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피플] ‘빈자의 미학’ 건축철학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

  • 김수영,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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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9 08:18  |  수정 2019-11-09 08:18  |  발행일 2019-11-09 제22면
“건축도 신학처럼 인간의 삶 다뤄…좋게도 나쁘게도 할 수 있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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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이 그의 건축사무소 이로재에서 국가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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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하양 무학로교회. 이지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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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안의 솔거미술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제공)

건축가 승효상(67) 하면 많은 이들이 ‘빈자의 미학’을 떠올린다. 경제력이 최고의 미덕이 된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눈을 돌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는 빈자의 미학이란 건축철학을 통해 건축으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오스트리아 유학 당시 알게된 건축가 아돌프 로스를 보면서 ‘건축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는 그는 좋은 건축으로 좀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고 싶어한다.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이기도 한 그가 부동산 투기 바람에 휩쓸린 한국의 주거문화를 새롭게 탄생시킬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드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홀로서기 고민하다 우연히 본 달동네
건축적 요소 조화에 빈자의 미학 느껴
‘절제·검박’ 건축철학 갖고 집 설계해

우리나라 건축정책 양적 공급에 초점
사람사는 집이 부동산투기 대상이 돼
아파트, 소통없이 모여사는 주거형태
가족·이웃간 공동체 사라지게 만들어

행복한 삶 위해 죽음·영성 관심 가져야
설계 건축물 연계한 순례코스 개발 중

▶어떻게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됐는지요.

“부모님이 이북에서 월남했습니다. 부산의 피란민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선친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사춘기 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교회를 다닌다며 반항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종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지요.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하지만 장남이라 부모님의 반대가 컸고 누님의 권유로 건축과를 진학했습니다.”

▶건축을 공부해보니 신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건축과 신학 모두 인간의 삶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건축가는 다른 사람의 삶을 설계해주는 작업이지요. 설계에 따라 사람의 삶을 좋게도, 나쁘게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설계가 두려웠습니다. 설계가 사람의 생명에 관여하고 가치·인생을 바꾸게도 하지요. 성직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건축의 1세대인 김수근 선생의 문하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한국건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김수근 선생이지요. 그 분 밑에서 15년간 일하면서 건축가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철저히 배웠습니다. 김수근 선생이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 1986년 그 분이 운영하던 ‘공간’이란 설계사무소를 맡았습니다. 빚 30억원도 같이 넘어왔지요. 3년간 부채를 좀 해결하고 숨 돌릴 틈이 나자 제 설계사무소 ‘이로재’(서울 종로구 동숭동)를 열었습니다.”

▶이로재를 연 뒤 자신만의 건축을 찾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셨는데요.

“김수근 선생의 그늘에 있다가 홀로서기를 하면서 저를 찾아내는 작업이었지요.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하고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달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피란민촌과 비슷했고 모든 건축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 즉 빈자의 미학을 알게 됐습니다.”

▶빈자의 미학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지요.

“빈자를 가난한 사람보다는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해석하고 싶습니다. 부는 있으나 절제하는 방법을 알고 검박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조선의 선비가 추구했던 삶의 방식입니다. 건축사무소의 이름인 이로재와도 딱 들어맞지요. 한자로 밟을 이(履), 이슬 로(露)를 사용한 이로재는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이란 뜻이거든요. 이런 철학을 갖고 집을 설계합니다.”

▶건축가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요.

“유명한 건축가가 되기는 쉽습니다. 이상하게 집을 지으면 단박에 이름을 날리게 되지요. 하지만 좋은 건축가가 되기는 힘듭니다. 우선 거주자의 삶을 알고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다 건물을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거주자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바탕으로 인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있어야 좋은 건축을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단순한 기술이나 예쁘게 짓는 예술이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인문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완성되는 것 입니다.”

▶현재 한국의 건축방식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듯합니다.

“그동안 국가건축정책이 주택정책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주택정책은 물량, 즉 양적 공급에 초점을 둔 정책입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 사는 집이 경제적 부의 상징이 되고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되었지요. 이는 건설·개발업체가 중심이 된 공급자 위주의 주택정책 때문입니다. 이제는 거주자를 중심에 두고 그들의 삶에 시선을 맞춘 주거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단순히 밀집해 사는 곳이 아니라 소통하며 사는 공동체적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주거방식이 과거에 비해 퇴보했다고 하셨는데요.

“예전에 비해 너무 편리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능적인 집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삶이 피폐해진 공간으로 전락했습니다. 거실에서 리모컨 하나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집은 가족간의 소통을 단절하고 삶의 체취도 사라지게 합니다. 지속가능한 삶은 건강한 가족공동체를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의 불편한 집이 더 좋은 집이라 할 수 있지요. 현재의 집은 가족·이웃간의 공동체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허물고 새로 짓는 집보다는 고치는 집에 가치를 두셨는데요.

“오래된 집의 기억을 허물고 새로 짓는 집은 기억을 상실한 집입니다. 내가 온 곳, 나의 정체성을 모르는 집이지요. 오래된 집을 고쳐서 사용하면 기억을 유지하면서 바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입니다.”

▶최근 아파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아파트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의 아파트는 공동주거가 아닌 집합주거 형태입니다. 소통 없이 단순히 모여사는 형태이지요. 아파트가 많아지면서 임대아파트를 불가촉천민처럼 취급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이 섞여 사는 소셜믹스가 되어야 건강한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주택문제의 해결책이 있는지요.

“우리나라는 그동안 가난에서 벗어나 잘사는데만 초점을 두고 살아왔습니다. 그렇다 보니 집이 투기 대상이 되고 경제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지요. 국민의 인식전환이 절실합니다. 행복한 삶에 목적을 둬야 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죽음, 영성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외국에는 도심에 무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도심에 집만 있고 무덤은 모두 외곽지로 쫓겨났습니다. 무덤은 죽은 사람의 공간이 아닙니다. 영성의 공간, 경건한 공간입니다. 이런 공간이 도심에서 사라지고 번잡한 공간만이 남게 되었지요.”

▶낙동강 힐링·영성코스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압니다.

“군위에 있는 50만평의 수목원 안에 ‘사유원’이라는 명상관련 건축물을 10년째 짓고 있습니다. 곧 완성됩니다. 여기를 시작으로 하양 무학로교회, 포항 청하공소, 밀양 명례성지, 봉하 노무현묘역, 양산 통도사, 부산 구덕교회를 잇는 코스입니다. 통도사를 제외하고 모두 제가 설계한 곳입니다. 건축한지 30년된 해를 기념해 지난 6월 수도원 순례기를 담은 ‘묵상’이란 책을 내고 독자들과 함께 이들 중 몇 곳을 순례했을때 반응이 좋아 생각해낸 것 입니다. 죽음·영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건축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건축가는 지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인은 경계 밖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 밖으로 내쫓아 경계안을 바라보고 비판해야 합니다. 경계 밖은 춥고 배가 고픕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식인의 삶입니다. 건축가도 마찬가지지요. 남의 집을 짓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화, 타자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수영 논설위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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