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市 승격 70년, 포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다 .5] 호국정신의 고장 <下> 6·25전쟁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보루(2)

  • 박종진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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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8   |  발행일 2019-11-18 제13면   |  수정 2019-11-18
포항전투서 敵 1만5천343명 사살…북한군 총공세 물리치고 대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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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남구 해도 근린공원에는 6·25전쟁 당시 국군 제3사단의 ‘형산강 도하작전’에서 활약한 고 연재근 상사와 특공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제3사단 예하 3개 연대는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도하에 성공한 뒤 포항을 재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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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용흥공원 입구에 위치한 포항지구전적비. 1950년 8월9일부터 44일에 걸쳐 북한의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전세 변화의 기초를 마련한 포항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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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산화한 포항지역 학도의용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전몰학도의용군 추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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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근린공원에 세워진 6·25 참전유공자 명예선양비.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과 포항 출신 호국 영웅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1만5천343명 사살, 3천722명 생포. 6·25전쟁 당시 포항전투(8월9일~9월22일)에서 한·미 연합군이 올린 혁혁한 전과다. 아군의 희생도 컸다. 2천301명이 전사하고, 무려 4천40명이 실종됐다. 부상자 수도 5천908명에 달했다. 한 달여 동안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포항지역에서 벌어졌는지 짐작하게 한다. 특히 포항전투는 6·25전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파죽지세에 있던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포항전투에서 온 몸을 내던져 호국을 실천한 이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반격은 커녕 부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포항에서 벌어진 전투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어려운 싸움이었다. 수천년간 전략적 요충지로 시대적 사명을 꿋꿋이 실행해 온 포항이 또 한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호국(護國)을 실현한 셈이다.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 한달이상 지속
결국 3사단 후퇴 포항 적군 수중으로
9월13일 포항∼흥해지구 회심의 반격
3사단 모든 예하 부대 투입 포항 수복

연합군도 2천301명 소중한 목숨 잃어


#1. 기계 공방전(8월13일~9월4일)

기계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자 국군은 곧바로 ‘수복 작전’을 세웠다. 적의 전방과 측후방을 동시에 공격해 기계를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다. 세부적으론 제26연대와 제17연대, 제1연대, 해군육전대로 하여금 기계 남쪽과 동쪽에서 적을 압박하고, 제18연대와 기갑연대가 기계 서북쪽 후방을 공략하기로 했다.

8월15일 동이 트자 작전이 시작됐다. 1군단 예하 모든 연대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제18연대는 기계쪽으로 동진했고, 기갑연대가 우측에서 측방 경계를 담당했다. 17연대는 미 공군의 화력지원을 받아 445고지를 점령한 뒤 기계로 향했다. 양동리에 주둔하던 제1연대도 110고지와 236고지를 탈환하며 북한군의 숨통을 조였다.

특히 제1연대 제3대대는 포항터널 부근의 고지 점령에 성공, 포항 탈환 작전을 동시에 펼칠 수 있게 됐다. 이날 군 예비대인 민(閔)부대는 이곳을 통해 포항으로 진입하게 된다.

18일 국군은 공세에 박차를 가했다. 전면 공격으로 북한군을 더욱 압박했다. 제18연대 일부 병력은 기계에 돌입했고, 남산리(안강읍 노당리)에 집결 중이던 제17연대 제1대대도 기계 남쪽에서 북진했다. 제18연대와 제17연대는 이날 기계 내 잔적 소탕까지 마무리했다. 기계 부근에서 산별 전투를 벌이던 북한군은 전투력을 상실하고, 비학산으로 퇴각했다. 작전이 시작된 지 3일만에 거둔 성과다.

하지만 비학산 점령은 쉽지 않았다. 계속된 국군의 공세에도 북한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오히려 일주일 뒤에는 전세가 역전됐다. 북한군의 기세에 떠밀려 기계 수성마저도 어려워졌다. 수일간 물고 물리는 격전 끝에 제18연대와 17연대는 결국 기계를 다시 내주고 후방으로 철수했다.

8월 초 북한군 제12사단의 남하로 시작된 기계·안강 전투는 9월4일 수도사단이 방어선을 안강 남방으로 재편하면서 ‘경주북방 전투’로 이어지게 됐다.

#2. 민 부대의 포항 탈환과 고지전(8월15일~9월5일)

육군본부는 8월15일 민부대를 영천에서 포항 방면으로 투입했다. 본격적인 포항 탈환에 나선 것이다. 민부대는 먼저 경주 화산리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이어 형산강 남쪽 256고지에 2대대, 대각동(대송면)에 이르는 지대에는 1대대를 배치했다.

17일 2대대는 정찰대를 침투시켜 시가지에 북한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튿날 새벽 형산강을 건너 포항으로 향했다. 1대대도 시가지로 전진, 소수의 적 병력을 제압한 뒤 포항을 수복했다.

의외로 쉽게 포항을 되찾은 국군은 민부대와 제3사단의 임무교대를 명했다. 동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제3사단은 포항이 점령된 뒤 해상을 통해 철수한 상태였다. 제3사단은 도구동(동해면 소재지)에서 포항으로 진출해 사단 사령부를 구축했다. 사단 예하 제23연대는 민부대의 진지를 인수하고, 제22연대는 예비대로서 포항에 남았다. 20일 포항 수복 이후 제3사단의 첫 반격이 이뤄졌다. 제23연대는 이날 새벽 냉천동(흥해읍 성곡리)과 장흥동(장성동)을 잇는 선까지 진격한 뒤 이튿날에는 천마산(天馬山)까지 접수했다. 포항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고지전의 시작이었다.

천마산 점령의 기쁨도 잠시, 제23연대는 이튿날 북한군의 야습에 밀려 퇴각하게 된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22연대는 12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조직해 북한군의 허를 찔렀다. 특공대의 활약으로 국군은 이틀만에 다시 천마산을 수복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북한군은 27일 새벽, 파상 공격을 해왔다. 쏟아져 나오는 북한군에 밀려 제26연대가 먼저 후퇴했다. 이로 인해 제22연대 후방지역인 천곡사(泉谷寺, 흥해읍 학천리) 좌측 산악지대 방어선이 뚫렸다. 배후를 적에게 내주게 된 제22연대는 128고지 연대지휘소 쪽으로 이동이 불가피했다. 제23연대 역시 천마산을 탈환하지 못한 채 두호동 북쪽 1㎞선에서 새 진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제22·23연대와 제8연대 제1대대(제3사단 배속)는 북한군의 남하를 계속 막아내고 있었으나, 언제 방어선이 뚫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에 제3사단은 효자동에 집결중인 제26연대 1개 대대를 학천동 우측 능선에 진출시켜 제8연대 1대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또한 제1군단은 미 공군의 근접지원과 포병, 전차 소대의 지원을 받아 정면돌파를 감행한다. 북한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했다. 당시 미군은 29~30일 양일간 적의 보급소이자 집결지인 흥해 일대에 5인치 포탄 1천500발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미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제3사단은 9월1일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제23연대는 장흥동(장성동)과 충곡동(흥해읍 성곡3리)의 99고지, 제22연대는 128고지를 점령했다. 제1연대도 295고지를 접수한 뒤 천곡사로 계속 전진해 나갔다. 제10연대는 제1연대 우측에서 함께 이동했다.

북한군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공세로 전환해 99고지를 재점령했다. 9월3일에는 중요 고지 중 하나인 105고지마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곳은 포항으로 진입하는 어귀에 위치한 감제(瞰制)고지였다. 제22연대 제1대대는 특공대 1개 소대를 편성해 105고지를 탈환했지만 하루도 채 지키지 못하고 다시 빼앗겼다.

더욱이 기계쪽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수도사단이 후방으로 철수하면서 3사단 좌측에 3㎞에 달하는 간격이 생겼다. 형산강 이북에 고립된 제3사단은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3. 포항~흥해지구 반격전(9월6~22일)

엎친데 덮친격으로 9월6일 제10연대가 원소속인 제8사단으로 복귀했다. 제8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영천지역이 북한군 제15사단에 점령당하자 더이상 제3사단을 지원할 수 없게 된 것. 더욱이 제23연대가 방어선으로 이동하기 전 제10연대가 먼저 철수하면서 영일비행장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에 처치특수임무부대인 미군 제19연대 제2대대가 급파돼 북한군을 몰아내고 운제산(雲梯山)을 점령했다. 이와 발맞춰 제22연대도 대각동(대송면) 서쪽의 107고지를 재탈환했다.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이 이어지던 9월13일, 국군은 회심의 카드를 빼들었다. 포항~흥해지구 반격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제3사단 모든 예하 부대가 전진 배치됐다. 제22연대는 사정리(대송면 장동) 부근에서 패적(敗敵)을 공격했고, 제23연대는 남성동(대송면)에서 생지동(연일읍) 부근으로 나아갔다. 제26연대도 용덕동(오천읍)에서 3개 대대 편성을 마친 뒤 괴동동(대송면)에 있는 적을 격퇴했다.

제3사단은 육군본부의 총 반격계획에 따라 예하 각 연대의 전투지경선을 설치하고, 각 부대를 형산강 남쪽 기슭에 배치했다. 포항 탈환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북한군도 만반의 대비를 한 상태였다. 형산강 북안 제방 일대에 횡단 교통로를 구축, 기관총 사격과 수류탄 등으로 국군의 도하작전을 방해했다. 또한 제방 후방고지에는 1개 연대로 추정되는 적의 주력이 전선을 지원하고 있었다.

미군도 포항 근해에서 전함 미주리호를 포함한 기동함대로 제3사단을 지원했다. 특히 16인치 함포를 갖춘 미주리호는 위력을 발휘했다. 형산강 북쪽 제방쪽 적진지에 화력을 집중해 국군의 도하를 도왔다.

제23연대가 먼저 강을 건넜다. 적의 집중사격으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음에도 계속 전진해 도하에 성공했다. 반면 형산교 부근에 배치돼 있던 제26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지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아군 피해만 늘어나자 특공대를 보내 교량 북쪽기슭을 확보했다. 이어 2대대 병력이 도하에 성공하면서 북쪽 제방도 점령했다. 제22연대도 형산강 도하를 완료하고 효자동 동쪽에서 포항을 향해 나아갔다.

우측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제26연대 역시 송내동(당시는 대송면)을 기점으로 진격, 제22연대와 함께 포항을 재탈환했다. 제22연대는 흥해를 수복한 뒤 계속 전진해 청하면 고현리선까지 진출했고, 제26연대는 동해안을 따라 패주하는 적을 쫓았다.

포항 전투 패배로 북한군의 공격 기세는 둔화됐고, 단숨에 부산까지 점령하려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반면 한·미연합군은 포항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반전시켰다. 북한군의 총공세를 한달 이상 저지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재정비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포항시사. 나라를 지켜낸 낙동강방어선 전투, 최용성. 6·25전쟁사 낙동강, 류형석.
공동기획지원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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