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한여름 밤의 꿈

  • 이은경
  • |
  • 입력 2019-12-04 07:55  |  수정 2020-09-09 14:37  |  발행일 2019-12-04 제23면
[문화산책] 한여름 밤의 꿈

몇 년 전 여름, 문경에 있는 대성암이란 산사에 글을 쓰려고 두 달 동안 머문 적이 있다.

하루는 운달산 중턱의 토굴에서 혼자 수행하시는 스님이 고사리를 꺾어 오셨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50ℓ쯤으로 보이는 비닐봉지 한가득이었다. 저녁에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님들은 안채에 기거하시고 나는 식당이 있는 바깥채에 있었기 때문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가 보니 주지스님께서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을 큰솥 가득 받고 계셨다. 왜 공양주 보살님과 같이 안 하고 혼자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보살님이 피곤하실까 봐 몰래 하려고 나오셨단다. 나는 뛰어 내려가 솥을 들어 부엌의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그리고는 고사리 삶는 것을 지켜보았다. ‘토굴 스님은 이 많은 걸 꺾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난 한 시간만 고사리를 꺾어도 허리가 아파 못하겠던데.’ 스님은 계속 중얼거리셨다. 나는 그 옆에서 다 익은 고사리를 건져내서 찬물에 씻는 것을 도와드렸다.

“저녁에 혹시 차 뭐 마셔요?” 스님이 물으셨다.

“오늘은 피곤해서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네요.”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스님은 안채로 가서 유리병 하나를 들고 오셨다.

“이게 와송이라는 건데. 제가 당뇨가 있어서 채취하는 스님께 사정해서 얻은 거예요. 아주 귀한 거니까 공부할 때 마셔요. 머리도 맑아지고 피로회복에도 좋아요.” 거절했지만 스님은 한사코 내 손에 그 병을 쥐어주었다.

고사리가 익길 기다리며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깨달음을 얻는 법은 하나인데 길은 수없이 많다고 말씀하시며 보살의 여섯 수행덕목인 육바라밀 중 첫째가 보시라고 하셨다. 남에게 주는 것, 그래서 나를 비우는 것. 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깨달음을 얻기 쉽다고 말씀하셨다.

“고사리 삶는 것도 수행의 과정입니다. 고사리를 삶을 때는 고사리 삶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고사리 삶는데 가족 생각이나 다른 걸 생각하는 게 번뇌입니다.” 고사리가 다 삶아지자 우리는 부엌 앞에 발을 펼쳐 놓고 거기에 고사리를 늘어놓았다.

“요즘은 볕이 좋아 금방 마르겠죠.” “그럼요. 이삼 일이면 다 마를 겁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녹아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밤에 산사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산사 옆에 있는 계곡 쪽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반딧불이였다. 가만히 서서 그것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동화 속에 있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그러다가 뭔가 옆에 있는 것 같아 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라니는 까만 조약돌처럼 생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머리를 만지려고 손을 뻗자 고라니는 숲속으로 뛰어갔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 같았다.

송영인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기자 이미지

이은경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