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떡잎만 보고 모른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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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0 07:51  |  수정 2020-09-09 14:43  |  발행일 2019-11-20 제23면
[문화산책] 떡잎만 보고 모른다
송영인<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며칠째 가을비가 내린다. 은행나무들이 비바람에 세차게 흔들린다. 샛노란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꽃이 지는 것만큼이나 잎이 지는 것도 아름답다. 그런데 건너편 길가의 은행나무는 아직 물이 제대로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잎이 제법 무성하다. 같은 종류의 꽃도 지는 시기가 다르듯, 잎도 각자의 시간에 맞춰 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정원엔 목련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는 응달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느 목련 나무보다 꽃이 늦게 피고 늦게 졌다. 5월 말경에나 하얀 꽃잎을 뚝뚝 떨어뜨리곤 했다. 그것과 관련된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별달리 예쁜 모양도 아니었지만 그 목련은 내 기억 속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그 목련 꽃송이가 한 잎 두 잎 떨어질 때 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꽃잎은 규칙도 없이 빙글빙글 돌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럴 때면 세상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보였고 꽃잎만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늦게 피지만 언젠가는 꽃을 피우고, 다른 나무들보다 늦게까지 피어 있는 그 나무는 나에게 어떤 말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운동회를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비웃을 만큼 느리게 무용을 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내가 했던 동작을 흉내내며 깔깔깔 웃곤 했다. 나는 가족들이 웃는 모습이 좋았다. 달리기도 항상 꼴찌여서 쟤는 뭐든 못 한다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신발의 좌우를 구분하지 못했다. 신발을 신을 때마다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2분의 1의 확률인데 매번 나는 거꾸로 신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신발을 거꾸로 신는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바보의 징표 같은 것이었다. 모두 한마디씩 하거나 혀를 차며 지나갔다.

연필도 잘 깎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은 매끈하게 깎는데 내가 깎은 연필은 좌우가 고르지 못하고 이빨로 물어뜯은 것 같았다. 실제로 칼을 사용하는 것보다 이빨로 물어뜯는 게 심을 나오게 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입술에 연필심 자국이 시꺼멓게 나 있곤 했다. 하지만 볼펜을 쓰기 시작했던 중학교 때, 조금밖에 연습을 하지 않았는데도 누구보다 더 연필을 잘 깎게 되었다.

신춘의 계절이다.

찬 바람이 불면 직장을 마치고 밤늦게까지 신춘문예에 보낼 원고를 다듬었다. 낙엽이 질 때쯤 원고를 부쳤다. 그러고 나면 가을이 끝났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그 목련이 생각났다. 다른 나무들이 다 지고 나서야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우리 집 정원의 목련. 모든 게 느린 나답게 나는 아주 늦깎이로 데뷔했다.

늦깎이로 도전하는 분들의 건투를 빈다. 꽃망울을 터뜨리면 새로운 봄이 오지 않을까.
송영인<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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