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2.0] 한국영화 100년을 빛낸 영화감독 - ⑧ 장준환

  • 임성수
  • |
  • 입력 2019-11-15   |  발행일 2019-11-15 제43면   |  수정 2020-09-08
타고난 천재성으로 노는 듯 일하는 감독…가장 기발하고 독창적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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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한창 봉준호 감독이 주목받던 2003년 5월, 제작자 차승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봉 감독과 장준환 감독을 비교해서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봉준호 감독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봉 감독이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라면 장준환 감독은 모차르트다. 봉 감독이 꼼꼼히 준비하고 노력하는 반면, 장 감독은 타고난 천재성으로 노는 듯 일한다. 스타일의 차이지 우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장준환은 봉준호와 함께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이면서 재학 당시 만든 단편영화들이 해외 영화제에서 똑같이 주목 받았고, 차승재가 이끄는 제작사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조연출을 맡으며 현장 경험을 쌓아 데뷔작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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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2003)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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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2013)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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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017)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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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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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이매진’(1994)은 장준환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로 배우 박희순이 맡은 주인공은 자신이 저 유명한 존 레넌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존 레넌이 사망한 날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의 음악성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다 요코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는 떠나고 누군가가 자신을 존 레넌처럼 죽이려 한다는 과대망상에 시달린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요코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자상한 분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버지는 실은 알코올중독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이로 나온다. 장준환이 연출하고 봉준호가 촬영한 이 소품의 세계관은 그대로 장편 데뷔작으로 이어진다.

‘지구를 지켜라!’(2003)의 주인공 병구(신하균 분)는 안드로메다 PK-45 행성의 왕자를 개기월식까지 만나지 못하면 지구가 곧 위험에 닥칠 거라고 믿고 자신의 여자친구 순이(황정민 분)와 함께 왕자를 만나게 해 줄 최고책임자인 경찰청장의 사위이자 유제화학의 사장 강만식(백윤식 분)을 납치해 자신의 집 지하에 가둔 후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가한다. 그러던 중 강 사장에 의해 병구가 유제화학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사실과 근무 중 병구의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고 그의 애인은 사망한 사실이 각각 밝혀진다. 영화 초반과 중반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계속 병구는 정신이상과 과대망상 환자로 보이지만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망상으로 보이던 병구의 모든 얘기들이 결국 사실로 밝혀진다. 그러나 개기월식이 시작되던 날 강 사장에 의해 병구와 순이는 모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외계인들에 의해 지구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할리우드산 SF 영화에서도 단 한 번 행해지지 않았던 지구라는 행성 자체의 소멸).


봉준호와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
단편‘이매진’세계관, 장편 데뷔작 연결
뭔가 어설프고 황당한 ‘지구를 지켜라’
국내외 잇단 호평…16년이 지나도 화제
10년 걸린 복귀작 ‘화이’진실성에 어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흥행몰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 병구가 외계인을 무찌르고 지구를 지킨다고 하는데 뭔가 영 어설프다. 외계인의 텔레파시를 차단해 준다는 모자하며 강 사장을 묶어놓은 고문의자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 없다. 멀쩡한 사람 붙잡아다 외계인이라 하질 않나,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갖은 고문에 게다가 심한 우울증이나 화병에 쓰인다는 약까지 장기간 다량으로 복용하고 있다니 지켜보는 관객들은 이 병구에게 도무지 정이란 게 안 간다. 주인공으로 폼도 나질 않고. 오직 이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병구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이는 감독 장준환뿐이다.

그는 관객뿐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누구도 진심으로 거들떠보지 않는 병구를 일으켜 세우고 세심한 손길로 보듬으며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들을 하나하나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멀쩡한 사람 데려다 차마 눈뜨고 못 볼 온갖 고문을 가하는 일은 나쁜 거 아니냐고. 나 역시 병구가 행하는 폭력이 옳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그네들을 한번이라도 진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냐고. 그래서 그들이 어떤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지 알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느냐고. 그네들을 진심으로 이해한 후에나 나눌 수 있는 애정을 나눠본 적이 있었느냐고. 그랬다면, 정말 누구 하나라도 그렇게 했다면 그네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2003년 ‘지구를 지켜라!’에 쏟아진 호평은 국내뿐이 아니었다. 제40회 대종상영화제와 제24회 청룡영화상, 제2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신인감독상을 모두 휩쓴 데 이어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작품상을 시작으로 제25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제6회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독립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황정민)과 촬영상(홍경표)을, 제22회 브뤼셀판타스틱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최근에는 영화 ‘유전’으로 잘 알려진 아리 에스터 감독이 연출한 ‘미드소마’가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로 ‘지구를 지켜라!’를 꼽기도 하는 등 개봉한 지 1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화제가 된 바 있다.

‘화이’(2013)는 이런 평단과 국내외 영화제들의 찬사에도 데뷔작의 흥행 참패와 차기작으로 준비하던 작품들이 여럿 엎어지면서 무려 10년이 걸린 장준환의 복귀작이었다. 5명의 범죄자 아버지를 둔 소년 화이(여진구 분)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범죄 집단의 냉혹한 리더 석태(김윤석 분)가 어떤 사건으로 끝을 향해 치닫는 갈등과 복수를 그린 영화로, 장준환은 자신이 드라마의 힘이나 진실성을 더 중요하게 파고든 감독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1987’(2017)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밀도 높은 연출로 그렸다. 2017년 광장에 모였던 촛불과 맞물리며 723만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지구를 지켜라!’ 관객 수의 100배였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만약 ‘지구를 지켜라!’가 흥행에 성공했다면 이후 장준환은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고. 모르긴 해도 ‘화이’와 ‘1987’이 차기작은 아니었을 것이다(물론 두 영화는 재론의 여지없는 훌륭한 영화다). 나는 여전히 장준환이 만든 미완의 프로젝트 ‘파트맨’이 보고 싶다.

독립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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