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조선의 손실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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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5   |  발행일 2019-11-15 제39면   |  수정 2020-09-08
전통美 살리지 못한 자수교육…‘삭아가는 꽃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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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씨가 소장했던 19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십장생(十長生) 8폭자 수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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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개설돼 1979년 폐과된 이화여대 미술대학 자수과 69학번 학생들이 자수 실기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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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자수과 학생들의 작품전을 관계자들이 둘러보고 있다.

간밤 잦은 빗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나선 마당에 아직 젖은 낙엽들이 꽃수를 놓아 두었다. 하얀 자동차위에 놓인 선명한 낙엽 꽃수는 그 잔잔하고 고운색에 이끌려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박물관의 아름다운 꽃수들이 이 아침만큼은 그 아름다움을 저 낙엽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겠다. 자수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자주 우리 자수의 계승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상에 묻혀서 그때뿐이었고 또 체계적으로 생각해볼 자료를 갖고 있지도 못했다.

조선인 고등여학교 일본풍 자수 교육
1919년 日 신문에 실린 일본인의 기고
사라져가는 조선의 美 안타까움 토로

일제 교육 의해 고유한 아름다움 상실
광복후에도 전통자수 계승·발전 답보
색채·선·도안 전통美 지키는 노력 필요


그러던 중 우연히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전(展)’ 도록을 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19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십장생(十長生) 8곡병(曲屛) 한 틀이 실려 있었다. 물론 그 작품은 야나기씨의 수집품 중 하나였다. 그 도판 에 대한 해설문을 읽고 부끄럽고 고마운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느 날 서울에서 이조(李朝) 초기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오래된 우수한 자수(刺繡)를 구했다. 그곳은 분명 명(明)나라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이면서도, 그 색채에 있어서나 선에 있어서나 도안에 있어서나 옛 조선의 미를 이야기하는 데 충분한 작품이었다. 그것을 구한 날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안내를 받고 조선인의 고등여학교를 참관(參觀)했다. 학생들의 제작품을 많이 보았지만, 마침 벽에 걸려 있는 대작의 자수를 보았을 때, 나는 기이한 감격을 느꼈다. 그것은 어디에도 조선의 고유의 미를 인정할 수 없는 현대 일본풍(日本風)의 작품 - 즉 거의 서양화된 취미도 없고 기품도 없는 우둔한 도안과 얕은 색채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잘 교육된 경탄할 만한 수공(手工)을 나타내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옛날의 자수를 생각해 내어 잘못된 교육의 죄를 생각하고, 이러한 교육을 강요받아 고유의 미를 상실해 가는 조선의 손실을 슬프게 생각했다.”-조선인(朝鮮人)을 생각한다. 이대원 역. 지식산업사. 1974년.

이 글은 야나기씨가 1919년 5월11일에 썼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실렸으며,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에까지 게재되었던 유명한 글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글에는 거칠기는 하지만 우리의 전통자수에 대한 회고와 전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자료상의 큰 오류도 발견된다. 우선 ‘이조 초기 작품’이니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사실 이 자수 병풍은 우리의 고유한 궁중 자수이며 그 제작 시기는 조선 후기로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가 있음에도 여전히 감동적인 것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사실적인 상황 묘사와 그에 대한 의미부여 때문이다.

이 글에서 가장 감동적인 내용은 ‘잘못된 교육의 죄를 생각하고, 이러한 교육을 강요받아 고유의 미를 상실해가는 조선의 손실을 슬프게 생각했다’였다. 양심적인 일본인만으로는 이러한 글을 쓸 수 없다. 분명 그는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미’에 대한 대단한 감식력을 지녔던 이라는 것이다.

광복 전의 우리 자수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역시 야나기씨의 고백처럼 일본 교육을 받은 이들이 식민지 시대에 우리 자수교육을 담당했다. 그 시기에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자수과에 한국여성들이 유학하고 돌아와 활동했다. 그 첫 졸업생은 박찬희(1920년)로부터 광복 직전인 1944년까지 총 150명이나 되었다.

그렇다면 광복 이후의 우리 자수 교육은 어떠했을까.

어렵게 1979년도에 졸업한 이화여대 미술대학 앨범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이사장은 서인숙 박사, 총장은 김옥길 박사, 미술대학장은 이유태 교수였다. 이유태 교수는 호를 현초(玄草)라고 했는데 우리가 매일 만나는 천원권 화폐의 도안 인물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그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데 앨범 안에 자수과가 있었고 김혜경 교수(학과장), 이영숙 교수, 엄정윤 교수, 임홍순 교수와 배출한 28명의 졸업생 사진과 개인 작품 한 점씩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이화여대에 자수과가 있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기 어려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79년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수과는 1947년 9월에 개설된 이후 많은 자수인을 배출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의 스물두살 연하의 부인인 박인경 역시 자수과에 입학해 동양화과로 전과했다. 그녀가 자수과를 택한 것은 “수 잘 놓으면 시집 잘 간다”는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난 10월24일부터 서울 강북구 소재 박을복 자수박물관에서는 엄정윤(93) 전(展)이 열리고 있는데, 그는 이화여대 자수과 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 엄 교수는 1956년 이화여대 의류직물과 전임강사를 거쳐 1992년 섬유예술과 교수로 정년퇴임하기까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국내외 다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앨범을 통해 1973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자수과 학생들의 졸업 작품을 보면서 야나기씨가 느꼈을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교육 받은 대로 열심히 수놓았을 그 작품들의 흑백 사진을 보면서 필자 역시 시공을 초월해 ‘고유의 미를 상실해 가는 조선의 손실’을 다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다른 분야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최고의 성취를 거둔 바가 적지 않다. 그런데 유독 우리의 전통자수 분야는 그 계승과 발전에 있어서 모두 퇴보 또는 답보를 거듭하고 있지는 않는지 안타까운 심정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들이 우리 자수의 고유한 아름다움 또는 가치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자수를 아끼고 좋아했으며 그 제작에도 참여했다. 지금도 한 땀 한 땀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자수인들에 대한 격려와 자긍심을 갖도록 할 수 있는 국가적 진흥책(振興策)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중국 및 동남아로부터 수입한 작품을 우리 것으로 바꾸어 전시 또는 유통을 하는 문제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해외에서 전시된 우리의 전통 자수 작품에 대한 검찰 조사까지 받았을 정도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유아 및 초등교육과 대학교육과정 중에서도 단계에 맞는 바느질 교육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외국인의 눈에도 보이는 ‘조선의 손실’을 깨닫고 우리의 문화를 계승해 가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잠깐 바람이 불면 낙엽들이 놓은 꽃수들이 사라지는 것이나 우리의 아름다운 꽃수들이 나날이 삭아가는 것은 어쩌면 같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더 늦기전에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을 간추려 챙기는 일이 지금 이 시대 지식인들의 사명이 아닐까.

박물관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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