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제르맹, 평범하지만 깊은 인간 내면을 탐색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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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6   |  발행일 2019-11-16 제16면   |  수정 2019-11-16
프랑스의 한 가족과 인연 맺게 된 남자
68혁명 전후 배경‘가족’둘러싼 이야기
와인 애호가가 와인의 역사를 탐구하듯
제르맹만의 시선으로 미시적 인간에 집중
실비 제르맹, 평범하지만 깊은 인간 내면을 탐색
실비 제르맹의 소설 ‘숨겨진 삶’은 와인 애호가가 한잔의 와인을 탐색하며 마시듯, 인간의 역사를 탐색한다.
실비 제르맹, 평범하지만 깊은 인간 내면을 탐색
숨겨진 삶//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문학동네/ 296쪽/ 1만4천500원

우리 눈앞에 ‘와인’ 한 병이 있다고 치자. 와인에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은 ‘레드 와인이군’ ‘화이트 와인이군’ 정도만 생각할 것이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느 나라 와인인지, 몇년산인지’ 정도를 생각한다.

와인 애호가라면 ‘캘리포니아 피노누아군. 부르고뉴 피노누아와는 뭐가 다를까’를 생각한다. 정말 와인에 애정이 깊은 사람은 여기서 몇단계 더 들어간다. ‘이 예민한 품종은 어떤 땅에서 얼마나 햇빛을 받고 자라, 얼마짜리 오크통에 보관돼 있다가 와인이 됐을까’ 와인의 가장 깊은 역사까지 탐색한다. 와인을 바라보는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와인의 수명은 딱 와인병 한 병의 크기만큼이다. 마셔버리면 끝이다. 세상에는 와인이 넘쳐나니 와인 한 병의 역사에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와인의 역사를 탐색해 어쩌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에 대해 존재의 이유와 가치, 매력을 부여한다.

문학동네에서 최근 펴낸 실비 제르맹의 ‘숨겨진 삶’은 그 ‘마지막 단계’의 시선으로 인간을 탐색하는 소설이다.

소설은 세상에 널린 수많은 와인을 그냥 뭉뚱그려 보지 않고, 한 병 한 병 그 깊은 역사를 탐색하듯 인간에 대해 탐색하며 쓰고 있다. 인간 저마다 지니고 있는 가장 아프고 내밀한 비밀까지도.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프랑스 68혁명 전후다. 주요 등장인물은 프랑스의 한 평범한 가족(베랭스가)과 우연히 그 가족과 인연을 맺게 된 한 남성이다.

젊은 나이에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이 넷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빈, 그의 죽은 남편 조르주, 사빈의 딸 마리, 사빈의 시아버지 샤를람과 그의 여동생 에디트, 사빈과 함께 일을 하게 된 의문의 남성 피에르, 피에르의 어머니인 셀레스트 등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르주가 죽는 과정과 피에르와 그의 어머니의 사연 등을 제외하고는 어찌보면 대단할 것 없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줄거리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집집마다 조금씩 사연없는 집이 없을 테니 말이다. 대부분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평범한 삶으로 일반화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다른 점은 실비 제르맹의 특별한 시선과 서술 방식에 있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골라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다.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명인 실비 제르맹은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프라하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전공이 철학이기 때문일까. 실비 제르맹의 이 소설은 ‘프랑스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이 만났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한 가족’이라는 협소한 배경 안에서 우주처럼 깊은 심연의 역사를 끄집어내 서술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일까. 옮긴이는 이 책에 대해 ‘탐색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라고 표현했다.

또 글의 표현이 무척이나 섬세한 것은 프랑스적인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이다. “공간보다 시간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할까. 일련의 그릇된 동작의 무미건조한 반복이며 도주, 결국은 정체에 불과한 방황이다.” 무기력한 방랑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했다.

“어쨌거나 세상에서 별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건 행운인지 모른다. 너무 눈에 띄지도,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홀가분히 지낼 수 있다면, 그래서 환멸과 상처에도 덜 노출된다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제 갈 길을 갈 수 있겠지. 단조롭긴 해도 평화로운 길임이 틀림없다.” 사빈이 찬란하게 매력적이었지만 일찍 죽은 자신의 남편을 떠올릴 때의 표현이다.

책을 읽다보면 처음 프랑스 코스 요리를 접했을 때 만큼이나 당혹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차근차근 인간의 미시사(微視史)에 집중하다 보면, 예상 밖의 매력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와 내 주변인들에 대해 새로 자각하게 될 것이다. 평범한 우리 모두가 우주같은 심연을 지닌 귀하고 슬픈 존재임을.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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