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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食客열전 제6회-울산 서태일 시인·최영희 블로거
울산에서 두 명의 식객을 만났다. 1976년 현대그룹 계열사인 울산 대한알미늄에 입사해 2008년 노벨리스코리아 울산공장장을 끝으로 자연인으로 돌아온 서태일 시인과 ‘한바다’란 닉네임으로 네이버에서 활동하는 울산의 대표 파워 푸드블로거 최영희씨였다. 둘은 지향하는 외식 스타일이 대조적이다. 서 시인은 고래고기, 오래된 한식당 등 울산의 해묵은 음식을 찾아다닌다. 최씨는 숨겨진 커피숍과 찻집 등 비교적 트렌디하고 젊은 취향의 숨은 맛집을 포스팅하고 있다. 둘의 얘기만 합쳐도 울산맛의 현주소를 대충 감지할 수 있다. ‘고래고기·묵은 음식 심취’ 서태일 시인 ‘젊은 취향 먹거리 탐방’ 최영희 블로거 서로 다른 외식스타일 지향 ‘숨은 食客’ 10여년째 ‘울산맛집 대표 블로거’ 최씨 매달 자비로 ‘맛집지도’ 제작 무료 배포 서 시인은 고래·불고기문화 줄줄이 꿰어 ◆식객 서태일 시인 서태일 시인은 ‘고래고기광’이다. 32년간 울산 공단에서 잔뼈가 굵었다. 현재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전문위원이며 2009년 문예지 문학공간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울산의 음식문화 지형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울산의 고래문화 인프라의 발전 과정도 소상하게 알려준다. “1995년 맨처음 고래축제가 등장한다. 2005년 고래박물관, 이듬해 고래연구소가 등장한다. 2008년 장생포는 ‘고래문화특구’가 된다. 포경업 금지로 인해 울산 앞바다는 돌고래 등 온갖 고래로 들끓기 시작한다. 그래서 등장한 게 ‘고래바다여행선’. 고래생태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9년 국립수산과학원 소유 선박을 빌려 운항을 시작한 것으로 전국 유일의 ‘관경선’이다. 이어 고래생태체험관과 고래문화재단, 지난해는 실제 장생포 고래마을의 옛모습을 재현해놓은 고래문화마을이 구축된다.” 하지만 울산의 고래문화가 찬반양론으로 분열되는 걸 무척 안타깝게 여긴다. “지난달 고래축제를 했는데 환경단체에서 남구청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했다. 포획 관계자들이 일부 검거되고 일부 식당의 고래고기까지 압수당했다. 다른 생선과 함께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를 이 바닥에서는 ‘혼획된 고래’라고 해서 합법적으로 팔 수 있다. 하지만 수요를 공급이 따라갈 수 없고 결국 불법포획을 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한쪽에서는 ‘고래 찬성’, 또 다른 쪽에서는 ‘결사반대’다. 솔로몬의 지혜가 아쉽다. 장생포 고래집은 1세대 ‘고래할매’ 때문인지 너도나도 ‘할매’란 단어를 독점하려 한다. 장생포에서 기술을 배운 몇몇 식당주는 포구를 떠나 현대백화점 뒷골목에서 도심파 고래집을 열었다. 고래불, 원조할매집 등이다.” 그가 울산의 상권발전사를 설명해준다. 공단 초창기에는 이렇다 할 만한 식당이 형성될 수 없었다. 임원들은 공단별로 형성돼 있는 영빈관을 이용했고 VIP가 오면 데려갈 고급 레스토랑조차 울산에는 없었다. ‘있는 사람들’은 울산시에 머물지 않고 다들 경주보문단지 호텔현대 등으로 갔다. 심완구 울산시장 재임 때(1997~2002년) 울산이 고향(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인 롯데 신격호 회장에게 제대로 된 호텔과 백화점을 하나 지어달라고 했다. 심 시장의 간청을 받은 신 회장 지시로 울산 롯데백화점·호텔·시네마가 구축된다. 현대백화점도 주리원백화점을 흡수하면서 태어난다. 울산 아산병원 근처에 현대호텔 등도 울산의 면모를 모던하게 만든다. 신 회장은 71년부터 마을잔치를 40년 이상 주도했다. “울산불고기도 회와 함께 ‘울산공단 회식문화’에 한 획을 그었다. 울산불고기는 도심지나 바닷가 쪽에서는 잘 볼 수 없다. 초창기에는 옥교동 ‘기와집’ 등 서너 집이 있었는데 옛날집 개조한 불고기집 정도였다.” ‘부르주아’처럼 등장한 울산 공단 근로자들. 한 집 건너 한 집이 직원의 집이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울산 식문화는 외화내빈이었다. 화이트칼라가 아니라 블루칼라 중산층이 포진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여건이 좋아지면서 시청 뒤 양념돼지불고기를 파는 ‘농장불고기’ 등이 흥행했다. 2000년대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서부터는 가족 나들이 먹거리로 언양과 봉계의 불고기 타운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 80년대 중반에 공업탑 근처에 대구뽈찜 전문점이 등장하고 ‘공단복집’(현재는 폐업)은 울산에서 처음으로 대구식으로 복껍질을 무쳐냈다. 중식당으로는 ‘신도반점’, 돌솥밥 전문점 ‘송광정’, 울산 첫 쌈밥 전문점인 ‘청화쌈밥’ 등이 울산 식문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90년대 들면서 곁반찬을 많이 주는 ‘란 스시’ 등 퓨전 초밥집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울주군 울산구치소 곁 ‘감나무집’은 울산 첫 오리불고기 전문점이 된다. 그 때문에 그 동네는 현재 15개 업소가 모인 오리불고기타운이 된다. ▶추천식당 서태일 시인이 안심하고 가도 좋을 25개 업소를 추천했다. 최씨와 중복되는 걸 빼고 나머지만 소개한다. 떡바위횟집(간절곶 근처 삼식이매운탕 전문점, 멍게·성게 비빔밥, 성수기 대기 필수)/ 이조한정식(남구·가격 대비 만족도 높은 코스한식당)/ 이어도(남구·항상 맛이 일정한 아구탕 전문)/ 울산돼지국밥(남구·대표 돼지국밥집)/ 외가집(중구·간편 한식)/ 금강산삼계탕(남구)/ 완도참전복(남구·전복코스요리), 희락복국(남구)/ 란 스시(남구·일식)/ 미진돌곱창(중구)/ 경주식당(중구·보신탕)/ 대감당(남구·일식)/ 만복래(울주군 봉계리·불고기)/ 기와집(언양불고기)/ 진미불고기(언양불고기) ◆식객 최영희 현재 울산시 중구 성남동에서 ‘감성창고’란 상설 플리마켓을 운영하는 프리랜서 자영업자. ‘울산맛집 블로거’ 하면 그의 이름이 첫손에 꼽힌다. 제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식도락 생활을 시작한다.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서울에서 공부를 할 때도 틈틈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었다. 울산으로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울산에서 먹거리 탐방에 나서면서 자료를 정리했다. 2005년에 다음 카페에서 커뮤니티 생활을 하게 되었다. 2006년에 본격적으로 다음에서 블로그 활동을 시작한다. 2006년 울산에서 블로그를 할 때만 해도 블로거는 거의 없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드물어 식당을 다니면서 오해도 많이 받았다. 2011년을 기점으로 블로그 이웃들과의 만남을 가지며 바비큐 파티도 열었다. 20012년에 처음으로 ‘울산블로거즈’라는 울산에서 활동하는 블로그 모임과 협업을 시작했다. 식당에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블로그에는 철저하게 자기 사진을 올리진 않는다. 공짜로 먹는 것도 싫다. ‘돈이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라고 믿는다. 사진 찍는다고 사장님들이 서비스 주거나 공짜로 주는 것도 불편해 한다. “울산은 공단이 많고 근로자가 많다보니 회식 문화가 압도하는 것 같다. 식문화에 있어서도 다른 지역들에 비해 꽤 뒤처져 있다. 새로 생기는 가게 상당수가 회식이 가능한 삼겹살집이나 횟집이 많다. 맛과 퀄리티보다는 편하게 회식하며 즐길 수 있는 푸짐한 양과 고기 등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다. 그래서인지 외부 음식의 유입도 꽤 더딘 편이다. 울산에서 유명한 일식집이래도 로바다야키처럼 이런 저런 퀄리티 떨어지는 밑반찬 같은 음식으로 채워진다. 양식도 마찬가지다. SNS가 발달하여 예전에 비해 세련된 레스토랑들은 많이 생기고 있지만 비주얼만큼 맛을 따라가는 식당이 적다. 횟집과 초장집이 발달하다보니 퀄리티 있는 일식집이 생겨나도 오래 못 가는 게 현실이다. 요즘 젊은 사장이 오픈하는, 조금 색다르고 서울·부산·대구처럼 트렌드를 따라가는 곳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특색있는 곳이 있다면 현대 계열사가 모여있는 동구에 형성되고 있는 ‘울산의 이태원’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다보니 외국인 겨냥 식당과 펍이 많이 생긴다.” 그는 2016년 1월부터 네이버를 통해 ‘한바다 & 무상훈과 함께 울산맛집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는 또 ‘울산맛집지도’를 매달 1회 발행한다. 자비로 직접 제작하고 200부 정도 인쇄하여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추천맛집 함양집(80년 역사의 비빔밥 전문점)/ 북경통닭(하루 30마리 한정 마늘통닭)/ 거제전통국밥(울진 최고 굴국밥집)/ 미스김떡볶이(중독에 가까운 양념맛 인상적)/ 바투바투(3만원에 6가지 코스식, 하루 5팀만 받음)/ 율리이장집(발효천연조미료 베이스 식단)/ 간절곶해빵(간절곶 대표 빵, 항상 줄을 섬)/ 금장생복집(간절곶 근처 된장물회점)/ 충주식당(닭내장탕 전문)/ 더 데판(데판야키 전문점)/ 하르방밀면(보말칼국수 전문)/ 남산민물추어탕(밑반찬 좋은 추어탕점)/ 강촌잉어찜(30년 전통 잉어찜 전문)/ 그라파 피자리아(울산 방어동에서 핫한 외국인 단골 많은 레스토랑)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6.1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울산 ‘라틴커피’ 노현일 대표
울산에도 ‘커피문화’가 있을까. 대다수 ‘자동차, 배, 석유는 있어도 커피 문화는 글쎄…’ 하는 반응인 것 같다. 그런데 남구 선암동, 온산공단과 울산시 접경에 자리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커피 전문 ‘라틴커피’의 노현일 대표(59)를 만나면 ‘글쎄’란 단어는 유보해야 될 것 같다. 그는 믹스커피 수준의 커피문화가 점령하고 있는 울산 커피계에 커피 탐험가처럼 등장했다. 상당수 공단의 직원들은 아직 원두커피보다 달달한 다방커피에 익숙한 게 현실. 생활 수준이 다른 도시에 비해 높은 울산이라지만, 커피는 여전히 생활 중심권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는 원두 커피향이 공단 곳곳을 파고드는 울산을 꿈꾼다. 에스프레소에 ‘그라파’(와인증류주)를 섞어 식전 공백에 마실 정도로 그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광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커피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라틴아메리카 품종커피 전문 커피숍 ‘라티노’(라틴사람)를 2011년 남구 신정동에서 론칭한다. 지난해 ‘라틴커피’로 상호를 달리해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 그는 ‘품종커피’의 선두주자다. 지구촌에 유통되는 모든 커피를 다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현재 한국 커피문화가 국가별 커피에 너무 매몰돼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특징이 희박할 수밖에 없는 ‘국가별 커피’에서 벗어났다. 국가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농장으로 농장에서 특정 품종으로 더 특화시키기 위해 품종 중심으로 커피를 팔겠다는 전략이다. 특정 지역 커피를 품종별로 잘게 쪼개 맛의 스펙트럼을 세분화시키겠다는 것. 가령 하와이 커피를 얘기하는 데서 벗어나 하와이 코나 지역에서 자라는 티피카종의 맛을 얘기하는 식으로 커피를 팔겠단다. 그는 지금 라틴아메리카 커피에만 올인한다. 상당수 커피숍이 묻지마 식으로 카페라테,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등을 백과사전식으로 팔고 있을 때 그는 라틴커피만 특화시켜 ‘학술논문’처럼 팔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생두를 직접 수입해서 로스팅하고 그 원두를 건네받은 핸드드립 전문가 강유임씨가 최상의 원두커피를 작품처럼 제공한다. 갓 볶은 원두는 품종별로 디자인된 포장지에 들어간다. 스페셜티 전문점보다 한 발 더 나간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로스팅한 원두를 받아 사용하는 걸 납득하지 못한다. 비록 한국이 커피 원산지는 아니지만, 바리스타라면 당연히 자기가 선택한 생두를 생산하는 현지 농장을 한번이라도 찾아가 보는 게 기본적 열정이란다. ◆1부 인생은 성악가였다 커피쟁이가 되기 전 그는 성악가였다. 영남대 성악과를 졸업한 그는 부산시립합창단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고 1989년 트렌토 음악원을 졸업한다. 1996년부터 10년간 영남대 성악과 강단에 섰다. 그 과정에 모두 12차례의 독창회를 갖는다. 그런데 성악은 1% 부족했다. 그를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47세가 되던 어느 날 매우 황량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음악으로 대성할 가능성도, 음악을 계속해야 될 에너지도 찾을 수 없었다. 속으로 ‘쉰에 음악을 그만두자’고 결심한다. 각종 커피머신을 구비한 그의 레슨실은 점차 원두커피 시음공간으로 변한다. ‘커피광’아버지 영향…초등4년때 맛 경험 伊 성악 전공 유학에도 뭔가 황량한 느낌 95년 커피명가 안명규 대표와 운명적 만남 ‘쉰에 음악 관두자’ 결심 실행 과테말라行 2006년부터‘커피 볶는 사내’로 인생2막 라틴커피 수입 전문으로 커피숍도 운영 95년쯤 운명적인 사람을 만난다. 바로 한국 원두커피문화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커피명가’의 창업자 안명규 대표였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경주시 감포 바닷가에 있었던 레스토랑 ‘지중해’. 그는 10회 정도 그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불렀다. 안 대표는 그의 팬이었다. 두 사내는 커피와 음악을 공유하며 도반이 된다. 마치 존 레논과 밥 딜런이 뉴욕에서 만나 전자기타와 마약을 주고 받는 식이었다. 그는 커피명가의 드립커피를 퍽 즐겼다. 그의 화두는 점차 음악에서 커피로 변한다. 2006년 사직서를 던진다. 그리고 과테말라로 가서 1년간 음악선교사가 된다. 물방울만 한 커피 지식을 가진 그는 과테말라에서 비로소 바다를 본다. 한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한 지역에도 얼마나 많은 커피 농장과 다양한 품종이 존재하는지에 충격을 받는다. 책 속의 커피 지식은 조족지혈이었다. 과테말라 그의 집에서 40㎞ 떨어진 안티구아. 숱한 커피농장을 투어하면서 수시로 생두를 사와 프라이팬에 볶아 커피를 뽑아 먹고 그 느낌을 기록했다. 안티구아 보르봉 품종도 농장마다 맛이 달랐다. ‘커피는 이렇다 저렇다’ 확신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란 걸 깨닫는다. 과수원마다 사과 맛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과의 맛은 이렇다’고 절대 단언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커피 현장 공부차 30회 이상 안티구아로 건너갔다. 그는 커피 볶는 사내로 변해 있었다. 2009년 신정동 그의 스튜디오는 라틴커피 전문 수입업체 사무실로 개조된다. 그해 9월 안 대표와 라틴커피투어에 나선다. 멕시코 국경 근처 우에우에테낭고 지역에 있는 농장 ‘인헤르토’, 그곳은 두 사내에게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거기에서 무려 7년간 과테말라 올해 최고 커피 품종에 선정된 ‘파카마라’를 친견하게 된다. 현지 농장주도 농장부터 방문한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둘은 20일간 과테말라를 비롯해 엘살바도르, 파나마, 자메이카, 쿠바, 멕시코 등을 순례한다. 지난 4월 그는 또 라틴아메리카 농장 순례에 나선다. “안 대표가 제 커피의 초석이다. 항상 고맙게 여기고 있다.” 2003~2005년 뉴욕 커피품평회에서 세계적 선풍을 일으킨 ‘게이샤’ 품종을 주목한다. 이 품종이 2011~2012년 국내에서도 돌풍을 일으킨다. 그도 2011년 2월 과테말라로 가서 게이샤를 찾았다. 안티구아 옆 도시 아카테낭고의 농장 ‘일리바노’에서 80㎏의 게이샤를 울산으로 수입한다. 고가라서 그런지 판로가 막막했다. 그해 5월 부산 해운대 신세계백화점 센텀점 커피페어 행사에 참여해 게이샤를 직접 볶아주며 적극 홍보에 나선다. 그걸 계기로 신세계백화점 협력업체가 된다. 지금도 백화점 지하 2층 식당가 입구에서 원두커피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 내가 생각하는 한국 커피문화 현재 일반 커피숍에서 다양한 고급 품종 커피를 취급하기 힘든 이유는 뭘까? “일단 볶은 원두의 유통기한이 보름 정도로 무척 짧고 그래서 재고관리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게다가 손님의 90% 이상이 커피가 아니라 대화 때문에 숍에 온다. 그들에겐 1만원 넘는 커피는 부담이다. 한 잔에 2천~5천원이 대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직 핸드드립 전문점이 대중화되기 어렵다.” 현재 그가 취급하는 커피는 게이샤(과테말라 파나마 에스메랄다), 파카마라(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콜롬비아 슈프리모, 과테말라 보르봉, 파나마 베를리나, 과테말라 리바노, 온두라스 웰체스, 그리고 브라질 보르봉·과테말라 티피카·코스타리카 카투라·인도 로브스타를 황금비율로 섞은 라틴블렌딩커피 등 모두 14종. 그 중 몇 종을 시음해봤다. 일반 가게의 커피가 냉동사과 같다면 그의 커피는 방금 딴 과즙 흥건한 청송얼음골사과 같다. 원두향이 ‘기승전결식’으로 감지된다. 여느 커피는 그냥 ‘탄내’가 주조향이다. 역시 싼 게 비지떡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디저트용 커피로 차와 커피를 혼합한 듯한 ‘커피체리차’를 내민다. 보이차, 홍차, 원두커피를 섞어놓은 것 같았다. 원두향 묻은 혀가 더 차분해진다. 현재 품종별로 1.2㎏를 볶아 1㎏은 백화점에서 유통시키고 나머지 200g은 커피숍에서 소진시킨다. 그는 로스팅한 지 2일 이내의 ‘겉절이 커피’, 3~5일의 ‘잘 익은 커피’, 열흘이 넘은 ‘묵은지 커피’ 등으로 분류한다. 그는 맛있다고 저렴하다고 한꺼번에 많이 살 필요가 없단다. 맛의 유통기한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커피맛의 결정 변수는 뭘까. “일단 생두가 70%, 로스팅이 20%, 추출이 10%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 변수가 있다. 바로 마시는 사람의 심리상태다. 가령 부모님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세계 최고의 커피도 가장 쓴 커피가 될 것이다.” 좋은 커피는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 좋은 마음은 좋은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커피는 항상 문화와 공존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좋은 문화를 위해 계절별 살롱음악회를 기획한다. 오는 8월1일부터 1주일간 새로운 라틴커피 시음회를 겸한 음악회를 가질 계획이다. “90%를 차지하고 있는 믹스커피 시장도 향후 55% 정도로 하락할 거고 그럼 10% 정도에 불과한 원두커피 마니아 수도 35%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그는 언젠가 품종 전문 커피시대가 오리라 믿는다. 지금처럼 어느 곳이나 엇비슷한 커피가 아니다. 여기는 이맛, 저기는 저맛, 하지만 우열은 따지지 않고 어떤 특징만 존중하고 소비하는 ‘각인각색 커피문화시대’를 갈구하는 것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6.10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食客열전 제5회- ‘시식남녀…’ 김영탁 시인
14년 출판사‘황금알’운영 130여 시인選 계간 詩종합지 ‘문학청춘’ 7년째 펴내 뛰어난 요리솜씨로 ‘식객 시인’ 평가도 4년전 ‘전국유람 詩食프로젝트’ 시도 대구 이하석 등 14명 시인 ‘大邱十味’ 향토시인 단골식당 대표 메뉴를 詩로 ‘시인과 맛을 찾아서’ ‘음식시집’ 계획 ‘잡식성 시인’ 지난 주말 서울에서 암약(?)하는 김영탁 시인을 만났다. 동숭동 대학로 세실극장과 월간 객석 뒷골목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출판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었던 이화장 근처에 주둔하고 있다. 30평 빌라를 통채로 쓰는 출판사이다. 2층 같은 1층인데 바로 앞에 이화장과 낙산이 정원처럼 웅크리고 있다. 절묘한 입지다. 골목 풍광은 고상하면서도 뭔가 빈티지스럽다. 서랍에서 십수 년 만에 끄집어내 방금 입은 고급 청바지의 질감이랄까. 시인들이 불쑥 사람 좋은 그를 예고 없이 찾아온다. 출판사 때려치우고 식당 차려도 망하지 않을 요리 솜씨 때문이다. 다들 뚝딱 만들어 오는 그의 즉석 요리에 뻑 간다. 물론 그의 작업실 바로 옆 테라스 비치파라솔에 앉아 먹어야 제격. 뜨락엔 라일락과 쥐똥나무 향기가 무성하다. ◆동대문 옆 족발집 취담 대학로~동대문 근처 술집을 전전하며 밤새 ‘음주잡담’을 했다. 1975년부터 한 자리에서 장사하고 있는 동대문 바로 옆 창신동의 대표 족발집인 ‘와글와글’에서 포문을 열었다. 정말 술집 분위기가 와글와글이다. 조금 늦어 우린 대기를 했다. 출입문에 대기자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이후 대학로 마지막 포장마차로 불리는 ‘명륜포차’ 등으로 차수를 옮겨다녔다. 다음 날 오전 9시30분,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기가 막힌 양평해장국이 있는데 그걸로 속을 풀고 근처 주택가 골목에 있는 단골 커피숍으로 이동해 커피 한 잔 해야 된단다. 징할 정도로 정이 푸짐했다. 그는 월~수요일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목~토요일만 마신다. 임종 때까지 주당 소리를 듣기 위한 그만의 ‘주도(酒道)’다. 그의 콧수염은 일종의 블랙홀이고 덫이다. 유행에서 한 걸음 멀어진 버전, 하지만 그런대로 서울에서 아직 통용된다. 녹 묻은 금속성 음성. 야수적이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눈빛. 그게 상대를 금세 무장해제시킨다. 쫄게 만드는 게 아니라 ‘취흥(醉興)’으로 바로 빠져들게 만든다. 매력보다는 ‘마력’이다. 그는 스스로를 ‘잡놈’이라 했다. 여기서 '잡'은 공자가 예기한 '조수와 초목(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이 시'라고 하는 뜻과 통한다. 여기에 풍류가 합쳐야 '잡'이 된다. 그가 얘기한 '잡놈'의 뜻은 낭만적인 멀티플레이어인 듯 하다. 하지만 아주 섬세한 잡놈이다. 14년 역사의 출판사 ‘황금알’을 꾸려가는 사장이다. 시전문종합지 계간 ‘문학청춘’을 7년째 내고 있다. 130권의 황금알 시인선까지 펴냈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안 되는 직업을 갖고 10년 이상 서울의 노른자위 땅에서 버티고 있는 그의 능력이 신비롭다. 라면을 먹더라도 좋은 책만 내겠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낸 책이 300여 종. 이 책 중 효자도 있어 스테디셀러도 있다. 여기서 조금씩 나오는 이익을 잡지 제작 등에 투입한단다. 그럼 그렇지. 아무튼 그의 소망은 시만 갖고도 밥 먹고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미 그게 불가능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가능하다고 굳이 믿고 싶어 한다. ◆팔도 시인…식탁으로 불러내다 그는 시단이 너무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선 안된다고 믿는다. 늘 소외받는 지역시인의 안부가 더 궁금하고 염려됐다. 4년 전 어느 날이었다. ‘시인 찾아 삼만리를 떠나자’고 결심한다. 소싯적 3년간 전국 유람한 경력이 도움이 됐다. 팔도 시인의 등을 쳐먹으려는 고도의 술책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시인들도 있었지만 그는 그냥 빙그레 웃으며 야반도주하듯 유람을 시작했다. 수백 명의 시인을 만났고 그만큼의 술병이 비워졌다. 그런 덕분에 ‘김영탁의 전국유람 시식남녀(詩食男女)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다. ‘시식’이란 시와 음식의 합작품. 그 내용은 ‘문학청춘’에 연재됐다. 우리 문단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다. 그가 다닌 도시는 대구를 필두로 여수, 순천, 군산, 김제, 부산, 울산, 마산, 충주, 속초, 고성, 양양, 서산, 인천, 경주 등이다. 수년간 전국 각처 향토시인들이 사랑하는 문화사랑방 같은 식당과 그 식당의 대표 메뉴를 그 지역 시인이 시로 노래하도록 기획했다. ‘팔도시인음식견문록’인 셈이다. 김 시인은 그걸 ‘한국의 시인과 맛을 찾아서’란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으로 있다. 이와 관련해 ‘팔도음식시집’도 국내 최초로 태어날 예정이다. 덕분에 그는 식객 시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 작고한 송수권 시인, 충북 옥천으로 들어가 옻요리 연구가로 변신한 박기영 시인도 식객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시식남녀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국어로 쓴 시의 정수를 찾아보고 독자들과 함께 시와 맛의 향연에 동참하고 느끼며 호흡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한국 현대시는 대중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극복할 과제라 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전국 경향 각지에 살고 있는 시인들과 그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언어를 만든 시와 고향의 맛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는 수공업적이고 발로 뛰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일일이 시인을 만나서 밥을 함께하며 시화(詩話)를 꽃피우는 고단한 작업이다. 언젠가 문단의 대동여지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그는 식약동원(食藥同源)이란 말 옆에 ‘시식동원(詩食同源)’이라는 말을 기대 세운다. “약과 음식이 동일한 것이라면 시를 읽고 쓰는 행위도 음식을 요리하고 냄새를 맡고 먹고 마시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이것이 한국의 시인과 맛을 찾아서의 두 번째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음식은 사람을 만들고 시인을 만든다. 음식을 만들어서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은 서로가 생명을 호흡하며 즐거운 일”이라고 규정한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은 타자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시의 운동성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음식은 인간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어 있듯이 시인들에게도 시는 음식과 마찬가지로 생명 같은 게 아닐까. 대구 시식남녀에 모인 시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대구음식시 맛보기 1박2일 일정으로 대구로 온 그는 14명의 지역 시인을 동봉막창구이, 미도다방, 대덕식당, 산호찜갈비 등에서 만나 통음했다. 거기서 가장 대구스러운 음식이랄 수 있는 ‘대구십미(大邱十味)’ 관련 시 몇 편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대구십미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따로국밥’에 대해서 3명의 시인이 시를 적었다. 이하석 시인은 ‘국밥 먹기란 얼마나 성급한 사랑인가?/ 선 채로 먹건 앉아서 먹건/ 맵고 뜨거움에 숨을 몰아쉬면서/ 연기 맛 같은 현실과 꿈, 나와 너, 또는 지나온 곳과 가야 할 곳까지 말아서 후딱 해치우느니'(이하석), '삭둑 삭둑 잘려진 백년해로 맹세를/ 싸잡아 무쇠 가마에 태워/ 북 치고 장구 치고 춤추고 노래하여 피운/ 한 송이 블랙홀이여'(권순학), ‘앞산 진달래 봄을 푼다/ 대덕식당 따로국밥/ 해장술에 취해/ 그 아침 개나리 목련 다 불러내어/ 불큰하니, 능선 따라 가슴 속 한(恨)을 푼다'(김동원)면서 시인들은 따로국밥을 찬(讚)했다. 정숙·정하해 두 시인은 ‘동인동찜갈비’에 대해 노래했다. 정숙 시인은 ‘찜을 한다는 것은, 내가 네 그윽한 눈동자를 그리워한다는 것/ 갈수록 욕망은 자라나서 해 종일 네 그림자 따라다니다 보면/ 언젠가 화끈하게 서로 몸 섞으면서 마음속 풀잎들/ 비비고 또 비비다가 나른한 눈동자로 같이 뜨거운 커피향의/ 깊이를 재는 시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정하해 시인은 ‘살이 온통 당기는 것이다/ 한 줌의 마늘과 매운 고춧가루가 우려진 양푼에 이 질기지 않은 사랑 같은 거/ 볼이 터지도록 먹는 내내 눈물이 괴인다/ 맵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달지 않은 포옹이 어디 있으랴/ 또 한낮은 붉어, 벚꽃 마구 쳐들어올 때/ 우묵한 양푼에 잘근잘근 삶아진/ 갈비를 뜯는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다//(하략)’면서 찜갈비를 토로했다. 그는 시인과 시인들이 사랑하는 공간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닐 터. 풋나물에 막걸리 한잔을 나누며 시화를 노래할 방랑자 시인. 현재 미국과 유럽 쪽에서도 '시식남녀' 콜이 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6.0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신개념 IT카페를 찾아서 - 수성구 두산동 ‘텀트리 프로젝트’
소문난 핫플레이스에는 남다른 데가 꼭 하나는 있다. 예전에는 음식의 맛에 집중했지만 요즘 ‘폰카족’은 무엇인가 새롭거나 디테일한, 그러면서도 남다른 스토리가 있는 공간을 선택한다.‘숍인숍 마케팅’도 이 흐름을 반영한다. 지난주 수성구 두산동에 있는 신개념 카페 한 곳을 둘러보고 왔다. 그 카페는 집 짓는 일을 ‘공사’라고 하지 않는다. 당당히 ‘프로젝트(project)’라고 한다. 무크지 형식의 잡지까지 출간해 가게 구상에서부터 공사되는 전 과정을 사진으로 담았다. 참여한 스태프의 면면은 물론 입점하게 될 셰프의 이력까지 소상하게 기록했다. T갤러리·오픈오피스 등 공간 5등분 그림·공연감상에 회의하고 공부까지 열린 듯 닫힌 닫힌 듯 열린 숍인숍 카페 커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 접목 ‘윈윈’ 특별한 카페 만들려던 이승훈 대표 ‘슈퍼파이 디자인’ 박재우 대표에 의뢰 먹고 즐기는 ‘도심 속 힐링공간’ 완성 오픈기념 지역예술단체 초청 전시도 지난 13일부터 열흘간 오픈 기념 전시회도 가졌다. 스스로 전시를 기획하고 활동하는 지역 예술 단체인 ‘아트 살롱(art salon)’이 처음 초대를 받았다. 전시회 이름은 ‘아트 오브 아우라’. 감상 집중도를 올리기 위해 전시 기간 내내 커튼을 닫았다. 인테리어 소품과 작품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손님의 동선과 한 몸이 되도록 배치했다. 오픈 행사는 별도로 하지 않았다. 콘텐츠가 흥미로워 파워블로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났다. 맛 이전에 분위기가 특색 있기 때문이다. 쿨하면서도 시크하고 그러면서도 아방가르드하다. 그 가게 이름은 ‘텀트리(TUMTREE) 프로젝트’. 텀트리는 의성어로 두드리거나 현을 켤 때 나는 소리를 의미하는 ‘텀텀(Tumtum)’과 ‘트리(Tree)’의 합성어. ‘세상을 울리는 나무’란 뜻이다. 복합몰 형식의 콜라보 카페처럼 보인다 . 손님이 관객·관람객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도록 인테리어 라인을 구축했다. 홀이 꼭 무대·전시장 같다. 한 공간에서 회의도 하고 그림도 감상하고 사무도 보고 공부도 하고 공연까지 감상할 수 있게 했다. 텀트리에서는 주인이 손님이 되기도 하고 손님이 주인이 되기도 한다. 손님을 텀트리 공간의 한 오브제로 끌어들였다. ‘주객일여(主客一如) 마케팅’이랄까. ◆ 텀트리 실내 인테리어 스토리 660㎡(200평) 규모의 건물은 밖에서 보면 미술관 같다. 모노크롬(단색화) 버전의 디자인 덕분이다. 유채색을 극도로 자제했다. 간판도 없다. 그냥 ‘텀트리 프로젝트’란 고딕체 영문자를 딱 두 자락 적어 놓은 게 전부. 천고가 엄청 높다. 족히 8m는 될 것 같다. 그래서 입장하면 자신이 좀 특별하게 느껴진다. 스탠딩 파티를 열면 500명 이상도 수용할 것 같다. 내부는 다양한 공간으로 쪼개져 있다. 그러나 룸처럼 밀폐시키지 않았다. 열린 듯 닫혀있고 닫힌 듯 열려있다. 그 흔한 업자용 방부목 같은 건 일절 보이지 않는다. 건축자재를 잘 익혀 사용했다. 벽돌, 합판 등도 공간에 맞도록 재가공했다. 천장은 스파이럴 덕트를 붙여놓아 발전소 보일러실 안에 들어온 것 같다. 눅눅했던 마음이 산뜻하게 충전된다. 이런 게 인테리어 파워. 이런 공간 배치는 안목과 뚝심의 디자인 디렉터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혼자서 기획·설계·시공까지 하는 ‘슈퍼 파이 디자인’ 대표인 박재우. 그가 이 건물을 영화처럼 만들기 위해 1년쯤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화려하고 어디 가나 비슷한 현재 카페 스타일을 거부한다. 심플하지만 럭셔리하고 집처럼 따뜻하지만 뭔가 특별해 보이는 그런 공간디자인을 텀트리를 통해 구현해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야 한다. 나름 스티브 잡스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텀트리의 이승훈 대표. 그가 박 대표에게 ‘사고 한번 쳐보자’면서 전권을 위임한다. 박 대표는 이 공간을 단순히 먹고 마시는 식음 공간이 아니라 첨단기기와 예술이 융·복합되는 곳으로 치장하고 싶었다. 공간은 크게 T갤러리, 오픈오피스, 라이브러리, 뮤직스테이션, 오픈 커피 바 등으로 5등분돼 있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위해 기존 노출 콘크리트를 수제 톤으로 변주했다. 벽돌도 수공예적 방법으로 정성껏 쌓아올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커피 바가 보인다. 빨강 아크릴로 만든 게이트가 코사지처럼 서있다. 그 게이트는 정식 문이 아니다. 장식용 문이다. 커피 바 옆에 뮤직홀, 그 옆에 갤러리가 포진해 있다. 커피 바가 중심이면서도 다른 공간을 침입하지 않는 개폐형 레스토랑, 그래, 꼭 ‘창고토랑’ 같다. 커피머신도 좋은 오브제. 스피리트 머신과 슬레이어 머신 등을 세팅했다. 박 대표는 이 공간을 하나의 작품으로 여겨 세계3대 디자인어워드인 ‘IDA 디자인어워드’에 출품했다. ◆ 어떤 카페인가 ‘멀티플렉스 버전의 IT카페(SNS카페)’를 하나 론칭하자. 이 대표는 스태프와 머리를 맞댔다. 시장조사를 해봤다. 고작 와이파이를 서비스하는 수준이거나 휴대폰 가게 한쪽에서 커피, 빵, 빙수 등을 파는 정도. 2014년 스마트폰으로 소통하는, ‘텀트리’란 앱부터 개발했다. 국내 첫 위치 기반 블로깅 및 메시징 시스템. 이 앱을 이용하면 지인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텀트리 앱 가입자를 위한 자기 사무실 같은 카페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바로 텀트리 프로젝트다. 현재 앱은 보강작업 때문에 잠시 쉬고 있다. 오픈 기획 중 계획이 다수 수정된다. IT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문화카페를 만든다고 했는데 자칫 IT쪽에만 치우친 공간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텀트리에 가장 잘 맞는 게 뭘지 고민한다. 스테디 브랜드인 커피를 기반으로 한 콜라보 카페를 만들기로 한다. 전국 유명 커피숍을 벤치마킹한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일반 대중을 독점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텀트리가 파고들 시장을 모색한다. 스타벅스 마케팅을 눈여겨본다. 스타벅스는 커피보다 문화로 돈을 벌고 있었다. 직원과 손님 간에 ‘가족애’가 있다. 스타벅스는 살갑다. 직원과 손님의 시선이 마주친다. 커피가 나왔을 때 호출벨을 울리지 않고 가능한 한 손님의 이름을 불러준다. 세계 어느 지점에 가도 스파벅스 가족이란 공감대를 느낄 수 있게 표준화 시스템을 잘 구축했다. 텀트리는 커피를 축으로 문화예술 콘텐츠와 윈윈전략을 구사한다. 서울의 압구정동 도산공원 근처에 있는 핫플레이스 ‘퀸마마 마켓’을 닮았다. 퀸마마는 1~4층이 유기적으로 짜인 복합몰 형식의 편집숍 카페인데, 향후 이런 방식의 외식업체가 줄을 이을 전망이다. 공사하면서 가장 고민한 대목은 ‘커피와 어떤 음식을 함께할 것인가’였다. 음식이 너무 푸짐하고 고급스러우면 문화적 소통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커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샌드위치를 브런치메뉴로 선택한다. 요리적 측면에서 다양한 식성을 세련되게 응용할 수 있는 메뉴 중 하나가 샌드위치. 허기를 조금 채우면서 우아하게 대화하는 데 샌드위치만 한 파트너가 없다고 봤다. ◆ 바리스타가 셰프를 만났을 때 커피는 바리스타 박수아씨, 새로운 샌드위치 라인은 셰프 강혜은씨가 만든다. 박수아씨는 커피가 가진 1천200가지 이상의 화학 분자 속에서 새로운 맛을 찾아낼 때 가장 행복하단다. 건축공학도인 그녀는 휴학 중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다가 이 길로 접어든다. 지난해 코리아 브루잉 챔피언십에서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본선에 올라 대상을 차지한다. 그녀는 이탈리아 커피협회에서 인증한 바리스타 자격인증 배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강 셰프를 요리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건 ‘병’이다. 10년 전 악성 림프종에 걸린다. 3년간 각종 식이요법을 전전하다가 결국 요리가 그녀의 화두가 된다. 시내 레스토랑 ‘디종’, 베이커리 카페 ‘르배’ 등에서 근무했다. 현재 북구 읍내정보통신학교에서 케이크 디자인 등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가 만드는 샌드위치는 샐러드에 유기농 빵을 섞어놓은 것 같다. 그렇다고 빵 따로 재료 따로는 아니다. 빵을 둘러싼 기능성 식재료 선택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그녀는 ‘비트크림치즈 샌드위치’를 강추한다. 이 샌드위치에는 비트크림치즈, 화이트크림치즈, 그라나파나노치즈, 호밀빵, 사과, 슬라이스 아몬드, 로메인, 롤리로사, 라디키오, 로즈 등이 들어간다. 하나같이 홈메이드 스타일의 음식이다. 향후 패션쇼도 하고 댄싱파티 등 다양한 공연을 끌고 올 모양이다. 아직은 무명이지만 천재적 역량을 가진 신진 화가도 띄워주고 싶어한다. 갑자기 요즘 제일 핫한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전문 클럽 DJ 겸 가수인 춘자 정도의 파티맨을 불러 ‘미드나잇 스탠딩 힙합 파티’를 폭탄처럼 터트려도 좋을 듯….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5.2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食客열전 제4회 - 별별 식객 리스트
식객은 뭔가. 식객은 최소 10년 이상 다른 일은 제쳐둔 채 오직 팔도 별미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에 미쳐 있어야 할 것. 그리고 그 과정을 글로 기록해나가는 음식연구가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식당의 정보만 곧이곧대로 주례사처럼 알려주는 푸드블로거와 음식칼럼니스트. 엄격히 말해 이들은 식객이 아니다. 특정 식당의 특정 메뉴가 다른 고장의 음식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소상하게 비교·설명할 수 있는 평론가급 안목과 입맛을 가져야 한다. 음식에 비교와 비판이 가미되어야 식객의 글이다. 식객도 전국파와 로컬파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광복 직후 국내 첫 음식칼럼니스트는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국파 식객 중 가장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 작고한 백파 홍성유를 꼽는다. 또 어떤 사람은 동아일보 전 편집장으로 국내에서 구어체 버전의 칼럼시대를 연 홍승면(1927~1983)을 꼽는다. 홍승면은 1950~60년대 독일·홍콩특파원이었고 견문이 넓어 동서양의 음식계보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1949년 합동통신사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그가 기념비적인 음식관련 연재를 시작한다. 76년부터 83년까지 월간 ‘주부생활’을 통해 연재된 ‘100미(味) 100상(想)’이란 음식칼럼이었다. 그의 연재물은 이후 삼우반 출판사에 의해 2권(1권은 ‘대밭에서 초여름을 씹다’, 2권은 ‘꿈을 끼운 샌드위치’)의 책으로 묶여나온다. ‘음식계보의 인문학적 접근’ 홍승면 ‘우리땅 식재료들의 재발견’ 임지호 드라마도 만든 만화 ‘식객’ 허영만 ‘30여년 4천여 식당 맛기행’ 김순경 황광해 “맛은 주관적이지 않다” 주장 재료 맛 가리는 조미료·육수문화 일침 “衣·住 배우듯 음식 먹는 것도 익혀야” ‘맛집엔 관심 없는’ 미식사학자 황교익 재료 본질을 역사·식품지리학적 탐구 “요리하는 수라간 궁녀는 없었다” 지적 또한 독학으로 만화를 터득한 뒤 월간 산을 통해 ‘뫼뿌리’를 연재한 조주청(71). 그는 다양한 직군을 돌아다닌 만화가이면서 세계여행작가로도 유명하다. 85년부터 신동아에 ‘조주청과 함께하는 지구촌기행’, 이어 문화일보에 ‘조주청의 맛기행’을 연재한다. 한국의 식재료를 찾아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한식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안동 출신의 산당 임지호(61). 자연에서 식재료를 취득해 요리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방랑식객’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자연요리연구가 겸 화가이기도 한 그는 2003년에 유엔이 주관하는 유엔 한국 음식 축제에 참가한다. 2013년 여행과 요리를 곁들인 방송 SBS ‘방랑식객- 식사하셨어요?’, 토크 쇼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적 있다. 한때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자연요리 전문점 ‘산당’을 차렸다가 접었다. 식객 돌풍의 주인공 만화가 허영만. 전남 여수 출신인 그는 2002년 9월2일부터 2008년 12월17일까지 총 116개의 이야기가 1천438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쿡 인터넷존에서 2010년 3월9일까지 연재했다. 단행본은 지금까지 총 27권으로 완결까지 모두 김영사에서 출간되었으며 SBS에서 24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이 밖에 ‘한국음식의 뿌리를 찾아서’(백산출판사)란 책을 낸 김영복, 마산 출신으로 ‘식탁 위의 한국사’로 더욱 유명해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 교수, 베이징 특파원을 거쳐 매일경제를 은퇴한 윤덕노는 2007년 출간한 ‘음식잡학사전’으로 유명해졌다. 여성지 기자 출신으로 후에 이탈리아로 가서 요리를 배우고 국내로 온 셰프 겸 요리연구가인 박찬일, 그는 요즘 경향신문에 ‘맛있는 미학’을 연재하고 있다. 일간지 기자 중에는 조선일보 김성윤, 한겨레 박미향, 지금은 은퇴한 중앙일보 유지상이 있으며 시인으로는 송수권, 소설가로는 김중혁, 한창훈, 성석제 등이 푸드스토리텔링을 잘한다. 삼천포 출신의 박정배(53)는 여행작가 풍모의 식객이다. 20대 중반부터 식객의 삶을 산다. 그 무렵 NHK의 ‘다큐서울 아시아는 지금’ 제작에 간여하면서 일본 출장을 많이 다닌다. 이후 2013년 한길사에서 나온, 음식의 유래를 찾아가는 박정배의 ‘음식강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수편에서는 강원도 막국수, 부산 밀면 등 전국 유명 냉면집의 족보를 고조리서 자료와 매칭시키면서 파고든다. 현재 고기, 술, 한식의 원형, 북한음식 등을 주제로 모두 6권의 시리즈로 묶을 작정이다. 대구에서 잔뼈가 굵은 우촌 박재곤(80). 국내 최고령 식객인 그는 20년째 월간 ‘산’에서 음식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소개된 업소 주인이 ‘산촌미락회’를 만들었다. ◆ 1인5역의 근성파 식객…김순경 홍승면 이후 가장 승부근성이 강한 식객은 김순경(77)일 것 같다. 그는 67년 동아일보에 사진기자로 입사했다 75년 동료 기자 112명과 함께 해직된다. 이후 서울 종로타워 자리에 국숫집을 차려 최초의 만두국수전골을 팔기도 했고, 충남 당진에 내려가 육우목장도 꾸렸다. 82년부터는 잡지사에서 일을 했다. 그는 잡지에 여행기사를 쓰며, 차를 몰며 전국을 다녔다. 84년 편집 이사를 맡았던 월간 자동차생활 창간호에 음식칼럼을 처음으로 썼고, 90년초에는 전업 칼럼니스트로 나섰다. 그는 전국의 유명 맛집과 주인공들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며 음식칼럼의 개척자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90년대에는 한국일보, 국민일보, 두산 사보 ‘백년 이웃’ 등에 연재를 시작해 ‘길따라 맛따라’ ‘길과 맛’을 자신의 고유 브랜드로 정착시키기도 했다. 이어서 주간지 한겨레21의 ‘음식이야기’에 8년, 월간조선에 ‘별미여행’을 5년, 연합뉴스(YTN) 르페르에 7년, 요리전문지 쿠켄에 한식이야기 5년 등 다양한 매체에 연재를 이어가며 많은 글을 남겼다. 저서로는 ‘우리맛 백한가지’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 ‘이맛을 대대로 전하게 하라’ ‘세상에 단 한 곳 내 고향 최고의 맛집’ ‘자랑스런 한식진미 100집’ 등 10여 권이 있는데,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은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화제를 모았다. 2011년 시작한 ‘김순경의 한식여행’을 위해 매월 1회 회원들과 함께 한식여행을 떠나고 있다. 30년 넘도록 취재한 식당은 4천곳이 넘는다. 지독한 사람이다. 속을 들여다 보면 백파보다 그를 전국을 종횡무진한 국내 첫 음식칼럼니스트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 ◆ 독설파 음식평론가 황광해와 황교익 현재 국내에는 두 명의 독설파 음식평론가 황씨가 있다. 황교익과 황광해다. 평론계에 등장한 건 황광해(59)가 먼저다.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사에서 잔뼈가 굵었다. 80년대 바캉스 부록으로 전국의 맛집 시리즈를 낼 때 그는 전국을 아홉 번 정도 일주했다. 그때 안목이 생겼다. 현재 네이버 맛집 카페 ‘포크와 젓가락’의 매니저인 그는 채널A ‘먹거리X파일-착한식당’ 검증위원, MBC ‘찾아라 맛있는 TV’ 검증위원, KBS ‘한국인의 밥상’ 등에 출연. 저서로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서울의 맛집 100선’ ‘한국맛집 579’ ‘줄서는 맛집’ 등이 있다. 그도 김순경처럼 지난 30여년 동안 3천500여 군데 맛집을 훑었다. 그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가리는 한국의 과도한 조미료·육수문화에 칼날을 들이댄다. “맛은 주관적이지 않다. ‘나는 좋은데 너는 어때?’라는 표현은 엉터리다. 맛은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북엇국을 먹는데 소고기 맛이 난다. 그런데도 그냥 맛있다고들 한다. 북엇국에서는 잘 손질한 북어의 맛이 나야 한다. 소고기 맛이 나는데도 무작정 ‘맛있다’고 표현하니까 자꾸 맛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도 배워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다. 옷 입는 것, 인테리어 등 의식주 중 의(衣)와 주(住)는 배우면서, 정작 제일 중요한 식(食)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과한 조미료와 감미제, 성분을 알 수 없는 향미증진제 같은 이른바 식품첨가물에 지나치게 관대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음식 만드는 사람들의 진정성은 대부분 이런 식품첨가물을 최대한 덜 쓰거나 안 쓰는 노력에서부터 출발한다. 조미료가 내는 맛이 식재료의 맛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수요미식회’ ‘죽기 전에 먹어야 될 음식 101선’ 등으로 전국적 명사가 된 식객 황교익(55). 그는 맛집에 관심이 없다. 맛의 족보를 파헤치는 ‘미식사학자’ 같다.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시절 부전공으로 생물학을 공부했다. 특정 식재료가 갖고 있는 본질을 역사적이면서도 식품지리학적으로 파고든다. 2002년부터 향토지적재산본부에서 지역 특산물의 취재 및 발굴, 브랜드 개발 연구를 했다. 국내 최초의 맛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20여년간 한국음식문화에 대해 고찰하고 사색한 내용을 담은 미각 입문서 ‘미각의 제국’을 펴낸다. 식당 이야기 대신 한국의 식재료에 대한 탐구서다. 한국인의 현재적 음식 문화론 ‘한국음식문화박물지’도 주목받는다. 독서량이 엄청나다. 그래서 이런 지적도 할 수 있었다. “대장금에 보면 수라간 궁녀들이 음식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여자는 궁중음식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궁중에서 음식을 하는 사람은 남숙수다. 한복은 요리할 때 입는 옷이 아니다.”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4.29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상상 속에 국수’ 이미희 사장
대구에 별미 국숫집 하나가 새로 태어났다. 중구 수동 중식당 천안성 바로 옆에 자리한 ‘상상속에 국수’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모리국수’. 뭐, 모리국수? 의령 메밀소바, 제주 고기국수, 충북 옥천 생선국수, 경남 거창의 어탕국수, 안동의 건진국수, 부산 밀면, 대구식 육국수 등보다 더 정체가 애매모호한 음식명이다. 일단 오너셰프 이미희씨가 구룡포의 국수 명가인 ‘까꾸네’로부터 조리법을 전수해 대구로 가져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했다. 당일 잡은 생선·해물에 끓인 칼국수 오래 전부터 구룡포 어부 해장음식 ‘모리’ 어원 日語·사투리 추측만 무성 15년前 ‘까꾸네’서 먹고 13년 단골 2014년 어머니 여읜 후 우울증·방황 상상 속에 있던 국수 배우며 벗어나 포항 원조 비법 전수…대구 첫 오픈 깔끔하고 맑은 매운 맛 신세계 선봬 기자도 10여 년 전 모리국수를 처음 접하곤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그 국수는 국내 각종 국수 스타일을 하나로 뭉쳐놓은 것 같았다. 짬뽕, 갱시기, 어탕, 해물탕, 매운탕, 칼국수 등의 공통분모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해물칼국수보다 해산물·생선칼국수 같았다. 화끈거릴 정도로 매운맛이지만 각종 해산물을 베이스로 해서 그런지 뒤끝이 아주 깔끔하고 맑았다. 멸치 육수도 사용하지 않는다. 국물이 맑지 않고 죽처럼 걸쭉하지만 최고급 고춧가루 때문인지 면발을 다 먹고도 성에 차지 않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국물을 퍼먹었던 기억이 난다. 모리국수를 생각하면 벌써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생선이 가장 많이 유통됐던 항구 중 한 곳인 구룡포. 울산 방어진과 함께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임과 동시에 청어, 고등어, 훗날에는 국내 대게 유통의 절대다수를 점하던 곳이다. 부산 초량에는 못 미치지만 경북 동해안 어촌 중에서는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해 일본인거리가 새롭게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권종원·이옥순 부부는 가난했다. 이옥순씨는 48년 전 구룡포 수협이 바로 보이는 뒷골목에 입에 풀칠할 공간을 연다. 이씨는 1만원을 빌려 시누이 집 마당에서 판자 국숫집을 마련했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25세 젊은 나이 때부터 고운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식당 이름은 ‘까꾸네’로 했다. 현재 외국에 거주하는 막내딸이 어릴 때 이웃 주민들로부터 귀염을 독차지했다. 딸을 보면 다들 까꿍, 까꿍을 연발했다. 자연히 부부의 국숫집은 ‘까꿍네’로 불렸고 나중에 ‘까꾸네’가 된다. 초창기에는 번듯한 메뉴판도 카운터도 없었다. 주먹구구식 국수를 끓여 팔았다. 무슨 치밀한 레시피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새벽 4시가 되면 갓 경매를 마친 항구의 사내들을 위해 국수 한 ‘다라이’를 삶았다. 번듯한 생선을 살 돈이 없었다. 어판장 후미에 나뒹굴던 죽은 고기 등을 얻어오기도 했다. 그걸 잘 양념해서 냄비에 담았다. 그러면 자기들이 알아서 가져다 연탄불에 끓여 먹었다. 각자 식성에 따라 양념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술에 찌든 속을 푸는 데는 역시 매운맛만 한 게 없었다. 칼국수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었다. 어부들은 국수는 불어도 상관 안 했다. 다들 국물맛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무렵 포항의 물회, 속초의 섭국, 제주의 자리물회 등 국내 어촌 마을의 해장음식은 다들 모리국수식이었다. ◆모리국수의 어원 국수에는 이런저런 생선이 많이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생선은 아귀와 열합(홍합), 미더덕 등이었다. 어황이 좋으면 곰치, 대게 등도 들어갔다. 들어가는 생선이 자주 바뀌었다. 사내들이 오늘은 무슨 고기가 들어갔느냐고 하면 무뚝뚝한 남편 권씨는 “나도 모린다”고 말하거나 “이것저것 모디 들어갔다”고 대답했다. 모리를 생선 머리라고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여러 수산물을 몰아넣으니 ‘모리’가 되었다고도 하고, ‘내도 모른데이’가 변용됐다고도 한다. 일부 국수 연구가는 모리는 나무 빽빽할 ‘삼(森)’ 자의 일어 훈독 발음이라며 본래는 숲을 의미하지만, 구룡포에서는 ‘많다’는 뜻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생선이 넉넉하게 들어간 먹음직스러운 요리여서 모리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구 서문시장의 명물국숫집이었던 ‘왕근이’, 강원도식 냉면인 ‘막국수’와 모리의 어감이 비슷한 것 같다. 왕근이는 대구식 사투리로 ‘아주 많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막국수는 ‘지금, 방금 거칠게 마구잡이 메밀국수’란 뜻을 갖고 있다. ◆ 모리국수에 반한 바리스타 이미희 오너셰프. 그녀는 싹싹하고 친절하다. 일본의 유명 료칸의 지배인급 친절도를 품고 있다. 일부러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피가 그렇단다. 대구여고를 나온 그녀는 원래 대학에서 한문을 전공했고 나중에 학원선생이 된다. 모리국수를 만난 건 2001년. 포항에 사는 그녀의 막내 이모와 함께 구룡포로 놀러갔다. 구룡포초등학교 정문 앞 철규분식에서 50년대식 찐빵을 먹고 우연히 들른 까꾸네. 거기서 만난 모리국수는 훗날 그녀의 삶의 노정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저는 원래 국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리국수는 남달랐어요. 국물은 뻑뻑한데도 그렇게 담백할 수가 없었어요.” 모리국수에 반한 그녀는 무려 13년간 그 집의 골수단골이 된다. 많이 갈 때는 격주로 갔다. 그녀는 대구에 모리국수 전문점을 내기 전 바리스타의 길을 잠시 걸었다. 바리스타 전에는 5명의 직원을 데리고 광고회사 사장이 되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삶이 아니었다. 바리스타의 꿈을 꾸면서 커피 연구에 푹 빠졌다. 그렇게 해서 지인과 함께 동업 형식으로 달서구 상인동 e편한세상 아파트 상가에서 ‘프렌치 홈’이란 숍 인 숍(Shop in shoip) 커피숍을 차렸다. 커피숍 한쪽에서는 프랑스 디자인 가구인 몽티니 등을 팔았다. 당시 패션 블로거 사이에 예쁘고 개성 있는 프로방스풍의 커피숍으로 소문난다. 하지만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장사 못지않게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먼 세상으로 가버린다. 그녀는 지독한 우울증을 앓는다. 2014년 가게도 정리했다. 1년6개월간 방황의 나날이었다. 그녀의 ‘수호천사’는 모리국수였다. 10년 넘게 상상 속 모리국수를 배우기 위해 곧장 구룡포로 내려갔다. 내려갔을 때 장남 진수씨가 가업을 이은 상태였다. 그녀를 위해 진수씨가 대구로 와서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 장인급 정성…맛 해부 대구식 모리국수는 조리사를 괴롭힌다. 잔치국수 끓이는 것과 방식이 확 다르다. 뭐랄까, 곰탕 끓이듯 대하지 않으면 맛이 손님을 배신한다. 이 셰프도 엄청 고생하고 나서 원형의 맛에 조금 근접할 수 있었다. 칼국수라고 얕봤다가는 모리국수한테 큰코 다친다. 그녀는 고춧가루부터 다시 공부했다. 신맛 나는 고춧가루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처음에 사용한 경북 모 지역의 고추는 김장김치에 어울리는 신맛고추였다. 영양고추로 바꾸자 신맛이 말끔히 사라졌다. 사람이 많이 올 것에 대비해 홍합, 미더덕, 파, 건새우 등으로 한꺼번에 50인분 기본 육수를 마련했다. 하지만 원형의 맛에서 많이 벗어났다. 해산물도 ‘다다익선’이 절대 아니었다. 자칫 마트에서 사 온 해물탕 육수로 추락한다. 육수도 숙성기간이 필요했다. 베이스 육수는 50인분에서 20인분씩만 장만한다. 육수도 초탕·재탕을 통해 완성된다. 그 과정에 아귀 내장이 큰 구실을 한다. 아귀 대신 대구·명태를 사용하면 비린내가 풍겨 맛을 망친다. 요즘은 혼자 오는 단골이 많아 아귀 사용이 쉽지 않아 낙지를 넣는다. 콩나물도 맛의 중요한 원천.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이 들어가도 맛이 확 달라진다. 콩나물도 국수를 넣고 3분의 1 정도 끓을 때 집어넣는다. 국수도 ‘까꾸네’는 건면을 사용하지만 그녀는 지역 정서를 반영해 생면을 사용한다. 그녀는 국물의 맛이 생선 이상으로 마늘과 고춧가루에서 발원한다고 믿는다. 국수는 매일 1% 정도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식재료 사정이 매일 달라지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튼 대구의 첫 ‘까꾸네’ 모리국수 기술전수 1호집이 어렵사리 태어났다. 거기 말고도 대구에 두 군데 정도 모리국수 파는 업소가 있는데 그건 ‘까꾸네’와 상관없다. 오후 4시쯤 모리국수를 들이켰다. 온몸이 땀에 젖는다. 지쳐있던 혓바닥이 가을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별스러운 국수를 찾는다면? 비 오는 평일 오후 혼자 가서 진검승부처럼 드셔보시길. 중구 수동 39-1. (053)426-9933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4.22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현풍장 名物’ 수구레 따로국밥, 이두연 십이리할매국밥집 사장
모처럼 전통시장으로 길을 향했다. 현풍백년도깨비시장(5·10일)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3년 전쯤 새롭게 지어진 상가 1층에 도열해 있는 수구레국밥촌. 간판을 일일이 수첩에 적어본다. 현대식당, 장세미소구레할매집, 창녕소구레국밥, 부현소구레국밥, 현가네어탕, 시장국밥, 으뜸이네, 은하곰탕, 현풍식당, 이방아지매수구레국밥, 시장보신탕, 진주식당, 성일식육식당, 십이리할매국밥, 지영이네국밥, 제일식당, 시장꿀꿀이집 등. 저 국밥집이 없는 현풍장을 생각해보라. 맥이 빠질 것이다. 3년 전부터 10여개 수구레 관련 국밥집은 5일장과 상관없이 매일 문을 연다. 소가죽과 갈빗살 사이 지방질로 별미 마리당 2㎏…좀 질기고 씹을수록 고소 60·70년대 미제군화로 끓였단 野談도 최근엔 국밥부터 무침·볶음까지 주목 현풍 국밥촌 3년 前부터 연중무휴 영업 媤母 김두임 이은 35년차 이두연 사장 선지 등 재료 장만부터 全 과정 온정성 ◆소구레와 수구레 여기 오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 하나. 소구레와 수구레. 어느 게 표준어일까? 일흔 고개를 살고 있는 할매 사장들은 모두 수구레는 맛이 안 난단다. 소구레, 해야 국밥이 제대로 맛을 낸다고 본다. 짜장면과 자장면이 차이랄 수 있겠다. 표준어는 ‘수구레’, 현풍지역에선 ‘소구레’로 통한다. 수구레는 소의 가죽과 갈빗살 부위 사이에 있는 지방질. 장터 사람들은 ‘소 껍데기 안의 껍데기’라 부른다. 양지머리와 같이 쫄깃쫄깃하다. 고기 값이 비싸던 시절 서민들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수구레로 단백질을 보충하기도 했다. 생활이 나아지면서 수구레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웃지 못할 ‘수구레 야담’이 있다. 1960~70년대에는 서울역 앞에 큰 솥을 걸어 놓고 설렁탕을 끓여 팔았다. 그 설렁탕에 들어 있던 고기가 미제 군화로 만든 수구레다. 당시 미군이 신던 군화는 순 쇠가죽으로만 만든 것이라서 몇 번 푹 삶으면 염색물이 빠지고 그럴듯한 고기가 됐다. 또 포장마차에서 파는 매콤한 수구레볶음도 샐러리맨 사이에 인기였다. 수구레는 한식 중에서 가장 ‘씹힘성의 미학’이 강하다. 씹을수록 고소하다는 점. 막상 입에 넣을 땐 비계 같은데 꼬들꼬들함과 부드러움이 비계와는 확연히 다른 살코기의 질감도 있다. 고기 같은 지방이랄까.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비계, 해파리, 물메기, 아귀 껍질을 씹는 느낌이 든다. 소 한 마리에서 수구레는 2㎏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수구레는 약간 질긴 데다 손질하기가 다소 힘들어 처음에는 버려지다시피 한 부위였다. 그래서 요즘은 수구레라는 음식을 파는 곳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청도, 창녕 등 대구와 맞물린 일부 경상도 남부권에서 아직 건재하고 있다. 원래 경상도 국밥 마니아는 맵고 얼큰하고 화끈하고 씹힘성이 있는 질깃한 특미를 좋아한다. 수구레가 딱이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막창과 곱창을 술안주로 만든 대구의 식도락가 취향도 바로 경상도 남부권의 별미 유전자와 맞물려 있다. 현풍장의 수구레 식당들은 국물에 밥이 따라 나오는 수구레국밥과 밥 대신에 삶은 국수를 말아먹는 수구레국수가 기본메뉴. 손님들의 주문에 따라 수구레 무침이나 볶음도 내놓는다. ◆십이리국밥할매를 만나다 오전 11시 수구레국밥촌 입구. 10여개 업소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런 곳에서는 다들 자기가 원조라 한다. 원조를 찾는 게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어느 집이 원조인가를 너무 따지지 않는 게 바람직한 것 같다. 참고로 수구레국밥촌은 1970년쯤 장세미 할머니가 맨 처음 전을 깔았다고 한다. 지금은 같은 상호를 이어받은 노순연 사장이 명맥을 잇고 있다. 현풍장 수구레국밥의 첫 단추로 불리는 ‘십이리할매국밥집’을 찾았다. 가게로 들어서니 35년 전부터 국밥집을 꾸려가고 있는 이두연 사장(65)이 해바라기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반갑게 맞는다. 이를 어쩌랴! 그녀의 등이 성치 않다. 얼굴은 봄날인데 등은 북풍한설 이는 한겨울이다. 수구레가 한 여인의 등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사장이 빙그레 웃으면 푸념을 깐다. “소구레가 내 등을 이렇게 소나무처럼 굽게 만들었지. 내 등이 굽어서 내 자식이 반듯하게 클 수 있었던 거라.” 장터 할매는 왜 하나같이 시인보다 더 시인 같은가. 저렇게 쉬운 표현으로 나그네를 감동시키니. 이 국밥집은 원래 그녀의 시어머니인 올해 아흔여덟살의 김두임 할머니가 천직이라 여기면서 끌고 왔다. 김두임 할머니는 국밥집 바로 지척에 살고 있다. 아직도 지난 세월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그녀의 몸집은 마른 대추처럼 쪼그라들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한다. 수구레에 웃고 수구레에 울던 한 할매의 고단한, 아니 보람차고 거룩하기까지 한 평생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이 집 가계를 보니 ‘수구레 가문’이다. 이 사장이 창녕군 대합면 십이리로 시집을 오니 시어머니는 창녕에서 가장 유명한 수구레국밥집을 꾸려가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십이리 장터 안에 있던 국밥집을 둘째 며느리한테 물려준다. 수구레국밥은 운명적인 구석이 있다. 멀쩡한 사람도 십수 년을 넘기면 등이 남아나질 못한다. 다들 휙휙 굽는다. 둘째 며느리도 허리가 너무 아파 가업을 이을 수 없었다. 결국 가장 강한 허리를 타고난 넷째 며느리인 이 사장이 26세 때 장터로 나온 시어머니의 가업을 잇게 된다. ◆수구레국밥 끓이기의 어려움 수구레는 5일마다 근처 도축장에서 보통 35~40관(1관은 3.75㎏)을 갖고 온다. 수구레의 물컹거리는 느낌을 부분적으로 상쇄시키는 게 선지다. 맛의 기본은 일단 선지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다. 그녀가 선지의 맛을 내는 방법을 소상하게 설명해준다. 펄펄 끓는 물에 한 밥그릇 분량을 집어넣는다. ‘물피’라서 주걱을 사용하지 않는다. 주걱을 사용해 휘휘 저으면 탱글탱글한 선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씌운다. 마치 참문어를 뜨거운 물에서 꽃모양으로 가닥을 잡아주듯 선지도 직접 양 손을 사용해 성형해준다. 마치 갓난아기를 목욕시켜주듯 정성스럽게 선지를 만져주어야 제대로 모양이 잡힌다. 김이 나면 잠시 불을 끈다. 그렇게 30분 정도 기다린다. 아직 선지의 속은 생피 상태라 이후 속속들이 다 익혀주어야 한다. 다시 불을 올리고 손으로 저어주고 김이 나면 뚜껑을 덮고 서서히 식히면 쫄깃쫄깃한 선지가 완성된다. 다음은 수구레 장만하기. 이 과정도 도자기 빚는 과정을 방불케 한다. 선지 만들기에 비하면 수구레 다듬는 절차는 더 조리사를 지키게 한다. 수구레는 질기고 잡내도 심해 제대로 손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탕 과정에 수구레를 잘 삶아야 하는데 너무 큰 솥에 삶으면 고기가 퍼져 맛을 버리게 된다. 50인분짜리 백철솥을 사용해 다듬는다. 찬물에 고기를 집어넣는다. 불을 켠다. 김이 나면 한번 뒤적거려 준다. 또 김이 나면 끄집어 낸다. 그것으로 ‘빨래 끝’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찬물로 빨래 치대듯 박박 씻어줘야 한다. 그렇게 안 씻어주면 잡내가 앙금처럼 남아 식감을 급감시킨다. 힘들어도 씻고 또 씻어줘야 한다. 그게 힘들면 전업을 해야 한다. 전통 수구레국밥을 고수하려면 이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은 육안으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잔털을 일일이 뽑아준다. 그러면서 1시간여 많게는 9번 수구레를 치대준다. 손질이 끝난 수구레는 채반에 올려 물기를 빼준다. 국을 끓이는 과정은 재료를 제대로 장만하는 데 비해 수월하다. 초탕 솥과 재탕 솥 두 개를 번갈아 이용하면서 국을 끓인다. 솥 하나만으로 끓이면 국이 너무 짓물러 맛이 없어진다. 초탕에서는 70% 정도만 익히고 나머지 30%는 주문이 들어오면 확 끓여낸다. 일차적으로 선지를 넣고 그 다음 수구레를 넣고 이어 파, 마늘, 양념류를 대충 넣고 초탕을 장만한다. 이때 선지를 바닥으로 가라앉게 하고 수구레는 위로 올린다. 그래야 너무 익고 덜 익는 걸 막을 수 있다. 수구레국밥, 부디 역사가 되시길!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4.1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음식 칼럼니스트 1세대’ 소설가 표성흠·홍성유
2000년 이전에는 방송보다는 신문·시사잡지·여성지 별책부록 등의 영향력이 더 컸다. 당연히 그런 곳에 글을 전문적으로 쓸 수 있는 문인, 레저담당 기자 등이 여론을 형성했다. 하지만 맛집 담론은 지극히 제한적으로 형성됐다. 일단 교통망이 제일 문제였다.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지만 교통은 여전히 거북이 수준. 80년대 후반 마이카붐 전까지 미식가와 식도락가의 행동 반경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국을 누비는 식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관광객이 갈 수 있는 곳도 제한됐다. 전국의 유명 맛집에 대한 정보 역시 바닥권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언론은 맛집에 대한 포문을 열 수 없었다. 음식전문기자도 생길 수 없었다. 다들 자기 동네, 자기 고장의 음식 범주에 갇혀 있었다. 70년대 언론이 다룬 음식 관련 프로그램은 고작 요리교실 정도였다. 70년대 조선왕조 궁중음식으로 인간문화재가 된 황혜성과 그의 딸 한복녀·한복선·한복진, 1954년 수도가정요리학원(현 하선정 요리학원)을 세운 하선정과 이종임 등 여성요리연구가가 국내 첫 쿡방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맛집 뉴스는 여전히 언론의 사냥감이 아니었다. 표성흠 ‘韓 첫 레저관광가이드북’主役 80년 한국일보가 펴낸 ‘한국의 여로’ 15권 걸쳐 길·숙박·음식정보 집대성 삼숙이탕·도리뱅뱅이·인삼어죽 등 無名 음식 특징 살린 작명도 수두룩 소설 ‘장군의 아들’ 작가 백파 홍성유 별미 찾아다니며 전하는 일에도 애착 주간조선에 ‘식도락기행’ 연재 모아 87·99년 이어 ‘한국 맛있는 집’ 출간 ◆한국일보의 ‘한국의 여로’ 198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한국인의 입맛도 점점 컬러풀해지기 시작한다. 관광·레저·여행문화가 기지개를 켠 덕분이다. 그 흐름을 미리 감지한 한국일보가 80년에 한 질 15권짜리 ‘한국의 여로’를 펴낸다. 기념비적이었다. 제작비 상당 부분은 작고한 앙드레 김이 떠안았다. 한국의 첫 레저·관광가이드북으로 기록되기도 하는 이 책은 갓 등장하기 시작한 드라이브족·미식가 등을 위해 길·숙박·음식 정보를 집대성했다. 금상첨화로 해외여행자유화가 시작된다. 70년대에는 해외여행 목적의 여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는 83년 1월1일부터 50세 이상 국민에 한하여 200만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 관광여권을 발급하였다. 사상 최초로 관광목적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것이다. 해외여행의 전면적 자유화는 89년에 이루어졌다. ‘한국의 여로’를 바탕으로 월간지 ‘마당’도 전국가이드북을 출간한다. ‘한국의 여로’ 제작에 관여했던 소설가 표성흠씨는 한국일보를 나와 일요신문 레저전문기자로 활약한다. 83년 소설가 중에서는 최인호 다음으로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한다. 표씨는 여러 여행사와 윈윈전략을 짜고 전국을 유람하며 드라이브 코스별 맛집 정보를 주말마다 알려주었다. 78년부터 소설가 김동리의 권유로 ‘월간문학’에 식도락 여행기를 연재했던 소설가 백파 홍성유는 홍승면과 표성흠이 알려준 맛집 등을 토대로 전국별미기행에 나선다. 표씨는 백파와 자주 정보를 교류했다. 이런 흐름 위에서 90년대 초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 간)를 띄울 수 있었다. 표씨가 기자에게 그때 사정이 담긴 회고담을 e메일로 보내왔다. 그는 경남 거창에서 고교 선생을 하다가 소설 공부를 위해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 편입학을 했다. 그때가 77년이다. 78년 여름방학 때 낙동강 뗏목 타기를 시도한다. 그 기록을 월간 ‘학원’지에 연재한다. 이 기사들을 봤다며 한국일보사 출판국에서 그를 특채했다. ‘한국의 여로’라는 책을 기획하면서 취재기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책이 한국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나온 관광가이드북이다. 가볼 만한 곳, 숙박, 음식 특산물 순으로 편집됐다. 취재차 전국을 몇 바퀴 돌았다. 이후 소설가가 되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다. 일요신문 레저기자로 발탁돼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치르는 동안 드라이브·등산·낚시·맛있는 집 등을 취재하러 또다시 전국일주를 몇 번 한다. 86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후부터 ‘맛있는 집’이 점점 인기를 누린다. 식도락을 즐길 만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 변천사가 재미있어요. 70년대엔 맛있는 집을 찾으려면 군청이나 읍사무소 근방의 오래된 집을 찾으라 했어요. 그다음이 기사식당이죠. 이 때까지는 질보다는 양이 우선이었습니다. 80년대 들어서며 창녕 양지발 향어회가 인기를 누렸어요. 곧이어 향어에 기생충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송어가 나옵니다. 아시안게임을 치를 즈음 해선 이 메뉴를 누르고 ‘역돔’이란 놈이 등장해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올림픽을 치르면서 보신탕에 대한 반감이 불거지고 대안책으로 신토불이 토종닭과 채식이 등장합니다.” 여기까지는 식도락이라기보다는 별미여행 정도였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 거리에 관계없이 식도락을 즐기러 다녔다. 같은 회를 먹어도 섬세하게 다져야 하는 세꼬시와 텀벙텀벙 막 썰어내는 막썰이회파가 나뉜다. 같은 돼지고기를 먹어도 배 속에서 갓 꺼낸 새끼돼지 요리인 ‘애저찜’을 찾는 팀과 돼지껍데기를 구운 수구레를 먹는 팀으로 갈라진다. 주머니 사정에 따른 양극화다. 그는 백파 홍성유보다 앞서 반 세기 동안 신문 잡지 방송 레저전문원고를 집필하며 살았다. 표씨는 일요신문에 있을 때 흥미로운 음식 이름을 많이 작명했다. 강릉의 대표적 해물탕 중 하나인 ‘삼숙이탕’, 강원도 홍천의 ‘엄나무백숙’, 충북 영동의 ‘도리뱅뱅이’, 금산의 ‘인삼어죽’, 거제도의 ‘막썰이회’, 부산의 ‘세꼬시’ 등 제대로 된 메뉴명이 없던 음식의 특징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 재미있는 메뉴명을 만들어주어 이젠 그 이름이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그 덕분에 국도는 물론 지방도로까지 훤히 꿰차고 있다. 지금도 내비게이션 없이 다닌다. 그러나 그는 여행 관련 30여권의 책을 낸 기자였지 식도락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음식은 먹고 살 만큼 섭취하는 것이지 사치 부릴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일요신문을 나온 표씨는 1인 레저전문기사집필실로 불렸던 ‘길손기획’을 창업한다. 그가 만든 별책부록만 40여권에 달한다. 그 어름에 앙드레 김이 간여한 여행전문 가이드북의 신지평을 열었던 ‘나그네’가 창간된다. 거기에 글을 연재했던 김홍성·박인식씨는 산꾼들을 위한 맛집을 소개했다. 낚시와 등산 관련 잡지는 조선일보가 독점하다시피 한다. 뒷날 97년 1월호 우촌 박재곤씨가 조선일보에서 펴내는 ‘월간 산’에서 ‘산따라 맛따라’란 음식칼럼을 지금까지 연재하고 있다. 표씨의 노력으로 90년대 중반에 국내 첫 여행작가협회가 태어난다. 유연태·송일봉씨 등이 초창기 맹활약을 한다. ◆백파 홍성유의 ‘별미기행’ 식객 칼럼니스트 1세대로 가장 인기를 누린 사람은 역시 백파 홍성유(1928~2002). 2002년 작고한 그는 미식가라기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던 식도락가형 작가였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장군의 아들’ 작가로 잘 알려진 백파는 서울 토박이로 10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중학시절에는 유도를 배우기도 하였고 형과 매형들 어깨너머로 마작도 배웠다고 한다. 또 까부는 일본 학생을 때려눕혀 철창신세를 졌다. 그곳에서 고바야시라는 노름꾼을 만났으며 이로 인해 10년 후쯤부터 한동안 노름판을 전전한다. 훗날 그의 이런 경력 때문인지 그는 자타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타짜로 불린다. 실제 고스톱의 각종 법칙도 그가 정립했고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도 그를 국제적 타짜로 인정할 정도다. 그는 소설 쓰는 일 못지않게 별미를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가 맛본 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도 그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주간조선에 ‘백파 홍성유의 식도락기행’을 연재했다. 그 결과를 모아 87년 전국 각지의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한 ‘한국 맛있는 집 999점’에 이어 99년 ‘한국 맛있는 집 1234점’ 등을 발간했다. 그걸 토대로 한국의 제대로 된 음식칼럼니스트 1호로 불리는 김순경씨(76)가 2000년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을 출간할 수 있게 된다. 외식업계에 ‘다담회’라는 것이 있다. 가끔 유명한 식당에 가면 이 ‘다담회’ 간판이 걸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 ‘다담회’는 백파의 ‘별미기행’에 소개된 업소들 중 100여명의 식당 사장들이 93년 의기투합해 만든 모임이다. 백파가 우리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의 칼럼을 보면 좀 아쉬움이 남는다. 미식가 특유의 전문성도 덜 보이고, 뭐랄까 그냥 사람이 많이 모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집을 찾아나선 일종의 음식 찾는 ‘주유산천기(周遊山川記)’로 보인다. 뒤에 등장하는 제대로 된 음식칼럼니스트인 김순경, 황광해, 황교익, 박정배 등에 비하면 내공이 한참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4.0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제철음식을 찾아서 - 봄 주꾸미
미식가는 ‘제철 식재료 캘린더’를 작성한다. 그는 지금 이 무렵, 어떤 농수산물을 먹어야 되는지를 안다. ‘10리(4㎞) 안에서 생산되는 로컬 제철음식’을 농협에서는 ‘신토불이(身土不二)’ 음식이라 한다. 생육환경 탓인지 자꾸 제철이 실종되는 것 같다. 제철 만난 농수산물은 포스와 때깔부터 다르다. 늦가을 제철 사과의 생동감 넘치는 과즙을 생각하시라. 창고에서 해를 넘긴 푸석푸석 하박하박한 사과는 절대 따라올 수 없다. 제철식재료는 사실 별다른 조리술이 필요치 않다. 그냥 날것 그대로가 딱이다. 제철 식재료는 ‘생얼’이 제격. 식재료가 시들면 악덕 식당주는 요상한 양념·향신료로 짙은 메이크업을 한다. 저급 식재료를 고급스럽게 보이게 하는 일종의 사기. 그건 조리가 아니고 조립(組立)이다. 요즘 그런 음식이 식당마다 흘러넘친다. 힐링·웰빙의 출발은 제철음식을 찾는 데서부터. 5∼6월 산란기前 3∼5월 서해産 별미 소라껍데기 이용 주낙 씨알 굵고 싱싱 가을에도 잡히지만 알 없어 맛 떨어져 오는 8일까지 ‘서천 동백주꾸미축제’ 무분별한 어획에 씨 말라…88% 수입 대구신주꾸미 샤부샤부로 ‘五味’ 경험 봄 도다리 시즌이 다 끝나간다. 이젠 ‘봄 주꾸미’ 시즌이다. 시즌은 3~5월. 주꾸미는 동·서·남해에서 다 잡힌다. 하지만 동·남해 주꾸미는 서해산(충남 서산~보령)에 맥을 못 춘다. 막강한 서해 주꾸미, 이놈을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사건이 1976년에 발생한다. 그해 1월 신안군 지도면 도덕도의 한 어부가 희한한 일로 고려청자 접시를 확보하게 된다. 주꾸미가 청자를 물고 물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 주꾸미 때문에 그해 10월11일부터 대대적인 신안 해저유물 발굴이 시작된다. 주꾸미 이야기를 할 때면 꼭 그 청자접시가 감초처럼 등장한다. 주꾸미도 지역마다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전라·충남에서는 ‘쭈깨미’, 경남에서는 ‘쭈게미’라고도 불린다. 흔히 ‘쭈꾸미’로 불리지만 주꾸미가 정확한 이름이다. 몸통에 8개의 팔이 달려 있는 것은 낙지와 비슷하다. 하지만 크기가 70㎝ 정도 되는 낙지에 비해 몸길이가 약 20㎝로 작은 편에 속한다. 한 팔이 긴 낙지와 달리 주꾸미의 8개 팔은 거의 같은 길이다. 주꾸미는 지역에 따라 잡는 시기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서남해에서는 더운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9월 무렵이면 주꾸미를 잡기 시작해 가을철이 한철이고 마량포구, 무창포 등 서해 중부에서는 2월 하순~5월 하순 주로 조업을 한다. 잡는 방법은 ‘주꾸미주낙’과 ‘낭장망’ 두 가지가 있다. 주꾸미주낙은 소라껍데기를 이용하며, 낭장망은 그물을 이용한다. 낭장망을 이용하여 잡은 주꾸미는 씨알이 잘고 싱싱함이 떨어지기 때문에 득량만과 곰소만 같은 부안 지역에서는 주꾸미주낙을 이용한다. 이를 ‘소라빵’이라고 부른다. 주꾸미주낙은 몸줄에 60여㎝ 간격으로 소라(피뿔고동)나 피조개의 껍데기를 달아서 만든다. 이 껍데기들을 ‘주꾸미단지’라고 하는데 주꾸미단지는 조업철에 따라 가을단지와 봄단지로 나뉜다. 가을단지는 높이가 8㎝, 길이는 4㎝ 남짓이다. 고흥반도 서쪽 득량만 일대처럼 가을철에 조업을 하는 지역은 크기가 작은 가을단지를 이용하지만 곰소 일대처럼 봄철에 조업하는 지역은 크기가 큰 봄단지를 이용한다. 주꾸미는 수심 10m 정도 연안의 바위틈에 서식하며 야행성이다. 산란기는 5∼6월이다. 바다 밑의 오목한 틈이 있는 곳에 포도 모양의 알을 낳는다. 1년생인 주꾸미는 알을 낳고 나면 연어처럼 죽는다. 산란기를 앞두고 머리 안에 알이 꽉 들어찬다. 삶으면 꼭 밀감 알갱이, 찐쌀처럼 보인다. 가을에도 잡히지만 알이 없기 때문에 맛이 떨어진다. 국내산 주꾸미는 갈색과 회색을 띠는 반면 냉동 수입된 주꾸미는 누런 색깔을 띠며 빨판 크기도 큰 편. 특히 봄철 주꾸미의 알은 밥알을 뭉쳐놓은 것과 비슷해 ‘주꾸미 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주꾸미와 함께 동백꽃을 떠올린다. 주꾸미는 보통 충남 서천군 동백정의 동백꽃이 필 무렵에 알을 품는데 이때가 제철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 최대 최고의 주꾸미축제는 올해 17회(3월26일~4월8일)를 맞는 충남 서천군 마량포구·홍원항에서 열리는 서천 동백주꾸미축제다. 대천과 무창포 등 충남 서해안은 3월말부터 4월초 일제히 ‘주꾸미 축제촌’으로 변한다. ◆ 주꾸미 금어기 논쟁 일반인은 현재 해양수산부가 주꾸미에 대해 금어기를 정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충남 서해안권 어민들은 매년 3~5월 소라빵 조업을 통해 산란기를 맞은 주꾸미를 잡아 생업을 해왔다. 그런데 2009년 가을 보령 오천 앞바다에서부터 주꾸미 선상낚시 붐이 일어난다. 봄 주꾸미를 잡는 어민과 가을 주꾸미를 잡는 낚시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보다 못한 어민들은 2012년 충남도청과 해수부에 가을 낚시인 때문에 성장기의 주꾸미씨가 마르는 바람에 봄 주꾸미 조업이 치명상을 입었다면서 금어기를 정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5월1일~8월31일을 금어기로 하는 입법예고를 했다. 그런데 그 예고가 다시 5월16일~9월20일로 조정된다. 낚시인들이 다시 반발한다. 서해안 주꾸미 낚시는 8~10월이 적기라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 이들은 모든 어종의 금어기는 산란기에 맞춰지는데 주꾸미는 왜 성장기인 가을을 금어기로 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산란기인 3~6월을 금어기로 정해야 된다고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충남의 경우 낚시어선만 1천54척, 소라빵 소형어선은 1천여척. 갈수록 낚시주꾸미가 강세를 보인다. 가을이 되면 충남 보령에서만 매일 낚시 어선 500여척이 바다로 나간다. ◆ 주꾸미 원산지 표시대상 아니다? 주꾸미는 낙지와 꼴뚜기의 중간 정도 크기다. 주꾸미불고깃집에 나오는 새끼 주꾸미는 대개 수입된 것. 7~8년 전부터 주꾸미 요릿집이 급증하면서 수입량도 대거 늘어났다. 해수부에 따르면 2014년 국내에서 생산된 주꾸미의 양은 2천525t, 수입된 양은 2만989t으로 8배 이상이다. 어획량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낚시객. 가을철 한창 성장할 시기에 낚시객이 몰려 치어까지 낚아올리기 때문이다. 봄철 서해안을 따라 열리는 축제에 맞춰 무리한 조업을 하는 것도 문제다. 제철을 맞은 국산 주꾸미를 구하기 쉽지 않자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에서는 베트남이나 태국 등 다양한 국가로부터 수입 주꾸미 취급 물량을 늘려가고 있다. 롯데마트가 지난 3년간(2013~2015년) 주꾸미 매출을 살펴본 결과 지난해 전체 주꾸미 매출 중 수입 비중은 85%였으며 국내산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결국 충남도 등이 2019년까지 연안 해역 1천300㏊에 주꾸미 산란·보육장을 조성한다. 문제는 이 주꾸미는 음식점에선 원산지 표시 의무 대상이 아니란 사실이다. 음식점 수산물 원산지 표시 대상은 낙지 등 9개 품목뿐. 국내산 가격의 절반인 냉동 수입 주꾸미를 국산으로 속여 팔아도 사실상 음식점을 단속할 수 없다. 국내서 팔리는 주꾸미의 88%가 중국, 베트남 등에서 수입되는데 음식점에서 먹는 주꾸미의 국적은 알 수 없는 상황. ◆ 대구의 주꾸미 전문점 ‘낭만’ ‘참한상’ ‘아라’ ‘청담’ 등등은 3년 전부터 대구에서 힘을 발휘하는 ‘체인형 주꾸미불고기점’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제철 주꾸미 맛을 못 본다. 너무 비싸 서해산 주꾸미를 사용하기 어렵다. 원활한 물량공급 때문에 대구에선 주꾸미 전문점을 하기 어렵다. 대구에서 주꾸미 전문점이 생기기 시작한 건 10년 전. 남구 봉덕동 대천주꾸미였다. 이후 황금동 대구신주꾸미, 범물동 미정식당, 대명동 무안회타운, 성서 신흥주꾸미, 독도주꾸미 등 9개가 생겨났다. 지금은 4개(대구신주꾸미·독도주꾸미·무안회타운·미정식당)만 남았다. 수성구 황금네거리 근처 한국관 맞은편에 있는 ‘대구신주꾸미’. 7년 역사를 갖고 있다. 서해안 대천에서 4시간 걸려 주꾸미가 도착한다. 30년 역사의 어패류 유통전문 대도수산 유대식 사장이 유통을 책임진다. 주꾸미에 올인한 김윤동 사장(51). 그는 튀김, 직화, 숯불 등은 물론 고량주로 불쇼도 벌여가면서 새로운 주꾸미 메뉴를 실험했다. 결론은 주꾸미 샤부샤부였다. 샤부샤부엔 별다른 반찬이 필요없다. 제철 서해안을 맛본다. 그 이상의 맛을 기대해선 안 된다. 그 이상은 양념맛임에 분명하다. 머리를 잘라 잘 익은 주꾸미밥을 씹어봤다. 정말 밥맛이다. 8℃로 유지되는 수족관. 거기에 주꾸미가 까다롭게 산다. 3일 이상 못 산다. 산 것만 갖고 샤부샤부를 한다. 죽으면 곧바로 손님에게 얘기하고 서비스로 낸다. 가장 담백한 맛을 위해 마리당 6천원 이상인 100g짜리를 쓴다. 주꾸미는 푹 삶으면 지옥. 슬쩍 익혀야 한다. 주꾸미 먹물을 겁내는 사람도 있는데 보기와 달리 먹물도 천연 조미료다. 익으면서 특유의 페로몬 냄새를 뿜어낸다. 중간에 감자 수제비와 칼국수를 넣는다. 육수가 계속 졸아든다. 다 먹는 동안 모두 5번 맛이 달라졌다. 이 때문에 기본 육수는 맹물에 가깝게 한다. 불 조절도 관건. 샤부샤부를 주문할 때 매니저에게 불을 부탁해라. 무턱대고 끓이면 주꾸미 샤부샤부 먹을 자격이 없다. 주꾸미는 정해진 가격이 없다. 시세인데 7마리짜리 샤부샤부 가격은 5만6천원. 수성구 청수로 118. (053)766-8562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4.0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 김천 농소면 월곡리 ‘한우선지국’ 박영수 사장
국밥집 사장을 ‘오너셰프’라 부르면? 초점 맞지않는 사진 같다. 국밥집 사장은 역시 국밥집 사장이 딱이다. 기자는 요즘 경상도 육개장 원류를 정리하기 위해 지역의 명품급 국밥집을 수소문하고 있다. 김천에 괜찮은 소고기국밥집이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동김천IC에서 8분쯤 걸리는 농소면 월곡리 한 곳에 있었다. 김천혁신도시권과 맞물려서 그런지 주변은 상가지역이 아니었다. 그냥 벌판에 외따로 서 있는 듯한 복합상가에 입주해 있었다. 상호가 적힌 간판도 없었다. 그냥 ‘한우선지국’이 가게 이름이다. 오죽 국을 강조하고 싶었으면‘○○식당’ 같은 상호를 버렸을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깜짝 놀랐다. 그렇게 층고가 높은 국밥집이 있을까 싶었다. 방앗간 건물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찜질방 하던 건물이었다. 국밥집은 맛 이전에 주인의 관상맛이 좋아야 승률이 높다. 주인의 관상을 봤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레슬링 선수 같은 각진 얼굴, 다부진 상체,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서글서글한 표정, 그러면서도 성실함이 물씬 풍겨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믿음을 준다. 넓은 홀은 점심 무렵이라서 손님으로 흘러 넘쳤다. 박영수 사장(61)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았다.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카운터를 보다가 국이 나오면 주방 입구로 달려가서 직접 손님 상에 세팅한다. 깍두기가 부족하다 싶으면 직접 장만한다. 사장 겸 조리사·홀매니저·찬모·주차관리까지 1인5역이다. 무려 하루 16시간 국밥에만 올인한다. ‘초인적’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팔자가 아니고서 저토록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감내할 수 없다. 그는 국밥집 사장이 천명이고 천직일 수밖에 없다. 관상을 봐도 그는 국밥집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포스다. ◆ 한때 유명한 소장수 국을 한 숟가락 떠먹어봤다. 모처럼 ‘진검국밥’을 만났다. 소고기·선지·우거지·육수가 똘똘 뭉쳐 한 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레시피를 조정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자가 만족한 표정을 짓자 그가 곁에 앉아 지난 세월을 실처럼 풀어낸다. 42년前 축산업 첫발…사육·도축·유통 식육점 성공 이어 식육식당 오픈 고배 15년前 국밥집 연 후 2010년 현 위치로 구제역에 1년 허탕…100여곳 맛 유람 ‘푸짐하고 저렴하되 맛있게’ 대박 승부 하루 16시간 국밥 올인 원천기술 터득 식감 살린 우거지 숙성법 ‘신의 한수’ 구미시 고아읍에서 태어난 그는 1974년부터 고아읍 봉한리에서 축산업을 시작한다. 소도 키우고 도축도 하고 유통하는 것까지 원스톱으로 배웠다. 당시 구미에서 비육우 농가를 3곳 선정할 때 그도 포함됐다. 제대 후 소장사도 경험했다. 당시 대구시 서구 내당동 신흥축산에 소 도축을 맡겨봤지만 어찌된 셈인지 항상 40만원 이상 밑졌다. 소를 키우는 것도 소를 잡아 고기를 파는 것도 자기한테는 맞지 않았다. 고부가가치는 식육점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선산터미널 근처 관광호텔 1층에서 터미널식육점을 운영했다. 예상이 적중됐다. 구미, 선산, 칠곡 쪽에서 셋째로 고기를 많이 판다. 가지를 하나 더 달았다. 칠곡군 북삼읍에서 자기 이름은 건 ‘박영수식육식당’을 오픈한다. 너무 시골이고 손님 치다꺼리 때문에 실패를 했다. 고기를 찾는 VIP 뒷수발이 힘들었다. 7년간 맘고생이 심했다. 다시 자기만의 국밥집을 15년 전에 론칭한다. 2010년 현재 자리로 이전을 한다. 근처에 중식당 하나 말고는 이렇다 할 만한 식당이 전무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곳에 왜 국밥집을 차리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현재 자리는 육회, 횟집 등이 스쳐갔지만 다 망했다. 개업을 했지만 주위 반응은 냉랭했다. 김천은 외지인에게 텃세가 셌다. 구미 출신이 국밥집을 한다고 하니 대다수 외면했다. 하루 5만~7만원밖에 벌지 못했다. 찬모도 구하기 어려웠다. 차편이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구제역과 천안함사건 후유증은 상당했다. 그렇게 1년을 허탕쳤다. 한 명씩 찾아온 시골 노인은 여기가 잠자는 곳인 줄 알고 툭하면 목침을 찾는다. 기가막힐 지경이었다. 전단을 100만원어치 돌렸다. 소주 1천원, 선짓국은 3천원. 수육도 3개월간 서비스로 냈고 여름에는 생수도 서비스로 주었다. 역시 맛이다 싶어 전국 유명 육개장 현장조사에 착수한다. 경기도 광주 쌍룡해장국, 서울 청진옥, 포천 양평해장국, 삼천포 신라해장국, 백종원 추천 국밥집 등 100여곳을 유람했다. 자기보다 형편없는 국맛이다 싶었는데 손님은 몇 배로 더 밀려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분석에 들어갔다. 일단 국밥집은 푸짐하고 저렴하고 맛있어야 대박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운좋게 천연암반수를 갖게 됐다. 예전 찜질방의 시설이다. ◆ 맛과 레시피 분석 국밥을 맛보았다. 선지해장국, 쇠머리곰탕, 설렁탕, 우거짓국, 육개장, 장터국밥 등의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하루 이틀에 터득될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식재료 배합도 절묘했다. 특히 그만의 소피 다루는 방식이 남달랐다. 도축장에서 갓 나온 피는 빨리 갈무리하지 않으면 못 먹게 된다. 소피에 물과 소금 정도만 넣고 30~40분 안착시켜야 된다. 소피 농도 관리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물을 적게 넣으면 피가 딱딱해진다. 선지를 뜨거운 물에 잘 익히는 것도 맛의 원천이다. 미지근하면 핏물이 빠져나와 맛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팔팔 끓여도 안된다. 15~20분 끓이면 선지가 둥둥 뜬다. 묵처럼 주걱으로 저어주지 않으면 선지가 바닥에 눌러붙어 못먹는다. 선지 덩어리도 어른 주먹만 한 게 좋단다. 여느 국밥집 선지는 대다수 축구공만 하다. 너무 크면 피의 떫은 맛이 빠져나오고 비린내도 진해진다. 선지는 매일 오후 2~3시 갖고 온다. 전화를 하면 아들 정인씨가 선지 끓일 준비를 한다. 다음은 사골로 육수내기. 6시간 찬물에서 핏물을 빼낸다.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막이 생겨 핏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사골, 등뼈, 엉치뼈 등을 10㎝ 크기로 잘라둔다. 뼈를 찬물에 넣고 불을 붙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뼈를 다시 꺼내 남은 핏물은 버린다. 뼈를 다시 찬물에 씻고 다시 찬물에 사골을 넣고 5시간 초탕, 또 5시간은 재탕한다. 초탕과 재탕을 반반씩 섞어 사용한다. 이걸 그대로 사용하면 요즘 손님은 너무 진해 느끼해 한다. 자칫 곰탕 같은 국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물을 70% 정도 섞는다. 대파도 맛에 영향을 준다. 파는 봄부터 진이 나온다. 진이 나오면 국맛이 개운하지 않다. 파는 마지막에 고명으로 슬쩍 올리는 게 낫다는 걸 터득했다. 우거지 관리법이 가장 탁월했다. 여느 감자탕집은 우거지를 길게 째서 사용하는데 그는 식감이 안 좋아서 4~5㎝로 잘라 사용한다. 시래기는 고등어찌개 등에는 어울려도 소고기국밥에는 궁합이 안맞단다. 그래서 우거지를 사용한다. 우거지도 말린 건 별로다. 봄동 등 월동 배추는 추어탕에 더 맞지 선짓국에는 영 아니다. 국밥용 채소류는 섬유소가 씹혀야 제맛이 난다. 그런데 우거지 관리가 그렇게 어려웠다. 족히 수백단을 내버렸다. 그는 원천기술을 터득하기까지 절대 누구한테 기술을 받지 않는다. 시행착오를 최고의 스승이라 믿는다. 그는 우거지 맛도 삶는 과정에서 결판이 난다고 했다. 보통 묶은 끈을 끊고 우거지를 삶는데 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끈이 묶인 우거지를 통째로 집어넣었다. 잎부분은 밑으로 가면 짓물러지니 상방으로 향하게 한다. 배추 하단이 물속에 푹 잠겨야 섬유소가 야들야들해진다. 우거지도 충분히 숙성시켜야 된다. 바로 꺼내 찬물에 씻으면 시금치처럼 파래진다. 그럼 식감이 안 살아난다. 우거지는 누른빛이 조금 감돌아야 식감이 살아난다. 5월부터 하우스배추가 출하된다. 그 새파란 우거지를 누렇게 숙성시키려면 어떻게 하지? 그는 궁리를 거듭했다. 누런 색이 나는 천연색소도 사용해봤다. 우여곡절 끝에 ‘신의 한수’를 알게 된다. 솥뚜껑을 닫고 삶으면 순간 솥안이 진공이 되고 10시간 정도 뚜껑을 닫은 채로 식히면 누런 빛깔이 감돈다는 걸. 깍두기도 소금간이 가장 중요하다. 설탕을 사용하면 진물이 형성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무는 1년 내내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월동무를 사용한다. 별일 없으면 퍼질러 앉아 하염없이 무를 자른다. 그런 정성의 선짓국 한 그릇이 6천원. 수입이 아니라 1등급 한우라 ‘씹힘성’이 남다르다. 고기에 육즙까지 감돈다. 여느 소고깃국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육질이다. 그 가격에 저런 씹힘성이라니…. 오전 9시~ 밤 9시 영업. 김천시 농소면 월곡1리 97-1. (054)431-8385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3.2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食客열전 제2회 - 고조리서 이야기
식객열전 취재를 위해 이런저런 고조리서를 훑어본다. 국내에서 고조리서 족보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故) 이성우 박사다.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경북·영남대에서 한국 식품문화사의 기틀을 잡았고 훗날 한양대 식품영양학과에 있으면서 한국식품과학연구소를 꾸려갔다. 81년에 그의 존재를 알려준 ‘한국식경대전’에 이어 84~85년 불후의 명저 3권, ‘한국식품문화사·한국식품사회사·한국요리문화사’를 출간한다. 당시 식품영양학과 교수들은 식재료 영양분석에 매달렸지, 한식의 원류 찾기는 교수가 할 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 고조리서의 보고…경상도 반가 식객이라면 경상도 북부 반가음식에 주목해야 한다. 전라도가 음식의 고장이라지만 사실 경상도 반가에선 질펀하게 차린 전라도 한상차림을 ‘술안주상(교자상)’ 범주로 낮춰 본다. 경북은 대한민국 최고 고조리서 4종을 모두 갖고 있다. 수운잡방·음식디미방·규합총서·시의전서다. 우리에겐 고조리서가 참 귀하다. 30여 종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음식은 귀하게 여기면서도 요리서와 조리사는 천대했다. 조리서가 있더라도 상당수는 집필 연대·저자·서문과 해제가 전무했다. 또한 식재료의 길이와 양을 눈대중, 손대중, 즉 ‘양척법(量尺法)’에 의존하다 보니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데도 애를 먹는다. 종부들도 요리만 할 줄 알았지 그걸 후대에 남기겠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그냥 종부를 통해 가전됐다. 1450년경 醫官 전순의의 ‘산가요록’ 우리나라서 가장 오래된 음식 서적 김치 38種 등 230여 개 레시피 소개 200여년 뒤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여성이 집필한 최초의 한글 조리서 ‘규곤시의방’에 28장 146가지 기록 반가음식 원형 담은 안동‘수운잡방’ 등 경북지역 옛 요리 관련 책 寶庫 주목 요리법은 개인 또는 각 가정의 몫으로 돌려 공식 도서목록에도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고려 때 고조리서는 한 권도 없다. 중국은 우리와 달랐다. 시경(詩經)에서부터 생선, 회, 김치, 구이, 탕 등에 대해 터치를 했다. 6세기, 그러니까 우리의 삼국시대 때 북위의 가사협이 지은 방대한 ‘제민요술(齊民要術)’이 등장한다. 중국 산둥반도가 주무대인 이 책은 북송대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물론 조선조 요리문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준다. 이성우 박사는 ‘제민요술에 김치의 한 종류가 백제로 건너와 수수보리지(須須保利漬)란 이름으로 일본에 전해졌고, 이것이 훗날 일본 다쿠앙으로 변형됐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 다음으로 고조리서 정리에 헌신한 사람은 황혜성씨(2006년 87세로 작고). 그녀는 1973년 한희순 상궁에 이어 제2대 조선왕조 궁중음식(무형문화재 제38호) 기능 보유자가 된다. 76년 ‘한국요리백과사전’을 펴낸다. 그를 잇는 연구자는 안동에서 집필된 김유의 ‘수운잡방’을 발견하고 안동의 불천위제사음식 연구의 국내 권위자인 안동대 식품영양학과 윤숙경 교수다. 한국궁중음식문화협회 김상보 이사장(대전보건대 전통조리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 교수, 윤숙자 한국전통요리연구소 소장, 이연자 한배달 우리차문화연구원장,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등도 한국전통요리서 발굴에 노력 중이다. 상주의 노명희씨는 시의전서 전통음식연구회를 만들어 상주비빔밥의 원형을 재현·보급 중이다. ◆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 전문서는 뭘까. 그동안 김유가 지은 ‘수운잡방’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1400년대 중반 ‘의방유취’를 지은 당시 의관 겸 식품학자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이다. 여기에는 술 빚는 방법 63가지를 포함해 모두 230여 종류의 음식 레시피가 소개돼 있다. 김치의 경우 나박김치, 생강김치, 송이김치, 동아김치, 동치미, 토란김치 등 38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윤숙경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장 등이 음식을 재현하기도 했다. 식품학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대목은 바로 온상재배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안동은 경상도 음식은 물론 한국 반가음식의 한 원형을 보여주는 세 권의 귀한 고조리서를 배태한 고장이다. 바로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 그리고 의성김씨 청계공 종택이 갖고 있는 ‘온주법’이다. 특히 정부인 안동장씨(장계향)가 지은 음식디미방은 한중일 삼국에서 여성의 손에 의해 펴낸 최초의 요리서로 평가받는다.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된 국내 최초의 요리서다. 소설가 이문열은 윗대 할매인 장계향을 주인공으로 해서 ‘선택’이란 장편소설을 출간한다. 장계향은 1598년(선조 31)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참봉을 지내고 향리에서 후학을 기르는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1564~1633)의 외동딸이었다. 부인의 남다른 헌신 때문인지 그 집안에서 세칭 7산림(山林), 7현자(賢者)가 태어나 세인의 부러움을 산다. 남편 이시명과 아들 상일·휘일·현일·숭일, 손자 재·만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학문과 덕행으로 벼슬을 받는 ‘산림(山林)’이 된 것이다. 시댁은 물론 친정 제사까지 챙겼고, 이와 함께 숱한 손을 맞이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요리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 이를 가식(家食)으로 물러주기 위해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부인의 묘소는 현재 안동시 수동에 있다. 국내에 한 권밖에 없는 음식디미방 원본은 현재 경북대 고문서 보관실에 보관돼 있다. 원래 장씨부인의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후손이 보관하다가 도난을 우려해 1960년 경북대 도서관 고서실에 영구기증한 것이다. 이 책의 존재를 맨 처음 알린 사람은 경북대 김사엽 박사. 그는 1960년 ‘고병간 박사 기념논총’에서 ‘규곤시의방과 장씨부인의 아들인 존재 이휘일의 ‘전가팔곡(田家八曲)’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이어 김형수 박사, 1966년 손정자 교수, 1999년에는 안동대 윤숙경 교수가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조선중기 음식법에 대한 조리학적 고찰에 대한 논평’을 정부인 안동장씨 추모학술대회 발표 논문집에 발표한다. 황혜성씨의 딸 한복려, 한복선, 한복진은 ‘다시 보고 배우는 음식디미방’, 한복진은 다시 그해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조선시대 중기 음식법에 대한 조리학적 고찰’을 펴낸다. 2006년 경북대 국어국문과 백두현 교수는 당시 어원을 거의 정확하게 추적한 끝에 ‘음식디미방 주해’(글누림 刊)를 낸다. 장정한 표지 제목은 ‘음식디미방’이 아니고 ‘규곤시의방’. 표지를 넘기면 권두서명은 음식디미방. 규곤은 ‘여성들이 거처하는 공간인 안방과 안뜰’을 뜻하고 시의방(是議方)은 ‘올바르게 풀이한 방문’이란 뜻이다. ◆ 음식디미방 현대적 재현 재현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황혜성씨. 그녀는 국내 요리전문가로선 맨 먼저 1965년 음식디미방을 만난다. 82년 해제본을 내고, 86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음식디미방 음식 72품을 발표한다. 2006년 태동된 영양군 음식디미방보존회는 빈자병, 앵두편, 조개탕, 어만두 등 모두 50여 가지 음식을 재현했다. 전통주 복원의 경우 영남대 서정순 교수가 초빙돼 음식디미방 회원 26명을 대상으로 감향주를 비롯해 이화주, 유화주 등 3종의 술을 음식디미방에 쓰인 조리법대로 복원했다. 영양군은 2006년부터 음식디미방에 수록된 146종의 음식조리법의 재현작업이 성과를 거둬 두들마을 전통한옥체험관에서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3.0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食客열전 제1회 - 한국 최초 음식칼럼니스트
탤런트 최불암. 그가 2011년부터 전국을 누비며 만들고 있는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수사반장 최불암보다 ‘식객 최불암’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그간 256번이나 맛기행을 떠났다. ‘조선음식상식’을 적은 육당 최남선, 서울 600년의 문화진객이었던 조풍연, ‘별미기행’의 대명사 소설가 백파 홍성유도 어른거린다. ‘방랑식객’ 임지호도 생각나고, ‘식객’이란 만화로 한 시절을 풍미한 허영만도 생각난다. 대한민국발 ‘식객의 족보’. 언젠가부터 깔끔하게 정리해보고 싶었다. ‘식객열전’, 이름도 그럴싸하다. 그런데 너무 힘든 작업이다. 진검 제철음식을 찾아 방방곡곡 파고드는 미식가·식도락가들이 급증일로. 이들 뒤를 잘 쫓아다녀 본다면? 관광형 맛집에 적이 실망한 맘을 실속 있게 달랠 수 있는 방도를 얻을 것이다. 식객(食客)! ‘현대판 나그네 풍류객’이랄까. 아무튼 이들의 안목과 내공은 엄청나다. 대한민국 대표 식객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의 급소, 특정 지역 대표 식객이라면 그 지역의 제약조건을 손금처럼 들여다볼 줄 안다. 모르긴 해도 우리의 또 다른 ‘인간문화재’인 것 같다. 식객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루에 10끼라도 감내한다. 자정 무렵에도 셰프가 만나자고 하면 달려간다. 하지만 소문난 식당에 잘 안 휘둘린다. 집잠보다 노숙에 더 적응된, 어떻게 보면 ‘금수저 팔자’이고 어떻게 보면 ‘반풍수 집안 망하게 할 인물’인 것 같다. 아무튼 문필가의 재질, 방랑벽, 셰프적 감각, 까탈스러운 식성, 호기심, 사교력, 다큐멘터리즘 등이 안분되어 있어야 이 바닥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을 부르는 명칭도 시대 따라 아주 다양했다. 과객, 푸드에세이스트, 음식칼럼니스트, 여행작가, 맛칼럼니스트를 거쳐 방랑식객까지 진화했고 이어 파워 푸드블로거까지 먹방, 쿡방에 이어 각종 신문과 잡지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심지어 섬의 먹거리만 찾아다니는 ‘섬 푸드스토리텔러’도 생겨났다. 서울에는 ‘븟(부엌)’이란 페이스북 커뮤니티를 통해 셰프들을 위한 ‘식재료 탐사여행 프로젝트 리스(LISS)’도 성업 중이다. 전국의 유명 식객을 한데 모으면 ‘음식으로 본 한국사 한 권’이 태어날 것 같다. 이제 강호의 고수 같은 식객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본다. ◆ 한국 최초의 음식칼럼니스트는 누굴까 다들 허균(1569~1618)을 꼽는다. 물론 고려의 이색, 조선조로 들어와서는 ‘수운잡방’이란 고조리서를 집필한 김유, 실학파의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정약용·정약전 형제, 추사 김정희 등도 식객의 범주에 넣는 식품사학가들도 있다. 역시 조선조 식객문화는 유배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자였던 허균은 천재였지만 ‘서자필패(庶子必敗)’세상인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도통 없었다. 그런 탓에 그는 불우한 문인이나 시인들과 어울렸다. 또 세상에서 버림받은 서자, 승려, 무사, 기생 등과 한 패가 되어 술로 보냈다. 조선 식객문화는 유배문화와 밀접 ‘홍길동전’ 쓰기 1년 전인 1611년 귀양지서 이전 식도락 기억 되살려 ‘다식은 안동, 약밥은 경주…’ 기록 첫 팔도 별미 134가지 체계적 소개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 탓이었고 또 예교(禮敎)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를 깔보고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하고 강릉 경포대 옆 초당순두부 탄생의 주역이 되기도 한 초당 허엽의 아들이다. 허균은 짱짱한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서경덕의 수제자 격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동인의 거두였으며, 그의 맏형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이다. 그의 둘째 형 허봉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쓴 인물로 유명했다. 또 누이는 여류시인 난설헌이었다. 이런 가정배경이다 보니 어릴 적부터 류성룡과 같은 명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허균은 이때부터 당시 서자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알았다. 그 시절 선비들은 여성 이상으로 음식에 민감했다. 그 음식은 ‘제수(祭需)’였다. 기제사 제수는 반드시 남성이 장을 봐왔고 진설도 남성의 몫이었다. 그러니 통과의례 관련 식재료의 본질에 대해서도 탁월한 안목을 가질 수밖에. 봉제사 접빈객의 본질은 결국 음식이었다. 그 음식을 통해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할 수 있었다. 종가의 종부와 종손은 매월 닥치는 기제사 등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내림 전통음식에 대한 매뉴얼을 후대에 전승해야만 했다. 반가의 음식은 맛보다 정성이었다. ◆ 요리했던 선비들 그런 배경을 안고 한국 첫 한글 고조리서로 기록된, 정부인 안동장씨(장계향)가 1670년 지은 ‘음식디미방’보다 130년 앞서 안동의 한 선비가 가전된 통과의례식에 대한 레시피를 총정리한다. 바로 ‘수운잡방(需雲雜方)’이다. 안동 군자마을(안동시 용상동) 출신인 탁청공 김유에 의해 저술된 요리책이다. 2012년 5월14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35호로 지정되었다. ‘수운(需雲)’은 격조를 지닌 음식문화를 뜻하며, ‘잡방(雜方)’은 여러 가지 방법을 뜻한다. 즉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의미한다. 상·하권 두 권에 술 빚기 등 안동 지방 121가지 음식의 조리법을 담고 있다. 선비는 맛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음식 자체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그들은 배부른 걸 부덕하고 민망스럽게 여겼다. 허기를 조금 면하면 수저를 놓고 밥상을 수하에게 물린다. 더 배고플 것 같은 수하에게 밥상을 너무 양보하는 바람에 더없이 수척할 수밖에 없는데, 그 형상을 유림에서는 ‘양상수척(讓床瘦瘠)’이라 해서 선비의 미덕으로 존수했다. 안동 반가에선 양상수척을 체면치레로 봤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재난이 들면 왕 역시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아예 밥상을 물리는 ‘감선(減膳)’, 또는 고기반찬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철선(撤膳)’, 신하들과 당파싸움을 다스리기 위해 이른바 단식투쟁인 ‘각선(却膳)’도 불사했다. 이런 마당에 선비가 전국의 진미를 찾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기록을 보면 선비들도 끼리끼리 모인 자리에선 ‘식탐’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좋은 차를 마시고,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 했다. 심지어 불교가 절정이었던 고려 시대 때도 한국 불고기의 원형으로 지목받는 ‘설야멱(雪夜覓)’을 즐겼다. 연암 박지원의 ‘연암일기’에도 ‘눈 오는 날 친구와 뜨거운 화로 위에 번철을 놓고 조미한 쇠고기를 구워 먹는 난로회’를 즐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새해 첫날 임금 앞에서 ‘단향회(檀香會)’를 벌이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단향회란 ‘박달나무 숯불에 구운 대나무꼬치를 먹는 모임’이다. 설야멱의 선배는 고조선발 맥적(貊炙), 이것이 근대화 과정에 ‘너비아니’란 이름을 갖게 된다. 입맛과 식탐이 남달랐던 선비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목격할 수 있다. 고려 말의 충신이자 조선에 성리학을 들여온 이색도 고려의 먹거리에 대해 수많은 자료를 남겼다. 워낙 식탐이 심했던 그는 이를 뽑은 뒤 맛있는 걸 먹기 힘들어졌다며 슬퍼하기도 했단다. 여섯 임금을 섬긴 서거정은 게장이라면 눈이 뒤집어졌고, 박제가는 한자리에서 냉면 세 그릇, 만두 100개를 먹는 대식가로 오해받기도 했다. ◆ 한국의 첫 미식가이드북…도문대작 아무튼 허균은 1611년에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을 펴낸다. 도문대작은 ‘고기를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는 뜻으로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리킨 말이다. 국내 첫 팔도 맛 평가서로 불리는 이 책은 허균이 전북 익산의 함열로 귀양 갔을 때에 쓴 책으로 귀양지에서 거친 음식을 먹게 되자 전에 먹었던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허균은 서문에서 ‘조선시대 남성 학자들이 식생활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며 경계의 글을 남겼다. 이 책은 당시의 먹거리를 병이지류(餠餌之類·떡류), 과실지류(果實之類·과일류), 비주지류(飛走之類·날짐승류), 해수족지류(海水族之類·어패류), 소채지류(蔬菜之類·푸성귀) 등으로 나눠 모두 134가지 음식을 소개했다. 곰발바닥, 표범 태반, 사슴 꼬리와 혀 등까지 기록한 것으로 보아 허균은 대단한 미식가인 듯하다. 백산자(박산·쌀로 만든 백당을 고물에 묻혀 먹는 한과)는 전주, 석이병은 금강산, 다식은 안동, 엿은 개성, 약밥은 경주 등이 잘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사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2.26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詩 끓이는 국밥집’ 세명식당 신정민
돼지국밥과 시인. 좀 생뚱맞은 궁합 같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어울릴 구석도 보인다. 부산의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인 최영철. 그가 1997년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에 발표한 ‘야성은 빛나다’란 시에서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라고 돼지국밥을 노래했다. 돼지국밥집의 주제는 국밥보다 국을 만드는 아줌마가 아닐까. 돼지국밥은 눈물, 아니 웃음 같다가 일순 한숨으로 변주된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여러 수호신이 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돼지국밥집 아줌마다. 모든 걸 받아들이는 포용력과 수가 틀리면 일거에 상대를 육두문자로 제압하는 카리스마. 넉넉한 몸집에 달덩이처럼 둥두렷한 얼굴이 압권이다. 아무나 돼지국밥집을 열 수 없다. 대구에 여러 돼지국밥 아줌마가 있지만 기자는 이 아줌마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 우리가 잃어가고 망각하고 있는 조선의 정(情), 품앗이 정신을 비교적 원형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은 양복 입고 ‘에헴~’ 하고 폼 잡고 오는 사람은 대우받지 못한다. 반듯한 사람보다 좀 헐렁한 사람이 더 어울린다. 15년 전에 가창 대일리 식당 열고 매일 詩 쓰는 마음으로 국밥 끓여 서지월·석용진 등 예술가들 단골 육수내기부터 全 과정 혼자 터득 “요리는 덧셈 아니라 뺄셈이 급소” 머릿고기만 사용…조미료도 없애 ◆ 시를 쓰는 돼지국밥 아줌마 ‘세명식당’이다. 팔조령 가는 국도변에 허름하게 앉아 있다. 가창면 대일리 가창초등학교 네거리 대일1리 마을회관 바로 옆에 있다. 일명 ‘감투봉식당’. 감투봉은 대일리를 굽어보는 산 이름. 신정민 여사장(61)은 시인 지망생이다. 국 끓이는 일 자체가 그녀의 ‘시작(詩作)’ 활동이다. 한쪽 벽에 그녀가 얼마 전 지은 ‘회초리 소리’란 자작시가 액자로 걸려 있다. ‘옛날 엄마한테 회초리로 맞는 소리/ 그 소리처럼 앙칼진 소리 밤새 잠 못 들게 한다/ 따뜻한 이부자리 속에서 듣는 내 몸 휘감는 매서운 바람소리/ 두고 온 엄마 잊기나 할까 봐/ 뒷문 밖 앙상한 나뭇가지 깨어나 부딪히는 소리/ 엄마는 차가운 땅속 깊은 잠 들었는데/ 아직도 나를 꾸짖는 소리’ 꾸짖는 엄마의 맘으로 매일 돼지국밥을 끓인다. 얼마 전 식당 근처에 있는 서지월 시인의 집이 홀라당 전소됐다. 지역 문인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보냈다. 그 화재 때 가장 안타까워한 사람이 바로 그녀다. 이 식당은 새벽 늦게 잠들고 오후 2시가 넘어야 부스스 잠을 깨는 겨울곰 같은 서 시인의 전용 식당. 그녀의 시 곁에 그의 시 ‘인생을 묻는 그대에게’란 시가 놓여 있다. 서 시인은 그녀의 가창초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다. 이 집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다. 서예가 일사 석용진이다. 일사는 15년 전 식당이 문을 열 때부터 단골이었다. 팔조령 너머 청도 집과 시내 작업실을 오갈 때 애용했다. 옛 국도가 확장될 때 세명식당이 길 건너편으로 이전한다. 일사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이전한 이 식당을 찾는 데 1년이 걸렸다. 일사는 아줌마와의 인연을 소중히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몇 작품을 벽에 걸어주었다. 자연스럽게 일사의 ‘국밥갤러리’ 하나가 그렇게 태어난다. ◆ 한때 유명 돼지갈빗집 주인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대일리로 이사 온다. 학창시절 문학적 재능이 있어 이런저런 백일장에 나갔다. 훗날 돼지국밥집 주인이 될 줄은 몰랐다. 충청도 남편을 만나 대구서 시집살이를 시작한다. 30년 전 남구 대봉동 세명정형외과 옆에서 ‘보은숯불갈비집’을 연다. 기본 손맛은 있어 저지른 식당이다. 요리는 주방장, 자신은 카운터와 홀 관리 담당. 남편 등 모두 10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남편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렇게 고분고분한 남편은 아니었다. 자연히 일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오전 9시부터 12시간 식당에 서 있었다. 발이 퉁퉁 부었다. 문학소녀여서 그랬던지 돈은 벌어도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단다. 그냥 벌어서 직원과 나눠 가질 수 있어 마냥 행복했다. 오후 2시 어름이면 근처 힘든 노인들이 찾아온다. 자투리 잡고기를 넣어 돼지찌개를 맛있게 끓여 나눠주었다. 이정무 전 국회의원, 남구청 직원 등도 단골이었다. 식당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외환위기 때 맘씨 좋은 남편이 보증을 섰다. 식당은 졸지에 절벽으로 내몰린다. 돼지갈빗집은 그간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흘러갔는데 일시에 청천벽력을 만난다. 3년 만에 식당을 정리했다. 빚을 떠안고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대일리로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역시 여장부. 우울한 맘도 없었다. “가창 올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없어도 행복하더라’. 재산을 싹 털고 나니 되레 ‘없는 게 행복’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모르긴 해도 시심(詩心)이 그녀를 다독거렸을 것이다. 일과 후 화장을 지울 때나 커피 한 잔 먹을 때 문득 떠오른 좋은 시상을 장부 귀퉁이에 부리나케 몇 줄 적어놓기도 했다. 누가 ‘뭘 적어요’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면서 웃어넘겼다. 그게 다 그녀의 시 근육을 연마하는 과정이었다. 대일리로 와서 맨 처음 한 건 분식집이다. 우동·라면·김밥 정도만 파는 간판 없는 분식집이었다. 빠듯했다. 다시 뭘 갖고 입에 풀칠을 할까 고민했다. 그때 동네 오라버니가 국밥집을 적극 추천했다. ◆ 혼자 터득한 돼지국밥 끓이기 만만한 게 돼지국밥이지만 막상 끓이려고 하니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막막했다. 레시피를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일단 부딪혀보자. 찬물에 사골을 넣고 무턱대고 종일 끓였다. 육수가 완성됐다 싶으면 한 입맛 하는 오라버니를 불러 테스트를 받았다. 찬물보다 뜨거운 물에 사골을 넣고 끓여야 잡내가 안 난다는 사실을 터득한다. 다음은 육수의 농도 잡기. 너무 묽어도, 너무 진해도 안된다. 괜찮다 싶은 한약재, 소주, 잡내 제거하는 첨가제 등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넣었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니었다. 요리는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 급소였다. 물과 사골, 그리고 불만 있으면 되지, 다른 첨가제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되었다. 고맙게도 한 후배가 육수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들쭉날쭉이었다. 한우 사골과 달리 돼지뼈는 재탕·삼탕 하면 짠내가 나서 맛을 버리게 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뼛속 골분도 초탕에서 거의 사라집니다. 사골을 여러 번 고아내면 육수가 더 좋은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초보자가 실수하는 대목도 바로 여기죠.” 수돗물이 아니다. 산에서 가둬 사용하는 지하수라서 육수가 더 믿음직하다. 성품처럼 주방에는 화학조미료통이 없다. 다른 고기는 사용하지 않고 머릿고기만 사용한다. 지방이 적으면서도 육질이 좋아서 그랬다. 동절기보다 하절기가 육수 맛을 관리하기 힘들단다. 2~3년 묵은지. 이게 매우 강렬한 조미료 구실을 한다. 국을 먹을 때 잘게 채 썰어 놓은 이걸 조금씩 넣어가면서 달라지는 육수의 농도를 만끽해 본다. “예전 장터에 가면 양념이 부족해서 묵은지를 쫑쫑 썰어 넣고 또 소면을 조금씩 넣어주잖아요. 그게 생각나 응용을 해봤습니다.” 조미료가 없다 보니 손님과 맛 때문에 시비도 잦았다. 묵은지를 넣어 먹어보라고 해도 손님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조미료가 없는 대신 육수도 좀 더 진하게, 정구지(부추)도 더 푸짐하게 넣었다. 4년 정도 지나면서 단골들도 세명만의 맛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서정률(작고), 송창준, 서영식, 서영욱, 서칠교, 배태원…. 이웃 사내들이 줄을 잇는다. 제주도에서는 만만하면 삼촌이라고 하듯 그녀는 그들을 ‘화상’이라 부른다. 욕을 해도 상관없는 사이다. 커피와 약차 마시러 오는 화상, 갓 수확한 농작물 주러 오는 화상, 김장김치 갖고 오는 화상, 부부싸움 속풀이하느라 찾는 화상, 심심해서 하품하러 오는 화상들…. 가끔 대구의 자전거족과 비슬산 둘레길족도 찾는다. 그녀는 화상들의 집안 속사정을 그 가족보다 더 소상히 안다. 그녀는 국밥 아줌마가 아닌 것 같다. ‘대일리 명예이장’이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가창면 대일리 가창로 126길. 매주 일요일 휴무. (053)767-6788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2.19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대구 ‘안영감’ 안재성의 소고깃국
그 사내(안재성·55)의 별명은 ‘안영감’. 그런데 만나보니 50대 사내다. 아내 김은영씨(51)는 남편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꼼꼼한 남자일 거다”고 평가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그냥 빙그레 웃는다. 기질상 소고깃국 끓이는 일은 천직이었다. 부부는 낮에는 달서구 상인동 ‘달비골 안영감집 국밥’,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는 범물동 진밭골 초입 ‘안영감 식육식당’에 머문다. 안영감은 식육점은 물론 거기서 나온 고기로 숯불구이도 팔고 소고깃국과 곰탕까지 만들어 판다. 소고기와 관련해 A부터 Z까지를 모두 다루는 셈. 경남 합천군 초계면 출신인 그는 30여년 전에 대구로 온다. 대학에서 기계학을 전공한 그는 훗날 자신이 소고깃국을 끓이는 요리사가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졸업 후 빙그레아이스크림 납품 차를 몰았다. 그런데 왠지 그 일이 자기한테는 맞지 않았다. 점심 때는 허름한 돼지국밥집, 따로국밥, 선지해장국 등을 즐겨 먹었다. ‘종이커피’를 마시면서 주방에서 열심히 국을 끓이고 있는 식당주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30년前 식육점하던 누나의 사업 제안 발골기술 익히며 소의 29개 부위 터득 11년前 아내와 범물동에 식육식당 오픈 식당옆 식육점 운영 부위별 최고맛 선사 2년前 상인동선 대구式 소고깃국 전문점 참기름 넣어 육즙내 따로국밥과 차별화 양지·사태·무·대파만으로 최고 깊은 맛 10일 만에 한번 끓이는 곰탕까지 섭렵 안씨의 누나는 1985년 달서구 송현시장 내에서 식육점을 꾸려갔다. 5년 뒤 수성구 지산동 목련시장으로 옮겨 동신식육점을 오픈한다. 그무렵 그는 소고기를 파는 가게가 서울에선 ‘정육점, 대구에선 ‘식육점’으로 불린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그런데 누나가 남동생에게 식육점 사업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난생처음 사바키용 ‘발골도(拔骨刀)’란 걸 잡게 된다. 그가 일반인은 접근할 수 있는 도축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의 도축은 30여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크게 생축 반입, 계류 및 검사, 유도로로 들어온 소를 도축하고 이어 피를 빼고 두족을 절단하고 예박(털을 벗김)하고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적출합니다. 이어 세척하고 영하 20℃로 예냉해 계량한 뒤 등급을 판정받고 발골 전문 기술자에 의해 4등분 도체 직후 육가공돼 출하되죠. 그런데 일반인은 지육·정육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지육은 도축 후 껍질을 벗기고 머리 부분, 꼬리, 사지 끝을 절단하고 내장을 꺼낸 상태, 정육은 지육에서 뼈, 근육, 여분의 지방을 제거한 거죠.” 그는 3~4개월 지육과 동고동락했다. 살과 근육, 지방과 뼈의 구조를 머리에 모두 암기를 했다. 특히 등심 부위를 빼내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고기가 들어오면 발골 전문가가 1시간 이상 칼질을 하는데 그것도 고도의 기술이라 여겼는지 그가 훔쳐보면 평소 하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발골했다. 그렇게 해서 일반인이 알고 있는 29개 소 부위별 모양을 어렵사리 익힐 수 있었다. “하루 두 마리의 지육과 씨름하고 나면 제 몸은 피범벅이 됩니다. 밤에는 속이 메슥거리고 울렁거려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막상 해보니 그는 식육점보다 식육식당이 체질에 더 맞을 것 같았다. 아내와 상의해 2004년 수성구 범물동에 안영감 식육식당을 차린다. ◆ 품질은 최고로 가격은 최저로 당시 시내 곳곳에 숯불구이 전문점이 포진해 있었다. 특별한 구석이 없으면 승산이 없었다. 일단 한우에 대한 기본 지식은 갖고 있고, 다음은 맛 경쟁보다 가격 경쟁이라 봤다. 한우 1등급 투플(1++), 그건 1인분에 2만원대 아니면 먹기 힘들었다. 그걸 최대한 1만원 초반대로 낮추었다. 고기는 대구 도심 신흥축산의 124번 중개인, 고령축산의 77번 중개인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식당 옆은 들어온 도체를 정육으로 해체하는 식육점이다. 고기를 굽는 도구도 석쇠와 곱돌 두 종류를 사용했다. 직화구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돌판에 간접적으로 굽힌 걸 더 선호하는 이도 있었다. 한쪽은 석쇠구이, 한쪽은 돌판구이 공간이었다. 식육식당을 제대로 하려면 고기별 맛과 적당한 요리 형태가 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부부가 부위별 맛과 적당한 요리에 대한 지식을 정리해준다. “서울은 등심이 강하고 대구는 갈빗살이 강하죠. 불고기용으로는 지방이 적으면서 고기결이 약간은 거친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답니다. 단백질이 많고 맛을 낼 수 있는 부위인 목심이나 앞다리와 우둔 그리고 설도가 불고기용으로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이나 탕으로 요리를 할 때에는 진한 육수가 잘 우러나오는 양지나 갈비 그리고 앞다리가 적합하죠. 산적과 장조림을 만들 때에는 기름기가 적은 앞다리 살과 우둔 그리고 설도가 적당해요. 숯불구이는 갈비가 제일이죠.” ◆ 안영감 소고깃국에 도전하다 범물동 식육식당에서 현재 스타일과 다른 육개장을 끓였다. 고사리도 넣고 고기도 결대로 찢어냈다. 그런데 단골에게 별로 어필되지 않았다. 솔직히 소고기로 끓인 해물탕 같았다. 제대로 끓이고 싶어 2년 전 상인동에 소고깃국 전문점을 냈다. 일단 최상급 양지머리, 사태살과 무와 대파, 양념장만으로 가장 심플하면서도 가장 깊은 맛의 대구식 소고깃국에 도전했다. 백철솥으로는 특유의 맛을 내기 힘들다 싶어 250인분 무쇠가마솥을 마련했다. 안 아프면 오전 10시에 나와 1시간30분 남짓 국을 끓인다. 여느 따로국밥은 사골육수를 베이스로 하지만 그는 정육에 참기름을 넣어 거기서 스며나오는 육즙, 그리고 무와 파에서 추출되는 달면서도 깔끔한 맛을 역이용한다. 무와 파의 양도 조절해야 된다. 파는 단 성분이 감도는 감미로운 맛을 내는데 너무 익어버리면 국맛이 달달해 식감을 버린다. 그걸 방지하는 식재료가 무다. 무는 파보다 상대적으로 덜 넣는다. 무를 넣고 10분 뒤 파를 집어넣어야 맛의 균형이 딱 맞아들어간다. 국을 오래 끓이면서 동·하절기별 채소의 맛 차이도 알게 됐다. 파의 경우 겨울에는 뿌리 부위, 봄에는 잎 부위에 무게 중심이 실린다. 하지만 하절기에는 무와 대파가 동절기만큼 깊은 맛을 못 내기 때문에 그때마다 고기의 양을 더 증가시켜 묽어지는 국물맛에 중량감을 주어야 한다. 들어가는 물의 양이 조금만 줄어들면 졸아들어 너무 익어버린 맛이 입맛을 불쾌하게 한다. 불의 강약을 조절해야 되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의 강도도 염두에 두어야 된다. 또한 국그릇도 맛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국을 담는 그릇이 빨리 식으면 식감은 금세 추락해버린다. 손님이 다 먹을 동안 육수 온도가 따끈해야 된다. 그래서 놋그릇에 국을 담는다. 특히 수면 위에 떠돌아다니는 국기름은 예전과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다 제거해야 된다. 소고기의 육질이 비록 좋다고 해도 너무 많이 끓이면 물 먹은 가죽처럼 질기다. 이젠 국물이 끓는 소리만 들으면 국의 속마음이 보인다고 한다. 방심은 금물. 비록 오늘 국맛이 상종가라도 자칫 한눈을 팔면 하한가로 마구 추락한다. 한번 실망한 사람은 발길을 냉정하게 돌린다. 그래서 그는 소고깃국은 체인점이 원칙적으로 어렵다고 본다. 10여년 만에 소고깃국의 맛을 일정수준으로 세팅시킨 뒤 곰탕에 도전했다. 곰탕은 10일 만에 한번 끓인다. 이때 양질의 사골을 13개 정도 넣고 한 번에 6~8시간 세 차례에 걸쳐 육수를 뽑아내 섞어 사용한다. 사골 속에 숨어 있는 핏물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데 보통 2일 정도 물에 담가둔다. 곰탕 육수의 구수한 기운을 발산시키기 위해 족발도 10개 정도 함께 넣어 고아낸다. 최고의 맛은 아무래도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단다. (053)639-4916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6.02.0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춘천 닭갈비
엄밀히 말하면 춘천은 막국수보다 ‘닭갈비 고장’이다. 막국수는 강원도에 모두 4인방이 있다. 맏형 격은 춘천, 둘째는 봉평, 셋째는 원주, 넷째는 인제·횡성·홍천·양양 등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구의 대표 메뉴인 따로국밥이 정작 대구사람한테 크게 어필되고 있지 못하듯 춘천 시민들 역시 닭갈비를 다들 식상해한다는 것이다. 춘천 닭갈비 대박 신화는 편리해진 교통망과 연이은 방송 노출 덕이다. 2001년 중앙고속도로 대개통과 2011년 12월21일 춘천행 지하철 개통 후 주말 서울 등 경기권은 물론 경상도권에서까지 몰려온 맛투어족 덕분에 춘천은 ‘닭갈비왕국’으로 등극한다. 덩달아 서울~춘천 사이에 있는 강촌과 대성리역권도 닭갈비벨트로 묶인다. ◆ 춘천닭갈비의 유래 춘천닭갈비는 크게 닭불고기와 닭갈비 스타일로 나뉜다. 닭불고기는 ‘석쇠구이’, 닭갈비는 ‘철판볶음’이다. 대구에 내려온 건 철판볶음형이다. 닭불고기가 선배 격이고 닭갈비는 90년대 이후 등장한 신세대 스타일로 보면 된다. 강원도 농업기술센터가 2003년부터 춘천닭갈비의 유래를 찾아나섰다. 그 결과 춘천닭갈비의 발상지는 춘천 중앙로2가 18번지. 현 삼성생명 주차장과 주차장 옆 삼성생명 현관 계단 사이에서 판자로 된 조그만 돼지갈빗집이 59년에 생겨난다. 그 당시에는 버스터미널로 사용되었으며 인근에 있는 현 중앙로2가 11번지 조흥은행은 강원합승 종점으로 사용된다. 60년 어느 날 거기서 돼지갈빗집을 운영하던 김영석씨(작고)가 우연찮게 닭갈비를 요리하게 된다. 돼지고기를 구하기 어려워 대신 닭 2마리를 사 와서 닭을 토막 내 돼지갈비 같은 최초의 닭갈비를 만든 것. 닭갈비는 이후 드럼통 위에 무쇠판을 올려놓고 연탄불을 지펴 닭갈비를 구워 파는 닭갈비 포장마차, 연탄닭갈비(연탄과 석쇠 이용+구이 형태), 숯불닭갈비(숯과 석쇠이용+구이형태), 춘천닭갈비(무쇠판이용+볶음 형태) 등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70년대 초부터는 닭갈비만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71년 지금과 같이 둥근 철판 형태의 11㎜ 두께 닭갈비판이 등장한다. 양배추, 썬 고구마, 가래떡 등을 양념한 닭고기와 함께 볶아 내는 오늘날의 춘천닭갈비 모습을 갖추게 된다. 300개 넘을 것으로 보이는 업소마다 모두 자기가 원조라고 할 정도다. 김씨의 사망과 가게 폐업으로 현 춘천닭갈비 원조집은 없다고 봐야 된다. 강원대 동물생명과학대 이성기 교수가 춘천닭갈비의 산업화 과정을 면밀하게 연구한다. 돼지고기 못구하자 닭을 사서 돼지갈비처럼 구운 것이 시초 석쇠구이 닭불고기가 선배 격 철판볶음 닭갈비는 1990년대 등장 신세대 스타일 닭갈비집 명동 등 7곳에 산재 맛 비슷비슷하니 홍보전 몰두 “서민과 함께한 춘천닭갈비는 영세상인들에 의해 숯불구이에서 불판구이로 전환되어 판매되어 왔다. 초창기부터 줄곧 뼈를 포함하여 통마리 닭을 잘라 팔아온 형태가 90년대 이후부터는 서서히 뼈 없는 닭갈비·닭다리 고기만으로 만든 닭갈비로 전환되었다.” 이 교수는 “뼈 없는 닭고기와 닭다리 고기만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소비자들의 욕구에 부합된 측면도 있다. 또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 다리 고기의 출현으로 뼈 없는 다리 살을 사용한 원인도 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원료육뿐 아니라 토막 내는 방법, 닭고기 부위, 냉동육이나 냉장육, 수입육 사용 여부, 양념을 비롯한 가열방법 등에 대한 과학적, 행정적 품질관리 체계가 미비했다. 춘천닭갈비 발전을 위해 2004년 9월 당시 최성동 시의원이 중심이 되어 ‘춘천닭갈비 발전연구회’를 설립한다. 이후 춘천닭갈비협회도 발족된다. 그 시절 춘천 지역에는 양계장이 많았다. 평소에 닭백숙, 닭튀김 등 다양한 닭요리에 익숙해 있던 춘천 주민들의 입맛을 닭갈비가 사로잡는다. 맛과 푸짐한 양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서민들과 대학생, 휴가나 외박을 나온 군인들에게 큰 인기였다. 현재 닭갈비는 1인분(300g)에 1만원 남짓, 70~80년대까지만 해도 150g 정도의 닭갈비 1인분 값이 100~500원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춘천닭갈비는 ‘대학생 갈비’ 또는 ‘서민 갈비’란 별명이 붙었다. ◆ 홍천닭갈비와 춘천닭갈비 원래 닭갈비의 탄생지는 춘천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홍천군이다. 홍천식 닭갈비는 냄비에 육수를 넣고 끓이는 ‘닭볶음탕’. 양념한 닭과 각종 채소를 철판에 볶아내는 춘천의 닭갈비와는 요리 방법이 전혀 다르다. 갈빗살을 전혀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닭갈비라 이름 붙여진 것은 원조가 뼈째 포를 떠 석쇠에 구워 손으로 잡고 뜯어먹는 형태였기 때문. 이제 뼈 있는 닭갈비(1천원 더 비쌈)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춘천닭갈비는 대부분 적당한 크기로 토막 낸 닭고기를 양념장에 버무려 7~8시간 이상 재운다. 각자 비법이 따로 있지만 양념장에는 다진 마늘과 생강, 양파, 고춧가루, 설탕, 간장, 맛술 등 20여 가지 재료를 사용한다. 이후 달군 팬에 기름을 두르고 도톰하게 썬 양배추, 고구마, 당근, 깻잎 등과 함께 볶아 먹는다. 타 지역에서 맛보는 닭갈비도 이와 비슷하지만 춘천닭갈비만의 특징으로는 닭고기 토막이 더 크며 쫄면이나 라면 사리가 아닌 우동 사리만을 쓰는 것을 들 수 있다. ◆ 춘천닭갈비 골목 춘천닭갈비는 대구의 막창곱창 골목처럼 명동, 낙원동, 후평동, 온의동, 만천리, 동면, 신북면 등 모두 7군데에 산재한다. 외지인들에게는 명동만 잘 알려져 있다. 제일 먼저 강원도청 근처에 있는 번화가 ‘명동닭갈비골목’을 찾아봤다. 꼭 대구의 평화시장 닭똥집골목 초입을 연상시킨다. 행정구역상으로 여기는 조양동. 그런데 1960년대 요선동시장이 큰 화재를 당해 중앙로와 조양동 사이가 공백이 된다. 춘천시와 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불탄 자리에 새로운 쇼핑가를 꾸밀 계획이었다. 그래서 벤치마킹한 게 서울 명동. 그렇게 해서 춘천에 명동이 생겨난다. 68년부터 명동 골목에 우미, 육림, 뚝배기집, 대성 등 4개 업소를 시작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닭갈빗집들이 들어서면서 명동닭갈비골목이 형성된다. 현재는 135m 골목에 16개 업소가 성업 중이다. 닭갈비골목에 위치한 업소들은 93년 ‘계명회’라는 친목단체를 설립했다. 한류드라마 ‘겨울연가’의 영향으로 남이섬을 찾은 일본 여성팬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관광코스로도 이름을 날렸다. 외국 관광객을 위해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함께 표기했다. 골목 곳곳에는 조형물과 경관 조명을 새롭게 설치했다. 명동과 브라운5번가 입구 등 닭갈비골목으로 통하는 길목 3곳에는 조형물과 문화홍보판을 설치했다. 골목 중간에 포토존을 설치하고 휴게공간을 마련했다. 초창기 버전의 닭불고기가 먹고 싶어 지척에 있는 ‘원조숯불닭불고기집’으로 갔다. 현재 춘천닭갈비 업소 중 최고참급이다. 좋은 시설 운운하는 사람에겐 별로일 것 같다. 명동골목 번쩍거리는 매머드 업소보다 훨씬 허름한 집이다. 참숯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타는 고기가 꼭 대구의 북성로 돼지불고기를 닮았다. 맛은 범상치 않았다. 국내산 냉장육이기 때문에 가능한 맛이다. 여느 프라이드치킨집의 바비큐치킨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맛이었다. 원조 음식은 이래서 본바닥에서 먹어야 되는 모양이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닭갈비거리는 소양강댐에서 지척인 ‘신북닭갈비촌’. 여기는 춘천 3대 막국수 중 하나인 샘밭막국수 등이 포진하고 있어 ‘막국수거리’로도 불린다. 근처에 막국수체험박물관까지 있다. 30여 개 업소가 너무 현대풍인 게 아쉬웠다. 맛은 비슷한데 업소 간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상당수가 방송에 노출된 업소라 현수막 홍보전이 너무 뜨겁다. 외지인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럴 땐 덜 유명한 집이 유리하다. 그 거리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한 ‘통나무집’, 승용차로 가득하다. 소문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하루를 기다려서도 그런 집에 들어간다. 하지만 기자는 노선을 바꿨다. 한산한 ‘마적산닭갈비’를 찾았다. 유호영 사장이 정색했다. “맛은 솔직히 엇비슷하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정도는 서로 다르다. 이게 문제다. 유명함이 다른 업소의 장점을 밀어버린다. 조만간 유명 경쟁은 끝나고 가장 위생적인 집이 어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디 그의 전망이 맞길!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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