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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농촌문화운동가 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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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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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드미마을 농촌유학 온 아이들, 잘 놀고 바른 인성 갖추는 게 최고의 경쟁력”

교육·문화기획가로서의 삶을 살던 중 한국 교육의 미래가 너무 성적위주로 굳어진 것에 실망을 하고 신개념 농촌유학의 신지평을 열기 위해 단양군 영농조합법인 한드미마을로 들어와 지금은 농촌문화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이은숙 한드미마을 교육팀장.
2005년 5월21일 노무현 대통령이 충북 단양을 전격 방문한다. 이날 대강면 대강양조장에서 여섯 잔의 막걸리를 연거푸 마셨고 이 마을까지 방문한다. 단양군 가곡면 소백산 자락인 세밭계곡 언저리에 깃을 튼 ‘한드미마을’. 그때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숲 속에 있는 정자도 ‘어래정(御來亭)’으로 개명된다. 14년이 지난 지금 이 마을은 ‘농촌유학 1번지’로 전국적 주목을 받고 있다.

한드미마을은 이제 어엿한 영농조합으로도 발돋움했다. 마을 어르신 모두 조합원이다. 농산물은 거의 조합에서 수매한다. 그걸 갖고 약선요리를 만들어 농촌유학생에게 제공한다.

이 마을은 1971년 영국에서 시작된 신개념 워킹홀리데이인 ‘우프(Woof)’에도 가입돼 있다. 여기 와서 하루 4~6시간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다. 얼마전 시카고 출신 한 배우도 이 마을의 풍광에 반해 2개월간 머물다 갔다.

귀촌한 4가구를 포함, 현재 모두 36가구가 있는 한드미마을. 한때 버스조차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두메산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4차산업혁명에 걸맞은 신개념 교육에 대한 욕망을 가진 학부모와 그 자녀들을 위한 ‘에코 빌리지 스쿨(Eco village school)’로 변모 중이다. 조합과 연계된 ‘농촌유학센터’ 때문에 교육운동가들에겐 ‘농촌유학운동’의 출발지로도 불린다. 영어 때문에 외국으로 유학보내는 것보다 심성을 위해 농촌으로 유학을 보내는 게 더 미래지향적이라는 걸 절감한 학부모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르신들은 농사의 달인, 그리고 전래동화를 구수하게 풀어낼 줄 아는 스토리텔러. 때때로 아이들을 위한 간식까지 만들어준다. 마을 자체가 ‘교사’인 셈. 현재 초등학생 28명, 중학생 14명이 한드미마을로 주소를 이전했다. 아이들은 일어나면 대곡분교로 등교를 한다. 하교하면 8명의 교사들이 학생들의 학부모 구실을 한다. 밥도 챙겨주고 계곡에서 함께 물장난도 친다.

이은숙 한드미마을 2년차 교육팀장. 그녀의 닉네임은 ‘연두샘’. 빵샘, 빽샘, 단아샘, 자두샘, 대공샘, 백호샘, 민들레샘, 당나구샘, 고모샘 및 외국인 근로자들과 오순도순 살고 있다. 한때 대구경북권에서 멀티플레이어 문화기획가로 살던 그녀가 갑자기 이 산골로 온 이유를 알기 위해 단양으로 갔다. 그녀는 전날 모처럼 학부모와 학생들이 함께한 캠프파이어를 진두지휘했다. 목걸이 대신 토끼풀을 목에 걸고 있다. 빨강 안경, 그리고 노랑 티셔츠. 통통한 표정. 5월의 싱그러운 신록 속 그녀도 어엿한 풀꽃이다. ‘천직’을 찾은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이 당신더러 ‘여성 상록수’라 하더군요. 학창시절이 궁금합니다.

“왜관 옆 과수원집 막내딸로 태어나 말괄량이 삐삐처럼 자랐습니다. 왜관 순심여고 시절만 해도 여전히 순진하고 촌티를 못 벗어났죠. 엄숙한 학교 분위기 속에서 나만의 재기발랄한 끼를 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는 데 도움을 준 분이 바로 홍현기 미술선생님이었어요. 덕분에 경북대로 가서 미술을 전공하게 되죠. 미술이 절 야생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대학 1학년 때 아버지 트럭을 몰고 학교에 가기도 했어요. ‘트럭 모는 여대생’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제가 캠퍼스 잔디밭에 모여 막걸리 먹고 데모가를 부르던 마지막 낭만세대였던 것 같습니다.”

▶졸업 후에는 어떤 일부터 시작했습니까.

“대학시절 4년 줄곧 저는 칠곡군 지천면 신동성당에서 주일학교 교리교사로 봉사를 했어요. 이때 돈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정말 보람되고 즐겁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졸업 후 미술학원을 경영하며 아이들의 심성과 색깔과의 상관관계를 깊게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깔이 다를까? 그게 궁금해서 색채심리학을 파고들었습니다. 무채색 계열과 유채색 계열, 그게 내성·외향적인 성격으로 분류되는 패턴을 추적했죠. 무채색 아이에게 유채색, 유채색 아이에게 무채색의 매력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스승이 좋아하는 색을 아이에게 강요해선 안 됩니다. 모든 색깔이 존중받아야죠. 그리고 남이 좋아하는 색에도 관심을 둬야죠. 학원을 운영하며 대구가톨릭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해서 전문성을 더 키워나갔습니다.”


농촌문화운동가의 삶 ‘여성 상록수’
대구경북 멀티 문화기획가로 활동
울릉에서 미술 지도 ‘섬마을 선생님’
농촌과 문화 교육 운명처럼 다가와

국내 첫 농촌유학센터 ‘한드미마을’
심성 키우는 ‘미래가 있는 산촌 학교’
아토피 심한 아이·모험 강한 아이…
마을자체가 교사, 교사들이 학부모
밥 챙겨주고 자연속에서 함께 놀이
1년간 사계절 캠프 자기주도적 체험
스스로 규칙 만드는 ‘동그라미 장터’


▶무슨 운동가가 되려면 큰 고비를 겪어야 된다고 하죠.

“생애 가장 큰 슬픔으로 인한 전환기가 있었습니다. 2003년 어머니, 3년 뒤에는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어요. 그 전까지 이어진 제 삶은 그냥 워밍업 수준 같았어요. 부모의 부재, 크게 한방 맞았죠. 인생의 큰 숙제 하나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달라지는 세상을 만났어요. 누구의 자식이 아닌, 그냥 내 인생을 살자고 다짐합니다. 상실의 슬픔이 동시에 자유로운 시간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찾기 위한 싸움이 시작됐겠네요.

“‘진짜 이은숙 찾기’의 나날이었죠. 밥줄이었던 미술학원도 미련없이 정리합니다. 대학교에서 제의한 아동미술학과 주임강사 자리도 거절했죠. 그리고 내리 3년을 무직으로 지냈습니다. 문화센터에 나가 수강생 신분으로 강의도 듣고 맛집도 찾아다닙니다. 찻집에서 만난 인연들과 동호회를 만들어 차·커피·와인공부도 합니다. 또 ‘영남 백두대간 보전회’라는 환경단체 총무 자격으로 3년간 정말 다양한 시민운동권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취함’이란 시를 정말 좋아하게 됐죠. 어떤 일에 취해 있는 내가 무작정 좋았어요. 무료한 시간에는 바느질에 몰입했습니다. 덕분에 2006년 수성아트피아에서 ‘패브릭 퍼포먼스-手舞’란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어요. 가나자와 국제 교류살롱 초대전, 통영 펄 뮤지엄 초대전, 대구예술발전소 등 다수의 초대전을 경험했습니다.”

▶몇 회 전시했다고 해서 전문작가가 되는 건 아닌 듯합니다만.

“그냥 생활예술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술쪽은 아닌 것 같아요. 제 심장을 가장 뜨겁게 만드는 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할 때’였습니다. 어느날 ‘선생님 덕분에 미술 대학에 갔어요’라며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저를 지도자로 터닝하게 만든 계기가 됩니다. 다시 교실로 돌아갔어요. 김천 지역의 여러 학교 기간제 미술교사로 경험을 쌓던 중 울릉도로 가게 됩니다.”

이은숙 팀장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근처 텃밭으로 데려가 자기만의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면서 농사가 가장 재밌는 일임을 깨닫게 만들어준다.
미술을 전공한 이은숙 팀장은 틈틈이 아이들과 식물, 그리고 색채를 중심으로 현장체험적인 심리교육을 진행한다.
▶울릉도에선 어떤 교육운동을 전개합니까.

“울릉교육청 소속 순회 방과후 미술강사로 채용된 겁니다. 꿈에도 그리던 도서벽지에서의 삶이 시작된 거죠. 다니던 중학교를 사직하고 기꺼이 노처녀 섬마을 미술선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울릉도의 자연을 그리게 했습니다. 매일 형형색색 바뀌는 울릉도의 석양은 그 자체가 경이로움이었습니다. 뭐랄까, 색채 마술사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감상하는 듯했죠. 퇴근 후 읍내에서 놀다가 보름달이 떠있는 해안도로를 따라 사택으로 돌아올 때 바다 위에 반짝이는 파도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 눈이 부셨습니다. 거기서 만난 섬마을 처녀 선생 다섯이 모여 툭하면 음악·미술·문학이 어우러진 흥겹고 즐거운 인문학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3개월 동안 매일 3시간씩 시험치듯 치열하게 그림 공부를 했던 제자 세명이 모두 부산 국제디자인학교에 들어갑니다.”

▶참, 카멜레온 같은 측면이 많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울릉도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육지로 돌아온 저는 대구시문화원연합회에서 문화기획자로 잠시 활동했어요. 대구 차문화제, 문화품앗e, 대구 학생 서예대회, 어르신 축제 등의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농촌과 문화, 그리고 교육이란 영역이 하나로 뭉쳐지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 운명처럼 다가 온 것이 한드미마을이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한드미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는지요.

“인터넷을 통해 이 마을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농촌유학이란 말이 좋아 직접 e메일로 지원했죠. 저는 이 마을의 미래를 일궈내고 국내 첫 농촌유학센터를 만든 정문찬 대표의 열정에 엄청 감동했습니다. 그 분은 농촌살리기운동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13년간 고생한 끝에 여기를 미래가 있는 산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폐교 위기의 대곡분교를 유지하기 위해 36년 전통의 일본 산촌유학마을을 벤치마킹하기도 했어요.”

▶학교 운영이 궁금하네요.

“맞벌이부부의 아이, 아토피가 심한 아이, 학원 가기 싫어하는 아이, 패스트푸드에 중독된 아이, 모험심이 강한 아이…. 입교 목적도 다양합니다. 한드미 농촌유학은 1주일간의 유학체험 등을 경험한 뒤 유학을 결정하면 됩니다. 가곡초등 대곡분교, 소백산중학교로 전학 신청을 하게 됩니다. 이후 1년 동안 사계절캠프와 다름없는 공동생활로 자기주도적 모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현재 13기가 들어와 있습니다. 1·2기 졸업생들이 벌써 대학생이 되어 방학 때마다 보조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공부가 아니라 잘 노는 것, 그리고 ‘인성’입니다. 인성이 최고의 경쟁력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입학하면 휴대폰부터 반납받아 2주마다 2박3일 집에 잠시 다녀올 때 돌려줍니다. 저희들은 인성의 출발이 ‘인사’라 여깁니다. 지난 어버이날에는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카네이션을 달아주도록 유도했습니다.”

▶재밌는 제도와 규율도 많을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건 월 한차례 열리는 ‘동그라미 장터’입니다.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면 교사들이 통장에 동그라미를 그려줍니다. 10개 정도 모이면 컵 라면 2개 정도 살 수 있죠. 또 ‘휴대폰 1시간 사용권’도 경매에 부칩니다. 동그라미를 가장 많이 제시한 아이한테 낙찰되죠. 아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규칙을 만들도록 도와줍니다. 농사에도 동참하게 합니다. ‘신개념 대안학교’라 보면 됩니다. 이를 위해 교사들도 모두 이 마을에서 숙식합니다.”

▨ 한드미마을 (043)422-2831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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