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화, 넘자! 삶과 죽음] 흰 옷을 입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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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9   |  발행일 2019-11-09 제22면   |  수정 201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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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뚜레뜨 수도원에 걸려있던 흰색의 가운. 인간사의 슬픔과 처연함을 대신 입어주는 사람들의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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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장면을 지나칠 수 없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두 벌의 가운이 내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 이 곳,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프랑스 리옹의 라뚜레뜨 수도원과 성당에는 전 세계 무수한 사람이 다녀갔을 것이다. 조금만 검색해도 회화보다 더 회화적인 사진이 널려있다. 이 건물의 아름다움은 종교건축이 가지는 신성함을 단지 콘크리트와 철만 사용하여 더 깊은 감동을 만든 설계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성당의 빛과 벽, 거대한 문, 가늘고 긴 창, 오묘한 느낌을 주는 기둥, 마치 악보처럼 리듬이 느껴지는 창살 등을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처음엔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학생이 아닌 건축가로서 다시 찾은 이 곳은 설계한 이에 대한 존경과 동시에 체념도 주었음을 인정하게 했다. 그래서 좀 더 담담한 마음으로 건축의 위대함과 그보다 더 위대한 자연의 시간과 빛과 생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투숙객이 아니면 이 건물의 내부를 볼 수 없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날, 그 곳 숙박객은 열다섯 명 남짓이었고, 거대한 수도원 안에서 적막과 공허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나에겐 건물 사진을 찍고 시공 기술을 살피는 시간보다, 홀로 산책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더 좋았다. 특히 저녁 기도 시간에 나를 둘러쌌던 신부님과 사제 세 명의 목소리는 아직도 잔향으로 남아있다. 컴컴하고 눅눅한 입방체 성당 공간은, 하얀 옷을 입은 신부님과 수도사 세 사람의 목소리만 공명을 거듭 만들어냈고, 적막과 검박함과 신비로움은 나를 완전히 감싸버렸다. 건축은 분명 경이로웠지만, 적막과 반향은 나에게 겸손과 침묵을 알게 해 주었다.

빵과 샐러드와 야채 튀김 그리고 포도주만 제공되는 간소한 저녁 식사 후, 우연히 만난 여행객들과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늙음과 여행과 우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찍 눈이 떠진 다음 날, 수도원 안팎을 홀로 산책하다 어젯밤 사제들이 입고 있었던 이 옷 앞에 맞닥뜨린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눈부셨던 그들의 옷은 사실, 장식도 없고 잘 다려지지도 않았던 평범한 가운에 불과했다. 화려한 건축술과 역사를 자랑하는 서양의 종교건축을 많이 봤고 기교와 정성이 가득한 신부님의 의복에도 경탄했지만, 여느 인간의 뒷모습처럼 축 처져 걸려있는 두 벌의 옷에 나는 더 숙연했다. 체크아웃을 위해 열쇠를 돌려주려 다시 찾은 안내데스크에서 푸른 셔츠를 입고 서류를 챙기던 이가 어젯밤 하얀 옷의 주인이었음을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횐 옷을 입은 사람들. 인간사의 슬픔과 처연함을 대신 입어주는 사람들. 김현진<SPLK 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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