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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포차의 전설’ 대구 계산동 ‘프리타임(그날 포장마차)’ 8년 장수 비결
아날로그 시절 추억의 술판은 ‘포장마차’, 디지털 시대 추억의 술판은 ‘포차’가 주인공. 옥외형인 포장마차에선 ‘묻지마 메뉴’였다. 소주·석쇠돼지불고기와 곁들여 먹던 가락우동·곰장어·멍게·해삼류가 대세였다. 하지만 요즘 포차는 많이 다르다. 실내형이고 메뉴도 쫀드기·라면땅 등 추억의 불량식품에서 샐러드바·1.2m꼬치·라면 등을 ‘DIY(Do it yourself) Food’처럼 직접 요리해 먹도록 한 게 특징. 또한 주류도 와인·맥주·막걸리포차 등으로 분류된다. 한마디로 복고에서 뉴모드까지 모두 끌어안는 퓨전주점 스타일. ◆포차의 족보를 찾아서 포차의 원류는 뭘까. 멀게는 ‘학사주점’과 ‘민속주점’, 가깝게는 IMF 외환위기 직후 전국을 강타한 ‘속에 천불 정구지찌짐 막걸리’도 한 맥을 이어준다. 이게 찌짐집 붐의 원동력이 된다. 대구의 경우 수성구 김대건성당 근처의 ‘찌짐집’이 유명한데, 사장 유진혁씨는 대구 MBC FM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인기 DJ였다. 찌짐집 붐은 팔도 막걸리만 파는 막걸리 전문 카페 붐으로도 연결된다. 4년 전 수성구 중동교 근처에서 태어난 ‘3천냥대포’도 일조한다. 3천냥대포는 몇 년 사이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해 나갔다. 거짓말 조금 보태 한 집 건너 하나가 3천냥대포였다. 올해 들면서 지역의 3천냥대포는 포화상태에 이른다. 그 이전에는 ‘미워도 다시 한 번’ 등과 같은 예전 극장간판을 내건 추억의 대폿집도 인기를 얻었다. 또 별스러운 주점이 둘 있다. 바로 80년대 인천에서 생겨난 어묵과 각종 꼬치를 전면에 앞세운 고급스러운 실내 포장마차 체인점이었던 ‘투다리’, 일찍 귀가 못 하는 중년을 겨냥한 포차형 호프집이었던 ‘간이역’ 등이 득세했다. 하지만 다들 유행주기를 넘어섰다는 평가다. 또한 세계 각국의 맥주를 맘껏 맛보게 했던 수입맥주전문점 ‘와바(WABA)’ 붐도 이젠 좀 주춤해졌다. 인기주점의 라이프사이클은 채 2년을 못 넘어서고 있는 게 사실이다. ◆ 포차 ‘프리타임’의 1급 영업비밀은… 주당들 사이에선 ‘전국 포차의 왕초’가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있다고 한다. 인쇄골목 한복판에 있는 ‘프리타임(포차 그날)’이다. 한 집인데 상호는 일부러 두 개. 이것도 ‘펀 마케팅’의 일환이다. 오후 7시에 가게를 찾았다. 손님으로 들끓는다. 소문에는 ‘이 집에 오면 친구 둘이서 2만1천원 내고 소주 두 병 먹고 무려 30여가지의 각종 반찬을 안주처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정말일까? 확인하고 싶었다. 잉꼬부부 사장인 황수열(45)·박지선씨(49)가 “정말이다”면서 부리나케 한 상을 차려준다. 즉석 오징어튀김, 샐러드, 똥집장조림, 옛날소시지, 꼬막, 삶은감자, 김밥, 옛날잡채, 닭조림, 맛살꼬치, 납작만두, 부추전, 라면땅튀김, 쥐포튀김, 오징어깐풍기, 삶은계란, 옛날꿀호떡, 삶은땅콩, 완두콩, 고디, 번데기, 떡볶이, 쫀드기, 눈깔사탕, 콘칩, 줄줄이비엔나조림, 염통꼬치, 어묵조림, 동그랑땡, 풋고추무침, 오이, 도토리묵, 마른멸치, 떡국, 두부구이, 김가루무침, 계절과일, 사과맛아이스크림, 추억의 쭈쭈바, 아폴로, 뽀빠이, 별사탕.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메뉴가 이어져 나왔다. 너무 많아 세 차례로 나눠 낸다. 놓을 자리가 없어 접시 위로 접시가 올라간다. 처음 온 사람은 여느 집에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추억의 불량식품에 웃음을 참지 못한다. 당연히 다음에 나오는 질문, “아저씨, 이렇게 퍼주고도 남아요?” “포차는 마음 비워야 성공한다. 기본 안주 이렇게 주고 남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손님은 그걸 두 배로 더 잘 안다. 불경기가 절정이다. 그래서 퍼주기 마케팅을 시도했다.” ◆ “재미있고 푸짐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 솔직히 기자가 둘러본 이런저런 포차의 메뉴 수준은 이 집 포차보다 맛과 정성이 좀 떨어진다. 부부는 “싼 게 절대 비지떡이 되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좋은 식재료를 찾아 서문·칠성시장을 매일 2~3시간 뒤진다. 주방 안으로 들어가봤다. 남편은 소매 없는 러닝셔츠를 입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맸다. 얼굴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손님은 친척이다. “우리 집에서는 절대 한숨이 없다. 우는 얼굴이라도 갈 때는 웃는 얼굴이어야 한다면서 힘든 사람 보면 서비스 소주를 몰래 내민다.” 전국을 떠돌다가 8년 전 포차 오픈식 날 하루 매상이 막걸리 판 돈 2천원뿐이었다. 부부는 장사의 생리를 안다. 한 사람이 대박을 몰고오는 ‘강남제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남편과 이미지 사진을 찍는 걸 즐기는 아내는 교복차림을 즐긴다. 고령읍 출신인 남편은 스무 살 때 대구로 와서 서구 비산동 비산네거리에서 ‘구루마’ 포장마차를 했다. 단속을 피해 비산동네거리에서 삼익뉴타운 정문 앞, 감삼네거리 등지로 옮겨다닌다. 그러다 서울로 간다. 이주일씨가 회장으로 있던 서울 ‘무랑루즈’ 본점에서 주방보조로 있었다. 과일 파트 및 양식·중식·일식을 다 경험한다. 그 후 고향으로 내려와 호프집을 낸다. 고령읍에서는 최초였다. 호프집에 포장마차 버전을 결합시켰다. 다시 경기도 수원 근처 병점으로 가서 지금 형태의 실내포장마차를 연다. 인근 삼성본사 직원들도 많이 찾았다. 8년 전에 대구로 온다. 자본금 50만원, 테이블 세 개로 시작한다. 이젠 20대부터 70대까지 찾는다. 단골이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고 부부 사진도 찍어준다. “포차는 폼을 잡으면 안 된다. 시설은 후미지고 허름해도 분위기가 재미있고 푸짐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 초창기에는 지금보다 반찬이 적었다. 15가지 정도만 깔았다. 역반응이 왔다. 몇몇 손님은 “추억의 과자를 왜 주냐. 먹지도 않는데”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건 제 것 아니고 손님 것이니 집에 가져가서 아이한테 주면 된다”고 응수했다. 결국 주인이 이긴다. 부부는 평생 포차인생이 될 것 같단다. 체인점은 절대 안 내겠다고 약속한다. 대를 잇는 포차가 됐으면 싶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 53-3. (053)253-0983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9.13
[이춘호기자의 푸드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22) 대구 수성구 두산동 ‘참우 양곱창’의 장손태
그의 몸에는 집시의 피가 흐른다. 유목민으로 사는 게 딱일 것 같다. 그런데 그는 하루 종일 식당에 갇혀 산다. 그게 그의 매력 포인트. 배기음이 천둥소리 같은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출근한다. 해적처럼 두건을 쓰고 찢어진 청바지 허리춤엔 체인이 드리워져 있다. 강렬한 고글형 선글라스와 목걸이…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당연히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난 6월 대구 수성직영점으로 오기 전 2004년 북구 구암동 시절에는 MTB 타던 차림으로 서빙을 했다. 그것도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다. 다들 ‘미스터 양곱창’이라고 부른다. 아직 대구에서 소곱창은 낯설다. 좋은 물량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극복했다. 텃세 드센 축산물 가공업자들을 내 사람으로 만든 덕이다. 이 바닥에선 그런 재주도 실력이다. 수성구 두산동 수성못 동쪽 먹거리타운 중심부에 있는 ‘참우 양곱창’에서 장손태 사장(47)을 만났다. ‘참우’(參宇)란 말은 시내 유명한 작명원에 의뢰해서 지었다. ‘다 같이 참여하는 집’이란 뜻. 자본금 2천만원으로 시작했다. 3년 만에 막창을 버리고 곱창으로 돌아온다. 제대로 된 곱창을 찾았기 때문이다. 양곱창은 소양과 곱창의 합성어. 곱창을 축으로 곁에 소양을 올리는 것이다. 문제는 소곱창인데 생명은 ‘곱’에 있다. 일반인은 기름인 줄 알고 먹지 않으려고 하는데 미식가는 이걸 더 선호한다. 곱은 곱창 안팎에 묻어 있는 신선한 지방질의 효소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대다수 집에는 곱이 없다. 손질 과정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 터프가이 학창시절 청도 출신인 그는 학창시절 반항적이었다. 하지만 보스기질도 조금은 보였다. 고교 졸업 후 대구로 온다. 공부는 꽝이었다. 일찌감치 포기한다. 군대 가기 전 생애 처음으로 3개월간 시내 하이센스란 카페에서 종업원 생활을 한다. 군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외식업 관련 책을 읽었다. 제대하자마자 요리학원에 들어간다. 자격증을 따고 인천으로 넘어가서 호프집 주방에서 설거지부터 배운다. 다시 대구로 내려와 중구 삼덕동에 있는 레스토랑 바다성의 주방보조로 들어간다. 그때 그는 비로소 학원자격증과 현실의 실무가 따로 놀고 있다는 걸 안다. 역량을 발휘해 매출을 많이 올렸다. 하지만 자꾸 자기는 일하는 기계인 것 같았다. 중구 동인동 국제호텔 맞은편 미래 레스토랑에서 총지배인으로 지배인 관리를 했다. “주인들은 자꾸 덜 좋은 재료를 갖고 돈을 벌 생각만 하더군요. 좋은 재료를 갖고 오면 10분이면 끝날 걸 질이 떨어지는 재료를 갖고 하려고 하니 시간과 인건비 낭비가 생겼습니다.” 그는 그때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란 사실을 터득한다. 다시 시내 한 로바다야키로 가서 1년쯤 일식을 배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룸살롱에도 들어간다. “유흥업은 가슴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죠.” 그 정도면 삶의 기본기를 충분히 다졌다고 생각하고 독립을 감행한다. 가장 좋은 부위는 서울로 다 올라가… 손질·보관 과정서 쉽게 녹아 사라져… 양곱창집 대부분 곱 없는 곱창 내놔 곱이 제대로 붙은 좋은 재료 구하려 도축장 직접 방문 “황소를 최고로 쳐… 암젖소는 너무 질겨 전골용으로 사용” ◆ 으랏차차! 최고의 양곱창을 찾아라 서른한 살에 생애 첫 식당을 창업한다. 북구 구암동의 돈가스 전문점이다. 주는 것을 받기먹기만 하다가 모든 걸 혼자 결정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종업원은 자기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종업원이 퇴근하면 자정 넘어 남은 일을 정리해야만 했다. 장사는 잘 됐는데 이것저것 빼고나니 남는 건 ‘생고생’뿐이었다. 5년에 걸쳐 목을 맸던 가게를 정리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양곱창이 생각났다. 스무살 때 부산 서면 문화호텔 옆 양곱창 골목에서 먹어 본 그 양곱창 요리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처음엔 참우참숯구이를 열었다. 당시 양곱창 시장은 광우병 파동 때문에 완전 하락세.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위기가 기회다’라고. 하지만 양곱창 맛만 알았지 장사할 준비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부산의 양곱창 고수한테 매달렸다. 수영로터리 근처의 진주양곱창, 문화호텔 옆 문화양곱창 등을 잡았다. “대박 식당이지만 정작 주인들은 곱창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더군요. 업자가 제공하는 재료에 안주하고 있었어요. 후(後)처리는 알아도 전(前)처리되는 현장의 정보는 상당히 약하다는 걸 알았던 거죠.” 식재료의 출발 상황은 모른 채 업자들이 가져다 주는 재료만 갖고 재주를 부리는 국내 양곱창문화에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 인터넷과 책에도 1급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잠입했다. 시내 모 도축장으로 쳐들어갔다. “‘저승사자’라 불리는 총책임자에게 ‘내가 가져갈 곱창을 내가 직접 작업해서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죠. 절대 안된다고 하더군요. 위생 문제 등이 걸림돌이어서 관계자가 아니면 절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 안된다는 걸 되도록 만드는 데 3년이 걸렸다. 소의 부산물을 정리하는 내장실에 들어가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가장 좋은 부위는 역시 대구보다 서울로 다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재료 손질 과정에서 곱창의 가장 주요한 성분인 ‘곱’이 거의 손실된다는 것이었다. ◆ 좋은 곱창 이야기 소 한 마리 잡은 뒤 기름을 제거하면 곱창은 5~7㎏ 남짓. “우린 지금 제대로 된 소곱창을 맛보기 힘이 듭니다. 도축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식당주가 아니라서 세밀하게 처리하기가 어렵죠.” 곱창의 안팎에는 양질의 기름인 ‘곱’이 촛농처럼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장에 들어있는 똥을 물총 등으로 강압적으로 제거하면 곱은 금방 녹아내린다. 곱창에만 곱이 있다. 곱창 중에서도 40% 부위에는 곱이 없다. 그는 직접 좋은 곱이 있는 부위를 선별해 갖고 온다. 그가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통상 월요일은 재료 상태가 별로란다. 가령 목요일 도축 예정인 소가 일정이 밀려 월요일에 잡힐 경우 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며칠 사이에 소가 사료를 먹지 않고 물만 먹기 때문에 내장이 다 비고 당연히 효소도 활성화가 안된다. “도축장에서 좋은 곱창을 확보하는 즉시 얼음물에 담가 곱을 살립니다. 가게에 오면 김치냉장고 안에서 숙성시켜요. 냉동실에 들어가면 곱이 녹아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자를 데리고 숙성실로 들어간다. 투명하게 붙어 있는 곱창껍질을 직접 벗겨보인다. “일반 소비자는 곱창에 붙은 껍질을 무청 시래기 피막처럼 벗겨줘야 진정한 맛이 난다는 사실을 잘 모를 거예요.” ◆연꽃처럼 피어나는 불판 위 소곱창 주문이 들어오면 숙성실의 곱창에 마늘과 키위, 파인애플 등을 넣어 버무린 뒤 불판에 올린다. 1m가 넘어보이는 길다란 소곱창이다. 조금 있으니 풀이 죽어 있던 곱창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계란이 불판에서 딱딱해지는 것처럼 곱창의 조직이 경직되기 때문이다. 그가 살갑게 가위로 먹기 알맞게 잘라준다. 한 점 씹어봤다. 곱창 안팎에 붙어 있는 곱과 기름이 황홀한 맛을 형성한다. 대게 내장 맛이다. 그가 좋은 곱창에 대해 설명해준다. “황소(육우)의 곱창이 가장 좋죠. 새끼 많이 낳은 암소의 곱창은 상당히 질깁니다. 최악의 경우는 오래된 암젖소입니다. 이놈의 곱창은 너무 질겨 씹어도 육질이 잘 풀리지 않는데 일부 업소에선 곱창전골용으로 자주 이용하죠.” 좋은 곱창을 확보한 뒤 좋은 반찬거리를 찾아다닌다. 마늘부터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젠 북구 매천시장에서 손으로 직접 깐 마늘만 갖고 온다. 시중 마늘보다 20% 비싸다. 고춧가루도 엄선한다. 태양초를 선별해 동네 방앗간에서 빻아서 갖고 온다. 참기름도 30년 고수한테 배웠다. 요즘은 시내 참기름 집에서 직접 짜온다. 채소는 매천시장에서 구입해오는데, 조만간 귀농한 유기농 농부한테 계약재배를 시키고 싶단다. 곱창에 집중하라고 TV도 켜지 않는 대신 자신이 찍은 숱한 사진을 슬라이드쇼로 보여준다. 그리고 믹서로 직접 간 알로에주스 한 잔을 디저트로 내민다. 맛의 안배가 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010-3528-9563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8.30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냉면의 변신
‘냉면, 막국수, 밀면.’ 한 가족 음식이다. 모두 메밀이 원재료다. 많은 사람들은 냉면은 ‘북한음식’이라고 믿는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남한에도 북한 평양냉면과 쌍벽을 이룰 만한 냉면이 있다. 바로 ‘진주냉면’이다. 진주냉면은 사골육수가 아니라 해물육수를 사용하고 육전을 꾸미로 올리는 게 특징이다. 함흥냉면을 비빔냉면의 메카로 만든 건 남한 냉면업자들. 냉면을 더 많이 팔기 위해 냉면을 물냉면과 비빔냉면으로 양분시킨 것이다. 북한의 조선음식사전에는 함흥냉면이란 말이 없다. 비엔나에 비엔나커피가 없듯 함흥에 가면 함흥냉면이 없다. 거기서는 함흥냉면 대신 ‘농마면·회국수’로 부른다. 농마는 ‘녹말’의 북한말이다. 상당수의 냉면 전문업소에서는 물냉면과 비빔냉면에 넣는 면의 재료가 같다. 이건 냉면에 대한 모욕이다. 물냉면과 비빔냉면의 면의 재료는 완전히 다르고 실제로 달라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우린 육수가 들어가면 물냉면이고 물이 없으면 비빔냉면인 줄 잘못 알고 있다. 북한 냉면의 면은 메밀 100%로 만든다. 육수는 나중에는 꿩육수가 되지만 초창기엔 동치미 육수가 주로 사용됐다. 동치미국수가 평양 물냉면의 원형인 셈. 北에 평양냉면 있다면 남한엔 진주냉면 있어 함흥엔 함흥냉면 없다 ◆ 숨겨진 메밀의 족보 메밀의 어원은 뭘까. 나그네 식객인 박정배씨가 펴낸 ‘음식강산’(한길사)에는 이렇게 설명돼 있다. ‘메밀의 어원을 언어학자들은 뫼와 밀의 합성어로, ‘산에서 나는 밀’이란 의미로 해석한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모밀 대신 메밀이 더 많이 사용됐다. 일본에서는 메밀을 ‘소바’라 부른다. 메밀로 만든 면도 소바라 부르는데 100% 메밀가루만으로 만드는 메밀국수를 ‘나마코우치소바’ 또는 ‘주와루소바’(十割蕎麥)라 한다. 일본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스타일인 ‘니하치소바’(二八蕎麥)는 메밀가루 80%에 밀가루를 20% 섞는다.’ 메밀은 생육기간이 가장 짧다. 약 2개월이다. 구황작물로는 더없이 좋다. 밀과 달리 메밀가루는 너무 푸석하다. 물로 반죽해도 잘 엉겨붙지 않는다. 메밀묵은 괜찮은데 메밀면은 다른 전분을 넣지 않으면 젓가락질을 하기 힘들 정도로 툭툭 잘 끊어진다. 그래서 잘 뭉치도록 전분을 섞는다. 메밀 열매도 볍씨처럼 속껍질과 겉껍질이 있다. 겉껍질을 벗겨내고 가루를 낼 때와 겉껍질까지 모두 갈 때 국수 색이 달라진다. 속껍질만으로 가루를 내면 흰색 계열이 되고 강원도 원주처럼 겉껍질을 다 넣으면 흑갈색을 띤다. 북한 냉면이 강원도로 오면 ‘막국수’로 변한다. 아직도 냉면과 막국수를 다른 음식으로 보는 이가 있다. 북한 냉면과 강원도 막국수의 차이점을 굳이 들라고 하면 막국수 면에는 북한보다 전분이 조금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 북한에서는 평양냉면을 만들 때 가급적 메밀만으로 만들려고 한다. 함흥의 회국수에서는 감자전분 100%로 면을 뽑아 고무줄처럼 탄력이 있다. 그런데 아직 대구는 비빔냉면과 달리 물냉면까지 가위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질긴 ‘고무줄면’을 낸다. 식감을 줄이는 주범이다. 막국수의 천국인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신촌리에 가면 춘천향토막국수협의회 영농조합법인이 있다. 이 법인은 막국수 가게 주인들이 세운 것으로, 막국수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메밀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근처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에서 체험용으로 사용되는 메밀가루도 여기서 제공된다. 이 공장에서 나오는 메밀가루를 사용하는 회원 업소는 30여곳이다. 춘천 막국수는 거의 메밀가루 70%에 전분가루를 30%를 섞는다. 강원도 막국수 명가는 춘천의 샘밭, 유포리, 부안, 별당 등이고 홍천으로 가면 장원, 횡성은 삼군리, 인제는 남북과 서호순모밀국수, 고성은 백촌과 산북, 속초는 삼대, 강릉은 삼교리동치미막국수, 원주는 남경과 황둔, 봉평은 현대와 장평이 유명하다. 하지만 맛은 다른 지역보다 한 수 위인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냉면과 강원도 막국수 전통을 퓨전으로 이어받은 건 부산의 ‘밀면’. 밀면은 ‘밀가루 냉면’의 준말. 부산 우암동 내호냉면이 1호점이다. 부산 피란민들은 갈수록 품귀현상을 보이는 메밀로 냉면을 만들기 힘들어졌다. 1956년 미국의 PL480 규정에 의거, 밀가루 11만4천t이 수입된다. 졸지에 밀가루 세상이 된다. 내호냉면은 메밀가루 대신에 밀가루 냉면에 고구마 전분을 섞어 새로운 면발을 고안해 낸다. 육수는 춘천막국수처럼 사골육수를 베이스로 했다. 강원도 양양은 특이하게 간장육수를 사용하기도 하고 동치미 육수에 사골육수를 섞어 육수를 빚는다. 이런 스타일이 대구에 한 군데가 있다. 바로 대동강(남구 봉덕동 948-13)이다. ◆ 진짜 메밀맛을 느끼게 하는 식당은 아쉽게도 우린 원형의 메밀국수의 맛을 이젠 볼 수 없다. 원형의 냉면·막국수 맛을 보려면 화전민촌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화전민은 정부 정책에 의해 73년 일제히 퇴거명령을 받는다. 지금은 메밀향이 죽어버렸다. 메밀가루를 낼 때 디딜방아나 멧돌을 이용해야 제대로 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공장의 롤러에 들어간 메밀은 롤러의 열기에 향을 거의 뺏기고 만다. 차선의 맛이라도 보려면 몇 가지 물어봐야 한다. 면과 온육수(뜨거운 사골육수)를 직접 내는지를 물어보라. 없다고 하면 사정없이 돌아서라. 상당수 식당이 식재료 상에서 구입한 봉지냉면 육수를 사용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대구에선 냉면 양대 산맥인 대동면옥(중구 계산동 13번지)과 부산안면옥(중구 공평동 94-5번지)이 면도 직접 뽑고 온육수까지 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강원도 명가의 분청사기 같은 걸쭉한 메밀의 맛은 아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8.2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서울의 역사가 묻은 식당들
지역 음식에 정통한 음식칼럼니스트도 막상 서울에 가면 막막해진다. 기자는 가끔 서울의 식당가 사정이 궁금하면 몇몇 고수한테 전화를 건다. 한식 및 서울의 전반적 음식문화에 대한 동향은 네이버카페 ‘포크와 젓가락’ 운영자인 나그네식객 황광해씨만큼 안목을 가진 사람을 찾기 힘들다. 전국 맛집 3천 곳을 찾아 팔도를 10바퀴쯤 돌아다녔다. ‘다이어리알(DiaryR)’이란 ‘한국판 미슐랭가이드’ 같은 푸드가이드북을 발간하는 다이어리알의 이윤화 대표도 고성능 안테나를 탑재한 미식가다. 그녀의 소개로 요즘 서울 CEO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비앙에트로’의 오너셰프 박민재씨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파워푸드블로거인 모모짱(전문양)은 비록 대구에 있지만 서울의 식당 트렌드를 잘 꿰고 있다. 그녀는 강남구 도곡동 453-12 프렌치 레스토랑 ‘Cuisson82(퀴숑82)’, 강남구 청담동 90-25 프렌치 비스트로 ‘레스쁘아’, 강남구 논현동 8-6 청림빌딩 1층 ‘스시타츠’, 강남구 신사동 650-6 ‘스시초희’를 강추했다. 만약 서울에서 제대로 된 푸드투어를 하고 싶다면. 다이어리알(02-533-8020)의 도움을 받아라. 5명 이상 단체에 한해 주문식 서울 맛집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은 육개장보다 설렁탕과 곰탕이 더 인기. 곰탕은 1904년 창업된 이문설렁탕(종로구 견지동 88)이 단연 좌장이다. 서울의 역사가 담겨있다. 1941년 오픈한 옥천옥(동대문구 신설동 94의 57)도 설렁탕 잘하는 집으로 소문이 나있다. 52년 모습을 드러낸 문화옥(중구 주교동 118의 3)은 을지로4가역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설렁탕 명가. 신사동 네거리에 있는 영동설렁탕도 마니아를 많이 품고 있다. 곰탕의 경우 80년간 3대를 이어온 은호식당(중구 남창동 50의 43), 1933년 문을 연 잼배옥(중구 서소문동 64의 4), 최근 경제단체 양 거두가 점심 회동을 해 유명해진 하동관(중구 명동1가 10의 4) 등이 명가로 통한다. 하동관은 전라도 나주의 하얀집,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의 박소선할매곰탕과 함께 국내 3인방 곰탕집에 속한다. 1939년 문을 열어 한국 전통 탕반문화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후 4시30분만 되면 문을 닫는다. 중탕과 재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깍두기 국물도 일품이다. 남대문 시장통 갈치골목에 있는 진주집(50년·중구 남창동 34의 31)의 대표메뉴는 꼬리토막(꼬리곰탕)과 꼬리찜. 서울식 해장국의 명가는 단연 1937년 문을 연 청진옥(종로구 종로1가 24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123호)이 고수로, 2008년 도심재개발 때문에 청진동 골목을 떠났다. 서울식 추어탕의 명가는 세 곳이다. 1926년 문을 연 형제추어탕(종로구 평창동 281의 1)·1932년 오픈한 용금옥(중구 다동 165의 1)·곰보추탕(동대문구 용신동 767의 6)이다. 흥미롭게도 다른 음식은 경상도 음식이 서울보다 맵고 짜고 얼큰하지만, 추어탕만은 서울식이 육개장처럼 자극적이다. 서울은 냉면이 강한 도시다. 서울에서 평양냉면을 가장 잘하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우래옥(1946년·중구 주교동 118의 1)이다. 보통 고기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섞어 사용하지만, 여기는 순수하게 고기만 삶아서 우려낸 육수를 사용한다. 원래 ‘서북관’으로 시작했으며, 창업주 고 장원일씨는 북한 출신으로 평양에서 ‘명월관’이란 식당을 하다가 광복 직후 서울로 왔다. 신당동에 떡볶이, 신림동에 순대가 있다면 오장동에는 ‘냉면거리’가 있다. 오장동 함흥냉면, 흥남집, 신창면옥 등이 이 거리의 터줏대감이다. 오장동 함흥냉면(1958년·중구 오장동 90의10)은 고 한혜선씨가 6·25 당시 함경남도 함흥을 떠나 서울에서 냉면집을 차렸다. 통상 함흥냉면은 홍어회무침을 꾸미로 얹는 매콤한 회냉면 스타일이지만 여기는 100%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쫄깃한 면 위에 간재미회무침을 올린다. 한일관(1939년·강남구 신사동 619-4)은 불고기 명가. ‘화선옥’으로 출발했으며, 창업주 신우경씨가 종로3가의 허름한 한옥집을 개조해 쇠고기국밥과 너비아니(불고기)를 팔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돌집(1948년·성북구 길음동 1065) 역시 불고기 명가다. 일본의 인기 여배우인 구로다 후쿠미가 한국을 소개하는 자신의 책에 게재하면서부터 일본관광객한테 엄청 인기를 얻는다. 부여집(1947년·영등포구 당산동 162의 13)은 도가니탕으로 이름을 알렸다. 강서면옥(1948년·중구 서소문동 120의 15)은 청와대도 인정한 평양냉면집이다. 한때 청와대 관계자들이 협박하듯 맛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창업주가 고사해서 유명해졌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인정을 받아 청와대에 납품했다. 그래서 ‘청와대냉면’이란 별명을 갖게 된다. 연남서식당(53년·마포시 노고산동 109의 69)은 연탄불 드럼통 식탁에서 갈비를 먹는데 특이하게 앉지 못하고 서서 먹는 게 특징. 6·25전쟁 때 노동자 문화가 그대로 전승된 이야깃거리 푸짐한 공간이다. 마포진짜원조최대포(56년·마포구 공덕동 255의 5)는 연탄불에 구워 먹는 양념돼지갈비를 서울에서 처음 선보였다. 오랫동안 돼지갈비를 찜으로 해먹고 삶아서 먹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대구 동인동찜갈비처럼 매콤한 버전으로 바꿔 놓았다. 해묵은 빈대떡이 그리우면 열차집(56년·종로구 공평동 130의 1)으로 가면 된다. 고려삼계탕(60년·중구 서소문동 55의 3)은 국내 최초의 삼계탕 전문점. 부화된 지 49일 된 산란계 수탉인 ‘웅추’만 사용한다. 국물이 없는 바싹 구운 불고기는 역전회관(62년·마포구 용강동 67의 1)에서 처음 출시했다. 서울 최고의 콩국수 명가인 진주회관(62년·중구 서소문동 120의 35)은 경남 진주에서 출발, 서울에서 대박을 낸다. 콩맛을 위해 국수 외 그 어떤 고명도 올리지 않아 극도로 심플하다. 겨울에는 콩맛이 없다고 해서 콩국수를 팔지 않는다. 한 그릇 9천500원.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CEO를 위한 서울 레스토랑 가이드 ▶비앙에트로 박민재 셰프가 운영하는 프렌치파인다이닝. 메인보다 전채와 디저트가 더 공력이 보인다. 르누아르 그림처럼 화사하면서도 모던하다. 제대로 된 수플레도 맛볼 수 있다. 종로구 화동 106의 5. (02)543-3288 ▶리스토란테에오 진정한 맛 탐험가라면 비용 상관없이 가보라. 서울에서 손꼽히는 이탤리언 파인 다이닝이다. 어윤권 셰프의 지휘 아래 수준급의 이탈리아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사전 예약은 필수. 강남구 청담동 99의 11 2층. (02)3445-1926 ▶바루(발우공양) 조계종에서 직접 운영하는 사찰 음식 전문점. 술과 함께하는 접대는 무리. 종로구 견지동 73. (02)733-2081 ▶비채나 ‘광주요’에서 오픈한 모던 한식당. 용산구 한남동 740의 1 2층. (02)749-6795 ▶타이가든 1996년 국내 최초로 타이 음식을 선보여 온 유서 깊은 곳. 용산구 한남동 737의 24. (02)792-8836 ▶미치루스시 실력파 이만 오너셰프가 선보이는 수준급의 스시코스를 만나볼 수 있다. 영등포구 여의도동 36 2층. (02)761-4091 ▶레스쁘아뒤이부 임기학 셰프가 선보이는 전형적인 프렌치비스트로. 강남구 청담동 90의 20. (02)517-6034 ▶엘본더테이블 셰프 최현석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존의 틀을 탈피한 창의적인 요리 주종. 강남구 신사동 530-5 엘본 2층. (02)547-4100 ▶정식당 ‘뉴코리안’이라는 콘셉트를 표방한다. 명문 요리학교 CIA 출신인 임정식 셰프 스타일로 재해석한 요리들은 플레이팅이나 조리법 등 기존의 통념을 깨 모던 한식 다이닝의 선두로 평가받고 있다. 강남구 신사동 649-7 아크로스빌딩 3층. (02)517-4654 ▶스시선수 ‘스시초희’ 출신 최지훈 셰프가 이끄는 스시야. 일본 에도마에 스시를 기본으로 한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 강남구 신사동 651의 16. (02)514-0812 ▨취재협조= 미식전문사이트 다이어리알(www.diaryr.com)
2013.08.16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21) 팔공산 ‘고향차밭골’의 김도윤
팔공산 자락엔 입소문이 난 식당이 여럿 있다. 그런데 다들 오리·닭 타령이라서 1만원 남짓한 백반집 같은 밥상은 별로 없다. 널리 알려진 곳은 파계사 초입 주차장 근처에 있는 고향차밭골. 최근 힐링푸드 붐을 제대로 갈무리하기 위해서 아주 특별한 ‘효소비빔밥’도 개발했단다. 김도윤 오너셰프는 영천시 교동에서 태어났다. 종가라서 음식의 품격이 뭔가를 어릴 때부터 배울 수 있었다. 중학생 때 대구로 온다. 결혼해 첫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식당 사장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둘째를 낳은 뒤부터 병명도 모르고 앓았다. 약을 멀리하고, 음식으로 ‘식치(食治)’를 했다. 돌미나리를 생즙으로 짜 먹었다. 그때부터 신토불이 제철 식재료에 관심을 가진다. 5년 만에 완치된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의 묘리를 깨닫는다. 전통음식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모친에게 요리비법을 배웠다. 요리에도 ‘행간(行間)’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20년 전 그렇게 그녀는 요리사의 길로 접어든다. 그녀는 요리 못지않게 예술적 감각도 겸비했다. 매듭과 수예 등에도 안목이 있다. 20년 전부터는 차 공부도 했다. 지정다례원 오극자 원장이 그의 사부다. ◆ 차밭골 한정식 반찬 비법 공개 15년 전 대구국제공항 앞에서 한식 전문 고향차밭골을 차렸다. 차림은 수수했다. 식당 옆에는 ‘끽다(喫茶)’할 수 있는 도윤다례원을 연다. 차밭골정식은 전라도밥상처럼 풀코스가 아니라 한상차림이다. 지금까지 시래기된장·청방배추김치·고등어찌개·우엉잎쌈·우엉조림 라인을 유지하고 있다. 시래기된장용 육수는 멸치를 사용한다. 어른 검지손가락 굵기인 거제도산 청어멸치인데 연중 몇 달만 나오는 것이라서 많이 비싸다. 이 집은 멸치똥까지 사용해서 다시를 낸다. 파는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살짝 구워 단맛을 보강해서 넣는다. 껍질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말아서 석쇠에 넣어 살짝 구우면 대파 특유의 향기가 더해진다. “사람들한테 가장 인기 좋은 메뉴 중 하나가 시래기된장입니다. 원래 무청 말린 걸 시래기라고 하는데 고향에선 생배추 잎을 우거지라고 하고, 말리면 ‘시래기’라고 부릅니다.” 하절기 우거지용 배추는 도착하는 즉시 바로바로 삶아야 한다. 삶은 것도 하루 정도 물에 우려낸다. 그래야 배추 풋내를 잡을 수 있다. 된장 비율을 잘못 조정하면 약간 쌉쌀하다. 우거지는 17분 정도 삶아야 한다. 덜 삶으면 배추 자체에서 질긴 맛이 난다. ◆ 오감만족 효소육성실 10년 전에 파계사 쪽으로 이전한다. 그때 주변이 허허벌판이었다. 접근성이 낮다면서 모두 반대했다. 전원에서의 삶을 위해 고생할 각오를 하고 들어와 집을 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식재료 확보가 승부처라고 믿는다. 그래서 주위 농부의 농산물을 매입하면서 윈윈전략을 수립했다. 식당은 지하 한 개 층을 포함해 4층. 전통차실도 있고 골동품 전시공간도 있다. 밥만 먹지 말고 맘 편히 쉬다 가라는 배려였다. 궤짝, 찬장, 옹기, 반닫이, 나비장, 옹기류, 노리개, 자수용품, 베갯모, 전통식초항아리, 뒤주, 전통 바구니 등이 보인다. 파계사 아래로 오면서 몇 가지 밑반찬이 달라진다. 명태조림, 우엉조림, 깨순멸치조림, 고구마줄기조림, 꽁잎김치 등을 축으로 차밭골정식(1만3천원)을 짰다. 빡빡장 옆에 찐 우엉·호박·양배추 잎까지 낸다. 50대 이상은 밥상 차림만 보고 군침을 흘린다. 그만큼 토속적이다. 5년 전부터 효소를 공부하면서 자기만의 힐링·슬로푸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지하 1층 공간을 직접 디자인했다. 전국에서 수집한 옹기를 위해 전시장도 짰다. 돌로 국그릇을 만들었다. 봉화의 김선희 명장이 만든 유기세트를 식기로 사용한다. 놋그릇을 반들거리게 닦는 주방 식구에게 그릇 한 개당 수고비 조로 천 원을 준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란다. 그래도 그녀는 웃는다. 효소육성실에는 전국에서 수집한 새우 담는 옹기, 초두루미(식초 담는 병) 등이 놓여 있다. 주방 입구에 각종 효소액 담은 용기가 실험실 비커처럼 앉아 있다. 여느 식당풍이 아니다. ◆ 효소비빔밥을 개발하다 이번 취재 때 가장 관심이 갔던 메뉴는 단연 효소비빔밥. 갓 퇴원한 환자, 채식주의자, 미식가 등이 많이 찾는다. 가격은 1만5천원. 가격만큼 조리법도 까다롭다. 효소액은 양파효소발효액과 집간장·된장을 섞어 만든다. 발효액은 껍질 안 깐 4등분된 양파에 백설탕을 7 대 3 비율로 넣고 간수 뺀 소금을 적당량 넣어 45일간 숙성시켜 낸다. 울릉도 부지깽이나물, 현미찹쌀과 멥쌀, 호박, 박나물, 표고버섯이 한 무리를 이룬다. 소스는 양파효소 등을 주로 사용한다. 효소비빔밥 요리 중 가장 힘든 대목은 밥 안치기. 압력밥솥에 10분 정도 불려 놓은 쌀을 깔고 그 위에 나물을 다져서 넣고 그 위에 또 쌀을 올린다. 밥이 다 되면 놋그릇에 담고 그 위에 삼색나물을 고명으로 올린다. 삼색을 안배한 이유가 있다. 시행착오도 겪었다. 고명으로 오색나물을 넣었는데 부지깽이나물 특유의 향기가 사라져버렸다. 몸도 부담이 됐다. 삼색이 가장 무난했다. 약선원리상 여름의 경우 호박이 좋다. 도라지와 표고버섯은 모든 체질에 맞다. 가을의 경우에는 박나물이 도라지 대신 들어간다. 겨울에는 가지를 말려서 볶은 뒤 올린다. 효소비빔밥에는 여느 비빔밥과 달리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꼭 안동 헛제사밥처럼 ‘지렁’(집간장)을 사용한다. 곁반찬도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돌용기에 담긴 오징어탕국물은 기제사 때 먹는 탕국 같았다. 오징어는 참기름을 넣고 조선간장에 볶는다. 이때 필히 집간장을 사용해야 오징어향과 소스가 어우러진다. 박나물과 두부는 그대로 넣으면 안 된다. 수분이 들어가면 퍼져서 재료가 부서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부는 노릇하게 구워 넣고 마지막에 소금간을 한다. 참기름 대신 들기름을 넣으면 오징어향이 죽어버린다. 그녀는 힐링·슬로·사찰·약선요리에 강하다. 20여년 전 국내 사찰요리의 리더격인 선재스님과 인연이 있었다. 약선은 대구한의대 한방식품조리영양학부 김미림 교수한테 배운다. 주변 모든 식재료가 다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초창기에는 양념 재료가 된장과 간장 수준을 못 벗어났는데 이젠 나물과 채소를 갖고 효소를 만들고, 그걸 천연양념으로 활용할 줄 안다. “일반인은 효소에 대해 너무 안이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탕을 넣고 1년쯤 묵히면 그게 모두 효소인 줄 아는데 그건 발효액으로 봐야 될 것 같습니다. 효소가 되려면 최소 5년 정도 세월이 흘러야 됩니다.” 현재 5년 이상 된 냉이·민들레·복분자·더덕·도라지 등을 갖고 있다. 효소를 위해 70여 가지 재료를 확보해 놓았다. 여기선 발효항아리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다. 장아찌에 대한 노하우도 공개했다. 간장장아찌는 조선간장과 물을 동량으로 넣고 달인다. 1시간20분 정도 중불에서 달여야 한다. 정종을 조금 넣거나 3일씩 세 번 같은 시간 달이면 곰팡이가 피지 않는단다. ◆ 가업을 잇는 장남 내외 요즘 난맥상을 보이는 약선요리를 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요리를 모르는 약선전문가가 음식을 만들면 식감이 확 죽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약선요리 입문자라면 약선의 이론은 물론 요리과학까지 동시에 익히면 더 좋겠죠.” 가끔 자신이 죽으면 누가 차밭골의 요리술을 이어받을까 걱정이 된다. 그걸 눈치챘는지 지난 3월 장남(권기남)과 며느리(심미경)가 “기꺼이 가업을 잇겠다”고 결심한다. 그래도 그녀는 반신반의다. “가업을 잇는 게 한갓 취미 수준의 취향이어선 절대 성공을 못합니다. 청소와 설거지, 음식쓰레기 분류, 식재료 재고 관리 등이 요리와 영업마케팅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접한 장남은 범절이 깍듯하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대구를 방문하는 VIP에게 ‘바로 저 집 음식이 대구 대표음식’이란 평가를 받는 명품식당을 아내와 함께 만들고 싶단다. 아내는 간호학을 전공한 뒤 경대병원에서 근무를 했는데 식당을 배우기 위해 사표를 냈다. 김도윤 셰프는 가지를 너무 많이 뻗으면 음식이 죽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차밭골 2호점도 단호히 거부한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밝힌 요리철학 중 한 대목에 밑줄을 긋는다. “식재료의 향기로 그대로 전해져야지 양념과 향신료가 식재료의 향을 막아버리면 그건 음식이 아니고 무식(無識)이겠죠.”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8.09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닭 이야기 (하) - 토종닭 전도사에게서 듣다
갑자기 ‘닭의 일생’이 궁금했다.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성실영농조합 배신욱 대표를 만났다. 2009년부터 한국토종닭협회 대구·경북 도지회장이 된 그는 전국적 명성을 가진 ‘토종닭 전도사’. 그는 대를 이은 토종닭 사업가이자 애계가(愛鷄家)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배 대표만큼 닭의 생리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그가 상세하게 닭의 일생에 대한 정보를 준다. ◆ 생후 540일 지나면 노계로 전락 닭은 생후 14개월까지 23시간 만에 한개씩 계란을 생산한다. 노계는 알을 안낳는 휴면기간을 설정한다. 이를 업자들은 ‘환우시킨다’고 한다. 알을 안낳을 때 업자들은 더 건강한 알을 받기 위해 기존 알집을 인위적으로 잠시 ‘휴면’시킨다. 이때 사료공급을 중단시키고 물만 먹인다. 이때 닭은 ‘노계(老鷄)’로 전락한다. 알을 더 받고 싶으면 다시 사료를 투입하면 1달간 강제환우를 시킨 뒤 알을 받는다. 예전의 80%만 생산된다. 540일이 되면 닭은 스스로 도태하게 된다. 인간으로 보면 60대로 접어든 것이다. 완전 노계가 된다. 노계가 되면 가치도 급락한다. 도계장에서 도계해서 소시지 공장이나 베트남 쪽으로 수출한다. 도계한 상태에서 무게는 보통 1.7㎏ 안팎이 된다. 육계는 병아리에서 35~40일이 되면 프라이드치킨용만큼 자란다. 육계는 보통 허벅하고 물러서 식감이 별로 나지 않는다. 더 나은 육질을 위해 ‘쎄미(일명 삼계탕용 육계)’를 출하한다. 28일 정도 자란 무게 450~500g 남짓이어야 한다. ◆ 계란→병아리→종계→산란 ‘닭의 일생’ 계란은 크게 육계용·토종닭용·산란용이 있다. 산란용이 가장 비싼데 한 개 2천원 안팎이다. 알 유통은 거의 개인이 한다. 산란용 종란은 칠곡군에 있는 성진부화장 등에서 담당한다. 1세대 산란계는 거의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에서 수입해 온다. 2세대는 외국에서 종란을 갖고 와서 부화장에서 집중적으로 알을 부화한다. 쉽게 말해 외국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이어 국내에서 그 아버지와 엄마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 암평아리와 수평아리로 분류된다. 지금은 기술이 좋아 색깔만으로 암수를 알아낸다. 암평아리는 붉은색, 수평아리는 흰색이다. 부화는 37.8~38℃에서 21일간 부화한다. 모두 자동 전기부화다. 부화한 병아리는 종계장으로 이전한다. 모이를 먹고 사육을 하면 150일 정도 되면 알을 낳는 종계가 된다. 계란 생산용 종계는 평균 2천여원선. 이 종계에서 나온 종란을 갖고 부화장으로 가서 21일 만에 아들뻘 병아리가 태어난다. 이 병아리를 갖고 양계장으로 가서 사육되면 비로소 산란계가 태어난다. ◆ “닭도 닭 나름” 호수 따라 용도도 달라진다 보통 4호에서 시작된다. 6호까지는 삼계탕용, 7호에서 10호까지는 약닭, 10호 이후 18호까지는 백숙도 되고 볶음탕용도 된다. 예전에는 손수 잡았는데 70년대 이후 닭털을 뽑는 ‘통도리기계’가 나온다. 도계장 시절은 65년부터 시작된다. 그때 외국에서 자동도계설비가 수입된다. 현대화된 도계장은 북구 조야동 근처에 지역에선 가장 큰 닭잡는 공장이 있었다. 10여년 전에 사라졌다. 공식적으로 대구 시내에는 도계장이 없는 셈이다. 경북의 경우 상주 올품, 이현공단 근처의 키토란이 각각 도계장을 갖고 있다. 예전에는 청송 구미 포항에 유명 도계장이 있었다. 현재 거의 사설 도계장이 있다. 전국에 68개가 있고 정상적 영업은 45군데에서 하고 있다. ◆ 일제 때 대량말살됐다 부활한 토종닭 토종닭은 얼마나 유통될까. 일제 때는 우리닭이 많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토종닭을 대량 말살시킨다. 57년쯤 국내에서 처음으로 수입용 닭이 들어온다. 식용닭으로 수입된다. 토종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번째는 100% 순수 혈통은 아니지만 근사치 ‘재래토종닭’, 두번째는 일반적으로 식당에서 먹는 ‘토종닭’(일명 한협 토종닭), 농업진흥청에서 개발한 ‘우리맛닭’이 있다. 외형상으로 볼 때 재래토종닭은 고기 양이 제법 작다. 알도 많이 낳는다. 자기가 직접 품어서 부화시켜 번식력이 강하다. 백숙용으로 잘 나간다. 한협닭은 원래 예전에는 수입종이었는데, 7세대 토착형으로 보면 된다. 토종닭은 70일 정도 자라면 백숙용으로 판매가 된다. 우리맛닭은 100일 정도 사육되며, 도계된 상태에서 무게는 1.5㎏ 안팎. 우리맛닭은 2000년에 가금학계 박사들이 개발한 것. 오봉욱 교수(서울대) 등이 모여서 전국에 있는 재래토종닭 피를 다 모았다. 농업진흥청 산하 국립축산과학원에서 복원시켰다. 2003년 드디어 복원이 된다. 전국의 40농가에 한 농가당 수천원만씩 지원했다. 그때 상당수가 죽었다. 채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업자들이 외면하기 시작한다. 창녕의 한 농장만 존속하고 있었다. 이 농장까지 위태로울 때 그가 기술지원도 해주고 2년간 동업을 하다가 김천시 갑문면에서 독립을 한다. 당시 우리맛닭 종계 1천600마리로 시작한다. 양보다 질로 승부수를 띄운다. 이때 궁중한방백숙 붐을 일으킨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는 큰나무집의 조갑연 사장을 만나 우리맛닭이 비약적 발전을 한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토종닭을 지켜낸 것이다. 2011년 7월1일부터 국내에선 닭의 경우 항생제를 사용하지 못한다. 닭은 배합사료를 많이 먹인다. 주재료는 옥수수, 콩 등 10여종의 곡물류다. 할머니가 장에 가서 사온 병아리를 키우면 장닭이 된다. 가장 맛있을 시기는 알을 낳기 바로 직전인 5개월, 수탉은 4개월 정도 되면 가장 맛있단다. ‘웅추’는 양계장에서 부화한 지 50~55일 정도된 수탉을 말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가창 ‘큰나무집’ 궁중한방닭백숙 유명…청도‘여정’ 가창‘토담집’ 군위‘연화’ 옻닭으로 알아줘 대구에서 가장 닭을 많이 파는 백숙집은 단연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큰나무집’이다. 지역에서 궁중한방닭백숙 붐을 일으킨 진원지기도 하고 삼복철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손님이 밀려든다. 검정깨가 많아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검은빛이 감돌고 닭은 토종닭이라서 육질이 아주 쫄깃하다. 옻닭의 경우 3곳을 추천할 만하다. 한곳은 40여년 역사를 가진 청도읍 고수리 청도시장 내 ‘여정옻닭’. 청도에선 토박이들한테 인기절정이다. 30대에 청상과부가 된 박정늠 할매(74)가 옹이 같은 손으로 가마솥을 움직인다. 한꺼번에 10마리의 닭을 넣고 옻을 비롯 헛개나무, 느릅나무, 운지버섯 등 13가지 한약재를 넣고 3시간 이상 곰탕처럼 고아낸다. 일반 백숙과 맛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다음은 20여년 역사를 가진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의 ‘토담집’의 옻닭. 지역에 팬이 많다. 담백한 참옻밥과 국물, 가슴살까지 졸깃하고 묵은지가 느끼함을 눌러준다. 군위읍 서부리 연화식당은 고급옻닭으로 정평이 나있다. 가격이 5만원대지만 예약을 해야 될 정도로 마니아가 넘친다.
2013.07.12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종가 음식' 대중화 어디까지 왔나
종부(宗婦). 종가지킴이인 그녀의 손맛도 당연히 ‘인간문화재’. 그런데 우린 종부를 좀 곡해하기도 한다. 자기식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종부의 심정을 헤아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종부가 사는 종가는 체통과 격조를 위해 더더욱 베일 속에 감춰진다. 한동안 지자체, 연구단체, 언론에서도 여러번 노크를 했지만 종가에선 그런 제스처를 ‘수작(酬酌)’ 쯤으로 치부해버렸다. 안동식으로 말하자면 ‘본배없는 작자’로 깎아내린 것이다. 기자도 오래 경상도 종가음식의 실체를 궁금해 했다. 안동 지례예술촌 김원길 촌장을 통해 종부의 DNA를 조금 맛보긴 해도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오래된 한옥도 두 종류가 있다. 종택(종가)과 고택이다. 종택은 주종손이 사는 고택. 물론 종택이 아파트에 살 수도 있기 때문에 종택이 무조건 고택은 아니다. 문화재청은 150년 이상 된 한옥을 고택으로 본다. 경북은 고택의 보고다. 전국 고택의 60%가 집중돼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도내 종가만 해도 120여곳에 달한다. 그 종가의 반 이상이 안동에 집중돼 있다. 한식의 보고는 종가의 접빈객·봉제사 음식(내림음식)이다. 하지만 연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종가음식은 철저히 문중 안에서만 갈무리되고 바깥에는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내림음식을 갖고 식당을 차린다는 생각을 종부들은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만 해도 경북 종가음식은 일반인에겐 ‘그림속의 떡’이었다. ◆ 경북 종가음식 세상 밖으로 국내 종가음식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본 전통문화연구가가 있다. 바로 한배달 우리차문화원장 겸 고택문화보존회 이사인 이연자씨. 그녀는 요리 전문 월간지 ‘쿠켄’을 통해 ‘국내 명문종가의 맛을 찾아서’를 연재하고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종가시리즈’를 펴낸다. 2000년 들어 종가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고택마케팅’은 물론 ‘고택스토리텔링’ 붐이 일어난다. 템플·팜스테이와 함께 ‘고택스테이’가 국내 대표적 웰빙관광상품으로 인기를 얻는다. 물론 안동이 중심이었다. 특히 경북은 ‘국내 3대 식경(食經)’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고의 조리서로 불리는 ‘수운잡방’(1540년 탁청정 김유가 집필), 최초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1670년 정부인 안동장씨가 집필), 반가 전통주 연구의 결정적 자료인 ‘온주법’이다. 별다른 고조리서를 갖고 있지 못한 전라도 향토요리연구가들도 이를 무척 부러워한다. 경북도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의 도움을 받아 종가돕기에 나선다. 2009년 3월 도내 일부 종가의 종부를 초청해서 ‘경북종가포럼’을 개최한다. 종가문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의 장이 마련된다. 무려 125개 도내 종가를 대상으로 실태를 알아보기 위한 우편조사도 벌였다. 석계종택(영양 재령이씨)의 음식디미방 재현음식·설월당종택(안동 광산김씨)의 수운잡방 재현음식·춘우재종택(예천 안동권씨)의 맛질방문 재현음식·충재종택(봉화 안동권씨)의 내림음식 레시피까지 보였다. 그 결과가 최근 ‘경북종가 문을 열다’와 ‘종가의 깊은 맛 문 밖을 나서다’란 책으로 묶였다. 특히 안동장씨 경당종택, 경주최씨 백불고택, 월성손씨 서백당, 재령이씨 석계종택, 광산김씨 설월당, 진성이씨 수졸당, 풍산류씨 양진당, 성산이씨 응와종택, 의성김씨 지촌종택, 풍산류씨 충효당, 의성김씨 학봉종택, 광산김씨 후조당 등 도내 12곳 종가음식 요리법까지 소개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 종가음식 일자리 창출 사업 경북여성정책개발원과 대경연구원은 함께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역인재육성사업 일환인 ‘종가음식 일자리 창출’ 공모사업도 추진한다. 종가음식문화 스토리텔러 양성·종가음식문화기행 코스 개발·종가음식 홍보책자 발간 사업을 펼친다. 3년간 250명의 종가음식 전문인력도 배출한다. 특히 안동시 온혜리 노송정(퇴계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이 1545년에 지은 종택) 18대 종부 최정숙씨는 종가음식 창업컨설팅 과정을 수료해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중소기업청의 예비기술창업자 양성 공모사업에도 나서 2011년부터 노송정에서 종가음식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재령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 석계종택 조귀분 종부는 강남구청 및 전국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일반인 대상 음식디미방 강좌를 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영양 두들마을에는 음식디미방전수관과 음식연구회, 2009년 1월에는 안동시 법상동에 수운잡방연구회가 각각 결성돼 옛 음식 복원에 나선다. 2011년에는 안동의 김광림 의원에 의해 2011년 ‘지트코리아(GITE KOREA)’ 사업이 발족된다. 지트는 ‘프랑스형 농촌민박제도’로 프랑스 정부가 2차 세계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농촌을 살리려고 했던 정책이다. 이농현상을 막고 농촌의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 마련한 국가주도의 지역발전정책으로, 지트코리아는 안동의 고택을 새로운 민박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사업이다. 이에 앞서 2002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농암(이현보)종택이 안동에선 선두로 고택스테이 공간으로 외부에 공개된다. 현재 한끼 7천원에 열여섯 가지 반찬이 나오는데 특이하게 안동의 대표적 종가음식인 ‘명태보푸름’이 나온다. 신토불이·슬로푸드 붐은 자연스럽게 종가음식과 맞물려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안동에서 제대로 된 종가음식을 먹는다는 건 무척 어렵다. 안동을 찾은 관광객이 맛볼 수 있는 안동음식은 간고등어, 식혜, 헛제사밥, 찜닭, 버버리떡 정도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은 그게 안동의 종가음식인 것으로 착각한다. 안동식혜는 실은 안동의 종가음식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60여년 전 안동에서 등장한 일반인을 위한 음청류라는 전언이다. 안동간고등어조차 종가음식 범주에 넣기 곤란하단다. 안동 종가음식의 유래에 대한 학자들의 철저한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런 가운데 20여명의 안동 내 명문가 종부가 모여 ‘정미회’, 경북의 60여명 종부가 모여 ‘경부회’를 결성했다. 각기 다른 종가음식을 상호비교하면서 종가문화의 정체성을 활성화해보려는 자구책의 일환이었다. ◆ 안동 종가음식 예미정으로 부활하다 지난해 안동종가음식산업사업단(단장 우정구)이 발족했다. 사업단은 국내 최초로 안동 종가음식을 세계화하기 위해 ‘예미정(禮味亭·유교문화에 기초한 특색 있는 음식산업 방향을 잡고, 예의바른 음식)’이란 종가음식 상표를 제시했다. 또한 안동 풍천면 하회류씨 안동건진국수를 시작으로 안동권씨 비빔밥과 안동장씨 7첩 반상차림 등 세 가지의 종가음식에 대해 전통음식 연구가인 박미숙 한국전통음식체험교육원장(경주 수리뫼 대표)을 초청, 현대인의 입맛에 맞도록 레시피 개발을 위해 현장조사 활동을 벌였다. 안동건진국수는 풍천면 광덕리 박재숙씨(69) 농가에서 밀가루에 20%의 콩가루를 섞은 반죽을 홍두깨를 이용해 얇게 펴서 면발을 만드는 전통 칼국수 방식이 시연됐으며, 하회류씨 안동건진국수는 삶은 국수를 건져내 오방색 고명을 얹고 멸치 대신 말린 은어로 만든 육수에 말아내 맛이 담백한 게 특징이다. 삶은 나물로 비빔밥을 만드는 안동권씨 집안의 독특한 비빔밥은 안동 와룡면 조선행씨(51·향토음식연구가) 집에서 시연됐다. 말린 가지나물과 도라지, 토란대, 고사리, 콩나물, 무는 묵나물로, 시금치는 풋나물로 한 솥에 같이 삶아낸 다음 싱겁게 간을 하고 멸장과 꿩장에 비벼먹는 이 비빔밥은 나물을 기름에 볶지 않아 칼로리가 적고 소화가 잘 되며 느끼하지 않아 산업화 가치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음식디미방의 저자 정부인장씨의 친정인 경당종택에서는 안동지방 양반가의 7첩반상 상차림이 종부 권순씨(73)에 의해 예전 법식대로 차려졌다. 특히 경당종택에서는 건진국수 옆에 고봉밥을 함께 놓은 것도 이색적이었다. 참고로 안동의 건진국수는 귀한 손님이 올 때 내놨고, 솜씨 좋은 종부는 바늘만큼 가는 면발을 뽑을 줄 알았다. 건진국수는 종부 손맛의 시험대였다. 강력 제분기가 나오기 전에는 수작업을 통해 고운 면을 얻었다. 디딜방아 등으로 성글게 간 밀가루를 부채로 날리면 고운 가루가 한지벽 아래로 안개처럼 내려앉는데 그걸 모아 면을 만들었다. 당연히 천상의 국수맛이다. 하지만 이젠 맛볼 수 없고 그렇게 할 종부도 없다. 안동에서는 홍두깨로 민 칼국수를 늘린국수란 의미로 ‘느림국수’라 했다. 이를 일명 제자리에서 한꺼번에 끓인 국수라 해서 ‘제물국수’라고도 했다. 또 홍두깨로 눌러 국수를 만들었다고 해서 ‘누름국수’라고도 한다. 안동 시내에 있는 예미정 메뉴협력식당인 솔밭식당·청록·풍전한정식·까치구멍집·골목안손국수·박재숙농가민박·하회솥밭식당은 연내 대중화된 종가음식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7.0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닭이야기(중)-삼계탕
삼계탕 먹기 전에 닭 상식부터 익혀 보자. 닭, 예전엔 가장 만만한 날짐승이었다. 소는 보물 같은 동력원이니 잡아먹는다는 건 언감생심. 삼복 철에는 개 아니면 닭을 갖고 개장을 끓여 먹었다. 개장은 보신탕의 옛말. 개장의 아들은 육개장, 또 그 아들은 닭개장 정도가 된다. 닭개장이 궁금하면 대구시 동구 불로동 ‘경주보양탕’으로 가면 원형을 알 수 있다. 셋 모두 결대로 찢어 내 국을 끓여 먹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닭백숙과 삼계탕의 상관관계에 대한 스토리는 그렇게 풍부하지 못하다. 조선시대 문헌엔 한 번도 등장 안 해 1942년 조리서에 인삼가루 첫 등장 80년대에 대중화 89년엔 “계삼탕” 北에선 물 없이 쪄 최근엔 콩물·들깨 낙지먹물·누룽지 대나무·전복 등 ◆역사 속의 삼계탕 조선시대 닭요리는 어땠을까. 1670년 발간된 국내 첫 한글 고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 연계찜(영계찜)과 수증계(닭찜) 레시피가 나온다. 수증계는 닭을 기름에 볶고 물과 밀가루를 부어 걸쭉하게 만든 뒤 갖은 채소와 함께 먹는 요리다. 19세기에 나온 ‘규합총서’에 따르면 삼계탕과 비슷한 음식이 나온다. 승기악탕과 칠향계다. 닭 속에 뭔가를 집어넣어 국을 만들어 먹는 음식이란 점에서 삼계탕과 유사하다. 물론 속에 들어가는 재료는 현재와 사뭇 다르다. 승기악탕에는 술, 기름, 식초 이외에 박고지, 표고버섯 및 돼지비계, 칠향계에는 도라지, 생강, 파, 천초, 간장, 식초, 기름 등이 들어간다. 현재 영주 시내에 ‘칠향계’란 상호를 가진 삼계탕 전문점이 있다. 조선 어느 문헌에도 인삼을 삼계탕 재료로 사용한다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인삼의 경우 18세기 중반 개성상인에 의해 재배가 본격화된다. 인삼이 흔하게 각인된 건 개화기 시대 이후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1942년에 발간된 조리서인 조선요리제법에 백숙 레시피가 등장하는데 지금 삼계탕과 비슷하다. 여기엔 인삼과 찹쌀이 등장한다. 인삼은 통삼이 아니라 인삼 가루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삼계탕이란 말이 대중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1989년 조풍연씨가 펴낸 서울잡학사전에 ‘계삼탕 만드는 법’ 설명이 나온다. 1951년 보건복지부 주요 음식 가격표에 ‘닭고음’이란 메뉴가 등장한다. 북한에는 ‘닭곰’이란 요리가 이와 비슷하다. 닭을 잡아서 내장을 빼고 그 안에 찹쌀과 황기, 밤을 넣고 찜통에 넣어 물 없이 오랜 시간 쪄 먹는다. 최근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쪽 기업가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삼계탕 명가를 찾아서 국내 삼계탕 붐은 언제부터 일어났을까? 대중적인 흐름은 1980년대 초중반에 형성된다. 삼계탕이 여름 보양식의 대명사로 떠오른 건 90년대 초부터다. 역시 일본관광객이 붐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일본인은 고려인삼에 혹한다. 지금도 인기 한식 선두군에 삼계탕이 속한다. 70년대 밀물처럼 들어오던 일본인 관광객이 삼계탕을 즐겨 찾으면서 이들을 겨냥한 전문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특히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는 자신의 소설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에서 삼계탕을 대한민국 최고의 요리로 소개했다. 중국 영화감독 장예모는 ‘진생 치킨 수프’라 부르며 한국을 찾을 때마다 즐긴다. 요즘 별별 삼계탕이 다 등장한다. 서울에 있는 왕후장상 ‘두계탕’은 닭을 콩물에 삶은 삼계탕이다. 먼저 황기·엄나무·가시오갈피 등 5가지의 한방재료에 닭을 삶는다. 이어 비지를 걸러 낸 콩물을 넣고 다시 끓이면 완성이다. 서울 호수 삼계탕은 ‘들깨삼계탕’으로 유명하다. 진한 들깨 국물에 영계 한 마리를 빠뜨린 형상이다. 닭 머리와 발을 푹 곤 국물에 찹쌀·땅콩·들깨, 배를 꽉 채운 닭을 넣고 다시 1시간30분 정도 삶는다. 고소한 들깨 국물이 별미. 경기도 일산에 있는 한 낙지집에서는 ‘먹물삼계탕’까지 개발했다. 이 밖에 구워서 내놓는 굽는 삼계탕도 있다. 인삼 성분이 들어간 소스에 숙성시킨 닭을 바짝 마른 옥수수알로 피운 불에 굽는 방식으로 조리한다. 조리 후에도 인삼 성분이나 향이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경기도에서 출발한 본가 장수촌은 ‘누룽지삼계탕’으로 떴다. 큰 접시에 닭 한 마리가 올려져 있고, 뚝배기에는 닭죽과 함께 노릇노릇한 누룽지가 큼지막하게 얹혀서 나온다. 삼계탕이라기보다 백숙에 가깝다. 조리 방법은 간단하다. 압력밥솥에 물과 함께 찹쌀과 녹두를 깔고 닭을 얹은 뒤 인삼·마늘·대추·밤 등을 넣고 푹 찌면 된다. 바닥에는 누룽지가 만들어지고, 국물은 졸아들어 먹음직스러운 죽이 완성된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너편 수림은 ‘대나무삼계탕’의 원조집이다. 왕대나무를 배처럼 깎아 불에 달군 돌을 깔고 그 위에 닭·인삼·전복·낙지를 얹으면 된다. 닭고기 외에 전복이 주로 들어가면 대나무전복삼계탕, 낙지가 주인공이면 대나무낙지삼계탕 등으로 불린다. 둘을 함께 사용하면 대나무전복낙지삼계탕이 된다. 이런 집은 대다수 기능성·퓨전 스타일이라서 롱런할지는 불투명하다. 대다수 중장년층은 역시 오리지널 삼계탕을 즐긴다. 국물도 심플하고 내용물도 간단하다. 깔끔하면서도 깊은 국물맛. 하지만 그렇게 빚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오래된 삼계탕 전문점은 서울 중구 서소문동의 고려삼계탕(1960년 개업)이다. 이밖에 장안삼계탕(1971년·서울 중구 북창동)·강원정(1978년·서울 용산구 원효로)·토속촌(1983년·서울 종로구 채부동), 풍기삼계탕(1980년·경북 영주시 하망동)·금곡삼계탕(1989년·대구시 중구 공평동)이 블로거들에게 러브콜을 많이 받고 있다. 풍기는 이름과 달리 풍기 읍내가 아니라 영주 시내 경찰서 인근에 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함께 영업을 시작했다. 닭고기는 인근 양계장에서 5주 정도 키운 육계를 사용한다. 무게는 550~600g 정도. 50마리씩 솥에 넣고 센 불에 약 40분, 그리고 약한 불에 15분 정도 삶으면 완성이다. 닭의 배 속에는 4년근 풍기인삼·찹쌀·대추·밤·통마늘이 들어간다. 한약재를 넣어 보기도 했지만 색깔이나 맛이 달라 곧바로 포기했다고 한다. 특히 90년대 초 출발한 대구시 수성구 들안길 금산은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체인 삼계탕 시대를 개막했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개그맨 전유성을 앞세워 삼계탕 광고를 한 업소로 유명하다. 금산은 전복삼계탕 등 5종의 각종 삼계탕을 개발했다. ◆대구에서 삼계탕을 먹는다면 지역에서 가장 맑으면서도 깊은 맛을 가진 ‘4인방 삼계탕집’이 있다. 바로 금곡·백자·대동·약전삼계탕이다. 퓨전이 아니고 우직하게 옛날 스타일을 고집한다. 금곡은 대구백화점 인근 금싸라기 땅에 들어서 있다. 삼계탕집을 하기 전에는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프렌치 레스토랑 ‘아비뇽’이 있었다. 건물 외벽은 온통 담쟁이덩굴로 뒤덮였다. 작지만 주차 공간이 있다. 육수는 아주 맑은 편이고 대추와 인삼만 넣는 게 특징. 대구MBC 남측 골목 안에 있는 백자는 14년 역사를 갖고 있는데 요즘 급상승하고 있다. 청송에서 직접 방목한 3천400원짜리 닭을 사용하고 8가지 잡곡과 황기, 당귀, 오갈피, 밤, 대추, 마늘 등이 속에 들어간다. 수성구 황금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대동은 옛날 삼계탕 국물 맛을 찾는 마니아가 애용한다. 특이하게 큰 닭 앞가슴살로 육수를 내고, 사람이 많이 몰려도 냉동은 맛이 급감한다고 해서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냉동을 하면 닭뼈 색이 검게 변한다. 부추무침에는 직접 짜 온 참기름만 사용한다. 3단계로 나눠 1시간 남짓 끓이는데 국물이 깔끔하면서 묵직하다. 약전골목 안에 있는 약전삼계탕은 ‘약령시 전속 삼계탕’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외국 관광객이 중구 근대골목 도심투어할 때 많이 찾는다. 이밖에 가리산, 연화정도 나름의 인지도를 갖고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6.2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닭 이야기(상)-유명 치킨브랜드의 산실, 대구
대학생들은 물론,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인기짱 간식. 게다가 우는 아이를 뚝 그치게도 만들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가족들 오순도순하게 만드는 데도 1등공신. 도대체 이 음식이 뭘까. 정답은 ‘프라이드치킨’. 닭 요리의 역사도 그 시대를 반영한다. 백숙시대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전기오븐~삼계탕~양념프라이드치킨~야채찜닭~굽는 바비큐치킨 등으로 진화해 왔다. 매일 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진다. 무려 5조원짜리 시장을 놓고 벌이는 ‘닭들의 전쟁’. 2007년부터 비비큐치킨과 교촌치킨 두 업체 모두 가맹점 모집을 안 한다. 기존 가맹점이 1천 곳을 넘었기 때문이다. 더는 점포를 내줄 지역도 없지만, 더 큰 이유는 기존 가맹점들을 보호해야 하는 탓이다. 영세자영업의 대명사인 치킨집은 현재 전국 5만 곳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 얼추 인구 1천명당 한 곳꼴이므로, 250가구마다 닭집이 하나씩인 셈. 군소업체까지 포함하면 치킨 프랜차이즈는 300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최근 한국계육협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한 해 닭고기 소비량은 줄잡아 4억2천만여마리. 하루 평균 120만 마리가 출하된다. 이 가운데 40% 정도가 프랜차이즈 치킨집, 40%는 학교와 군부대 급식, 그리고 마트 판매분이다. 나머지 20%는 부위별로 판매되거나 햄이나 패티 등으로 가공된다. 사실 프라이드치킨의 맛은 대개 비슷하다. 승부처는 양념. 처음에는 마늘이 들어갔는데 이젠 기능성 웰빙프라이드치킨 시대가 열리고 있다. ‘튀김닭=비만’으로 간주해 갈수록 건강에 좋은 기름으로 튀기거나, 아예 튀기지 않고 굽는 닭 등을 개발하는 데 주력한다. 농촌지역의 경우 특산품을 가미해 다양한 신메뉴를 개발할 수도 있다. 문경 오미자프라이드치킨, 상주 뽕잎프라이드치킨, 영천 한방프라이드치킨…. 맛은 비슷해도 다른 스토리텔링마케팅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프라이드치킨의 유행 주기는 길어야 1~2년. 보통 6개월 정도가 전성기란다. 업체들은 기본 간판 메뉴 외에 얼마나 많은 곁가지 메뉴로 시장 흐름에 대응할 것이냐를 놓고 고심한다. 역사가 오래된 업체의 경우는 여러 유행 치킨을 두루 갖춘 다양한 메뉴가 무기다. 20년 넘은 멕시카나는 메뉴가 가장 많고 다양하다. 치킨업계는, 오늘의 강자에게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치킨 프랜차이즈 1세대들 중 상당수가 밀려났다. 1세대 6대 강자는 멕시칸, 멕시카나, 페리카나, 처갓집, 이서방, 스머프 등이다. 90년대 제법 강했던 멕시칸치킨의 경우 한때 가맹점이 1천100곳이 넘었지만 지금 호시절은 지났다. 기념비적인 프라이드치킨인 멕시칸을 세운 윤종계씨는 대구를 떠나지 않고 지금 수성동4가에서 ‘윤치킨’으로 제2의 전성기를 노리고 있다. 1세대 치킨들이 밀려난 이유는 소비자들의 입맛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탓이다. 국내 250가구마다 치킨집 한 개꼴 포진 프라이드 맛 ‘비슷’ 마늘 등 양념에 승부 오미자·뽕잎 등 지역특산품 가미도 멕시칸·처갓집 등 90년대 풍미 브랜드 소비자들의 입맛 못 따라가 뒷전으로 교촌 ‘부분육’으로 호식이는 ‘두마리’로 땅땅은 ‘뼈 제거’로 단숨에 돌풍 일으켜 대구·옛날통닭도 여전히 옛명성 유지 ◆대구는 프라이드치킨 1번지 대구를 잡는 닭이 한국을 잡는다 대구는 자타가 공인하는 ‘닭의 고장’. 대구에서 성공한 치킨 브랜드가 수두룩하다. 치킨 프랜차이즈는 크게 두 종류. 작은 동네 닭집이 성공한 뒤 분점을 내다가 프랜차이즈가 된 ‘자생형’, 처음부터 프랜차이즈 본사를 세워 가맹점을 받는 ‘계획형’이다. 전통적 프랜차이즈인 전자의 대표가 ‘교촌치킨’, 기업형인 후자의 대표가 현재 체인 1위인 ‘비비큐’다. 간장 맛으로 90년대 돌풍을 일으키며 단숨에 강자가 된 교촌치킨. 91년 경북 구미에서 치킨집을 열고 입소문이 번져 95년부터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교촌은 대형화의 선두주자였고, 튀김옷 시대와 닭날개 등 부분육 시대를 연다. 20년 넘게 버텨 온 멕시카나도 87년 대구·경북 지역에서 작은 치킨집으로 시작해 성공한 뒤 91년 서울로 진출했고, 2004년에는 본사를 서울로 옮겼다. 이후 페리카나, 스머프, 처갓집양념통닭 등이 가세하면서 대구는 튀김닭의 격돌장으로 변한다. 2007년 다크호스처럼 등장한 땅땅치킨은 300호 가맹점 시대를 넘었다. 국내 최초로 60년대 식 전기오븐기를 갖고 뼈를 제거한 바비큐처럼 굽는 치킨 시대를 연다. 직접 가게로 오면 1천원 할인해주기도 했다. 이어 튀기는 닭에서 벗어나 굽는 치킨이 대세를 이루는데 굽네, 네네, 파닭, 별별치킨 등이 나타난다. 호식이치킨은 두마리치킨의 선두주자가 된다. 마케팅기법이 좋았다. 치킨용 통닭은 모두 13등급이 있는데 이 중 8~9호가 가장 비싸고 10~11, 6~7호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호식이는 저렴한 가격대의 닭 두 마리를 한 마리처럼 팔아서 어필한다. 이 밖에 종국이두마리치킨, 꼬꼬네두마리치킨 등도 비슷한 전략으로 가세한다. 이 밖에 백록담 BRD, 윤치킨, 키토랑 등이 대구 프라이드치킨의 파워를 더 키웠다. 전국의 유명 치킨 브랜드의 연혁을 보면 대다수 대구를 발판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또 다른 향토 프라이드치킨 브랜드가 있다. 78년 대구시 수성구 수성3가동에서 태어난 ‘대구통닭’과 85년 대구시 동구 효목동에서 계성통닭으로 시작한 ‘멕시칸’이 쌍두마차가 된다. 물론 더 이전인 60년대에는 중앙네거리 모퉁이에 있었던 백마강이 전기오븐 통닭의 신지평을 열었다. 또한 대구 일본요리 2세대인 향촌동 주부센터(현재는 보리밥 뷔페로 바뀜)의 김정식 사장도 오븐통닭 다각화에 나선다. 대구통닭은 기존의 밋밋한 프라이드치킨에 변화를 준다. 당시에는 튀긴 닭을 구운 천일염에 찍어 먹었다. 하지만 대구통닭은 마늘간장소스를 발라 히트를 친다. 현재 허동만 사장의 두 아들이 모두 가업을 잇고 서울에까지 진출했다. 또한 수성구 신매동과 욱수동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옛날통닭’도 20년 역사를 자랑한다. 의성군 단촌면사무소 입구에 있는 삼미식당은 ‘의성마늘튀김닭’으로 전국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6.1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20) 대구 남구 대명6동 ‘솔내음’의 박진숙
대구시 남구 대명6동 ‘솔내음’의 박진숙 오너셰프(59). 남도한정식을 대구스타일로 변주한다. 거의 모든 메뉴에 박 셰프의 손길이 머무른다. 너무 정성스럽고 보기도 좋고 간도 맞아 ‘이게 과연 대구 한정식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남도 육자배기가 생각난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말끝마다 잘 삭힌 젓갈 냄새가 풍긴다. 단골을 대하는 자태가 혈족을 대하듯 한다. 그녀는 우선 보기 좋아야 하고, 그 다음이 맛이라고 했다. 훗날 주차하기 좋은 교외 한옥으로 옮겨 음식과 음악이 있는 풍류가 흐르는 한정식을 만들기 위해 요즘 소리를 배우고 있다. 경기민요를 다 뗀 뒤 판소리 흥부가를 배우고 있단다. 대소쿠리의 7곡밥 압권 미·시각 모두 충족시켜 간장닭다리찜 감미롭고 수입 갈비와 매치시킨 퓨전 전복찜은‘독창적’ 서해안 ‘장대’도 눈길 손님 식탁에 충실하려고 무조건 3인 이상 예약제 ◆3만원짜리 상을 받아 보니 앉으면 수프 같은 계절탕국이 나온다. 이날은 들깨탕이다. 겨울에는 매생이국, 또 고디탕, 옹심이 등도 낸다. 홍어삼합도 비록 칠레산이지만 목포에서 올라온 1급. 분홍색 살점은 치밀하고 지린내도 그렇게 독하지 않다. 2년 된 묵은지에 돼지수육이 한 조를 이룬다. 닭다리 부위만 떼어 내 간장마늘소스를 갖고 만든 간장찜닭은 안동찜닭보다는 더 감미로우면서도 살점이 푸석하지 않고 쫄깃하다. 큼지막한 피꼬막이 나온다. 전남 보성 벌교에서 갖고 온다. 전남에선 핏물이 감도는 피꼬막을 즐기는데 대구에선 푹 삶아 양념해서 줘야 먹는다. 퓨전전복찜은 특히 이 집만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메뉴. 특이하게 수입 갈비와 매치시켰다. 전복만으론 단조로워 갈비를 넣었다. 사실 이 단품 메뉴 하나만 3만원 이상이 될 것 같다. 간장찜닭과 같은 항렬인 오징어간장찜도 자체 응용한 것. 참나물 겉절이에는 작은 새우가 고명으로 세팅돼 있다. 10월 이후가 되면 굴을 곁들인다. 홍어무침이 나왔다. 문제는 초장인데 여기선 어떻게 만들까. 고추장, 마늘, 생강, 식초, 설탕, 와사비 등으로 만든다. 전남의 서대나 군평서니를 연상케 하는 서해안 장대는 지금이 철이라서 낸다. 철 따라 병어도 낸다. 장아찌는 어떤 걸까. 이날은 가죽나물과 표고장아찌인데 철 따라 두릅, 부추, 콜라비 등을 갖고 만든다. 장아찌용 간장물에선 비린내가 안 난다. 간장 1·설탕 1·생수 3 비율로 섞은 뒤 펄펄 끓여서 그런 모양이다. 한 번 끓여 재료에 넣었다가 그 물을 다시 달여서 또 넣는다. 3일 만이면 먹는다. 부침개는 명태포, 마늘쫑, 송이버섯, 호박, 고추 등으로 만든다. 고등어는 안동간고등어가 아니고 목포에서 올라오는 고등어. 조기 대신 영광굴비를 낸다. 굴비는 조기와 달리 머리에 다이아몬드 모양이 선명하고 살이 풍성하고 부드럽다. 조기는 머리도 단단해 씹을 수 없고 살도 야물다. 김치 사랑도 유별나다. 김치용 젓갈은 멸치와 왕새우로 만든 건데 목포에서 항상 갖고 온다. 쉬 무를 수 있어 통배추 안에 속을 넣지 않는다. 지난겨울엔 200포기를 장만했다. 갓김치의 경우 여수에서 공급받는다. 된장은 경북 청도에 사는 시어머니가 책임지고 있다. 위생에도 철저하다. 유독 농약을 많이 친 깻잎은 흐르는 물에 한 장씩 씻는다. 간장게장은 광주 등지에서 갖고 온다. 간장게장은 오래 묵히면 자연히 염도가 높아져서 짜지게 돼 그날 온 손님상에 낼 만큼만 만든다. 지하에 신안군 천일염이 20포대 정도 쌓여 있다. ◆나만의 요리비법 공개 전라도 살다가 남편 만나 경상도로 시집왔다. 마흔 살에 청도읍에서 식당을 시작한다. 10년 정도 했다. 쉰 살 되어서 경산 윤영조 시장 옛 자택에서 ‘명지고을’이란 상호로 현재 버전의 풀코스 한정식을 시작한다. 그녀는 요리학원에 가지 않고 모두 자기 안목으로 응용해서 요리를 한다. 발품을 많이 팔았다. 전라도 순천 목포 광주 등으로 가서 굴비와 장아찌 갈무리하는 방법도 공부했다. 전라도는 해물 종류가 너무 많아서 대구에선 응용을 하기 힘들고 재료도 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오리지널 전라도식은 곤란하다 싶었다. “전라도 음식은 젓갈과 장아찌 등과 해물이 강하다. 간도 경상도보다 더 세다. 삭힌 음식이기 때문이다. 너무 쿰쿰한 기운은 싫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음식 위주로 한상차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철마다 음식 배우러 예전에는 전라도에 갔는데 이제는 강원도 쪽을 찾고 싶다.” 그녀는 물김치에 강하다. 특이하게 양배추로 담근 물김치를 엿보자. 일단 맵쌀풀을 끓인다. 맵쌀가루풀을 끓여 식힌다. 양배추를 굵은 소금에 절여 놓는다. 숨 죽으면 거기에 양파와 대파, 생강과 마늘 약간을 자루에 넣어 묶고 풀물을 그 위에 붓는다. 자루에 넣어 풀물과 분리해야 국물이 지저분하지 않다. 풀물의 비율이 궁금하다. 쌀가루가 한 컵이라면 물은 10컵 정도. 펄펄 끓기 시작하면 끄고 식힌다. 동치미는 소금에 무를 절여야 한다. 3~4일 절이고, 다음은 물을 팔팔 끓여 식혀서 무가 둥둥 뜰 때까지 붓는다. 이어 소금간을 하면 된다. 한 달 이상 되어야 제맛이 난다. 사이다 맛이 나야 오리지널이지만 사이다와 식초, 설탕을 넣으면 제맛이 절대 안 난다. ◆먹기 아깝도록 예쁜 7곡밥 대소쿠리 메인이 끝나고 밥을 낼 때쯤 대소쿠리를 들고 인사를 하러 그녀가 소리꾼처럼 등장한다. “흰 쌀밥만 단골에게 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곱 가지 곡물을 어떻게 갈무리하는가. 보리쌀, 수수, 율무, 검정 찹쌀, 팥 등은 물에 불리고 조와 멥쌀은 따로 불려서 밥을 안친다. 가스솥에서 어느 정도 익으면 전기밥솥으로 옮겨야 더 고슬고슬해진다. 잘못하면 너무 질거나 고두밥처럼 된다. 7곡밥은 쌀밥보다 10배도 더 힘들단다. 기자는 국내에서 여러 한정식집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맛있고 보기 좋은 밥은 처음이다. 8년 전 경산에서 여기로 이전해 왔다. 평소엔 주인과 매니저 둘이서 모든 음식을 갈무리한다. “20여년간 단 한 차례도 음식 갖고 꾀를 부린 적이 없다. 우리 가족, 아니 내가 먹는다는 마음을 갖고 요리하면 눈이 열린다. 오직 돈만을 위해 음식을 조립하듯이 꾀로 만들면 그 음식은 결국 손님한테 외면당한다. 내 인품을 음식에 넣고 싶다.” 지역 각급 기관장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중이다. 앞으로 대구에선 먹기 힘든 짱뚱어탕, 연호탕, 갈낙탕 등도 선보이려고 한다. 여긴 무조건 3명 이상 예약해야 된다. 식재료도 아끼고, 단골한테 충실하기 위해서다. 왠지 대구 한정식의 자존심으로 진화할 것 같은 예감이 쬐끔 든다. (053)655-1511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6.07
‘이름난’ 전라도밥상에 딴죽 좀 걸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라도밥상에 최면이 걸려 있다. 더 이상 전라도에선 음식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경상도, 특히 대구밥상은 최악의 밥상으로 몰매를 맞고 있다. 하지만 음식칼럼니스트급 나그네식객들은 간판 달린 유명식당의 내공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전국의 식재료가 실시간으로 이동한다. 지역색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물론 전라도도 마찬가지다. 1만원 미만의 식단은 대구나 전라도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대구가 더 나을 수 있다. 관광객이 붐비는 식당은 최악이라고 보면 된다. ◆비빔밥은 전주의 독점물이 아니다 기자는 13년 전부터 전라도밥상의 진화과정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조선 때 ‘골동반’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 비빔밥. 사람들은 전주비빔밥만 안다. 전주는 가족회관, 한국관, 성미당 등 6개 업소가 클러스터 형식으로 똘똘 뭉쳐 있다. 가족회관의 김영임씨는 전주비빔밥 1호장인으로 선정됐다. 전주 식당가에서 맨 처음 비빔밥을 선보인 건 1968년(전주 덕진구청 영업신고일시 기준). 하지만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비빔밥을 내놓은 도시가 있다. 바로 경남 진주다. 진주시 대안동에 있는 ‘천황(天凰)식당’. 진주MBC 남쪽 중앙시장 내 수정탕 앞에 꼭 일제 때 여관풍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예전 상호는 ‘대방네’. 영업신고증엔 1965년으로 신고돼 있지만, 1915년 진주시 수정동 나무전거리에서 출발한 유서 깊은 식당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빔밥 전문식당이다. 시할머니(강문숙)에서 시어머니(오봉순)를 거쳐 넷째 며느리인 김정희씨로 손맛이 3대째 이어지고 있다. 6·25 때 화재로 인해 재건축됐는데 페인트 글씨체의 옛 송판간판, 지금은 볼 수 없는 표면이 울퉁불퉁한 곰보유리창은 근대건축물에서만 볼 수 있다. 60년이 다 돼 가는 나무 식탁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 손때가 묻어 퇴락미가 완연하다. 샘과 임시 콘크리트 수조, 장독대, 살평상, 찬장, 뒤주, 음식 출입구 선반에는 다이얼전화기까지 있어 미니 향토박물관 같다. 처음부터 비빔밥을 팔지 않고 나무전거리 상인을 대상으로 허름한 백반을 팔다가 사람이 너무 많이 붐벼 먹기 편하게 비빔밥 형태로 변형시켰다. 진주비빔밥도 물론 진주 제사음식의 변형태로 분류된다. 각종 식재료가 꽃처럼 화려하게 놓여 있다고 해서 ‘화반(花飯)’으로 불렸다. 진주향토음식연구원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군인들의 비상식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진주비빔밥의 가장 큰 특징은 보탕인데, 여기선 소피(선지)가 들어간다. 전주에서는 콩나물국이 나온다. 전주식에 비해 밥 위에 올라가는 고명도 어른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식감이 좋게 짧게 자른다. 배추, 데친 고사리, 일명 속데기로 불리는 김자반, 그리고 육회가 눈길을 끈다. 잘 비벼지게 마른 문어와 홍합으로 만든 포탕 국물을 한 숟갈 올린다. 안타깝게도 전주비빔밥은 월드마케팅에 성공했지만 진주에서는 타지전파를 게을리해서 전국적 인지도가 너무 낮은 게 안타깝다. 물론 이 음식도 진주교방한정식 상에 올랐던 음식이다. 참고로 평양비빔밥에는 육회가 들어가지 않고, 해주비빔밥은 고추장 대신 간장 양념이 올라간다. 그런데 최근 전국 최고의 비빔밥집이 울산시 남구 신정3동에 있다는 게 확인됐다. 바로 1924년 개업한 함양집이다. 강분남-안숙희-황화선-윤희·윤정아씨로 대가 이어졌다. 진주비빔밥과 비슷하면서도 고명으로 전복, 물미역 등이 올라가는 게 특징이다. 이젠 전주비빔밥 타령만 해선 안 된다. 진주비빔밥, 울산 함양집, 그리고 육회비빔밥으로 유명한 전북 익산의 황등비빔밥, 또한 현재 현대백화점 식당가에서 인기 캡인 개정의 대구식 전주비빔밥도 있다. 달성군의 사찰비빔밥, 문경의 사찰비빔밥도 유명세를 갖고 있다. 전주보다는 목포·강진이 진정한 ‘서민 한정식’… 삭힌 홍어·젓갈·장아찌 묵은지·간장게장 등이 한상에 올라야 남도밥상 여수권 최고 유명식당의 돌게간장백반엔 실망감 가벼움으로 급조된 느낌 사람 들끓는 ‘유명 맛집’ 가급적 피하는 게 좋을듯 비빔밥도 전주만 찾지만 진주·울산에 ‘最古’존재 대구‘개정’·달성‘사찰’ 문경‘사찰’도 못지않아 ◆남도의 맛을 찾아서 남도 맛 전도사로 유명한 시인 송수권이 펴낸 남도맛기행서인 ‘풍류맛기행’(2003년 고요나라 刊)에서는 남도 맛의 요체가 절임과 삭힘이라고 했고, 그래야 음식이 건건하고 얼큰해지고, 그로 인해 진정한 맛인 ‘개미(‘맛’의 전라도 방언)’가 생긴다고 봤다. 이는 제대로 된 판소리에서 발견되는 소리의 ‘그늘’에 해당된다. 절임과 삭힘은 발효의 원천이고, 남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발효음식을 갖고 있다. 송 시인은 가장 남도스러운 맛 중 하나로 ‘목포3합(홍어·묵은지·돼지편육)’을 꼽았다. 홍어는 두엄 속에 삭혀야 비로소 ‘지린맛’이 생긴다. 지린맛은 갯벌맛과 함께 ‘곰삭은 맛’을 연출한다. 보성 벌교의 참꼬막, 영암 독천의 갈낙탕, 장흥의 매생이, 목포의 홍어, 무안 세발낙지 등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남도 한정식’도 지역색을 갖고 있다. 경상도한정식은 ‘거문고’ 같고 남도한정식은 ‘가야금’ 같다. 전주한정식은 엄격히 말해 남도 한상차림의 본령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시각적이고 화려해서 술안주상 같은 ‘교자상 버전’이다. 남도한정식은 서민식 한정식이다. 화려하지 않고 정겹고 수수하고 맛깔스럽다. 어떻게 보면 전주식이 영국·일본·중국 자기풍라면 남도식은 ‘막사발’에 가깝다. 강진한정식은 서민식이다. 흡사 허름한 밥집의 백반정식 같다. 강진은 포구를 끼고 있어 해물이 많다. 참고로 여수한정식을 대표하는 한일관은 특이하게 회요리를 한정식 한상차림으로 개발해 성공한 식당이다. 정리하자면 제대로 된 남도의 맛은 전북보다 전남, 전남 중에서도 강과 바다(남해보다 서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목포와 강진의 밥상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나주의 곰탕도 남도의 맛에서 조금 벗어난다. 적어도 삭힌 홍어, 젓갈, 장아찌, 묵은지, 간장게장 등이 한상에 올라가야 남도밥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강진군 강진읍에 전주시내 전주비빔밥 전문점처럼 운집한 3대 한정식이 있다. 청자골 종가집·명동식당·해태식당이다. 해태식당은 90년대 초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소개했다. 하지만 강진 한정식 붐을 일으킨 사람은 현재 한정식 ‘예향’을 꾸려가고 있는 김정운씨. 명동도 85년부터 23년간 운영하다 수하 사람에게 맡긴 것이다. 그녀는 85년 명동식당을 인수했다. 법정 스님, 소설가 박완서 등이 거길 스쳐갔다. 강진 근처에는 탐진강과 서·남해가 만난 마량포구에서 재첩, 짱뚱어, 낙지, 바지락, 숭어, 장어, 은어, 대합 등이 많이 잡혔다. 이젠 갯벌이 많이 매립돼 수산물이 예전 같지 않다. ◆전라도밥상도 검증하라 지난 월요일 폭우를 뚫고 순천정원박람회 관람을 겸해 대구식객단과 전라도밥상 탐사에 나섰다. 기자는 좀 충격을 받았다. 전체 업소를 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전라도밥상에 밀려드는 알 수 없는 암운(暗雲)을 예감할 수 있었다. 여수권에서는 최고로 유명한 여수시 봉산동 H 돌게간장백반의 차림새를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 식당은 지난 여수박람회 때 전국에서 밀려든 손님 때문에 대박이 났다. 그 일대가 간장게장골목으로 돌변했다. 식당 옆에는 포장용 간장게장 작업장이 보였다. 평상복 차림으로 급히 움직이는 몸짓에서 알바생의 고단함이 감지됐다. 기존 남도밥상에선 상상도 못할 한없이 경박스럽고 가벼운 밥상이 급조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대다수 외지 관광객은 최면에 걸린 듯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한다. 몇 년 전 해남 최고의 해물탕집을 검증해 봤다. 소라, 산낙지, 꽃게, 백합, 새우, 오징어, 바지락, 미더덕, 보리새우, 대하, 대맛 등 20가지 이상 해물이 들어갔지만 무슨 일인지 해물탕 특유의 맛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유는 콩나물 때문인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콩나물 탓인지 콩나물국인지 해물탕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곁반찬도 너무 부실했다. 남도의 맛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도 맛집정보에는 유명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휴가철 전라도에선 유명한 식당은 가급적 피해라. 덜 유명한 데서 의외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해남의 천일식당과 강진의 해태식당이 한때 ‘양대 남도한정식’으로 불렸지만, 이젠 사람으로 들끓는 바람에 예전만 못하다. 오히려 전남 담양의 전통식당과 충북 보은의 경희식당이 미식가에게 사랑받는다. 가기 전에 놀러 갈 곳의 문화해설사, 마을이장, 문화원 관계자에게 맛집정보를 요청하면 유명하지 않아도 ‘착한식당’을 알려줄 것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5.3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19) 대구 수성구 ‘앙뜨레 누보’의 박현석
풀코스 부티크 프랑스 디너 테이블. 솔직히 그런 데 전혀 경험 없는 자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좌를 구경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 중심부 라스칼라나 영국 런던 코벤트가든 로비에 서있는 심정이다. 일단 주문 담당 웨이터에게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프랑스 메뉴명 앞에서 너무 질려 미뢰(Taste bud)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국 ‘아무거나 메뉴’에 낙착한다. 한 도시에 새로운 버전의 레스토랑이 생긴다는 건 흥분되고 설레는 일이다. 사장이 오너셰프이고, 자신의 일생이 투입된 공간이라면 그곳의 인테리어, 메뉴라인, 서빙 매너, 음악 등이 모두 분석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대구에서도 분자요리를 처음 맛볼 수 있게 됐다. 올해 그랜드 오픈한 대구시 수성구 두산동 앙뜨레누보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3년전 강남구 신사동에 정식당의 오너셰프 임정식씨가 분자요리(과학기법을 이용한 첨단요리로 스페인 최고 레스토랑 엘불리 수석주방장인 페란 아드리아가 창시)를 선보여 뉴스메이커가 됐다. 앙뜨레(Entree)는 ‘식사 전 나오는 두 번째 전채요리’, 누보(Nouveau)는 ‘새롭다’는 의미다. 올해 37세의 싱글 오너셰프 박현석씨는 약 20명의 직원을 종일 핸들링해야 된다. ◆ 심플하고 쿨하고 디럭스한 인테리어 인테리어라인을 분석해봤다. 극도의 심플함을 추구한다. 돈이 부족한 탓에 건축비용을 줄여야만 했다. 굿디자인 파일을 참고해서 짜깁기 디자인을 했다. 1층은 화이트톤으로 갔다. 동굴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주기 위해 아치기법도 동원했다. 1층 천장의 한 포인트를 강화유리로 처리하고 그 자리에 황금빛 사과 조형물을 설치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아끼려고 했던 걸 뼈아프게 후회한다. “공사 때 힘들었다. 지인 업자를 통했다. 3개월이면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391일 동안 공사를 했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설계가 필요하다. 싼 데 맡겼지만 하자와 부작용에 시달렸다. 내가 모르는 분야라서 그렇다. 역시 싼 게 비지떡이었다.” ◆ 취사병 출신 유럽 배낭여행 대구 출신인 그는 경신고와 대구산업정보대(현 수성대) 금융회계과를 나왔다. 군대에서는 취사병이었다. 취사반장을 맡으면서 조리인의 기본 소양과 시스템 등을 본격적으로 습득해 나가면서, 나름의 끼를 스스로 발견한다. 타 연대에까지 맛있다고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조리병 집채교육에 나가서 전체 1등을 했고 연대장 표창까지 받았다. 제대 후 조리사의 꿈은 잠시 접었다. 의료기 방문판매 영업을 하면서 지점내 최연소 판매왕까지 차지한다. 영업이 내 길인가 싶었다. 금융기관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금융기관과 나중에는 법무사 등기 사무장을 거치면서 또래의 월급쟁이 친구들보다는 좀더 월수입이 높았다. 하지만 인간미 없는 직업에 갑자기 깊은 회의를 느낀다. 보람이 있는 직업을 찾아보고 싶어 유럽 배낭여행에 나선다. 여행 내내 배고프고 돈 없는 배낭족 청년이었다. 맛있겠다는 눈초리로 쇼케이스로만 쳐다본 빵, 아이스크림, 피자 등을 공짜로 얻어 먹게 되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 그 따뜻한 가게에 장인급 오너셰프가 있었다. 문득 깨달음이 생긴다. ‘아! 인종을 떠나서 사람은 누구나 첫째도 둘째도 먹어야 사는 것이다.’ 귀국해 양식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대구에서는 괜찮다는 레스토랑을 순례한다. ◆앙뜨레 누보의 오픈 배경 그는 오로지 먹어보기 위해 유럽으로, 서울로, 월급의 몇배나 지출해 가면서 괜찮다는 집의 인기 메뉴를 먹으러 다녔다. 특히 스페인의 페란 아드리아가 운영하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엘불리라는 레스토랑을 무척 동경했다. 2년 걸린다는 예약까지 해놓았다. 아쉽게도 지금은 폐업하고 없어졌다. 엘불리에서 선보이던 당시 충격적인 음식이었던 분자요리에 큰 자극을 받는다. 즉시 우리나라 최초의 엘불리 출신 요리사 황선진씨가 강의하는 분자요리 강의를 신청하여 수강한다. 대구 시장을 해부해 봤다. 결국 오너가 전적으로 셰프에게 일임하거나 또는 셰프가 직접 경영하는 레스토랑만이 그나마 롱런 할 수 있다고 봤다. 스마트폰 문화 탓에 레스토랑 손님 세대교체까지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적어도 대구에서는 트렌드를 이끌어가면서 대구입맛과 최소한의 타협을 해나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전망했다. ◆앙뜨레 누보의 아이덴티티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기본’에 충실한다는 것이다. 업장의 규모와 주력 판매음식과 상관없이 장인정신이 담긴 레스토랑을 추구한다. 메뉴, 인테리어, 음악, 서비스, 위생 등이 원스톱으로 돌아가는 오감만족 식당구축이다. 맛과 멋의 공존이다. 양심적인 가격도 중시한다. 요즘 레스토랑 음식가격이 이유 없이 비싸다고 본다. 비싼 인테리어로 치장만 해 놓고 비싸게 받아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싶었다. 식자재 가격을 그는 잘 알고 있다. 푸아그라나 철갑상어 등 고가 식재료를 제외하면 그렇게 비쌀 이유가 없다. 식자재 외 광고비 현수막 등의 경상경비를 절약한다면 충분히 착한 가격을 줄 수 있다. 직원의 자존감을 위해 항상 직원의 애인과 가족에게 50% 할인을 해준다. ◆ 메뉴라인을 엿보다 분자요리 감각이 포함된 메뉴는 뭘까. 스테이크 위에 토핑되는 에스프레소 거품, 치즈 튀김, 망고 스펠리코. 젤리가 가미된 오이 피클, 에어초코 등이다. 특히 다시마의 끈적한 성분을 갖고 막을 형성해 그 안에 망고주스를 랩핑한 스펠리코는 이미 이 집의 명물이 됐는데 처음 본 사람들은 다들 계란 노른자로 착각한다. 렌틸콩도 스테이크 소스 위에 올리고 수프도 매일 바뀐다. 스테이크 소스도 그리스의 바다처럼 참 맑으면서도 깊은 단맛이 감돈다. 포트와인을 걸쭉하게 졸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빵 파트에서는 매일 구워낸 그리시니(스틱 건빵), 동그란 바게트, 유자빵 등을 낸다. 씹어도 찰떡처럼 들러붙지 않는다. 효모와 발효가 잘 됐다는 증거다. 디저트로는 수제 마카롱이 나온다. 아이스크림 같은 우유푸딩과 아이스크림 같은 무스케이크는 입자가 정말 부드럽다. 점심은 2만6천원∼져녁5만2천원. 맛 이상의 감동이 있었다. 오너셰프의 상냥한 쌍꺼풀과 밝은 미소, 그리고 영국 신사 같은 헤드 매니저 박설호씨의 스타일리시한 친절함과 매너가 혀 끝에 오래 남아 있었다. leekh@yeongnam.com ◆ 박현석 셰프 일문일답 -오픈 행사는 어떻게 했나. “오픈 행사는 촌스럽다고 봤다. ‘개업발’을 외면했다. 좋으면 구전으로 알려질 거라 믿었다. 그런데 오픈한 날 한 테이블만 받았다. 어떤 날은 공을 치기도 했다. 참견하는 사람이 많았다. 간판은 초대형으로 가라, 현수막 내걸어라, 광고를 해라 등 온갖 주문이 난무했다. 일단은 웃고 넘겼다. 한달간 직원끼리 팀워크만 다졌다.” - 주 공략층은 누군가. “일단 나름 구매력이 있는 수성구 아줌마 부대를 겨냥했다. 이를 위해 화장실에 신경을 썼다. 샤넬 향수도 두고 파우더 룸도 세웠다.” - 대구 레스토랑의 현주소를 어떻게 보나. 나름 독특한 경영철학이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공백’상태라고 본다. 요리사들이 타성에 젖은 탓이다. 이 집 요리사가 저 집에 가고 저 집 요리사가 이 집에 온다. 다 비슷한 메뉴다. 직원의 서비스 마인드가 매우 중요하다. 일단 홀 서버도 교육이 끝나면 직접 손님이 되어 테이블에서 풀코스 요리를 먹도록 했다. 손님에게 각 메뉴를 설명하려면 실제 먹어봐야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상당수 지역 레스토랑 서버는 서빙하는 메뉴를 거의 먹지 못하고 있다. 우린 조리사도 자기가 요리한 걸 직접 손님이 되어서 먹게 한다. 그래야 자기 요리가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서버도 서버끼리 서비스에 문제가 없는지 쌍방향 체크를 한다. 메뉴판도 계속 챕터(Chapter)1·챕터2 하는 식으로 분기별로 메뉴라인을 교체한다.”
2013.05.1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패션디자이너에서 외식창업디자이너로 변신한 변상일
그의 명함이 바뀌었다. 패션디자이너 변상일씨가 ‘외식창업주치의’로 변신한 것이다. 외식창업 스타일링 & 컨설팅 전문 ‘B& P’ 대표가 된 것이다. 지난 달 25일이다. 그가 그날 출간된 책을 기자에게 보내왔다. 책 제목에 관심이 갔다. ‘베이비부머, 스타일 모르고 외식창업 절대로 하지마라’(북갤러리 刊)였다. 그는 ‘인생 2모작 시대’를 맞아 파격적 변신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은 세상이란 걸 실감케해주었다. 패션디자이너에서 외식창업컨설턴트로의 변신, 그게 성공할까? 그는 실제 외식창업도 5번 정도 해봤고, 점포 입지 선정 및 분석, 실내인테리어 등에도 상당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2000년 겨울, 패션과 레스토랑을 매칭한 F & P(현재는 레스토랑 튜즈데이모닝)를 남구 대명동에 오픈했다. 그게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그 구역이 전국 첫 주택가 카페거리가 태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가 패션을 버리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책을 정독했다. 외식 전문가의 책에서 발견하기 힘든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알짜 창업 정보가 빼곡했다. 그의 아들 창민씨가 차려 대박을 낸 대명9동 파스타 전문점 ‘파스타민’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가슴은 새로운 길에 대한 부푼 꿈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1975년 9월15일 동성로3가 현재 유니클로 앞에서 창업했다. 패션쇼를 50여차례 했고 삼익뉴타운점을 오픈했을 때 하루 2천500만원도 팔았다. 그가 추구하는 패션 콘셉트는 디테일없는 심플함이다. 그는 ‘클래식캐주얼라인’을 추구했다. 캐주얼 패션을 주도했다. 84년 대구백화점에 캐주얼숍을 처음 입점한다. 매출이 엄청났다. 매출전표를 본 백화점 바이어들도 캐주얼숍을 벤치마킹한다. 초보 창업자 위한 지침 ‘베이비부머…’ 펴내고 정보·노하우 전수 나서 “폭 10∼20m 주택가나 아파트 반경 500m 내 눈에 띄는 장소 노리고 셰프 조리복 차별화를 한식집 공사업자 불러 카페·레스토랑·와인바 인테리어 맡기면 실패 노출 콘크리트식 꾸미고 천장은 높게 만들어야 주황색을 잘 활용하고 테라스석 설치 검토를” -패션과 요리,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패션과 요리는 모두 조화의 예술이다. 옷은 디자인을 해서 옷감, 안감 부직포, 실, 단추 등을 디자이너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작품(옷)으로 완성하듯 요리는 모든 재료가 조화가 돼야 맛과 향을 낸다. 이젠 패션을 떠나 요리 세계로 왔다. 예비 외식창업자에게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는 노하우를 전하는 외식창업주치의로 활동을 할 것이다.” - 프랜차이즈를 하지 말고 오리지널 창업을 권하는 이유는. “베이비부머는 경험이 없어 모든 걸 다 챙겨주는 유명 프랜차이즈를 선호한다. 하지만 가맹점비, 인테리어, 집기 등 모든 것을 가맹점 본사에서 구입해야 하므로 투자 금액이 많이 든다. 또 모든 걸 본사에 의존해야 되기 때문에 실제 수익률은 상당히 낮다. 본사 창업교육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안이한 사고방식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얼마 투자하면 얼마의 수익이 난다는 식의 신문광고에 절대 현혹되지마라.” -오리지널 창업은 어떤 강점이 있는가. “이젠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오리지널 창업의 시대다. 물론 장단점을 알아야 한다. 긴 시간을 갖고 철저한 시장조사와 그 업종에 맞는 품목을 배우는 과정이 프랜차이즈보다 힘들다. 프랜차이즈 창업비의 반만 투자해도 스타일있는 가게가 태어난다.” -창업 준비생이 어떤 각오를 해야하는가. “백화점 매장 구성을 잘 봐라. 명품 브랜드는 오픈매장 에스컬레이터 부근의 눈에 잘 띄는 곳이 아니라 안쪽 조용한 박스매장에 있다. 마니아 고객은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 패션과 외식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길목 선택에 있어 오리지널 창업은 상권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좋은 목이란 장소가 좋아서 사람이 많이 붐비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업종과 맞아 떨어지는 곳이다.” - 자리가 좋지 않은데 좋은 목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된다. “주위 환경에 나의 업종과 코디네이션 잘 되는 곳이 명소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말도 있다. 10~20m 폭의 깨끗하고 한적한 주택가를 노려라. 여긴 주차공간이 잘 확보된다. 상가밀집지역은 아무리 특이하게 디자인 해놓아도 희소가치가 떨어진다. 부동산업자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하지마라. 그들은 소개업을 하는 사람이지 창업컨설턴트가 아니다.” -길목 보는 실력은 어떻게 기르는가. “감각이다. 감각은 경험에서 온다. 그건 노력의 산물이다. 발바닥이 터지도록 시간별로 주위를 돌아다녀야 한다. 주위환경을 익히려면 몇달, 아니 2년이라도 발품을 팔아야 한다. 임차료가 싸고 가게가 고객의 눈에 뜨일 수 있는 APT 대단지 500m 반경도 좋다. 구전으로 소문이 나면 찾아올 수 있는 거리다. 유통차량 통행량도 세밀히 조사해야 된다. 나의 첫 창업 장소는 25m 도로 옆 주택가 밀집지역이었다. 예전에는 상가라고는 전혀없는, 밤이면 가로등만 쓸쓸히 지키고 있는 적막한 주택가였다. 이런 곳에 카페를 창업하면 희소가치를 느끼겠구나 하는 생각에 시장조사를 했다. 반년간 그곳에서 매일 통행량조사까지 해서 2000년 12월 패션카페를 열었다. 지금 그 거리가 대명동 카페거리로 탈바꿈했다.” - 인테리어도 참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안목이 없는 사람에겐 언감생심이다. “건축공사는 골치아프다. 해보면 안다. 업자들의 노가다기질 때문이다. 공사비 예산 얼마를 정해놓고 여기에 맞추어서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상담해야 실수가 없다. 인테리어 투자를 많이 한다고 해서 손님이 많은 게 아니다. 그 품목과 얼마나 콘셉트를 잘 맞추어서 작업하느냐가 중요하다. 공사를 하다보면 필요 없는 것도 하게 되고, 공기가 길어져 임차료 등 영업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인테리어는 가급적 겨울을 피해야 한다. 겨울에는 설비공사에 하자가 많고 시멘트가 얼어서 잘 마르지 않는다. 일의 능률도 덜 오르고 낮이 짧아 작업시간도 짧아져 공기가 길어진다. 업자 선정은 그 업종에 많이 공사한 업체여야 한다. 분식점 한식점 중국집 횟집 공사업자는 카페·레스토랑·와인바·서양 선술집 동선을 잘 모른다. 그런 업자를 부르면 초점이 없고 디자인도 조잡하다. 최소한 같은 업종을 공사한 곳 3~4곳을 가보고 결정해야 된다. 영업 잘 되는 동일 업종 몇 군데를 리서치해서 그 집 주인에게 어디서 공사했냐고 물어보는 방법도 있다.” -공사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안이 있다면. “공사업체가 결정되면 공사내역서와 계약서를 필히 받아야 한다. 특약에는 ‘하자보수 1년’이란 문구를 필히 써야 된다. 공사마감일도 명확히 기재해야 된다. 결제방식도 중요하다. 공사계약금은 총공사비의 10%, 공사 시작하면서 착수금 20%, 1차 중도금 20%, 2차 중도금 30%, 잔금은 오픈 후 10일 이내 지급하는 게 좋다. 공사 진행은 몇 % 안되었는데 자꾸 결제를 요구하면 그 업자는 한번 의심해봐라.” - 컬러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그런데 대다수 주인은 색맹인 것 같다. “오리지널 창업에서는 자기 색깔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가 원하는 건물 인테리어 디자인 라인을 잘 모르는 업자와는 계약하지 마라. 작은 가게일수록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공간미학을 잘 모르면 영업동선이 잘 나오기 어렵다. 특히 천장이 높도록 하는 게 좋다. 아직 천장과 벽체를 노출 콘크리트식으로 꾸미는 게 좋다. 마이크로 본드로 미장하면 아주 앤티크스러워진다. 벽 한 군데에 포인트 컬러를 주고 싶으면 그린이나 주황색을 칠하면 편해 보인다. 그런데 절대 색을 2가지 이상 바르면 안된다. 혼란스러워진다. 주황색을 특히 잘 활용해라. 젊은 손님이 좋아할 것이다.” -요즘 테라스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것 같다. “가게에 테라스 공간을 붙이면 첫인상이 좋아진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며 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고객을 흡수하는 효과도 있다. 유럽에서는 실내보다 테라스석 값이 더 비싸다.” - 유니폼도 참 중요한 것 같다. “유니폼은 가게의 얼굴이다. 옷을 잘 입어서 멋있게 연출하라는 것이 아니다.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옷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작은 가게는 오픈 주방을 선호하기 때문에 셰프들의 조리복 패션이 차별화되어야 한다. 기성복 유니폼 조리복은 어디에서나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차별화를 두려면 맞춤을 해야 되는데 맞춤은 예산이 많이 들기 때문에 평범한 티셔츠나 흰셔츠를 구입해서 자신의 브랜드 로고를 수놓으면 오리지널 유니폼이 된다. 유니폼 유무가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불과 5만원만 투자해도 멋진 유니폼을 만들 수 있다. 우중충한 스타일의 중년 사장은 명심해야 된다.” leekh@yeongnam.com
2013.05.0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18)대구 달성군 가창면 ‘큰나무집’의 조갑연
대구는 자타가 공인하는 ‘닭의 고장’. 삼계탕, 튀김닭, 찜닭, 백숙, 옻닭 등 온갖 버전의 닭요리가 대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대구의 백숙문화는 오랜 역사를 갖고 새로운 삼계탕 문화와 만나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한다. 예전의 백숙은 삼베보자기에 찹쌀 등 온갖 잡곡을 넣고 솥에 넣어 푹 고아냈다. 그런데 밋밋한 백숙문화를 한 단계 버전업시킨 식당이 있다. 바로 대구 궁중한방백숙의 신지평을 연 가창 우록리 큰나무집이다. 그 집의 여사장 조갑연씨(62)는 부산 아지매 같은 억척스러움과 여걸스러움을 겸비하고 있다. 백숙집 아줌마에서 백숙분야 명인이 된 뒤 전통음식연구가로 변신하고 있는 조씨의 ‘식당론’을 들었다. ◆백숙명인…처음에는 천을 만졌다 처음부터 닭백숙에 올인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청송군 안덕면에서 태어났다. 대구로 올라와 봉제공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1988년 클레임에 걸려 쫄딱 망한다. “열심히 해도 망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 복현동 서민아파트 작은 평수가 900만원에 팔리던 때에 1억1천만원이나 손해를 봤습니다. 정말 천을 보기도 싫더라고요.” 남편과 우연히 가야산에서 닭백숙을 먹었는데 관심이 있어 주인이 요리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순간적으로 닭백숙이라는 게 참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기력을 보충해줄 수 있는 메뉴라는 생각을 한다. 즉시 대구시 북구 복현동 영진전문대 근처에 성화궁중약백숙을 차린다. 1989년 봄이었다. 당시 대구의 닭백숙은 버전이 천편일률적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런 백숙에 질렸을 것이고, 당연히 새로운 버전으로 가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고 분석했다. 지역 한정식당가에서는 궁중요리가 유행했다. 그렇다면 일단 닭백숙을 하되 ‘궁중버전’으로 가자고 맘을 다져 먹는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라디오 프로에 나온 이화신 한의사가 남녀노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 한약재를 소개해서 그걸 메모해둔다. 번쩍, 답이 나왔다. “그래, 제가 파고들어야 할 메뉴가 궁중한방닭백숙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녀는 당귀, 황기, 청궁, 백작약, 감초 등 아홉가지 한약재를 선별한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약재배합 비율을 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양한 조합의 양을 물에 섞어 일일이 먹어보면서 테스팅을 했다. “한약재는 약재이기 때문에 향이 너무 강하면 안됩니다. 황기가 순하면서 깊은 맛이 있었어요. 당귀는 향기가 짙어 주연이 될 수가 없었죠. 하지만 황기가 주가 되면 닭 특유의 비린내가 납니다. 황금비율을 찾았습니다.” 한약재를 넣고 끓여보니 육수가 붉은 톤으로 변했다. 호감 가는 식감이 아니었다. 또 고심을 한다. 그때 블랙푸드가 유행한다는 걸 알게 된다. 블랙푸드에 관련된 책을 탐독했다. 그렇게 해서 골라낸 것이 바로 검정깨였다. 이젠 시식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이를 불러 두 종류의 백숙을 먹였다. 아이가 “옆집 치킨은 조금만 먹으면 질리는데 엄마 건 둘 다 맛있고 자꾸 당긴다”고 했다. 용기백배했다. 처음에는 냄비에 끓였다. 그런데 국물이 농밀하지가 못했다. 그래서 찾은 게 압력솥. 나름대로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계절별 영업이어서 들쭉날쭉했다. 일본은 겨울에 닭을 더 찾는데 한국은 이열치열식의 대명사가 백숙으로 각인돼 있다보니 동절기에는 매출이 급감했다. 우연한 기회에 현재 자리의 땅주인이 자기 집 언저리 촌집에 들어와서 백숙을 하는 게 더 좋겠다고 권유했다. 혼자 집을 보러왔는데 식당 자리로는 최악이었다. 폐가 직전의 농가는 실개천에 둘러싸여 손님이 차를 갖고 접근하기에 어려웠다. 그런데 느티나무 고목 한 그루가 그녀의 맘을 사로잡았다. 나무의 싱그러운 그늘이 자신을 위로해줄 것 같아서 묻지마식 계약을 한다. 90년 여름에 이사를 왔다. 41세였다. 그녀의 억척기질이 발동했다. 일단 차가 들어오려면 일정한 폭의 농로가 확보되어야만 했다. 구불구불한 30여m의 도랑을 반듯하게 복개하는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인다. 주민들이 안 보일 때 새벽같이 일어나 플라스틱 관을 묻고 지나가는 포클레인 기사를 불러 흙을 덮도록 했다. 몇달 죽도록 일을 했다. 그야말로 돌과의 전쟁이었다. 어느 날 손가락 지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나가니 지문이 없다고 해서 되돌아올 정도였다. ◆생명의 은인은 제1호 손님 역시 한 명이 중요했다. 당시 생명보험이 호황기를 누렸다. 보험회사 소장들은 팀원을 독려하기 위해 대구 인근 닭백숙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개업한 날도 옛 대구생명의 모 국장이 집 근처로 지나가다가 돌부리에 차의 밑바닥이 긁혔다며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했던지 모 국장이 그녀의 해맑은 표정에 매료된 나머지, 행선지를 그 집으로 바꾼다. 당시는 정말 초라한 식당이었다. 간판도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수중에 돈이 없었어요. 식탁을 구할 돈이 없어 133번 버스를 타고 칠성시장에 장 보러 나갈 때 눈에 띄는 내다버린 호마이카상, 선풍기 같은 걸 주워 사용했습니다. 모 국장이 나를 보고 이것도 식탁이냐면서 웃더군요. 그런데 전통의 기운이 묻어 있는 김치를 주니 금세 표정이 달라지면서 ‘아줌마, 이 식당 때문에 돈을 많이 벌 것’이라고 장담하더군요.” 어떻게 보면 최악의 서비스였다. 그런데도 첫 손님은 감동을 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저는 남편한테 차리는 밥상을 손님한테 낸다는 그 맘뿐이었어요. 그리고 상술 어린 미소 대신 그냥 수더분한 시골 아낙네의 풋살구 같은 웃음을 자연스럽게 내보냈습니다.” 지역 보험사 직원 사이에 백숙 잘하는 집으로 입소문이 난다. 특히 1호 단골이 680여명을 데려왔다. 역시 겨울철엔 장사가 안됐다. 살림할 돈이 필요한 나머지 부업거리를 찾으려고 대구시 중구 달성공원 근처 직업소개소에도 갔다. 하지만 그곳은 술집에 나가는 여성을 찾는 곳이었다. 발걸음을 돌렸다. 가장 서러웠던 때가 있다. “칠성시장에서 생닭을 사갖고 왔습니다. 우록으로 오는 직행이 없어 방천시장까지 와서 갈아 타야 하는데, 어느 날 검정 비닐에 담긴 찹쌀이 한 학생의 가방에 걸려 찢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쏟아졌습니다. 저는 울먹이면서 찹쌀을 한톨씩 주워담았습니다. 닭비린내가 거북해 승차를 거부하는 기사도 있었어요.” 2002년부터 고령의 성실축산, 축산과학원 등의 도움을 받아 토종닭 복원에 동참한다. 덕분에 2006년부터 토종닭으로 요리할 수 있게 된다. 매출이 폭증했다. 2008년 ‘우리맛닭’이란 인증서를 갖게 된다. 지난해부터 시래기찜닭, 영계찜닭, 부위별 백숙 등 6가지를 유통시키고 있다. 그런 공로 덕분에 지난해 대한명인회의 백숙분야 명인이 된다. 한약재 황금비율 찾고 흑깨로 블랙푸드 접목 궁중백숙 신지평 열어 토종닭 복원에도 동참 우리맛닭 인증서 취득 시래기찜닭·영계찜닭 부위별 백숙 등 6종류 최근 사찰요리점 변신 모든 식재료 직접 제조 무전·콩죽까지 낼 정도… 남·여 기능성 밥 눈길 ◆밥 잘하는 여자로 변신 세상은 슬로푸드를 원했다. 내심 ‘밥 잘하는 집을 만들자’고 다짐한다. 그녀는 닭에서 ‘밥’으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한다. 연일 정체불명의 나쁜 식재료 보도에 충격을 받는다. ‘단골에게 나쁜 식재료를 주는 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안된다’고 다짐한다. 새롭게 음식공부를 시작한다. 음식궁합이 궁금해 대구한의대 김미림 교수한테 2년간 약선요리를 배운다. 경산시 하양읍 향림사 장아찌에 반해 장아찌 배우기에 돌입해 이젠 복숭아·민들레 등 희귀한 장아찌를 수시로 낸다. 공장에서 나온 조미간장도 못 믿어 직접 집간장에 갖은 채소를 다 넣고 달인다. 모든 재료를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다음에는 사찰요리 공부에 들어간다. 현재 달성군사찰요리연구회 고문으로 있고, 지난해부터 달성군 사찰요리전문점이 된다.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고 상을 차린다. 참 어렵다고 했다. 김장은 통상 매년 3만포기 정도 한다. 천일염은 매년 신안군 하의도에서 400~500포를 갖고 온다. 백김치도 보리새우를 갈아 넣어 담근다. 청송·안동지역에선 ‘소적’으로 불리는 무전과 생콩을 불려 빻은 뒤 찹쌀과 함께 끓인 콩죽도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남자와 여자를 위한 기능성 밥을 개발한 것. 남자밥은 ‘기운’을, 여자밥은 ‘기혈’을 보강해준다. 남자밥에는 호두와 은행, 여자밥에는 검정콩과 대추 정도가 고명으로 올라간다. 사찰밥상이라 고기 대용으로 콩스테이크를 올린다. 아들이 닭에 더 집중한다면, 계절이 ‘씨앗’처럼 박혀 있는 ‘추억의 그 엄마표 밥’상을 재현해 보겠단다. 꼭 그렇게 되시길…. leekh@yeongnam.com
2013.04.19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경북대북문 상권 줌인
요즘 외식업계 큰손들은 경대북문(이하 북문) 맞은편, 일명 ‘대구의 홍대 푸드스트리트’를 제일 주목한다. 2010년 북구 산격3동에서 북문앞 상권을 전수조사한 결과 모두 440개의 점포가 있었다. 지금은 500여개로 추산. 여기에 북쪽 원룸촌에는 330여채의 원룸이 밀집해 있다. 북문 맞은편 상권의 첫 단추를 연 건 역시 대구 향토커피 1호 브랜드격인 80년대의 커피명가. 당시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시내 동성로에 가서 술을 먹고 폼을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권 문화가 깊게 자리를 잡고 있어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유흥업은 대학가에 진입하기 힘들었다. 식사도 대충 학생식당에서 해결을 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북문은 없었다. 정문과 후문, 동문 옆 개구멍문 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도서관이 개관되면서 수요가 있어 북문을 낸다. 90년대초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압구정 오렌지족이 불러일으킨 모방·소비성 강한 신세대문화가 가세한다. 덩달아 동성로 야시·늑대·로데오골목 붐에 중독이 된 대학생을 잡으려는 사업가들이 북문 앞 상권을 활성화시킨다. 2000년대 전국 최강의 찜닭붐이 이 거리에서 일어난다. 그 흐름은 아직 유효하다. 권리금과 임차료가 가장 비싼 곳은 벌써 유명 브랜드 커피숍과 빵집이 독점하고 있다. 파리바게트와 뚜레쥬르도 초입을 장승처럼 지키고 있다. 대구 브랜드인 다빈치는 북문 앞 초입을 지키다가 결국 서울발 브랜드한테 밀려 손을 들었다 그 자리에 파스구찌가 밀고 들어왔다. 카페베네는 수억원의 권리금을 안고 4층 빌딩을 통째 집어삼켰다. 북쪽으로는 원룸촌 때문에 깊숙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있고 대신 서쪽과 남쪽으로 많이 활성화되고 있다. 예전에는 대도시장과 분리됐는데 상권이 팽창하면서 붙어버렸고, 심지어 경대 북측 막창골목과도 연계된다. 점포의 70% 이상이 유명 프랜차이즈다. 대로변은 임차료가 500만~1천만원. 소자본으로는 엄두도 못낸다. 북문 상권은 대로 바로 옆 골목에는 밥, 나머지 두 골목은 술집이 주종을 이룬다. 특히 산격3동 주민센터 앞 거리 140m는 ‘북문 로데오’로 불리며 그 골목 양편에만 56개 업소가 들어와 있다. 메뉴는 역시 고기류가 강세를 보인다. 이밖에 포차식 고기집, 테이크아웃도시락(오봉 도시락), 중식스타일의 호프집(북경깐풍기), 컵밥(GGGO), 옛맛 통닭을 카페 분위기로 파는 대구통닭, 주먹밥(공씨네 주먹밥), 일본형 도시락 전문점(한솥), 밥버거(봉구스), 포차식고기집(맘보집) 등 기존 한식을 퓨전스타일로 팔고 있다. 분위기는 카페와 레스토랑형이다. 요즘 10~20대는 국물이 있는 고기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구이류가 선풍적 인기를 끈다. 갈매기살, 진갈매기, 서래갈매기살, 오늘 김해 뒷고기 등 저가 뒷고기류가 강세를 보인다. 점심 때면 학생들로 흘러넘치기 때문에 승패가 잘 나지 않는다. 역시 야간이 승부처이다. 산격3동 치안센터 옆 공원도 홍대앞 소공원처럼 리모델링할 계획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3.04.12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정부, 非수도권 국립대 건의 전격 수용…의대 신입생 모집인원 조정 허용
의대생 유효 휴학계 제출 건수 소폭 늘어 총 만585건…수업 거부 대학 10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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