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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의 철학편지] “비판·비난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바뀌지 않는 지식인처럼, 나도 그 한명일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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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뉴스부기자
  • 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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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올해초부터 읽고 공부하면서 내가 많은 놀라움을 가졌다는 것을 태형이 너에게 전해야겠다. 수십 년도 전, 나의 고교 시절 대봉성당(대구시 중구) 옆 작은 책방에서 샀던 흰 표지의 두툼한 순수이성비판. 그러나 내용은 너무나 난해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솔직히 난 한 페이지도 넘기기 어려웠다. 20대 때 철학과 학부에 들어갔을 때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화두였기 때문에 칸트는 철학사의 위대한 한 인물이었을 뿐 우리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매달려야만 했단다. ‘물자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그렇게 어려운 관념론을 ‘지껄이는’ 칸트, 난 그를 ‘부르주아 철학자’에 불과하다고 외면해 버렸어.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 우리의 ‘공부’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되고 얕고 어리석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이건 책이라는 텍스트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 번역된 책도 별로 없던 일제강점기나 광복 이후에 살았던 인물들의 독서 편력과 깊이를 보면서 나는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단다.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한 번 하도록 하자.

아무튼 책을 읽으면서 가져야 될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오늘 너와 이야기해 보고 싶구나. 얼마 전 푸코의 책(‘비판이란 무엇인가’)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고 많이 놀랐단다. 좀 길지만 인용해 볼게.

“1784년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텍스트를 썼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구 사상사에서 철학이 ‘오늘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제 생각에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제를 철학 영역 내에 도입한 것, 요컨대 철학의 범주로 ‘오늘’이라는 문제를 도입한 것은 우리의 철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대단히 이상하며 대단히 결정적인 어떤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도 자기 국가의 역사나 사회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들보다 훨씬 더 정치 문제에 개입했던 홉스나 흄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현실태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우리는 우리의 동시대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정식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칸트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칸트와 심지어는 3대 비판서를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입각해 재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면에서 순수이성비판은 말하자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순수이성비판이 문제에 대한 답변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물자체’도 ‘오늘’의 문제와 대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푸코의 칸트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여. 분명 칸트는 자신의 논의 곳곳에 ‘인간인 한에서’라는 단서를 박아둔다. 가령 외계인이 사물, 지식, 우리의 오늘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칸트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겠지. 중요한 것은 오직 인간이고 오늘이라는 것.

관념론 철학의 최절정에 서 있는 철학자의 중심 화두가 오늘이라는 주장은 정말 놀랍지.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며 현실에 눈감고 아예 우주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러한 비판은 자주 오늘의 굴레에 갇혀버리는 일이 빈발해. 이게 무슨 말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푸코의 논의를 좀 더 따라가 보자.

푸코는 칸트 당시의 계몽의 격언이자 표어가 ‘감히 알고자 하라(Sapere aude)’라고 말해. 이 격언은 프리드리히 2세의 ‘복종하기만 하면 원하는 만큼 이치를 따져도 좋다’는 말과 대구를 이룬다’고 설명해. 다시 말하자면 계몽으로서의 비판이 기존 체제의 오늘에 갇혀버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이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일 거야. 마치 비판과 비난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바뀌지 않는 지식인처럼. 물론 나 자신도 그 한 명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칸트는 복종의 굴레에서 빠져나왔을까. 푸코는 칸트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말해.

“타인이 복종하라고 명령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자기 자신의 인식을 스스로 올바른 관념으로 만들게 될 때, 바로 그 순간 자율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고 복종하라는 명령에 더 이상 순종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아니 차라리 복종하라는 명령이 자율성 자체에 의거하게 되리라.”

태형아, 오늘도 늘 하던 이야기처럼 되어버렸지만, 공부는 오늘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자.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존재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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