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자태 빛 향연뒤 땅의 빛깔 ‘人生 같은 단풍’…그 허전함 채워주는 ‘억새’

  • 글·사진=이춘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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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34면   |  수정 2019-11-22
■ 만추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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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 두산위브더제니스 아파트 상가 인도에서 만난 플라타너스 단풍이 고운 자태를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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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한 번째 작업실을 옮긴 권기철 화가의 작업실 내에 설치된 만추에 든 신문지나무를 배경으로 권 화가가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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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름과 붉음의 단풍이 황금분할된 가창댐~헐티재 가는 길. 그 중간에 있는 동제미술관은 최정산의 만추지락을 가장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멋진 테라스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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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순환도로를 물들인 2019년 절정기의 단풍벨트. <대구 동구청 제공>

단풍나무가 워낙 인상적이라 가을에 물든 잎들을 흔히 ‘단풍(丹楓)’이라 통칭한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빨강색이 존재하는 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밝은 빨강, 선명한 빨강, 진한 빨강, 탁한 빨강, 연지색, 딸기색, 홍색, 체리핑크, 와인색, 다홍, 선홍, 주홍, 주황…. 100가지 이상의 빨강 계열이 있다. 벚나무 단풍의 붉음도 여러 갈래. 푸르죽죽한 것부터 화창한 빨강까지, 잘 익고 못 익고에 따라 채도 차이가 엄청나게 생긴다. 하지만 바쁜 현대인의 삶은 그걸 정독할 겨를이 없다. 그냥 끝자락 단풍을 주마간산식으로 퉁치고 넘어간다. 단풍의 일생을 따라가 본다. 초록을 필두로 거의 모든 컬러를 건드려 본다. 누렇게 노랗게 변하다가 나중엔 암갈색, 끝내 땅의 빛깔로 귀일한다. 단풍의 일생 우리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빨강~노랑~누름의 앙상블
대구에서 가장 먼저 물드는 대덕산 언저리
노랑∼암적색까지 10가지 이상 붉은 색상
홀로 서 있는 단풍은 군락형보다 더 미학적
왕창 잎이 지고서 자태 고와지는 은행나무
권기철 화가 작업실서 본 14년된 신문지 단풍

백양사(전남 장성군)는 한국 군락형 단풍의 지존으로 불린다. 처음엔 강렬하지만 오래 보면 ‘민방위교육용’ 같다. 그래서 질린다. 극홍(極紅)과 극황(極黃)은 섬뜩하고 흉측한 구석이 있다. 어떤 단풍은 붉음에 너무 짓물러 색소가 과다하게 들어간 육포같은 거무튀튀한 암적색을 보여준다. 실패한 빨강 같다.

딱 한 그루의 단풍나무가 오히려 이웃한 단풍을 주연급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 포인트가 대구 도심 곳곳에도 포진해 있다. 수성못 주변 2㎞도 고감도 만추를 보여준다. 대구MBC 앞 광장 소공원의 단풍 강도도 헤비급 수준이라 주변 느티나무·벚나무 단풍 속으로 트럼펫 같은 기세로 꽂힌다. 앞산순환도로 남쪽 끝지점인 달서구 상인동 임휴사 초입 대덕산 언저리도 기억할만한 단풍존이다. 거기는 대구에서 가장 먼저 물이 든다. 하나의 붉음이 아니다. 노랑부터 암적색까지 10가지 이상의 붉은 색상을 동시에 뿜어낸다. 하지만 앞으로 전선이 지나가고 촬영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게 아쉽다. 그냥 임휴사 고가도로를 지나면서 한 번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팔공산순환도로의 단풍나무 벨트는 대구의 자랑이랄 수 있다. 10월 중순쯤 물이 드는 걸 목격했다. 한 달 만에 앙상한 자태로 남았다. 지난 14일이 고비였다. 강한 바람이 단풍을 거의 다 떼내버렸다.

그 붉음과 호흡을 맞추는 건 단연 벚나무 단풍벨트. 남구 앞산네거리에서 충혼탑 방향, 달성군 옥포 용연사와 가창댐~헐티재 등 여러 벚나무군이 있지만 단연 대구스타디움 서편 광장 벚나무 단풍벨트가 장원급이다. 단풍의 70% 정도가 지고난 뒤 아웃포커싱으로 찍으면 누가 찍어도 작품사진이 된다.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서는 것은 홀로 서 있는 단풍나무다. 군락형 단풍보다 더 미학적이다. 남구 봉덕동 앞산 고산골 보리밥집 보금식당 옆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5그루의 단풍나무가 있다. 첫째 단풍나무만 유독 변화구를 잘 구사한다. 푸른색부터 밝고 어두운 빨강까지, 그 변화의 맥락을 원스톱으로 다 보여준다. 하지만 옆의 단풍나무는 붉은 기운을 전혀 뿜지 못하고 어두운 자줏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밖에 수성구 대륜고 정문 앞과 범물동 용지네거리 모퉁이 소공원에서도 이방인 같은 단풍을 만날 수 있다.

붉음의 절정을 남천과 화살나무에서 찾는 이도 있다. 겨울에도 단풍을 가동하는 몇 안 되는 식물이 바로 남천이다. 문희갑 시장 시절 대구수목원이 론칭됐고, 이 때 대구 곳곳에 가장 광범위하게 보급된 게 남천이다. 남천의 단풍은 빵강보다는 체리핑크에 가깝다. 화살나무의 단풍은 더욱 짙어 가장 전형적인 빨강인데, 수성못 산책로 서남쪽 언저리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은행나무는 좀 멍청한 것 같다. 항상 1%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힘을 덜 받으면 겨자색으로 가고 기분이 좋으면 해바라기색을 유지한다. 은행잎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꼭 노랑이 난동질 부리는 것 같다. 왕창 잎이 져야 그제서야 자태가 더 고와진다. 나무 전체를 다 찍어선 단풍 사진이 안 된다. 부분만 강조해야 된다. 간들거리는 나뭇잎 하나. 그게 폭발력을 갖는다.

동구 공산터널에서 백안삼거리까지 뻗어있는 은행나무군도 절정기에는 너무 떼거리로 덤벼들어 도가 지나치단 생각이다. 은행나무잎은 너무 큰 것보다 달걀크기만한 게 딱이다.

가로수로 발탁된 은행나무보다 산 위에서 만난 은행나무가 더 고혹한 빛을 발산한다. 그런 걸 만끽할 수 있는 포인트가 도심에 있다. 수성구 수성아트피아 옆 레스토랑 레드피아노 옥상에 올라가면 두산오거리 동남쪽 동산 정상부를 노랗게 물들인 은행나무숲을 보게 된다. 단풍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행인들은 그게 참나무숲인 줄 착각한다.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둘러선 참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이 실내악을 협연한다.

특히 수성구 범어네거리 두산위브더제니스 아파트 상가 앞 플라타너스 행렬은 은행나무보다 한 수 위의 노랑의 향연을 펼쳐준다. 빌딩과 노랑 단풍의 앙상블. 흐린 날이라도 그 단풍의 밝기만으로 충분히 주위를 훤하게 만들 정도의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나도 그 광경을 지나칠 수 없어 차를 세웠다. 찰칵~, 거기서 한 컷의 만추 이미지를 포착했다. 플라타너스와 동급인 수종 중 포플러가 있다. 많이 사라졌지만 최강 포스는 단연 대구 이월드(옛 우방랜드) 맨 남쪽 언저리에 포플러군락. 그리고 앞산공원 앞 캠프헨리 내 포플러도 ‘이 정도라야 진짜 노랑이지’란 독백을 한다.

노랑과 누른색을 동시에 흡수한 건 자작나무 잎이다. 이번 만추로드에서 가장 나중이었던 권기철 화가의 작업실에서 그걸 만났다. 심은 지 얼마 안돼 아이 팔둑 굵기만하다. 옥수수 이파리의 표정으로 흔들거리는 그 잎들을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오래 올려봤다. 도심보다 3℃ 정도 낮은 기온이라 단풍도 빨리 들고 사라져 버린다. 지난 10여년 ‘어이쿠 시리즈’에 매달려 있는 그도 조만간 그 주제에서 벗어날 것 같다. 1983년 경북대 북문 근처에서 첫 번째 작업실을 열었다. 지난해 어쩜 생애 마지막이 될 지 모를 스물 한 번째 작업실을 팔조령 옛길 초입에 마련했다.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특별한 단풍이 있다. 그것은 해묵은 신문이 만든 단풍이다. 14년째 높이를 올려가는 권기철표 신문지나무(紙木)다. 밑둥은 누렇게 바랬다. 그것도 하나의 만추였다. 그가 만추에 걸맞은 선글라스를 하나 보여준다. 애지중지 하던 겨자색 안경이다. 부러져 사용 못 하지만 버리지 않고 테이프로 깁스해 놓았다. 맞다. 그 안경도 누렇게 물이 들었다.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밖은 청명했다. 수정보다 더 맑은 가을햇살이 심해어처럼 유영하고 있다. 격자형 통유리창 밖 팔조령의 노란 만추지경이 실경산수화처럼 파고들었다.

단풍로드가 낙엽로드로
단풍 지고 가을과 겨울 동시에 즐기는 억새
비슬산, 달서구 강창교, 금호강 둑방길 명소
가창댐∼헐티재 가는길 누름·붉음 황금분할
대구교회 단풍존·만추지락 명당 동제미술관


둘러 보니 단풍의 8할이 지고 없다. 단풍로드가 낙엽로드로 둔갑해 버렸다.

봄의 미학은 잎보다 꽃에 있다. 하지만 가을은 꽃보다 잎(단풍)이 주인공. 잎도 꽃도 아닌 것 같은 강아지풀·억새·갈대·팜파스글라스가 비로소 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억새의 스걱거림은 단풍이 오두방정을 부릴 때 침묵을 유지한다. 단풍이 증발하고 난 그 허전한 공간에 억새는 대금연주자로 등장해 가을과 겨울을 동시에 들었다 놓는다. 울산 울주군 영남알프스, 경남 창녕 화왕산, 대구 달성군 비슬산, 달서구 강창교 인근 금호강 둑방길, 부산 삼락공원, 서울 하늘공원, 제주 산굼부리, 수원 화서공원, 태안 청산수목원…. 전국 처처에 억새 명소가 있다. 억새의 한들거림을 ‘울음’으로 본 두 시인이 있다. 박재삼과 신경림이다. 박재삼은 1962년 그의 대표시 ‘울음이 타는 강’에서 그 울음을 이렇게 풀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중략)/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겠네’

구절초, 쑥부쟁이, 코스모스, 국화 등 가을꽃은 초강력 단풍 때문에 몸을 가려 때를 기다려 기습적으로 와락 피어난다. 그래서 가을꽃은 국화처럼 화분에 갇힌 것보다 들판에 저절로 핀 야생초가 한 수 위다. 대구수목원은 늘 가을을 맞춰 수목원을 국화동산으로 만든다. 올해도 그랬다.

발길을 동제미술관으로 돌렸다. 비슬산권 단풍로드의 명당은 단연 가창댐~헐티재. 거기 벚나무는 가창댐권 산들의 누른 단풍과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이 언저리 산에는 소나무 등 상록수가 별로 없다. 거의 활엽수군이다. 특히 주암산과 연결된 냉천골프장 인근 산하는 누른색 계열의 단풍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성구 용계초등학교를 지나 가창댐 가는 길로 우회전하면 불타는 정원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초입 왼쪽 대구교회도 단풍존으로 입소문이 난 곳이다. 교회 정문 입구에 상당한 수고를 자랑하는 벚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다. 봄에는 ‘환(幻)’하지만 만추에는 ‘몽(夢)’의 자태를 보여준다. ‘길’이란 글자가 새겨진 표석과 벚나무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 초입에 자그마한 컨테이너형 커피숍인 커피스톱이 있다. 그 옆에 쌀로 만든 찐빵집도 있다. 찐빵과 곁들인 커피 한 잔.

바람이 불자 나무는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잎을 허공으로 훅 날려보낸다. 사진기를 연사했다.

만추의 명당 중 한 곳인 동제미술관 한 켠에 작업실을 마련했던 원로 사진작가 강상규(83). 그가 위클리포유를 위해 애지중지하던 단풍 사진을 보내온 적이 있다. 그 길의 가을은 그만의 애장품이다. 강상규가 비워준 자리에 ‘블랙미학’의 정수를 파고있는 김길후 화가가 방목의 삶을 살고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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