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쏙쏙 인성 쑥쑥] 엎어지고 자빠져도 이지러지지 않아야 한다(顚沛匪虧)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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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4 08:15  |  수정 2020-09-09 14:09  |  발행일 2019-11-04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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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사는 네 살배기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 유치원운동회 오세요”하고 초대를 했습니다. 손녀의 애교스러운 말을 듣고 아침 일찍 대구에서 출발하여 대전에 있는 도솔다목적체육관으로 갔습니다. 커다란 체육관의 실내 전면에는 ‘태평유치원 가족운동회’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4~6세의 원아들이 넓은 실내 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느라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엄마가 안고 있던 아기들도 아장아장 걸어 나와서 그 틈에 섞입니다. 모두들 신이 났습니다.

‘유아의 하루는 움직임의 연속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밥을 먹거나 책을 읽을 경우에도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머리 크기가 신체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신생아에서 체중의 중심이 아래로 증가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아직은 무거운 머리무게 때문에 뛰어야만 균형을 잡기가 편한 듯합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원아들이 서로 부딪쳐 엎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유아들은 얼굴이 이지러지지 않고 일어나 다시 달립니다. 더 힘차게 달립니다. 유아들은 세상의 모든 현상을 자기중심적 사고로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도 사과도 없습니다. 그곳엔 용서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천국입니다.

옛날에는 5, 6세가 되면 서당에서 천자문을 제일 먼저 배웠습니다. 천자문에 ‘전패비휴(顚沛匪虧)’라는 말이 있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져도 이지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지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얼굴이 망가지고 찡그려지는 것은 개인사일 뿐입니다.

중종 때의 김인후는 5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대보름달’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달이 높고 낮은 것은 땅의 높낮이 때문이고, 달이 일찍 뜨거나 늦게 뜨는 것은 하늘의 시간에 따름이다. 사람들은 말의 실수로 근심을 많이 한다. 그러나 대보름달은 근심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사사로이 이지러지지 않는다’고 읊었습니다.

공자는 “훌륭한 사람은 밥 먹기를 끝내는 동안이라도 어짊(仁)을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주 급한 때라도 꿋꿋이 어짊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엎어지고 자빠져도(顚沛) 용기를 잃지 말고 어짊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들의 장애물 달리기는 중간지점에서 자루를 썼다가 벗는 경기입니다. 넘어지고 쓰러졌습니다. 아버지들은 오리발을 신고 트랙을 돌았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졌습니다. 모두들 웃고 떠들고 깔깔거렸습니다. 원아들의 달리기는 농구 코트의 28m 직선을 달리는 경기였습니다. 출발신호를 듣지 못하다가 늦게 달리는가 하면, 한눈을 팔다가 뛰지 못하는 원아들도 있었습니다. 재미있고 흥이 일어나는 경기들입니다. 질서도 최상급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가 손녀에게 “오늘 무엇이 가장 재미있었어”하고 물었습니다. “몰라요”하고 손녀가 대답하였습니다. ‘과자 입으로 따먹기, 밀가루 속 엿 입으로 찾아먹기, 꼬리 자르기 놀이, 풍선 터뜨리기…. 필자의 옛날 운동회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원아들에게는 기억될 만한 운동회로 조금 부족한 듯합니다. 아무튼 엎어지고 자빠지는 순간에도 이지러지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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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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