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 연민하기보다 냉철하게 세상 바라본 ‘6인의 지성’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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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4   |  발행일 2019-12-14 제16면   |  수정 2019-12-14
전쟁·폭력·죽음…반복되는 현실의 고통속
위안이라는 마취제 대신 원인 분석을 택한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휴머니즘 가진 女 다뤄
비극에 연민하기보다 냉철하게 세상 바라본 ‘6인의 지성’
냉철하고 터프하게 현실과 진실을 직시한 6인의 멋진 지성들. <책세상 제공>
비극에 연민하기보다 냉철하게 세상 바라본 ‘6인의 지성’
터프 이너프 /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책세상/ 436쪽/ 1만9천원

“아렌트는 자기 평생의 연구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이 끼친 영향을 공공연히 인정했고, 무사유를 고찰하고 ‘정신의 삶’의 3부를 이루는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행위들로 구성된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헌신했다. 그리고 이런 탐구의 절박한 동기를 제공한 근원이 바로 아이히만의 무사유라는 ‘사실’을 목도하고 그 ‘사실’이 바로 독일의 도덕적 붕괴에 중대한 일익을 담당했다는 깨달음에 있다고 여러 번 밝혔다.”

한나 아렌트가 처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을때, 당시 많은 이들이 이 책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유대인 독자를 비롯해 많은 독자들은 원한과 분노, 상처, 실망감 등의 반응을 보였다.

아렌트가 (독자들의 기대처럼) 격정적으로 유대인의 수난을 강조하지 않고, 너무 매정하게 사안을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했다. 그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감정에 빠지면 사실적 진실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유대인의 수난이 설 자리가 없었던 건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대상은 아이히만의 책임 여부였고, 아렌트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아렌트가 타인의 몰이해와 비평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과 진실을 직시한 결과 ‘악의 평범성’이라는 놀라운 개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만약 당시 아렌트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 감상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면, 우리는 여지껏 ‘악의 평범성’을 모른 채 살았을 수 있다.

‘터프 이너프’는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를 비롯해 철학자 시몬 베유, 소설가 메리 매카시, 평론가이자 소설가 수전 손택,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 작가 조앤 디디온 등 ‘강인하게 세상의 고통과 진실을 직시한’ 6명의 인물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들은 모두 여성이다. 미국 시카고대 영문학과 교수인 저자 데보라 넬슨은 이 6명의 여성이 문체와 철학적 관점에서 서로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전쟁, 폭력, 죽음 등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실의 고통 앞에서 연민이나 위안이라는 마취제 혹은 눈가림을 거부하고, 냉철하게 고통을 직시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6명의 여성 각자의 저서와 관련 기록물들을 꼼꼼하게 분석해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리만치 강인하고 냉철한 사유를 했는가를 보여준다.

앞부분에서 한나 아렌트의 예를 들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렌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게 ‘독하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란 자신의 책에서 “연민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초래한 원인과 공범자가 된다. 우리가 느끼는 연민이란 무기력이나 무지를 드러낼 뿐”이라고 썼다. 시몬 베유는 “불행이 드리우는 그늘과 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내면적 분석에 능해야 하는데, 불행한 이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했다.

이들은 비극을 당한 이들을 연민하고 함께 울어주기보다, 비극을 초래한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쪽을 택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정서적 유대와 집단과의 동질성을 옹호한 당시의 ‘자칭’ 진보적 사회운동 세력과도 선을 그었다고 하는데, 그런 당당한 ‘My way’도 매력으로 다가온다.

역자는 이들에 대해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휴머니즘을 지닌 터프한 여자들’이라고 표현했다. 뜨거운 휴머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이 여성들은 차갑고 초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책을 읽으면서 딱 걸맞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냉철한 사유, 지성을 바탕으로 인간은 보다 나은 무언가를 꿈꾸고, 또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언론을 비롯해 인간의 양심, 윤리가 갈수록 추락하는 세상이다. SNS에는 자기연민과 감상이 넘쳐난다. 행동하는 용기는 사라지고, 타협을 강요받는 시대다. 비겁하고 나약한 이들이 많은 시대에 이 책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책 속의 멋진 지성들은 세상의 허위와 위선을 향해 묵직한 ‘돌직구’를 날린다. 강인하게, 터프하게.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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