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유리의 공예 담화(談話)] 슬로 라이프 (Slow Life)

  • 임성수
  • |
  • 입력 2019-11-15   |  발행일 2019-11-15 제40면   |  수정 2020-09-08
정성다해 만드는 과정 안에서 빛나는 가치 ‘수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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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차의 핀란드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 ‘슬로 라이프’가 들어간 제목의 책을 한 권 썼다. ‘슬로’는 ‘느린’으로 직역될 수 있기에, 나는 종종 느린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다.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들 때나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혹은 관련 업무를 할 때 천천히 미리 준비하고, 과정에 충실하려 노력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냉철하기에, 느림을 ‘유유자적’ ‘빈둥빈둥’ 혹은 ‘게으른’으로 오해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오히려 나는 꽤 빠른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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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내용이 담긴 철학자 매튜 크로퍼드의 저서 ‘The World Beyond Your Head’.

"건강한 음식·생활 ‘슬로 푸드·라이프’
느림이라는 의미보다 내적인 충실함
소소한 기쁨·만족감 가장 중요한 본질

시간에 쫓겨 충실하지 못한 공예 작업
실패한 결과 인해 더 많은 시간 허비
현대사회 집중력 실현 숙련된 손기술
삶을 통제할수 있는 능력·지혜 터득"


속도를 늦추는 것만이 슬로 라이프의 핵심이라는 편견처럼, 공예 역시 느림의 미학을 대변하는 감성적 용어로 포장되고는 한다. 물론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체해 대량 생산화된 것에 주목하면 기계는 빠름의 상징이고, 반대로 수작업은 느림의 상징이기 때문에 슬로 라이프와 공예가 공유하는 DNA는 속도의 문제도 분명 포함한다.

내가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빨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천천히 해!’이다. ‘쓰으윽 싹, 쓰으윽 싹’해야 하는 점잖은 톱질 소리가 ‘쓱싹, 쓱싹, 쓱싹’하는 다소 가볍고 요망스러운 소리로 들리면, 톱을 내릴 때 절단되는 금속 판재의 커팅의 정확도가 불안할 수 있으며, (어차피 톱날을 올릴 때는 절단되지 않으니)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힘을 주었다는 신호다. 느림을 상실한 시대에, 나는 학생들에게 ‘천천히’를 강조하며,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단계별 과정에서 충실해야 하는 것이 그 조건이다.

과정에 충실하란 의미는 정확성과 연결되고, 그것은 결과물의 완성도에 진실하게 나타난다. 공예 작업은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줄질과 사포질로 수평을 맞추어 땜을 해야 하는 금속공예의 한 과정에서, 작은 틈을 보고도 무리하게 그 틈을 땜으로 메우려다 보면 틈이 녹아 더 커지거나 금속판이 틀어지기도 하며, 과도하게 퍼진 땜을 갈아내느라 나중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과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그 충실하지 못했던 과정으로 인하여 더욱 악화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섭리에 공예가 존재한다. 디자인을 구상하고 재료를 선정하고, 가공하고 연마하는 등 각각의 공정에서 공예가는 어느 과정 하나도 간과할 수 없다.

‘슬로 라이프’의 아이디어는 패스트푸드 소비문화에 대한 반감과 회의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슬로푸드 운동에서는 단지 건강한 음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의미있는 관계 형성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슬로 라이프의 개념을 시간적 빈곤을 탓하며, 단순히 빠름에 역행하여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으로만 해석하고 초점을 맞추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슬로 라이프의 핵심은 과정 안에서 본질적 의미를 찾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며, 정신적으로 보다 풍요로운 활동과 내적 가치를 탐색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삶의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시간이 다소 더 걸린다 하여도, 혹은 잠시 시간을 잊는다 하여도, 시간이나 속도에 얽매이거나 그것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슬로 라이프에 대한 개념에서 내가 생각하는 ‘슬로’의 해석이다.

몇 년째 방송 예능프로그램 ‘삼시 세끼’의 자급자족 라이프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도시의 삶보다 소도시나 전원의 삶이 자신의 삶에 오롯이 집중하기 좋기 때문에, 도시의 편리함을 뒤로하고 보다 단순해진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보다 단순해진 삶의 선택으로 여유를 갖게 된다. 그 여유는 집중과 선택으로 인하여 생긴 선물이며, 이로 인해 본질적인 시간의 사용 방식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소한 일상적 기쁨과 만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된다. 나는 이러한 삶의 양식을 ‘슬로 라이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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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가치 유무와 상관없이 무수한 정보들은 제공받는다. 또한 광고, 전화, 인터넷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에 노출되어 있으며 쉽게 주의를 잃는다. 철학자 매튜 크로퍼드(Matthew B. Crawford)는 그의 저서 ‘The World Beyond Your Head’에서 현대인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요소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한 곳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숙련된 ‘손기술’이 자신만의 삶의 중요한 가치에 초점을 맞춰 그 선택을 좁혀 정리하며, 방해물 없는 고도의 구조화된 패턴의 집중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무언가를 직접 만지는 공예의 촉지(觸知)적인 요소들이 가상현실과 같은 비현실성에 대한 막연한 감각, 줄어든 자주성, 분열된 자아감의 치유가 되며 즐거운 육체적 몰입이 주는 위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만드는 행위가 스마트폰이나 가상현실 등의 비실제적인 경험들에 둘러싸인 세계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고, ‘진짜’를 되찾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현대인의 삶을 기술의 발전이 준 마냥의 축복으로만 볼 수 있을까. 중요한 삶의 가치에 대한 선택의 자율권이 부재된 ‘산만’한 현대인에게 만드는 행위는 자립의 수단이자, 정신적으로 삶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또한 관계없는 정보는 완충되게 하며, 무의미한 행동은 사라지게 한다. 즉, 선택은 심플해지고 이를 위한 추진력은 향상된다. 크로퍼드는 손을 사용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를 통하여 일종의 ‘집중(Attention)’할 수 있는 구조의 생태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유의미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슬로 라이프와 공예와의 연관성에 대입하자면, 공예가 슬로 라이프를 대변할 수 있는 속성을 내재한 이유는 수작업의 본질적 속성이 기계에 보다 ‘느림’을 대변하고, 빠름의 시대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그 역행의 성격에만 매료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공예가 슬로 라이프를 대변할 수 있는 속성을 내재한 진정한 이유는, 만드는 행위가 현대인에게 주는 ‘힘’과 ‘가치’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슬로 라이프를 실현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집중’과 ‘선택’이다.

계명대 공예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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