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아르헨티나 바릴로체(Bariloche)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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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9   |  발행일 2019-11-29 제37면   |  수정 2020-09-08
雪山아래 그림같은 물빛으로 빛나는 '호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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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바릴로체 푼토 파노라미코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레노 호수.

최고 휴양지로 꼽는 남미의 알프스
수십개의 호수·폭포, 울창한 원시림
스위스 이민자 개척지, 오두막집 많아
부활절 기간, 명물 초콜릿 알리는 축제

세계 최고 긴 초콜릿바 함께 만들어

침엽수 군락 곡선따라 아름다운 호수
푸른 언덕위 솟아있는 샤오샤오 호텔
오바마 등 세계 명사 숙박지로도 유명
무인도 빅토리아 섬의 메타세쿼이아
'아기 사슴 밤비' 영감받은 은매화 나무


파타고니아가 시작되는 칠레의 항구 도시 푸에르토 몬트에서 이른 아침에 바릴로체행 버스를 탔다. 약 7시간 거리이다. 남미에서 타는 버스 치고는 시간도 길지 않고 버스도 고급이다. 더구나 야간 버스가 아니어서 파타고니아의 자연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그 너른 초원 위에 간간이 소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인구 1인당 소 두 마리로 사람보다 소가 많은 나라라더니, 소에도 계급이 있다면 이곳의 소들은 행복한 상류층이다. 넓은 초원에 깨끗한 공기와 풀, 그리고 만년설이 녹은 빙하수를 마시며 살고 있으니, 사람으로 쳐도 최상류층이라 할 만하다. 이 소들이 아르헨티나를 한때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만들었던 주역이 아니던가. 여유롭고 넉넉한 품이 이 초원의 주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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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섬 나우엘 우아피 호수 모래밭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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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축제가 열리는 시비코 광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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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샤오샤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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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샤오 호텔 옆의 작은 목조 성당.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보고 겪었던 안데스산맥의 거친 야생이 푸른 초원과 호수의 모습으로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얌전한 모습’이 바릴로체의 첫 인상이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남미의 알프스라고 부르며 최고의 휴양지로 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차분하게 정돈된 자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단연 크고 작은 호수 때문이었다.

바릴로체는 마을을 포함해 주변 75만8천㏊가 나우엘 우아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최초의 국립공원인 이곳은 서른개가 넘는 호수와 폭포, 깊고 울창한 원시림, 기묘한 형상의 바위봉우리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곳을 ‘호수 지방’이라고 부른다. 눈 덮인 안데스산맥 아래 투명한 물빛을 자랑하는 수많은 호수들, 푸른 물감을 쏟아놓은 것처럼 새파란 하늘이 드리워진 이곳은 바라보는 곳마다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서쪽으로 1천720㎞ 떨어진 바릴로체의 공식 명칭은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San Carlos de Bariloche)이다. 리오네그로 주에 속해 있으며, 인구는 10만명 정도이다. 이 도시는 스위스 이민자들이 개척한 곳으로, 도시의 주택은 스위스 양식의 오두막집 샬레가 많다. ‘산 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바릴로체’는 알프스 산맥에서 살다 온 스위스 이민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해발 770m에 자리 잡은 바릴로체는 여름에는 하이킹, 등반, 승마, 낚시, 래프팅, 카약, 패러글라이딩 등을 즐기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일 년 내내 붐빈다.

내가 찾은 날은 초콜릿 축제가 한창인 부활절 기간 첫 주말이었다. 마침 축제의 메인이벤트인 세계에서 가장 긴 초콜릿 바를 만드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축제도 보고 저녁도 먹을 겸 숙소에 짐을 풀고 느긋하게 시내 구경을 나갔다. 이 도시의 중심가는 센트로 시비코 광장이다. 가게와 레스토랑이 늘어선 미트레 거리를 따라 가니 포석이 깔린 큰 광장이 나타났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나무와 돌로 만든 시청사, 경찰서, 도서관, 박물관, 인포메이션 센터 등이 몰려 있다. 나우엘 우아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광장 주변은 공원과 대성당이 만들어내는 한적함이 배어 있다. 오후 햇살을 즐기며 잔디에도 누워보고 호숫가도 걸었다. 햇살이 옅어지자 오후 7시에 시작되는 축제에 늦지 않기 위해 중심가로 들어섰다.

초콜릿 축제는 바릴로체의 명물인 초콜릿을 알리기 위해 매년 부활절 기간에 열린다. 시비코 광장 입구에서 중심가인 미트레 거리에는 이미 200m에 달하는 긴 식탁이 설치되었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들의 응원과 박수소리에 맞춰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긴 초콜릿 바가 완성되었다. 축하 풍선이 하늘을 수놓았고, 사람들은 함께 축하하며 그 초콜릿을 나누어 먹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이곳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스테이크 집 알베르토를 찾았다. 이 도시의 저녁 식사는 보통 오후 8시에 시작한다. 알베르토도 그 시간에 오픈을 했다. 식당은 이미 만석이었고 대기 손님도 여럿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스테이크 맛을 볼 수 있었다. 허튼 명성은 아니었다. ‘상류층’ 아르헨티나 소는 고기 맛도 좋았다. 무엇보다 양이 많고 저렴했다. 하나만 해도 둘이서 충분할 것 같았다.

배가 불렀지만 바릴로체의 수제 초콜릿을 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제에서 잠깐 얻어먹은 초콜릿 향이 더욱 입맛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바릴로체의 가장 유명한 초콜릿 가게는 라파누이와 마무슈카이다. 가까운 라파누이에 들러 초콜릿 디저트까지 맛있게 먹고 나니 거리는 다시 색색의 조명으로 밝아져 있었다. 가을밤 호숫가를 한참 더 어슬렁거리다 숙소로 들었다.

다음날 아침 캄파나리오 언덕을 찾았다. 해발 1천52m에 불과하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세계 10대 절경으로 꼽을 정도로 바릴로체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멀리 설산을 끼고 있는 나우엘 우아피 호수를 감아 돌며 한참을 달린 버스는 캄파나리오 언덕 입구에 도착했다. 2인용 리프트로 언덕 위 전망대까지 이동했다. 빽빽한 침엽수 군락이 만들어내는 곡선을 따라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호수 멀리로는 오토, 카테드랄, 로페스 등의 설산들이 호수를 감싸고 있었다. 액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은 풍경이 눈을 돌릴 때마다 바뀌어 나타났다. 전망대 카페테리아는 이곳 경치를 오래 간직하기 좋은 장소이다. 짙은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창가에 앉았다. 호수와 설산을 머금은 향긋한 커피 향이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이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소환될 것이다. 나와 커피만의 은밀한 장소로.

캄파나리오 언덕을 내려와 다시 푼토 파노라미코를 찾았다. 이곳은 모레노 호수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캄파나리오 전망대가 설산과 어우러진 웅장한 스케일이라면 파노라미코 전망대는 호수 가까이서 호수의 속살들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아기자기하다.

이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는 세계 100대 호텔에 뽑힌 샤오샤오 호텔이다. 호텔 옆으로는 넓은 골프장이 펼쳐져 있었다. 숙박이 아니라 호텔 자체를 구경하려고 오는 곳이다. 싱그러운 푸른 언덕 위에 지상에서 수직으로 솟아있는 엄청난 높이의 암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 호텔은 버락 오바마를 비롯한 세계 명사들의 숙박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나는 호텔 옆 작은 성당에 더욱 눈길이 갔다. 나에게 성당은 항상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 크고 화려한 공간을 만날 때마다 인간이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을 위압하려는 오만함이 먼저 떠올랐다. 화려한 호텔과 대비되는 작고 소박한 이 성당이야말로 남미다운 성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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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를 여행하면서 험한 길모퉁이 한편에 모셔진 작은 유리 상자 속의 마리아상을 자주 만났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시든 들꽃이 놓여 있곤 했다. 특별한 종교를 가지지 못한 내가 성스럽다는 형용사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 것이 바로 이 길거리 성모상이었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자연 속에서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무종교자의 기도였다. 거기에 비하면 이 성당도 너무 크고 화려하지만 적어도 유럽 대도시에서 보았던 이름난 성당들의 오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죄 많은 나 같은 사람도 편안하게 들여 주는 공간이었다.

바릴로체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빅토리아 섬과 아라자네스 숲 투어였다. 이곳은 투어를 이용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버스로 푸에르토 파누엘로 선착장까지 이동한 후 유람선을 탔다. 빅토리아 섬에 내리면 가이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이 섬은 1930년대 정부에서 조성한 숲 지대로서 지금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무인도이다. 고즈넉한 섬의 주인공은 오직 나무들이었다. 키 큰 소나무와 덩치까지 큰 메타세쿼이아가 나무 터널을 만들고 있는 오솔길은 인적이 없어 더욱 호젓하였다. 간간이 나타나는 유칼립투스 군락지도 이 숲을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다. 길을 걷고, 나무를 만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숲은 나에게 이 낯설고 어색한 짓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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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섬의 메타세쿼이아가 만든 오솔길.
다시 배를 타고 아라자네스(Arrayanes) 숲으로 갔다. 아라자네스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은매화(Myrtle) 나무를 말한다.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야네스 정원’에 심은 바로 그 나무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아라자네스’로 발음하였다. 은매화 나무는 성장이 느리고 나무의 표피 온도가 낮은 독특한 나무이다. 또 가지 위에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떨어진 가지가 뿌리를 내리기도 한단다. 이곳에는 수령 500~600년이 넘은 은매화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의 색과 가지의 휘어진 모양이 여느 숲과 다른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월트 디즈니 제작자가 이 숲에서 ‘아기 사슴 밤비’의 영감을 얻었다는 소문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선가 큰 눈망울 의 아기 사슴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나타난 호숫가도 환상적인 분위기이다. 호숫가 모래밭은 들썩이는 해변 모래밭과는 달리 여행자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자꾸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해가 수면에 제법 가깝게 내려앉았다. 내가 지나온 길의 흔적이 그 위로 스쳤다. 이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휴양지였다. 내 남미 여행의 첫 번째 쉼표였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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