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광장] 비하르와 비하리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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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23면   |  수정 2020-09-08
[금요광장] 비하르와 비하리

인도 여행을 하다 보면 ‘헤이, 네팔리!’하면서 키득거리는 현지인들을 만날 때가 있다. 한국 사람을 비슷한 생김새의 네팔 사람으로 착각해서 놀리는 것이다. 공식 자료에 “네팔 사람들은 정직하고 튼튼하다”고 묘사돼 있으니 ‘네팔리’도 좋은 의미일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상생활 속 네팔리는 주로 밑바닥 직업을 가진 네팔인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인도인들의 의식을 담고 있다.

네팔리가 인종 차별 성격이 강한 표현이라면, 비하르 주(州) 출신 사람이라는 뜻의 ‘비하리’는 지역 소외와 관련 있다. 한때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우리아 왕조의 중심지였던 비하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 모리셔스, 수리남, 피지 공사 현장에서 일할 계약노동자 공급지 구실을 했다. 또 그 당시에는 대규모의 비하르 노동자가 수도 캘커타에 모여들었고, 독립 후 델리, 뭄바이, 펀자브로 옮겨가서 자리 잡았다. 펀자브 재건에 힘을 보탠 일꾼이 비하리였으며, 델리와 뭄바이 등 대도시의 인력거꾼, 릭샤 운전사, 택시기사, 경비원, 막노동꾼으로서 거친 일을 도맡은 다수도 비하르 사람들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하르는 옛날 그대로였다. 극심한 카스트 분열과 종교 갈등을 겪는 바람에 지역 개발과 경제 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결과는 지독한 가난이었고, 힘든 살림살이에 지친 이는 고향을 떠났다. 인도인들은 그런 비하르를 좋지 않게 봤다. 대도시 사람들은 비하르 억양을 들으면 연신 폭소를 터트리기 일쑤였으며, 그곳 출신이면서도 나고 자란 고장의 말투를 쓰지 않아야 오히려 찬사를 보냈다.

요즘 들어 ‘비하리’의 사정은 크게 나아졌다. 외지로 나온 비하르 출신자들은 정치인, 예술가, 관료, 과학자, 엔지니어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들은 전문직 분야에서 인도 디아스포라의 주요 그룹을 이룰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인도인에게 비하리는 여전히 기피 직종을 전전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네팔리처럼 부정적으로 쓰인다. 더러는 영어식 표현으로 비하리를 ‘해리’라고 부르지만, 미국 백인들이 흑인을 경시해서 내뱉는 ‘니그로’나 영국인들이 인도·파키스탄 이민자들을 낮게 봐서 붙인 ‘파키’와 비슷한 어조이다.

근래에 와서는 긴긴 역사의 땅, 침묵의 땅, 경제 침체의 땅이자 비하리의 고향인 비하르 주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고 한다. 비하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붓다, 찬드라굽타, 아쇼카, 아르야바타 등 옛 영웅들의 이야기 외에는 제대로 내세울 만한 게 없었으나, 최근 지방정부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바뀌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과감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주민들의 도전 의지를 살려냈다. 비하리의 고향에는 도로가 생기고 다리가 놓이는 중이다. 옛날 옛적 마우리아 왕조의 영화를 다시 누리고 ‘비하리’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바꿔놓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인도 네팔리와 비하리 얘기는 신분제 전통이나 종교 대립과는 또 다른 내용의 문제를 보여준다. 바로 특정 지역과 그곳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 평판을 부여하는 관행이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불명예스러운 별칭 짓기는 우리사회 내부적으로도 행해진다. 그 성격이 인도의 경우와 다소 차이 날 뿐이다. 근본 원인이야 안에 있고 밖에도 있지만, 대구경북에서 지역 정책을 다뤄온 연구자로서는 이러한 현상에 깊이 우려할 수밖에 없다. 대구경북이 그동안 변화와 혁신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과정을 잘 알고 지역 정체성과 도시 브랜드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니 더더욱 그렇다.

지난번 대구시 국정감사 때 수구도시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과 관련해 글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당시 글 내용에 대해 진지한 이의제기가 뒤따랐다. 발언한 분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기에 앞서 섭섭한 감정을 크게 드러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유를 막론하고 그렇게 여겨질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신중하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평소 생각한 바를 설명하면서 수긍 가는 부분을 수용했고 스스로는 적절한 긴장감을 재장착하게 됐다. 이번 일로 많은 분들께 염려를 끼쳐 송구한 마음이다.

오창균 (대구경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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