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대응 체계 제대로 갖추기 전에는 아픔 잊을 수 없을 것”

  • 손선우,이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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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8 07:28  |  수정 2017-02-18 07:28  |  발행일 2017-02-18 제6면
대구지하철참사 14주년…유족에게 듣다
20170218
2·18 대구지하철참사 14주기를 앞두고 지난 13일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기억의 공간에 설치된 ‘추모의 벽’을 방문한 황명애 희생자대책위 사무국장이 추모글을 붙인 후 헌화를 하고 있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2003년 2월18일 오전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정신질환이 있는 승객이 객차 안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불을 질러 192명이 숨지고 146명이 다쳤다. 화재는 한 방화범에게서 시작됐지만, 피해가 커진 이유는 누적된 안전불감증과 값싼 난연재에서 뿜어져 나온 유독성 가스 때문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국내 지하철 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참사가 일어난 지 14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지난 10일 대구지하철참사 14주기를 앞두고 대구시 중구 동인동1가에 위치한 한 건물을 찾았다. 입구에 빛바랜 나무 명패가 걸려 있다. 칠이 벗겨진 상태로 흐리게나마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이하 희생자대책위)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 건물 2층 33㎡(10평) 남짓한 방에 86위의 영정사진이 안치돼 있다. 그 옆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살아남은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란 커다란 글귀가 보인다. 먼지가 쌓인 사무용 책상과 오래된 컴퓨터와 집기, 푹 꺼진 소파 주변은 어지럽지만 영정사진 주변은 말끔하다. 이날 희생자대책위 사무실에서 희생자 오진영씨의 아버지 오금성씨(69), 강연주씨의 아버지 강순형씨(67), 변도연씨의 어머니 강정순씨(70), 한상임씨의 어머니 황명애씨(60)를 만나 그간의 소회를 들었다.

◆왜 암매장꾼으로 몰렸나

“남(타인)은 한솥에 밥을 지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우리는 가족이다.”

설인 지난달 28일, 대구지하철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한 데 모여 차례를 지낼 때 한 유족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들은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을 서로 어루만져왔다.

황명애 희생자대책위 사무국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상처를 치유할 의사의 역할도 치료를 받을 환자의 역할도 스스로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늘 같은 얘기를 나누는 유족들은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암매장꾼 몰렸지만 무죄판결
언론이 보도 제대로 안해 섭섭

매년 어김없이 추모제 초청장
희생자 192명의 유족 가운데
90명 안팎만 연락 닿아

2·18안전문화재단 역할 의문
아직 우리나라 안전부실국가
세월호는 지하철참사 판박이

추모 뜻 이을 ‘2세모임’준비



지난 14년 동안 유가족들을 괴롭힌 것은 참사 희생자의 유골을 공원에 암매장했다는 비판이었다. 실제로 2009년 10월26일 오전 3시쯤 유족들은 192명의 희생자 중 32명의 유골을 한지에 싸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안전 상징 조형물 근처에 묻었다. 유족들은 ‘대구시립 추모의 집’이나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옛 영남불교대학)에 안치됐던 유골 골분을 꺼내 시민안전테마파크로 옮겼고,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넣은 뒤 흙으로 덮었다. 하지만 이 공원에 피해자들의 영령이 안치됐다는 안내문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이듬해 10월 ‘대구지하철 참사의 유족들이 유골을 암매장했다’는 내용의 투서가 나돌았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암매장 의혹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대구시는 ‘암매장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대구지검에 수사 의뢰했다. 사건을 수사한 대구지검은 희생자대책위 소속 윤석기 위원장과 황순오 전 사무국장을 ‘유골암매장’ 혐의로 기소했다. 처음에 검찰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했으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자연공원법’ 위반으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이들은 1심에서 벌금형을 받았으나 2심과 대법원 최종 판결에선 무죄를 받았다. 2년이 넘는 법적 공방 끝에 윤 위원장은 2013년 9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황 전 사무국장은 2014년 1월에 최종 법률적 판단을 받았다.

법원은 “자연장지 조성행위는 자연공원의 외관에 실질적 변경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무죄 판결에 대한 언론의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형참사를 당한 유가족들이 ‘암매장’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이에 따른 재판까지 받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유족들은 한목소리로 2005년 11월22일 대구시와 희생자대책위가 작성한 합의문이 발단이라고 말한다.

황 사무국장은 “당시 강병규 대구시 행정부시장(전 안전행정부 장관)과 실무를 맡은 공무원들이 줄기차게 이면합의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추모관과 묘역, 위령탑 등이 없이 추모사업을 한다고 발표하도록 종용했지만 실제론 유족들의 요구대로 추모묘역 조성, 위령탑 건립 등을 해주겠다고 대구시가 제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구시와 유족 간 이면합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법적으론 확정되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유’

황 사무국장은 올해도 어김없이 유족들에게 추모제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실제로 발송된 초청장은 절반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14년이 지나 희생자대책위에서 연락이 닿는 유족은 90명 안팎이기 때문이다.

대구지하철참사 유족은 희생자 수와 같은 192명이다. 이 중 신원확인이 안 된 시신 6구를 제외하면 공식적인 유족은 186명으로 기록돼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처가 잊히고 있는 것일까.

“연락이 두절되거나 세상을 떠난 유족분들이 있지만, 추모제에 조용히 오셨다가 헌화만 하고 가는 분들도 있어요. 이 분들은 연락을 원하지 않아요. 우리처럼 그날의 상처를 늘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내성이 생겼지만, 그게 아닌 분들은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겠지요. 그날만 기억하겠다는 분들에게 억지로 상처를 줄 순 없잖아요.”

암매장 의혹이 불거진 2010년부터 매년 이 공원으로 참배를 하러 오는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유가족과 인근 상인들은 갈등을 빚으며 대치해왔다. 양쪽에서 고성이 오가며 몸싸움이 벌어졌고, 한편에는 가져온 꽃을 땅에 떨구며 흐느끼는 유가족도 있었다. 상인들은 대구시가 애초 공원이 조성될 때 유골과 위령탑이 들어오지 않다는 말을 믿고 유가족의 참배를 막아섰다.

14년 동안 유족들이 지치진 않았을까. 황 사무국장은 “사고 발생 후 유족들은 자책감을 많이 갖고 있다. 자책할 게 없으면 스스로를 괴롭힌다. 죽을 지경”이라며 “그런 와중에 남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게 너무 힘들다.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1주기는 넋이 나간 상태에서 아프기만 했다. 그래도 이땐 번듯한 재단과 묘역을 만들어 추모할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 희망도 없다. 지난해 3월 2·18 안전문화재단이 출범했지만 재단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재단에 욕심을 내는 게 아니라 재단과 유족의 마음이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지하철참사 이후 여러 대형 재난을 지켜봐온 유족들은 희생자에 대한 추모, 재난 대응에 대한 반성 등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황 사무국장은 “우리나라는 안전의식, 안전사고 예방, 사고수습 과정도 허점투성이”라며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지만 안전매뉴얼조차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월호참사와 지하철참사는 판박이라고 할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당시 암매장 의혹을 연일 보도했던 언론에는 애증이 교차했다.

황 사무국장은 “암매장 의혹을 보도할 때 언론에서 우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아 섭섭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숨통을 열어주는 언론도 더러 있었다. 폭탄만 준 게 아니라 사랑도 줬다. 우리가 언론에 바라는 것은 사실 보도”라고 토로했다.

유족들은 참사가 날 때마다 “가만히 있으라, 그만 잊으라”고 다그쳐선 안 된다고 했다.

“유족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잊는 것이다. 하지만 잊을 수 있는 건 대형재난 대응 등 모든 제도가 잘 갖춰져 있을 때에 해당된다. 이 때문에 잊지 말자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이제 추모의 뜻을 이어갈 ‘2세 모임’을 꾸리고 있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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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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