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이장' 배우 공민정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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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03   |  발행일 2020-04-03 제39면   |  수정 2020-04-03
"5남매 중 할말 하는 셋째딸…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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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존해야만 남아있는 건가요? 기억하겠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아버지 묘 이장을 앞두고 화장을 반대하는 큰아버지의 말에 조심스럽게 일침을 가한 건 5남매의 셋째 금희다. 늘 남매들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던 그는 결혼을 앞두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지만 가족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처지가 못된다. 육아휴직 신청을 했다고 해고 위기에 놓인 싱글맘 첫째 혜영(장리우), 남편의 외도를 의심 중인 둘째 금옥(이선희),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대학생 넷째 혜연(윤금선아), 그리고 무책임한 막내아들 승낙(곽민규)까지 모두 각자 삶에 지치고 찌들어 있다.

영화 '이장'은 남처럼 흩어져 살던 이들 가족이 모이게 된 1박2일의 여정에 포커스를 맞춰, 세기말적 가부장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공민정은 억압과 차별을 받아온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 영화에서 극의 중심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의 특장점이라 할 수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디테일한 연기가 빛을 발한 건 물론이다. '82년생 김지영'(2019)을 통해 똑 부러지는 성격의 김은영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가 또 한 번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얼굴을 흥미롭게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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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은 정승오 감독의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어떤 점에 끌렸나.

"재밌고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아서 잘 읽혔다. 5남매가 극을 이끌어가는 로드 무비 형식이다 보니 평소 만나고 싶었던 언니·동생들과 계속 얼굴을 맞대며 작업해 나갈 수 있다는 점도 기대됐다. 이런 기회가 정말 흔치 않기에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 한국의 가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나아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그 한 축을 책임지고 있는 셋째 금희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했나.

"어떤 캐릭터든 그 인물만의 차별된 성격이 있고, 습관이 있고, 행동이 있다. 그런 부분들을 많이 생각했다. 금희는 샌드위치처럼 5남매의 딱 중간에 껴있는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위아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을 테니 언니들을 케어하고 동생들을 다루는 건 누구보다 능숙했을 것이다. 그렇게 늘 중재자로 살아왔지만 그렇다고 마냥 평화주의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접근했다."


아버지 묘 이장 앞, 1박2일 모인 가족
각자 삶에 지치고 찌들어 있는 오남매
언니·동생사이 중재자로 살아온 금희
여성 중심적 서사 이야기 중심추 역할
가족간의 속살 해부 디테일하게 연출

10代때 연극통해 본 또다른 세상 감탄
단편 위주 하다 '82년생 김지영' 주목
연기하는 동안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또 보고싶은 배우로 사랑 받고 싶어



▶그 부분이 잘 드러난 게 이장 보상금으로 나온 500만원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놓고 장녀 혜영이 "나눠 가져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금희 입장에선 무척 서운했을 것 같다.

"맞다. 막 시끄럽게 소리를 내거나 주장을 하진 않지만 자기를 서운하게 만들거나 치부를 건드리면 굉장히 날이 서는 친구다. 500만원이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변변한 수입이 없는 남자 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금희는 한 푼이라도 아쉬운 입장이다. 내심 그동안 언니와 동생들을 알뜰살뜰 챙겨줬으니 이 돈만큼은 내게 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때문에 돈을 나누자는 큰 언니의 말에 배신감을 느끼고 진짜 이게 가족인가 싶으면서 서운함 감정이 들었을 거다."

▶실제 가족관계와 본인의 성격은 어떤가.

"장녀이고 여덟 살 터울의 남동생이 한 명 있다. 평소에는 자기주장이라는 게 거의 없는 편이다.(웃음) 스스로에게 의심이 많기도 하고 확신할 수 없어서 늘 조심한다. 그래서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불합리하거나 잘못됐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고 보면 평화주의자인 금희와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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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금희 말고 맡고 싶었던 역할이 있었나.

"누구보다 장녀의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가 됐지만 솔직히 연기하면 재밌겠다 싶은 역할은 돌직구 넷째 혜연이다. 내가 놀리고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 역할을 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우들은 가끔 실제의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감독님이 '민정씨는 금희예요'라고 딱 못을 박더라."(웃음)

▶5남매를 통해 가족의 속살을 해부하고 그 한편에서 남자들의 무능함을 질타한다. 남자 감독이지만 누구보다 여자들의 심리와 감정을 잘 이해하고 풀어냈다. 금희 역할을 위해 감독이 따로 주문한 게 있었나.

"나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여성 중심의 서사인 데다 너무 디테일해서 처음에는 여성 작가가 쓴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나의 편견이다. 아무튼 감독님 자체가 많이 열려 있는 분이다. 당신의 얘기보다 내 얘기를 많이 들으려 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 이야기를 이해했는지, 또 어떤 부분을 공감했고 공감이 가질 않는지,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 등 나에 대해서 많이 알려고 노력했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에게도 똑같았다. 감독님이 만들고 싶어 하는 색깔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전적으로 나에게 맡겨 줬다."

▶사건이 적고 볼거리가 많지 않은데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건 현실적인 공감대가 잘 전달됐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호흡도 좋았을 것 같은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모두 처음 만나는 배우들인데 진짜 가족처럼 호흡이 정말 잘 맞았다. 제작 여건이나 상황이 녹록지 않은 대신, 촬영 현장에서 느껴지는 유대감은 더 끈끈했던 것 같다. 늘 왁자지껄하고 외로울 겨를이 없었다. 특히 나는 언니들이 있는 5남매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좋았다. 가족이 많은 집에서 살다 보면 재밌는 일이 많겠다 싶더라. 티격태격했던 극 중 상황까지 그리울 정도다."

▶연기자로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 그 가난을 자식에게 대물림해 주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에겐 공부만 시켰다. 건축업을 하는데 늘 바쁘셨고 집에 늦게 귀가했다. 당신께선 사회에 나가 기죽지 않고 살아가려면 공부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때문에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대신 학원을 하나라도 더 보내려고 더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나 역시 공부만이 내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공부도 꽤 잘했다. 그러다 중3 특별활동 시간에 연극을 다 같이 보러 갈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공연한 연극 '지하철 1호선'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보는 내내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감탄하면서 봤다. 나도 모르게 눈물도 흘렸다. 여고에 가서도 그때의 감정과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한번은 교육방송의 한 장면을 친구들 앞에서 흉내 낸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친구들이 엄청 좋아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느낌이 마냥 신기했다. 배우라는 개념을 떠나 남을 웃기는 일이 이렇게 즐겁고 신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개그맨 시험에 응시할 생각까지 했다. 물론 부모님은 내가 공부하길 원했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반대는 하지 않았다. 이젠 누구보다 날 믿고 응원해준다."

▶장편 '누구나 제 명에 죽고 싶다'(2012)를 데뷔작으로 그동안 꾸준히 필모를 쌓아왔다. 하지만 주로 독립영화들이라 대중과 만날 기회는 적었다. 그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은 당신에게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볼 수 있는데.

"필모를 보면 출연작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 단편 위주라 작품 수에 비해 일을 한 시간이 많지 않다. 단편은 5일 내외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1년으로 봤을 때 채 한 달도 되지 않는다. 그 외 시간은 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솔직히 힘들었다. 첫 데뷔작을 운 좋게 주연으로 시작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기에 나름 기대를 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열심히 하고 노력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재작년부터 드라마를 포함해 긴 호흡의 작품들을 조금씩 해나갔다. 여성을 서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덕분에 나도 기회들이 조금씩 생겼고, 드라마 '아는 와이프'(2018), 영화 '82년생 김지영' 등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게 됐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장'과 마찬가지로 최근 여성이 중심이 돼 서사를 이끌어가는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여배우로서 포부를 가질만한데 욕심이 나는 장르나 캐릭터가 있다면.

"아직은 인지도가 없으니 내가 주도적으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욕심을 내본다면 꽤 비범한 인물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평소에 비구니 스님의 삶이 궁금했다. 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찾아봤는데 다양한 삶을 살다가 속세를 떠나온 분들이 많은 것 같더라. 그 전사가 궁금하고 지금 스님의 삶도 궁금하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꼭 참여하고 싶다. 또한 현실에서 겪기 힘든 일이나, 내가 겪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겪어볼 수 없을 것 같은 극적인 사건을 겪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 소중하고 신기한 체험일 텐데 나 스스로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내 얼굴들이 궁금하다."

▶어떤 연기자로 대중에게 기억되고 싶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와 철학이라면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힘은 문화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 변화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느냐는 내 몫이 아닌 것 같고, 함께 (작업)하는 사람에게 늘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고 싶다.

같이 일하는 동료나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내가 있으면 즐겁고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관객에게도 '저 배우는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랑받고 싶다."

글=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스타빌리지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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