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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11] 애국지사 수봉 문영박(1880~1930)
대구 달성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가문이 있다. 바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세거 중인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이다. 남평문씨 문중서고인 '인수문고(仁壽文庫)'에는 고서만 8천500여 책이 보존돼 있다. 이는 영남학파의 총본산인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보유하고 있는 장서보다 두 배가량 많은 양이다. 남평문씨 가문이 이렇게 많은 도서를 보유하게 된 데에는 수봉(壽峰) 문영박(文永樸)의 영향이 크다. 그는 부친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과 함께 인수문고의 전신인 만권당을 세우고 도서를 수집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의 발로로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교육을 통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조직이나 단체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10여 년간 소리 소문 없이 자금을 후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상하이 임시정부는 추조문을 보내 그의 업적을 치하할 정도였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인물 11편'에서는 수봉 문영박의 삶에 대해 다룬다.◆인흥사 터에 세거지를 세우다남평문씨가 달성 화원 본리리에 세거지를 형성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대구 입향조인 문세근(文世根)의 9대손 문경호(文敬鎬·1818~1874년)가 마을 터를 닦았다. 풍수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인흥사(仁興寺)가 있던 자리를 새 보금자리로 택했다. 일연 선사(一然 禪師)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인흥사 터를 후손들이 대대손손 번창할 '길지(吉地)'라고 판단한 것이다.인흥사는 창건 연대와 창시자는 알려진 바 없으나 일연 선사가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중수해 인흥사로 개칭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돼 폐사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흥마을 주변에는 아직도 인흥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려정(高麗井)이라는 우물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3층 석탑도 건재하다.남평 문씨 세거지 인흥마을서 출생광거당·만권당 매개로 폭넓은 교유가족 모르게 비밀리 독립자금 후원1930년 사망하자 임정 추조문 보내정부 건국포장·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문경호의 바람대로 남평문씨는 인흥마을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번성했다. 특히 문경호의 손자인 문봉성 대에 이르러 막대한 부를 쌓았다. 문봉성은 학문은 물론 경제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만석꾼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그가 소유한 토지는 160여만㎡(50만평)에 달했다고 한다.문봉성은 인흥 세거지를 개척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공사에 직접 참여해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후학을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1910년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한 교육장소로 지었던 용호재(龍湖齋)를 헐고 광거당(廣居堂)을 조성한 뒤 서고를 뒀다. 광거당은 공부를 하고 싶은 선비에게 언제나 열려 있었다. 문중 사람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누구든지 광거당에서 머물며 수학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당시 인흥마을은 유학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독립운동 역사의 숨은 영웅광거당을 세우게 된 배경에는 차남인 문영박의 역할이 컸다. 1880년 8월3일 달성군 화원면 인흥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인품이 남달랐다고 한다.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이다. 치주(恥宙) 손정은(孫廷誾)과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에게 수학해 학문에도 성취를 이뤘다.그는 일찍이 견문을 넓히는데 치중했다. 전국 곳곳을 둘러보며 많은 학자들과 교유했다. 특히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는 막역한 사이로 왕래가 잦았다. 조긍섭은 남명학 계승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또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이정(彛庭) 변정상(卞鼎相),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 백괴(百愧) 우하구(禹夏九), 소암(素巖) 김현동(金鉉東) 등 당대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도 어울려 지냈다. 문영박이 수많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광거당과 만권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거당은 당시 학자와 문인들의 교류 장으로 활용됐다. 만권당에는 중국과 전국 각지에서 구한 도서들이 소장돼 있어 이를 보기 위해 많은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광거당은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문영박이 광거당을 세운 것은 시대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터였다. 이에 문영박은 여러 인물과 뜻을 함께하고, 인재를 양성해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광거당을 짓고 수많은 양서를 확보한 것이다. 또한 후손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문영박은 조긍섭은 물론 중국에 망명 중이던 사학자 창강 김택영 등과 논의해 자료를 선별하고 책을 확보했다고 한다.광거당의 이름에서도 그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광거'는 맹자(孟子) 제2장의 대장부론에 나오는 '거천하지광거'란 말을 차용했다. 맹자가 말하는 대장부는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리를 행하고,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에도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않으며 위세와 무력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일제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고 백성과 함께 도리를 행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실제 문영박은 독립운동에도 동참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10여 년간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송달했다. 임시정부 요원을 통해 보내기도 하고, 중국에서 책을 구입하는 방법으로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수문고에 보존된 책들은 인재 양성의 밑거름이 된 것은 물론 독립운동 자금의 통로로도 활용된 셈이다.문영박의 독립운동은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졌다. 가족들조차 그의 활동을 전혀 몰랐을 정도다. 1929년 2월27일 고등계 형사들이 4시간 동안 가택 수색을 한 뒤 그를 체포했으나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석방하기도 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그는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독립을 지켜보지 못하고 1930년 12월18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32년 만에 전달된 임시정부의 편지1963년 경남 창원의 한 민가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들이 발견됐다. 집수리를 위해 뜯어낸 천장에서 찾아낸 독립역사의 숨겨진 조각이었다. 문서들은 빛바랜 보자기 속에 쌓여 수십 년간 고이 간직돼 있었다. 보자기의 주인은 창원 출신 독립지사 이교재(李敎載)였다. 임시정부 경상남북도 상주 대표였던 그는 1931년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 체포됐고, 1933년 고문 후유증으로 출소 뒤 1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보자기는 그가 체포되기 전 발각되지 않게 자신의 집 천장에 숨겨 놓은 것이었다. 다급한 상황이었던 만큼 다른 이에게 보자기의 존재를 알리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서류 중에는 수신처가 대구 달성 인흥마을인 문서가 두 점 포함됐다. 1930년 세상을 떠난 문영박에 대한 추조문과 특발문이었다. 추조문은 분홍빛이 감도는 비단에 16×20.8㎝, 특발문은 22.3×18.7㎝ 크기로 제작됐다. 추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문영박의 유족에게 조의를 표명한 문서이고, 특발은 그의 아들인 원만(元萬)에게 독립활동을 위한 지원금을 요청한 내용을 담고 있다.특히 추조문에선 문영박을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 칭했는데 이는 '대한국 역사의 주인이 되는 어른'이란 뜻이다. 임시정부가 그의 업적을 얼마나 높이 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두 문서는 달성 인흥마을로 전달됐다. 발송된 지 32년 만에 수신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편지가 전해지기 전까지 후손들은 그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추조문과 특발문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궁핍한 사정과 주변 정세에 대한 기대감, 광복을 위한 의지를 엿볼 수 있어 지난 2월6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74-2호로 지정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해설사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남평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은 주택 9가구와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로 구성돼 있다. 원래 인흥사가 있던 곳에 인산재 문경호가 터를 잡아 세거지를 형성하게 됐다.달성 인흥마을에 위치한 광거당(위)과 수백당. 광거당은 일제 강점기 국내의 수많은 유학자들이 모여 강론하고 공부하던 문화의 산실이었다. 문영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수백당은 현재 손님을 맞는 사랑채로 활용되고 있다.남평문씨 후은공파 문중 총무인 문석기씨가 인수문고에 보관돼 있는 서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지난 2월6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영박 추조문(위)과 문원만 특발문.
2020.10.15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10] 낙포 이종문(1566~1638)과 하옹 이익필(1674~1751)
대구 달성에는 수많은 보물이 존재한다. 도동서원 중정당과 사당, 태고정, 현풍 석빙고, 운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등이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지난해에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하목정(霞鶩亭)이 보물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하목정은 단순히 아름다운 정자가 아닌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상(詩想)의 대상이자 그들이 교류한 장(場)으로서 의미가 남다르다. 유교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목정의 주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가문이다. 조선시대 달성에 입향해 터를 이룬 이들은 문과 무를 가리지 않고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서슴없이 몸을 던져 구국의 밀알이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목정을 세운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과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이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10편'에서는 낙포 이종문과 하옹(霞翁) 이익필의 삶에 대해 다룬다.◆의병 활동에 나서이종문은 1566년(명종 21)에 달성 하빈 하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학가(學可), 호는 낙포다. 그의 가문이 달성에 터를 잡은 것은 예산현감을 지낸 조부 이필(李필) 때부터다. 이필은 경기도 부평(富平)에 거주하다 성주로 이거(移居)한 뒤 다시 하빈에 정착했다. 그가 영남으로 이주하게 된 계기는 사돈인 파평윤씨 가문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파평윤씨는 하빈과 고령(당시 성주)의 다산(茶山) 등지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족이었다. 또한 당시 끊임없는 당쟁 등으로 인해 뜻있는 선비들이 은둔자적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필 역시 비슷한 판단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달성에 나고 자란 이종문은 그의 장인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문하에서 공부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인 전경창은 대구지역 성리학 1세대로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큰 스승 밑에서 배움을 이룬 이종문은 1588년(선조 21) 22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한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잠시 손에서 책을 놓는다. 당시 대구지역 인사들은 공산의진군을 결성,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이종문은 하빈 4면의 대장 겸 서면장(西面將)을 맡았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장을 맡은 것은 그만큼 그의 능력이 출중했던 것으로 풀이된다.이종문의 부친 이경두(李慶斗)와 아우 종택(宗澤)도 의병활동에 동참했다. 이들은 군량과 군수품을 제공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 가문에서 3부자가 나라를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적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됐다. 이종문 또한 군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됐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이종문은 자신의 서재를 중건해 하목정(霞鶩亭)이라고 편액했다. 지역 유교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 장소가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이종문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연이 닿지 않았다. 다행히 이종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기던 시관(試官)의 천거로 그는 1606년(선조 39) 금화사(禁火司) 별좌(別坐)에 임명됐다. 이후 그는 1609년(광해군 4)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을 거쳐 사헌부 감찰로 승진했고, 비안·양성·군위현감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는 1623년(인조 1) 정치적인 이유로 파직돼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더 이상 그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지역 유림들과 강학하며 여생을 보냈다. 1638년(인조 16) 6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3세였다. 사후 그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됐다. 후손들은 그의 유문을 수습해 낙포집(洛浦集)을 편찬하고, 1897년 전성세고(全城世稿)에 다른 이들의 문집과 함께 엮어 간행했다.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된 하목정하목정은 빼어난 경관을 갖춰 많은 문인이 시와 글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시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남긴 제하목정(題霞鶩亭)이다. 인조의 명으로 사가(私家)에는 없는 부연(겹처마)을 갖게 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인조는 능양군 시절 하목정을 지나다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유숙한 일이 있었다. 이후 이종문의 아들 수월당(水月堂) 이지영(李之英)이 입궐하자 옛일을 잊지 않고 "하목정은 강산 경치가 좋은데 부연을 달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이지영은 "사가에는 감히 부연을 달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고, 인조는 "정자는 사가와 다르니 마땅히 지붕을 수리해 부연을 다는 것이 옳다"라고 하며 은 200냥을 하사했다. 왕명을 들은 이지영은 "부연을 단 뒤 출입을 금하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자, 인조는 다시 "거처하는 것은 폐하지 말고 내가 유숙한 표적을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며 하목당이라는 당호를 하사했다고 한다. 하목정은 명망 높은 선비들이 교유한 장소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데 모여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하던 곳이었다. 실제 이종문은 서사원(徐思遠), 여대로(呂大老), 장현광(張顯光), 송후창(宋後昌), 도성유(都聖兪), 도여유(都汝兪) 등과 금호강 선유를 즐기는 등 지역 인사들과 많은 교류를 가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1604년(선조 37) 조성된 하목정은 살림집의 사랑채 겸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우측 1칸에는 앞쪽으로 누 1칸을 첨가하고 뒤쪽으로 방 1칸을 더 만들어 평면이 정자형(丁字形)으로 구성돼 있다. 처마곡선이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된 특이한 형태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내부에는 김명석(金命錫), 남용익(南龍翼) 등 여러 명인들의 시액(詩額)이 걸려 있다. 조성 당시 하목정 우측에 안채와 사당, 행랑채, 사랑채, 새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995년 5월12일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뒤 2019년 12월30일 보물 제2053호로 승격했다.◆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전양군 이익필이종문의 현손자인 이익필은 1674년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에서 출생했다. 자는 문원(聞遠), 호는 하옹이다.그는 어려서부터 호탕한 성격에 겁이 없었다고 한다. 귀신의 허실과 유무를 알기 위해 늦은 밤에 사당을 지켜본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남다른 골격을 가졌던 그는 문무를 겸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1703년(숙종 29)에는 무과에 급제해 능력을 인정 받았다. 1710년(숙종 36) 선전관을 시작으로 부사정, 훈련원 주부, 도총 도사 등을 거쳐 1714년(숙종 40)에는 평해군수로 부임했다. 이후 죽산부사, 내금위장, 금위영 천총, 여주목사 직을 수행했다. 이익필의 가장 큰 업적은 무신난(戊申亂)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돼 토벌에 나섰다. 특히 그는 양난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해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선봉에 나서 독전(督戰)했다. 죽산 전투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李遂良)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했다. 당시 그의 면밀한 전략과 기민한 활동, 용감한 투지에 종사관(從事官) 박문수(朴文秀) 등이 탄복했다고 한다. 안성과 죽산 등지에서 잇따라 반란군을 격파한 공적으로 그는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해졌다.난을 토벌한 뒤 전라병사에 임명됐고, 1730년(영조 6) 9월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됐다. 같은 해 그는 전라도 운봉현의 진황전(陳荒田) 71부 2속과 전라도 강진현 고군내면 등의 진황답(陳荒畓) 1결 21부 1속을 사패 전답으로 지급받았다.이후 회령부사, 금군 별장, 도총부 부총관, 춘천부사를 역임한 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머물렀다. 하목정에서 시를 읊고 자적하다 1751년(영조 27) 세상을 떠났다. 병조판서로 추증됐으며 시호는 양무(襄武)다. 저서로는 하옹문집(霞翁文集), 황원일기(黃猿日記) 등을 남겼다.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 =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달성 하목정, 전의이씨예산공파종중 하목정 보존회. 낙포 이종문의 생애와 하목정, 구본욱.▨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자리한 하목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이 세운 정자다. 1995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뒤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53호로 승격했다.하목정 뒤편에는 전양군 이익필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사당안에 모셔진 이익필의 영정.
2020.09.24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9] 양직당 도성유(1571~1649)와 서재 도여유(1574~1640)
대구 달성의 명망 높은 가문 중 성주 도씨(星州 都氏)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 개국공신 도진(都陳)때부터 팔거에서 세거하던 성주 도씨는 경상좌도 병마우후 도흠조(都欽祖)가 하빈현 도촌리로 이거하면서 뿌리를 달성에 두게 됐다. 달성에 입향한 이래 문·무과에 급제한 교지가 24매에 이를 정도로 도씨 가문은 학문을 숭상하는 가풍을 올곧게 이어왔다. 또한 서예와 시, 글짓기에 뛰어난 이들이 많아 다양한 문집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兪)와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달성십현(達城十賢)에 오를 정도로 학문과 인품이 남달라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9편'에서는 양직당 도성유와 서재 도여유의 삶에 대해 다룬다.대구 유학 문풍 계승한 도성유한강 정구·서사원 스승으로 모셔임진왜란 때 의병 군량 조달 임무이황 문묘종사 위해 상경 상소도후학 양성에 힘쏟은 도여유병자호란 끝난후 학문에만 전념이괄의 난 일어나자 향병 모집다사읍 서재마을 유래는 그의 號◆대구 유학의 문풍을 계승도성유는 1571년(선조 4) 8월22일 세상에 나왔다.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에게 수학했다. 권응인은 당시 송대의 시풍이 유행하던 문단에 만당(晩唐)의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을 가져온 주역이다. 가풍을 이어 도성유는 학문에 정진했고, 15세에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 됐다. 당시 그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등암(藤庵) 배상룡(裵尙龍),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 사월당(沙月堂) 유시번(柳時藩) 등과 교유했다.특히 도성유는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아 항상 자신을 살폈다고 한다. 체구는 작았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중후했으며 효심 또한 지극했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는 데 힘을 보탰다.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친이 팔공산에서 피란하던 중 숨져 더이상 활약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삼년상을 마친 뒤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낙향하자 그를 찾아가 배례(拜禮)했다. 이후 그는 정구와 서사원을 스승으로 모시며 더욱 학문에 매진했다. 그는 문장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정구가 선성(先聖)들의 유상(遺像)과 주자의 친필을 그에게 모사하게 하면서 "도성유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1611년(광해군 3)에는 불의에 대항하는 선비의 기개를 보였다. 같은 해 5월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손처눌 등과 상경해 반박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후 그는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 때 신판(神版)에 글씨를 쓰는 역할을 맡았다.도성유는 대구 유학의 문풍을 계승했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1615년(광해군 7) 서사원의 병이 깊어지자 선사서재(仙査書齋)의 재장(齋長)을 위임받았다. 이후 후학들로 하여금 스승의 뜻과 가르침을 본받고 따르게 했다. 서사원이 타계한 뒤에는 이천에 사당을 세우고 봉향했다. 이듬해부터는 와룡산 아래에 와룡정사를 짓고 학문과 저술에도 힘썼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성리정학집(性理正學集),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가 있다.스승을 어버이처럼 섬긴 그는 정구를 화암서원(연경서원)에 제향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당시 화암서원은 이황을 제향하는 서원이자 대구 유학의 중심지였다. 도성유는 서원의 규모를 정비하고, 원지(院誌) 편찬 및 원록(院錄) 수정 작업도 펼쳤다. 또한 서사원의 강학소인 선사서재에 묘우를 짓자고 제안해 이강서원(伊江書院)을 건립하기도 했다.유학에 대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칠곡부가 문묘를 세우기 위해 도성유의 땅을 자신에게 팔 것을 청하자 "문묘를 세움에 어찌 땅을 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기증을 했다고 한다.평생을 강학에만 몰두했던 그는 1649년(인조 27) 1월30일 와룡정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1636년(인조 14)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세상을 등지고 두문불출한 지 10여 년 만이다. ◆선비의 도는 말이 아닌 실천에도여유는 1574년(선조 7) 12월23일 하빈현 도촌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해중(諧仲), 호는 서재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 마을 이름이 그의 호(號)에서 비롯됐다. 그만큼 그의 인물됨이 높다는 방증이다.그는 어릴 때부터 배움에 뜻을 뒀다. 10세 무렵 사촌형인 도성유와 함께 권응인에게 가르침을 받아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성실함과 두터움이 한결같았다. 특히 다른 이를 공손히 대해 다툼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토지에 다른 이가 밭을 일궈 싸움이 나게 되자 "어찌 한 자 한 치의 땅 때문에 남과 서로 따지랴"라며 개의치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그의 나이 15세 때부터는 서사원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강학에 몰두했다. 하지만 곧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부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렀다. 평소 '학문은 하루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은 그에게 강학은 즐거움이었다. 정구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로 그는 배움을 청했고, 이후 정구와 서사원 문하에서 심경·주서·예학 등 책을 강론했다. 특히 그는 학문에 탁월했던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서사원은 그를 가리켜 "학문하는 방향이 올발라 쇠폐한 나를 일깨워 준다"고 했으며, 정구는 "후생(後生) 중에 뜻을 가진 이는 도여유뿐"이라고 했을 정도로 신임이 깊었다. 당대 큰 어른인 두 스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 받은 셈이다.1611년에는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배척하자 이를 변론하는 상소 모임에 참여했다. 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손처눌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해 공을 세웠다.그는 "학문은 자득(自得)하기를 귀하게 여기니, 자득하면 옛사람들의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황홀하게 친히 듣는 듯 해 나의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여서 이른바 '구이(口耳)의 학문'일 따름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선비의 도는 말이 아니라 실천에 있음을 강조한 것.벼슬에는 큰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성시에 떨어지자 그는 "얻고 얻지 못함은 명이니 요행으로 이룰 수 없다. 과거에 급제하길 바라는 것은 어버이가 계셨기 때문인데 양친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진취에 마음을 두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반면 슬하에 아들 네 명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나아갔다. 장남 도신수(都愼修)는 당쟁의 영향으로 주로 외직에 있었지만 백성들의 구휼과 교화 등에 힘써 왕명으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기도 했으며, 넷째 도신징(都愼徵)은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병자호란 이후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로지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은 도여유는 1640년(인조 18) 10월3일 세상을 등졌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서재집 4권 2책'이 있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한민족대백과. 용호육현행록, 성주도씨용호문중.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는 도성유와 도여유, 도신수를 배향하는 용호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 입구인 입덕문을 지나면 용호서당이 나온다.용호서원은 흥선대원군 집권기 때 훼철된 뒤 용호서당으로 개칭됐다. 이후 강당만 복원돼 용호서당 현판을 달았다.용호서당 아래 쪽에 위치한 치경당은 묘소가 전해지지 않는 성주 도씨 시조 도순과 3세조 도유도, 도유덕을 추모하는 공간이다.용호서원 앞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2020.09.10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8] 대구 유학사 큰 족적 남긴 낙재 서사원(1550~1615)
"나라가 파괴되고 집이 망했으며, 임금이 피란했으니 조금이라도 혈기를 가진 이라면 누구인들 피로 얼굴을 적시고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있으랴. 활과 화살을 소지하고 궁시가 없으면 창이나 칼, 혹은 도끼를 잡되 모두 자루를 길게 하라". 임진왜란 당시 대구지역 의병장을 지낸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이 향병 모집을 위해 지은 '초집향병문(招集鄕兵文)'의 한 구절이다. 그는 온 나라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처지를 통탄하며 지역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적에 대항하기를 주문했다. 평생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은 문인이면서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후학 양성을 통해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의 학문을 이어 지역 학풍을 후대에 계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8편'에서는 낙재 서사원의 삶에 대해 다룬다.◆지역민을 먼저 생각한 달성 서씨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달성 서씨는 대구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 중 하나다. 대구를 근거로 오랜 기간 세거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도 실천해왔기 때문이다.대표적인 사례가 달성공원 일대를 나라에 헌납하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받게 해 준 일화다. 달성읍지 등에 따르면 세종은 달성 서씨 세거지에 요새를 짓길 원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적격하다는 판단에서다. 세종이 새로 정착할 땅을 줄 테니 세거지 터를 달라고 하자 서씨 가문은 흔쾌히 협조해 포상을 받게 됐다.하지만 구계(龜溪) 서침(徐沈)은 "나라 땅이 모두 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다"며 포상 대신 지역 백성들의 환곡(還穀)이자를 감면해 줄 것을 청했다. 환곡은 곡식을 저장했다가 백성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제도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세종은 서침의 인품을 높이 사 그의 청을 들어줬다. 이후 지역 백성들은 조선 말까지 환곡이자를 한 섬당 5되씩 감면 받았다. 사사로운 이익보다 민초들의 고된 삶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전경창·채응린·정사철의 학문 계승임란 일어나자 공산의진군 수장 역할영남의병 활동 기록한 일기도 남겨전쟁후 하빈현 이천에 머물며 강학학문업적 기려 1639년 이강서원 배향서씨 가문의 이 같은 행동은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림들은 서침의 송덕을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1665년(현종 6) 조성된 구암서원(龜岩書院)의 탄생 비화다.서씨 가문의 선행은 수백년의 세월을 지나 또다시 재현됐다. 2019년 달성 서씨 대종회가 서침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대구 중구 동산동 구암서원 터와 남은 건물을 대구시민에게 기부한 것이다.구암서원은 동산동 일대로 한 차례 이전한 뒤 1995년 북구 산격동 연암공원 내 현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옛 구암서원 터는 2천500㎡ 규모로 감정가만 35억여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관직보다는 학문 연구에 전념서사원은 1550년(명종 5) 6월4일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태어난 곳은 그의 외가가 있던 경상도 성주목 팔거현(현 칠곡)이다. 6세 때 백부인 연정(蓮亭) 서형(徐)에게 처음 글을 배운 서사원은 이듬해 그의 양자가 됐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생모를 잃은 그는 부친의 뜻을 받아 공부에 매진한다. 1566년(명종 21)에는 송담 채응린의 문하에서 수학을 시작했다. 채응린은 위기지학에 전념한 유학자로 당시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다. 서사원은 학문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응린뿐만 아니라 전경창과 정사철,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는데 모두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특히 정사철은 경전을 강학한 뒤 서사원에게 "그대는 나의 외우(畏友)"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1575년(선조 8)에는 26세의 나이로 향시에서 장원 급제까지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 양부인 서형이 타계하고 만다. 3년간 복상을 마친 뒤 그는 1579년(선조 12) 선사(仙査·현 다사읍 이천리)에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지어 학문 연구와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1584년(선조 17)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87년(선조 20)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직을 맡았으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2년 뒤 재차 동몽교관에 임명됐으나 이번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관직에는 큰 뜻을 두지않고 공부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그는 지역 여러 곳을 탐방하기도 했다. 1590년(선조 23) 존재(存齋) 곽준 등과 더불어 안동 도산서원, 역동서원을 참배하고 청량산을 유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듬해에는 연경서원을 찾아 화암(畵巖)을 돌아보고 퇴계의 시에 차운(次韻)을 했다고 한다.◆임진왜란과 공산의진 의병장강학에 매진했던 서사원의 삶이 급격하게 바뀐 것은 1592년(선조 25)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 온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구지역 인사들은 상황이 날로 악화되자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서사원도 동화사(桐華寺)에 머무르면서 향병 모집을 독려하는 격문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을 짓고, 여러 인사들과 의논해 향병입약(鄕兵立約)을 제정했다.지역 의병장직도 그가 맡게 됐다. 당시 의병장으로 추대된 정사철이 연로한 나이 탓에 직수행을 고사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임진년 7월6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 조직됐다. 서사원 외에도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등이 뜻을 함께했다. 대구부사도 군사를 편성하면서 서사원이 참여하도록 배려했다. 수장 역할을 해오던 서사원은 연이어 상(喪)을 당해 손처눌에게 의병장직을 맡겼다. 이후 그는 1594년(선조 27)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면서 항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1596년(선조 29) 7월에는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이끌고 목천(木川)에 가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또 1597년(선조 30) 4월에는 군대를 이끌고 문경새재를 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의병 활동 외에도 그는 또 다른 유산을 남겼다. 임진왜란 시기 일기를 써 당시 영남지역 관군과 의병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후대에 전한 것이다. 낙재선생일기에는 전쟁 직후인 1592년 4월12일부터 1595년(선조 28) 9월20일까지 3년5개월 동안의 일상이 기록돼 있다.◆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열어전쟁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달성군 하빈현 이천에 머물며 거처하는 곳을 '미락재(彌樂齋)'라 이름 붙였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미락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미(彌)'자를 떼고 '낙재(樂齋)'로 호를 고쳤다. 또한 성리학 연구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특히 퇴계의 문집을 즐겨 읽으며 퇴계학을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01년(선조 34)에는 전쟁으로 불탄 선사재(仙査齋)를 다시 지어 강학 장소로 삼았다. 선사재는 고운 최치원이 해인사에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문 적이 있는 선사암 옛터에 정사철이 세운 서재다. 서사원은 대구 유학 1세대로 평가받는 전경창·채응린·정사철 세 명의 인물 가운데 정사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그는 1601년부터 꾸준히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손처눌 등과 함께 지역 유생을 모아 선사재와 연경서원에서 강학하며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당시 그는 학생들과 강학하면서 "자고로 후학들이 힘을 얻을 곳으로 주자서만 한 것이 없다"며 강조했다고 한다.평생을 학문 연구와 함께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 그는 대구 유학의 전성기를 꽃 피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시 문학적으로도 업적을 남겼다. 금호강의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는 것을 즐겼는데, 선유에 참여한 문인들과 어울리며 탈속적 감성과 도학적 감성을 공유했다. 대구 유학사의 큰 족적을 남긴 그는 1615년(광해군 7)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39년(인조 17)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에 배향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낙재 서사원의 생애와 강학 및 임진란 창의, 구본욱.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대구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자리잡은 이강서원. 낙재 서사원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1639년(인조 17) 서원의 모습을 갖췄으나 1871년(고종 8) 훼철된 뒤 복설되지 않았다.서사원의 묘소는 달성 서씨 선산이 아닌 달서구 호산동에 위치하고 있다.서사원의 묘소 관리를 위해 1860년경에 지어진 낙선재.
2020.08.27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7] 하빈면 동곡 출신 유학자 임하 정사철·낙애 정광천
퇴계학에 뿌리를 둔 대구의 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이다. 달성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과 함께 많은 후학을 양성하며 대구 유학 1세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강학에 몰두해 대구지역 문풍을 후대에 전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그는 지역 유림 최고 지도자로 의병활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노년의 나이로 직접 활약하진 못했으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의병 활동의 선봉에 섰다. 그의 아들인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역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7편'에서는 임하 정사철과 낙애 정광천의 삶에 대해 다룬다.후학 양성 힘쓴 정사철임하초당·선사서사 짓고 강학 매진평생 성리학 배우고 가르침 후대 전해임란 의병장 추대됐지만 병으로 고사사후 170여년 지나 금암서원에 배향임진왜란 의병 일으킨 정광천한강 정구·계동 전경창 가르침 받아곽재우 장군 화왕산성 전투 도와 전공◆소학과 서경, 주역을 탐독정사철은 1530년(중종 25) 4월24일 달성 하빈면 동곡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계명(季明), 호는 임하다.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문장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7세 때 효경(孝經)을 처음 접하고, 이듬해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다. 10세부터는 소학(小學) 공부를 시작해 서경(書經)과 주역(周易)도 탐독했다. 16세의 나이로 성주 이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그는 어머니의 곁을 떠나 분가한다. 결혼 이후 그는 학문에 더욱 정진한 것으로 보인다. 모친의 권유로 과거를 준비해 1552년(명종 7)에는 초시(初試)에도 합격했다.본격적으로 학문에 매진하기 위함이었을까. 2년 뒤 그는 팔거(칠곡) 사수에 서실을 지었다. 달성에서 꽤 떨어진 곳에 공부방을 만든 건 사수의 이름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사수는 공자가 태어나 강학한 곳의 지명이기도 하다.1555년(명종 10) 봄, 그는 선친의 묘소가 있는 연화산 아래 연화재를 짓고 또다시 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연화재를 지은 연유는 부친에 대한 회한과 사모의 감정이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사철이 성리학에 관한 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연화재에 우거하면서다. 당시 연정 서형, 남간 서식 형제와 송담 채응린, 계동 전경창 등이 방문해 강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대구지역 유학의 선구자1562년(명종 17) 그에게 또 한 번 시련이 찾아온다. 홀로 남은 모친마저 타계한 것이다. 애끓는 마음으로 3년간 여묘살이를 마친 그는 1568년(선조 1) 연화동에 임하초당(林下草堂)을 짓는다. 이때부터 임하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정사철이 학문에 큰 정진을 이룬 곳이 바로 임하초당이다. 16년간 거주하면서 강학에 매진했다.1571년(선조 4)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임하초당을 방문했는데, 정사철은 그가 13세아래임에도 도의로 사귀었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정구와 교유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해 크게 깨닫고 성리학 관련 서적을 섭렵하며 깊이 탐독했다. 이황(李滉)을 사숙(私淑)해 퇴계학을 추구했으며, 도산으로 가서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는 특히 유학의 경전 중에서 소학과 주역을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인 서경·심경·근사록·주자서절요 등을 연구했으며, 예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정사철의 가장 큰 업적은 강학 장소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는 점이다. 1587년(선조 20) 금호강 하류에 선사서사(仙査書社·선사서당)를 짓고 강학했는데 수많은 수재(秀才)들이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곽재겸(郭再謙)·손처눌(孫處訥)·서사원(徐思遠)·도원결(都元結)·윤인협(尹仁浹)·채몽연(蔡夢硯)·곽대덕(郭大德)·주신언(朱信言) 등이 그를 좇아 함께 지냈다.더욱이 그는 같은 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들을 모아 강학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택했다. 일생 성리학을 배우고, 그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는 삶을 실천한 셈이다. 선사서사(서당)는 연경서원과 더불어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열게 한 강학 장소로 꼽힌다.◆지역 의병장으로 추대1592년(선조 25)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다. 일본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전쟁을 벌인 것. 전란 발발 무렵 정사철은 대구 유림의 최고 지도자였다. 당시 지역 유림을 대표한 인물은 그 외에도 전경창, 채응린이 있었지만 두 명 모두 사망한 터였다. 앞서 채응린은 1584년 금호강변 왕옥산 기슭에 자리 잡은 압로정(狎鷺亭)에서 세상을 등졌고, 이듬해 전경창마저 한양 여저(旅邸)에서 숨을 거뒀다.이에 지역 인사들은 임진년 7월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을 조직하고, 정사철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또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도 그를 소모관(召募官)에 임명했다.하지만 정사철은 직을 수행할 몸상태가 아니었다. 63세의 나이로 최고령 유학자였던 그는 종환(腫患)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결국 그는 열흘 뒤 노비 둘을 시켜 '다리에 난 종환 때문에 향병(鄕兵)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전갈을 부인사 의병소로 보내 직을 거절했다. 공산의진군 의병장은 그의 문하인 낙재(樂齋) 서사원이 대신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전세는 여전히 불리했다. 정사철은 이듬해 봄, 거창으로 몸을 피했다가 전염병에 걸려 별세했다. 향년 64세였다. 대구 유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3권 1책의 '임하실기(林下實記)'와 4권 1책의 문집인 '임하집(林下集)'을 남겼다. 사후 170여 년이 지난 1764년(영조 40) 그를 배향하는 사당인 금암사(琴巖祠)가 세워졌고, 금암사는 1786년(정조 10) 금암서원(琴巖書院)으로 승격됐다.◆그 아버지에 그 아들 정사철의 아들인 정광천은 1553년(명종 8)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버지가 나고 자란 달성 하빈면 동곡에서 첫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정광천의 자는 자회(子晦), 호는 낙애(洛涯)·송파(松坡)다. 벽진 이씨와 결혼해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그는 가학을 계승(家學)하고, 계동 전경창을 사숙(私淑)했다. 또한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부친과 정구의 영향을 받아 소학을 자신을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다고 한다. 또 염락관민과 같은 성리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정광천은 가사와 시 작문에 능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부친을 비롯해 낙재 서사원, 송재(松齋) 주신언(朱愼言)과 함께 팔공산을 유람한 뒤 남긴 연작시 유팔공산십수(遊八公山十首) 등이 있다. 그는 부친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으로 보인다. 1586년(선조 19)에는 낙동강 동쪽 물가 '아금(牙琴)'이라는 바위에 누대를 짓고, 부친과 함께 생활하며 유유자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곁에서 보필한 영향일까. 그의 효심 또한 남달랐다. 1590년(선조 23) 정사철이 병에 걸리자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했으며, 회갑연까지 준비한 뒤 연수곡(延壽曲)을 지어 부친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효행만큼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다. 부친이 의병장으로 추대될 때 그는 하빈면 남면장이 됐다. 의병을 일으켜 경남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교전 중인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부친이 피란길에 오르자 곁을 지켰다. 대구는 한양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어 왜군 주력부대가 머물렀고, 지역 유림들은 피란을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부친이 거창에서 타계한 뒤 이듬해 그 역시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지은 술회가 6수와 병중술회가 3수 등을 비롯한 '낙애일기'와 3권 1책의 낙애집(洛涯集)를 남긴 채 부친과 함께 금암서원에 배향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임하 정사철과 낙애 정광천 선생, 구본욱, 학이사.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정사철과 정광천을 배향하는 금암서원은 1871년(고종 8) 훼철됐다가 1958년 후손들에 의해 금암서당으로 복원됐다. 현존하는 건물은 서당 한 채가 전부다.금암서당 인근에는 정사철과 정광천 부자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달성군 다사읍 연화산 자락에 위치한 임하 정사철(위쪽)과 낙애 정광천의 묘소.
2020.08.13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6] '시대의 충신' 사육신 박팽년(1417~1456)
대구 달성에는 '충절(忠節)'의 의미를 되돌아 보게 하는 공간이 있다. 조선시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다. 육신사가 달성에 터를 잡은 이유는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후손들이 하빈면 묘골에 세거 집성촌을 이뤘기 때문이다. 박팽년은 집현전 정자부터 형조참판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 관직 생활을 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올곧은 성품은 타의 모범이 됐고, 문장과 글쓰기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행장이나 문집이 전해지지 않지만 몇편의 시와 서문 등이 남아있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서슴없이 죽음을 선택한 '시대의 충신'이었다. 그의 절의는 시대를 거슬러 오늘날까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6편'에서는 사육신 박팽년의 삶에 대해 다룬다.◆문장·글씨 모두 뛰어난 집대성박팽년은 1417년(태종 17) 한석당 박중림(朴仲林)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인수(仁수),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그는 어릴 때 부터 학문에 대한 소양이 깊었다. 15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한 뒤 2년 만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세종은 일찍이 그를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발탁해 중용했다. 1438년에는 호당(湖當)에 선발돼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47년(세종 29) 중시에 합격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다.세종 연간 박팽년은 집현전의 정자(正字)·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직집현전(直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당시 그는 집현전 학사로 다양한 편찬 사업은 물론 한글 창제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특히 그는 당시 집현전의 젊고 유망한 학사들 가운데 학문과 문장, 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렸다.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이석형(李石亨)·유성원(柳誠源)·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하위지(河緯地)등 기라성 같은 인물 가운데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의 문장은 부드럽고 담담했으며, 필법이 유독 뛰어났다고 한다. 성격은 과묵하면서 침착했다.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으며, 하루 종일 앉아있으면서도 의관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명나라 6대 황제인 정통제(正統帝)가 오랑캐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침실을 마다하고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지냈다. 주위에서 그 연유를 묻자 그는 "천자가 오랑캐에 잡혀 있으니 비록 남의 나라 신하이기는 하나 차마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의 충절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팽년은 세종에 이어 문종에게도 총애를 받았다. 문종이 그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부탁했을 정도다. 문종은 어느 날 밤,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들여 무릎에 단종을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며 술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 자리엔 성삼문과 신숙주 등이 동석했다. 단종 즉위 이후 그는 집현전 부제학,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 左副承旨)·승정원 우승지(右承旨),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등을 거치며 소임을 다했다.◆오직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1455년 조선사회는 급변한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다. 앞서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직후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등을 차례로 죽이고 이미 정권을 잡은 터였다. 왕위 찬탈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했다. 성삼문의 간곡한 만류 끝에 그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박팽년은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임명됐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은밀히 추진, 거사일을 6월1일로 잡았다.이날은 세조가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가 예정돼 있었다. 연회 때 별운검(別雲劒)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를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 시위(侍衛)를 폐지했다. 결국 거사가 미뤄졌고, 파국으로 치달았다.거사 실패를 두려워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했고, 박팽년과 성삼문 등은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능을 높이 사 회유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했다. 더욱이 그는 국문(鞠問)자리에서도 세조에게 '나으리'라는 호칭을 썼다. 이에 세조는 "그대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칭했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 감사로 있을 때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답했다. 실제 박팽년은 충청 도 관찰사 시절,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심한 고문을 당한 박팽년은 같은달 7일 옥중에서 숨졌다. 이튿날 그의 아버지 박중림과 동생 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 아들 박헌(朴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됐다.죽기 전 그는 "나를 난신(亂臣)이라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를 지켜 본 금부랑 김명중(金命重)이 "어찌하여 이러한 화를 스스로 자처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마음이 평안하지 않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충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선비의 절의를 끝내 지켜낸 셈이다. 생육신(生六臣) 중 한 명인 남효온(南孝溫)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박팽년 등 사육신의 충절을 추모했다. 이후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는 사육신으로 추앙받게 됐다.숙종대에 이르러 박팽년은 복관(復官)됐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증직됨과 더불어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하늘의 뜻을 받아 대를 잇는 충절심사육신 가운데 박팽년의 가문만 유일하게 직계 혈손으로 계통이 내려온다. 이는 하늘이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멸문의 화를 당했을 당시 박팽년의 아들인 박순의 아내 이씨가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친정인 대구로 내려간 이씨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려고 했다. 이씨가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이때 공교롭게 박팽년의 여종 또한 딸을 낳았고, 서로 자식을 바꿨다. 목숨을 부지한 박순의 아들은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훗날 박비는 장성한 뒤 경상감사로 온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의 권유로 자수했다. 성종은 특별히 이를 용서하고 일산(壹珊)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문의 명맥을 비로소 잇게 된 순간이었다.박팽년의 충절심은 대를 이어 재현된다. 박팽년의 5세손인 박충후(朴忠後)와 박충윤(朴忠胤), 박충서(朴忠緖)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박충후는 무과에 급제한 뒤 통정대부·가선대부를 거쳐 태안군수·함안군수를 역임했다.박충윤의 아들인 도곡(陶谷) 박종우(朴宗祐)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587년(선조 20) 하빈면 묘골에서 태어난 박종우는 어려서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에게 수학했다. 서사원과 교유한 백부와 부친의 영향이 컸다. 그는 일찍이 문예에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19세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한결같이 두 스승에게 나아가 바로잡았다고 한다. 또 정구가 고을 사람에게 무고를 당하자 한달음에 달려가 변론하는 등 스승의 일을 제 일인 양 도왔다. 그의 성품과 됨됨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박종우는 1630년(인조 8) 한성시에 책문으로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6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장에 나가길 원했으나 아흔의 양친을 두고 차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대신 적을 막을 9가지 방책을 관찰사 심연(沈演)에게 진언했다. 그는 또 "주상께서 포위돼 있는데 내가 비록 초야의 미천한 신하이나 어찌 침소에서 편안히 거처하겠는가"라며 50일 동안 길바닥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통곡하며 평생 쓴 초고를 모두 태워버렸다. 당시 그는 "백성들이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갓과 신이 뒤바뀌며 풍속이 변하고 바뀔 것인데 차마 죽지는 못할지언정 글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후 그는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호하고 19년간 두문불출하며 평생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달성 십현(十賢)으로 꼽히는 그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 =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추적·박팽년·곽재우, 대구달성교육청. 도곡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달성 육신사 경내 오른편에 위치한 태고정.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중기 정자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554호로 지정됐다.사당인 숭정사에는 박팽년 , 하위지,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 '사육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위치한 도곡재는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이었으나 1800년대 들어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됐다.
2020.07.30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5] 문헌공 노당 추적(1246~1317)
대구 달성에는 성리학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노당(露堂) 추적(秋適)의 위패를 모신 인흥서원(仁興書院)이다. 추적은 회헌(晦軒) 안향(安珦)과 함께 성리학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이다. 실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남긴 '무릉잡고(武陵雜稿)'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해동(海東)에서 유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건립한 도가 복초당 안선생 문성공 유와 노당 추선생 문헌공 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누구라도 흠모하지 않겠는가.' 문성공 유와 문헌공 적이 바로 안향과 추적이다. 그만큼 추적이 성리학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또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중국 고전에 나온 선현들의 금언(金言)·명구(名句)를 편집해 만든 명심보감은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교양도서로 자리 잡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5편'에서는 문헌공 노당 추적에 대해 다룬다.◆송나라에 뿌리를 둔 추계추씨추적의 가문은 중국 송나라에서 건너왔다. 할아버지인 추엽(秋)이 고려 인종(1122~1146년) 때 가솔을 이끌고 와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시조가 됐다. 문중 자료 등에 따르면 추엽은 동해상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비치는 것을 보고 큰 뗏목을 타고 고려에 왔다고 한다. 송나라가 금나라의 위세에 밀려 쇠멸해가는 것을 보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간 곳이 고려였던 것이다. 추엽은 1141년 송나라 문과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까지 나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아버지인 추황(秋篁)도 문신으로 명성이 높았다. 고려사에는 추황이 아닌 추영수(秋永壽), 문정공 조충공의 지석에는 추영수(秋潁秀)로 기록돼 있다.추황은 비교적 어린 나이인 16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학식만 갖춘 것이 아니라 인품도 겸비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단편적인 일화가 있다. 보성의 원으로 부임해 임기를 마친 뒤 그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녹봉을 백성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몽골의 침략으로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전할 당시 임금을 극진히 보좌한 공을 인정받아 예문관 대제학 등 고관에 올랐다. 그는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훗날 그를 기리는 제자들에 의해 이학종사(理學宗師)라는 명성을 얻었을 정도다. 사후에는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지학(志學)의 나이에 급제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아서일까. 추적은 떡잎부터 남달랐다. 1246년 태어난 그는 15세가 되던 1260년(원종1) 문과에 급제했다. 아버지보다 한 살 더 어린 나이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회헌 안향도 18세의 나이로 급제했다. 성리학 보급의 주역인 안향과 추적의 인연이 과거를 통해 시작된 셈이다. 지학의 나이에 급제한 추적은 안동부서기를 시작으로 사록, 직사관, 좌사간, 용만부사, 원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당시 추적의 성품은 고서 등에 기록된 일화로 알 수 있다.먼저 좌사간 때 일이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해 자신의 고향 합덕부곡(合德部曲·현재 충남 당진군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 하자 추적은 문안에 서명을 거부했다. 부당한 일에 동조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이를 빌미 삼아 황석량은 왕에게 참소(讒訴)했고, 추적은 칼이 씌워져 순마소(巡馬所·원나라가 내정간섭을 위해 고려에 둔 감찰기관)로 보내졌다. 이때 압송하던 이들이 '이목이 있으니 골목길로 가자'고 하자 추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마땅히 넓은 길을 감으로써 모든 이들이 나를 보게 할 것이다. 또 간관(諫官)으로서 칼을 씌움은 영광스러운 일이니, 어찌 아녀자들처럼 길거리에서 낯을 가리는 것을 본받겠느냐"고 꾸짖었다.평안북도 용만부사로 부임할 때의 일화도 전해온다. 용만은 오지이긴 하나 압록강을 경계로 원나라와 마주한 접경지대로 교통·군사·무역의 요충지였다. 신임 부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관리들은 성대한 잔칫상을 마련했다. 하지만 관청에 도착한 추적은 아무 말 없이 상을 물리쳤다. 관리들은 상차림이 초라한 탓이라 여겨 부사에게 상을 다시 차리기를 청했다. 이에 추적은 "산해진미는 필요 없다. 오직 밥 한 그릇과 나물국이면 족하다. 백금을 써 팔진미를 차려놓아도 입으로 한 번 지나가면 다 마찬가지인 것"이라며 타일렀다고 한다.◆성리학의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충렬왕 말년 추적은 안향에 의해 발탁돼 시랑(侍郞) 겸 국학교수(國學敎授)로 고위 관직자의 자제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했다. 당시 안향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를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힘썼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학(성균관)과 사학을 세운 것이다. 또 고려말 장학제도를 대표하는 '섬학전(贍學錢)' 사업을 제의해 시행했다. 섬학전은 국학생들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관리들이 품위에 따라 낸 장학기금이다. 일부 자금은 원나라에서 유학과 관련된 여러 서적과 제기·악기 등을 구하는 데도 사용됐다고 한다.안향은 추적의 능력을 높이 사 성리학 보급에 그를 중용했다. 후진을 양성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닌 국학교수를 맡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려말 안향과 추적 등이 성리학 중흥책을 펼치며 고려 국학은 전성기를 누렸다. 고려사에는 '마치 중국 연경의 시장터처럼 학생들로 붐볐는데, 그 수가 수백에 이르렀다'고 당시 국학을 묘사하고 있다.이처럼 추적은 안향과 함께 고려의 학풍을 성리학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추적은 민부상서, 예문관 대제학까지 지낸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후 충선왕에 의해 다시 정2품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되고, 밀성백에 봉해졌다. 추적이 명심보감을 편저한 시기는 국학교수 또는 밀성백을 역임한 시기로 추정된다. 하지만 학계를 중심으로 중국 명나라의 '범립본'이 편저자라는 주장이 제기돼 원저자에 대한 논란이 진행 중에 있다.50여 년간 고려의 번영과 성리학 발전에 헌신한 추적은 1317년(충숙왕 4) 향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는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평안도 용천부에 섬학재이란 재실이 세워지고 영정이 하사됐다.◆552년 만에 찾은 묘소 그리고 인흥서원추적의 위패를 모신 인흥서원은 1866년(고종 3)에 세워졌다. 안향을 기리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1543년 건립된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크다. 인흥서원이 긴 세월을 건너 뒤늦게 세워진 데에는 어떤 연유가 있을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손들이 중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손자인 추유(秋濡)는 중국으로 넘어가 명나라 개국공신이 된다. 공신에 이름을 올린 만큼 벼슬도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으로 돌아간 추적의 후손이 다시 이 땅에 발을 디딘 건 조선시대다. 그것도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 당시다.추적의 7세손인 추수경(秋水鏡)은 1591년(선조 24) 명나라의 무강자사(武康刺史)가 된 이후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파병된다. 그의 다섯 아들인 노·적·국·지·란도 함께 출병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추수경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 정유재란 때 부상을 입고 병세가 악화돼 1600년(선조 33) 전주에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선조는 왕명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그를 보국숭록대부 완산부원군에 추증했다. 아버지를 조선 땅에 묻은 다섯 아들은 모두 나주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다. 추계추씨 가문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셈이다.이로부터 2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후손인 명암(明庵) 추세문(秋世文)과 추성옥이 등장한다. 추계추씨 가승에 따르면 추성옥은 대구읍지를 통해 추적의 묘가 '인흥'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구 출신인 추세문과 선조의 흔적을 찾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이들은 1853년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서 추적의 묘소를 찾아냈다. 실전된 지 552년 만이다. 이후 유림들은 후손들과 힘을 모아 묘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추적의 위패를 모셨다. 이후 1866년 인흥서원이 세워지고 추황과 추유, 추수경도 함께 배향됐다.현재 인흥서원 장판각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인흥서원본 명심보감 목판'이 보관돼 있다. 국내 여러 판본의 명심보감이 통용되고 있으나 현존하는 목판은 인흥서원본이 유일하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달성의 유교 문화재, 김봉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위치한 인흥서원은 추계추씨 3세조이자 고려 말기 문신인 노당 추적을 기리기 위해 창건됐다.인흥서원 장판각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인흥서원본 명심보감 목판이 보관돼 있다. 이는 국내 유일한 명심보감 목판이다.인흥서원 뒷산에 있는 추적의 묘소는 552여 년이 지난 뒤에야 후손 추세문과 추성옥에 의해 발견됐다.인흥서원 입구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노당 추적 선생 신도비. 예조판서를 역임한 신석우가 비문을 지었다.
2020.07.16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4] 韓日 가교의 상징 항왜 장수 모하당 김충선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는 한·일 양국 관계에 남다른 의미를 갖는 공간이 있다. 한쪽 앞발로 사람을 부르는 듯한 고양이상이 방문객을 맞이하는 달성한일우호관이다. 2012년 개관한 우호관은 최근 들어 매년 3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꾸준히 방문할 정도로 달성의 명소가 됐다. 달성과 일본이 어떤 연결고리가 있기에 이곳에 우호관이 지어졌을까. 설립 배경에는 항왜(降倭) 장수 김충선(金忠善)이 있다. 일본 출신인 그는 임진왜란(임진전쟁)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대의와 명분 없는' 전쟁이라며 조선에 투항했다. 이후 조총(鳥銃)과 화약 제조법을 조선에 전수하고, 수많은 성을 탈환하는데 힘을 보탰다. 또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병자전쟁)에서 공을 세워 삼란공신(三亂功臣)에 올랐다. 일본에서도 그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반전·평화주의자이자 한·일 가교의 상징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 인물 4편'에서는 모하당(慕夏堂) 김충선의 삶에 대해 다룬다.◆사야가(김충선), 그는 누구인가사야가(沙也可),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일본인으로 조선에 귀화한 사실은 명확하나, 출신이나 가문 등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그가 쓴 시와 글을 모은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서의 삶이 베일에 싸여 있는 셈이다. 전쟁 중 조선에 귀화한 터라 본국에 남은 친인척 등을 위해 의도한 바가 아닐까. 때문에 사야가라는 이름 역시 가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출신과 관련해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사이카슈' 출신이라는 견해다. '바다의 가야금'의 저자 고사카 지로는 김충선이 철포(鐵砲) 집단으로 이름을 떨친 사이카슈의 일원으로 기슈(紀州·현 와카야마현) 사이가(雜賀) 지방 출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야가(サヤガ)란 이름도 사이카(サイカ) 또는 사이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사이카슈는 전국시대 최강의 철포부대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 결국 멸망했다. 출신·가문 등 일본에서의 삶 베일일부선 기슈 사이가 지방 출생 추정왜장 가토 기요마사 선봉장으로 참전"군자의 나라 짓밟을 수 없다" 귀화1600년 가창 우록리 터잡고 뿌리내려임란·이괄의 난·병자호란 '삼란공신'일본 향토사학자 야마나카 야스키는 사이카슈의 무장인 쓰치하시 헤이죠의 둘째아들 헤이지가 사야가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가 사이카슈가 멸망하고 생존한 인물 중 한 명이 조선으로 건너가 김충선이 됐을 것으로 짐작한다.김충선의 일본 성(沙)을 토대로 사씨 가문설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이는 시가현(佐賀縣) 가라츠시(唐津市) 명각사의 주지가 성을 '사이고(沙)'로 사용하고, 그의 선조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철포부대 대장으로 전쟁에 나갔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또 당시 출전했던 일본 장수의 일기에 두 명의 항왜 장수가 등장하는데 김충선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울산성·순천성 전투 기록에 나오는 항왜장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와 '아소노미야 에치고노카미'가 김충선이라는 주장이다. '풍신수길의 조선침략'을 쓴 기타지마 만지는 오카모토가 휘하병을 이끌고 조선에 투항한 뒤 항왜를 통솔하는 무장의 지위에 있었던 점, 오카모토와 아소노미야가 모두 에치고노카미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으로 미뤄 세 인물이 동일인이라고 유추한다.김충선은 자손에게도 출신에 대한 배경을 밝히지 않았기에 이들의 주장은 단지 추정에 불과하다. 다만 김충선이 조선에 총포기술을 전파했다는 역사적 기록과 도요토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사이카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반면 김충선이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은 역사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각각 항왜첨지사야가(降倭僉知沙也加), 항왜영장김충선(降倭領將金忠善)이라는 문장이 나온다.◆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의 삼란공신으로모하당문집 등에 따르면 김충선은 1571년(선조 4) 일본에서 출생했다. 일본 이름은 사야가,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이다.그가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임진년(1592년) 4월13일의 일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부산 동래에 상륙했다. 평소 흠모하던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의 선봉에 선 셈이다.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던 그는 일주일 만에 투항한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에게 서신을 보내 귀화의 뜻을 밝힌 것이다. 앞서 그는 조선인을 해치거나 노략질을 하지 않겠다는 '효유서'를 써 민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한 터였다.당시 투항한 일본인을 '항왜(降倭)'라 칭했다. 조선의 입장에서 항왜는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였다.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무기 관련 기술도 전수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야가는 달랐다. 그는 조선을 동경해 처음부터 귀화를 결심했다고 술회한다.실제 그가 박진에게 보낸 강화서에는 "내가 못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라는 내용이 담겼다.귀화한 그는 경상도절도사 휘하에서 활동하며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을 전수하고, 동래(東萊)·양산(梁山) 등지에서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다.이듬해에는 도원수 권율(權慄)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청으로 성씨와 이름까지 하사받는다. 이때 선조는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사성(賜姓)김해김씨(金海金氏)에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벼슬을 제수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충선은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가 됐다.사야가에서 김충선이 된 그는 1600년(선조 33) 달성 우록리에 터를 잡고 인동장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자신의 호를 딴 모하당을 세우고, 가훈(家訓)과 향약(鄕約)도 마련했다. 자신의 후손이 대대손손 조선에 뿌리내리기를 바랐던 것이다.1603년에는 북쪽 변경에 오랑캐가 자주 침입해 온다는 말을 듣고 변방의 방어를 자청했다. 이로부터 무려 10년간 요해지(要害地)를 수호했다. 그 공을 인정받은 그는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자리까지 오른다.변방 수호를 끝내자마자 이괄(李适)의 난(1624년·인조 2)이 일어났고, 그는 또 부하를 이끌고 진압에 참여했다. 이때 김충선은 김해에서 이괄의 부장(副將)인 서아지(徐牙之)를 참수하는데, 서아지 역시 항왜장(降倭將) 출신이었다. 난을 진압하고 김충선은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쓰게 했다. 그가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청백리의 모습도 갖췄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그의 활약은 나이를 무색게 했다. 1627년 정묘호란(정묘전쟁), 1636년 병자호란(병자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임진왜란부터 이괄의 난, 병자호란까지 맹활약한 그는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명분 없는 침략을 단호히 거부한 김충선은 전란의 위기에 조선을 구한 충신이자 평화의 메신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그의 박애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한·일 우호 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 :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충선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의 장군으로 변신하다, 신병주. 항왜 김충선(사야가)의 모하사상 연구, 김선기.▨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자리잡은 녹동서원. 1789년 지역 유림에서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중시했던 모하당 김충선의 뜻을 기려 건립했다.한·일 양국의 우호와 문화관광 교류를 위해 건립된 달성한일우호관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일교류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녹동서원 뒤편 산 중턱에 위치한 김충선 묘소.김충선의 위패가 모셔진 녹동사 앞에는 모하당김공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2020.07.02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3] 현풍 솔례마을 입향조 곽안방·충렬공 곽준·홍의장군 곽재우
대구 달성군 현풍읍 솔례마을 입구에는 좀처럼 보기드문 규모의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져 있다. 충신 1명, 효자 8명, 열부 6명을 기린 12정문(旌門)이다. 한 가문에서 충(忠)·효(孝)·열(烈) 삼강(三綱)의 정신을 실천한 이가 15명이나 나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유교문화 사회에서 삼강은 최고의 덕목이었던 만큼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일문삼강 12정문'을 배출한 가문은 바로 현풍 곽씨다. 시조 곽경(郭鏡)이 현풍에 터를 잡은 뒤 시대별로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특히 솔례마을 입향조(入鄕祖)인 곽안방(郭安邦)을 비롯해 충렬공 곽준(郭䞭),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우리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올곧은 정신은 수백년 세월을 관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 인물 3편'에서는 곽안방과 곽준, 곽재우의 삶에 대해 다룬다.'조선 청백리 교과서' 곽안방성품 곧고 강직한 달성의 대표 인물해남 현감 시절에 선정 베풀어 명성'일문삼강' 실천한 충렬공 곽준친구 김면이 의병 일으키자 힘 보태왜군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최후'왜군을 노루 쫓듯' 망우당 곽재우 임진왜란 일어나자 곧바로 의병 활동유격전 펼쳐 현풍·창녕 일대서 큰 승리◆조선시대 청백리의 교과서곽안방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달성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멸실됐으나 성품이 곧고 강직한 청백리(淸白吏)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명환록(名宦錄)에 따르면 '청백하기가 빙옥(氷玉)같이 깨끗해 벼슬을 그만두고 필마행장(匹馬行裝)으로 돌아올 때는 나는 듯이 가벼웠다'고 한다.곽안방의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자(字)는 여주(汝柱)다. 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를 지낸 곽득종(郭得宗), 어머니는 나사선(羅斯善)의 딸 수성 나씨(壽城 羅氏)다.그는 세종 말기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됐으며, 1455년(세조 1)에는 세조의 등극을 도운 공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녹선됐다.무신인 곽안방은 외관직(外官職)에 있으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해남현감 시절에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정사를 펼 때는 엄하고 분명하며 덕행이 높아 아전(衙前)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우러렀다고 한다. 여지승람 해남현(海南縣) 명환(名宦)에는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익산군수 시절에는 높은 성품을 인정받아 청백리에 오른다. 청백리는 관직 수행 능력은 물론 청렴·근검·도덕·경호·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그 시대 최고의 영예로 통했다.그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익산군수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다. 당시 그는 자신의 종자(從者)가 관아의 자물쇠 하나를 허리춤에 찬 것을 보고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작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라며 바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후한(後漢) 시대 양속(羊續)이 태수로 있을 때 한 벼슬아치가 생선을 선물하니, 그 생선을 처마에 매달아 놓아 이를 경계했다는 '현어(懸魚)'와 비유될 만한 일화다.벼슬에서 물러난 곽안방은 달성 현풍 솔례마을에 입향한다. 제자백가를 관통하고 음양·지리의 서적에도 능통했던 그는 솔례마을에 거주하면서 '산수가 웅장하고 선명해 맑은 기운이 모였으니 영특한 자손이 반드시 많이 태어나리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현재 솔례마을 입구에는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이라 새겨진 문훈비가 자리 잡고 있다. 충·효를 대대로 가업으로 삼고, 청렴결백을 가문의 명성으로 삼으라는 곽안방의 가르침이 여전히 남아 있다.◆충·효·열 '삼강'을 실천하다곽안방이 솔례에 터를 잡으면서 예언했듯이 후손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됐다. 현손(玄孫)인 곽준도 그중 하나다. 곽준의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시호는 충렬(忠烈)이다.유가읍 가태리에 세워진 신도비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유별났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의 잘못을 이해하고 감싸주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다.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특히 일체의 외물에 욕심이 없어 처자(妻子)가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태연했다고 한다.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면서다. 친구인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힘을 보탰다. 이때 경상도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곽준의 현명함과 군공(軍功)을 조정에 보고했고, 그는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에 임명됐다. 이듬해 병란과 심한 흉년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지만 곽준이 관할한 고을에서 만큼은 그 피해가 덜했다고 한다.1594년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부임한 그는 또 한 번 전쟁을 치른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그는 황석산성(黃石山城) 방어에 나섰다. 당시 곽준의 상관이던 백사림(白士霖)은 산성을 둘로 나눠 험준한 북쪽은 자신이 맡고, 평지에 가까운 남쪽은 곽준이 지키도록 했다. 왜적들은 공략이 쉬운 남쪽부터 침공해 들어왔다. 군사 수와 무기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지만 곽준과 부하들은 용감하게 맞서 방어해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날 밤 아군은 왜군의 기습에 무너지고 말았다. 적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백사림이 도망치자 북쪽을 통해 다시 쳐들어온 것이었다.하지만 곽준은 끝까지 싸우다 죽기로 작정했다. 큰아들인 이상(履常)과 둘째아들 이후(履厚)도 아버지와 함께 남길 원했다. 이에 그는 "나는 직책이 있으니 마땅히 성을 사수를 해야 하나 너희는 피란하라"고 했으나 두 아들은 "아버님이 구국을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자식이 부친을 위해 죽는 것이 불가하겠습니까"라며 호위하다 함께 참해(斬害)를 당했다.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상의 부인 거창 신씨는 남편을 따라 성안에서 자결하고, 곽준의 딸도 그의 남편이 싸움터에서 전사하자 바로 목을 맸다. 이러한 순사(殉死)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는 정문을 지어 표창할 것을 명했다. ◆왜군을 노루 쫓듯 한 의병장곽재우는 1552년(명종 7) 경남 의령군 유곡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그는 16세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녀인 김행(金行)의 딸과 혼인했다. 조식의 문인이기도 한 곽재우는 18세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병법서를 공부해 문무에 능했다고 한다.1578년(선조 11)에는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중국 북경에 다녀왔는데 이때 가져온 비단이 그의 상징이 된 홍의(紅衣)의 옷감이 됐다.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로 인해 파방(罷榜)됐다. 이듬해에는 아버지를 잃고 선산인 현풍 신당(新塘)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했다.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은 임진년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없이 행동에 나섰다. 그의 봉기는 호남·호서의 의병보다 한 달 정도 빠른 기병이었다. 정암진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갔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현풍·창녕 일대에서 잇따라 왜군을 격파해 왜군의 진행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진주성·화왕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다. 그가 구사한 전술은 유격전이었다. 위장·매복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해 무찔렀다.당시 붉은색 전포(戰袍)를 휘날리며 수많은 전장에서 공적을 세운 곽재우를 가리켜 호성공신 이호민(李好閔)은 '왜군을 노루 쫓듯했다'고 칭송했다.조정은 곽재우의 공로를 인정해 벼슬을 내렸다. 그는 유곡찰방·형조정랑을 거쳐 통정대부에 가자됐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경상우도 최대 격전지였던 진주의 목사로 임명됐다.명나라 군대와 왜군 사이에 강화 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그는 돌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후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는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에 기용됐으나 계모 허씨가 별세해 삼년상을 치르게 된다. 탈상한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됐지만 부임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또다시 사직한다. 이후 그는 비슬산으로 들어가 수련 생활을 하며 벼슬에 나갔다가 물러나기를 거듭한다.결국 그는 1617년 4월10일 66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사후 그의 사우에 예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1709년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헌=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김봉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청백리 곽안방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양서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45년 이후 복원됐다.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위치한 예연서원은 망우당 곽재우와 충렬공 곽준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솔례마을 뒤편 언덕배기에 위치한 추보당. 동쪽 문 위에는 '청백가성', 서쪽 문 위에는 '충효세업'이란 현판이 걸려있다.이양서원 강당 오른편에 위치한 사당인 청백사에는 곽안방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2020.06.18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2] 참된 선비 한훤당 김굉필(1454~1504)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여기에 전해지게 되니,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달성 도동서원 옆 비각 내부 신도비에 적힌 구절이다. 진유, '유학의 진리를 터득한 참된 선비'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일컫는다. 조선 전기의 도학자인 그는 평생 '몸가짐을 바로 세우는 일'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했다.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그는 정몽주(鄭夢周)에서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을 거쳐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진실된 말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2편에서는 실천하는 도학자 김굉필의 삶에 대해 다룬다.◆유교의 시대, 참된 선비로김굉필은 단종 2년(1454) 5월, 한양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현풍현을 주 근거지로 삼았으나 조부 김소형(金小亨)이 개국공신 조반(趙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갖게 됐다. 아버지 김유(金紐)는 어모장군 행충좌위사용(禦侮將軍 行忠佐衛司勇)을 지냈고, 어머니는 추원부사(樞院副使) 한승순(韓承舜)의 딸 청주 한씨다.김굉필이 살았던 조선 전기는 왕권 교체와 정치 문제 등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나라의 근간을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삼국시대 도입된 불교는 이땅에 1천년 이상 뿌리내린 터라 유교적 질서의 기반 확립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뜻있는 선비로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은 시대였다.김굉필은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영기가 빼어났으며, 정의감이 투철했다고 한다. 무례하게 굴거나 남을 조롱하는 이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로잡아야 했다. 나이가 많아도 예외는 없었다.신도비에 따르면 그는 창려집(昌黎集)을 즐겨 읽었는데,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에서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부르며 이르기를, '남팔(南八)은 남아(男兒)이니 죽을 뿐이다. 불의(不義)에 굽혀서는 안 된다'고 한 부분을 반복해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성종 3년(1472) 19세가 된 그는 백년가약을 맺는다. 합천군 야로현 말곡 남교동에 사는 순천 박씨에게 장가를 든 것. 김굉필은 결혼한 뒤 처가 근처 개울가에 조그만 서재를 짓고 이름을 '한훤당'이라 붙였다. 차갑고 따뜻한 공부방, 한훤당은 김굉필의 호이기도 하다. 김굉필의 자는 대유(大猷)였으나 스스로는 사옹(蓑翁)이라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사옹은 비 올 때 입는 도롱이다. 비에 젖은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한훤'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소학(小學)에 심취하다김굉필이 본격적으로 수학에 나선 건 점필재(점畢齋) 김종직을 만나면서다. 김종직이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함양군수로 내려오자 김굉필은 그에게 배움을 청한다. 이때 일두(一두) 정여창(鄭汝昌)과도 인연을 맺는다. 김종직은 사림을 정치 세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사림은 학문하는 선비들의 무리를 일컫는데 사림파는 왕실의 공신 집단인 훈구파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통한다. 사림파의 기원은 고려 말 온건개혁파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졌고, 김숙자를 거쳐 다시 김종직으로 학통을 이어왔다.김굉필이 김종직을 찾아간 시기는 성종 즉위 직후였다. 당시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소학'을 주며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의 기상(氣像)이 모두 이 가운데에 있다"고 했다. 소학은 아동 교육서로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은 책이다. 반면 김종직이 설파한 소학은 대학(大學)을 접하기 전 읽어야 하는 입문서가 아닌 인륜 도리를 꿰뚫고 실천해야 할 학문이자 윤리였던 것이다. 이에 김굉필은 소학을 깊이 파고들었다. 글자 한 자 한 자, 글이 내포하고 있는 뜻까지 모두 가슴에 새겼다. 특히 김굉필은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수신(修身)'에 치중했다. 수신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유학을 완성시키는 것이 그에게 필생의 업이 된 것이다.그의 학문 탐구는 함양에서 선산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된다. 스승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이때 선산향교에는 여러 인물이 모였는데 이승언(李承彦), 원개(元개), 이철균(李鐵鈞), 곽승화(郭承華), 주윤창(周允昌) 등도 포함됐다. 김굉필의 소학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깊이가 더해졌다.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하며, 30세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하고, 육경(六經)을 섭렵했다고 한다.◆스승과 절연 그리고 무오사화김굉필은 성종 11년(1480)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한다. 이때 그는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一身)의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는 게 상소의 요지였다. 유학에 대한 그의 가치관이 뚜렷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이처럼 강직한 김굉필은 뜻이 다름을 이유로 스승과도 척을 지게 된다. 김종직이 나랏일을 맡게 되자 그의 처신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 것. 당시 김굉필과 김종직은 여려 편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입장을 표출한다.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 맥 이어김종직 문하서 공부하며 소학 심취유배지서 개혁가 조광조 가르치기도갑자사화때 賜死…중종반정 후 신원둘의 사이가 급속히 틀어진 것은 성종 17년(1486)의 일이다. 이조참판으로 있던 김종직에게 김굉필은 시를 지어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종직도 함부로 폄훼하지 말라는 답시를 보낸다. 이후 이들의 교류는 사실상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굉필의 벗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사우명행록에 이들의 시를 옮기고는 '이 두 사람의 사제지간이 마침내 갈렸다'고 적었다.스승과 다른 길을 가게 된 김굉필도 벼슬길에 나선다. 성종 25년(1494),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다.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종9품 남부참봉에 제수된다. 이어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에는 군자감 주부에 제수됐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정6품)에 오른다. 출세가도는 조정 막료들이 그의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김굉필의 관직생활은 길지 않았다.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년)가 일어나며 한순간에 역적으로 몰린다. 그는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다. 2년 뒤에는 또 한 번 순천으로 이배됐다. 조선 전기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대립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조광조와 인연, 문묘 종사로 이어져김굉필은 유배지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학문 연구에 증진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인격과 학문을 흠모해 가르침을 청하는 선비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고 한다. 특히 희천에서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조광조는 개혁정치를 펼치며, 조선이 유교의 나라로 굳혀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김굉필이 조선 유학의 시조로 평가받을 수 있게 한 기반이기도 했다.무오사화로 시작된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나 김굉필은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진다. 평생 강학(講學)에 몰두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뤄면서 김굉필은 도승지에 추증된다. 이후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돼 그의 존재는 더욱 부각됐다. 중종 12년(1517)에는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1591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이 숙청됐으나 김굉필은 성균관 유생들의 힘을 업고 증직(贈職)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선조 8년(1575)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에는 정여창·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문헌=실천하는 도학자 김굉필, 이경우, 민속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달성군 현풍면 다람재에서 내려다 본 도동서원 전경. 조선 초기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은 2019년 7월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도동서원 뒤편에 위치한 한훤당 김굉필 묘소. 뒤편에는 한훤당의 아내 정경부인 순천 박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달성군 현풍읍 지리에 자리잡은 한훤당 고택은 안채의 평면 구성이 다른 지역에서 찾기 힘든 겹집 형태를 취하고 있다.다람재에 있는 한훤당 노방송 시비.
2020.06.04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1] 고려 국존에 추대된 일연 선사(1206~1289)
대구 달성은 명실상부한 인재의 고장이다. 우리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고려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달성의 인물들은 시대 정신을 일으켜 세우며 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특히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적 기풍이 뿌리 깊게 내려 학식과 인품을 갖춘 선비들이 많았다. 여전히 달성에는 이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가문들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무엇보다 달성 출신 인물들은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들은 항상 몸을 낮춰 충·효·애(忠·孝·愛)를 실천하고 불의에 대항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들의 올곧은 정신문화는 시대와 지역을 넘어 독특한 유무형 자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남일보는 이들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시리즈를 11차례에 걸쳐 연재한다.고려 희종2년 지금의 경산서 출생1218년 강원도 양양 진전사로 출가승과 급제후 비슬산 보당암 주지로오어사 등 거쳐 1264년 인흥사 주석삼국유사와 관련된 역대연표 제작지눌 정통 승계한 당시 불교계 1인자 달성의 인물을 논할 때 일연(一然·1206~1289) 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비록 달성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으나 꽤 깊은 인연을 맺었다. 불교 과거(科擧)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뒤 처음 부임한 곳이 달성이고, 비슬산에서만 37년간 수행했다. 그에게 있어 달성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시리즈 1편에서는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에 새겨진 내용을 토대로 일연이 달성에 남긴 흔적을 되짚어 본다.#1. 혼돈의 시대 불교에 귀의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한 일연의 삶은 명성에 비해 알려진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다.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불교계 최고의 위치인 국존에까지 오른 것을 감안하면 분명 아쉬운 대목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군위 인각사(麟角寺)에 세워진 비의 내용이 전부다. 이외에 다른 기록이 없어 그의 생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 그나마 인각사 보각국사비에는 단편적이지만 일연의 일생이 담겨져 있다. 보각국사비에 따르면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6월 신유일에 경주 장산군에서 태어났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 제국을 건설한 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장경 판각사업에 참여하고 삼국유사를 쓰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장산군은 지금의 경산시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불가에 출가하기 전 그는 견명(見明)이라 불렸다. 모친이 환한 해가 자신을 비추는 꿈을 꾼 뒤 그를 잉태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유년시절부터 그는 남달랐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범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살필 만큼 당당했다고 기록돼 있다.9세 때부터는 해양(현 전라도 광주) 무량사에서 배움을 시작했다. 1214년(고종 1년)의 일이다. 장산군에서 멀리 해양까지 가서 수학한 것은 어떠한 연(緣)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년 뒤 그는 설악산 자락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했다. 무신정권 혼돈의 시대, 불교에 귀의한 것이다. 당시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진전사는 절터로만 남아있다가 2005년 복원이 시작돼 4년 만에 전통사찰로 지정됐다.진전사 인근에는 우리나라 제일의 관음도량인 낙산사를 비롯해 신흥사, 백담사, 봉정암, 오세암 등 이름난 절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일연은 선종 승려였지만 다른 종파의 교리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보각국사비에도 '선방을 두루 다니면서 참선해 명성이 매우 높았다. 당시 무리들이 받들어 구산중의 사선의 우두머리로 삼았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2. 선불장 장원 이후 비슬산으로일연은 1227년(고종 14년) 개경(開京)에서 치른 스님들의 과거 선불장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진전사에서 경전과 참선 공부는 물론 주변 사찰을 다니며 여러 종파에 대한 지식을 쌓은 것이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달성과의 첫 인연을 맺는다. 초임지로 비슬산 보당암에 오게 된 것이다. 수도권 지역의 이름 있는 사찰에 가지 않고 달성으로 향한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보당암 부임은 그가 수행 생활의 절반을 비슬산에서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보당암은 일연이 꽤 오랜 시간 머물렀던 사찰로 의미가 남다르다. 수행과 득도, 국존이 되기까지 모든 활동의 기초를 닦은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보당암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다. 실증할 수 있는 뚜렷한 자료가 없어서다. 다만 1478년 조선조의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에 '비슬산 정상에 한 암자가 보당'이라 기록돼 있다. 이 구절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비슬산의 정상을 천왕봉으로 볼지, 대견봉으로 볼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관측 결과로는 천왕봉이 1천83m로 대견봉(1천58m)보다 높다. 반면 조선시대까지 기록을 보면 대견봉을 비슬산 정상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조선 영조 때 어명(御命)으로 편찬한 여지도서의 경상도 현풍면 산천조에는 대견봉을 비슬산 최고정으로 서술했다.천왕봉 아래 도성암 주변에 보당암이 존재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으나, 대견봉에 위치한 대견사를 보당암의 전신으로 판단하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아예 달성군과 동화사는 2014년 3월1일 대견사를 중창 낙성하면서 이 절을 일연이 주석했던 보당암으로 공표했다.보당암에서 주석한지 9년째 되던 해(1236년) 일연의 신변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해 몸을 피해야만 했다. 몽골의 3차 침입이었다. 비문에 따르면 당시 그는 오자주(五字呪)를 외우며 문수보살에게 지혜를 구했다. 그의 절박한 기도가 통했던 것인지 문수보살은 벽에서 몸을 나타내 '무주 북쪽에 있으라'고 계시했다고 한다. 이듬해 일연은 무주 인근의 묘문암으로 피신한 뒤 무주암으로 또 한 번 거처를 옮긴다. 이 시기 일연은 깨달음을 얻고 삼중대사라는 법계를 받았다. 비슬산 묘문암과 무주암에 대한 기록은 보각국사비문 외에 남아 있지않다. 보당암과 인접하면서 은신이 가능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3. 비슬산서 삼국유사의 토대 마련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44세 때였다. 1249년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무신집권자 최이의 매제인 정안이 대장경조조를 위해 일연을 초청한 뒤 사찰의 운영과 함께 분사대장도감의 사업을 맡겼다. 막중한 국책사업을 맡을 정도로 그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일연은 정림사와 길상사에 주석하면서 대장경조조사업은 물론 불교서적 편술과 출판 작업도 병행했다. 이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일연은 고종에 의해 대선사로 보임됐다. 특히 당시 일연은 강화도의 중심사찰인 선월사의 주지로 임명, 보조국사 지눌의 정통을 승계하며 불교계 1인자로 인정받았다. 비슬산에서 발신해 당대 최고의 승려가 된 것이다.무신정권 잔당들의 발호로 왕권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자 일연은 영남지역으로 향한다. 포항 항사사(현 오어사) 주지를 역임하고, 1264년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왔다. 보각국사비문에는 인홍사 주지 만회가 스님에게 주지 자리를 사양하니 학식 있는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일연은 인홍사를 인흥사로 개칭하고 삼국유사와 관련된 '역대 연표'를 제작했다. 삼국유사 찬술(纂述)을 위한 선행 작업이 비슬산에서 이뤄진 셈이다. 이 역대연표의 일부는 현재 합천 해인사 사간판에 보관돼 있다. 삼국유사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집필 기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가 비슬산에서 삼국유사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니다. 실제 일연은 비슬산에서만 1227~1249년, 1264~1277년 두차례에 걸려 37년의 세월을 보냈다. 삼국유사 내용에도 그가 머물렀던 절집들이 소개되고 있다.78세의 나이로 국사에 책봉된 일연은 1년 만에 귀향한다. 70여 년간 홀로 계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일연은 인각사에서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전해진다.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 문헌=비슬산의 도인 일연선사, 홍종흠, 민속원. 일연 비슬산 37년(대견사 중창 1주년 기념 학술집), 일연 삼국유사를 쓴 뛰어난 이야기꾼, 고운기·장선환.▨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해설사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달성 비슬산 대견봉에 위치한 대견사 전경. 달성군과 동화사는 2014년 3월1일 대견사를 중창 낙성하면서 이 절을 일연이 주석했던 보당암으로 공표했다.달성 비슬산 천왕봉 아래 자리를 잡고 있는 도성암. 도성암 위쪽에 위치한 바위는 삼국유사에 실린 '관기와 도성' 이야기의 주무대로 알려져 있다.달성 비슬산자연휴양림에는 삼국유사를 품에 안고 있는 일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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