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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식당 디자인의 해결사’ 푸드스타일리스트 유언주씨와 파트너 푸드사진가 송석영씨
대구의 간판을 보라. 참으로 경악스럽지 않은가. 간판도 ‘공공재’라서 자기 맘대로란 마인드는 극히 제한적이어야 한다. 요즘 간판을 보면 ‘흉측’하거나 ‘무개념’이란 생각이다. 음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솔직히 2만 개가 넘는 대구의 식당 중에 그래도 이건 기억해 둘 만한 감각과 철학을 가진 간판은 어느 정도일까? 타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국제도시로 불리는 대구의 간판문화 수준은 거의 ‘구석기버전’. 대다수 주인은 ‘간판은 아무렇게 달면 되는 것’이란다. 주인의 머리 안을 들여다 본다. ‘잘 보이게 글씨는 무조건 크게, 다른 데도 모두 자기 얼굴을 올리니 나도 올려보고, 음식 사진도 올리니 스마트폰으로 대충 찍은 사진을 한 귀퉁이에 올리고, 색도 이 색 저 색 다 동원시킨다.’ 무개념 현수막 업자는 늘 사용하던 글꼴을 쏟아낸다. 어디가나 비슷한 간판뿐이다. 꼭 미친사람이 널 뛰는 것 같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간판개선 작업을 주도한 중구청의 안목도 간판 사이즈만 조금 작게 만들었을 뿐 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지적이다. ‘붕어빵 간판’이랄 수밖에 없다. 돈만 앞세워 톱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겨 뉴욕 맨해튼 버전의 원더풀 간판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의식으론 국제적 감각의 식당문화를 만들긴 어려울 듯싶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허점이 그대로 노출된다. 겉은 ‘벤츠 S500시리즈 급’인데 내부는 티코 수준인 식당으로 추락한다. 하드웨어는 톱인데 손님을 접대하는 매니저의 말씨와 눈빛, 옷 맵씨 등은 전혀 하드웨어와 어울리지 않는 ‘촌닭’ 수준이다. 다들 그런 식당을 나오면서 ‘속았다’고 투덜댈 것이다. 대구는 언젠가부터 ‘알아서 해주소 업자 디자인’이 무법자처럼 활보하고 있다. 대책은 없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푸드스타일리스트를 기억해야 된다. 실내인테리어…메뉴 선택… 그릇…식탁…의자…소품… 식당과 관련한 디자인 연출 경륜 쌓이면 요리개발 참여 인기 끌 메뉴 탄생시키기도 음식 보기에도 좋도록 메뉴판을 한권의 잡지처럼 음식사진은 생동감이 생명 별의별 촬영 아이디어 동원 좋은 건축가는 식당신축때 푸드스타일리스트와 동행 만족할만한 디자인 만들어 ◆ 10년간 무소의 뿔처럼 달려온 유언주 맥 디자인 대표. 유언주 맥 디자인 대표(32). 현재 수성구 들안길에 있는 디자인 사무실에서 척박한 디자인 대구를 ‘디자인 천국’으로 만들 꿈에 취해 산다. 명함 뒤에 ‘외식업 전문 디자인 연구소’라고 적혀 있다. 지역에선 10년 이상 한 길을 걸은 몇 안되는 푸드스타일리스트다. 아직도 일반인에겐 생소한 푸드스타일리스트. 도대체 뭘할까? 식당과 관련된 디자인 작업을 총연출한다. 건축을 제외하고 실내 인테리어에서부터 메뉴 선택, 메뉴에 맞는 그릇, 그 그릇에 맞는 식탁, 그 식탁에 맞는 의자, 그 분위기에 맞는 종업원 유니폼과 실내 소품, 그것에 맞는 메뉴판과 간판, 심지어 주인의 색깔에 맞는 유별난 명함까지 개발해준다. 한마디로 ‘식당 디자인의 해결사’로 불린다. 유 대표는 계명대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음식에 필이 꽂혀 요리학원을 전전했다. 요리 본능과 패션 본능이 합쳐지면서 푸드스타일리스트의 길이 운명처럼 그녀를 움켜잡았다. 5년 전 남성 작업 파트너 한 명을 만난다. 현재 중구 봉산동에서 스튜디오 석을 운영하는 사진가 송석영씨(42)다. 푸드 사진 전문가로 불린다. 두 사람은 지금 대구음식문화의 유전자에 디자인 감각을 심어주고 있다. 음식이 맛만으로 결정이 날 수도 있지만 그 맛이 일단 보기에 좋게 사진과 소품, 캘리그래피 등으로 치장해준다. 요즘은 스토리텔링 기법을 투입한다. 메뉴판 표지에 메인 카피를 한 편의 서사시처럼 새겨준다. 메뉴판을 한 권의 잡지처럼 만들어 준다. 레시피와 메뉴 사진, 가격만 나오는 메뉴판에서 사이 사이 식당의 역사, 주인의 성향, 종업원의 캐릭터, 게다가 식재료 공급자의 인적사항까지 삽입한다. 손님은 그 메뉴판을 보고 그 식당을 더욱 믿게 된다. 그런데 아직 이런 구상이 아직 대구에선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럴 것이 자기 건물을 가진 식당주는 채 1% 수준도 안 된다. 7% 안팎만 오너셰프이다. 나머지 식당주는 임차료 내기에도 급하다. 간판과 실내 인테리어는 안중에도 없지만 그래도 초창기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상태다. 맛이 평준화 되면서 승부처 중 하나로 식당 분위기가 중시되면서부터다. “아직 디자인을 중시하는 건 대다수 프랜차이즈 식당입니다. 상당수 식당은 여전히 생계형이라서 돈을 주고서라도 좋은 디자인을 갖겠다는 마인드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대다수 식당주 마인드는 거의 ‘식당에선 음식만 맛있으면 그만’이란 수준이었다. 식당 광고조차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 항상 업자한테는 을의 입장 광고주는 이들에겐 ‘슈퍼갑’으로 군림한다. 자신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클라이언트가 ‘노(No)’라고 하면 다시 만들어야 된다. “가장 힘들 때는 우리가 날밤을 새우면서 만든 작품이 무조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우길 때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있습니다. 사진 촬영 때 직접 광고주를 참여시켜 현장에서 대화를 해가면서 정답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개념이 없는 것과 개념 있는 디자인을 서로 비교하면서 설명하면 다들 왜 디자인 기법이 들어간 게 더 좋아보이는지 그게 왜 매출 증가로 이어지는지 스스로 깨닫게 되더군요.”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수식되고 부풀려진 사진을 원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가장 자연스럽게 연출해야지 실제 사용하지도 않는 식재료를 예쁘다는 이유로 촬영에 투입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란 걸 설득할 때가 가장 힘들단다. 또 이들을 괴롭히는 게 있다. 식당이 건축될 그 시점에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저희들은 맨 나중에 투입됩니다. 투입해 보면 이미 100가지 선택지 중 99개는 모든 게 결정된 뒤죠. 그런 상황에서 깜짝 놀랄 만한 디자인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정말 답답하죠. 탁월한 건축가는 식당이 신축될 때 푸드스타일리스트와 동행합니다. 그럼 더 만족할 만한 디자인이 구축돼요.” 대구 10味 중 하나인 동인동찜갈비 촬영 때도 고민을 많이 했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그리고 너무나 칙칙한 내용물. 사진 찍기가 정말 어려웠다.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선 평균 10가지 이상의 구도를 설정한다. 한 구도별로 50~100여 장을 찍는다. 마지막 한 장이지만 그 한 장은 수백에서 수천장 중 한 컷임을 상당수 주인은 알지 못한다. ◆ 남는 장사를 하자 사무실 벽에 ‘남는 장사를 하자’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식당이 남는 장사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디자인 회사가 아직 마인드 부족으로 제대로 된 몸값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극복, 열정만큼 돈을 버는 세상을 만들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돈이 아니라 자기 열정과 안목을 알아주는 식당주를 남기자’란 뜻일 것이다. 푸드스타일리스트는 원래 요리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오래 있다 보면 저절로 요리 전문가로 변한다. 많이 경험하다보면 유행하는 메뉴에 대한 감각까지 생긴다. 이게 될 메뉴인지 안 될 메뉴인지에 대한 감각도 생긴다. 나중엔 요리개발에도 참여한다. 자신들이 추천한 이색 식기로 바꾸는 식당주도 생긴다. 이럴 땐 일 할 맛이 난다. 소품개발비도 장난이 아니다. 한 가지를 오래 사용할 수 없다. “외식업계는 유행주기라는 게 있어요. 한 물간 소품이나 스타일을 고집할 수 없어요. 항상 새로운 걸 찾아 전국 각처를 기웃거립니다.” 유 대표는 특이한 바닥재를 찾으려고 공사장 현장을 자주 기웃거린다. 고전적 소품은 서울 인사동, 대구 칠성시장에선 온갖 주방기기를 찾을 수 있다. 때론 바닷가에서 조개와 모래, 자갈 등을 주워오기도 한다. 송 대표는 사진에 생동감을 주기 위해 별의별 아이디어를 찾는다. 특별히 찍기 어려운 사진이 있을까. 피자 사진이 가장 힘들단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피자를 찍으려면 치즈가 안굳어야 하는데 보통 1분이면 굳는다. 그래서 스튜디오 바로 곁에 조리를 할 수 있는 피자 차량까지 오기도 한다. 김 나는 장면은 드라이아이스나 담배연기를 활용한다. 맥주잔에는 분무기를 뿌려 물방울을 만들어낸다. 고기에 식용유를 살짝 발라주기도 한다. 색이 죽은 삼겹살은 냉장고에 5분 정도 넣어두면 더욱 붉은 기운을 얻을 수 있다. 맥주 거품을 더 풍부하게 내기 위해선 소금을 집어넣는다. 예전에는 사진촬영에 더 많은 시간이 투입되는데 이젠 디지털 세상이라서 촬영후 CG(컴퓨터 그래픽) 작업시간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중 어느 게 가장 촬영하기 어려울까. 단연 한식이고 컬러풀한 일식은 상대적으로 찍기가 수월하단다. 가끔 손님한테 나가는 그대로 찍어달라고 할 때 식겁을 한다. 주재료와 부재료, 고명이 사진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문이기 때문이다. 메뉴판용 사진의 경우 이름만으로 어떤 음식인지 분간이 잘 안 갈 경우를 생각해 반드시 메뉴 옆에 사진을 올려두는 게 센스란다. 모쪼록, 대구음식문화가 채 몇 명도 안되는 푸드스타일리스트와 눈높이 대화를 하는 시절이 빨리 왔으면 싶다. (053) 766-4470∼2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9.0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發 프랜차이즈 ‘행복한 찌짐포차, 전국지’
그동안 프랜차이즈 음식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음식을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게 식당정신에 영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생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겠다 싶다. 프랜차이즈만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위생과 친절, 그리고 푸드스토리텔링 콘텐츠이다. 프랜차이즈는 본사에서 가맹점에 실시간으로 재료를 공급해줘야 하기 때문에 메뉴 표준화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또한 프랜차이즈 홀서버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다수 친절함이 몸에 스며 있다. 또한 간판과 실내인테리어 감각도 여느 식당보다 더 펀하고 심플하다. 맛은 다들 한 맛을 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될 듯싶다. 시쳇말로 ‘이 집 음식 맛이 죽인다’고 해도 그게 상당수 양념, 조미료, 향신료, 소스의 조작된 맛이라는 걸 일반인은 잘 분별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맛을 온몸으로 감지하는 게 아니다. 맛 세포인 미뢰(Taste bud)에 의존한다. 조미료를 절대 넣지 않고 맹물로 국을 끓이면서 재료는 최고급을 사용해도 요즘 젊은이는 ‘헐, 이게 무슨 맛’이라면서 수저를 놓고 만다. 맞벌이 엄마가 착한표 식재료로 요리할 틈이 없어 패스트푸드로 아이의 입을 초토화시켜 놓았으니 당연히 그 아이도 자극적이고 풍미가 짙은 걸 좋아할 수밖에 없다. ◆ 행복한 찌짐포차…전국지 최근 흥미롭게 지켜본 한 대구발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있다. 바로 ‘행복한 찌짐포차’란 제목을 단 ‘전국지(煎國地)’다. ‘전국지(戰國地)’를 패러디한 것이다. 한마디로 별의별 찌짐(부침개)을 갖고 스토리텔링 마케팅을 한 것이다. 이게 잘 되자 전총무가 쏜다, 전선생 등도 힘을 받고 있다. 대구시 중구 동성로 통신골목 초입에 있는 전국지 동성로 본점을 찾았다. 식탁에 앉자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다. 수저통 뚜껑 위에 ‘사장나와’란 카피의 안내 스티커였다. 음식을 먹다가 불만스러운 게 있으면 직접 사장 카카오톡으로 불만 사항, 가맹점과 테이블 번호를 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명 ‘초고속 서비스’ 아이템이다. ‘30세 총각’ 정연곤 대표 전국 엄선 20여종 막걸리 별의별 찌짐안주로 승부 할인가격 테이크아웃도 별의별 찌짐에 별의별 막걸리도 집결시켰다. 현재 전국 막걸리 브랜드는 무려 1천여개. 양조장은 800여개. 팔도에서 엄선된 20여종의 막걸리를 골라냈다. 벽에 대한민국 전통주 지도를 벽화로 그려놓았다. 울산시 울주군 복순도가의 수제 샴페인 ‘손 막걸리’, 전남 함평의 전통주 명인 백록담씨가 만든 ‘자희향탁주’, 충북 옥천의 양반이 먹던 ‘고택찹쌀생주’, 서울 느린마을양조장에서 만든 ‘느린막걸리’,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던 부산 ‘금정산성막걸리’, 노무현 대통령이 즐겼던 충북 소백산 ‘대강막걸리’, 전남 고흥의 ‘유자막걸리’, 충남 공주의 ‘알밤막걸리’, 강원도 원주의 ‘옥수수막걸리’, 충북 논산의 딸기로 만든 ‘딸구막걸리’, 제주도 ‘한라봉막걸리’, 조선 3대 명주인 ‘죽력고’, ‘안동소주’, 전북 대표명주인 ‘이강주’, 경기도 대표 ‘문배주’ 등이다. ◆ 30세의 솔로 사장 현재 42호 가맹점을 낸 전국지 대표는 30세의 정연곤씨. 그는 20대 초반부터 인생의 단맛 쓴맛을 골고루 맛봤다. 대학 초입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생업전선으로 떠밀려 나왔다. 인생 초입에서 강력한 먹구름을 만난다. 3세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생활 기반을 잃어버린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대학생활을 해보기도 전에 어머니가 2008년 그가 24세 때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22세에 덜컥 가장이 됐고 여동생도 대학생이었다. 고교 때는 원없이 놀았다. 대학은 안중에 없었다. 그런데 군대에 가서 철이 든다. 더 폼나게 놀기 위해선 대학은 필수란 결론을 내린다. 경북대 사대교육과에 들어간다. 하지만 돈을 벌지 않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 여동생과 자신의 등록금과 아버지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한다. 일단 대학은 접고 생업전선에 뛰어든다. 경북대 북문 앞에서 ‘고니’라는 주먹밥 전문 분식집을 열었다. 22세 때 알바를 했던 호프집 사장이 메뉴를 짜주었다. 2009년 그 사장과 동업을 한다. 2년간 나름 열심히 했고 돈도 들어온 것 같은데 정산해 보면 적자였다. 그는 경영학에 대한 기본기가 없어 원가분석에 실패했다. 물러설 처지가 아니었다. 차도 팔고 달서구 용산동의 아파트도 팔았다. 가족이 모두 자기만 쳐다봤다. 동성로 상권을 분석하다가 통신골목 초입에 8개월간 놀고 있는 점포를 잡아 ‘쿡스(KUKS)’란 별의별 국수 전문점을 낸다. 2011년이었다. 잔치국수, 비빔국수, 일본 나가사키 짬뽕, 베트남 쌀국수, 이탈리아 파스타 등 세계 면요리를 총출동시켰다. 영남대 식품공학과를 다니고 있는 여동생도 메뉴개발에 투입시켰다. “다들 맥주를 내밀 때 저는 좀 독특하게 막걸리를 잡았습니다. 막걸리 붐을 역이용한 거죠. 막걸리는 영어로 ‘Rice wine’이잖아요. 그래서 와인잔에 막걸리를 부어주었습니다.” 그때 3개국 전 요리를 모둠 스타일로 내놓았다. 이탈리아 피자, 일본의 오코노미야키, 한국의 찌짐이었다. 이걸 삼국지를 패러디해서 ‘전국지’라 했다. 3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단골들은 이구동성으로 전반적으로 ‘찌짐보다 막걸리가 좋다’는 반응이었다. 이미 1억원 이상 빚을 진 상태에 맹목적으로 한탕할 작정으로 쿡스를 열었는데 역시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빠른 시간 내에 사람들을 많이 끌고 오기 위해 소셜 커머스, 푸드 블로거 등을 동원했다. 처음엔 사람이 몰렸다. 하지만 소문처럼 맛이 없자 다시 재방문하지 않았다. 3개월 만에 문을 닫는다. 스스로 ‘제 얼굴에 침을 뱉은 꼴’이라고 자탄했다. 세상을 너무 쉽게 본 것이다. ◆ 찌짐에 빙의가 되다 ‘명량해전’에 임하는 이순신의 심정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쿡스에서의 교훈을 거름삼아 다시 도전을 했다. 반응 좋은 전국 팔도 막걸리, 그리고 찌짐을 갖고 재도전했다. 2011년 12월 현재 본점 자리에서 행복한 찌짐포차 전국지를 론칭했다. 일단 막걸리는 괜찮은데 찌짐만은 절정의 맛을 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는다. 서점으로 가서 국내에 나온 찌짐 관련 서적을 싹 사들고 와서 분석에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전국에선 처음으로 막걸리와 찌짐 전문 프랜차이즈를 탄생시킨다. 그는 온갖 식재료를 갖고 찌짐을 만들었다. 온도가 맞지 않아 식용유 양을 조절하지 못해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는다. 새로운 찌짐이 생기면 즉시 메뉴판을 바꿨다. 수십번 메뉴판이 업그레이드된다. 온도가 높으면 튀김처럼 너무 파삭거리고 온도가 낮으면 눅눅하게 흘러내렸다. 절묘한 포인트는 쉬 터득되지 못했다. 그가 만든 메뉴판을 읽어보았다. 웃음이 난다. 그 어떤 메뉴판보다 이야기가 풍부했다. 일단 여느 술집에선 약한 ‘밥거리’를 보강했다.여기에 오는 손님 대다수가 여성이다. 술을 먹기 전에 저녁을 먹고 싶어한다. 그런데 밥을 제대로 챙겨주는 술집이 별로 없다. 여기선 술과 밥을 동시에 충족시켜주었다. 안주 같은 밥을 추구했다. 2차 술집이 아니고 ‘1.5차 술집’으로 각인시켰다. 이 와중에 오후 7시 전까지만 주문 가능한 6천800원짜리 ‘전찌밥’이 탄생한다. 전과 김치찌개, 공기밥을 섞은 것이다. 전은 5종(쇠고기육전, 동태전, 애호박전, 두부전, 소시지전)이다. 대한민국 모둠전은 14가지 전을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눠 낸다. 한꺼번에 나오면 나중에 먹는 전은 식어버려 맛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반전에는 쇠고기전, 육전, 전병, 부추전, 애호박전, 새송이버섯전, 감자전, 후반전에는 녹두빈대떡, 동태전, 오미산전, 두부전, 호박전, 완자전, 고추전이 나온다. 이 밖에 깻잎완자전과 동태전을 합친 ‘깨동전’, 샐러드 버전을 가미한 ‘육전샐러드’ 등이 개발됐다. 또한 예전 명절 뒤 남은 음식으로 해먹는 ‘거지탕’ 비슷한 ‘전찌개’도 개발했다. 심지어 주꾸미, 참치, 떡갈비, 떡볶이, 볶음밥 등과 매치시켰다. 패스트푸드점처럼 전도 10% 할인된 가격에 테이크아웃으로도 팔고 있다. 그가 인터뷰 말미에 뼈있는 말을 전했다. 모든 예비 창업자가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 “월급은 제가 주는 게 아니고 손님이 주는 겁니다. 결국 식당이란 푸짐하고 맛있고 청결하고 깨끗한 음식을 머리 숙여 친절하게 대접하는 공간입니다. 예전에는 청결하고 머리는 숙일 줄 알았는데 푸짐하고 맛있게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균형을 잡은 것 같고 그래서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춘호 기자leekh@yeongnam.com
2014.08.29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폿집 ‘3천대포’ 돌풍의 주인공 김영석씨 ‘미우나 고우나 5천냥’으로 조용한 컴백
2009년 2월20일. 대구시 수성구 중동교 근처에 뉴버전의 대폿집이 론칭됐다. ‘3천대포’였다. 오후 4시에 문을 열면 인근 낮술파들이 하나둘 진을 치기 시작한다. 자정 무렵이면 가족단위에서부터 예술가, 시민운동가, 밤업소 종사자, 대리운전 기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오전 6시까지 불야성을 이룬다. 대다수 안주 값은 3천원. 막걸리 한 주전자가 5천원, 2만원 정도면 4명에서 2시간 남짓 푸짐하게 배를 채우고 수다를 떨다가 갈 수 있었다. 영남대 법대 출신인 김영석 사장(50). 그는 한때 운동권으로 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운동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가장 솔직한 일이 ‘식당’이다 싶었다. 20여년 여러 식당을 전전했다. 횟집, 생선그릴집, 막창집, 생고깃집, 치킨집, 안동찜닭집 등을 꾸려봤다. 거기서 요리에 대한 기본기를 다 익혔다. 미국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세계금융위기가 서민에겐 제1의 IMF 외환위기로 각인되는 걸 보고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탁주집을 열자고 맘을 먹는다. 그는 3천대포를 ‘한국 식당민주주의 1번지’로 만들고 싶었다. 3천대포는 문을 연 지 두 달 만에 대박이었다. 1년 만에 10개의 가맹점이 생겼다. 해물파전, 감자전, 빈대떡, 배추전, 깻잎전 등 참 많은 전을 개발했다. 단골들은 ‘이렇게 주고도 남느냐’고 직원에게 곧잘 물었다. 대구시 전역에 3천대포 바람이 몰아쳤다. 대포 3천냥, 막걸리 3천냥 등 다양한 콘셉트의 대폿집이 등장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폭리(暴利)’에 반감을 갖는다. 직원이 가게 지출 내역을 다 알 수 있도록 배려했다. 메뉴의 인기차트도 공개했다. 그곳은 사장과 직원의 구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워낙 활기차고 자신있게 일을 하니 되레 직원들을 사장으로 본다. 그는 항상 허름한 포즈로 손님처럼 단골과 어울린다. 다시 말하면 사장과 직원이란 수직관계가 아니라 서로 윈윈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수평적 공생관계’로 발전시켰다. 그는 가맹점 사업을 하면서도 서민섬김정신이 없는 사람에겐 가맹점을 주지 않는다. ◆무늬만 3천대포… 원망스러웠다 대구는 참으로 소문에 잘 혹한다. 돈이 된다 싶으면 맹목적으로 남의 아이디어를 잘 베껴간다. 뭔가 하나가 떴다 싶으면 다들 아프리카 누떼처럼 그쪽을 향해 달려간다. 자연 순진한 사장만 상처를 입고 작전세력은 배를 불린다. 3천대포도 마찬가지. 경쟁이 심해지고 식재료 값이 폭등하면서 3천원짜리 안주 라인은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부추전 등 만만한 메뉴 몇 개만 3천원이고 나머지는 1만원에 육박했다. 마치 ‘수박 3천원’이란 문구만 보고 수박을 사러갔다가 몇 배 더 비싼 수박을 사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악덕 상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 사장은 1년 정도 하다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인계했다. 그는 지친 몸을 달래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요리솜씨를 익히기 위해 강호의 고수를 찾아다녔다. 동해·서해·남해 해산물 산지를 순례하면서 제철이 언제인가도 기록해나갔다. 그 사이 3천대포의 정신이 많이 손상됐다는 판단을 하고 ‘3천대포 부활 프로젝트’를 엄밀히 가동한다. 3천원짜리 메뉴가 ‘미끼 메뉴’로 팔리는 걸 더 이상 방치하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미우나 고우나 5천냥’. “5천냥 앞에 ‘미우나 고우나’란 수식어를 붙인 것은 그 단어 속에 서민의 애환이 녹아 있고, ‘3천원을 극복하려는 5천냥을 미우나 고우나 사랑해달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 5천냥에서 푸짐함을 만나다 5년 전에 잠시 만났던 김 사장. 그가 ‘장고’처럼 돌아왔다. 지난주 화요일 오후 5시30분 어름. 동부정류장 동편에 자리한 5천냥. 벌써 반 이상 자리가 단골로 채워졌다. 메뉴판을 봤다. 전류(녹두빈대떡, 오징어부추전, 해물파전, 감자전, 동태전, 김치전, 깻잎전)·생선구이류(고등어, 도루묵, 가자미, 조기)·초회류(동해참문어, 벌교꼬막, 백소라, 연어사시미, 가오리무침회, 미주구리무침회, 오징어무침회, 통오징어숙회, 가오리찜, 미더덕찜)·스페셜(석쇠불고기, 계란말이, 오징이두루치기, 돼지두루치기, 매운닭발, 닭똥집볶음, 순대볶음, 소시지야채볶음)·탕류(삼계탕, 떡어묵탕, 알곤탕, 김치찌개)가 모두 5천원. “예전처럼 3천원 갖고 안주를 만들어 직원 월급주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식당을 열기 전 참 오래 고민했습니다. 서민들이 푸짐하고 맛있게 먹고, 주인과 직원이 먹고 살 만한 최소 안주 가격대는 얼마일까. 5천원이 답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아귀탕과 아귀찜, 참문어숙회, 생소라 등을 내왔다. 찜에 들어간 전분은 100% 감자전분이라서 시간이 지나도 갱물이 형성되지 않았다. 1만원 이상의 값을 하는 것 같았다. 매일 매천시장, 칠성시장 등에서 장을 봐오기 때문에 신선도가 좋다. 그러니 요리도 쉽고 간단하다. “냉동이면 절대 이런 맛이 나올 수 없죠. 실비집일수록 생물이어야 성공합니다. 보통 양념과 조미료를 저급한 걸로 사용해 돈을 남기려고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죠.” 여느 실비집에선 바쁠 때 잔치국수를 해달라고 하면 싫어한다. 그런데 여기선 술과 밥을 동시에 충족시켜준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잔치국수와 우동은 3천원, 비빔국수는 3천500원, 콩국수와 칼국수는 4천원. 여느 실비집과 달리 혼자 와도 술을 먹을 수 있게 했다. 주방 옆에 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바텐석도 마련했다. “요즘 솔로족이 흘러 넘칩니다. 그들을 배려한 겁니다.” 재밌는 문구에 굶주린 요즘. 그도 그 욕구를 반영하듯 벽에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글귀를 칠판에 적어둔다. ‘소원 게시판’도 마련했다. ‘마누라님, 애들만 좋아하지 말고 나를 좀 더 사랑해주세요.’ 이 문구가 여존남비세상을 실감케한다. 원산지 표시란에는 주인장, 주방장, 홀, 알바 모두 국내산이라 적혀 있다. ‘오늘 아침 동해 앞바다에 있었는데 여가 어딘교? 동해 참문어~’ 입구에 부착된 POP 글씨는 김 사장의 솜씨. 시간대별로 손님이 달라진다. 초저녁엔 50~60대, 늦은 저녁에는 30~40대, 심야에는 20대, 새벽엔 대리운전기사, 택시기사, 식당주, 야간업소 종업원 등이 단골이다. 오후 4시에 문을 열고 다음날 오전 6시 문을 닫는다. 좋은 고등어집을 찾는데 5년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지역 곳곳에 숨어 있는 50여 개 도매상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런 저력 때문에 5천냥이 가능하다. ◆공정 프랜차이즈 시대를 열고 싶다 그는 요즘 ‘황소개구리’처럼 지역 외식계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프랜차이즈문화에 반기를 든다. 그는 ‘공정 프랜차이즈’를 원한다. “유명 가맹점을 열려면 가맹비는 말할 것도 없고 3.3㎡당 300만원 이상하는 고비용 인테리어 때문에 다들 휘청거립니다. 2억~3억원을 투입해 월 1천만원을 벌어도 평균 2~3년 버텨야 하는데 그 시기가 되면 안타깝게도 유행시기도 끝나 흑자도산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는 앞으로 장기 불황이 예상되기 때문에 푸짐하면서도 저렴한 업소가 득세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절대 초기에 과도한 투자를 하지 말고, 인테리어도 가능한 한 자신이 직접 챙기라고 주문한다. “별의별 인테리어 기법이 다 쏟아졌습니다. 업자들은 자기가 인테리어하면 대박칠 거라고 장담하지만 최고의 인테리어는 주인과 직원, 그리고 손님이라고 믿습니다. 수천만원만 갖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점포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해보세요. 거기에선 돈보다 열정이 더 승부처죠.” 그는 형편이 되면 식재료를 공동으로 헐값에 구입할 수 있는 식재료창고도 운영하고 싶단다. 또 청년백수와 조기 은퇴자를 위한 ‘창업 인큐베이터’ 같은 것도 차려보고 싶어한다. 대구시 동구 효목동 509-1. (053)751-2778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8.22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백반정식집 이야기
세상사 단순·소박함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도 온갖 진귀한 오디오를 넘나들다가 끝내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식도락가가 미식가로 진화하고, 그 미식가가 오대양 육대주를 돌면서 온갖 산해진미에 통달해도 혓바닥은 만족 못하고 뭔가를 더 갈구한다. 혀가 평화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이 또한 미식가의 굴종이 아닐 수 없다. 혀가 더 맛있는 걸 찾으면 세계 최고 셰프도 그 입맛을 만족시킬 수 없다. 나그네식객은 결국 더 맛있는 게 아니라 ‘더 맛없는 길’로 접어든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만나는 접점에서 제대로 된 음식이 탄생된다. 바로 ‘집밥’이 아닐까. 그 집밥이 제대로 된 식당에 안착하면 그게 바로 ‘백반정식’이다. 고장마다 그곳만의 백반정식이 있다. 전북 전주는 전주비빔밥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전주식 백반정식을 한 상 받아봐야 한다. 요즘은 8천원 안팎에도 20가지 이상 곁반찬이 형성된다. 식도락 여행의 첫 단추는 바로 이 지역별 백반정식을 찾아나서는 일이다. 이 정식은 제주의 깊은 바위틈에 숨어 있는 다금바리처럼 여느 낚시질엔 좀처럼 낚이지 않는다. ◆ 프랜차이즈에 잡아먹히는 백반정식집 식재료는 모두 자신만의 색과 맛과 향기, 영양소와 영양분, 열량을 갖고 있다.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재료를 하나로 뭉쳐줄 수 있는 융화력을 갖고 있다. 그 융화력이 본연의 맛에 이르도록 하는 건 결국 불과 식재료의 혼합비율, 그리고 간과 향신료와 양념이다. 지역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척추 음식’이 있다. 한 나라에도 척추 음식이 있다. 한국은 당연히 한식(韓食)일 것이다. 한식도 팔도마다 그 자태가 다르다. 100년 이상 특정 지역에서 베스트셀러푸드가 되면 그게 ‘전통음식’이 되고, 일정 기간 반짝 사랑을 받고 있으면 ‘향토음식’에 포함된다. 그런데 갈수록 우리의 입은 ‘트렌디 푸드(Trendy food)’로 분류될 수 있는 각종 대박 난 프랜차이즈 메뉴에 목을 맨다. 이번 여름 부산에서 태어난 ‘설빙’이 단위 시간당 가장 많은 손님을 끌어모은 메뉴로 기록된다. 지난해 4월 부산시 수영구 남천동의 떡카페 ‘시루’에서 처음 선보인 설빙은 인절미설빙 등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한국디저트카페 신드롬’의 주인공이 된다. 이즈음 대구 유명 백반정식은 어디에 다 숨어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의 한식은 크게 백반정식과 한정식으로 양분된다. 한정식도 전라도 같은 한상차림파와 코스식 한정식파로 분류된다. 백반정식파의 손맛은 6·25전쟁 직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백반집 아줌마로부터 비롯된다. 이 아줌마 중 상당수는 한때 특정 언저리에서 ‘주모(酒母)’급으로 행세를 했다. 그 시절, 그래도 남존여비문화가 엄존했을 당시엔 지근거리에 시댁 식구가 포진해 있어 대놓고 눈 밖에 난 지아비의 행신에 대해 바가지를 긁기 뭣했다. 그냥 ‘은장도 버전’으로, ‘모름지기 참아야 하느니라’ 버전으로 응어리진 맘을 삭혀야만 했다. 풍류랍시고 나부댔던 지아비들의 한량놀음은 술과 음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던 ‘주막형 선술집’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 선술집엔 그 어떤 기질의 남정네도 단번에 촛농처럼 녹여버리는 주모가 ‘부적’처럼 앉아 있다. 평소 먹고 싶은 반찬도 그 주모는 단번에 해결해준다. 소 팔고 남은 돈이 얼마인지 그 주모는 단번에 알아버린다. 어물전에서 사 온 고등어도 술안주로 둔갑해버린다. 낮부터 시작된 낮술행진은 근처 지인이 송사리 떼처럼 몰려들면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길 경우에는 1주일도 서슴지 않았다. 속이 탄 아내는 아이를 술집에 보내 지아비를 귀가토록 종용한다. 주종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안주가 올라온다. 주모는 못하는 음식도 못 부르는 노래도 없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대령해야만 한다. 하지만 주모문화는 ‘핵가족문화’에 잡아먹혀 버린다. 시댁에서 독립한 아내는 평소 독수리 같던 남편을 졸지에 ‘참새’의 행색으로 반죽해버린다. 손님이 들지 않는 선술집, 그 시절 그 주모는 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바로 ‘백반정식집’이다. 여긴 대표메뉴가 없다. 주면 주는대로 먹어야 된다. 그게 매력이다. ◆ 태화식당 할매를 찾아서 대구시 중구 인교동 오토바이 골목 중간에 있는 태화식당. 날렵하고 모던한, 노출 콘크리트조 레스토랑 문화에 젖어 있는 네티즌에겐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낡고 불편하고 누추한 공간으로 다가설 것이다. 그런데 50대 이상 장·노년층에는 ‘기립박수’감이다. ‘대구 백반의 명맥을 잇는 마지막 식당’으로 사랑받는다. 풍류절정의 문풍(文風)을 날리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의 사각지역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풍류식객 겸 수필가인 구활씨가 이 집을 소개했다. 이후 기자도 단골이다. 대구 서민밥상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미식가가 오면 어김없이 데려간다. 다들 세 번 놀란다. 직원 한 명 없이 할매 혼자서 모든 걸 다 해결한다는 것에 놀라고, 문을 열고 단 한 번도 리모델링하지 않아 낡을 대로 낡은 실내 정경에 또 한 번 놀라고, 마지막엔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국물 맛과 마치 사위 대하듯 마구 내주는 옹골차고 손맛 가득한 곁반찬의 행렬에 놀란다. 금호 할매는 이름을 싫어한다. 몇 번 물어도 대답을 안 한다. 영천시 금호가 고향이라서 그냥 ‘금호 할매’라 한다. 지역 백반집 중에선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구식 한정식 전문점은 34년 역사의 중구 삼덕동 청맥식당(한정식)이다. 경주 출신인 김정숙 사장도 ‘욕쟁이 할매’로 불린다. 이 집은 다른 집에선 보기 힘든 팥잎 요리로 유명하다. 이 밖에 원대동 자갈마당식당(복어), 수성보건소 골목 안 가덕식당(콩나물비빔밥), 중구 대봉동 청산식당(청국장), 동구 신천동 거창식당(어탕국수), 고령식당(된장찌개), 동대구역전시장 안 할매식당(동태탕) 등도 주인 손맛이 담긴 밥상이다. ● 인교동 오토바이골목 중간 ‘태화식당’ 대구 백반의 명맥 잇는 마지막 가게 주인 할머니 혼자 요리·서빙·설거지 사위 대하듯 후하게 내주는 반찬행렬 50대 이상 장·노년층 식도락가 줄 서 금호 할매는 너무나 억척스럽다. 일이 곧 쉼이고 놀이다. 50여년 쉬는 날도 없고 그 흔한 영화도, 그 흔한 해수욕장 같은 데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현재 자리로 오기 전에는 현재 덕영치과 입구 대로변에 있었는데 그때는 직원이 5명이나 있었다. 줄 서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대박집이었다. 생선찌개·매운탕·낙지볶음으로 소문이 났다. 12년여 전 여기로 이사를 와서는 경기도 예전 같지 않아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요리에서부터 서빙·설거지까지 도맡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귀찮아 집에 가지 않고 식당 한편에 방석을 깔고 잔다. 일어나면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에서 그날 사용할 대구, 아귀, 도루묵 등 제철생선을 장만해 온다. 손이 저울이다. 대충 주물럭거렸는데 식감은 맘껏 부푼다. 기분이 좋으면 꼭 단풍을 손에 쥔 여고생처럼 배시시 웃으며 독백톤으로 ‘인생사 다 그런 것 아니냐’는 푸념식 신세타령이 이어진다. 단골도 다 비슷한 인생의 강을 건너고 있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태화에는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다. 다 손님이고 다 주인이다. 그래서 신경림의 시 ‘농무’의 한 대목처럼 더없이 정겹다. 할 말만 하고 요리할 땐 한없이 무뚝뚝해 욕쟁이 할매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전국에 적잖은 욕쟁이 할매가 있다. 대표 격은 신분을 감춘 박정희 대통령에게 꼭 박정희처럼 생겼다고 인정 어린 욕을 한 전북 전주 콩나물국밥 명가 삼백집의 이봉순 할매, 전남 순천 별량시장 삼거리에 있는 욕보할매집의 이정남 할매, 문경새재 초입 할매집의 황학순 할매, 울산시 대안동 신흥다리 근처 울산 욕쟁이 할매, 서울 성북구청 후문 돈암성당 옆 우렁밥으로 유명한 신신식당의 욕쟁이 할매, 안동시 용상동 복개시장 끝 지점에서 매일 군복만 입고 있는 안동 군복 할매 등이다. ‘항상 기운이 없어 보이는 저 금호 할매가 세상을 떠나면 어느 집에서 저런 맛을 찾을 수 있을까’ 다들 금호 할매를 걱정한다. 숱한 기자가 취재를 하고 싶어 했지만 모두 불발이었다. 기자도 물먹었다. 생각해보니 취재 자체가 ‘언폐(言弊)’였다. 파워블로거가 사진을 찍으려 하면 정색하면서 ‘사람 얼굴 함부로 찍지 마라’고 경고한다. 허락받지 않았지만 태화의 눅눅한 얘기를 적고 싶었다. 금호 할매도 이해할 것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8.1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하)삼겹살 이야기
스테이크처럼 두툼한 ‘두꺼운 삼겹살 왕소금구이(이하 두삼)’ 시대다. 두삼 신드롬의 진앙지는 제주시 노형동 ‘돈사돈’. 여기서 ‘제주도 생근고기 특수’가 일어난다. 2005년쯤 문을 연 돈사돈은 2009년 방영된 강호동의 ‘1박2일’에 소개되면서 초대박을 친다. 돈사돈은 보라색 ‘제주 흑’ 검인이 찍힌 제주도 흑돼지를 추자도 멜젓(멸치젓갈) 소스에 찍어 먹게 한 게 성공 포인트. 가스와 참숯 대신 1960~70년대 제주도 토박이들이 즐기던 연탄불구이를 부활시켰다. 드럼통 테이블을 사용해 일명 ‘깡통근고기’로 불렸다. 제주도에선 두삼을 일명 ‘근고기’라 하는데, 통상 한 근 단위로 팔린다. 영농법인 길갈축산 오영익 대표는 “제주도 토박이는 원래 돔베(도마)수육을 즐기지만 구이 문화도 60년대부터 존재했다가 10여년 전부터 근고기구이 붐으로 활성화됐다”고 말했다. 돈사돈이 대박이 나자 제주공항 근처인 노형동엔 동시에 1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빌딩형 근고기 전문식당이 들어선다. 2011년 문을 연 ‘늘봄’, 바로 옆에 ‘흑돈가’가 마주보고 선다. 이 둘은 ‘빌딩형 근고기 집’시대를 열었다. 이와 함께 제주시 건입동에 ‘흑돼지 거리’가 생기고, 20여개 업소가 들어선다. 제주도 근고기 붐은 대구 돼지구이 시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돈사돈의 허락도 없이 유사상호로 체인사업을 한 모 브랜드는 현재 법정소송에 휘말렸다. 참고로 돈사돈은 체인사업을 하지 않는다. 현재 제주도에선 제주 흑돼지를 엄격하게 관리한다. 육지의 돼지고기도 반입금지다. 대신 도축된 돼지고기의 65% 정도가 육지로 흘러들어간다. 제주 흑돼지 공동 브랜드인 ‘흑다돈’까지 탄생했다. 현재 인증점은 전국에 모두 24개소. 아직 대구에는 유통되지 않는다. 현재 제주도 흑돼지를 키우는 양돈가는 모두 302개 농가. ‘제주 재래 흑돼지’로 불리는 ‘똥돼지’도 350여두 사육되지만 육질이 질겨 그다지 사랑은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제주 흑돼지는 제주시 애월읍 도축장에서 하루 3천200여두 도축된다. 이젠 ‘돈’ ‘근고기’ ‘제주’란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손님이 외면할 정도. 그러니 비슷한 상호가 난립할 수밖에. 돈사돈과 비슷한 돈앤돈, 돈육돈, 한돈시대, 미스돈, 정행돈, 농협목우촌 미소와돈 등이 지역에서 기싸움을 하고 있다. 이 밖에 맛찬들 왕소금구이, 솔낭구, 존슨식당, 고령불 등도 자기만의 구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특이한 불판도 등장했다. 대구시 동구 동촌 구름다리 옆 농협목우촌 미소와돈은 특이하게 피아노선 불판을 사용한다. 대구시 남구 대명동 옛 계명전문대 돌계단 맞은편에 있는 고령불은 기존의 숯불직화구이의 단점을 보완하고 바비큐의 장점을 어느 정도 살려 원적외선 돌을 깔고 그 위에 석쇠를 올린, 덜 타는 이중불판을 사용한다. ◆ 맛찬들…3.5㎝ 왕소금구이 탄생하다 2007년 대구시 북구 서변동 월드메르디앙 아파트 근처에 문을 연 맛찬들 왕소금구이. 본점에 이어 최근 범어네거리 그랜드호텔 서쪽 골목에 직영점을 낸 이동관 대표는 여느 구이집에선 좀처럼 시도하지 못한 구이 방법을 고안해 내고 특허 불판까지 만들었다. 1988년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 그는 경남 창녕 부곡 로얄호텔에서 스테이크를 구웠다. 제대한 뒤 우방랜드, 용인 에버랜드, 핀외식연구소 등을 거쳐 12년 전 북구 서변동에서 정성축산을 차린다. 5년간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본질에 대해 파고든다. 당시 삼겹살을 먹으면서 육즙을 느낀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는 돼지 육즙을 맛보려면 반드시 일정 두께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시 좀 두껍다 해도 1.2~1.5㎝ 정도. 하지만 그는 2㎝부터 조금씩 두께를 올리면서 4㎝까지 구워봤다. 결국 3.5㎝가 구이용으로 가장 좋은 맛을 내는 두께라는 결론을 내린다. 좋은 맛을 위해선 일단 불판의 온도가 중요했다. 불판 온도를 재는 온도기까지 투입했다. 기본 220℃에서 시작해 310℃에서 굽기를 마쳤다. “양식당에서 사용하는 저만의 그릴링 기법을 도입했습니다. 숙달된 직원이 4분30초 정도에서 굽기를 마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고기를 불판에 올려 겉면에 핏물이 감돌고 윤기가 나면 뒤집어 굽고, 즉시 먹기 좋게 가위로 잘라줍니다. 손님에게 맡겨두면 20분이 지나야 한 점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두 달 정도 고기 굽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는 고기 숙성에 대한 상당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얼마 전 채널A ‘이영돈의 먹거리 X파일’에 출연해 저등급 쇠고기를 잘 숙성시켜 1등급 마블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비결을 선보였다. “보통 영하 1℃에서 쇠고기는 25~35일, 돼지고기는 14일 숙성시켜야 정말 제대로 된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오래 숙성시키면 육질이 물러지죠. 3일 정도의 사후경직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숙성이 시작되죠.” 이 집 불판과 화로는 구조가 좀 특이하다. “저는 기름이 절대 숯에 떨어지지 못하게 기름이 숯 밖으로 떨어질 수 있는 특허불판을 만들었습니다. 기름이 타면 유독성 물질이 고기에 전달됩니다. 집연할 때의 흡입 공기가 육즙을 건조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별도의 철제 덮개를 화로 옆에 덧씌웠습니다.” 반찬도 음식궁합에 맞도록 여수갓김치, 동치미, 과일이 들어간 콩나물겉절이, 묵은지, 꼬시래기 등을 낸다. (053)939-9779 ◆ 존슨식당…연탄불에 초벌, 참숯에 재벌구이 2012년 6월 대구시 남구 이천동에 새로운 버전의 제주 근고기 전문점 하나가 탄생했다. ‘존슨식당’이다. 식당 주인은 현직 건축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는 우연히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해 고깃집을 오픈한다. 디자이너와 돼지고기 집, 뭔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그가 ‘기본기의 성공담’을 알려준다. “음식 솜씨는 없어도 식재료에 대한 정도(正道)만 지키면 기본은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지역 파워블로거 사이에 꽤 인정을 받고 있다. 600g에 3만6천원. 정말 ‘한 근’고기다. 초벌할 때 어른 주먹만 한 덩어리 고기를 연탄불에서 굽는다. 두께가 족히 4㎝는 될 것 같다. 주인은 이 정도 두께라야 제대로 육즙이 형성되고 절정의 돼지고기 맛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100~150g에 익숙한 손님은 주인의 그런 설명을 곡해하기도 하지만 나중엔 다들 근고기를 선호한다. 그도 처음 몇 달간은 돈사돈의 특수행렬에 가세했다. 아무리 제주도 고기가 좋다고 하지만 매일 육질이 달라져 실망했다. 비싸지만 제대로 된 제주 흑돼지를 수소문했다. 이런저런 유통상한테 고기를 받아봤다. 모양은 그럴듯했지만 구워보니 푸석했다. 현재 그는 한라축산유통을 통해 상급 흑돼지를 받아 사용한다. 1㎏ 기준, 일반 백돼지는 1만9천500원 선인데 제주 흑돼지는 2만4천원 이상. 새로운 굽기방식을 시도했다. 연탄불과 참숯을 동시에 이용한 것. 오후 3시 출근한 찬모가 너무 뜨겁지 않은 중불 정도의 연탄불에서 10분 남짓 초벌구이를 하고, 이후 식탁으로 갖고 와 고온의 불판에서 다시 5분 정도 구워준다. 여느 집에선 미리 썰어놓은 고기가 10분 이상이 되면 과자처럼 바싹거리지만 여기는 식어도 육즙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식감은 꼭 쇠고기 스테이크. 근고기에는 어김없이 멜젓이 붙어 다닌다. 하지만 지역에서 고가의 추자도 멜젓을 그대로 사용하는 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원가 때문에 상당수 육지의 멸치젓을 제주 멜젓으로 속여 내기도 했다. 그는 한 말에 4만여원짜리 추자도 멜젓을 사용한다. 멜젓에 한라산 소주를 넣고 고추·마늘·고춧가루를 넣어 구이용 소스로 빚는다. 1년 이상 숙성된 걸 세 달에 한 번 주문해 사용한다. 목살은 멜젓, 비계 부위는 갈치속젓에 찍어먹도록 한다. 케첩에 고추냉이를 섞어 아동용 특제 케첩도 만들었다. 육질은 새로운 맛의 탄생이라고 할 정도로 빼어나다. 원래 존슨식당은 서울 이태원에 있는 부대찌개 전문점. 이 집도 부대찌개를 잘 끓이는데 사골육수 대신 멸치육수로 끓이며, 일명 ‘존슨탕’이라 한다. 1만2천원. 둘째·넷째 일요일은 휴무. 남구 이천동 297-10 (053)471-9295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8.0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상)삼겹살 이야기
돈철살인(豚鐵殺人)! 돼지고기 얘기를 하자니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난다. 그 시절, 그러니까 쇠고기가 산삼보다 더 귀하던 시절, 대구는 돼지찌개와 돼지두루치기의 본산이었다. 유조선 사고 해역을 떠다니는 두꺼운 기름띠 같은 돼지기름, 잘 정리되지 않아 비쭉비쭉 올라온 검은 돼지털, 요즘 사람들에겐 혐오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허기가 일상이 된 그땐 돼지고기 한 점이 죽은 세포를 벌떡 깨우는 가공할 만한 파워를 갖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서민의 기력을 깨우니 그것이 바로 ‘돈철살인’이 아니고 뭘까? 돼지고기만큼 숱한 얘기거리를 가진 음식도 드물 것이다. 농경사회 때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연결해주는 ‘통과의례육(通過儀禮肉)’이었다. 각종 고사는 물론 기제사, 향사 등엔 으뜸 제수였다. 무속인에겐 영험한 식재료였다. 오줌보는 축구공 대용이었다. 예전에 소는 도축금지 대상이었다. 그래서 평생 쇠고기국 한번 못 먹고 죽은 민초들도 많았다. 대신 개·돼지가 가장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고기였다. 중국과 제주도는 돼지를 최고의 고기로 추앙한다. 특히 제주도에서 쇠고기는 최악의 고기로 받아들인다. 대구에서 유명한 갈빗살집도 거기로 건너가면 채 1년을 못 견디고 문을 닫을 것이다. 쇠고기 정육점도 거의 몰살지경이다. 오직 돼지만이 귀하신 존재다. 제주도에선 3일 이상 진행되는 잔치 때 돼지 삶은 육수에 몸(모자반)과 메밀가루를 넣고 매생이처럼 걸쭉하게 끓인 ‘몸국’을 제1의 전통음식으로 섬긴다. 잔치국수도 돼지를 끼고 돈다. 멸치육수 대신 사골육수를 사용해 중면을 넣고 그 위에 토핑처럼 삼겹살을 도리뱅뱅이처럼 돌려놓는다. 전북 진안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독특한 돼지요리를 해먹는다. ‘애저(哀猪)요리’다. 흔히 ‘돼지새끼집’을 애저라 한다. 애저를 한자로는 ‘아저(兒猪)’라고 한다. 일찍 희생되는 아주 어린 새끼돼지가 너무 애석하다는 뜻으로 슬플 哀(애) 자를 써서 애저라고 한다. 그런데 애저요리 중 가장 별스러운 스타일이 제주도 한 시장 안에서 팔리고 있다. 새끼를 꺼내 믹서에 갈아서 고춧가루, 깻가루, 김, 생강, 잔파, 참기름, 미나리 등으로 갖은 양념을 한 후에 계란 노른자와 식초를 넣어 조리한 ‘애저회’다. 암퇘지는 보통 임신 4개월이면 분만을 하게 되는데, 전라도의 애저는 생후 2개월 미만의 새끼돼지를 쓰지만 제주도는 뱃속에 들어 있는 2개월 내지 3개월의 태아를 쓴다. 이 무렵의 새끼는 돼지의 형태를 어렴풋이 갖추기는 했으나 아직 뼈가 굳지 않고 돈모가 자라지 않은 연한 상태다. 양념이 되어 대접에 담긴 발그스름한 반 액채 상태의 회다. 양이 적어 애저 한 마리는 성인 남성이 두 모금이면 마셔 버린다. ◆ 돼지수육의 메카, 서성로 돼지골목 경상도는 타 지역에 비해 유별스럽게 돼지요리를 즐긴다. 대구의 경우 광복 직후부터 70년대 후반까지는 돼지수육 전성시대였다. 수육과 함께 눌린 돼지머리도 인기였다. 삶아 흐물흐물해진 돼지머릿살을 모두 발라내 네모난 곽에 넣고 상어 피편처럼 눌러 만든 것이다. 50년대부터 중구 서성로는 돼지골목으로 유명했다. 서성로 돼지고기집은 50~60년대 1기, 70년대 생겨난 2기 식당으로 나눌 수 있다. 1기 대표주자는 서성식당(주인 정순연씨)이다. 그다음 순대, 수성, 김천, 대구 등 5개 식당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장사를 했다. 대구식당은 이후 밀양식당이 돼 지금 골목 초입을 당산목처럼 지키고 있다. 현재 8번식당과 이모식당이 가세 서성로 3인방 돼지집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76년 오픈한 8번식당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 고향인 합천을 방문할 때 이 집 고기를 갖고 가면서 유명해진다. 돼지국밥 역시 경상도가 메카다. 경북보다 경남이 더 전통이 짙다. 대구는 원래 돼지국밥이 대세가 아니었다. 경남 밀양 무안군의 동부식육식당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어 전국 돼지국밥 1번지로 불린다. 그런데 돼지국밥이 대박이 난 건 부산이다. 부산역 앞 초량 차이나타운 근처 ‘평산옥’, 서면 롯데호텔 뒤편 ‘송정돼지국밥’, 구포시장 근처 ‘덕천고가’ 등이 부산 돼지국밥의 명가로 군림한다. 이에 반해 중부 지방은 돼지국밥은 별로 인기가 없고 대신 병천순대 등 순대국밥이 강세다. 순대국밥도 처음에는 수애(제주식 순대)처럼 창자 안에 돼지피만 넣었다가 나중에 찹쌀과 당면 등이 들어간다. 현재 대구의 돼지국밥은 봉덕시장과 명덕시장, 그리고 대명동 파크맨션 근처 ‘파크 돼지국밥’, 달서구 용산동 ‘고령돼지국밥’, 앞산네거리 근처 ‘밀양돼지국밥’, 염매시장 초입의 ‘선산돼지국밥’ 등이 대표 격으로 뛰고 있다. 70년대 대구에선 특이하게 돼지수육과 칼국수가 세트메뉴로 결합된다. 그러면서 노보텔(옛 국세청) 옆 골목에 암뽕(돼지자궁)칼국수 거리가 형성된다. ◆ 삼겹살의 화려한 진화 돼지요리는 이 정도에서 진화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70년대 정말 다양한 고기 메뉴가 혈전을 벌인다. 동인동찜갈비, 대신동 쇠갈비, 불고기, 북성로 돼지불고기우동, 삼겹살, 돼지갈비, 돼지불고기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출시된다. 70년대 초 대백 바로 옆에 있는 원산면옥에서 삼겹살 구이가 등장한다. 양은 도시락 뚜껑에 1인분씩 썰어내 와 구워 먹게 했다. 이 흐름과 맞물려 다양한 돼지고기 요리가 등장한다. 60년대 ‘계산땅집’에서 발흥한 불고기 여파가 ‘돼지불고기’로 이어진다. 현 노보텔 뒤편에서 오픈한 ‘팔군식당’은 대구에서 맨 처음 돼지불고기 시대를 연다. 삼겹살보다 저렴한 다릿살에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만들었다. 78년 의성 출신 황희순씨가 남구 대명1동 현 남구 CATV 자리에서 ‘대원돼지숯불갈비집’을 연다. 대구 첫 돼지갈비구이집이다. 이 흐름을 이어받은 건 남부정류장 근처의 ‘미정’, 달성파출소 옆 ‘마당갈비’ 등이다. 이게 80년대로 넘어오면서 들안길 ‘서민숯불갈비’ 시대를 연다. 흥미로운 사실은 돼지갈빗집이 거의 프로야구 출범 원년이었던 82년쯤 몰렸다는 점이다. 팔군의 아성을 접수한 건 82년쯤 북성로 기계공구 골목 한편에 포장마차형 원조돼지불고기 시대를 연 최진수씨다. 이에 앞서 칠성시장 내 함남·단골식당에서 돼지석쇠불고기를 탄생시킨다. 그 흐름을 역 이용한 건 82년쯤 남부정류장 맞은편에 문을 연 미정과 마당갈비. 두 식당 모두 한약재를 양념재료로 흡수한 게 특징이다. 물론 80년대 가장 번성한 돼지 메뉴는 단연 ‘삼겹살’. 90년대 중반 콜드체인시스템(냉장유통체제)가 본격화되기 전에 돼지고기는 항상 조심해서 먹어야 될 음식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위생적 도축과 유통이 완비되지 않아 항상 돼지고기는 바싹 구워 먹어야 안전하다는 게 일반인의 인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삼겹살집은 냉동 대패삼겹살이 주종이었다. 쿠킹포일을 깔고 그 위에서 삼겹살을 구웠다. 그런데 그 어름 북구 3공단 내 명성불고기집에서 돼지기름을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바로 불판 한쪽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 생삼겹살 시대의 개막 90년대 초반으로 넘어오면서 기능성 삼겹살 시대로 넘어간다. 와인, 고추장 등 양념에 잰 ‘숙성 생삼겹살 시대’가 개막된다. 이어 호동이, 호박터 등이 1인분 2천원짜리 양념돼지갈비 시대를 연다. 그 흐름과 함께 IMF 외환위기 직후 고향솥단지생삼겹살 시대가 열린다. 고향솥단지는 원래 서울에서 시작됐지만 이걸 2002년쯤 대구에서 수입해 더욱 꽃을 피운다. 기존 네모난 불판 시대를 종식시키고 고향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솥뚜껑을 불판으로 등장시켰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 냉동삼겹살은 퇴조하고 생삼겹살 시장이 본격화된다. 고향솥단지는 이를 역이용하면서 기존 곁반찬으로 내던 걸 과감하게 삼겹살 옆에 매칭시켰다. 묵은지, 콩나물, 호박, 햄, 가래떡까지 올려 이보다 더 푸짐하고 재밌는 삼겹살 차림은 없을 것 같았다. 200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삼겹살 두께가 더 두꺼워지고 더욱 새로운 육질과 맛을 위해 별의별 테크닉을 다 구사했다. 고기를 더 빠른 시간 내 더 맛있게 골고루 익히기 위해 칼집을 십자 모양으로 넣었다. 그 모양이 꼭 벌집 같아 ‘벌집삼겹살’로 불렸다. 대박이었다. 이어 피자처럼 300℃ 가까운 고온의 화덕에서 피자처럼 빨리 구워내는 ‘3초삼겹살’도 강력한 세를 유지했다. 2005년 무렵 제주도에서 새로운 삼겹살 문화가 형성된다. 제주 ‘근고기’ 문화이다. 제주도에선 100g 식으로 팔리는 게 아니고 한 근 600g을 기준으로 고기가 팔렸다. 한 근 삼겹살을 현지인들은 근고기라고 했다. 거기선 삼겹살보다 주로 목살이 많이 팔렸다. 제주도 흑돼지는 제주도 똥돼지의 연장선상에서 팔렸다. 초창기 제주도에선 오분자기뚝배기, 갈치 요리 등이 대표적 관광음식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주흑돼지근고기가 대세였다. 제주도 표선면 성읍민속마을의 가시식당 등은 돼지두루치기구이가 대박을 낸다. 고추장에 재어놓은 고기를 구워서 삶은 고사리와 함께 먹는 방식이다. 그런데 1박2일에서 제주시 노형동 돈사돈 고기를 소개했다. 이게 대박을 친다. 나중에 늘봄, 칠돈가 등은 빌딩형 삼겹살집으로 인기를 얻는다. 제주도 삼겹살은 기존 경상도 삼겹살보다 훨씬 두꺼웠다. 제주도 삼겹살 신드롬이 3년 전쯤 대구에 상륙한다. 기존 양념돼지갈비는 물론 얇은 삼겹살 시대가 된서리를 맞게 된다. 물론 이런 가운데도 1인분 1천500원짜리 ‘삼겹사랑’이 반짝 붐을 일으켰고 수입 갈빗살을 1인분 4천원에 파는 뒷고기도 선방을 한다. 대구에선 돈사돈, 돈앤돈, 제주포크 등이 두꺼운 목살구이 시대를 연다. 이젠 그 흐름이 지역 삼겹살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다음 주에는 두꺼운 왕소금구이 삼겹살 명가인 맛찬들, 존슨식당, 양군팩토리, 고령불 등 지역 두꺼운 삼겹살 전문점의 깊숙한 얘기가 이어진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7.2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지역 레스토랑 긴급진단
한때 대구에서 가장 시설이 좋았던 프랑스 레스토랑 ‘세페우스’. 시내 2·28공원 바로 옆에 있었던 이 레스토랑은 2006년 문을 열 무렵 지역에선 가장 럭셔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1980년대 중반 현재 시내 금곡삼계탕 자리에 문을 열었던 프랑스 레스토랑 ‘아비뇽’ 못지않은 호화로운 출발이었다. 김훤자 사장은 대구에서 가장 좋은 레스토랑 시대를 열겠다면서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현지에서 상아빛 고급 대리석을 수입해 벽체를 치장했다. 천장에도 궁중풍 벽화를 그렸다. 메인 셰프 3명을 서울의 최고급 오너셰프에게 보내 제대로 된 요리술을 배우게 했다. 1인분 10만원 시대를 열었다. 김 사장은 제대로 된 메뉴라인을 형성하기 위해 식자재도 대량 서울에서 공수해 왔다. 당시 대구에서 괜찮은 식재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전 재료의 70%를 서울에서 갖고 왔다. 처음엔 대학총장, 의사, 교수, 기관단체장 등이 단골로 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 고가 메뉴를 먹을 오피니언 리더가 보이지 않았다. 적자가 누적됐다. 결국 2년 전에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았다. 이를 안 마니아들은 ‘대구에도 이런 레스토랑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라면서 모두 아쉬워했다. 모두들 싸고 맛있는 메뉴 선호 저가 혼합치즈·조미료 등 남용 웬만한 레스토랑 맛 거의 비슷 고급식당 식재료·인건비 압박 고액 임차료 겹쳐 폐업 불보듯 어렵게 김 사장과 전화통화가 됐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동안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제 레스토랑에 대한 꿈은 완전히 접었습니다. 대구에서 고품격 레스토랑은 아직 시기상조란 생각이에요. 고급 레스토랑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한 지역의 명물이란 인식을 가지지 않는 한 대구에서 국제적 레스토랑을 갖추기 힘들 겁니다. 우리 집이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잦았어요. 왜 비싼지에 대한 분석은 없죠. 그냥 다른 집보다 비싸다고 해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메뉴와 분위기, 서비스를 갖춰놓아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단골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죠. 대구는 인맥 중심이고, 소문 중심이고, 비교 중심이니 프로는 더더욱 이 바닥을 못 견디죠.” ◆ 지역 유명 레스토랑의 줄도산 세페우스의 폐점 후유증이 채 가시기 전에 한때 대구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프랑스 레스토랑이었던 TBC대구방송 바로 남측에 있는 ‘더 파리스(The Paris)’도 최근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대구에서 미국 뉴욕 맨해튼급 전망을 자랑하는 고품격 레스토랑 시대를 열어보겠다던 양근석 사장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려고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양 사장은 이전에 20~30대 양식 마니아로부터 대구에서 가장 캐주얼하면서도 귀족스러운 인테리어 레스토랑으로 손꼽혔던 두산오거리 근처 ‘라 벨라 쿠치나’도 경영했는데 이것 역시 갈무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매각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내 동성로에서 실력파 레스토랑이자 가격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은 레스토랑으로, 특히 대구에 살고 있는 외국인한테 인기 짱이었던 ‘디종’도 문을 닫아버렸다. 지역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좋은 재료를 쓰는 만큼 가장 비싼 스테이크 시대를 열겠다면서 열정의 행보를 보여주었던 대구 어린이회관 근처 ‘테이블 13’의 홍재만 오너셰프도 올해 폐업을 해버렸다. ◆ 국제급 레스토랑 없이 국제도시 어려워 현재 대구는 메디시티(Medicity)로 치닫고 있고 내년에 세계물포럼 대회를 앞두고 있다. 또한 대구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 수는 1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들을 겨냥해 다양한 양식당(올해 6월 말 기준 1만9천369개 회원업소 중 양식당은 모두 259개)이 포진해 있지만 실제 영업구조와 식당의 규모 및 서비스 수준을 감안하면 이들의 미래가 암담하기 이를 데 없다. 현재 자기 건물에 입주하지 못하고 고액의 임차료를 내고 있는 레스토랑은 장기적으로 폐업을 강요당하고 있다. 대구 양식당 셰프 중 최고참급인 앞산순환도로상에 있는 뷔페식 레스토랑 ‘르네상스’의 김영수 사장, 25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수성구 범어동 프랑스 레스토랑 ‘아트리움’의 김동환 사장, 중구 대봉1동 신라갤러리 부속 ‘신라 유기농 이탈리안 레스토랑’ 박수진, 미국식 캐주얼 레스토랑의 선두주자인 옛 수성하와이 옆 ‘뉴욕뉴욕’의 박세환 사장, 치과 의사를 그만두고 한국형 레스토랑의 신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팔공산 파계사 아랫동네에 둥지를 튼 ‘나무 906’의 박윤옥 사장, 2009년 포멀 갤러리 레스토랑의 기치를 내걸면서 대구 스타디움 근처에 생긴 ‘누오보’ 최영범 사장 등은 자신이 레스토랑 건물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래도 난관을 버텨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럼 절벽으로 내몰린 레스토랑이 어떤 승부수를 던져야 할까. 올해 22년째 셰프의 길을 걷고 있는 남정율 셰프. 춘천시 최고급 레스토랑 ‘산토리니’, 스파밸리 부속 레스토랑 ‘그린비’, 팔공산 ‘선빌리지’, 수성구 범어동 ‘테라짜 인 시티’ 대봉동 ‘셰프 엔’ 등을 거친 뒤 최근 수성구 김대건성당 근처 유기농 레스토랑 ‘비채’의 셰프로 있는 그가 지역 레스토랑 업계의 현주소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가장 좋은 레스토랑이 대구에서 존속하기 힘든 이유는 일단 손님들의 성향을 분석하면 답이 나옵니다. 대구의 웬만한 레스토랑 메뉴를 맛보면 거의 비슷합니다. 조리사의 요리 솜씨가 비슷해서 그럴까요? 절대 아닙니다. 싸고 많이 팔리는 메뉴를 선호하다 보니 저가의 비슷한 식재료를 구입해 오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요. 바로 손님입니다. 정말 좋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버팔로치즈의 경우 7천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5천~7천원 저가 파스타 만들 때 이런 재료는 절대 사용 못합니다. 생 버팔로치즈의 반값밖에 안 되는 냉동 버팔로치즈를 코스트코 같은 대형 식자재 코너에서 사옵니다. 거기에 저가 국산 혼합치즈류 등을 넣으면 어느 집에 가나 맛이 비슷해요. 요리에 더 자신이 없으면 치킨파우더, 화학조미료 등을 뿌리겠죠. 그럼 고급 식재료와 저급 식재료를 분간할 수 없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안 좋고 맛에 둔감한 20대는 다들 어디로 가겠어요.” 그가 꽤 비싼 메뉴로 알려졌지만 실은 고품격이라고 평가받는 메뉴인 ‘더 셰프 파스타’의 원가를 공개했다. 횡성한우 안심 80g은 5천원, 버섯류(표고, 양송이, 느타리버섯)는 800~1천원, 생크림 120㏄는 1천원 선, 고르곤졸라치즈 20g에 600원, 각종 채소류는 300원, 유기농 파스타인 이탈리아 그라노로 110g은 400원. 코스를 시키면 유기농 녹즙, 수제 양파바게트와 호두곡물빵, 프로슈토와 카프레제, 살아 있는 전복 구이, 산 문어, 수프, 초콜릿 무스와 마카롱, 커피 등이 따라 나온다. 이 모든 걸 2만9천원에 판다? 이익은 어느 정도일까. 정가의 15%를 넘지 못한다. 예전에는 30%를 넘었는데 이젠 치솟는 식재료비, 인건비, 신용카드 결제 등으로 수익률은 10~15% 남짓.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대구 레스토랑 변신을 위한 제언 ‘그 메뉴에 그 메뉴’ 탈피하고 젊은세대 변화한 입맛 잡아라 대구의 레스토랑도 변신할 때가 온 것 같다. 현재 대구 레스토랑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면초가에 놓여 있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 같다. 1인분 10만원 이상의 풀코스 포멀 정찬을 원하는 수요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새로운 감각의 단품요리를 원하는 젊은 층의 욕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새로운 욕구의 손님을 다 놓치고 그냥 단골만 붙들고 있다. 분위기와 맛, 인테리어, 서비스 등을 놓고 볼 때 그 어느 것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맛은 기본이다. 그리고 이 바닥에 나온 셰프는 다 한 가지 맛을 갖고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 특별한 맛은 없다. 상당수 레스토랑족은 그곳을 생각하는 순간 ‘아, 거기!’란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독보적인 ‘색깔’을 원한다. 색깔을 원한다는 건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 공간의 소프트웨어를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레스토랑이 뭘 이야기하는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가 확실한 것이 색깔이 있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업자용 인테리어는 어딜 가나 비슷하니 특별한 감흥이 있을 수 없다. 여러 메뉴라인을 하나로 뭉쳐 내는 코스식은 너무 지쳐있다. 이미 시내엔 별의별 테마과일빙수가 득세를 하고 있다. 가볍게 식사하고 가족끼리 이런 데 모여 수다를 떤다. ‘투 섬 플레이스’는 몇 년 새 디저트카페 붐을 일으켰다. 빈스빈스 같은 곳은 와플 전문 카페로 특화돼 나오고 있다. 커피숍도 이젠 빵집과 카페, 뮤직홀을 합쳐 놓은 것 같다. 그냥 물에 물 탄 것 같은 추억의 메뉴만 앞세운 레스토랑은 최대 단골층인 20~30대의 변화한 입맛을 따라잡을 수 없다. ‘치맥 신드롬’을 이용한 멋진 테라스와 널찍한 홀의 치킨 호프바는 40~50대 단체모임 장소로 급부상하고 있다. 70~90년대는 그래도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디저트 라인이 먹혔다. 다른 데 그런 메뉴가 없어 장사가 괜찮았다. 이젠 레스토랑의 메뉴만 특화한 레스토랑 시대가 개막됐다. 차세대 카페형 레스토랑이 공룡 같은 레스토랑을 죽이고 있다. 산업사회형 레스토랑에서 벗어나 ‘정보사회형 레스토랑’ 시대로 건너가야 한다. 지역의 CEO들도 국제도시를 위한 레스토랑 만들기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린 아직 폼은 잡아도 품격은 부족하다. 세계 최고의 식재료, 최고가, 최고의 매니저, 최고의 시설은 흉내 내도 그 옆에 세상을 굽어볼 줄 아는 문화적 안목 가득한 총지배인과 감각 있고 세련된 홀서버의 지원사격이 없다면 더 이상 세계적 레스토랑도 없다. 이 원동력도 결국 그 레스토랑을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안목에서 나온다. 단품 메뉴 전문 레스토랑도 필요하지만 이 모든 메뉴를 원스톱으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종택 같은 레스토랑도 함께 발전해야 국제도시가 될 수 있다. 원가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싼 레스토랑만 찾는 지역의 CEO는 더욱 각성할 필요가 있다.
2014.07.1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 ‘돌고래’ 매운탕집 대표 이상숙씨
한국발 강촌 매운탕집의 역사는 사실 끝이 났다. 그 시절 매운탕집은 모든 식재료를 가능한 한 주인이 직접 해결했다. ‘자기표 맛’이 있었다. 경상도 매운탕은 ‘고추장맛’, 전라도 매운탕은 ‘된장맛’이 지배적이었다. 어느 날부터 강이 오염돼 사람들은 더 이상 강에서 직접 잡은 고기를 멀리했다. 양식장이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강촌 매운탕집도 자체 수족관을 갖게 된다. 식자재상을 통하면 사철 싱싱한 식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 대구도시철도 2호선 마지막 역인 문양역 근처에서 한국 매운탕 역사를 바꿔놓는 매운탕집이 탄생한다. 손중헌 논메기매운탕이다. 90년대 들면서 도심 곳곳에 메기매운탕 명가가 생겨난다. 예전에는 잉어와 붕어가 인기였지만 메기매운탕으로부터 습격을 당한다. 마을 토박이 손씨가 우연한 기회로 논메기매운탕을 개발하게 된다. 농가소득을 찾다가 메기 양식장을 차린 것. 유료낚시터에서 건져 올린 메기로 요리를 했다. 손씨는 매운탕 요리가 뭔지도 몰랐다. 그냥 촌스럽게 메기탕을 끓였는데도 낚시꾼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다. 나중에 영업 허가를 내 간판을 걸고 메기매운탕 영업을 시작한다. 현재 논메기매운탕마을 문산번영회도 생겼다. 부곡·문양리에 무려 30여개의 논메기매운탕집이 산재해 있다. 문양역 앞 청국메기매운탕 주인 최진곤씨는 90년대 초 지역에서 처음으로 전라도 양식 메기를 대구·경북에 유통시킨다. 70년대 이전까지는 강창이 대구 매운탕1번지. 70년에 강창교가 생기고 물이 오염되면서 매운탕 거점은 강 건너 달성군 다사읍 강정으로 옮겨간다. 금호·경산·다사·대동·대구·낙동식당, 부동댁 등이 전성기를 맞는다. 물론 화원유원지와 옥포 용연사 아래 옥연지 주변에도 매운탕집이 즐비하게 들어선다. 이 밖에 청천·동촌의 매운탕도 유명했다. 80년대 초중반 남구 대명동 즉결재판소 근처의 향어회 타운이 향어 붐을 80년대 말까지 끌고 간다. ◆ 옥연지 옆 매운탕촌 달성군 옥포면 기세리 옥연지. 일제 때 조성된 이 저수지는 벚꽃길과 용연사 등으로 인해 대구 인근에 숨어 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혔다. 특히 그 저수지에는 도서방, 옥포식당, 돌고래, 강창, 별천지, 만리장성, 물가식당 등 7개의 유명 매운탕집이 운집해 있었다. 하지만 2010년 12월 매운탕촌에 ‘비보(悲報)’가 날아든다. 한국농어촌공사의 옥연지 둑높이기 국책사업 때문에 매운탕집이 이사를 가야만 했다. 돌고래 매운탕집 딸인 이상숙씨(46). 그녀는 원래 매운탕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려고 했다. 유명한 화가가 되기 위해 대구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운명이라는 게 참 묘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매운탕집 딸이란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어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매운탕과도 인연이 멀어지는 줄 알았는데 결국 어머니의 대를 이어 2대 매운탕집 사장이 되고 말았어요.” “어렸을 땐 ‘매운탕집 딸’ 소리 너무 듣기 싫었죠” 나이 들며 운명이라 여겨 어머니 완고한 반대에도 식당 이어받아 새로운 도전 조미료 밴 ‘옛날 맛’ 대신 오랜 연구끝 굵은 소금 볶아 매운탕 본래 맛 되살려 옥연지 매운탕촌은 60년 어름 형성된다. 초창기엔 못에서 직접 그물로 고기를 잡아 탕을 끓여 팔았다. 80~90년대는 호황을 누렸다. 그런데 2000년대 전후 대구 도심 곳곳에 다양한 먹을거리가 생기면서 극도의 불황기를 맞기 시작한다. 하지만 82년 문을 연 그녀의 어머니(이정임)는 천직을 버리지 못했다. 특히 돌고래는 풍광이 빼어나게 좋았다. 하절기엔 거기서 윈드서핑까지 가능해 사진작가들에게 사랑받는 포토존이 되기도 했다. 후발주자였지만 2000년 이후 옥연지 매운탕촌에서 선두주자가 된다. 2013년 10월30일 돌고래도 문을 닫는다. 기세리에서 근처 반송리 59-2번지로 이전한다. 50년 넘은 매운탕촌은 숱한 사연을 남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옥연지 옆에는 길 건너에 자리한 옥포식당만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 매운탕 끓이는 미술학도 “이전은 어떤 면에서는 많은 장점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많은 고충이 따랐습니다.” 어머니는 몇 날 돌고래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한다. 식당을 접을까, 아니면 힘들어도 계속할 것인가. 어머니는 ‘여성이 감당하기 힘든 이 식당을 딸에게 물려줘선 안된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딸의 생각은 청년기와는 달리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릴 때 생각과 달리 어머니가 평생 매운탕을 팔아 자신을 양육하고 대학까지 보낸 그 일을 가장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운명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애정과 증오가 함께 녹아들어가 있었다. 2005년부터 이씨는 어머니를 옆에서 돕는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매운탕 맛과 제가 생각하는 것이 너무 달랐어요. 어머니는 맛을 내기 위해 자꾸 화학조미료에 의존했어요. 저는 제발 조미료를 넣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어머니는 그걸 안 넣으면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면서 조금이라도 넣으라고 했어요. 저는 어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안 넣은 경우도 많아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어요. 어머니 옆에서 이것저것 많은 걸 배웠어요. 도와준다고 해놓고 실은 제가 매운탕에 최면이 걸리고 있었던가봐요.” 어머니는 딸이 매운탕집을 이어받는 것에 결사반대였다. ‘유명한 화가가 되어야지, 무슨 매운탕집 사장이야.’ 하지만 결심이 선 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허허벌판에 새로운 식당을 지었다. 고생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해맑은 그녀의 자태를 보면서 다들 이전할 돌고래의 앞날을 걱정하기 일쑤였다. “장사하는 게 어렵다고 하지만 새로 집 짓는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더군요. 기존 세입자와의 갈등, 새로 이전할 식당에 대한 지인들의 지나친 참견, 맘대로 굴러가지 않는 실내 인테리어 등 하루에도 몇 번 식당을 그만둘까 싶더라고요.” 어떤 주민은 돌고래 상호가 너무 촌스럽다며 고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 상호에 자긍심을 갖고 옛 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 돌고래 로고도 만들고 상표등록까지 해뒀다. ‘매운탕 잘 끓이는 것도 결국 그림 잘 그리기와 진배없다’고 믿는다. 맘이 편했다. 비로소 각종 어려움이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섰다. 이젠 맛 하나로 승부가 나는 세상이 아니다. 자주 그런 기도를 한다. ‘손님 많게 해 주세요’란 기도 대신 ‘좋은 사람과 행복과 따뜻한 마음이 가득한 식당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양념과 조미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장과 직원의 ‘친절미소’라고 생각했다. 가족단위 손님을 위해 족구장도 만들었다. 돌고래의 전통이 주위의 빼어난 자연과 어우러지게 하려면 족히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머니는 솔직히 입맛만 즐겁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이씨는 제2대 사장으로 달라진 세상에 맞는 마케팅전략을 구사한다. 입은 물론이고 눈과 맘까지 즐겁게 해야 한다는 주의다. ◆ 나만의 매운탕 맛 찾아내기 그녀는 어머니의 매운탕 맛을 혁신했다. ‘선인도 시대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젠 과도한 화학조미료맛은 반드시 퇴출될 것이라고 믿었다. 매운탕 맛의 본질이 감칠맛이 아니고 담백함과 ‘흙내음(土香)’이 전면으로 나와야 된다고 봤다. 예전에는 칼칼하게 맵고 적당히 짠맛이 나면 잘 팔렸다. 이젠 그런 세대는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단골층은 다른 맛을 원할 것이다. 그래서 매운탕과 장어 요리에 이어 항암효과가 남다른 잎새버섯이 들어간 잎새한방백숙도 개발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아직 매운탕 맛은 계속 진화시켜야 된다고 본다. “메기의 기름기가 철마다 다르기 때문에 기름기가 많아지는 철에는 소스를 가볍고 담백하게, 기름기가 부족한 시기에는 조금 무겁게 간을 조정해야 됩니다. 단골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옛날맛’은 사실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맛이라고 봅니다. 옥연지뿐만 아니라 전국 대다수 매운탕은 이미 선택의 여지 없이 화학조미료가 전제로 된 감칠맛 매운탕 맛입니다. 저는 그것에 반기를 들고 싶어요.” 어머니는 매운탕 특유의 떫은맛을 잡기 위해 화학조미료를 즐겨 사용했다. 그녀는 조미료 없이 그 맛을 잡기 위해 여러 가지 시험을 해봤다. 굵은 소금을 볶아서 사용해 본 결과 화학조미료 없이 떫은맛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굵은 소금을 볶아서 모든 음식에 사용하고 있다. 기본맛과 비린내는 토종된장으로 잡으며, 매운탕 매운맛의 특성상 고춧가루만 많이 넣으면 텁텁할 수 있어 육수를 만들 때 청양고추, 마른새우, 밴댕이, 멸치, 표고버섯 등도 사용한다. 기자도 그 국물을 한 점 떠 먹어봤다. 경상도 매운탕이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뭐랄까, 전주시 한옥마을 옆 한벽루 매운탕촌의 오모가리(뚝배기)탕에서 느껴지는, 된장을 베이스로 한 토장국 같은 맑으면서도 묵직한 탕이었다. 일반 냄비 대신 뚝배기를 사용하면 더 진국일 것 같았다. 조금 더 라인을 다듬으면 제대로 된 경상도 버전의 전라도 뚝배기매운탕이 탄생할 것 같았다. 장어구이도 천편일률적인 간장소스 양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과감하게 고추장양념으로 선회했다. 직접 담근 고추장을 1년 이상 숙성시켜 사용한다. 요즘 쿨한 젊은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커피숍 오픈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결심은 자못 ‘독립군적’이다. (053)616-5577 옥포면 반송리 59-2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7.0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센세이션 일으킨 ‘음식강산’의 저자 식객 칼럼니스트 박정배씨
한국에는 적잖은 ‘나그네 식객’이 있다. 멀게는 최초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부터 거론할 수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음식칼럼니스트로 분류된다. 그가 1611년 지은 ‘도문대작’(屠門大嚼·푸줏간 앞을 지나가면서 입맛을 다신다는 뜻. 실제로 먹지는 못하고 먹고 싶어서 먹는 흉내만을 내는 것으로 자족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에는 전국의 특산품과 명산지에 관한 정보가 있다. 물론 허균이 직접 강산유람하듯이 그 음식을 먹고 다닌 소감을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 적었다. 그의 아버지 초당 허엽도 미식가. 강릉 경포대 근처로 유배됐을 때 평소 좋아하던 두부를 먹고 싶은 나머지 경포대 해수로 연두부를 해먹었는데 이게 훗날 강릉의 명물 ‘초당 순두부’가 된다. 나그네 식객은 일명 ‘푸드스토리텔러(Foodstoryteller)’. 유전자가 남달라야 한다. 풍류와 한량스러움이 묻어 있고 거기에 인문학적 안목, 그걸 대중적으로 삭혀낼 줄 알아야 된다. ‘팔자’여야지, 노력해선 식객의 경지를 얻기 어렵다. ◆ 프롤로그…음식칼럼니스트 한국 음식칼럼니스트의 신지평을 연 두 사람이 있다. 백파 홍성유와 김순경씨(74)다. 2002년에 작고한 백파는 1987년 전국 각지의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한 ‘한국 맛있는 집 999점’에 이어 99년 ‘한국 맛있는 집 1234점’을 발간했다. 김씨는 84년 월간 자동차생활 창간호부터 두각을 드러낸다. 90년대에는 한국일보, 국민일보, 두산 사보 ‘백년 이웃’ 등에 연재를 시작, ‘길따라 맛따라’ ‘길과 맛’을 자신의 고유 브랜드로 정착시키기도 했다. 이어서 주간지 한겨레21의 ‘음식이야기’에 8년, 월간조선에 ‘별미여행’을 5년, 연합뉴스(YTN) 르페르에 7년, 요리전문지 쿠켄에 한식이야기를 5년 실었다. 저서로는 우리맛 101가지, 한국의 음식명가 1300, 이맛을 대대로 전하게하라, 한국인이 사랑하는 내고향 최고의 맛집, 자랑스런 한식진미 100집 등 10여권이 있다. ‘한국의 음식명가 1300’은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화제를 모았다. 2011년부터 매월 ‘김순경의 한식여행’을 떠나고 있다. 음식칼럼니스트와 대립각을 세우는 한 종족이 있다. ‘맛칼럼니스트’이다. 국내에선 황광해·황교익·박찬일씨가 3인방이다. 서울 뒷골목 식당 족보를 훤히 꿰고 있는 황광해씨는 80년대 경향신문에 있으면서 전국 바캉스 부록을 만들 때 전국을 누비면서 맛집기행기를 적었다. 황교익씨는 농민신문 기자 출신으로 전국 농산물의 원산지적 지식을 갖고 한식의 바른꼴을 탐구해나가고 있으며,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악식가의 미식일기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박찬일씨는 잡지기자였다가 99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요리학교 ICIF를 수료하고 귀국해 청담동 ‘뚜또베네’, 신사동 가로수길 ‘논나 ’ 등을 성공시켰다. 셋은 주요 일간지는 물론 음식 전문 방송 초대손님 1순위로 급부상했다. ◆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음식강산을 만나다 지난해 발간돼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킨 음식 전문 서적은 ‘음식강산’(한길사)이다. 한길사 발행인 김언호씨가 저자인 박정배씨(51)를 붙들고 한식이야기 시리즈물을 만들어보자고 간청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갔다. 그가 서울 지하철 3호선 을지로 3가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을지면옥으로 오라고 했다. 냉면을 먹고나자 근처 명물 호프집도 소개해주었다. 일명 ‘노가리 골목’에 있는 맥줏집 ‘만선호프’였다.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시각. 특성상 닫혀 있어야 될 호프집은 희한하게 낮술꾼으로 흘러넘쳤다. 왕노가리 한 마리(1천원)를 시키고 호프를 한 잔(3천원)씩 먹었다. 하루에 1천600~2천마리의 노가리가 팔린단다. 사실 지난해 그가 펴내 매우 주목을 받은 음식강산 때문에 적잖은 음식칼럼니스트가 긴장했다. 그는 특정 음식의 ‘원적(原籍)’을 찾아주는 데 청춘을 바치고 있다. 그의 한식에 대한 인문학적 정보력은 깊고 광범위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한민국에서 책과 자료를 가장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국회도서관으로 출근을 해서 자료와의 전쟁을 벌입니다. 주장은 디테일한 사실 위에서 빛을 발하죠.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하나라도 더 자료를 찾아내야죠.” 한식 탐구의 첫 관문은 방대한 양의 조선왕조실록. 해석본이라고 하지만 고어를 공부하지 않으면 제대로 익혀내지 못한다. “주장은 디테일한 사실 뒷받침 돼야 빛 발해” 매일 아침 국회도서관行···수많은 자료와 한판 씨름 노가리 안주 시초는? 서울 을지로 3가 ‘노가리골목’ 독립신문, 대한신보, 노걸대, 별건곤 등 조선조 고조리서와 인문지리서, 광복 직후부터 나온 신문, 잡지, 음식 관련 논문 등을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찾은 자료는 색인카드로 정리한다. 정말 지루한 절차였지만 그게 오늘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다. 그가 노가리골목의 족보를 대충 알려준다. “왕노가리는 새끼 명태입니다. 처음 내놓은 건 을지로 3가 노가리 골목이죠. 만선호프, OB베어, 뮌헨호프 등 이곳에 몰려있는 맥줏집은 30여년 전부터 왕노가리를 냈습니다. 명태(明太)는 한국인이 예부터 두루 즐겨 먹은 생선답게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죠. 노가리, 애기태, 앵치는 명태 새끼를 말합니다. 크기에 따라 대태, 중태, 소태, 왜태(矮太·함경도 연안에서 잡히는 작은 명태)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잡히는 시기에 따라 일태, 이태, 삼태, 오태, 섣달받이, 춘태라고 부르기도 하죠.” ‘국민 생선’ 명태에 대한 최초 기록은 뭘까. “음식계에서 정설로 여긴 기록은 1652년(조선 효종 3년) 10월8일 ‘승정원일기’에 등장한 명태 관련 내용인 ‘진상한 대구 알젓에 명태 알이 섞여 있다’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보다 앞선 기록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뒤집혀요. 현재까지 명태와 관련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함경도 회령에서 근무했던 무관(武官) 박계숙, 박취문 부자의 일기인 ‘부북일기(赴北日記)’에 나옵니다. 바로 ‘1645년(인조 23년) 4월20일 판관이 생대구 2마리, 생명태 5마리, 신삼어 5마리를 보내주었다’는 구절입니다.” ◆ 잘못된 음식사를 바로잡아라 그는 우리나라 음식 이야기가 너무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음식에 관한 책의 내용이 학자, 요리전문가, 음식(혹은 맛집) 칼럼니스트마다 제각각입니다. 한마디로, 왜곡되고 과장된 식당들의 역사와 잘못된 음식 상식이 넘쳐납니다. 저는 그와 달리 옛 문헌과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우리 음식의 기원과 뿌리를 촘촘히 재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카더라’ 정보 믿지 않아 방방곡곡 음식명가 방문, 확인·기록하고 사진 담아 1911년 창립 평양면옥조합···직계자손이 대구서 냉면집 ‘카더라 정보’는 적지 않는다. 자연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방방곡곡 음식명가의 실체를 확인하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다. 덕분에 여러 가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냉면과 관련해 1936년 평양상공회의소가 발간한 ‘평양상공명록’을 뒤져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이란 단체가 존재했고, 그 창립연도가 1911년임을 알아낸 것도 성과다. 남한은 물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면서 아직도 창업자의 직계자손이 대구에서 직접 운영하는 ‘부산안면옥’의 역사에 대한 고증도 했다. 또한 21년 계삼탕, 37년 매일신보에 나온 막국수, 진주냉면에 대한 신동아의 기록도 찾아냈다. 6개월간 국가기록원을 뒤져 60년대 전기통닭의 기수인 ‘명동전기통닭’의 특허번호까지 찾아낼 정도로 근성이 집요하다. 음식강산은 만 2년에 걸친 그의 흥미진진한 음식 탐구 결과물이다. ‘바다의 귀한 손님들이 찾아온다’(1권)와 ‘국수는 행복의 음식이다’(2권)는 어류와 해산물, 누구나 즐기는 국민 메뉴이자 축복의 음식인 국수를 소재로 다뤘다. 강원도 막국수편은 현지를 워낙 야무지게 답사하고 관련 문헌까지 제시해 현재로선 가장 객관적 글로 평가받는다. 육쪽마늘 산지로 유명한 경남 남해군 이동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 마늘과 빼때기(날고구마를 납작하게 썰어 말린 것), 죽방멸치와 쥐치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천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1년 허균의 ‘도문대작’을 접하곤 음식탐구에 나선다. 그의 첫 직업은 다큐멘터리 PD. ‘다큐 서울’에서 일본 NHK ‘ASIA NOW’ 프로그램의 한국 담당 PD로 일하면서 푸드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일본 사케의 비밀을 캐내 ‘사케입문서’까지 펴낸다. SBS 개국프로그램 PD를 맡기도 했다. 이후엔 직원이 600여명이나 되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대리사원으로 입사해 대표 자리에까지 성큼 올랐다. 첫 저서 ‘3000원으로 외식하기’(시공사)가 대중에 알려지면서 음식 칼럼니스트로 변신한다. KTX 매거진에 ‘박정배가 찾은 최고의 맛집’을, 음식잡지‘쿠켄’에 ‘박정배의 맛 따라 멋 따라 대한민국 음식지도’를 연재한다. 현재 조선일보에 음식이야기를 연재하며 음식강산 3·4·5권을 집필 중이다. 3권에선 돼지고기, 쇠고기 등 고기 이야기, 4권에선 비빔밥과 김치 등 한국음식의 원형, 5권에선 술과 음료의 세계를 소개할 계획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6.2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냉면 IN & OUT (하) 전국 유명 냉면 이야기
◆ 남한으로 스며든 북한 냉면 전통 현재 대한민국 국수의 비밀에 대해 밀착취재를 한 음식칼럼니스트는 경남 남해 출신으로 최근 ‘음식강산’(한길사 간)을 펴낸 박정배씨다. 그의 대한민국 국수탐색기는 식도락가라면 한 번 정독할 필요가 있다. 강원도 막국수를 공부하기 전에 일차적으로 남한으로 스며든 북한 냉면의 숨겨진 비밀에 대해 알고 넘어가야 될 것 같다. 다양한 강원도 막국수 영동지방선 동치미 국물 춘천 등은 사골 육수로 평창은 과일로 국물 내 북한 냉면 ABC 냉면은 북한 것밖에 없다? 남한에도 ‘진주냉면’ 전통 함흥냉면·평양냉면 구분 남한 냉면업자의 ‘장삿속’ 진주냉면은 원래 상류층 양반의 음식 멸치·새우 등 해산물 육수 쇠고기 육전 고명으로 써 ‘냉면은 북한밖에 없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남한에도 냉면 전통이 있다. 바로 경남 ‘진주냉면’이다. 냉면을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으로 가른 건 남한의 냉면업자이다. 많이 팔려고 그렇게 분류했다. 북한에선 겨울에 냉면을 즐긴다. 육수도 평양냉면의 경우 동치미국물이다. 나중엔 꿩육수를 사용한다. 남으로 내려오면서 사골육수가 틈입한다. 북한에는 함흥냉면이란 단어가 없다. 대신 ‘농마면’ ‘회국수’라 한다. 북한은 비빔냉면에도 육수가 있다. 현재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함흥의 냉면집인 ‘신흥관’에서는 함흥식 냉면을 ‘농마국수’라 한다. 농마는 ‘녹말’의 함흥도 사투리. 가자미 같은 수산물을 얹으면 ‘회국수’, 고기를 얹으면 ‘육국수’로 분류된다. 함경도 사람들은 피란 내려와 서울 중구 오장동 부근에 자리 잡았다. 1953년에 ‘오장동함흥냉면’이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이 언저리가 서울의 함흥냉면 본거지가 된다. 전성기 때는 오장동에만 20여개의 함흥냉면집이 있었는데 이젠 함흥곰보냉면과 오장동함흥냉면 정도만 남았다. 인천·백령도 인천에도 북한 냉면의 전통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육수에 까나리 액젓을 넣어 진한 단맛이 난다. 부평막국수, 변가네 옹진냉면, 사곶냉면 등이 알려져 있다. 경기도 양평균 옥천면에도 황해도식·해주식 냉면 문화가 꽃피운다. 52년 황해도 출신의 이건협씨가 옥천면에서 ‘황해냉면’을 론칭한다. 면발이 굵고 돼지고기 육수에 간장이나 설탕으로 간을 해서 단맛이 강하다. 옥천냉면(옛 황해냉면)과 옥천 고읍냉면이 이름이 나 있다. 충남 대전의 평양냉면 전통은 숯골원냉면 본점에 남아 있는데, 닭육수와 동치미를 섞은 육수를 사용한다. 경기도 의정부·동두천 일대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한다. 평양 출신 실향민이 53년에 창업한 동두천 ‘평남면옥’은 평양 장터의 냉면을 파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의정부평양면옥은 1·4 후퇴 때 평양에서 피란 온 홍진권씨가 70년 경기도 전곡에서 냉면집을 창업했다가 87년 의정부로 옮겨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서울의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이 홍씨의 딸들이 운영하는 집들이다. 양지머리를 삶아 기름을 걷어낸 후 차게 숙성시킨 육수에 약간의 동치미 국물을 더하고 고명으로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이 의정부 평양면옥 계열 냉면집들의 공통된 특징. 경기도 평택도 전쟁이 끝나고 평안도·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평양식 냉면이 자리 잡는다. 평남 강서에서 냉면가게를 운영하던 실향민이 53년 ‘강서면옥’을 시작한다. 강서면옥은 58년 서울로 이전한다. 30년대 평안북도 강계에서 ‘중앙면옥’을 운영하던 고학성씨의 아들이 74년 ‘고박사냉면’을 개업한다. 강서면옥과 고박사냉면은 모두 양지머리와 사태살을 삶아낸 육수를 기름을 제거해 맑게 한 후 동치미 국물을 섞고 간장을 살짝 쳐 엷은 갈색이 도는 육수를 만든다. 영주시 풍기면은 경북도에서 실향민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다. 견직물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덩달아 평양식 냉면집들도 장사가 잘됐다. 70년대 이후 견직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냉면집들도 된서리를 맞는다. 지금 풍기를 대표하는 ‘서부냉면’은 평북 운산 출신의 창업주가 73년에 문을 연 집이다. 강원도 속초는 함경도 출신 피란민이 많다. 바닷가 모래사장이던 청호동과, 건너편인 중앙동·금호동에 피란민들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함흥냉면집으로 알려진 함흥 출신이 세운 ‘함흥냉면옥’은 51년 중앙동에 자리를 잡는다. 함흥냉면옥은 ‘속초식 함흥냉면’을 만들어냈다. 감자 전분이 고구마 전분으로 변했고, 냉면의 성격을 결정하는 꾸미가 가자미회에서 명태회로 바뀌었다. 양반댁, 단천식당, 대포함흥면옥 등도 이름값을 한다. ◆ 진주냉면 진주냉면은 평양과 달리 상층부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진주냉면의 명맥은 현재 진주시 봉곡동 서부시장 내 장운서·하연옥 부부, 하거홍·황덕이 노부부로부터 냉면 노하우를 전수해 이어간다. 원래 중앙시장에선 부산식육식당으로 있다가 이어 부산냉면, 나중에 진주냉면으로 명칭이 바뀐다. 이 과정에 전통음식연구가 김영복씨가 진주냉면의 존재를 이들에게 알려준다. 진주냉면의 육수는 다른 냉면과 달리 멸치, 새우, 홍합, 바지락, 표고버섯, 다시마, 문어, 황태 등 각종 해산물로 뽑는다. 이 중 멸치가 가장 많이 들어간다. 흥미로운 건 육수의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달궈진 무쇠를 집어넣고 15일간의 숙성절차를 거친다는 것이다. 이때 곰탕 육수처럼 노란 막이 생기는데, 엄청 비려서 걷어내야 제맛이 난다. 석이버섯, 실고추, 오이, 배, 계란, 김치, 황백지단, 그리고 마지막에 진주냉면 고명 중 가장 이색적인 ‘쇠고기 육전’을 올린다. 진주냉면의 면에는 산청산 ‘장밀’이 들어가는 게 흥미롭다. 하지만 진주냉면도 대구냉면과 비슷한 식감을 보여 아쉽다. ◆ 강원도 막국수 북한식 냉면이 강원도 국수문화와 부딪히면서 생긴 게 ‘막국수’이다. 막국수는 지역마다 불리는 이름도 다르다. 춘천과 인근의 홍천·양구에서는 막국수라 한다. 양양 등 영동지방에서는 ‘메밀국수’로 부른다. 원래는 막국수였는데 2000년 오인택 양양군수가 막국수라고 하면 춘천이 떠오르니 앞으로 메밀국수로 부르자 해서 메밀국수가 태어난다. 막국수란 ‘금방, 바로 뽑은 국수’라는 뜻이다. 또 막국수 하면 으레 춘천이 떠오른다. 오리지널 막국수는 비빔장 양념에 비비고 육수를 부어 먹는 춘천식과는 다르다. 육수 대신 동치미에 말아 먹는다. 양양·속초·고성 등지에선 동치미 맛으로 먹는 막국수가 흔하다. 이곳은 6·25전쟁 이전에 38선 이북 지역이었고, 전쟁 후에는 피란민들이 많이 내려와 정착하다 보니 여전히 오리지널이 강세다. 특히 양양의 경우 산간은 동치미막국수, 해변 쪽은 간장막국수가 유행한다. 속초 공항을 지나 진전사 방면으로 4㎞ 남짓 들어가면 보이는 ‘영광정 메밀국수’가 강원도 동해안권 막국수의 전형이다. 3대째 막국수를 내는 집이다. 영광정은 막국수의 핵심은 메밀국수가 아니라 동치미라 본다. 김장철인 11월에 동치미를 담근다. 무를 깨끗이 씻은 후 소금물에 담그고, 마늘·생강·양파를 넣는다. 배는 넣지 않고, 잡내를 잡기 위해 제피나무(초피나무)를 넣는 게 전부다. 더우면 군내가 나고 추우면 무가 얼어서 물러지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간다. 항상 5℃ 정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춘천 막국수는 동치미보다 사골을 곤 육수가 섞인다. 춘천 남부 막국수는 돼지 뼈를 우려낸 육수를 쓴다. 춘천 막국수 1번지로 불리는 40여년 역사의 ‘샘밭 막국수’는 사골을 12시간가량 고아 사용한다. 메밀의 고장, 평창 막국수는 과일로 국물을 만든다. 봉평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막국수’. 사과와 배·양파 등을 갈아 즙을 내 5시간 정도 숙성시킨다. 원주는 특이하게 메밀을 거피하지 않고 통으로 사용해 면발이 유달리 검은 게 특색이다. 춘천에는 대룡산막국수, 유포리막국수, 장평리막국수, 홍천에는 장원막국수, 인제는 남포면옥과 서호순모밀국수, 속초는 삼대막국수, 고성은 백촌막국수와 핑크빛이 감도는 산북막국수, 양양은 실로암메밀막국수, 송전메밀국수, 문어를 꾸미로 올리는 송월막국수, 주문진의 신리면옥, 강릉의 삼교리동치미막국수, 원주의 황둔막국수, 남경막국수 등을 찾으면 강원도 막국수의 진미를 개괄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콩국수 전문점에 웬 ‘소바’ 간판? ◆ 이색 냉면 전북 전주에 가면 희한하게 콩국수 전문점인데도 소바라는 일본식 메밀면의 이름을 단 가게가 많다. 대표주자는 금암동 ‘금암소바’. 전주시 전주천변 남부시장에 있는 ‘진미집’도 소바콩국수의 원조이다. 음식평론가 박정배씨는 이걸 ‘한국식 국물문화와 일본식 츠유문화의 결합’이라고 분석한다. 경남 의령도 ‘의령소바’로 몸값을 올리고 있다. 밀면은 ‘밀가루냉면’의 준말. 부산밀면도 북한 냉면의 특별한 변신. 다시 말해 북한 피란민이 귀해진 메밀 대신 밀가루를 사용해 밀면을 만든 것이다. 원조는 우암동 ‘내호냉면’. 부산 밀면 대중화의 주역은 부산진구 가야2동 ‘가야밀면’. 최근에는 부산진구 개금동의 ‘개금냉면’도 세를 키우고 있다.
2014.06.1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문경 로컬푸드 마케팅 스토리
한 농촌 친구가 도시 친구한테 갓 수확한 배추를 수북하게 보냈다. 별다른 인사가 없었다. 농촌 친구는 내내 섭섭했다. 그 다음해는 그 배추로 김치를 만들어 보냈다. 그제서야 도시 친구로부터 “정말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다. 이젠 농작물만으로는 1% 부족하다. 농산물을 식품·음식으로 특화시키면 부가가치도 몇 배 더 증폭한다. 예전에는 농산물 가공은 도시의 몫이었다. 이젠 도시가 아니라 ‘농촌의 몫’이 되고 있다. 농작물을 수확한 즉석에서 가공해 더욱 비싸게 판다. 그 전략을 주도하는 곳은 어딜까? 바로 농업기술센터이다. 센터 부속 향토음식학교와 우리음식연구반의 지원사격을 받은 ‘농가맛집’이 태어난다. 농가맛집은 한국 농촌경제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농촌에 놀러가도 먹을 게 없다’는 도시 관광객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중이다. 농가맛집은 도시의 일반 식당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농가맛집은 ‘퓨전농업의 꽃’이다. 도시의 식당은 식당주가 배타적 이익을 누리지만 농가맛집은 식당주는 물론 거기에 식재료를 대는 농가가 동시에 혜택을 입는다. 현재 경북에만 20여개가 성업 중이다. 이제 농부는 일반 농작물만 맹목적으로 팔아선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 대목에서 ‘6차 농업’을 주시해야 된다. 1차 농업은 단순히 농산물만 생산하는 것, 2차 농업은 조리가공만 하고, 3차 농업은 농촌체험·농촌관광·농산물유통을 원스톱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 모든 고리가 하나로 돌아가게 만드는 게 바로 6차 농업이다. 농촌 스스로 로컬푸드의 신성장동력을 찾는 것이다. 영국의 슬로푸드운동, 미국의 딜리셔스 레볼루션(Delicious revolution), 일본의 지산지소(地産地消)운동, 프랑스의 미각살리기운동, 미셀 오바마의 텃밭운동 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문경사과 팩에 담은 즙 판매…잼·칩·식초로도 오미자로 막걸리·와인·초콜릿·젤리 등 만들어 ◆ 경북은 6차 농업 프런티어 경북은 ‘대한민국 농업 1번지’. 특히 사과, 복숭아, 오미자, 감, 포도, 자두, 대추, 참외, 수박, 포도, 마 등 대다수 과일류는 경북이 최고의 산지로 각광받는다. 도내 23개 시·군 중 문경의 연이은 로컬푸드 마케팅 성공사례는 후발주자에게 배울거리를 제공한다. 점촌을 품은 문경시.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탄광도시였다. 38개에 육박했던 탄광이 다 죽는다. 1994년 은성탄광 하나 만 남는다. 문경 지역경제의 절체절명의 순간. 문경 살리기에 나섰다. 관광거리가 될 만한 것을 뒤졌다. 문경새재와 문경찻사발 정도가 고작이었다. 96년쯤 돌풍을 일으킨 문경새재 KBS 대하사극 왕건 세트장으로 관광상품화에 나선 문경새재는 단번에 전국적 문화관광상품으로 떠오른다. 그때 제1관문 식당가의 터줏대감인 ‘소문난 식당’의 새재묵조밥은 예천의 ‘전국을 달리는 청포묵’과 함께 전국적 청포묵 전문 식당으로 주목받느다. 연이어 석탄박물관, 철로자전거 등이 1급 관광상품으로 각광받는다. 하지만 항상 볼거리에 비해 먹을거리가 너무 부족하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어떻게 하지? ‘없으면 만들면 되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96년 당시 전국 최고의 오미지 산지로 군림했던 전북 장수로부터 오미자를 수입, 동로면 생달1리 생달마을에 보급한다. 처음에는 200여 농가였는데 이젠 1천여 농가로 급증했다. 전국 생산량의 45%를 점하고 있다. 2003년에는 매출액이 고작 50여억원, 지난해는 1천50억원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예전에 오미자는 단순한 한약재였다. 갈수록 생산량은 많고 소비가 늘지 않았다. 죽도록 생산하는데 돈이 안됐다. 한때 문경 오미자 산업이 위기를 맞는다. ◆ 문경 최대 효자농작물 오미자 2003년 농업기술센터가 ‘해결사’로 긴급 투입된다. 센터 내에 ‘문경향토음식학교’를 세운다. 거기서 5가지 대박 콘텐츠를 만든다. 문경약돌샤브전문점, 농가맛집 새재오는 길, 문경산채비빔밥 전문점, 청운주막, 경북전통음식체험교육관인 모심정 등이다. 청운주막은 박정희 대통령의 옛 하숙집인 문경읍내 청운각 앞에 있는데 박 대통령이 평소 즐기던 소고기국밥과 막걸리 등을 판다. 시는 독창성을 지키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이 문경보통학교(현 문경초등)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던 해인 1937년을 강조해 ‘청운각 1937’이라는 상표를 출원했다. 박 전 대통령이 즐겨 마셨던 막걸리는 청운각이라는 상표로 출시했다. 2006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센터 내에 ‘농산물가공담당’이란 부서를 신설한다. 특히 책임자인 김미자 계장은 그때부터 ‘오미자 전도사’로 문경시의원 등을 설득하면서 오미자 식품화 사업에 전력투구한다. 그래서 태어난 게 ‘문경 오미자건강클러스트 구축사업’이다. 덕분에 오미자청, 오미자막걸리, 오미자와인, 오미자초콜릿, 오미자빵 등을 개발했다. 이뿐만 아니라 오미자로 퓌레, 요거트, 젤리, 화채, 백김치, 초고추장, 수제비, 불고기, 칵테일, 차 등을 만드는 레시피를 팸플릿으로 만들어 관광객에게 나눠주고 있다. 문경 식당에 오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식전에 오미자청을 물로 희석해 생수처럼 내놓는다. 반주는 묻지마 오미자막걸리 아니면 오미자와인이었다. 많이 팔리면 그만큼 문경 경제가 살찔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일석이조 로컬푸드 마케팅’이다. 매년 9월20일쯤 수확되는 문경 오미자. 이종기 와인마스터가 이걸 갖고 영농조합법인 오미나라의 대표 브랜드‘오미로제’를 만든다. 이게 2011년 11월 프랑스로 처음 수출된 국내산 와인 1호가 된다. 2009년 센터는 오미자에 이어 문경사과 특화에 나선다.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사과’란 이름을 달고 팩에 담긴 즙을 팔았다. 잼도 만들고 칩, 식초까지 개발했다. APC(사과품질관리 거점 유통센터)에서 사과의 당도와 색도를 철저하게 관리한다. 당도가 13 브릭스 이하면 불합격 판정을 내린다. 현재 50여 농가가 이 브랜드를 사용한다. 현재 센터는 문경새재 도립공원 내 문경산채비빔밥, 동화원, 마당바위 등 3개 ‘웰스푼(Well spoon)’업소를 중심으로 ‘힐링푸드밸리조성사업’을 벌이고 내아들밥상, 겨우살이삼계탕 등 군내 20개 업소를 축으로 ‘양백(소백산과 태백산)지간 푸드테라피활성화사업’을 진행 중이다. 문경시 모전동에 있는 겨우살이삼계탕은 특이하게 한약재로 유명한 겨우살이를 주재료로 삼계탕을 요리한다. ◆문경산채비빔밥 2008년 태어난 문경산채비빔밥은 전주비빔밥·익산황등비빔밥·진주비빔밥·달성군사찰비빔밥·거제멍게비빔밥과 함께 국내 대표 비빔밥으로 등극했다. 일단 메뉴라인을 정하기까지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쳤다. 일단 ‘보기 좋아야 먹기 좋다’고 판단했다. 문경새재호텔 근처 사계절 썰매장 바로 옆에 에 있는 식당은 인테리어에 부쩍 신경을 썼다. 우중충한 관광식당풍에서 벗어났다. 바닥에 강화유리를 깔았다. 문경 가은읍에 살고 있는 방짜유기 인간문화재 이봉주씨, 문경 갈평요의 신석용 장인의 도움을 받아 비빔밥은 유기에 담아내고, 곁반찬은 문경산 도자기에 담아냈다. 화가 박한씨는 맛에 반해 직접 ‘문경산채비빔밥’이란 시까지 액자로 만들어 증정했다. 8가지 나물 중 야생 다래순은 문경시 전역에서 채집, 급랭해 1년간 사용한다. 나물값만 1년에 4천만원. 사용되는 나물은 곰취, 도라지, 산나물, 고사리, 다래순, 곤드레, 참나물, 취나물 등이다. 유광희 사장(58)은 “콩나물과 채소류를 축으로 한 일반 비빔밥은 고추장을 넣어도 되지만 묵나물(말린 나물) 비빔밥은 고추장 대신 ‘지렁’(조선간장)으로 간을 해야 제맛을 느낀다”고 손님한테 설명해준다. 특히 지렁을 담는 에스프레소 잔 크기만 한 도자기 종지는 기자도 10년 이상 전국을 돌면서 처음 봤다. 배즙, 쇠고기, 오미자청 등으로 만든 약고추장도 인상적. 곁반찬은 서리태조림, 돼지감자장아찌, 오미자물김치, 3색전 등이다. 이곳 상은 모두 1인용 나무식판. 오미자막걸리·문경사과·오미자차가 무료로 제공된다. 비빔밥은 9천원·1만5천원· 2만5천원 세 종류가 있다. 지난해 정산결과 3만원 흑자를 냈다. 남는 게 없다. ‘땀’으로 빚은 음식이란 점을 알고 먹어야 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6.06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냉면 IN & OUT (상) 쫄면같은 냉면 유감
‘대구냉면’에 대해 쓴소리를 해봐야겠다. 서울·강원도권은 조금 낫지만 경상도, 특히 대구는 지금 원형에서 너무나 멀어진 ‘죽은 냉면’을 먹고 있다. 그냥 최면에 걸려 ‘냉면은 원래 이런 맛’이라면서 조건반사적으로 먹고 있다. 대구에선 메밀로 냉면을 만드는지, 전분으로 냉면을 만드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대구냉면은 냉면 마니아로부터 ‘기본에서 너무 멀어졌다’란 지적을 받는다.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해보자. 언젠가부터 대구냉면은 고무줄만큼 질겨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식초도 너무 짙다. 수제와 달리 공장표 냉면은 더욱 질기게 하기 위해 소다까지 집어넣는다. 이런 냉면을 먹으려면 가위를 동원해야 된다. 가위도 왜 하나같이 ‘공업용’인지 모르겠다. ◆ 대구사람…냉면을 쫄면으로 착각 대구는 솔직히 냉면을 쫄면으로 착각한 것 같다. 인천에서 태어난 쫄면이 대구에도 상륙해 70~80년대 엄청난 붐을 일으킨다. 젊은이에게 폭발적이었던 쫄면문화를 대구냉면이 벤치마킹을 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쫄면같이 질긴 대구냉면이 더욱 강세를 보인 것 같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대구의 물냉면과 비빔냉면에 사용되는 생면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건 냉면문화를 절벽으로 내모는 처사. 물냉면과 비빔냉면은 비슷한 메뉴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동일하게 취급하는 주인이 의외로 많다. 탄생 배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물냉면의 메카 평양 인근은 메밀이 흔했고 척박한 함경도 함흥에는 감자와 고구마가 흔했다. 고구마는 1768년 일본에서, 감자는 1824년 만주로부터 전해진다. 대구 냉면은 비빔냉면에 넣는 면을 물냉면에도 쓰는 오류 쫄면처럼 질겨 제맛 못내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공장에서 만든 면 곤란 메밀 비율 대폭 늘려야 물냉면 질기지도 않고 특유의 메밀향도 가득 자체 온육수·면수 확보도 물·비빔냉면은 물성이 각기 다르다. 자연히 육수와 소스, 고명도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면을 물에 넣으면 물냉면, 고추장 소스를 넣고 비비면 비빔냉면이라고 해선 안 된다. 그건 밀로 만든 소면을 먹을 때 적용하는 게 더 낫다. 물냉면의 육수가 차가운 만큼 면은 식감적으로 볼 때 채썬 묵사발처럼 툭툭 잘 끊어져야 제맛이다. 그런 질감을 느끼기 위해선 반드시 메밀가루를 70% 이상(강원대학교가 메밀 70%에 밀가루나 고구마 전분 30%를 섞을 때 사람들 입맛에 맞다는 용역보고서를 낸 바 있다) 사용하는 게 좋단다. 비빔냉면은 비벼 먹어야 하니 면이 쫄깃해야 한다. 그 쫄깃한 식감을 더욱 풍성하고 오래 즐길 수 있도록 가자미·명태식해, 아니면 진주냉면처럼 육전 등을 올려야 한다. 당연히 비빔냉면에선 메밀이 아니라 전분(감자가 고구마보다 조금 더 비쌈. 북한에선 감자전분, 남한에선 고구마전분이 더 대중적)을 주재료로 올려야 한다. 이제 단골 식당에 가서 과연 그런지 확인해 봐야 한다. 그게 잃어버린 ‘냉면 주권’을 되찾는 길이다. 상당수 유명 식당주는 단골은 항상 오는 것, 그러니 자기는 돈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매너리즘에 빠져있다. 그러니 요리를 작품처럼 대하는 일본의 수백년 된 소바집 주인을 따라갈 수 없다. ◆ 그럼 정통 냉면집은 어때야 하지 향후 대구냉면은 이렇게 변해야 된다. 냉면 전문점이라면 일단 면을 다른 업자한테 납품받아선 절대 안 된다. 대다수 번거롭고 가격이 비싸질 것 같아 면을 제면공장, 식자재상회 등으로부터 받아서 사용한다. 여기서부터 불합격이다. 냉면전문가라고 하면 직접 자기만의 메밀·전분 혼합비율을 갖고 있어야 한다. 철학이 없으면 그 비율을 못 찾는다. 그냥 누가 하는 대로 카피한다. 물론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맘으론 절대 명품 냉면이 탄생할 수 없다. 전문점은 일정한 단골, 일정한 물량, 일정한 레시피 라인을 형성해야 된다. 그런 곳은 가격은 비싸다. 비싸야 맛있는 걸 너머 제대로 된 명품 냉면을 먹을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냉면집은 서울 강남 서초동 1333 토아텔 1층에 있는 벽제갈비 직영 ‘봉피양(‘평양 본가’란 북한 사투리)’인데 메밀 100% 순면 1인분에 1만6천원. 전분이 30% 섞인 건 1만2천원이다. 서울 평양냉면의 지존인 우래옥에선 100% 순메밀 냉면을 1인분 1만3천원에 판다. 물론 제대로 된 것이니 건강에도 좋다. 그런데 대구는 자꾸 맛만 고집하면서도 가격은 싼 걸 원하니 업자도 살아남기 위해 ‘죽은 재료’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안이 있다. 국내산 메밀로 만든 냉면만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수요공급상 국내산 메밀은 가격이 초고가라서 웬만해선 선택할 수 없다. 물량도 한정돼 있다. 강원도 춘천막국수 영농조합법인도, 서울 봉피양도 수입산이다. 국내산 메밀을 대중화시키는 길은 소비자가 지갑을 더 풍족하게 열어주는 것이다. 지갑을 덜 열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한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고려청자처럼 빚은 보석 같은 냉면이라면 기자는 1인분 10만원이라도 먹고 싶다. 일본 교토의 명품 소바집에서 5명이 정통소바를 튀김류와 곁들여 먹으려면 1인분 최소 5만원 이상은 각오해야 한다. 물냉면은 절대 질겨선 안 된다. 상대적으로 비빔냉면은 질겨도 된다. 이제부터 대구에서 이런 원칙이라도 준수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물냉면용 메밀 비율을 팍 올려야 한다. 예전에는 기술이 안 좋아 메밀 100%로 반죽을 하면 잘 끊어져 면을 잘 만들 수가 없었다. 응집력을 위해 전분을 접착제처럼 일정량 섞었다. 그런데 이젠 익반죽 기술이 좋아 잘 끊어지지 않는다. 춘천의 일반 막국수 집에선 8천원짜리 100% 메밀 냉면도 판다. 참고로 일본에선 ‘니하치소바(二八蕎麥)’라 해서 메밀과 밀가루를 8대 2 비율로 섞은 걸 가장 대중적으로 소비한다. 100% 메밀가루만 사용하면 ‘나마코우치소바’, 혹은 ‘주와루소바(十割蕎麥)’라 한다. 둘째는 ‘온육수’와 ‘면수’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그건 냉면집 주인의 자존심이다. 아니, 문패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다수 식자재상에서 산 육수와 소스로 냉면을 치장하니…. 온육수는 쇠고기 각종 부위를 삶은 뜨거운 육수, 면수는 메밀 생면을 삶은 물이다. 일본에선 가츠오부시를 주재료로 만든 조금 짠맛이 감도는 ‘츠유(소바용 조리간장)’는 자작이 의무이다. 일본에서는 메밀 함유량이 30%를 넘지 않으면 소바란 말도 사용할 수 없다. 소바를 츠유에 3분의 1쯤 담가 먹은 뒤 남은 츠유에 면수를 넣어 희석해 디저트처럼 먹는데 이 희석수를 일명 ‘소바유’라고 한다. 일반 일본 간장은 ‘쇼유’라 한다. 츠유와 소바유가 양축에서 소바의 맛을 더욱 깊고 오묘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막국수의 본가 춘천의 ‘샘밭막국수’에 가면 주전자에 동치미국물까지 주전자에 담아 식탁에 놔둔다. 서울 명동 초입 한국 3대 곰탕집 중 한 곳인 하동관의 경우 깍두기국물 담은 주전자를 식초처럼 비치해놓고 있다. ‘평양식 동치미 냉면’만 고집하는 서울 무교동 ‘남포면옥’ 초입에는 20개의 동치미 항아리가 빛을 발한다. 명가란 바로 이런 곳이다. 메밀향이 뭔가를 보여줘야 된다. 좋은 국내산 메밀묵에선 특유의 찬 향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대구 물냉면은 도무지 향을 맡을 수가 없다. 거피한 메밀을 롤러로 갈 때, 롤러에서 발생한 열이 메밀향을 또 죽여버린다. 공장 면의 경우 전분을 과도하게 첨가해 또 한번 메밀향을 지운다. 특히 요리할 때 과도한 식초와 겨자를 넣고, 그것도 모자라 깨소금에 참기름, 묵은지 등을 듬뿍 올린다. 물냉면은 그야말로 당면·쫄면으로 전사하고 만다. 다음 편에선 전국 냉면 명가의 비밀 이야기를 담아본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대구 냉면’에 실망했다면…여기 괜찮아요 대구냉면에 실망한 기자는 요즘 일반 냉면집을 멀리한다. 냉면의 비밀을 잘 몰랐던 예전에는 자주 들락거렸지만. 대신 진주냉면과 함께 ‘경남식 냉면’의 선두주자인 ‘의령 소바’의 대구 달서구 상인점의 냉소바, 강원도 원주에서 재배한 메밀을 사용하는 대구수목원 근처 ‘풍성메밀’의 메밀칼국수,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 문을 연 ‘니하치’의 일본 본토형 소바로부터 다소 위안을 받고 있다. 물론 이것 또한 기자의 주관적인 취향이겠지만.
2014.05.30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신문기자에서 요리사로’ 대구 중구 대봉동 ‘카페 프란체스코’ 전경옥씨
전경옥. 한때 대구·경북지역에서 유명 논객이었다. 1982년 ‘우리의 맛’, 94년 ‘종부’ 등에서 한식의 비밀을 탐색했다. 2002년부터 5년3개월간 ‘전경옥입니다’란 270여편의 기명칼럼으로 두터운 팬층도 확보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다른 길을 걷는다. 펜을 버리고 ‘프라이팬’을 잡았다. 대구 수성구 지산동 ‘파파호두’에서 잠시 동생의 일을 거들기도 했다. 지금은 대구시 중구 대봉동 패션디자이너 박동준 빌딩 6층 카페 프란체스코의 오너셰프. ‘시늉만 내다가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퇴직 언론인에겐 묘한 ‘직업병’이 있다. 자기 몸값을 시세보다 더 비싸게 매긴다는 것. 화이트칼라에서 블루칼라로 전향하는 이는 아주 드물다. “원래 카페 프란체스코는 제 친구가 운영했어요. 건물주인인 패션디자이너 박동준씨와도 서로 친구사이인데 어느 날 이 카페의 남다른 조망과 프랑스풍의 공간미에 반해 나도 이런 카페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그런데 친구는 ‘돈이 안된다’고 만류하더군요.” 2011년 4월에 카페를 인수한다.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전직 저널리스트는 자기한테 어떤 시련이 닥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밤이면 대구 도심의 야경을 360도로 만끽할 수 있고 앞산까지 정원처럼 펼쳐져 있으니 커피 마시면서 음악 듣고 책도 읽으며 멋지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픈 당일은 빌딩 1층 분도 갤러리 오픈 행사와 맞물려 매우 바빴다. 징조가 좋아보였다. 7년간 단골층도 있으니 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매상이 뚝 떨어졌다. 엄청 당황했다. “저는 지인에게 오픈 사실도 거의 알리지 않았습니다. 식당 홍보를 민폐라고 생각했죠. 하루 만에 손님이 끊기니 온갖 생각이 다 들더군요.” 카페 주변 상권을 분석해봤다. 카페가 오픈할 당시 이런 스타일 카페는 근처에선 처음이었다. 그런데 7년이 지나면서 주변 상권이 많이 달라졌다. 수성못 주변 커피숍, 대명동 카페골목, 방천시장 김광석 벽화길, 도심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한 이탈리아 레스토랑 등. 자연히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더군다나 여기는 6층이고 유동인구도 별로 없다. 장기전에 돌입한다.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다 요리할 줄 아는 매니저만 믿고 자신은 경영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생각이 달라진다. “주인이 반드시 요리를 할 줄 알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최고의 요리학교인 르꼬르동블루의 기술을 익혔던 매니저에게 한 수 배웠지만 한계가 있었다. 자기 음식이 아니었다. 좀 더 새로운 걸 배우기 위해 대구 현대백화점 요리 강좌도 들었다. 사실 그녀는 80년대 중반쯤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게 요리 공부를 더 수월케 했다. 문제는 양식이었다. 2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주방에 들어가서 아주 기초적인 스파게티를 만든다. “어떤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과 잘한다는 것은 엄청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레시피대로 한다고 고수의 맛이 절대 안나죠. ‘숙달’과 ‘숙련’이란 변수 때문이죠. 같은 악보라도 가수 실력에 따라 부르는 수준이 다 다르잖아요. 음식도 그런 것 같아요. 식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원산지에 관한 지식도 갖고 있어야 하고, 특히 그 식재료 가격도 천차만별이라는 사실, 적당한 가격에 맞추려면 어떤 가격대의 재료를 누구로부터 구입해야 하는지, 그리고 재고관리도 어떤 방식으로 할 건지 모두 염두에 둬야하는데, 머리가 띵해지더군요.” 인건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매니저도 내보냈다. 2012년 2월말부터 오너셰프로 변신한다. 음식 종류가 너무 많았다. 확 줄였다. 맛도 좋아야 하지만 건강한 음식에 초점을 맞춘다. 비트 물을 들인 무·오이 피클도 직접 만들었다. “단골층 연령이 좀 높습니다. 정통 이탈리아식은 그들에게 너무 느끼해 부담스러워해요. 덜 느끼하게 하기 위해서 청양고추를 스파게티 등에 넣었습니다. 이탈리아 건고추인 페페론치노는 맵기만 하죠. 일반 청양고추는 매콤하지만 칼칼한 맛이 남는 게 특징입니다. 페페론치노를 포기했어요. 오레가노도 향이 너무 강해 반만 넣었어요. 처음엔 올리브오일도 가능한 적게 사용했습니다.” 샐러드 드레싱에도 변화를 주었다. 100% 레몬주스에 후추, 설탕, 소금,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 등을 넣었다. 원래 레몬주스 다섯 스푼당 올리브유를 그 2배를 넣는데 그녀는 심플하게 하기 위해 1.5배 정도 넣었다. 2011년 친구가게 인수 “식당 홍보는 큰 민폐…” 당시 개업사실 안알려 야심만만 오픈했지만 하루만에 매출 뚝 ‘쓴잔’ “매니저가 알아서 해?” 현실은 녹록지 않아 “주인이 셰프가 돼야” 요리와의 고된 전쟁끝 힐링볶음밥·김치그라탕 차별화한 신메뉴 내놓아 ◆전경옥표 자작 메뉴 좀 감각을 익히자 자기 이름을 건 신메뉴를 개발하고 싶었다. ‘힐링 볶음밥’이라고 별명을 붙인 ‘컬러풀 그린 필라프’부터 요리했다.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빨강·노랑 파프리카, 당근, 블랙 올리브, 그린빈스, 버섯, 보라 양배추 등에 밥과 올리브오일을 넣고 볶아낸 물기 없는 볶음밥이다. 거기에 오레가노와 후추, 그리고 치즈를 얹고 오븐에서 6분간 구워내면 ‘그린 그라탕’이 된다. 그린 그라탕은 우연의 산물이다. 어느 날 주방 찬모와 점심을 먹을 때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볶아 먹었는데 매우 맛있다는 반응이 있었다. 거기에 색깔있는 채소류를 더 넣어 상품화했다. 채소류는 230g, 밥은 150g으로 정량화했다. 채식주의자 등을 배려한 힐링푸드였다. 처음에는 새우도 몇 마리 넣었다가 완전 채식버전으로 간다. 치즈도 임실치즈만 사용한다. 자신이 해외유학파 셰프도 아닌데 맛있게 먹어주니 그게 ‘존재감’이 되었다. 인기 메뉴 중에 ‘해물 김치그라탕’도 있다. 해물과 김치를 잘게 다지고 청양고추와 마늘을 넣고 올리브오일로 볶고 직접 만든 토마토 소스를 섞어 볶다가 위에 치즈를 얹어 오븐에서 6분 구워낸다. 조금 얼큰하고 매콤하다. 느끼한 걸 싫어하는 중년 남성을 겨냥한 메뉴다. 신개념 샌드위치로 알려진 ‘치아바타’도 식감이 풍성하다. 계란, 치즈, 햄, 휘핑크림, 후추, 토마토 등을 얹어 낸 건데 식재료 맛이 충돌하지 않게 배려했다. 치아바타 전용 빵은 대구에서 구입할 수 없어서 서울 전문업체를 통해 구입한다. ◆음식보다 더 힘들었던 커피 공부 처음에는 음식에만 끙끙댔는데 커피가 더 난해했다. 평생교육원 원장 시절 커피교실을 열었고 거기서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정도는 배웠다. 일반 커피류는 그래도 쉬웠다. 민트모카, 카라멜 마키아토 등 색다른 기능성 재료가 들어가는 건 처음 접하는 것이라 레시피를 자꾸 외우고 반복 연습을 해봐야 했다. “한번은 한 젊은 친구가 내 커피 맛을 보더니 이 맛은 정통이 아니라고 정색하더군요. 식은땀이 났어요. 상대적으로 쉬운 아메리카노만 주문했으면 하는 맘이 간절했어요. 요리는 레시피가 머리에 들어와서 나름 장악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커피는 터득하는 데 참 힘이 들었습니다. 인건비 때문에 바리스타를 데려올 수도 없었죠. 한꺼번에 여러 잔을 주문하면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노는 먼저 만들면 위에 형성되는 흰 거품(크레마)이 순간 다 사라져서 안됩니다. 휘핑크림 얹는 법도 처음엔 감각 익히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휘핑기 작동 미숙으로 온몸에 커피 거품을 뒤집어 쓴 적도 몇 번이나 있었어요.”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지’라며 씁쓸한 독백을 한다. 주방이 매우 좁다. 하절기엔 땀범벅이다. “오븐을 잘못 사용해 화상을 많이 입었어요. 신문쟁이 때 제약조건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하절기엔 에어컨을 가동해도 땀이 비오는 듯하죠. 선풍기를 사용하고 싶어도 맛 때문에 사용 못해요.” 처음엔 육체노동을 벗하며 2부인생을 치열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많은 고생을 요구했다. 그녀는 현재 근골격계 질환에 노출돼 있다. 왼손 손목 부위가 혹처럼 부풀어 올랐다. 왼손만으로 프라이팬을 잡기 너무 힘들어 양손으로 쥐고 움직인다. 하루 평균 12시간 일을 한다. 바쁘면 7시간 논스톱으로 일할 때도 있다. 피가 발로 몰린다. 금세 퉁퉁 부어오른다. 굽 낮은 구두를 신다가 그래도 아파서 구두를 없애고 쿠션있는 슬리퍼를 신는다. 평소 안면이 있는 원로 연극인 박경자씨가 대구에 왔다가 지친 그녀를 보고 “몸이 가장 힘이 들 때 인간은 가장 숭고해진다”고 위로해주었다. 그게 약이 되었다. 매일 칠성시장과 할인매장, 농협 등에서 직접 장을 본다. 물품 체크리스트가 250여종이 된다. 직원까지 집에 데려다 주고 오면 다음날 오전 2시 무렵 취침. 요즘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달라졌다. 무슨 위인이 아니다. 그냥 ‘세금 잘 내고 가족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영세 식당주’라며 활짝 웃는다. 빨강 앞치마 차림의 그녀가 ‘알프스 소녀’ 같았다. 휴일은 매주 일요일. 영업은 오전 11시30분~ 밤 11시30분. (053)423-9625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5.2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이탈리안 레스토랑 ‘누오보(NUOVO)’
이탈리안 레스토랑 누오보(NUOVO·새롭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대구스타디움 근처에 있다. 꼭 ‘외딴 성채’ 같다. 잠시 정갈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건축디자인이 음식 맛을 압도한다. 실내 분위기가 명품 레드와인을 닮았다. 한편으론 이웃집 아저씨의 푸근함이 깃들어 있다. 이게 디자인 감각 아닐까. 극도의 심플함, 그러면서도 도도한 휴머니즘이 공존한다. 레스토랑이면서 일정한 수준을 가진 갤러리다. 2009년 9월에 문을 열어 이듬해 5월 최영범 사장의 고집으로 갤러리까지 연다. 지역에선 처음으로 갤러리버전의 레스토랑 시대를 열었다. 차도에선 맨 위에 있는 3층만 빼꼼히 보인다. 단층 집인가 싶지만 실은 아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3층 건물이다. 시선(창문)은 거의 차단했다. 그래서 첫인상이 꼭 회색톤 ‘중세 기사’ 같다. 실내 포인트 오브제가 방문객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입구의 통유리 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론 갤러리, 정면에는 근처 농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가림벽이 보초처럼 서 있다. 오른편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벽체는 노출 콘크리트조, 바닥은 갈색 티크집성목으로 치장해 놓았다. 2층 입구에는 인도네시아 폐선을 갖고 육중한 ‘원목커튼’을 설치해놓았다. 북측 언저리가 짜릿하다. 1~3층이 하나로 뚫려 있는, 천고높은 개방공간이 있다. 거기에 10여개의 장식등이 모빌처럼 달려있다. 3층에서 1층 아래를 내려다보는 맛이 각별하다. 기하학적 미학이 돋보이는 식탁을 향해 셔터를 눌러본다. ◆ 맛있는 건축디자인 거기에 한 명의 건축디자이너가 나른하게 앉아 있다. 이 집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을 한 이용민씨. 그가 누오보를 음식에 비교한다. “다진 마늘을 듬뿍 넣어 입안 가득 저며오는 묵직한 보디감의 양념 갈비 같아요.” 그는 냉면집에서 물냉면과 비빔냉면이 먹고 싶을 때, 매운탕과 담백한 국물의 탕이 같이 먹고 싶을 때, 이 대략 난감한 욕심을 어떻게 충족 시킬 것인가라는 갈등과 고민으로부터 누오보의 건축개념이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키워드는 비움과 채움(VOID & SOLID),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란 건축적 화두가 누오보에 감춰져 있다. 식당 공간을 연출하는 건축적 기법은 무수히 많다. 같은 메뉴의 음식을 조리할 때 어떠한 재료로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맛의 차이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건축 또한 마찬가지. 공간에 담아야 할 프로그램의 기능적 요소가 합리적으로 해결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시각적으로도 그 미적 아름다움이 기능과 잘 조화되었을 때 비로소 좋은 맛갈을 지닌 건축물로 태어난다. 음식이 허기진 배를 채우는 역할만 한다면 미각을 통해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건축의 미적 조화는 맛있게 잘 조리된 음식의 맛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휼륭한 건축물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감흥은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한 포만감과 일치한다고 해도 그 표현에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그는 건축과 인테리어 계획에 있어서도 역시 내외부를 하나의 개념으로 일체화시키는 데 더욱 주력했다. 2층의 창문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동쪽은 좀 넓게하고 반대로 서쪽 벽의 창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풍광을 가려주기 위해 한 뼘 정도의 폭만 주었다. 2층에 아주 특이한 나무 조각품이 있다. 삼성가 소유인 리움미술관 측에 계약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누오보로 흘러 들어온 윤석남의 ‘할머니와 유기견’ 시리즈물이다. 연작 108개 중의 하나다. 전시가 있을 때는 필히 갤러리부터 먼저 관람한 다음 레스토랑을 이용하면 닫힌 감성의 뚜껑이 활짝 개봉될 것이다. 그렇게 부드러워진 감성으로 레스토랑을 이용한다면 한층 더 우아하고 풍성한 식탁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 누오보 갤러리 누오보 갤러리를 20여명의 작가가 지나갔다. 영남대 서양화과 정병국 교수를 필두로 최병소, 제여란, 최병소, 윤우승, 차규선 등이다. 연 6회 이상의 초대 기획전으로 구성되는데 매년 1회의 기획전에서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국내외 아트페어에도 참가하고 있다. 근처에 대구미술관과 대구스타디움이 있다보니 국내외 VIP가 주도적으로 이용했다. 2011년에 개최된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 중국 스포츠 브랜드 업체인 ‘리닝’이 누오보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한다. 리닝이 후원 선수로 육상에 아사파 파월, 장대높이뛰기의 이신바예바, 창던지기 안드레아스 토르킬드센 등이 대회에 참석했다. 리닝의 소속 선수를 지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누오보에서 선수 취재와 각국 기자단의 저녁 만찬 등 여러 행사가 이어졌다. 지난해 세계 에너지 총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9월 중순쯤 대성에너지가스 본사로부터 세계에너지 총회에 참석하는 귀빈의 저녁 만찬을 누오보에서 하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참석 귀빈은 각 나라의 장관급 이상이었다. 후에 대성 측으로부터 모든 귀빈이 매우 만족하였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 첨단 와인셀러 일반 레스토랑에선 보기 힘든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 와인도 보유하고 있다. 1등급 샤토 무통 로칠드, 2등급 샤토 꼬 델스투르넬과 샤토 린치 바주, 3등급 샤토 지스쿠르, 4등급 샤토 탈보와 샤토 라퐁로쉐 등이다. 이탈리아 고급와인인 바를로, 사시카이야, 브로넬로 디 몬탈치노, 티냐넬로가 포함되어 있다. 신세계와인 중에서 세계 와인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와인도 맛볼 수 있다. 와인셀러도 고품격이다. 제작비만 1천여만원. 프랑스, 독일 등에서 기술을 습득한 모 창호 전문업체에서 국내에선 처음으로 누오보에 설치한 첨단셀러다. 안에서 문을 잠그면 밖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방음이 완벽하다.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을 분리하여 저장하고 레드와인은 18℃, 화이트와인은 10℃에서 보관한다. ◆ 음식 이야기 레스토랑의 총괄 매니저인 김강우씨(39)를 만났다. 안동 출신인 그는 90년대 중반 음식에 입문했다. 대명동 앞산의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고 2000년 초반 수성구 레스토랑업계에 진출한다. 비잔티움의 오픈멤버로 참가했다. 와인과 프랑스요리에 대한 열망으로 시내의 프렌치 레스토랑인 ‘디종’에서 6개월간 수련을 쌓는다. 다시 수성구에 입성하여 ‘포세이돈 레스토랑’ 오픈의 주축을 담당한다. 이어 빈센트 레스토랑에서 기본입지를 다지고 2000년 중반 수성구에 큰 반향을 불러 온 라벨라 쿠치나에 있다가 2009년 누오보 오픈멤버로 참여한다. 그는 지금과 같은 메뉴라인을 만드는 데 적잖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오픈 초기부터 식재료에 대한 까다로운 잣대를 항상 추구해 왔다. 국내산 한우 1등급 이상의 안심과 채끝등심만을 고집했다. ‘누오보 식재료는 정말 귀하고 깐깐하고 건강하다’는 평가를 듣고 싶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메뉴라인이 형성된다. 그동안 다소 부족했던 생선요리에 대한 비중을 늘린다. 바닷가재·농어·연어·새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생선모듬요리, 런치메뉴인 파스타코스도 새로이 선보인다. 그는 손님의 욕구를 잘 핸드링한다. “손님 욕구는 제각각입니다. 일단 선선한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먹도록 하는 게 제일 기초적인 욕구죠. 여기에 최상의 서비스와 분위기가 이루어지면 더 만족스럽죠. 하지만 대다수 셰프는 여기서 만족하죠. 손님의 욕구는 셰프의 욕구를 넘어서기 마련입니다. 이 대목에서 총괄 매니저의 중재와 조화 능력이 절실합니다.” 이를 위해 ‘셰프추천메뉴’를 추가했다. 요즘 대세인 힐링·소울푸드, 한때 세계 최고 인기를 얻었던 스페인 엘불리 레스토랑에서 유행한 ‘분자요리’에도 관심을 가질 계획이다. 점심 특선은 3만6천원부터. 저녁 정찬은 9만원부터 11만원까지. (053)792-6900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5.16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 수성구 이탈리안 레스토랑 ‘부온 아뻬띠또’ 박종필씨
광장보다 골목이 더 ‘민주적’인 것 같다. 광장은 다소 수직적 경향을 보이는데 골목은 상당한 ‘수평적 울림’을 갖고 있다. 광장은 다국적 브랜드가 독점하겠지만 골목 가게는 빈티지 계열의 간판에 자기 취향을 살짝 묻혀 둔다. 선진국으로 접어들수록 광장음식 라인에 살짝 질리게 된다. 그 무렵 골목식당이 하나둘 ‘사금’처럼 피기 시작한다. ◆ 청각장애… 요리를 만나다 대구시 수성구 중동 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부온 아뻬띠또(Buon appetito, ‘맛있게 드세요’란 뜻의 이탈리아어)’. 부온은 무채색 주택가 한켠에 포인트 벽지처럼 붙어 있다. 10년간 기본기를 다지고 난 오너셰프 박종필(34)은 부모의 집 1층 한켠에 ‘꿈터’를 차릴 수 있었다. 열정의 10년은 청각장애의 무게와 조화를 이룬다. 대구에서 태어난 박 셰프는 중학교 3학년 때 청각신경을 크게 다친다. 왼쪽 귀는 청각능력을 완전히 상실해서 보청기도 낄 수 없는 상태. 오른쪽 귀는 보청기를 해도 소리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상대의 입 모양을 보면서 겨우 의사소통을 한다. 청각장애 4급이다. 기자는 장남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림자처럼 도와주는 아버지(박규헌)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중학 3학년때 다친 청각신경 정규학교 공부 늘 발목 잡아 졸업후 음식 만들기 도전 레스토랑서 산전수전 겪고 부모 집 1층 한켠에 ‘둥지’ 닭가슴살 스테이크볶음밥 착한 가격에 양도 많아 인기 정규 과정의 공부는 포기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한쪽 청각능력도 상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한 공고에 입학했지만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들리지도 않고 막막했다. 도대체 뭘 할 것인가. 졸업 후 대구미래대 영상광고학과를 다녔는데 또 적성에 안 맞았다. 또래집단과 소통이 잘 안 되었다. 평소 스테이크와 스파게티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음식 만들기에 도전한다. 마침 그의 친구가 대구의 한 뷔페식당에서 일하고 있어 그를 통해 수성못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빈센트’에 들어간다. “바다를 처음 만난 아이 같은 심정이었어요. 그 바다의 수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어 한없이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상태였죠.” 요리부장은 그가 할 줄 아는 게 없어 안 받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해맑은 눈빛을 믿었다. 그의 동선은 다른 주방 멤버보다 훨씬 느리고 끊어졌다. 1년 정도 있으면서 기초 칼질법과 주방시스템을 배웠다. 처음으로 요리책도 본다. “모두 쉬워 보였는데 해보니 하나같이 어려웠어요. 칼질을 했을 때 단면이 매끈해야 합니다. 처음엔 두께도 왔다 갔다 하고 모양도 별로였죠. 단면이 매끈하지 않으면 채소의 영양분이 잘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셰프마다 칼질 방법이 달랐어요. 가르쳐주는 대로 했는데 저한테는 맞지 않았습니다. 자주 해보니 제 스타일이 나오더군요. 책은 하나의 기준이지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고요. 경험과 현실이 풍부해야 꿈에 더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어요.” 스테이크소스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건 비법이라서 잘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스파게티, 볶음밥 등의 소스를 배웠다. “볶음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밥 알갱이의 부드러운 정도와 습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그리고 그 밥과 어울리는 식재료를 세팅하는 일은 예술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기름으로 볶지만 궁극엔 기름냄새가 느끼함을 주지 않도록 만드는 게 중요해요. 밥은 질척해서도, 너무 꼬들꼬들해서도 안 되고, 그러면서 푸석해서도 안 되죠. 저는 한국형 파에야(스페인의 대표 볶음밥) 스타일의 닭가슴살스테이크를 곁들인 과일 볶음밥을 만들었어요. 고기의 푸짐함, 심플하면서도 고소한 밥맛, 그 둘을 합쳐주는 파인애플을 삼합처럼 결합시켜봤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더라고요.” 어느 날 프라이팬을 잡아보고 싶었다. 호기심 때문에 팬을 잡았다. 처지를 이해한 조리부장이 도와주었다. 프라이팬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절감한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맛은 천차만별이었다. 과연 내가 좋은 셰프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 시내 ‘작은프랑스’에서 작은 깨달음 대구 도심 ‘작은프랑스’ 2호점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운다. “보통 셰프의 실력이 늘수록 손님이 어떤 맛을 원하는지에 더 중점을 두죠. 그런데 올챙이 시절에는 좋아하는 메뉴라인을 고집하잖아요. 요리가 취미를 넘어 사업의 영역에 들면 ‘손님의 혀’에 대해 고민을 합니다. 어떤 분은 손님보다 자기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지만 저는 일단 손님이란 제약조건을 존중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걸 작은프랑스에서 절감했는데 제겐 새로운 충격이고 전환점이었습니다.” 일반 손님은 어떤 맛을 원하는가. 평균적인 맛이다. 그래서 식당에 가면 맛이 거의 평균적이다. 짜다거나 싱겁다는 불만이 전달되면 거기에 따라 간을 조절하고 변화를 주었다. “여러 승부처가 있지만 저는 일단 식재료의 신선도라고 봅니다. 신선도가 밀리게 되면 셰프는 자기 요리를 많이 위장하고 부풀리고 과도하게 수식하죠. 일종의 ‘거짓말 음식’이 되는 거죠. 음식 중요도의 경우 식재료는 7, 소스는 2, 손맛이 1 정도의 비중이 있다고 봅니다.” 재고관리법을 배운 뒤 마산의 한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주방장이 된다. 파도조차 그를 축하했다. “거기서 셰프는 조리술 못지않게 경영마인드까지 겸비해야 된다는 걸 깨닫습니다.” 마산의 해산물을 이용한 해산물크림스파게티를 자신있게 개발했다. 당시 마산에선 그런 버전이 다소 생소했다. 평소 손님이 뜸했는데 그 메뉴로 인해 단골라인이 푸짐해진다. “보통 주방장이 직접 식탁 옆에서 자기 음식에 만족하는지를 물어보는데 그건 잘못이라고 봐요. 셰프 체면 때문에 속으로는 맛이 없어도 겉으로는 맛있다고 얘기합니다. 이럴 땐 홀 서버를 통해 체크하면 식당 메뉴의 만족도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9년이 지났다. 그는 겨우 주방시스템, 식재료 재고관리, 마케팅기법, 홀 서빙법 등에 대한 나름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더 이상 그에게 청력은 ‘장벽’이 아니었다. ◆ 7년 만에 터득한 스테이크 굽기 스테이크를 잘 굽는다는 것. 모든 레스토랑 셰프의 꿈이다. 초보 의사가 메스로 신체를 절개하고, 수술 후 완전하게 봉합하는 감각을 익히려면 실제 자기 집에서 돼지고기 비계 등을 갖고 수천 번 반복 연습을 해야 한다. 그도 스테이크를 정복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어쩌면 굽는 것은 금세 배울 수 있다. 그런데 덩어리째 온 고기를 정량대로 썰어내고, 그 속에 박힌 힘줄과 기름 덩어리를 제거하고, 냉장고에서 숙성을 해야 하는 일련의 준비절차가 셰프를 시험에 들게 한다. 경산의 한우협동조합에서 가져와서 직접 장만을 한다. 하루 정도 냉장고에서 4~5℃로 하루 정도 숙성시킨다. 그는 요즘 자기가 개발한 블루베리소스를 베이스로 한 안심스테이크에 10점 만점에 9점 정도 점수를 준다. 그는 혼자 모든 걸 진두지휘하기 때문에 고기를 어떻게 구워줄지 물어보지 않고 알아서 구워낸다. 이 대목이 과연 옳은지는 기자도 의문이다. 그는 착한 가격을 제시했다. 스테이크는 2만7천원, 샐러드와 수프는 생략. 대신 양을 늘렸다. 190g 안팎을 준다. 평소 걸쭉한 브라운계열 소소에 길이 든 사람에겐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선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단맛을 잘 특화시켰다. “블루베리소스는 지역에선 제가 주도적으로 사용한 것 같아요. 블루베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 자연 고기에 맞는 곁재료도 달라지죠. 이걸 찾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TIP 그의 음식을 세 가지 먹어봤다. 닭가슴살스테이크볶음밥(9천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대구에선 드물게 과일 베이스 소스를 블루베리소스안심스테이크는 핏기를 대폭 줄인 웰던 같은 미디엄 스타일이어서 조금 아쉬웠다. 왕새우 해물크림스파게티(1만2천원)도 평균적 맛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코스 대신 단품 위주로 팔고 있다.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해야 되기 때문이다. 청각이 좋지 않아 손님과 매끄러운 대화가 어렵다. 그래서 손님이 직접 자신이 어떤 식성을 갖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메뉴체크리스트를 작성하도록 한다. 지난해 7월 오픈했다. 광고도 안 했다. 오픈 전에 워밍업 삼아 2년가량 피자가게도 가동했다. 장사는 됐지만 식재료 구입과 배달까지를 도맡은 아버지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현재 버전의 식당을 차렸다. 사전에 예약을 하면 숨겨둔 자신만의 메뉴라인을 선보이겠단다. 그의 맛은 아직 실험중이다. 그래서 더 기대하고 격려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부디 ‘골목식당가의 폴 포츠(휴대폰 판매원에서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를 통해 일약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태어난 성악가)’로 일취월장하길. 대구 중동 165-2. 매주 화요일은 휴무. (053)761-8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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