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짧아도 긴 학교장 훈화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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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2 07:50  |  수정 2020-09-09 13:47  |  발행일 2019-12-02 제15면
[행복한 교육] 짧아도 긴 학교장 훈화
김희숙 (대구 새론중 교장)

졸업 UCC를 찍는다고 3학년 세 명이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잘하라’는 메시지를 기분 좋게 표현해 달라고 했다. 소품을 활용하면 좋겠다는 이야기에 아령을 빌렸다. 카메라를 세워놓고 좌우 학생과 ‘몸 근육! 마음 근육! 공부 근육!’ 한 멘트씩 날리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아령을 얼굴 앞으로 내리며 파이팅을 유쾌하게 외쳤더니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났다. 보름 전, 개교기념일 축사에 세계로 뻗어 나가는 인재 이야기를 지구본을 들고 짧게 했는데 훈화 내용은 기억에 없고 지구본을 본 건 생각난다더니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장 훈화는 들리지 않는다. 젊은 공무직원에게 물어봤더니 12년 초·중·고 한결같이 길고 지루했다는 생각뿐이란다. ‘마지막으로, 끝으로’라면서 끝맺지 않을 때 미칠 것 같았다고 해서 모두 웃었다. 강한 뙤약볕 아래 쓰러지는 학생이 속출해도, 음질 나쁜 스피커 거친 소리가 울려 시간차 연설이 되어도 계속되던 운동장 조례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입학식, 졸업식 등의 큰 행사가 아니면 강당에 모이지도 않는다. 간단한 방송조례도 일 년에 한두 번이다. 교장선생님들께 여쭤 봐도 거의 3분 이내로, 어떤 경우는 인사하고 세 마디로 끝내고 박수 받고 내려온다는 것이다. 일단 물리적인 시간의 진보(?)는 혁혁하게 이루어졌다.

학교장 훈화는 왜 들을 것이 없는가. 왜 지루하기만 한가. 일단 의식 절차가 길다. 입 다물고 바로 서 있게 하기 위해 생활부에서 이미 식전에 시간을 할애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애국가 4절에 내빈 소개까지 이미 몸이 뒤틀리고 다리가 아프다. 그리고 시작된 교장선생님 말씀은 전달력 있는 좋은 목소리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일 뿐 가슴에 전해지지 않는다. 훈육이 잘된 학생들이라도 반듯한 자세로 경청하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고 해도 메시지가 기억에 남아 울림을 받았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위를 가르쳐야 하는 교육적 측면 때문에 늘 옳은 소리만 하니 재미가 없다. 가정이 밥상머리 교육과 멀어지면서 학교는 가정에서 하는 교육까지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자유로워진 아이들에게 공동체를 위한 규율은 더 존중하도록 반복하여 강조한다.

아는 교장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얼마 전, 대공연장에 학생들이 강제로 배정되어 왔는데 시끌벅적한 학생들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멘트를 시작해도 조용해지지 않자 장내 아나운서가 당황하여 객석을 향해 화를 쏟아냈고 그래도 소용이 없어 지휘자가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불과 1분도 안되어 거짓말처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끝날 때까지 몰입하여 감상했다는 것이다. 단체로 공연장에 도착하여 바깥에서 지루하게 대기했을 것이고, 우르르 입장하여 자리잡고 떠들면서 환경 적응을 한 것이다.

학교장 훈화가 핵심인 행사라면 과감하게 절차를 생략하고 핵심 본론으로 바로 가야 한다. 방송 조례의 경우 대화를 나누듯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음성과 비주얼은 확실히 중요하다. 카메라를 줌업시켜 표정이 다 보이도록,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면에 꽉 차야 한다. 뉴스 앵커 정도의 비율은 역동적인 동영상 자료로 보완되지 않는 한 배경일 뿐이다. 거기에 간결한 유머 스피치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 개개인을 알고 깊은 애정에서 배려하며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 또한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며 어긋나는 가치를 어긋난 채로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 열정이나 강압보다 더 품격이 있다.
김희숙 (대구 새론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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