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 이야기-2] 왕희지 '난정서'(하)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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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26 11:08  |  수정 2020-05-26 13:11  |  발행일 2020-05-27 제19면
왕희지-난정서(저수량)
당나라의 대표적 서예가 저수량이 베껴 쓴 '난정서'. 왕희지의 '난정서' 원본은 당태종 무덤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저수량, 구양순, 풍승소 등의 임모본이 전하고 있다.

당태종은 본인도 서예를 좋아하고 붓글씨를 잘 썼는데, 왕희지의 작품을 각별히 좋아해 숭배할 정도였다. 왕희지의 글씨를 배우려고 노력도 했던 그는 특히 왕희지의 작품을 수집하는데 온 정력을 쏟았다. 당대의 명필 저수량 등의 도움을 얻어 왕희지의 서예 진품 수집에 나선 결과 작품들을 거의 망라할 수 있었다. 2천290여점을 수집했다. 하지만 '난정서'는 구하지 못했다. 유명한 난정서에 대해 소문을 듣고 있던 당태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려고 했다.


이 난정서는 왕희지의 7대손 지영(智永) 스님에게 전해졌다. 서예가이기도 했던 지영은 출가한 승려여서 자손이 없었다. 그래서 100세로 입적하게 되자, 죽기 직전 이것을 제자인 변재(辯才)에게 물려주었다. 당태종은 이를 알고 세 차례나 회계의 영흔사에 있는 변재를 궁중으로 불러 추궁했으나, 그는 끝까지 모른다며 버텼다.


그러자 재상 방현령이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감찰어사 소익(蕭翼)을 평범한 서생으로 변장시켜 알아내게 하자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소익을 보내 어떻게든 구해오게 하였다. 소익은 일처리 솜씨가 뛰어난데다 글씨와 그림에 대한 식견과 안목도 탁월했다. 여러가지 잡기에도 능했다. 소익은 당태종으로부터 왕희지와 왕헌지의 작품을 몇 개 빌려 지닌 채 길손으로 위장, 변재 스님에게 접근했다.


매일 스님과 바둑을 두며 서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을 통해 친해지고 신뢰를 얻은 뒤, 하루는 소익이 왕희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신은 왕희지 작품을 가지고 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다며 보여주었다. 그러자 변재는 진품은 맞는데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의식 중에 난정서 진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어 지영선사가 직접 준 것이라고 소장 경위를 밝히면서 결국 대들보 위에서 꺼내 보여주게 된다. 소익은 변재가 없을 때 난정서를 훔쳐 태종에게 갔다 바쳤다.


변재는 나중에야 속아서 도둑맞은 걸 알았지만 황제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충격을 받은 그는 그날 이후 죽으로 연명하다 1년 후 입적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태종은 비단 3천필과 쌀 3천석을 보냈다. 


태종은 풍승소(馮承素), 조모(趙模) 등 뛰어난 서예가들을 시켜 임모본을 만들게 했다. 이 중 풍승소의 임모본이 가장 원본에 가까워 이를 고관대작들에게 나눠주게 했다. 난정서 원본은 그 후 당태종이 죽을 때 그의 아들에게 귓속말로 "내가 난정서를 가져가고 싶구나"고 했고, 유언에 따라 이 진품은 그의 무덤인 소릉에 부장품으로 묻히게 되었다. 


지금 전하는 난정서는 당태종이 확보한 것을 보고 베껴 쓴 풍승소의 임모본(당나라 중종 연호인 '신룡(神龍)' 도장이 찍혀 있어 신룡본이라 함.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저수량, 구양순, 우세남 등의 임모본이다. 


한편 난정서가 묻힌 소릉은 300년 후인 당나라 말기 혼란시대에 후량의 절도사 온도(溫韜)에 의해 도굴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원본 '난정서' 행방에 대해서는 논쟁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지금까지도 그 결론은 말끔하게 나지 않고 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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