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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어른이 되는 순간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자신의 반려견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름은 뭉이. 동물병원에서의 검사결과 폐와 혈액에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는 결국 입원치료를 결정하였다. 면역체계가 파괴되어 생사를 오갈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여느 반려동물이 그러하듯 뭉이는 그를 아빠처럼 믿고 따랐다. 퇴근 후면 그를 제일 먼저 반기는 것도 뭉이였고, 소파에 드러누워 그와 함께 잠드는 것도 뭉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뭉이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얼굴은 가장 빛나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가정에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곁엔 항상 그를 신뢰하고 응원하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고, 때론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그를 대하는 착하고 순한 아들이 있었다. 그런 가정환경을 잘 알기에 난 그의 뭉이 사랑이 조금은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냥, 정(情)이 많은 사람? 심성이 착하고 고운 그런 사람 말이다.금요일 오후면 난 즐겨 그의 집을 찾았는데, 우리가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뭉이와의 산책'이었다. 일상에 지친 나에게 있어 그 시간은 진정 치유의 시간이었다. 뭉이는 나를 '이웃집 아저씨' 이상으로 늘 반겨주었다. 뭉이 때문인지 난 아내에게 반려견 입양을 자주 제안했다. 하지만 아내는 단호했다. 이제 겨우 자식들을 독립시켰는데 또 양육이란 지난한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내가 산책시키고, 똥도 치우고, 다 할게…"라고 해도 아내의 고집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난 뭉이에게 더 정이 갔는지도 모른다.뭉이가 입원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우린 대구그랜드호텔 인근에 있는 한 편의점 앞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뭉이의 투병과정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은 더없이 핼쑥했고, 피부는 거칠었으며,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자식이 아픈 것도 아닌데…'란 말 따위는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아니 극히 무례한 표현이었다. 그래, 뭉이는 그에겐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고, 진정 혈육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며,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다고 했다. 폐에 생긴 염증과 혈소판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안색이 많이 좋아지고 있어 다행이야"라는 말과 함께 병원에서 보내준 뭉이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그래, 그날은 내가 그를 만난 이후 가장 진지하고 엄숙했던 시간이었다. 뭉이가 아프기 전까지 우린 소년이었다. 뭉이와의 산책을 마치면, 우린 항상 국밥을 먹고, 인형뽑기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퇴직 후의 삶에 관한 가벼운 농담을 나누었다. 조그마한 2층 상가를 구입하고, 1층을 두 칸으로 나누어 동네책방과 뽑기방으로 꾸미고, 그렇게 문학교실을 열어 동네 사랑방으로 자리 잡는 것. 닥쳐올 냉혹한 현실 따윈 애써 외면한 채 우린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낭만만을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우린 어리고, 또 어렸다.하지만 오늘 그는 어른이었다. 책임이라는 그 무거운 단어가 그의 인생 한편에 늘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난 처음으로 그의 언어에서, 그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무언가를, 아니 그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 그 고되고 지난한 일 한가운데에 우리가 있다. 아직 소년이라고 그렇게 매일 되뇌어 보지만, 현실의 우린 결국 어른인 채로 시지프스의 형벌을 견디며 텅 빈 정상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뭉이의 쾌유를, 아니 모든 아픈 반려동물들의 쾌유를 빈다.우광훈 소설가우광훈 소설가
[노윤구의 관광산업] 스토리텔링으로 지역관광 리디자인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스토리텔링은 어떤 논리적인 설득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강력하다. 이 때문에 스토리텔링이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활용되고 있다. 21세기는 더 이상 물건이 아닌 꿈을 파는 '꿈과 감성의 시대'라고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얀센은 예언했다. 획일적 대량 공급시대를 거쳐 수요 맞춤형 공급시대가 지나고 꿈과 감성에 호소하는 드림 소사이어티가 도래함에 따라 물량 중심 관광개발은 더 이상 현대인의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에 단순 관광에서 체험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체험관광으로 변화되고 방문 장소의 이야기를 생생히 전달받을 수 있는 스토리텔링 관광으로 변화되어 왔다.스토리텔링 관광상품 개발을 통해 관광객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와 함께 볼거리, 즐길 거리, 먹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관광산업발전과 함께 지역관광산업 발전을 도모해 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적 정서 요인과 결부한 특성상 장기적 안목에 입각한 지속적이고 전략적인 정책추진이 아닌 단발적이고 유행에 민감한 정책추진으로 치밀한 사업구상 및 모니터링을 통한 문제점 도출과 이를 적용한 사업추진전략이 미약한 것이 현실이다.동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한 '플란다스의 개'가 지니는 경제적 가치는 40억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며, 그 저작권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고, 관광수입은 벨기에로 떨어지는 윈도 이팩트(window effect)이다. 스토리텔링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세계 경제의 큰 흐름에서 이야기 경제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역량은 바로 스토리텔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광 스토리텔링은 숨어있는 지역의 이야기를 자원으로 재생산하여 소비자인 관광객에 판매할 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 먼 나라에서도 우리 지역을 인지하고 찾아오게 하는 매력적이고 강한 힘을 지닌 신산업이다. 이제 우리는 남과 다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 감성에 호소하는 콘텐츠가 필요한 시대에 매력적인 관광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그 지역만의 관광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구현해 나가야 할지 전략적 접근을 시도하고 실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4차산업 발전에 따른 디지털 스토리텔링, 관광 스토리텔링 산업 등 OSMU(one source multi-use)를 활용하여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창의적 관광 스토리텔링 관련 웹툰, 웹소설, 유튜브 크리에이터, 라이브커머스, 이모티콘, 멜로디 작곡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양성 사업과 문화산업에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경북대 RIS 전담교수노윤구 경북대 RIS 전담교수
[유영철 칼럼] '길위에 김대중'을 보면서
대학 서클 선배한테서 지난 11일 전화가 왔다. "시내 영화관에서 어제부터 '길위에 김대중'을 상영하고 있으니 한번 보시라! 일찍 종영될지 모르니 빨리 보시길!"하고 권했다. 대학교수로 퇴직한 그 선배는 개봉 첫날 영화를 봤다고 했다. 약속한 터라 며칠 뒤 가까운 영화관에 예매하고 집사람과 같이 관람했다.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보면서 사실 군데군데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 전후좌우 관람석도 흐느끼는 반응이었다. 마지막에 미국 망명 후 1987년 광주 망월동 5·18희생자묘역을 찾으면서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는 김대중을 보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다소 알고는 있다 해도 일목요연하게 제시된 다큐를 보면서 탄압과 박해와 용서와 아량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 3부작 기획 중 1부이다. 100년 전인 1924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 출생, 목포상고 졸업, 해운회사 경영, 신문사 경영, 1961년 민의원 당선(강원 인제) 정치입문, 같은 해 5·16, 1963년 국회의원 당선(전남 목포),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1972년 10월유신, 1973년 일본 동경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 1979년 10·26, 1980년 5·18, 1981년 내란음모죄 사형선고, 1982년 미국 망명, 1987년 귀국, 1부는 같은 해 13대 대선 직전까지의 생애를 조명했다. 잘 몰랐던 부분,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도 많았다. 이런 장면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짚어볼 수 있었다. 올 상반기 나올 2부는 1987년 13대 대선후보 중심의 이야기를 담고, 하반기 나올 3부는 1998년 15대 대통령 취임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과정 등을 다룬다고 한다.1부를 보면서 김대중이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투옥, 납치 등 목숨마저 위태로울 정도의 탄압과 박해를 당했는데도 실제로 박정희와 전두환을 용서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용서만이 진정한 대화와 화해의 길이다. 정치의 안정은 용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980년 사형수로 있을 때 김대중이 쓴 옥중일기의 첫 번째 주제가 용서였다.최근 국내외 학자들은 이 같은 김대중을 사상가로 조명하며 '사상가 김대중'(지식산업사)이란 책을 출간했다. 미국 센트럴미시간대 철학과 호프 엘리자베스 메이 교수는 김대중의 정치가 사상적 특징을 갖게 된 배경으로 그의 신앙에 주목하며 "개인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서 김대중을 이끈 원칙은 기독교 신앙의 영향이었다"고 설명했다. 김대중은 1970년대의 구금과 수감 중에서도 기독교적 관점을 적용해 공포, 무서움, 불안 등과 같은 '내적 장애'를 없애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분석했다. 용서와 화해라는 김대중의 정치철학을 사상 차원에서 평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구는 경북은 어떻게 보는가. 왜 그렇게 여기게 됐을까. 누구에 의한 것인가. 우리는 김대중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난 12일 일본 동경에서 열린 '길위에 김대중' 무료 시사회에서 경상도 출신의 한 여성(49)은 "우리 또래 경상도 사람들은 김대중은 빨갱이에 대통령병 환자라고 세뇌돼 살아왔다. 김대중에 대해 잘 몰랐는데 오늘 정말 영화 보러 오길 잘한 것 같다. 이 영화는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오마이뉴스 2024년 1월15일 보도). 1924년 1월6일 태어난 김대중은 2009년 8월18일 별세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이다. 이제는 김대중을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좋겠다. 언론학 박사유영철 (언론학 박사)
[시시각각(時時刻刻)] 국민의힘과 제3지대, 그리고 우리의 선택
총선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새해 들어 연일 각종 SNS 채널과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유권자들로부터 선택을 받기 위한 국회의원 예비후보들의 활동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의 정치가 국민들로부터 날이 가면 갈수록 관심과 그 효용가치가 외면받는 작금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선택을 받으려는 후보자들의 활동은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최근 여의도 정치권은 부산하고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전통적인 여·야 양당은 각자 소속 구성원들의 공천과 직결된 정치적 이해관계 상충으로 인한 내부갈등으로 더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낙수효과를 노리고 제3지대 정치 세력화를 위한 신당 창당과 합당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국민의힘은 용산 대통령실과 한동훈 비대위원장 간 갈등으로 비칠 수 있는 공천 논란으로 지난 한 주간이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하지만 서천시장 화재현장 동반점검 연출을 통해 어느 정도 급한 불은 끈 상태로 보인다. 민주당 역시 비(非)명계 탈당과 자객공천 움직임 그리고 이재명 대표의 사당화(私黨化) 양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이러한 여·야 양당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수권정당으로서 정치권 맏형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더군다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아직까지도 법률에서 정한 시한을 지키지 못하고 선거구 획정과 비례대표제 선출방식에 대한 여·야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제3지대 신당 추진세력들로 시선을 돌려보자.이준석 전 대표의 개혁신당과 양향자 의원의 한국의희망 합당 선언 및 이낙연 전 총리 측의 새로운미래와 비명계 탈당파 중심의 미래대연합은 공동창당을 추진 중에 있다. 여기에 군소 진보정당 역시 새판 짜기를 통한 제도권 진입을 다짐하고 있다. 유례없는 제3지대 정치세력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대구·경북의 국민의힘 후보자들은 제3지대 신당 출현 및 정치세력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지는 상황이지 않을 수 없다.이 틈바구니 속에서 과연 대구·경북 지역민들은 어떤 선택(選擇)을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절대적 강세를 보이는 국민의힘 후보를 선택해서 윤석열 정부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힘을 보탤지, 아니면 새로운 개혁과 미래를 내세우는 제3지대 신당 후보들을 선택해서 새로운 대구·경북의 정치질서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은 바로 유권자의 몫이다.지난 한 주간, 최근 몇 주간을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정치권은 혼란스러운 정국 상황을 마치 즐기기라도 하듯 그들만의 경쟁 속에서 과연 국민들을, 유권자들을 의식이라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할 정도이다. 그 어느 총선 때보다도 복잡한 셈법의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정치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 정치권이, 정치인들이 자성(自省)해봐야 할 대목이 어디인지는 명확해진다. 혁신과 변화, 미래를 화두(話頭)로 일전을 겨룰 국민의힘과 제3지대 신당 간의 총선 결과가 궁금해지는 이유이다.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과 냉철한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총선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이주엽 엘엔피파트너스<주> 대표이주엽 엘엔피파트너스 대표
[3040칼럼] 크레센도, 전쟁과 음악 사이
세계적인 지휘자 마린 알솝의 "맘껏 즐겨라"는 격려를 받으며 앳된 청년이 무대에 올라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다. 그의 연주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객들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마지막 크레셴도 구간이 끝나자 기립박수를 치며 열광한다. 금메달을 거머쥔 소년과 경연에 참가한 피아니스트들의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는 2023년 12월 개봉했다.이 영화는 2022년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앞서 언급한 청년은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18세 우리나라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이다. 임윤찬의 연주와 인터뷰 내용이 최근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청년은 '혼자 고립되어 외로운 순간 음악의 꽃을 피울 때'라고 한다. 고난도 곡이 쉽고 재미있게 들릴 만큼 그의 연주는 서사적이다. 어려운 부분을 틀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작곡가가 이 음을 왜 여기에 두었을까 고민한 흔적, 자신이 해석한 내용을 자신감 있게 전달해내는 연주를 들으며 "하늘에 있는 예술가들을 위해 연주했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영화 '크레센도'의 배경이 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동서 냉전이 치열하던 1958년 구소련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미국인 반 클라이번이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련은 예술, 문화, 과학 등 많은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었는데 차이콥스키 콩쿠르 또한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개최한 대회였다. 자국 참가자가 우승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미국인 참가자가 우승하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치적 이념과 현실에서의 갈등을 초월한 예술의 포용력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또한 러-우 전쟁 중에 개최됐다. 러시아의 출전을 보이콧한 다른 대회들과 달리 러시아의 출전을 허용하였고 영화 '크레센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참가자들이 서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담아냈다. 우크라이나 연주자 드미트리 초니는 자신의 연주가 어두운 시대에 치유의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말한다. 러시아 연주자 안나 게뉴셰네는 준준결승 무대에서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을 입고 피아노를 연주한다. 데뷔 전인 어린 신인들이지만 예술가로서 사명에 대해 각자의 철학이 깊다.안나와 드미트리가 나란히 은메달과 동메달을 수상하며 서로 포옹하는 모습은 극적이다. 음악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연주는 세상을 향해 평화를 외치는 절절한 마음을 마주하게 한다. 전쟁 당사국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주변국에게도 각자의, 그리고 공통의 울림을 준다. 이들의 연주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술은 단순히 우리에게 먹고사는 문제, 답답한 현실을 잊고 낭만적인 희망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 한가운데서 예술의 언어로 우리를 위로해준다. 마치 일제 식민 통치 때 시인 윤동주가 '서시(序詩)' '별 헤는 밤'과 같은 작품으로 시대의 아픔을 위로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크레센도' 확장판이 내일(1월31일) 개봉한다. 고인(故人)이 된 작곡가들이 악보 위에 수놓고 싶었던 메시지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가 일상에 지친 우리의 마음 또한 위로해 주리라 믿는다. 곽현지 (곽병원 홍보계장)곽현지 곽병원 홍보계장
[강준만의 易地思之]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국민사기극
지난해 7월 정부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사업을 최대 2년 이상 앞당기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50만 채 주택공급에 못지않게 주택에 따른 교통연결망을 제공하는 것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해야 한다"며 "모든 부처가 GTX 조기 개통에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한 덕분이다. 화끈해서 좋다.대통령은 지난 25일 의정부시청에서 열린 여섯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모두발언에서 "당장 올해부터 본격적인 GTX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A선부터 F선까지 전부 완공되면 수도권에서 서울 도심까지 30분대로 다닐 수 있게 된다"며 "이러한 좋은 교통 혜택은 수도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전국 대도시로 GTX 서비스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지방도 그렇게 배려해 주겠다니 고마운 말씀이다. GTX로 아산·춘천·원주까지 갈 수 있게 된다니 참 좋은 세상이다. 부·울·경, 대구·경북, 대전·세종·충청, 광주·전남 등 총 4개 도시권에는 최고시속 180㎞급의 x-TX(광역급행철도)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그렇긴 한데 '수도권 30분대 출퇴근 시대'가 마냥 좋기만 한 건지, '나쁨'이 '좋음'을 압도할 정도의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닌지 제대로 따져본 걸까? 문제는 지역균형발전이다. GTX 이전에 KTX가 있었다. 한겨레 선임기자 이춘재는 2022년 2월 KTX와 지역균형발전 관련 연구결과를 종합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KTX는 애초 고속화를 통해 지역균형발전을 달성하겠다는 목표와 달리 지역 간 격차를 오히려 심화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KTX 개통 이후 지방 중소도시의 지역내총생산과 인구는 감소하고 대도시는 증가하는 '빨대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속철도가 만든 '전국 1일생활권'의 수혜자는 결국 서울시민이었다."GTX는 다를까? 한겨레 경제에디터 김회승은 이미 2021년 7월 "GTX는 지방 인구와 경제력이 수도권에 더 강력히 흡수되는 빨대 효과를 부를 공산이 크다"며 이런 전망을 내놓았다. "수도권 진입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고, GTX 노선을 따라 줄줄이 더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서울 도심과 강남은 더 붐빌 것이다. 지금도 전 국토의 12% 남짓한 공간에 국민 절반이 모여 산다…지방 소멸은 더 빨라질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이 되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박종성은 2021년 9월 "GTX는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시키는 급행열차"라며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는 수도권과 지방 간의 균형발전을 역설했다. (그러나) GTX 노선 연장을 통해 거대 수도권 공동체 탄생을 부채질한 게 이번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다…좌초될 GTX 노선을 살리는 데 들인 노력만큼 소외 받는 지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무엇인가."2022년 대선을 맞아 거대 양당의 두 후보는 마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처럼 신나게 경쟁적으로 'GTX 확장'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들은 수도권 전역을 평균 30분대 생활권으로 연결하는 'GTX 혁명'이라는 꿈을 이루겠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나는 당시 두 후보의 공약을 비판하는 글을 썼지만, 대선이 끝난 지 한 달 후인 4월9일부터 방영된 TV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애청하면서 수도권 주민들의 출퇴근 고통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밝을 때 퇴근했는데, 밤이야. 저녁이 없어"라는 대사는 그런 출퇴근 전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수도권 주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하게 만들었다.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라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하고 많은 동네 중에 왜 계란 흰자에 태어나 갖고"라는 대사도 나로 하여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사는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기에 족했다. 자, 사정이 이와 같으니 우리 모두 솔직하게 이야길 해보자. 대선 후보들이, 아니 어떤 정부건, 수백만 수도권 주민들의 출퇴근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GTX 혁명'을 부르짖는 건 당연하거니와 칭찬받을 일일 게다. 그런데 왜 일자리는 서울에만 집중돼 있어야 한다는 건지 그걸 도무지 모르겠다. 134조원의 돈이 들어간다는 'GTX 혁명'이 완성되면 일자리의 서울 집중은 심화되고 또 교통난이 발생할 텐데, 그 돈의 일부나마 다른 지역 일자리를 위해 쓰면 무슨 큰일이 나는가?지방민들이 피해를 좀 보더라도 나라가 잘된다면, 지난 세월 그래왔듯이 또 참을 수도 있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저출산이 불러온 '지방소멸'과 그에 따른 '서울멸종'의 위기다. 지방만 죽는 게 아니라 서울, 아니 온 나라가 죽게 생겼다. 생존과 성공의 기회가 서울에 집중되면서 전국의 청년이 몰려드는 서울은 '초경쟁'의 아수라장이 되면서 결혼과 출산을 미친 짓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2022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0.78이었을 때 서울은 0.59를 기록함으로써 '서울공화국' 체제가 '서울멸종'과 '국가소멸' 위기의 주범임을 입증했다. 차라리 망할 때 망하더라도 우리 모두 이런 식으로 살아가자고 합의하면 화낼 일은 없을 게다. 그런데 역대 정권들은 기존 서울공화국 체제의 길을 따라가는 이른바 '경로의존'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입으로는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두 얼굴을 보여왔다. 이제 더 이상 그러지 말자. 희망고문도 정도 문제지 이런 국민사기극은 국민성마저 망가뜨릴 수 있으니 말이다.앞으론 대선 후보들도 왜 서울멸종과 국가소멸 위기를 막기 어려운지 그걸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반세기 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서울공화국의 구조를 5년짜리 정권이 바꿀 수 있나? 교육정책, 산업정책, 교통정책, 고용정책, 문화정책, 지역균형발전정책은 다 분리돼 있어 따로 놀고 있는데, 그걸 무슨 수로 통합시켜 지역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나? 서울 인구 집중의 최대 요인 중 하나인 '명문대의 서울 집중'을 바꿀 수 있나? 자식을 서울로 보낸 지방민들이 잠재적인 서울시민의 정서를 갖는 걸 막을 수 있나? 이런 솔직한 문제제기를 듣고 싶다. 결코 냉소나 비아냥이 아니다. 그렇게 해야 진정성 있는 논의와 대안도 가능할 게 아닌가.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단상지대] 여백, 그 부재의 의미
영국유학시절 인문대 연구실에서 만난 한 친구는 박사논문 주제가 책의 가장자리를 차지하는 '여백(margins)'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생소한 주제였다. 이는 어느 모로 보나 책 디자이너들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던가. 본문 중심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여백을, 그것도 몇 년에 걸쳐 연구하며 박사논문을 쓴다는 것이 나로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백의 크기와 디자인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전쟁' 내용처럼 책의 여백에 숨겨져 있는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학문인가. 또 아니면… 2천년 전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지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e-book에 이르기까지 책에는 본문을 포위하듯 둘러싼 상당한 부분의 여백이 존재한다. 더욱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던 양피지를 책의 재료로 사용한 중세시대에는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여백으로 구성된 책도 많았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여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전통 산수화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중기 화가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에는 곧게 솟은 매화나무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공간의 여백이 있다. 이 경우 여백은 다른 사물과 풍경들을 구체적으로 돋보이게 함은 물론, 배경적 이미지로서 미적 기능을 한다. 이 그림은 유무의 대비에서 비롯되는 묘한 분위기라든가, 군자의 생명력을 매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그 시대의 사상과 정서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동시대 화가 이정의 묵죽화 '풍죽(風竹)'은 비스듬히 젖혀진 대나무가 여백에 숨겨져 있는 거친 비바람에 팽팽하게 맞서며 그 어떤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건넨다. 두 그림은 내게 어떤 조건과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흔들림 없이 마음의 여유와 여백을 가지라고 무언의 말을 한다. 여백은 사물과 마음의 조응 또는 사색의 시간과 침묵의 대화를 유도한다. 한편, 산수화의 여백 처리는 대상과 창작자의 정신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먼저 여백-바탕을 보고 난 다음에 그림을 그리라는 그것은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유지하라(知其白 守其黑)"는 노자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흰 바탕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며, 비어 있으면서도 가장 충만한 상태를 암시한다. 하나의 심연이자 사건으로서 여백은 경계와 차이를 넘어 모든 새로운 가능성이나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하여 텍스트에서 여백은 본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텍스트의 여백은 저자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것을 채우는 동시에 독자가 저자와의 대화를 이끌어 내는 토포스(topos)로 기능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유일한 현실"(에드가 앨런 포)이라면, 여백은 텍스트에서 우리가 제대로 읽어야 할 유일한 의미이자 표지이다. 웹상에서 더 빨리, 더 많은 자료를 찾으며 일회적이고 단속적으로 브라우징(동물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풀이나 나뭇가지를 뜯어 먹는다는 뜻)하는 우리의 삶은 여백이 주는 많은 의미와 가치들을 놓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짧은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비우지 못해 너무 많은 말을 하거나 여백이 없는 지면을 구성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트로트 가수 정동원의 노래 '여백' 가사처럼 "전화기 충전은 잘 하면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닌지),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리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한겨울, 마들렌과 따뜻한 홍차 한 잔의 맛을 온전히 느끼며 내 삶의 여백을 즐기려 한다.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단체장의 생각:長考] 어떤 동구를 만들고 싶나요?
"어떤 동구를 만들고 싶나요?" 지난 연말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받은 질문이다. 내 대답은 "아이 키우기 좋은 동구를 만들고 싶습니다"였다.인터뷰가 끝나고 방송사 관계자와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공항 후적지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겠다'거나 '팔공산을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 만들겠다'와 같은 대답이 아니라 의외였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공항 후적지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어도, 팔공산이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가 된다고 해도 그곳에 사람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앞으로도 어떤 동구를 만들고 싶냐는 질문에 내 대답은 한결같이 '아이 키우기 좋은 동구'다.어느새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 힘든 시대가 왔다. 대한민국 출산율이 2022년 0.7명대를 기록했고, 올해는 0.6명대를 기록할 수도 있다는 어두운 전망이 나온다. 동구도 예외는 아니다. 2018년 2천200여 명이 태어나 출산율 1.02명을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떨어져 2022년에는 신생아 수 1천594명, 출산율 0.795명을 기록했다. 저출산의 공포가 시작된 것이다.국가적인 문제지만 기초지자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한다. 이번 칼럼을 쓰면서 출산 지원 사업에 대해 전반적으로 재검토했다. 아이를 키워본 입장에서 꽤 유용한 사업도 많았다. 혹시 우리 주민들이 이런 사업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지 노파심도 생겼다.그래서 이 자리를 통해 출산 지원 사업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우선 예비 부모를 위한 '임신 전 건강검진'이 있다. 동구 자체 사업으로 임신을 원하는 예비부부가 대상이고, 에이즈, 매독, 간 기능, B형 간염, 혈색소, 풍진 등 전반적인 검진을 받을 수 있다. 대구시에서 하는 '태아 기형아 검사비 지원'도 있다. 1차 검사(임신 11~13주), 2차 검사(임신 16~18주)를 지원하며 태반 호르몬 검사 등을 한다. 또 임산부 영양제도 지원한다. 올해는 달라지는 출산 지원 사업이 많다. 난임 진단 검사비를 부부당 최대 20만원 지원하는 사업이 새롭게 도입되고, 고위험 임산부 의료비 지원과 영유아 사전 예방 건강관리 사업은 소득 기준이 폐지된다. 특히 난임부부 시술비 지원은 11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확대되기도 했다.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여러 사업이 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첫 만남 이용권 지원'이 있고, 동구에서는 대표적으로 '동구 아이 사랑 통장 개설 축하금 지원'도 있다. 출생아 명의로 통장을 만들면 축하금으로 10만원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지난해 1천236명이 혜택을 받았다. 또한 동구 자체 사업인 '유축기 대여사업'은 호응도가 높다. 관내 1세 이하 영아를 둔 가정이면 누구나 대여할 수 있는데, 지난해 313명이 대여를 했다. 동구에서 하는 '모성과 어린이 건강관리 프로그램'도 인기가 제법 많다. 태교부터 요가, 조부모 육아 강좌, 임산부 우울증 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지원이 끊어져서도 안 된다. 동구에서 태어난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교육' 환경 조성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선거 당시 만난 한 부모가 "동구에서 아이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는 말을 간곡히 전해오기도 했다. 대구동구교육재단 설립을 추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구동구교육재단은 차별화된 교육 정책을 펼치고, 나아가 우수한 인재가 동구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다시 "어떤 동구를 만들고 싶으신가요?"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내 대답은 "글로벌 신성장 도시 공항 후적지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다니는 동구,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팔공산을 오르는 동구를 만드는 것"이다. 윤석준 (대구 동구청장)윤석준 대구 동구청장
[송재학의 시와 함께] 도광의 '엉겅퀴꽃 피던 고개'
우리에 갇힌염소 한 마리엉겅퀴꽃 핀 고개 그리워 달아났다가늑대 만나 밤새도록 싸운 끝에새벽녘에 잡혀 먹힌다비취 별빛 밝혀 살아온 여자즈믄 해 뒤에 살아온 여자누명 씌워 감옥 살게 한 여자그리움 하나 또 생기게 했다 도광의 '엉겅퀴꽃 피던 고개'"비취 별빛 밝혀 살아온 여자/ 즈믄 해 뒤에 살아온 여자/ 누명 씌워 감옥 살게 한 여자"라는 구절 때문에 그리움은 퍼덕이며 살아 있는 현재의 감정이고 만다. 늑대를 만나 밤새도록 싸운 염소가 장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년의 마음이라면, 그리움을 생기게 하는 여자는 마음을 부추기는 매혹의 외부 세계이다. 이 시를 곱씹게 하는 구도는 염소와 여자라는 대항 구조이다. 즈믄 해 뒤에 살아온 여자는 여우이거나 요기, 따라서 비취 별빛 또한 환상의 면적을 뜻하는 모습, 누명 씌워 감옥 살게 한 여자는 팜므파탈, 소년에게 세계는 전술한 여성성이 가득 넘치는 곳이다. 그것이 달콤하거나 환멸일지라도 겪어보기 전에는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시절, 그러므로 이 시의 부제는 사춘기이겠다. 시인송재학 (시인)
[박재열의 외신 톺아보기] 수하르토의 사위
인도네시아는 오는 2월14일에 대통령선거를 치른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프라보워 수비안토(72)가 46% 지지를 얻어 우뚝하게 선두를 달린다. 6월에 있을 2차 투표에서 이기면 그는 2억7천만명의 지도자가 된다. 그는 한동안 32년간 독재·도둑정치를 하다 1998년 반정부시위 때 쫓겨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둘째사위였다. 당연히 노년층들은 그에 묻어 있는 수하르토의 반민주주의 그림자를 걱정한다.프라보워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중장으로 군을 떠날 때까지 독재정권의 친위대로서 많은 오명과 의혹을 남겼다. 그는 26세 때 동티모르를 침략하여 그곳 부통령에게 치명적인 총상을 입혔으며 1990년대엔 수백 명을 학살하면서 독립운동을 짓밟았다. 당연히 인권문제가 제기되었고 미국은 그에게 입국금지라는 제재를 가했다. 1998년 5월 반정부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자 그는 정예군 사령관으로서 또 대통령의 오른팔로서 반정부 민주인사를 잡아 전기고문을 자행했다. 납치한 13명은 지금까지도 행방불명 상태다. 그 혼란기에 군 통수권과 나아가서는 대통령 자리까지 노렸다. 그러나 수하르토 대통령이 사퇴하자 그도 군에서 쫓겨나 요르단으로 망명하면서 아내와도 결별했다. 인도네시아가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여 민주주의 격식을 갖춘 것은 그때부터다.그는 대인니운동당을 창당하면서 재기했다. 2014년, 2019년에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두 번 다 현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 앞에 고배를 마셨다. 2019년 대선에서는 개표에 부정이 있다고 불복하자 지지자들이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현 대통령은 그에게 국방장관직을 내어 주었고 이번 대선에서는 자기 아들까지 러닝메이트로 붙여 놓았다. 경북대 명예교수·시인박재열 (경북대 명예교수·시인)
[아침을 열며] 조기 금융교육으로 건전한 신용사회 만들어가야
최근 경제 뉴스를 잘 살펴보면, 금융소비자 중 특히 청년층과 관련된 이슈들이 눈에 띄게 많이 소개되고 있다. '부채에 허덕이는 MZ' '영끌투자 실패·전세사기 피해… 2030 개인회생 갈수록 늘어나' 등 헤드라인만 보아도 청년층의 금융 이슈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한 기사에 따르면 암호화폐 및 주식시장 '빚투' 실패와 전세 사기 등의 영향으로 개인회생 신청자 중 30세 미만 청년비율이 2020년 10.7%에서 2022년 15.2%로 급상승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신용정보원의 2023년 6월 자료에 따르면 30대 이하 금융채무 불이행자는 23만1천200명으로 2022년 12월 말 기준과 비교하여 1만7천명이 급증하였다고 하니, 현재 청년층의 금융 이슈를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 것 같다.OECD 가입국이면서 2023년 GDP 기준 세계 경제 13위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 대국인 우리나라에서 청년층의 금융 이슈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본고에서 필자는 조기 금융교육의 중요성을 논하고 싶다.글로벌 금융시장을 선도하는 미국의 경우, 조기 금융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후에 건전한 금융소비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1999년 조기 금융교육 법안을 통과시키고 2014년 이후 모든 주에서 경제교육을 표준 교육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영국도 2014년 이후 중등교육과정에 금융교육을 포함시켰고, 호주도 고등학교까지 금융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돌아보면 현재까지 정규 교육과정을 통한 금융교육이 전무했다. 다행히 2025년부터 고등학교 과정에 '금융과 경제생활'이 개설된다고 하지만, 조금 더 앞당겨 선진국처럼 경제, 금융교육을 초중등 의무교육과정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신용사회로 빠르게 변모되고 있다. 이는 금융교육이 앞으로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금융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금융상품의 구조도 점점 복잡해지고, 금융투자 손익 발생과정에 대한 이해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조기 금융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의 금융이해력을 향상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마치 영어교육이나 생존수영처럼 금융교육도 어릴 때부터 시작함으로써 금융시장과 금융상품, 금융리스크 관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생활 속의 금융인을 양성하는 것만이 건전한 신용사회를 만들어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이미 많은 금융전문가들이 "청년층의 부족한 금융지식과 정보가 부동산 영끌과 주식·코인 빚투 등 충동적인 투자로 이어졌다"며 "가계부채 급증을 사전에 차단하고 청년이 건전하게 금융시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금융교육이 생존교육처럼 필수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언론기사, 연구보고서를 통해 수없이 많이 제기하고 있다. 그만큼 조기 금융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전 미국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문맹은 생활을 불편하게 하지만, 금융문맹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제 금융교육은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빨리 조기 금융교육을 확산하느냐에 따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작년에 '화폐이야기'라는 주제로 초등학생 경제교육을 한 경험이 있는데, 수업시간 내내 똘똘한 눈망울로 수업을 경청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아이들의 눈 속에서 보았던 미래세대의 희망을 떠올리며, 나부터 조기 금융교육 확산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해 본다.황병우 DGB대구은행장황병우 DGB대구은행장
[경제와 세상] 2024년 한국 주식시장, '골디락스' 달성할 수도
'1월 효과'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코스피지수가 2024년 거래 첫날과 19일, 23일을 제외하고는 계속 흘러내려 많은 투자자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1월 효과란 뚜렷한 호재 없이도 기대심리로 인해 연초에 주가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23일까지 코스피는 6.7% 밀린 반면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1월 코스피지수는 평균 2.7% 상승했으며 작년 1월 동안에도 8.4%나 올랐다.한국 증시가 부진한 사이 일본과 미국 증시는 강세를 보이며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지난 23일 닛케이225지수는 36,517로 마감하여 1990년 이후 처음으로 이틀 연속 36,000선을 넘으며 올해 들어서만 9.1% 올랐다. 미국 S&P500지수는 4,850, 다우존스지수는 38,002로 거래를 마치며 양 지수 모두 종가 기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올해 들어 국내 증시에서 실제 1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주요 이유는 작년 11~12월 2개월간 지수가 15%나 크게 올라 상승 피로감이 누적됐으며, 연말 배당 차익을 노리고 증시에 들어왔던 자금이 연초가 되면 통상 회수되는 경향이 있어 연말 상승에 대한 조정 차원이라 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 경제가 매우 호조여서 상반기 중 금리인하 가능성이 낮아진 데다 중국 부동산이 추락하고 있어 투자 심리가 불안해져 사실상 G2(미국과 중국) 악재가 동시에 터진 결과다. 덧붙여 삼성전자 등 시가총액 대형주들의 실적 부진, 국내외 지정학적 불안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2023년이 시작할 때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며 증시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기침체와 기업실적 둔화 속에 2023년이 우리 투자자들에게 힘든 한 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역시 통화긴축 기조가 이어져 가계소비 둔화 그리고 중국의 부동산발 경기침체 우려로 성장률 하락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한국 코스피는 18.7%, 코스닥은 27.6%를, 미국 S&P500은 23.9%, 다우존스는 13.5%나 상승하며 2023년 전망치가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감으로써 전문가들은 '우리 모두 틀렸다'고 자인하기에 이르렀다. 2023년과 달리 2024년 미국경제는 성장률 2%대에서 연착륙하며 1%대에서 안정된 후에 4%대로 급반등하는 붐의 기반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되는 데다 이미 미국 S&P500과 다우존스지수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어 2024년은 '골디락스'를 달성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골디락스(Goldilocks)란 경제가 적절히 성장하며 실업률이 적당히 낮으며 물가는 오르지 않고 적당히 안정되어 있는 모든 국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경제 상태이다. 증권시장에서는 주식시장이 과열되지도 않고 침체하지도 않으면서 서서히 상승하는 이보다 좋아질 수 없는 이상적인 국면을 말한다.물론 올해 초 고금리 장기화, 미국 대선 불확실성, 지정학적 위험과 내수침체 등으로 국내 증시의 부진은 어느 정도 예견됐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제규모에 2024년 1.7%의 잠재성장률 대비 2.2%의 성장률 전망치는 상당히 높은 성장이다. 특히 일부 수출산업은 유례없는 호황을 보이고 있어 수출을 중심으로 우리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들고 있는 데다 하반기에는 물가도 2%대로 안정화되고 고용도 적정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따라서 2023년 대비 모든 지표가 향상될 것으로 예상되어 주가의 추가 하락 가능성은 크지 않아 우리나라 역시 골디락스를 달성할 수 있다. 2023년 1월 본칼럼에서 필자는 '영구적 위기'도 끝에는 행복이 있다는 희망으로 실천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투자의 대가인 존 템플턴 경의 격언, "강세장은 비관 속에서 태어나 회의 속에서 자라며, 낙관 속에서 성숙하여 행복 속에서 죽는다"를 상기하며 연초에는 조금 어렵더라도 2024년도 결국에는 강세장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자.이재훈 (에코프로 파트너스 대표)이재훈 에코프로 파트너스 대표
[더 나은 세상]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는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로 잘 알려진 경제협력개발기구에 1996년 10월 제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1997년부터 회원국 활동을 시작하였다. OECD는 회원국들의 경제발전과 세계무역의 촉진을 위해 1961년 설립된 국제기구로 설립목적은 회원국들의 경제성장과 고용의 최고 수준 달성을 이루는 데 있으나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지원하는 일이다. 그동안 OECD는 농업, 과학연구, 자본시장, 조세 구조, 에너지원, 삼림 및 대기오염, 교육 발전, 저개발국 개발지원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2024년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을 포함한 경제적으로 발전한 38개 나라가 가입되어 있고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는 아직 가입하지 않고 있다.우리나라가 가입하기 전에는 OECD 회원국이 대부분 선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우리 국민은 OECD 회원국이 되면 곧 국제사회로부터 선진국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OECD 회원국이 38개로 늘어나고 폴란드, 헝가리, 칠레, 멕시코,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등이 가입하면서 그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OECD 회원국의 위상은 매우 공고하여 최근에는 선진국의 기준으로 OECD 회원국 중 다른 나라를 원조해주는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에 속한 국가를 선진국의 기준으로 삼는다. 직속 기구도 국제에너지기구(IEA), 핵에너지기구(NEA), 개발센터 (DEV), 교육·연구혁신센터(CERI)등 국제규범을 다루는 굵직굵직한, 언론에도 자주 거론되는 기구들이 있다. OECD는 각종 위원회와 총회에서 모든 회원국이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결정, 이행을 촉구하거나 강제성은 없는 권고, 일부 회원국, 비회원국 사이에 정한 규범인 선언, 일부 회원국만 강제적으로 구속되는 협정을 만들어 공포하고 있다. OECD의 DAC가 권고하는 저개발국가의 원조를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라고 한다. ODA를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였는가는 매년 OECD의 DAC가 4~5개의 회원국을 대상으로 그 정책과 재원의 집행을 검토, 심사하는 동료검토를 수행한다, 우리나라는 2010년 OECD의 DAC에 가입하여 세계 최초로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도약하였고 2012년과 2017년 그리고 2023년 3번의 동료검토를 받았다. 1994년 교수가 된 필자는 실제로 연구 기자재를 OECD의 ODA로부터 지원받은 경험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속도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빨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돌아봐야 할 그림자 또한 뒤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할 때이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한 항목은 다음과 같다. 자살률, 자살 증가율, 산업재해 사망률, 가계부채, 남녀 임금 격차, 노인 빈곤율, 청소년 흡연율, 성인 흡연율, 자동차접촉 사고율, 보행자 교통사고율,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 노인 교통사고율, 학업 시간, 미혼 증가율, 결핵 사망률, 당뇨 사망률, 남성 간질환 사망률, 대장암 사망률, 심근경색 사망률, 노령화지수, 국가채무 증가율, 실업 증가율, 저출산율, 15세 이상 알코올 소비량, 국민 세 부담 증가율, 공교육비 민간 부담률, 어린이·청소년 행복 지수 최하, 그리고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이 1위이다.정재학 영남대 교수정재학 영남대 교수
[시선과 창] 좋은 말, 나쁜 말, 이상한 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년 개봉한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이 출연한 한국 영화다. 세 인물의 특징을 '좋은, 나쁜, 이상한'으로 규정한 코미디물이다. 새해 벽두에 오래전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서 쓰이는 말의 모습을 이야기하려니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좋은 말, 나쁜 말, 이상한 말.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좋은 말은 좋은 마음을, 나쁜 말은 나쁜 마음을, 이상한 말은 이상한 마음을 만든다. 독일의 언어학자 훔볼트는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라고 했다. 그러니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좋은 말을 써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나쁜 말, 이상한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좋은 말을 쓰자.1월1일, 해돋이 명소마다 인파로 붐볐다. 사람들은 해를 보며 소원을 빌고, 뭔가 잘해보려고 다짐한다. 자치 단체에서도 해돋이 행사를 주관하여 시민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내가 사는 지역 기초자치단체에서도 가까운 산에서 해맞이 행사를 열었다. 그 산은 필자가 평소 운동 삼아 매일 새벽 오르내리는 곳이다.1월1일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산을 향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 중간중간마다 안내 직원 한 분씩 서서, 밝은 표정으로 새해 인사를 한다. 새벽 기온은 아직 싸늘한데, 웃으면서 시민을 맞이하는 공무원들이 고맙다. 산 정상까지 죽 이어지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시민들을 기쁘게 한다. 좋은 말이다.2022년,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을 표시하는 경우 최대 15일까지 아무 장소에나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에 내걸어도 괜찮다. 어떤 내용도 괜찮다. 온 동네가 현수막 천지가 되었다. 신호등 앞, 횡단보도 건너, 눈만 들면 현수막 천지다. 그러자 많은 시민이 고통을 호소했다. 교통사고 위험이 크다.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한다.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폐현수막 처리 문제도 크다. 법을 일부 고치기는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말이다. 법에는 어떤 말도 규제할 수 없도록 해 놓았다. 그러니 마구잡이로 썼다. 대부분 남 탓하는 말, 책임 회피하는 말, 덮어씌우는 말, 차별하는 말, 비하하는 말, 혐오감을 주는 말, 욕하는 말,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시민들만 피해를 봤다. 억지춘향 격으로 보게 된 부정적 표현에 화가 났다. 정말 나쁜 말이다.1인 미디어가 크게 늘었다. 콘텐츠를 제작, 생산, 유통하는 사람이 다양해졌다. 그들은 조회 수에 관심이 커 자극적인 말을 써야 사람들이 찾는다고 믿는다. 규칙에 어긋나는 말을 창의(?)라 생각하는지 멋대로 쓴다. 오랜 세월 다듬어 온 문법 규칙은 버린 지 오래다. 그들이 쓰는 말은 이상한 말이다.아무렇게나 쓰는 직과 이름도 이상한 말의 예다. 다른 이가 나를 가리킬 때 '박○○ 상임이사'라고 한다. 내가 나를 부를 때는 '상임이사 박○○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나'의 고유한 정체성은 직이 아니라 이름이기 때문이다. 꾸미는 말은 꾸밈을 받는 말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박○○ 상임이사입니다'라고 하는 말은 직을 중시하는 세태를 반영한 표현으로 이상한 말이다.새해에는 좋은 말을 쓰자. 좋은 마음으로 살자.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큰 분들은 더욱 노력하자. 공감하는 말, 배려하는 말, 긍정하는 말,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을 더 자주 쓰자. 그러면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고, 더 따뜻해질 것이다. 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김요한의 도시를 바꾸는 시간] 도시의 변화와 '바이털 사인'
도시의 변화를 종종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다. 연말 연초에 공식통계와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보도자료들이 많다. 2024년 갑진년 새해에는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전국 17개 시·도의 '2022년 기준 지역별 일·생활 균형 지수'에서 대구시가 10위에서 5위로 도약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2023년 계묘년 연초에는 대구지역 교통사고 사망자가 2022년 기준 66명으로 2017년 136명 대비 51.2%(70명) 감소하였다는 다행스러운 소식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대구시의 일·생활 균형의 구체적인 변화를 이해하기 어렵고, 2023년 최근 기준 대구지역 교통사고 통계는 아직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제공되는 단편적인 사실과 숫자만 접한다. 지난 연말 통계청의 '2022년 지역소득(잠정)' 자료가 공개됐다. 전국 경제 성적표가 발표된 것이다. 대구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31년째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민들은 31년째 같은 '성적표'보다 '진단표'가 더 궁금하지 않을까? 건강상태를 검사하는 '바이털 사인(vital sign)'이 있다. 우리말로 '활력징후'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생명과 직결되는 체온과 맥박, 호흡, 그리고 혈압의 4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의사가 응급환자의 상태를 보기 위해 '바이털 사인'을 확인하듯이, 지자체는 시민의 안전과 일상생활에 직결되는 경제, 사회, 환경에 대한 도시의 건강상태를 최대한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시민들도 건강검진을 하듯이 우리의 삶터인 도시의 '활력징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대구시가 시민들의 삶의 질, 소득·소비, 교육·훈련, 주거·교통 등의 분야를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는 '대구사회조사'의 사회지표도 이듬해 6월에야 공표가 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변화 추이를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런던시는 2013년 말 '런던 대시보드(London Dashboard)'를 개설하여 시민들에게 다양한 통계정보를 제공하고, 시민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토크 런던(Talk London)'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하였다. 대구시도 'D-데이터 허브'와 '대구통계 포털'을 운영하고 있고, '토크 런던'을 참고하여 2019년 말 시민소통 플랫폼인 '토크 대구' 운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자료 활용과 소통 방법에서 극복해야 할 한계점도 존재한다. 지자체가 시민의 삶과 직결된 도시의 '바이털 사인'을 분야별로 언론에 설명하고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는 자리가 정기적으로 마련되면 어떨까? 시민들에게 도시의 변화를 알리고, 참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도시의 변화를 만드는 적극행정의 '활력징후'를 기대해 본다. 지역과 인재 대표김요한 (지역과 인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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