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국운 융성에 내 여생 쏟을 작정”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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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8   |  발행일 2019-11-08 제33면   |  수정 2019-11-08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정윤근 홍익인간생명사랑회 공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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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생명사랑회 공동회장으로 있는 단산 정윤근. 그는 젊은시절 돈키호테처럼 살았지만 훗날 시인으로 변신했고 마침내 한민족 국운융성 운동가로 진화해 홍익인간 단군사상의 현대화에 매진하고 있다.

주유천하(周遊天下)를 딛고 이제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구름 속에서 놀고 있다. 더 잃을 것도 없고 더 얻을 것도 없는 칠순의 문을 갓 건넜다. 맘이 담담해지고 예전에 보이지 않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국운(國運)’이란 거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민족의 국운 말이다.

척추에 금이 가면 몸도 금이 간다. 몸이 금 가면 맘은 물론 영혼도 제 기능을 못한다. 지금 우리 국운이 그런 형국인 것 같다.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의 척추는 뭔가? 대다수에게는 ‘자본’일 것이다. 누군 ‘권력’이라 말한다. 하지만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말하는 이도 있다. 나도 그런 축에 든다. 홍익인간의 아이콘이랄 수 있는 단군의 기상과 얼, 그게 고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까지 면연했고 이제 남북한 분단시절까지 와 닿았다. 그 사이 무림도 중원도 풍류도 거의 사라진 것 같다. 남은 건 황금만능이 만든 불안한 욕망 뿐. 나는 한민족 국운을 융성하게 받드는 데 내 여생을 쏟을 작정이다.

젊은날은 불량스럽고 예측불허 세월
잡초처럼 피어나 이끌고 잡아준 독서
동양학에서 문학까지…詩人으로 변신
낭만·로망은 문학적 자산으로 영글어

예전에 보이지 않던 가치 ‘國運’발견
홍익인간 단군기상과 얼, 현대화 매진



정윤근. 지금 이름 앞에는 홍익인간생명사랑회 공동회장과 다물흥방단 사무총장이란 직함이 따라 다닌다. 전국 숱한 한민족 국운융성 관련 기관단체와 직간접으로 간여돼 있다. 음지에서 기도의 삶을 살고 있는 혜안의 어르신 안부를 챙기는 것도 내 소임이다. 어쩜 이 지면도 내겐 언감생심. 하지만 워낙 우리 국운이 안갯속인지라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돼 강호제현께 송구할 따름이다.

지금은 한민족운동가로 살고 있지만 내 젊은날은 대략난감했고 예측불허였다. 불량스럽고 불콰하고 언어도단의 나날이었다. 10대 때는 황해도 실향민인 홀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에서 살았다. 그때 장시 ‘영랑송(永郞頌)’을 지을 정도로 어린시절 난 영민했다. 독서 덕분이다. 도서관이 내 사부였다. 초등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던 1천여권의 책을 다 읽을 정도였다.

나의 20대는 부산 보수동 천변에서 잡초처럼 피어난다. 60년초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증산도 계열의 신흥종교 집단이 거기에 주거지를 만들고 신앙촌을 형성했다.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보수동 30여곳의 헌책방이 주무대였다.

동양학에서 시작된 나의 독서편력은 전자과학, 경제 쪽으로 굽이쳐 간다. 그렇게 챙겼던 책들이 5만여권. 인연에 따라 문학, 잡지, 시사 관련 3만여권은 먼저 시집을 보냈다. 현재 남아있는 책들은 2만여권. 철학사상, 예술, 과학, 의학, 동양고전류인데 강화도의 한 창고에 소장돼 있다. 이 책을 갖고 5년간 도서해제란 강의도 했다. 환단고기, 도덕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김대현의 술몽쇄언, 중국 한(漢)나라 때 왕충이 지은 사상서인 논형(論衡) 등이 내겐 일용할 양식 같은 책이다.

소싯적엔 참 몸도 재발랐다. 100m를 12.8초에 주파했다. 설악산 아래에서 중국 십팔기를 연마하기도 했다. 거침없는 나날이었고 무서울 것도 없었다. 야생의 피가 꿈틀거렸다. 항구도시 부산은 내겐 한마디로 ‘중원’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유흥가로 불리는 남포·광복·중앙동을 거점으로 무림계의 고수에게나 걸맞을 것 같은 유치찬란한 무용담을 엮어간다. 난 부산의 그 많은 술집을 수호지의 주요 배경이 되는 중국의 산둥성에 위치한 풍류 가득한 공간인 ‘양산박(梁山泊)’으로 불렀다.

뭔가에 항상 홀려 있었다. 사상가인 듯 수행자인 듯 로맨티스트인 듯,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누군 신들린 사내라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긴 머리카락과 수염, 형형한 눈빛, 도골선풍의 강파른 얼굴선. 나는 광장에선 어울리지 않았다. 언제나 골목의 선술집 술잔 앞에 앉아 있었다. 항구에는 한 주먹 하는 사내들이 많았다. 별들의 고향 음악실에서 만났던 그 많던 협객들, 그들과 부딪쳤던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 광복동 고갈비 골목의 고등어 냄새도 지금 내 누선을 자극한다.

그 많은 낭만과 로망. 점차 내 문학의 자산이 된다. 밤과 낮의 희비쌍곡선은 증발하지 않고 고스란히 원고지 안으로 틈입한다. 시란 형식으로 첫눈처럼 내려앉았다. 만약 시가 없었다면 나는 술주정뱅이, 아니 노숙인으로 삶이 마감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림과 예술계를 종횡무진했던 나를 ‘골목교’의 교주로 부르는 이도 있었다. 부산시절 삶은 한마디로 돈키호테였다. 혈연·지연·학연도 없었다. 홀로서기 시절이었다. 땅을 굳게 믿었다. 어슬프게 구름 위로 솟구치지 않았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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