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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칼럼] 국무위원이 장관보다 먼저다!
사상 최소 표차로 대통령선거가 결판난 뒤에 어느새 한 달 가까운 날들이 지났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는 했으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가동되면서 정권인수인계 작업도 궤도에 오르는 분위기다. 그중 백미는 역시 새로운 내각의 인선이다.한덕수씨가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정된 이후 내각의 주요 포스트에 대한 하마평이 나돌고 있다. 한데 가만히 들어보면 무슨 무슨 장관 후보자로 누구누구가 유력하다는 말들은 있으나 대통령, 국무총리와 함께 국무회의를 구성할 국무위원들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논공행상에 이목을 쏟는 호사가들의 관점에서야 장관직의 향배가 주목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언관이자 대간의 역할을 자처하는 주요 언론이라면 조금 달라야 한다. 현행 헌법은 장관이 아니라 국무위원직에 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대통령제의 모국인 미합중국과 달리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게 국회와의 협치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무총리의 존재가 첫 번째 고리라면,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무위원의 존재는 두 번째 고리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 동안 대한민국 헌정사는 국무위원 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 제도를 정착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헌법의 취지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러나 헌법상 국무회의 제도의 취지는 대통령과 국회의 협치라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이는 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반드시 열린 토론에 의한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청으로서 의회주의 원리의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행정권을 맡기면서 그 정부의 최고의사결정 과정에 열린 토론이 벌어지는 국무회의를 배치했다. 나아가 대통령의 궐위 또는 유고 시 국무총리 다음으로 법률로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장관의 순서가 아니라-그 권한을 대행하도록 선언하고 있다.따라서 대통령 당선인이 국무총리 후보자와 함께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은 국무회의를 구성하여 정부의 최고의사결정 과정을 담당할 국무위원 후보자의 전체 명단이다. 이때 개개 후보자의 면면만큼 중요한 것은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들로 구성되는 국무회의라는 한 팀의 특성일 수밖에 없다. 바람직하기로는 시대정신을 충실히 대변하면서 열린 토론을 통하여 국민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팀을 짜야 할 것이다. 아무리 스타 플레이어가 많아도 팀워크가 깨지면 좋은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것은 국무회의나 국가대표팀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헌법은 행정 각 부의 장관을 국무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한다. 국무회의가 최선의 의사결정을 위한 한 팀이라는 헌법의 취지를 고려할 때, 이 규정은 한 팀으로 결정한 사항을 그 팀의 구성원들이 나누어 맡아 책임을 지고 실행하라는 의미로 새겨야 한다. 다시 말해 행정 각 부의 장관직은 국무위원들이 국민 앞에 책임 행정을 실현하기 위한 헌법상의 보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행 헌법에서 국무위원직과 장관직 가운데 방점이 놓여야 할 것은 당연히 전자다. 물론 수많은 공무원과 산하 기구를 거느린 장관직의 위세가 현실적으로 더욱 강력해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와 같은 행정 관료제의 위세를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국무총리, 국무위원들과 함께 국무회의를 구성하여 통제하려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 헌법의 진정한 취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국무회의라는 한 팀의 전체 명단이 제시되기도 전에 각 부 장관의 하마평이 무성한 현상에는 경계할 바가 적지 않다. 헌법에 따르면 국무위원이 장관보다 먼저다.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영남시론] 4월의 한반도와 남북교류협력의 추억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남북한 교류협력과는 점점 멀어지는 형세다. 북한의 ICBM 시험발사, 격화되는 미·중 패권경쟁과 미·러 대립구도가 장애의 핵심이다. 여기에 4월의 남북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북한의 지난달 24일 ICBM 시험발사는 군사적·외교적·정치적 측면이 있지만 핵심은 국방력 강화로 귀결된다. 김정은 위원장 등장 이후 북한은 핵과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핵 분야는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고,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핵실험·ICBM 발사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일단락되었다. 경제 분야는 어려웠다. 최근에는 국제 제재, 코로나19, 자연 재해 등으로 더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남한은 2018년 이후 F35A 40대 도입,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으로 탄도미사일 거리 확대, SLBM 발사 성공 등 군사력 강화를 이뤘다. 그 결과 남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불균형이 심화되었다는 게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GFP)의 분석이다. 이러한 국방환경에 북한은 지속적인 핵전력 증강으로 대응방향을 잡고 있다.이번 북한의 ICBM 발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아나 침공으로 미·러 관계가 악화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대북제재 결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틈을 노려 추진되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당분간 국제사회의 흐름을 중국과 러시아를 한 축으로 하고 미국과 EU를 다른 한 축으로 하는 대립 구도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남한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국제환경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 남북한 사이에도 4월의 일정은 우려스럽다. 북한은 김일성 110회 생일(4.15), 김정은 출범 10주년(4.11), 조선인민군 창설 90주년(4.25) 등의 일정을 앞두고 있다. 남한은 한미연합군사훈련(4.12~28)을 예정하고 있다. 한·미가 함께 군사훈련을 실시할 경우 북한은 '강 대 강'의 논리에 따라 보다 강력한 핵실험이나 ICBM 발사 등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계절이 바뀌어 민간단체의 풍선 날리기도 우려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도 북한은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한반도 안팎에서 긴장 국면이 조성되면 남북교류협력이 설 자리는 좁아지게 된다. 2000년대 중반 통일부 남북교류협력 실무 책임자였던 필자에게는 남북교류협력의 소중한 추억이 몇 개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7년 3월 U-17 북한 청소년 대표팀의 남한 전지훈련이다. 분단 이후 북한 선수단이 남한에서 전지훈련을 한 최초의 역사로 기록돼 있다. 당시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이 제주시 한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뷔페 음식이 맛나게 차려진 만찬장에서 한 선수가 음식을 듬뿍 가져와서 먹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먹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북한에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라 부모님 생각이 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순간 가슴이 찡해졌다. 그 선수는 남한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이런 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 선한 눈망울이 잊히질 않는다. 남북관계가 힘겨운 4월이 예상된다. 이달에는 북한에 절제된 언행이 필요하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외교관계를 지양해야 한다. 그래야만 멀어져 가는 남북교류협력의 추억들을 다시 불러내 미래의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꿈이라도 꿀 수 있을 것이다.김정수 대구대 교수김정수 대구대 교수
[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전쟁과 사랑 사이
아마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어령 선생과 김수영 시인의 순수·참여문학 논쟁의 여운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사람들이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을 구별하면서 전자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삶의 물음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금 여기 현실적 문제와 대결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뒤 나는 오랫동안 순수문학이란 으레 황순원의 '소나기'나 김동리의 '저승새'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영원한 과제니까.하지만 유학 시절 고전 문헌학 공부를 통해 나는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서양에서 모든 문학의 원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사랑이 아니라 전쟁을 노래한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시인이 사랑을 노래한 것은 근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이다. 그 이전에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이 문학적으로 묘사된 것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사랑 이야기가 거의 유일하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전쟁에서 패배한 트로이 장수인데, 새로운 땅을 찾아 자기 부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를 미워한 유노 여신이 풍랑을 일으켜 배는 이탈리아 해안에서 아프리카 해안으로 떠밀려 오고, 아이네아스는 거기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진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이 오페라로 만들었을 만큼 애틋한 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아이네이스'의 중심 주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네아스는 메르쿠리우스 신의 경고를 받고 전쟁과 정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여성의 일이고 전쟁은 남성의 일이며, 사랑이 아무리 감미롭다 하더라도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앞서는 가치일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했던 가치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왜 사랑이 아니라 전쟁이었을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전쟁이야말로 만물의 아버지다. 만물은 전쟁을 통해 생성 소멸한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일종의 전쟁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삶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으뜸가는 주제가 전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에 비하면 사랑은 언제나 부수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네아스처럼 전쟁과 정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 전쟁은 본질적인 상수이지만 사랑이란 부수적인 변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서양에서 그렇게 천대받던 사랑이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가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선포한 뒤에, 사랑은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 아니라 신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들 역시 신이 사랑하듯이 사랑하기 시작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로미오는 줄리엣을 그리고 베르테르는 샤를로테를 죽도록 사랑했다. 그럼에도 사랑의 신이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쟁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이야 다 아는 이야기지만, 제주 4·3의 학살자들인 서북청년단 역시 영락교회 청년부가 모태였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학살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철학자 헤겔이 영구평화론을 쓴 칸트를 몽상가 취급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에 비하면 우리 시대 한국 드라마 작가들은 그저 변방의 시골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변방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세계를 근본에서 바꾸어야 할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심을 동경하여 지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지배적 현실이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가치를 추구하므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드라마 작가들은 전쟁이 본질적 상수이고 사랑이 부수적 변수라는 것을 자명한 공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시골뜨기다운 발칙함으로, 도리어 왜 사랑이 아니라 전쟁이 삶의 본질적 진실이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되묻는다. 함석헌은 전쟁을 본질적 상수로, 사랑을 부수적인 변수로 치부하는 세상에 맞서 모든 싸움은 사랑싸움이라고 말했다. 전쟁조차 상처받은 사랑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과 불화는 사랑을 통해 극복되고 치유될 수 있고, 또 치유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대중 예술가들이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낯설고 어리석은 믿음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다.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 붙는 신파라는 딱지는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한 순진하고 어리석은 믿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우리의 삶이 전쟁이라는 것은 '오징어게임'도 알고 있다. 그것은 가장 극단적인 데스게임이다. 거기서 나는 오직 남을 죽임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전쟁 상황을 불가피한 것으로도, 자명한 것으로도 승인하거나 전제하지 않는다. 그 전쟁터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다수가 원한다면 그 투쟁을 멈출 수도 있다. 그런 한에서 전쟁은 본질적 상수가 아니라 현실적 조건과 인간의 선택에 좌우되는 변수다. 생사를 건 투쟁이 아무리 지배적인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변경 불가능한 존재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에피소드인 구슬치기 게임에서 보듯이, 극단적인 투쟁의 현장에서조차 기훈과 일남은 깐부를 맺고, 지영은 새벽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 전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역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재확인하면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나 역시 다시는 누구도 이 땅을 넘볼 수 없도록 대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끝난 전쟁을 두고도 종전선언조차 못하고 휴전상태를 사는 이 땅에서 탄생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전쟁과 분단이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 세상을 구할 것이다.전남대 철학과 교수전남대 철학과 교수
[CEO칼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 등 4개 부분을 휩쓴 영화다. 하버드대 출신 배우 토미 리 존스가 역을 맡은 늙은 보안관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쓸모없어지고 더 이상 노인이 대접받을 수 없게 되는 현실을 상징한다. 대한민국도 효(孝) 문화가 사라지면서 점점 노인을 위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 서울 지하철에서 젊은 남성이 80대 노인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붓는 유튜브가 공개되어 공분을 샀다. 젊은 남성은 '인생 똑바로 살아라' '인간 같지 않은 ××야' '그 나이 먹고 차도 하나 없어서 지하철 타고 다니냐' 등의 패륜적 발언을 쏟아냈다. 얼마 전에는 지하철에서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사람에게 욕설을 하면서 휴대폰으로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때리는 동영상이 공개된 적도 있다.보건복지부의 '노인학대 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2016년 한해 1만2천9건이던 노인 학대 신고 건수는 2020년에 와서 40%가 더 늘었다. 노인 학대의 경우 주로 신체적 학대가 일어날 때 신고하는 경우가 많아 정서적 학대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학대 건수는 더 많을 것이다. 노인 학대는 부양자의 부양 부담과 스트레스 및 학대 행위자의 성격적 문제에서 비롯되겠지만 노인 공경의식 저하라는 사회문화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급속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살아본 경험'의 무게감이 급격하게 약화되면서 노인의 위상과 권위도 함께 추락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노인들의 삶은 점점 힘들어진다.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과 주문 매장의 키오스크(kiosk) 앞에서 노인들은 당혹스럽다.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KTX 열차표 구하기 전쟁에서도, 웹사이트로 예약해야 하는 이건희 컬렉션 관람권 구입에서도 노인들은 언제나 패자다.뇌과학자들은 태어나 처음 10년 동안의 환경에 의해 뇌가 완성된다고 한다. 뇌의 하드웨어는 변하지 않고 소프트웨어만 변한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부딪치는 지금의 환경과 속도는 자신의 뇌가 자랐던 시대와는 판이하다. 그러니 젊은이들에게 물어야 하고 늘 젊은이들의 뒷전에 설 수밖에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이 늙은이가 되면 자신의 뇌가 형성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를 살 것이 분명하니 현재의 노인들과 같은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인 노인들을 배려해야 하는 이유다. 노인들을 소외시키지만 젊은이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주는 기술 발전은 바로 앞선 세대인 노인들의 피와 땀의 결과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국가도 노인을 위한 나라를 만드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노인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인 네덜란드는 노인을 위한 다양한 복지정책과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매년 건강, 음식, 여가 등 다양한 주제와 아이템을 갖춘 노인박람회를 열어 노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노인전문방송 채널을 운영하며 노인 전문잡지도 발간한다. 노인을 위한 정당을 만들어 노인의 권익을 위한 정책도 개발한다.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지구에서 꼭 가지고 가야 할 제일의 문화는 '한국의 효(孝) 문화'라고 극찬했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사회가 된 오늘날 '한국의 효 문화'가 더욱 간절해진다.우동기 대구가톨릭대 총장우동기 대구가톨릭대 총장
[전채남의 AI Story] AI의 양식, 빅데이터
우리가 음성인식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네요"라는 답변을 자주 듣게 된다. 일상화되고 있는 AI 서비스가 음성인식 서비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만족스러운 성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기업에서 2016년 알파고 이후 꾸준히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AI의 성능이 월등히 좋아지고 있지는 못하다. 실제로 가트너(Gartner)의 리포트에 의하면, 2018년도부터 80~87% 이상의 AI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고 있다고 한다. 왜 AI 서비스의 성능이 생각만큼 빨리 높아지질 않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질 높은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AI 연구의 세계 3대 권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앤드류 응(Andrew Ng)은 '데이터는 AI를 위한 양식(Data is food for AI)'이라고 하며 AI 개발에 있어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AI 개발자들의 초점을 모델 및 알고리즘 개발에서 모델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데이터 품질(Quality)로 전환하기 위한 캠페인도 현재 펼치고 있다. AI 개발의 핵심이 딥러닝(Deep Learning)과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딥러닝은 사람의 뇌가 사물을 구분하는 것처럼 컴퓨터가 사물을 구분하기 위해 데이터를 분류하거나 군집하는 기계학습(Machind Learning)의 한 형태이다. 사람의 뇌가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비슷한 유형을 발견하여 사물을 구분하는 인지방식을 딥러닝은 모방하고 있다. 딥러닝은 사람의 뉴런 구조를 본떠 만든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이용하여 컴퓨터가 사물을 인식하도록 학습시킨다. AI는 딥러닝과 데이터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융합되어 구현된다.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AI는 데이터의 양과 품질이 중요하다. AI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즉 빅데이터를 필요로 한다. 빅데이터에서 딥러닝은 가치 있는 패턴을 찾아내 유용한 결과를 제시한다. 데이터 품질은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 일관성이 좌우한다. 데이터 기반의 AI는 모델을 먼저 선정하고 코드를 확정한 다음에 데이터의 품질을 반복적으로 향상시키며 정확률을 높인다.데이터의 양만 많다고 해서 AI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 분야의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는 격언과 같이 질 낮은 데이터는 AI의 성능을 떨어뜨린다. 실제로 제조 공장 설비에서 주어진 원데이터로 학습한 불량품 분류 AI는 53%의 정확도를 보였으나, 데이터 정제를 통해 품질을 제고한 데이터로 재학습한 AI는 결과 정확도를 71%로 개선하였다. 결국 우수한 AI를 개발하고 싶은 도시와 기업은 양질의 데이터를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도시는 어떻게 AI를 위한 양질의 데이터를 가질 수 있을까. 첫째, 데이터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데이터는 AI의 양식으로 매우 가치 있고 원자재와 같다는 인식을 AI 연구자, 정책 담당자, 소비자 등이 뼛속 깊이 해야 한다. 둘째, 도시의 데이터 맵을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그려야 한다. 도시의 어디에서 데이터가 생성되고 있고 어디에 산재해 있으며 데이터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셋째,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부의 데이터 사업을 지역에 많이 유치해야 한다. 데이터 거점도시 만들기는 자원과 시간이 많이 든다. 정부의 정책과 사업은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방사광가속기가 있는 곳으로 연구자들이 몰리듯이 앞으로는 품질 좋은 데이터가 있는 곳으로 기업과 인재들이 몰려올 것이다.<주>더아이엠씨 대표
[송재학의 시와 함께] 고재종 / 나무 속엔 물관이 있다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보면, 그 가지들이 가는 것이나 굵은 것이나 아예 실가지거나 우듬지거나, 모두 다 서로를 훼방놓는 법이 없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찰랑한 허공을 끌어안고, 바르르 떨거나 사운거리거나 건들대거나 휙휙 후리거나, 제 깜냥껏 한세상을 흔들거린다.더더욱 그 실가지 하나에 앉은 조막만 한 새의 무게가 둥치를 타고 내려가 칠흑 땅속의 그중 깊이 뻗은 실뿌리의 흙샅에까지 미쳐 그 무게를 견딜 힘을 다시 우듬지에까지 올려보내는 땅심의 배려로, 산 가지는 어느 것 하나라도 어떤 댓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참을 보여주는가. 고재종 / 나무 속엔 물관이 있다나무 아래서 위를 쳐다보면 나뭇가지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시인은 그것이 "모두 다 서로를 훼방놓는 법이 없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찰랑한 허공을 끌어안는다"고 생각한다. 나뭇가지라는 규칙 위에 작은 새가 앉았다. 그 미세한 무게를 나무는 자연이 넘겨준 무게라고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전율은 나무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칠흑 땅속의 실뿌리와 흙샅조차 새의 안착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실뿌리와 흙샅은 다시 그 무게의 감동을 나무 끝의 우듬지까지 올려 보낸다. 그것을 '땅심'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작은 새의 무게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자 생각이면서 시대를 움직이는 '땅심'이라고 생각을 확장하지 않더라도 시인의 시선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박재열의 외신 톺아보기] 정말 푸틴의 오판일까
뉴욕타임스의 브렛 스티븐스의 글이다. 현재 우크라전쟁을 보면서 푸틴이 오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점에서 오판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그의 군대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젤렌스키 정부는 쉽게 와해될 것이다, NATO는 분열될 것이다,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제제를 충분히 이겨낼 것이다, 중국이 도와 줄 것이다, 현대화된 러시아군에게 우크라군은 식전 해장거리일 것이다. 푸틴의 예상은 줄줄이 빗나갔다. 오히려 NATO는 더 단결하였고, 러시아 경제는 허물어졌고, 중국은 말을 바꾸었고, 그의 군대는 지리멸렬했고, 푸틴은 '미친 바보'라는 오명을 썼다.그런데 정말 미친 바보일까? 전쟁에서는 반대상황도 생각해야 한다. 1990년대 체첸 전쟁을 상기해 보자. 초전에는 용맹한 체첸군이 러시아군을 몰아붙였지만 러시아는 결국 포와 공군력으로 그로즈니를 초토화하지 않았나. 같은 각본이다. 체첸국민들은 다음 단계를 잘 안다. 일단 지상을 정복하면 어떤 반발과 반항도 체포와 구금으로 짓밟는다. 만약 우크라를 다 먹지 못하면 유럽의 두 번째로 많은 천연가스 매장량을 가진 동부지역을 노릴 것이다. 그 지역과 크림반도를 연결시키고 또 엄청난 셰일가스가 묻혀있는 돈바스 지역, 나아가 우크라의 바다를 손에 넣는다면 사람들은 푸틴을 '영악한 여우'라 부를 것이다. 그는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을 통합하기보다는 에너지를 뺏는 실익을 챙길 것이다. 무능한 러시아군의 오명을 씻기 위해서라도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여 젤렌스키 대통령으로부터 결국 문제의 영토를 받아내고 우크라를 중립국으로 만들 것이다. 서방은 정신 이상자의 핵무기 사용에만 겁을 먹고 있다. 경북대 명예교수·시인박재열 (경북대 명예교수·시인)
[단상지대] 청소년들의 정치참여를 기대하면서
"청소년 민주시민 서포터스를 제안합니다."지난해 대구 소재의 한 청소년회관 동아리 친구들이 아동·청소년참여예산제를 통해 대구청소년지원재단에 제안한 사업 중 하나다. 아동·청소년참여예산제도란 주민참여예산제도 내 아동·청소년 부문으로, 아동·청소년이 주도적으로 정책사업을 발굴·제안하고 예산편성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청소년의 의견을 수렴하고 지역사회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운영되는 제도다. 다수의 경쟁으로 인해 아쉽게도 수상작으로 선정되지는 않았으나 제8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우리 청소년들의 의지와 열정이 담긴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2019년 12월 '공직자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선거 연령이 하향 조정됨에 따라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처음으로 만 18세 청소년이 투표에 참여했다. 당시 대구 투표율은 만 25~40세 약 59.1%, 만 18~24세 약 64.1%로 청년보다 청소년들의 참여가 더 높았다. 지난 3월에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도 고3 재학생 중 다수의 학생들이 소중한 권리를 행사했다. 대구의 구체적인 투표율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전국 투표율은 67.4%로, 유권자 평균(66.5%)보다 높았다. 더구나 지난 1월 공직자선거법과 정당법 개정안이 공포·시행되면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만 18세 이상, 정당 가입 연령은 만 16세 이상으로 낮아졌다. 이로 인해 청소년들은 대선부터 기초의회 의원까지 자신이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선거일을 기준으로 만 40세 이상이어야 하는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선출직에도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6월1일 진행되는 지선에는 청소년 유권자 수가 대선 때 보다 약 2배 많은 21만4천617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부모 동의가 있으면 정당 가입도 가능한 상황이라 청소년의 정치관심도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정치참여의 급물살 앞에 교실의 정치화가 우려된다는 일부에서의 목소리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고3 학생들이 학교 안팎에서 선거운동, 정치활동이 가능해져 교실의 정치화와 학생들의 선거법 위반 등 다양한 갈등과 피해로 학교 현장이 혼란에 휩싸일 상황"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에 청소년들은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실질적인 선거권 실현을 위해 자발적인 참여를 높일 수 있는 '대구시 청소년 민주 시민 서포터스' 활동을 제안했다. 민주시민 기초교육, 선거관리위원회 투·개표현장 체험, 시·군·구 의회 모니터링, 온·오프라인 아웃리치 활동 등 다양한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의 민주시민 의식을 함양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청소년 참여기구로 청소년특별의회·청소년참여위원회 등이 운영되고 있으나, 정책제안이나 의사결정 위주의 활동이어서 실질적인 정치권리의 참여나 민주시민의식 교육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교과서를 통한 이론적 학습을 넘어 다양한 경험과 토론활동 등으로 청소년이 직면한 문제를 직접 찾아내고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청소년들이 체계적인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된다.지난 16일 제53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에 초등학생 주주들이 참여해 관심을 끌었던 재계의 이야기가 곧 정계로 이어지리라 기대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제안을 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을 응원한다. 박선 (대구청소년지원재단 대표)박선 (대구청소년지원재단 대표)
[여의도 메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혁신
4차 산업혁명이라는 ICT분야의 폭발적 발전으로 미디어환경도 격변을 맞고 있다. 디지털시대의 미디어혁신이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미디어 환경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회제도의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져왔다. 과학기술 발달의 파급은 활자의 발명이나 인터넷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를 돌이켜보면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규제개혁의 영향을 알려면 5공 시절 언론통폐합 이후 형성된 언론의 독과점체제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붕괴되면서 맞이한 경쟁체제를 돌이켜보자.인터넷과 초고속통신망의 등장으로 인한 방송과 통신의 융합, 디지털화는 방송 미디어 분야에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이념보다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생활에 더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네이버·다음과 같은 플랫폼의 등장은 국민들이 뉴스나 정보를 접하는 행태를 크게 바꾸었다. 가상현실 속의 메타버스는 또 어떤 산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콘텐츠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하고, 정부는 어떤 진흥책을 펴야 할 것인가.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방송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마저 불명확해졌다. SNS 등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유튜브와 같은 퍼스널 미디어(Personal media)가 범람하는 지금 누가 소비자이고 생산자인가.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강남에서 제일 잘나가는 아파트. 그 뭐라더라. 아 은마아파트. 은마아파트 그게 한 5천만원 정도 한다더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1980년대 후반 강남 아파트 가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지금 은마아파트 가격은 25억원대다. 반면 이 당시 방송사의 취재 카메라인 ENG(Electronic News Gathering)의 가격은 무려 1억 5천만원가량으로 일반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비싼 장비였다. 그러나 지금은 몇백만원대의 디지털카메라로도 얼마든지 방송을 할 수 있고 약간의 화질 저하 등 크지 않은 불편을 감내한다면 휴대전화 카메라를 이용해 방송을 할 수 있다. 방송콘텐츠 생산의 경제적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뉴 미디어 또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발맞춰 다양한 생산자와 변화된 방송 생태계에 걸맞은 법과 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뉴 미디어·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도 그에 걸맞은 진흥책과 더불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참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여과 장치도 겸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K-콘텐츠가 세계로 뻗어 나아갈 수 있다.미디어 콘텐츠에는 드라마, 음악, 뉴스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가 있다. 어느 부문에도 지나친 간섭과 규제는 발전의 장애물일 뿐이다. 일률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맞추도록 강요할 게 아니라 시장과 호흡하면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자율경쟁이 이뤄지도록 조심스럽게 법과 제도를 과학기술의 발달에 맞춰나가야 한다.2천500년 전 노자는 '치대국(治大國) 약팽소선(若烹小鮮)-'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작은 생선을 익히듯이 조심스러워야 한다'해야 한다고 했다. 광속으로 변한다는 ICT 기반의 디지털 미디어 정책을 짤 때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문장이다. 윤두현 국회의원 (국민의힘)윤두현 국회의원 (국민의힘)
[아침을 열며] 우리의 미래와 대학은
1088년 세계 최초의 대학이자 가장 오래된 대학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대학교(university)'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학교이기도 하다. 13세기 중세 유럽에는 기숙학교 형태의 칼리지(college)가 속속 등장하면서 고등 교육의 기반은 더욱 확대되었다.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중세시대의 교육의 중심 공간은 교회나 부속학교에서 대학으로 이동하였다. 중세의 대학은 라틴어로 학생들에게 신학·법학·의학을 가르치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으며, 유럽 각지의 대학들은 학자와 학생들의 교류가 상당히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神) 중심의 다소 엄격하고 경직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대학에서 생성된 새로운 사상과 지식은 사회의 변화와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물리적·재정적 기반이 미약했던 대학들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교회의 역할이 컸다. 대학은 자체 건물 없이 교회의 건물에서 수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대학운영의 재정을 교회로부터 충당하였다.때로는 당시의 상업 발달로 부를 축적한 부유한 상인들이 대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1258년 설립된 파리의 소르본 대학은 소르본이라는 상인이 설립하였고, 중세 스칼라 철학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의 대학들 모두 교회든 부유한 설립자든 대학이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재정 투자가 있었기에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대학의 발전은 학문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대학이 속한 사회의 변화와 발전으로 이어졌다.현재 우리의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국의 고등교육 부문 투자는 OECD 국가 중에서도 낮은 수준이다. 대학생 즉 고등교육에 얼마나 투자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학생 1인당 교육비'를 보면, OECD 평균이 1만7천65달러이며 한국은 1만1천290달러에 그친다. 그나마 이 수치는 R&D 비용을 포함한 것이며, 이 비용을 제외하면 8천882달러로 낮아진다. 웃픈 현실은 한국의 대학생 1인당 교육비 수준이 초·중등학생 1인당 교육비보다 낮은 수준이며, 이는 OECD 37개 국가 중 유일한 국가라는 점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치고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수치다. 그런데 이 와중에 국내 대학 간의 교육비 편차는 더욱 크다. 대학알리미 공시자료에 의하면, KAIST는 학생 1인당 교육비가 연 8천만원 수준이며, 수도권 사립의 교육비는 2천만원을 넘는다. 그에 비해 경북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1천800만원이다. 국립대인 경북대가 이럴진대 지방 사립대나 중소대학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도 수도권·과기부 출연대학과 지방·일반 대학 간의 운동장 기울기는 더 벌어진다. 14년째 동결·인하된 등록금, 대학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각종 규제,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가 무색한 정부의 교육정책, 학령인구의 급감 등 한국 대학이 처한 현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은 고사하고 버티는 것조차 너무 버거운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필자가 회장으로 취임하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새 정부에 고등교육의 개선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전달한 바 있다. 고등교육재정지원특별법 제정, 고등교육세 신설, 대학혁신을 가로막는 규제혁파, 권역별 연구중심 대학 육성과 지역경제를 살리는 중소도시형 지역대학 지원 등 대학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들이다.윤석열 당선인의 인수위에서 과학기술 투자에 중점을 두고 교육부의 조직개편을 고민하고 있다. 정부조직개편안을 두고 교육계가 술렁이고 있다. 이것만큼은 인수위에서 꼭 기억했으면 한다. 대학의 위기는 곧 국가경쟁력의 위기다.홍원화 경북대 총장홍원화 경북대 총장
[하재근의 시대공감] 30주년, 서태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우리 현대화는 서구화였다. 식민지 시절엔 일본을 통해 절반의 서구화가 이루어졌는데 그렇게 해서 생겨난 새 물결, 즉 신파(新派) 중의 하나가 트로트다. 신파는 당시 청년들의 새 문화였지만 지금은 옛 문화의 대명사 격으로 통용된다. 더 본격적인 서구화가 시작된 것은 광복 이후부터다. 광복 후, 특히 6·25전쟁 이후부터는 미국을 통해 직접 서구문화를 수입했다. 주한 미군이 그 주요 창구였고, 미8군 무대에 섰던 뮤지션들이 서구화의 핵심이 되었다. 신중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이런 서구화 끝에 1970년대에 서구식 청년문화가 만개했다. 그러자 당국은 장발, 퇴폐, 대마초 등을 이유로 탄압했다. 1980년대엔 전두환 정권이 문화적 유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서구화에 다시 가속이 붙었다. 이때 FM라디오가 확산되면서 젊은이들이 미국의 인기 팝송을 실시간으로 접했다. 마이클 잭슨, 듀란듀란, 컬쳐클럽 등이 인기를 끌더니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한국의 10~20대를 사로잡았다.3저 호황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1990년대에 접어들어 한강의 기적이 일단락됐다. 집집마다 TV, 냉장고를 갖춘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해외여행까지 바라보게 됐다. 이것은 새로운 소비문화의 탄생을 의미했다.급격히 서구문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는 전혀 달랐다. 우리 사회는 깜짝 놀라 이들이 신세대라며 세대 논쟁을 시작했고, 결국 이 신세대들에겐 엑스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가요계에선 들국화 같은 언더그라운드, 시나위로 대표되는 록, 현진영 등의 미국식 댄스음악 등이 나타나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이런 흐름이 집대성된 그룹이 바로 1992년에 데뷔해 최근 30주년을 맞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서태지는 들국화에 심취했었고, 신중현의 아들인 신대철의 눈에 띄어 시나위 멤버를 거쳤다. 동시에 최신 미국 음악인 랩음악에도 빠져들었다. 그가 미국식 댄스음악의 메카였던 이태원 문나이트 출신인 양현석, 이주노와 함께 결성한 팀이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이들이 랩, 록, 댄스 등을 접합해 만든 노래가 데뷔곡 '난 알아요'다. 당시 가요계 기성세대는 미지근한 반응이었지만, 팝에 익숙하면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찾던 엑스세대는 폭발적으로 열광했다. 엑스세대 이상으로 자신들만의 새 문화를 찾던 10대도 반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즉각 대체했고, 이후 이 땅의 10대들은 다시는 팝아이돌을 찾지 않았다.한국 가요는 '난 알아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문화적으로 1990년대는 이 노래가 나온 1992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많은 변화들이 80년대에 진행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류는 트로트와 발라드였다. '난 알아요'가 모든 것을 바꿨다. 이제부턴 댄스음악이 한국 대중음악계를 규정하게 됐다. 이들의 뒤를 잇는 아이돌도 등장했다.서태지와 아이들에 이르러 한국 대중음악은 완전한 서구화를 이뤘다. 광복 후부터 지속적으로 서구를 따라잡았지만 90년 정도까지도 가요의 사운드는 팝송과 현저히 달랐다. 서태지 이후 가요와 팝의 사운드가 유사해졌다. 서태지는 랩 등 흑인음악, 일렉트로닉 팝 댄스 등이 뼈대를 이루는 현대 케이팝의 원형을 확립했다. 그를 이은 케이팝 아이돌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가요계를 독식하더니 급기야 한류붐을 이뤄내 국제스타가 되었다. 이제 케이팝은 지구촌 젊은이들의 새로운 음악언어다. 서구인들의 신파가 된 것이다. 이 거대한 흐름의 출발점이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올해 30주년을 맞아 케이팝 탄생을 기리는 서태지와 후배들의 이벤트가 펼쳐지면 좋겠다. 문화평론가하재근 (문화평론가)
[경제와 세상] 부동산 시장만능주의의 부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정도가 지나침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18세기 후반 애덤 스미스가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을 강조하는 자유방임주의를 역설한 이래 시장주의는 경제학의 절대선으로 떠올랐다. 시장이라는 무대에서 모든 경제주체가 마음껏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적으로도 이익이 되므로 쓸데없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상이다. 스미스 이후 경제학은 이 사상이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정교하게 증명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시장이 정상적인 혹은 이상적인 시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비정상적인 경우, 그대로 방임하면 사회 전체의 이익이 최대가 될 수 없다. 그런 시장에서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다수는 가난해지는 불평등이 심화되기도 쉽다. 그래서 정부가 개입해서 시장을 정상화하고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시장주의'다. 하지만 오늘날 자칭 시장주의자 가운데 이 전제조건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실의 시장이 어떤 상태이건 정부는 개입하지 말고 시장이 실현하는 결과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과유불급의 전형이다. 여기에 시장만능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한국에서 시장만능주의가 특히 활개를 치는 곳은 부동산 분야다. 부동산 시장만능주의는 1990년대 초반에 출현하여 노무현 정부 부동산 정책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크게 성장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면서 다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언론에는 시장만능주의의 세례를 받은 부동산 기사가 넘쳐나고, 여야 정치인 중에도 부동산 시장만능주의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많다.부동산 시장만능주의자들은 부동산 시장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투기가 일어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더라도 방임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또 부동산 시장의 모든 문제가 공급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공급부족론 내지 공급확대론을 피력한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이유는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급을 어렵게 만드는 재건축 규제 등 각종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부동산 시장만능주의자들은 부동산 조세 특히 보유세를 활용하여 투기수요를 억제하려는 정책을 혐오한다. 이런 경향은 요즘 언론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세금폭탄론'의 진원이다.부동산 시장만능주의는 이론이라기보다는 특정 계층의 이해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투기를 정당화함으로써 투기꾼을 옹호하고, 공급확대론으로 토건업자를 옹호하며, 보유세 무용론으로 부동산 과다 보유자를 옹호한다. 투기꾼, 토건업자, 부동산 과다 보유자 중에는 지대추구자들이 많은데, 이들의 지대추구 행위는 효율성과 형평성을 저해한다. 부동산 시장은 시장의 자기조절기능이 작동하는 정상적인 시장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서 시장을 정상화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부동산 가격폭등은 기본적으로 투기적 가수요 때문에 발생한다. 공급은 가격폭등의 촉발 요인이 아니다. 작금의 가격폭등이 공급 부족에서 생긴 것이 아님은 통계로 입증되고 있다. 부동산보유세, 특히 토지보유세가 최선의 세금임은 저명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새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시장만능주의 쪽으로 흐를 것 같아서 걱정이다. 주요 포스트에 시장만능주의자의 얼굴이 보이고, 정책 공약에도 시장만능주의적인 내용이 많다. 투기를 잠재울 정책으로 부동산 시장 안정세를 지속시켜야 할 시기에 시장만능주의가 전면화하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
[우리말과 한국문학]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고전의 고전적 정의는 누구나 읽었다고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다. 필자에게 오그덴과 리처드, 두 명의 학자가 저술한 '의미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책이었다. 강의실에서 이 책에 나오는 의미 삼각형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지만 천천히 원전을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필자의 게으름에 돌을 던질 분은 참아 주시길!). 최근에야 기회가 닿아 이 책을 고전의 반열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고전 덕분에 잊고 지내던 기호의 위상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현대 언어학의 관점에서 언어는 기본적으로 기호와 의미의 결합이다. 이러한 결합 관계에서 어떤 필연성을 찾을 수 없다. 즉 우리는 사과를 '사과'라고 부를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특성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한다. 참 재미없는 이야기이지만 언어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원리다. 언어학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겠으나 언어의 자의성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는 주장이 오늘날까지도 당당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기호가 영적인, 주술적인, 마법적인 힘의 원천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전통에 기인한다. 이러한 전통의 현대적 계승자가 바로 성명학이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성명학의 핵심을 이루는 명제이다. 여러분은 야구를 잘 하기 위해 또는 잘 나가는 연예인이 되기 위해 이름을 바꾼 사람들의 성공담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수많은 실패담의 예외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든 작명이란 행위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당당히 화폐로 교환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이름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야 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상식이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에게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어릴 때 부르는 아명(兒名), 관례를 치른 다음에 부르는 자(字)가 따로 있었다. 또한 비교적 자유롭게 여러 개를 짓기도 했던 호(號)도 이름을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선비의 이름을 대하는 태도가 이러한데 왕의 이름은 어떠했겠는가? 왕의 이름으로 선택된 한자는 아예 사용이 금지되었다. 특정한 한자를 사용할 수 없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임금의 이름은 거의 전부 한 글자로, 흔히 사용되지 않는 글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이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유대교의 전통에서 신의 이름 '야훼'를 부르는 것은 금지된다. 사실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에 그 정확한 발음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야훼'라는 명칭은 추정의 소산이다. 흔히 신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이슬람의 '알라'는 특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유일신을 의미한다. 1997년에 나이키는 운동화에 아랍어 '알라'를 연상시키는 로고를 새겨 출시한 적이 있다(실은 'Air'를 새긴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나이키는 이슬람 교인들의 격렬한 항의를 견디지 못하고 공개 사과와 제품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그들은 왜 신의 이름(또는 그것을 닮은 로고)이 새겨진 신발에 분노하는 것일까? 이들의 사고에서 현대 언어학의 자의성, 기호와 의미의 분리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알라'라는 기호는 곧 신이다. 즉 기호 안에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인식하는 셈이다. 아랍 문화에서 신발은 모욕을 의미한다는 점도 사건의 심각성을 증폭시켰다. 그렇다. 신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다. 김진웅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김진웅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박창서의 예술공유] 미술관과 백화점 그리고 아트 페어
1793년에 탄생한 루브르 미술관은 근대(modern)라는 시대성과 공중(The Public)의 시민 사회 계급의 부상과 함께 설립되었다. 시민들에게 예술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전시가 시작되었고 점차 전시와 수집 그리고 교육을 위한 전문 공간으로 특화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미술관과 도서관을 19세기 헤테로토피아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는데 모든 시대, 모든 형태, 모든 취향을 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장소들은 움직이지 않고 시간을 축적한다. 루브르궁전이 박물관으로 바뀌고 반세기가 채 지나기 전인 1838년 파리에서 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르 봉 마르세가 영업을 시작하였다. 미술관과 백화점은 근대 시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모더니즘의 성전이라고도 불리는 미술관은 부르주아 계층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대변하였고 백화점은 시민 계층의 소비와 여가 문화를 반영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백화점과 미술관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탄생한 근대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고 19세기와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축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난 세기를 이끌었던 20세기 미술관들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며 예술의 지평을 확장시킨 동시에 자본주의의 선봉에서 그 주류 세력인 부르주아 엘리트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냉전이 종식되고 국제 자본의 유동적 움직임 속에서 미술관도 점차 스펙터클 사회를 반영하는 공간으로 변모하며 미술관은 중요한 관광지가 되고 카페와 아트숍과 같은 관람객을 위한 상업적 공간들이 생겨났으며 전시 또한 관람객이 붐비는 스펙터클한 전시가 성행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미술관은 점차 백화점을 닮아가고 백화점은 미술관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많은 백화점이 예술품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고객들의 아트 테크 트렌드를 겨냥한 이벤트들과 예술과 소비를 동시에 지향하는 아트 슈머 고객에 대한 마케팅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술 감상과 쇼핑이라는 미술관과 백화점의 장점을 모두 만족시키는 행사가 바로 아트 페어다. 미술관처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동시에 백화점에서 쇼핑하듯 작품을 구매할 수 있다. 미술시장의 가파른 상승세를 반영하듯 얼마 전에 끝난 화랑 미술제에서 닷새간 5만3천명의 관람객과 177억원의 판매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특히 MZ세대의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트렌드가 되고 있다.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미술 시장의 성장이 문화 예술계의 동반 성장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전시기획자박창서 (전시기획자)
[수요칼럼] '말뫼의 눈물'에서 '내일의 도시'로
북유럽 발트해 입구에는 외레순드 다리가 있다. 코펜하겐과 말뫼를 이어주는 16㎞의 이 다리는 말뫼의 스웨덴 쪽 바다 위로 다리 형태가 보이지만 갑자기 사라진다. 4차선의 도로와 복선철도가 지나가는 넓은 다리지만 중간에 인공 섬을 만들어 지하터널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이 다리는 산업 구조조정의 성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지역은 '말뫼의 눈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조선업의 성공으로 말뫼의 기적을 상징했던 코콤스 크레인이 2002년 1달러에 한국으로 팔려 떠나가던 날 말뫼 시민들은 울었다고 한다. 우리가 만든 이 표현은 크레인을 사 온 우쭐한 마음을 담아 경쟁력을 잃어버린 조선업에 대한 말뫼 시민의 후회로 해석했다.하지만 과연 그럴까. 크레인을 매각했던 당시 말뫼는 10년 전부터 고부가가치 산업을 위해 대변신을 시도했고 상당한 성과도 거둔 상태였다. 코콤스 크레인이 있던 자리에는 2005년 190m의 친환경 건물 '터닝 토르소(Turning Torso)'가 말뫼의 상징물로 들어섰다. 말뫼의 눈물은 도시와 함께해왔던 상징물에 대한 아쉬움이지 조선업의 경쟁력 상실에 대한 후회는 아니었다. 1840년 말뫼에 설립된 코콤스는 오랫동안 세계 최대 조선소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중반 아시아의 추격이 계속되자 코콤스는 1974년 1천600t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크레인을 만들어 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 크레인은 불과 75척의 배를 건조하는 데 그쳤다. 1980년대 중반 스웨덴 전체에 경기후퇴가 시작되자 조선업의 상징이었던 코콤스는 1987년 마침내 파산했고 덴마크회사에 팔린 크레인은 외레순드 교각 설치를 마지막으로 멈추어 섰다. 당시 말뫼 시민의 15%인 3만5천명이 도시를 떠났고 실업률은 15%를 넘었다. 그러자 정치인과 시민들은 말뫼를 조선업 중심지에서 친환경 지식산업 도시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우선 외레순드 다리를 통해 광대역 케이블을 설치하고 스웨덴과 유럽대륙을 연결했다. 조선소 부지를 창업지원센터로 바꾸고 신재생 에너지, IT 산업 등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1998년 첨단 친환경 도시를 위한 산학연의 중심으로 말뫼대학을 설립했다. 조선소를 재개발해 2001년 '내일의 도시'를 주제로 도시건축박람회(Bo01)를 열어 말뫼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제시했다.오늘날 말뫼는 가장 역동적인 도시가 되고 있다. 조선업에 투자했던 자금을 신재생에너지와 정보기술(IT), 바이오 등 신산업 분야에 집중 투입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은 태양열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유럽의 대표적인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했다. 크레인이 있던 자리에는 창업센터와 첨단 친환경건물로 가득하다.말뫼의 지속성장은 경쟁력을 잃은 조선업에서 ICT를 중심으로 한 지식산업으로 변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말뫼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내일의 도시'이며, 2050년 인구는 지금의 두 배에 가까운 50만명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몇 년 전 말뫼 해변에서 만난 어른의 말씀이 지금도 또렷하다. "도시의 운명은 그곳에 사는 시민들이 결정한다."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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