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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가송리 농암종택·고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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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뉴스부기자
  • 201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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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방한 풍광 속 단정하게 앉은 亭子…퇴계가 찾아 노닐며 수많은 詩 남겨

청량산이 빚어낸 협곡. 가송협의 단애 아래에 금난수의 정자 고산정이 앉았다.
분강서원, 별당인 명농당, 농암 종택 등이 각각 분리된 경역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동 도산면의 퇴계로를 달리다 아~ 하는 탄성이 쏟아지면 바로 가송리(佳松里)고, 곧 청량산(淸凉山)이다. 아름다운 소나무의 마을이라는 가송리. 청량산 줄기가 만들어내는 협곡을 끼고 흐르는 초록의 강, 서늘한 단애와 은빛 모래밭, 이 모든 현기증 나는 풍경이 잔잔한 조화로움으로 고정되어 있다. 예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천옥(天獄)이라고도 하였고, 안동 땅의 수많은 경승 가운데 제일이라고도 했다.

안동땅 경승 중 제일로 꼽는 가송리
청량산이 빚은 협곡과 서늘한 단애
퇴계 제자인 금난수의 정자 ‘고산정’
풍광에 반한 화가·시인 발길 이어져

강물따라 굽이 돌면 농암 종택·서원
후손들이 650년 이상 代 이으며 기거
아흔 넘은 부모님 위해 지은‘애일당’
집안어른 모셔 색동옷 입고 춤추기도


◆고산정

가송리 입구는 청량산이 빚어낸 협곡, 가송협(佳松峽)이다. 그 깎아지른 벼랑 아래에 정자 하나가 앉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금난수(琴蘭秀)의 정자 고산정(孤山亭)이다. 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있다. 호방한 풍광 속에 정자는 참으로 단정하게 앉아 있다. 절경이다. 고산정의 주인인 금난수의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퇴계의 제자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학행을 겸한 청빈한 선비로 시에 뛰어났고 글씨 또한 잘 썼다고 한다. 금난수는 명종 19년인 1564년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고 한다.

고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가운데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우측 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 방은 뒤쪽의 1칸만을 온돌방으로 꾸며 마루는 ‘ㄱ’자형을 이룬다. 정자의 마루는 높지 않고 전면과 양 측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퇴계는 자주 고산정을 찾아 노닐었고 이곳에서 ‘서고산벽(書孤山壁)’ ‘유고산(遊孤山)’‘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등 수많은 시를 썼다 전한다. 많은 화가가 고산정의 풍경을 그렸으며 정자 안에는 퇴계를 비롯하여 당시 이름 높았던 문호들이 이곳에서 쓴 시들이 걸려 있다.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퇴계의 시 ‘서고산벽’이다. 강 건너 벌써 노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고산정을 바라본다. 고산주인은 지금 없는데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가을하늘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린다. 가송협에 단풍은 아직 오지 않았다.

◆농암종택

농암 이현보 신도비. 분강서원 좌측에 위치해 있다.
농암종택 앞 낙동강변의 벽력암. 단애 위로 퇴계오솔길이 나 있으며 전망대가 있다.
고산정 앞 강물을 따라 올미재 아랫자락을 밟고 한 굽이를 돌면 고개의 서편 사면 제법 넉넉한 땅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종택과 서원 등이 마을처럼 펼쳐져 있다. 농암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어부가’로 유명한 시조 작가다. 퇴계의 숙부와 함께 과거에 급제했으며 34세나 어린 퇴계와도 격의 없는 교유를 했다고 한다. 연산군에게 바른 소리를 했다가 유배되기도 했고, 안동부사와 성주목사로 봉직할 때는 청렴함으로 존경받았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문장으로 자연을 노래한 문인으로 이름 높았다. 종택은 농암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이후 후손들이 650년 이상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농암종택은 1370년에 지어졌다. 이 집을 최초로 지은 사람은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李軒)이다. 원래는 도산서원 인근 분천마을에 있었다. 1976년 안동댐 건설 때 마을이 수몰지에 편입되자 종택과 사당 등은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종택은 사당, 안채, 별채, 문간채 등이 있는 본채와 긍구당(肯構堂), 명농당(明農堂)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택 옆에는 농암의 위패를 모신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자리한다. 이곳은 광해군 때인 1613년에 농암을 추모하기 위한 향현사로 창건되었고 숙종 때인 1700년에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분강서원을 지나 마을 끄트머리 산기슭에는 농암이 70세이던 1512년에 90세 넘은 부모님을 위해 지은 애일당(愛日堂)이 있다. ‘애일’은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부모님의 살아 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의미다. 농암은 애일당을 짓고 잔치를 열어 집안 어르신들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애일당 아래 ‘강각(江閣)’은 농암의 별장으로 퇴계, 김안국, 주세붕, 이언적 등이 머물렀다.

종택 앞에 벽력암이 우뚝하다. 그 아래로 초록빛의 강물이 흐르고 흰 모래와 보드라운 강돌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산봉우리 한가로운 구름 일고 물 위엔 갈매기 나네/ 아무런 사심 없이 다정한 건 이 둘 뿐이로다/ 한평생 시름을 잊고 너희와 더불어 지내리라’(어부가). 매일 정오마다 이 모래밭에 앉고 싶다. 이 천옥에는 어떠한 표정 없이도 행복이 감지되는 평화가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퇴계 오솔길

퇴계가 사랑한 청량산
詩句 따 ‘녀던길’불러
낙동강변길 단연 백미


도산면 토계리의 퇴계종택에서부터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길에 ‘퇴계 오솔길’이 있다. 퇴계의 시구(詩句)에서 따 지은 ‘예던길’, 혹은 ‘녀던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그 길은 퇴계가 숙부(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으로 가면서 처음 걸었던 곳이다.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던 퇴계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이 길을 걸어 청량산으로 향했다. 도산면에 접어들어 도산서원, 퇴계종택, 이육사문학관을 지나 단천교에서 본격적인 예던길이 시작된다. 단천교 서쪽으로는 전망대에서 건지산을 넘어 농암종택을 지나 고산정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백운지 전망대에서 가송리까지 가는 길이 있다. 퇴계는 낙동강변을 따라 거닐었다고 한다. 그중 가송리 농암종택과 고산정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은 단연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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