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의 문화 담론] ‘액티브 시니어’‘인조이 에이징’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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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8   |  발행일 2019-11-08 제39면   |  수정 2020-09-08
노년의 건강비결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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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노인은 향후 120세까지도 살 수 있다는 생명공학계의 전망도 나오고 있다. ‘어르신 한마음 축제’에 참석한 지역 어르신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영남일보 DB>

‘삐빅세대’란 65세 이상 법정(法定) 노년층을 지칭하는 은어(隱語)라고 한다. 지하철을 탈 때 개찰구에서 주민등록증을 갖다 대면 “삐빅!” 소리와 함께 무임승차권이 발급된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 노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세태를 반영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향후 5년이 지나면 법정 노년층이 전체 인구의 20%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평균수명 연장 따른 고령화 사회 진입
하루 한가지 가벼운 일거리로 몸놀림
여행·영화·연극·미술관람 문화 생활
몸·마음 편안…건강하고 활기찬 인생
하고싶은 대로 즐기는 자기주도적 삶

디지털 세상 빠른 변화, 소외감 우려도
어르신 적응위한 ‘실버 프로젝트’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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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인 1970년대만 해도 노년층의 기대수명은 불과 62.3세였으나 지금은 82.7세로 20년 이상 늘어났다. 하지만 노후세대 어르신들은 하릴없이 고달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런 어르신들이 2018년 말 현재 전체 노년층의 52%나 된다고 한다. 보건복지부의 공식조사 결과다. 특히 기초생활 수급비로 살아가는 홀몸 어르신의 절반 정도는 아예 복지관이나 경로당에도 안 나가고 집에서 누워 지낸다고 한다.

그러나 ‘일일일사(一日一事)’라는 말이 있다. 노후세대의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다. 하루 한 가지씩 일을 하며 슬기롭게 노후를 살아가자는 뜻이 담겨 있다. 늙어갈수록, 몸이 불편할수록 움직여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쇠해도 몸은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운심(運心), 즉 100세 시대의 건강 가이드라고 했다.

밤낮없이 누워 지내는 어르신에게 편안한 이부자리를 깔아주는 것보다 하루 한가지씩 가벼운 일을 맡겨 몸을 자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면 잃었던 밥맛도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법정 노인은 향후 운이 좋으면 120세까지도 살 수 있다는 생명공학계의 전망도 나온다.

영남일보가 지난 10월2일 ‘노인의 날’을 맞아 경북도의 통계자료를 조사·분석한 결과, 도내 100세 이상 노인이 총 901명으로 집계됐다. 10년 전만 해도 기백 명에 불과하던 수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 때문인지 요즘 어르신들 사이엔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보생와사(步生臥死)’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6070 은퇴세대 어르신들은 아예 ‘노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한다. 고령화 추세가 그만큼 빨라졌다는 얘기다.

‘노인 알바’ 등 재취업의 기회도 널려 있지만 웬만하면 바깥나들이로 문화 향수를 즐긴다고 한다. 건강을 위한 노후생활의 한 패턴이다. 주로 연극·영화나 대중음악, 미술관람 등 비교적 힘 안 들이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이 높다고 했다. 가능한 한 ‘삐빅’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오간다고 한다. 이른바 ‘삐빅세대’의 건강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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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가 국민의 문화 향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지난 한해 동안 문화예술행사를 한 번 이상 관람했다고 답한 60대 이상 노년층이 64.7%, 70대 이상은 46.9%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영화 관람(75.8%)이 가장 많았고, 대중음악·연예(21.1%), 미술전시(15.3%), 연극 관람(14.4%) 순으로 나타났다. 노년층의 절반 정도가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것이다.

지난 10월5∼6일 대구 동성로 야외무대와 2·28기념중앙공원 일대에서 열린 ‘2019 대구생활문화제’때 6070 어르신들이 대거 참석해 젊은이 못지않은 이른바 ‘삐빅세대의 버스킹’(거리공연)을 창출해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대구경북에는 아직 노인전용극장이 없지만 서울 대한극장에선 해마다 ‘노인영화제’가 열릴 만큼 6070 관객들로 붐비고 있다고 한다.

이 극장에선 티켓 한 장에 팝콘과 탄산음료를 포함해 9천원을 받는 ‘반값 세트’를 제공하고 있다. 티켓 값만 1만2천원씩 하는 대형극장에 비하면 파격적인 가격이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어르신에겐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할인을 받으려면 반드시 스마트폰 앱에서 여러 번 버튼을 누르고 카드 등록과 결제를 거쳐야 한다.

이 때문에 디지털 문화에 익숙지 못한 어르신들은 대부분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경로우대를 받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비단 극장뿐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 근무제 실시 이후 편의점이나 간편식당에서도 사람 대신 무인주문대와 셀프계산대가 설치돼 있어 스마트폰 앱을 사용하지 않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했다.

밤낮없이 스마트폰 앱을 들여다 보며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는 달리 아날로그 문화에만 익숙한 어르신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카드도 없고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만질 수도 없어 수중에 현금이 있어도 제때에 밥도 못 사먹는 세상으로 변했다. 디지털 문화에서 밀려난 노년층이 상실감과 불만과 외로움이 많은 이유다.

미국의 여성심리학자 메리 파이퍼는 저서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에서 “노년엔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아가는 ‘두 어크러시(Do Ocracy)’가 적기”라고 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인조이 에이징(Enjoy Aging)이다. 일본의 노인들은 이에 화답하듯 스스로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의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는 해를 부정하며 품위를 지키려는 안티 에이징(Anti Aging)보다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라며 언제나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노후를 즐기는 것이 건강한 워라밸이라고 했다. 일본은 노인 복지를 위한 국가정책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죽어라고 지갑만 열던 일본의 노후세대도 이제 지갑 대신 스마트폰 앱부터 갖다 댈 만큼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일본에 비해 한참 뒤처진 우리나라는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비전이나 정책도 별반 없이 첨단시대를 뒤따라가기에만 급급하다. 정녕 고령화 시대에 대처할 요량이라면 삐빅세대에게 인생 이모작을 열어주기 위한 국가정책으로 ‘디지털 실버 프로젝트’를 서둘러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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