 선대의 자취를 따라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는 김종환, 연산군의 실정과 중종의 반정에 동의하지 못해 떠나온 김세보. 그들 모두가 이곳에서 세상에 얽매임 없이 살았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영양군지. 영양지역의 마을과 역사, 영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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