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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펭수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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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뉴스부기자
  • 201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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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회사에 내년 계획부터 워크숍까지 할 일이 넘쳐난다. 중간관리자는 시키는 위치와 시킴을 당하는 위치, 그 어중간한 자리에 있다. 윗사람 앞에선 머리 조아리고 아랫사람에게는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한국적 조직문화의 생리라지만, 적어도 나만은 그런 이중성을 벗어나려 딴에는 애를 썼다. 물론 주변에선 ‘너도 매 한가지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인기있는 펭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남극에서 헤엄쳐 온 EBS 연습생 펭수. 키 210㎝. 잘 부르는 노래는 요들송. 좋아하는 간식은 빠다코코넛. 툭하면 EBS 사장 이름을 들먹이며 비싼 참치를 사달라 한다. 말투는 살짝 버릇 없다. EBS에 막 들어온 주제에 KBS로 가겠다 하지 않나, “잔소리하지 마라. 알아서 하겠다”고 대놓고 말한다. B급 마케팅에 병맛 감성을 지닌 이 펭수가 20~30대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이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꼰대 세대에 눌린 20~30대 직장인의 대리만족 혹은 탈출구라고 한다. 우리 회사 젊은 직원도 펭수가 미치게 좋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한다. 물론 나를 좋다 한 적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말이다, 나도 펭수가 좋다. 나도 펭수처럼 거칠 것 없이 “어이 사장님, 월급 많이 주세요”라고 툭 던지고 싶다. 높은 사람들 모인 행사장에서 “건배사 그만하시라” 외치고 싶다. 그런데 차마 그러지 못한다. 나이 들고 눈칫밥이 는 탓일까. 세상 돌아가는 꼴을 좀 보게 되면 위계와 권력, 체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씁쓸한 마음 때문인지 나의 늠름했던 펭수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이런 옛이야기조차 ‘내 때는 말이야’식 훈계질이 될까 조심스럽다. 이러면서 굳이 말하는 게 우리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방송국 생활을 할 때였다. 방송사고를 내고 제주도로 줄행랑을 쳐서는 돌담길 모서리에서 서러운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다. ‘내 자리는 이제 없다’ 생각하고 육지로 기어 올라오니 선배 PD가 개편 중에도 나를 기다려줬다. 요즘 같으면 코를 땅에 박고 고맙다고 연신 조아렸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선배가 봐주는 게 당연한 거 아냐?”라며 자판기 커피 하나, 그것도 내 것만 뽑아 들고 편집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완전 재수 없는 싹퉁바가지였다. 이런 나도 변하니, 청춘들도 지레 변하지는 마시라. 그리고 지금 생각해봐도 선배가 봐주는 게 맞다. 좀 실수하고 저질러도 감당은 선배가 해야 한다. 요즘 어린 직원들에게 위계를 강조하면서 “잘 봐, 실수하면 안 돼, 나처럼 잘해야 돼”라고 윽박지르고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된다.

난 요즘 맹랑 순수한 청춘들 앞에서 안색하나 변하지 않는 연습을 하려 한다. 할 말은 하고 머리 조아리지 않는 펭수님들을 보며 나도 기운을 내고 싶다 말이다. 그러니 펭수야, 대구 한번 와라. 참치보다 맛있는 막창 쏜다.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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