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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5) 이점희] 아들 하숙비도 못 대면서 예술에 재산 탕진...'오페라도시 대구' 초석을 놓다
1972년에 대구오페라협회가 결성됐다. 성악가(테너) 김금환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점희, 홍춘선, 성기용, 남세진, 김원경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1973년 창단 공연으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강당에서 공연했다. 첫 대구산 오페라다. 1975년 12월에는 대구오페라단으로 이름과 기구를 개편하고, 이때부터 바리톤 이점희(1915~1991)가 단장을 맡았다. 이후 초연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대구오페라단은 1991년 이점희가 별세하면서 이후 한동안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대구에서 불기 시작한 오페라의 바람은 1992년 대구시립오페라단(단장 김완준)의 창단으로 이어지고, 이를 토대로 대구의 오페라는 발전을 거듭했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은 92년 10월 창단연주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대구가 오페라의 중심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2003년에는 오페라 전용 극장인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개관, 한국오페라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되었다.성악가로, 교육자로 활동한 이점희는 지금의 대구 오페라가 있게 한 대표적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대구 클래식 음악 위해 일생 바쳐성악가 이점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진정한 예술인' '진짜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 '진심으로 지역 예술을 걱정한 사람'으로 회고한다.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교 법학과를 나온 아버지 이황룡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교회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계성중 시절 작곡가 박태준의 지도 아래 축음기를 통해 카루소의 노래를 들으면서 더욱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일본에서 할머니가 원하던 상업학교에 다니면서도 오직 음악에만 관심을 쏟던 그는 결국 가족 몰래 도쿄에 있는 음악학원에 다니게 됐다. 음악학원에서 만난 미무라 요시코(三村祥子)의 도움으로 동양음악학교를 거쳐 1939년 중앙음악학교 4학년 때는 세키야 오페라컴퍼니에서 제작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춘희)'의 제르몽 역에 뽑혀 출연하기도 했다. 중앙음악학교를 졸업(1940년)한 뒤 1946년에 귀국, 전주 전북중을 거쳐 1947년부터 계성중에서 근무했다. 1949년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제2회 독창회를 열었다. 1950년 대구음악학원을 개원했으며, 1952년에는 대구음악연구회를 발족하고 1953년에는 대구음악가협회를 결성했다. 1952년 개설된 효성여대 음악과 과장직을 맡았다. 1957년 대구교향악단의 창단 공연 때 출연했다. 1958년 조선대 음악과 교수로 부임했고, 그해 9월 광주중앙극장에서 제5회 독창회를 열었다. 1960년 광주사범대학(현 광주교대)을 거쳐 1964년 목포교대로 옮겼다. 1970년 3월 영남대 음악과가 개설될 때 교수로 부임해 1980년 정년퇴임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제자들은 "후학들을 위한 교육에 열정적이었고, 언제나 힘이 넘치는 모습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대구 오페라 운동 중추 역할1972년에 대구오페라협회(회장 김금환)가 결성되고, 이점희는 지도위원으로 추대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74년 대구오페라협회가 대구오페라단으로 개편되면서 이점희는 단장을 맡았다. 요즘처럼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높은 것도 아니고 후원금을 받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던 만큼 한 편 한 편의 오페라 무대를 올리기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었다. 남달랐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그의 셋째 아들 이재원씨는 "아버님이 대구지역의 음악운동에 한창 열정을 쏟으실 때 둘째 형님은 서울 생활 하숙비를 마련하지 못해 대학을 중도에 포기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그저 음악, 예술을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아 평생을 사신 분"이라고 말했다.대구오페라단은 지역 최초의 민간오페라단으로 초연 작품들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 1991년 그가 별세하면서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9년 후인 1999년에 그의 제자인 테너 김희윤이 독일에서 귀국해 조직을 정비, 명맥을 이었다. 그는 2008년 5월 '대구문화'와의 인터뷰에서 "학교 때 스승이었던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선생은 재산을 예술을 위해 다 쏟아부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대구 성악의 오늘, 대구 오페라의 오늘이 있는 것은 그분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이점희는 대구지역 무대에서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고 발표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가 특히 즐겨 부른 노래로 슈만의 '두 사람의 척탄병'과 무소르그스키의 '벼룩의 노래' 등을 꼽는다. 묵직하고 엄숙한 느낌의 '두 사람의 척탄병'은 힘 있는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한 노래로 2001년 원로음악가회 주최 '20세기 대구음악 회고 음악회'에서 성악가 남세진이 그를 기리는 의미로 부르기도 했다. 풍자가 넘치는 노래인 '벼룩의 노래'는 평소 술과 예술,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던 그의 호탕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노래라 할 수 있다.1975년 회갑기념 제11회 독창회를 광주YMCA강당에서 열었고, 1986년 5월에는 국내 성악가로는 처음으로 고희기념 음악회(제13회 독창회)를 대구 어린이회관 꾀꼬리극장에서 열었다. '염원과 사랑과 생명을 위한 바리톤 이점희'라는 당시 독창회의 부제는 그의 음악 인생을 잘 정리한 표현이다.1970~80년대에 대구 지역 음악대학에서 음악인들이 많이 배출되기 시작하자 그는 특히 그들이 열정적이고 안정적으로 오페라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시립오페라단 창단에 적극 나섰다. 20년 동안 오페라 운동에 매진했으나 안타깝게도 대구시립오페라단 창단(1992년)을 한 해 앞둔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1987년부터 별세 직전까지 '희(熙) 화랑'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들 이재원씨는 "화랑에서 수익이 나면 그 돈을 음악에 투자하곤 하셨다. 오페라 운동에 힘을 쏟을 때만큼 행복해하셨던 적은 없었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이 창단되기 한 해 전에 돌아가셨다. 한 해만 더 사셨더라도 염원하시던 일을 보고 돌아가셨을 텐데, 그 점이 두고두고 아쉽다"라고 털어놓았다.이재원씨는 2020년 5월 대구시에 이점희 관련 유품을 기증했다. 이점희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오래된 피아노를 비롯해 릴 녹음 플레이어, 전축, 연주복, 서예가 서경보 선생이 오페라에 대해 글을 써준 액자, 화가 백낙종 선생이 그려준 오페라 '춘향전' 포스터 원화, 음반, 사진 자료 등 다양하다. 이점희는 비록 마지막 염원이던 대구시립오페라단의 창단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존재는 대구가 음악도시·오페라도시로 자리를 굳건히 해가는 데 중요한 초석이고 원동력이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참고 자료 : '대구문화' 2008년 5월호 ▨사진 제공 :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공동기획 : 대구광역시1939년 일본의 세키야 오페라컴퍼니에서 제작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춘희)'에서 제르몽 역을 맡은 이점희.이점희 독창회(1995) 안내장 표지.대구음악학원 시절 제자들과 함께 한 이점희(앞줄 오른쪽 둘째). 이점희 왼쪽은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한 이기홍.
2021.07.26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4) 이만택] 지역연극 정체성 확립하고 대가 반열에 오른 극작가
국어 교사로 지내며 쓴 창작극 '무지개' 사람 냄새 배어있는 민초의 삶과 허무주의 녹여내며 호평국립극장 무대 오르며 대구 희곡사 새역사34년뒤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 작품으로 지역관객과 만남이만택(1920~2006)은 1960년대 자신의 희곡 작품을 국립극장 무대에 올리면서 무명에서 일약 대가의 반열에 오른 국어 교사 출신 극작가다. 이만택이 발표한 희곡 작품은 '난류' '무지개' '그 많은 낮과 밤을' '인간교향악' 등 네 편의 장막극과 단막극 '은하수에 정사한 견우직녀의 원혼은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를 포함해 총 5편이다. 특히 그의 희곡 작품 '무지개'는 외국 작품 일색이던 1960년대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창작극이기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무지개'는 1964년 극단 신협과 한국일보가 공동 주최한 희곡 공모에 당선, 지역 극작가 작품으로는 매우 드물게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며 대구 희곡사의 역사로 남았다. 이만택은 한 해 전인 1963년 국립극장 장막극 모집에서도 희곡 '난류'로 입선하는 등 극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였다.당시의 전국 규모 공모는 극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공모 당선은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극작가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했다. 훗날 이만택은 1972년 단막극 '은하수에 정사한 견우직녀의 원혼은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를 끝으로 본업인 교사 일에 집중하며 남은 생을 보냈지만, 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에도 자신의 작품 '무지개'를 올리며 '지역 연극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극작가로 지금껏 기억되고 있다. ◆연극을 사랑한 문학청년이만택은 1920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려운 고문을 해석해 일본인 교사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등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유소년기의 추억도 이만택을 극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소설이나 희곡이나 표현 양식만 다를 뿐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은 똑같은 게 아니겠어요? 그냥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어린 시절 봤던 연극을 생각하며 희곡으로 썼어요"라고 밝힌 바 있다. 마땅한 구경거리가 없던 시골 마을에서 신파극단의 연극을 보며 상상력을 키웠다.1934년에는 1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에 다닐 때도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대구사범 5학년 때 조선일보에 콩트가 실리면서 1개월의 구독권을 받기도 했다. 20세에 교직에 입문한 이만택은 영천 선화여고 교장을 끝으로 50년의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대구 중구 태평로 번개시장 인근 아파트에서 말년을 보냈고 생을 마감했다. 노년의 이만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난 평생 국어 선생을 했던 터라 지나치게 정돈된 문장을 만드는 것이 습관이 돼서 문단에 등단하기 힘들었어요. 인위적으로 다듬은 문장보다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는 구수한 문장이 더 좋은 문장이지요. 그래서 생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따스한 삶이 배어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지요. 그러다 보니 되더라고요"라며 자신의 등단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만택이 밝힌 등단기처럼 이만택의 작품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 있다. 그의 대표 희곡 작품인 '무지개'도 마찬가지다. '무지개'는 이만택이 신문기사에서 본 강원도 화전민의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어 집필한 작품이다. 소백산맥에 자리한 경상도의 한 산촌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민초의 삶을 작품에 녹여냈다. 혈기왕성한 산촌의 청년은 두메산골을 탈출해 새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구성은 당대 평론가들로부터도 니힐리즘(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됐다. 훗날의 이만택 역시 '무지개'에 대해 "작품의 무대는 현대문명과 격리된 경상도 화전민 부락으로 인간 생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군상들의 갈등과 거기서 탈출하려는 젊은이의 갈망이 무지개로 상징된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무지개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허상이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독학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르다'무지개'는 1964년 6월부터 14회에 걸쳐 극단 신협에 의해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다. 일주일 동안 매일 2회씩 공연됐지만 800석이었던 국립극장이 초만원을 이룰 정도로 많은 관객이 찾았다. 당시 출연진이 김동원 김승호 도금봉 황정순 조미령 장민호 김성원 등 당대 인기배우였던 점도 연극의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도 '무지개'는 대전·목포·원주·대구·부산 등 지방에서도 순회 공연됐다. 1970~80년대에도 영남대 극단 천마무대, 극단 대구무대가 '무지개'를 대구 무대에 올렸다.이필동 저 '새로 쓴 대구연극사'에는 연출가 이해랑(1916~1989) 선생의 '무지개'에 대한 평가가 남아 있다. 이 선생은 '무지개'에 대해 "현상모집에서 뽑힌 오리지널의 우수성, 올스타 출연, 여기다 생산적 연출 노력이 삼위일체로 작용해 '무지개'는 연극사에 남을 우수작품으로 평가된다"고 말하고 있다. '무지개'는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34년 후인 1998년 대구 관객을 다시 만난다. 대구시립극단의 창단 공연 작품으로 '무지개'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시립극단 이영규 감독은 창단작품 팸플릿에서 "대구시립극단이 지역 원로 작가의 작품을 창단 작품으로 올림으로써 지역 창작극의 활성화에 힘이 되고자 했다"며 작품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만택은 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 팸플릿에 "졸작 무지개가 대구시립극단 창단공연작품으로 선정된 것은 개인적으로 무상(無上)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서 "이제 막 싹이 돋아나는 시립극단에 물을 주고 북돋워서 정정(亭亭)한 거목(巨木)으로 키워 나갈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대구시립극단이 찬란한 무지개와 함께 영원하기를 바란다"며 소감을 적었다. 지역 원로 연출가 김삼일은 극작가 이만택을 두고 "극작 수업도 받지 않은 채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대단한 분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등 번역작품이 주를 이루던 시절, 무명의 교사 출신 극작가의 작품이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이만택의 작품 '무지개'는 인간적 이야기와 계몽성까지 담은 극사실주의 작품으로 차범석(1924~2006)과 같은 당대 유명 연출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며 극작가로서 이만택의 업적을 평가했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참고문헌=이필동 저 대구연극사, 월간 대구문화(2003년 2월).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2005년 8월18일자 영남일보).1969년 희곡집 '무지개' 출판기념회에서 이만택(오른쪽)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영남일보 DB〉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연극 '무지개'의 한 장면. 〈영남일보 DB〉1969년 발간된 희곡집 '무지개'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공연 '무지개'의 프로그램북.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2021.07.12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3) 최희선] 뚝배기 같은 여인의 멋을 가진 '달구벌 입춤'으로 전통 맥 이은 '舞人'
기생 춤·음악 담당 달성권번 춤선생 박지홍에게 가르침 받아전통춤·창작무용 등 자신만의 춤세계 구축1990년대부터 고향 대구 중심 전통춤 정리·전수 작업국립문화재연구소에 '달구벌 입춤' 수록 성과 최희선(1929~2010)은 평생 춤이라는 한 길만 묵묵히 걸어왔다. 권명화와 함께 달성권번의 춤 선생인 박지홍으로부터 전통춤을 배웠던 최희선은 '달구벌 입춤'으로 전통춤의 맥을 이어갔다. 동시에 창작무용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인생의 후반부에는 전통춤의 가치를 알리고, 이를 전승하는 데도 힘썼다.◆전통무용부터 신무용까지 두루 섭렵최희선은 1929년 11월18일 최벽수와 최두안의 4남매 중 둘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붙잡다는 뜻의 '붙들이'였다. 호적에는 '부돌'로 이름이 올라갔고, '희선'이라는 이름은 대학에 다닐 때 춤 스승이었던 한영숙이 지어준 이름이다.그는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여서 어렵지 않게 살았다. 최희선의 집은 대구 약전골목에 있었는데, 이곳에는 기생들의 춤, 음악 교육을 담당했던 달성권번이 있었다. 최희선은 이 근처를 오가며 음악 소리와 춤을 추는 기생들의 모습을 보며 춤에 빠지게 된다. 10대 후반 최희선은 전남 나주 출신 달성권번의 춤 선생인 박지홍을 만나 그의 문하생으로 살풀이춤, 검무, 입춤 등 전통춤을 배우게 된다. 최희선은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1945년 광복 이후 최희선은 서울에 있는 최승희의 제자 장추화가 운영하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고, 조용자에게서는 발레를 배우기도 했다. 한영숙으로부터는 전통춤도 사사했다. 즉 전통춤부터 신무용까지 다양한 춤을 배웠던 시기였다.1950년 최희선은 6·25 전쟁으로 대구로 내려온다. 그는 이때 대구에서 박지홍에게서 다시 무용을 배운다. 당시 무용가로는 드물게 청구대학(현 영남대) 국문과를 다니면서 무용 활동을 병행했다. 최희선은 57년 대구에서 최희선무용연구소를 열고, 후학 양성을 시작했다. 같은 해 대구 문화극장(옛 국립극장)에서 제1회 최희선무용발표회를 개최하면서, 전통춤과 창작춤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듬해 8월에는 제1회 민족예술경연대회에 스승 박지홍과 함께 하회별신굿놀이를 복원해 무대에 올렸는데, 이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최희선은 59년 서울 원각사에서 전통춤과 창작춤을 발표하는 등 자신만의 춤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창작 무용 작업에 몰두최희선은 1970년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서울에서 무용연구소를 연 최희선은 후진 양성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73년 국립극장 지도위원으로 위촉되면서, 국립무용단 제12회 공연 '별의 전설'에 출연하고, 국립극장 산하 단체인 무용단·가무단·창극단에서 안무와 연출로 공연에 참여한다. 당시 주요 작품으로는 '대춘향전' '시집가는 날' '왕자호동' '배비장전' '심청' '원효대사' '흥보가' '마음 속에 이는 바람' '꿈, 꿈, 꿈' '푸른천지' '황진이' 등이 있다. 1982년 최희선은 국립무용단을 나와 청주사범대 무용과에서 강의를 맡았다. 교편을 잡았지만 춤을 향한 열정은 여전했다. 이에 84년 한길무용단을 창단해 공연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춤의 내력' '어느 자서전' '물꽃' '물이랑 삶이랑' 등을 발표했다. 특히 '물꽃'이라는 작품은 86년 아시아드문화예술축전에서 안무상과 연기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투박한 멋의 달구벌 입춤1990년대부터 최희선은 고향 대구의 춤을 이어가는 데 집중한다. 88년 달구벌전통무용 연구회를 조직한 최희선은 대구를 중심으로 박지홍류 전통춤을 정리, 전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95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행한 무보집에 '최희선 달구벌 입춤 무보'가 수록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최희선은 박지홍으로부터 배운 입춤을 계승해 '달구벌 입춤'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려 나갔다. 이 춤은 '달구벌 수건춤' '달구벌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맨손춤을 추다 소매 안에 넣어둔 작은 수건을 빼내 춤을 추다가 소고춤으로 이어지는 형태다. 달구벌 입춤을 이어가고 있는 윤미라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는 2016년 영남춤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발제문에서 "달구벌입춤은 한국 전통춤 전승에 지대한 기여를 한 교방춤 중 가장 기본무에 해당하는 춤으로 경상도 지역의 교방춤으로서 그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이 춤은 추는 사람 또는 장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형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최희선은 2007년 9월28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달구벌 입춤과 함께한 최희선 춤인생 60주년' 공연을 앞두고 했던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달구벌 입춤'을 가르칠 때는 딱 하나! '정직함만 가지고 추라'고 주문합니다. 동작만 만들면 뭐 합니까. 달구벌 입춤을 출 때는 '달구벌'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형성됐는가를 생각해야죠. 경기지역 춤은 아름답고 풍물이 있는데, 대구의 지명을 내걸고 추는 달구벌춤은 투박하고 뚝배기 같은 여인의 멋, 즉 내면의 강함을 통한 멋으로 희비애락을 나타냅니다. 달구벌은 푸른 언덕이라는 뜻이니, 고단한 여인의 삶 속에서도 그 정신을 잘 새겨 추는 춤이어야 한다는 것이죠."이후 최희선은 2009년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NEW YEAR DANCE FESTIVAL' 무대를 끝으로 2010년 10월12일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참고문헌=영남의 음악과 무용의 전통을 찾아서(계명대 출판부), 춤과 그들(동아시아), 영남춤학회 2016년 학술대회 자료집최희선이 달구벌 입춤을 추는 모습.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최희선이 북춤을 추는 모습. 최희선의 1962년 제4회 발표회 팸플릿 표지.
2021.06.28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2] 이여성(下)…미술·복식·건축분야 평론가로서 발자취
중년에 畵道로 전향한 동양화단의 귀재로 평가, 1936년부터 역사화로 화풍 변경48년에 월북 사회주의 민족문화 활동, 대구 향토회 이끈 畵友 김용준에 의해 학계서 매장 당해 이여성은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언론인, 정치인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상화 시인의 큰형 이상정과 함께 대구 근대화단을 개척한 화가이면서 미술사학자였다. 특히 미술·복식·건축 분야 평론가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대구 근대화단의 개척자이여성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나'에서 그가 '호렵도를 보고 말 탄 사냥꾼이나 잠수정을 탄 해군 사관이 되고 싶어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아가 학창 시절 잠수정을 설계하는 등 그림을 그리다가 성적까지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심취했다.이여성이 최초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때는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23년이다. 그해 대구 노동공제회관에서 열린 제2회 교남서화연구회전에 서양화 '정물'을 걸었다. 또 34년 조선서화협회가 주최한 제13회 협회전에 비회원으로서 동양화 '어가소동(漁家小童)'을 출품해 입선했다. 35년엔 이상범과 함께 2인전을 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우리 산수화계의 독특한 경역을 이룬 청전 이상범씨와 우리 화단의 숨은 거재 청정 이여성씨'라고 소개됐다. 이 여성은 36년 7월4일부터 9일까지 조선일보에 '신미도행(身彌島行)'이란 글과 그림을 게재했다. 이 연작은 신미도, 기울포, 장군굴, 운종산, 유열만을 소재로 한 5폭 산수화다. 그는 곧 '화단의 혜성, 중년에 화도(畵道)로 전향한 동양화단의 귀재'로 평가받았고 조선화단의 중견화가로 인정받았다.이여성은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의거'에 연루돼 조사부장으로서 당시 부원이었던 청전 이상범, 사회부장이던 대구출신 소설가 빙허 현진건 등과 일제에 의해 강제사직 당한 후 본격적으로 동양화에 몰두했다. 그가 동양화에 빠지게 된 계기는 동양화단의 핵심인 이상범과의 인연이라고 본다. 이상범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였고, 이여성은 실경을 중시한 사경산수(寫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40년대 이상범은 최우석, 노수현, 김기창 등과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이후 이여성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됐다. 이처럼 다른 지역과 달리 대구 화단을 개척한 선각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점이 특별하다.◆사화가(史畵家)로서의 활동이여성은 1936년부터 동양화에서 역사화로 화풍을 바꾸었다. 그는 "처음에는 소일 삼아 동양화를 장난한 것이 오늘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고대 풍속도를그리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의 역사화는 철저한 고증으로 인물과 생활상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는 본격적인 자료수집과 함께 역사화 제작에 들어가 1936~37년에 10여점의 역사화를 그렸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고사를 그린 '유신참마지도', 김정호를 드러낸 '대동여지도 작자 고산자', '청해진 대사 장보고', '격구지도' 풍속화 '가례동모이'와 기생 '황진이', 고대 무사를 그린 '고무도(古武圖)', '악조 박연 선생' , '농악그림', '마상재(馬上才)' 등이다. 모두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졌으나, 제2차대전 말기 역사화 수십 점이 분실됐다.그의 '격구도'(1938, 수묵담채, 마사박물관 소장)는 현존 작 중 유일하게 남은 대표작으로 전통화풍에 서양 기법을 가미한 걸작이다. 사계산수도(1934, 종이에 채색, 이쾌대 유족 소장)도 남아 있는데, 4곡의 조그만 병풍 형태로 역시 서양풍을 차용한 산수화다. 1930년대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던 안석주는 그의 그림에 대해 "이여성씨는 문필가로서도, 화필에도 이만한 역량이 있는가를 의심할 만큼 초인의 수완을 나타냈다"고 했다. 소설가 김기진의 형이면서 한국 근대조각의 개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복진은 한술 더 떠 "이여성씨의 박식과 독학, 윤필(潤筆)은 세칭 범속한 전문가의 지위를 뛰어넘었다. 또한, 그와 동일하게 논할 비례(非禮)를 나는 가지고 싶지 않다"고 극찬했다.사화가 이여성은 1930년대 말 복식사 연구자로 변신, 그 성과를 묶어 연구서로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를 출간했다. 광복 후 한국어로 번역, 1947년 1월에 출판했다. 이여성의 남한에서의 마지막 전시는 46년 9월11일부터 15일까지 태백공사 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이었다. 그는 이때 15폭 동양화 소품을 선보였다.◆북한에서의 활동과 조선미술사론이여성의 정치적 멘토는 여운형이다. 그의 동지이자 화가인 이상정의 둘째 동생 이상백도 뜻을 같이 했다. 이여성은 여운형 암살 뒤 북을 자발적으로 선택, 북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했다. 그가 북에서 연구한 조선미술사는 사회주의적 민족문화론 인식의 총화였다. 그는 48년초 월북한 뒤 그해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고, 57년 제2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됐다. 하지만 그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49년 평양 고구려 안악고분 논문을 발표한 이후 다수의 논문과 '조선미술사개요' '조선 건축미술의 연구' 등의 역저를 출간했다. 특히 '조선미술사개요'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출판한 최초의 조선미술사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는 북한의 대표 학술잡지였던 '문화유산'의 편집인이자 조선역사가 민족위원회 위원이었고, 57년 김일성대학 역사강좌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까지였다.북한에서의 초기 학술활동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6·25전쟁 전후 복구과정에서 신축 건물에 민족주의적 양식을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 김일성 권력의 강화과정 즉 주체사상이 대두되면서 학문·예술의 자유가 위축될 즈음 57년 중국에서의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민주주의 정책을 목격하고 이를 소개, 김일성 세력의 권력독점을 비판했다. 결과는 명약관화. 앞서 남로당파·연안파에 이어 종파주의로 비판받던 그는 소년기부터 평생 동지였던 약산 김원봉과 약수 김두전도 함께 숙청됐다. 그 과정에서 경북 선산 출신으로 대구에서 향토회·영과회를 이끈 김용준에 의해 철저히 비판받았다. 60년 김용준은 이여성의 '조선미술사개요'를 학계에서 매장했다. 김용준이 왜 동향 친구인 이여성을 탄핵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말년에 김용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서 그 원인을 짐작할 뿐이다. 김용준은 이여성을 "은폐된 민족주의와 가장한 마르크스주의"라면서 "그의 사상을 "쇼비니즘"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여성의 숙청은 전후 북한 사회의 예술적 경직성을 보여준다. 그는 인민 중심의 민족주의 미술사를 정립하고 발전시키자는 민족미술계승론을 주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61년 교조주의와 민족허무주의, 부정한 계급적 비속화, 사이비 마르크스주의로 비판받아 공식적으로 그의 이론은 폐기됐다.◆천재화가 동생 이쾌대와의 관계이여성은 열두 살 아래 동생 이쾌대와 친밀했다. 이쾌대가 형을 좇아 월북한 것으로 봐 형제애를 넘어 예술적·사상적 동지였다. 이쾌대는 서울 휘문고 재학 중 미술 교사였던 장발(張勃)의 권유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장발은 이여성과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쾌대가 34년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귀국, 40년대 국내에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을 때, 향토색과 전통성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려 민족의식을 나타낸 것 또한 형의 영향이었다. 형의 모습을 그린 양화 '이여성'은 당시 형의 동양화론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40년대 이여성은 이쾌대와 이중섭·진환·최재덕 등 재야작가들로 구성된 신미술가협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들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43년 서울 화신화랑에서 열린 제3회 신미술가협회전 기념사진에 이여성이 회원들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은 이들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미술가협회는 일본 관전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든 화가들의 모임이다. 조선의 향토 소재를 탐구하되 토속성과 근대성의 접점을 추구했다. 이 협회 사무실이 이쾌대의 자택이었으며 이쾌대는 이 협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여성의 영향을 받은 신미술가협회의 젊은 화가들의 활동은 '조선적인 것'을 화폭에 담으며 민족의식을 주요 화두로 삼아 작품 활동에 매진한 일종의 '저항운동'이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참고문헌=대구미술 100년사(대구미술협회),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이중희·동아문화), 대구독립운동사(광복회 대구지부), 신용균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 박사학위 논문(2013)이여성의 산수화.이여성의 격구도.이여성의 동생 이쾌대가 그린 이여성의 초상화.
2021.06.14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1] 서동균…석재 서병오 대표제자 후세 남기기 위한 작품 50점만 골라내고 소각
스승 서병오에게 묵죽 배워 회화성 넘치는 '죽농풍' 확립 후 日 대가로부터 세밀한 필법 습득서화 모두 능했지만 문인화에 특히 뛰어나…1970년대 원근감 드러나는 개성적 작품세계 구축죽농(竹農)서동균(1902~1978)은 긍석 김진만과 더불어 석재 서병오의 대표적 제자다. 서병오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관을 덮을 명정(銘旌)을 쓰라는 유언을 남긴 제자가 서동균이다. 또한 그는 서병오가 창립해 이끌어오던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죽농'이라는 호도 서병오가 지어주었다. 서동균은 임종 전 "작품이란 종이의 상태에 따라 수백 년도 보존된다. 지금까지 남의 손에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라도 정리해서 후세에 남부끄럽지 않은 것들만 남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자신의 작품 700여 점 중 스스로 남겨도 될 만한 작품으로 생각한 50여 점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버렸다.서동균은 대구 향촌동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7세 때인 1908년부터 조부 서용묵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병오의 스승으로 당대의 영남 명필인 서석지(徐錫止)와 교분을 맺고 있던 조부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조부는 병세 3년 전 온 힘을 다해 손자 서동균에게 붓글씨 체본을 써주기도 했다. 조부 별세(1911년) 후 서동균 부친은 당시 대표적 선비인 김만취(金晩翠)를 스승으로 모셔 서동균에게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을 배우게 했다. 15세 때(1916년) 서병주가 개설한 강습소에서 신학문을 배운 뒤 이듬해 해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하며 서동진, 이효상, 백기만 등과 교우관계를 맺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투옥,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대표적 화가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문하에서 1년 동안 서화를 연마했다. 훗날 서동균의 문인화에서 엿볼 수 있는 남다른 회화성과 소묘 기량은 이때의 학습효과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서병오 문하에서 본격적 서화 공부서동균의 본격적인 문인화 공부는 서병오의 문하에 입문하면서부터 이뤄졌다. 서병오는 1920년 의성군수 관사에 걸려있던 서동균의 15세 때 서예작품을 보고는, 대구로 돌아와 그를 불러 만나본 뒤 제자로 삼고 '죽농(竹農)'이라는 아호도 지어주었다. 서병오는 당시 자신의 글씨 및 그림 몇 작품과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첩 한 권을 주며 "자네가 이 서첩을 백 번 쓰면 겨우 글자 흉내만 낼 것이고, 천 번을 쓰면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만 번을 쓴다면 틀림없이 명필이라는 소릴 들을 것이네"라며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서동균은 5년 동안 5천 번을 썼다고 한다. 서병오 문하에서 서화에 매진한 서동균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사군자를 출품, 연속 8회 입선하기도 했다. 서병오 별세 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맡아 서화 활동을 펼치고, 1938년에 2차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 2년 동안 머물다 귀국했다. 광복 후에는 경북여고와 신명여고 교사로 재직했고,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영남서화회로 개칭한 뒤 '영남서화원' 간판을 내걸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1925년에는 스승인 서병오와 진주 한시백일장에 참여한 후 돌아오는 길에 단양을 들렀다가 그곳 사람들의 요청으로 서화 전람회를 가졌다. 그 이후 진주에서 개성 출신의 서화가 미산(美山) 황용하와 만나 합동전을 열고, 1930년에는 공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1960년 부산 개인전 등 25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31년에는 대구 미술인들이 모여 만든 '향토회'의 멤버로 활동했다. 서동균, 김용진, 최화수, 서동진, 박명조, 최유근, 한성준 등이 멤버였다. 서화가로는 서동균이 유일했다. 서동균은 향토회전에 '풍경' '장미' 등을 출품했다. 전통 문인화 소재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를 소화하기도 했다. 광복 후 10여 년간의 교직 생활 중 경북여고 재직 때는 교내 중등교원양성소에서 동양미술사를 강의하고, 1957년부터 신명여고에서 4년간 재직했다. 만년에는 대구대와 효성여대 에서 서화를 지도했다. 이 시기에 서화 작업도 가장 왕성하게 했다. 1966년에는 제자들의 요청으로 1년 정도 서울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일중 김충현(1921~2006), 시암 배길기(1917~1999), 검여 유희강(1911~1976) 등과 함께 중앙에서 열리는 서예전의 작품심사에 참여하고 개인적인 서화 지도를 하기도 했다. 1957년 제2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하고, 1975년에는 제7회 대한민국 미술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서동균의 작품세계서동균은 서화 모두에 능했지만 문인화는 특히 뛰어났다. 그중에서도 묵죽화는 자신의 필명에 걸맞을 정도로 출중했다.서동균은 회고록을 통해 '내 필법이나 화법은 내가 만든 것'이라며 남화의 오창석과 사군자의 정판교를 참고하고, 해·행서는 안진경·소동파·황산곡·유공권·동기창을, 전서는 고정(固鼎), 예서는 한의 장천비(張遷碑)를 가미한 서체라고 설명했다. 문인화 중에는 매화와 대나무를 압도적으로 많이 그렸다. 작품 경향을 보면 서병오 문하에서 서화를 연마하던 학습기는 농묵이 강하게 나타나고 발묵성 짙은 필치가 특징이다. 모색기(1950~1960)는 자신의 개성을 찾아가는 시기로, 보다 밀도 있는 필선을 사용했다. 바위 묘사에서 그런 점이 두드러진다. 확립기인 1960년대와 만년기인 1970년대는 서동균의 개성이 현저하게 드러난 작품들이 완성된다. 특히 사군자 작품들은 원근감과 탄탄한 구도감을 갖추고 있어서 일반 회화를 방불케 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원근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등 회화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개성적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묵죽(墨竹)을 많이 작업하면서 독자적 화풍을 이룩하게 된다.서동균은 산수화도 적지 않게 그렸는데, 산수화는 모색기와 확립기에 주로 그렸다. 일본에서 학습한 서양화 기법과 남종화는 그의 산수화 작업에 영향을 주고, 그의 문인화의 회화 성향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서동균은 조선미전 제7회와 제8회에서 '묵죽'으로 입선하고, 서화협회전에서 3회 입선하며 묵죽 분야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묵죽은 서화가로서 그의 명성을 드러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20대부터 시작한 묵죽은 서병오의 지도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대가들의 묵죽을 모방하는 단계를 벗어나 50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60대 이후에는 독자적 묵죽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서병오에게서 배운 농묵과 발묵의 서예적 필치 중심의 '석재풍' 묵죽을 토대로, 회화성이 넘치는 '죽농풍' 묵죽을 확립하며 일가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오창석 선생의 필의(筆意)를 사용한 것이다' '포화 노인이 이 기법을 잘 사용했다' '장판교의 필의를 본받았다' '내가 소년 시절에 판교 정섭이 그린 소폭의 대나무 그림을 봤는데, 그 신묘한 필치가 지금까지 늘 눈에 선하여 잊을 수가 없다'대가들 작품의 필의를 본받으려는 서동균의 노력은 만년까지 지속되었다. 1965년 전후에는 서예적인 힘찬 필치와 맑고 담박한 먹의 운용으로 회화적 표현이 나타난다. 서동균 묵죽의 독창성은 회화성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먹의 풍부한 농담 변화, 대상의 배치, 공간의 활용 등 표현 요소를 조화롭게 활용해 대나무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회화적 표현을 두드러지게 한 것이다.서동균은 학습기에는 서병오의 영향을 받아 농묵의 필법을 구사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화단의 대가들로부터 세밀한 필법과 맑은 묵법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기법 및 화면 구성법을 습득했다. 이런 기법들은 그의 문인화에 회화성을 불어넣는 특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스승인 서병오의 문인화 작품이 서예적인 데 비해, 그의 문인화는 농담 변화와 풍부한 색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하고, 구도를 화면 전체로 확대하면서 풍부한 회화성을 지니게 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참고자료: 대구미술 100년사(근대편)/대구미술협회(2015), 한국학논집 제49집/계명대 한국학연구원(2012)서동균 작 '묵죽''소나무 화분과 영지'
2021.05.24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0] 이필동...지역 연극·뮤지컬 발전 평생 걸쳐 남다른 노력
"예술가는 동시대 사람들과 동일한 혈액형을 가져야 한다."대구 연극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연극배우이자 연출가 아성(雅聲) 이필동(1944~2008) 선생이 생전 남긴 말이다. 경북 안동 출신인 이필동은 경북고와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평생 대구경북 연극 및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필동은 1967년 극단 인간무대와 1971년 극단 공간 대표, 1975년 한국연극협회 경북지부장, 1977년 극단 원각사 대표, 1988년 한국연극협회 대구지부장을 지내며 대구 연극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1997년부터 2007년까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획실장, 처장을 역임했으며,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초대 조직위원장과 집행위원장으로 일하며 문화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대구를 사랑한 연극인연극인 이필동의 인생은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고 재학 시절인 1961년 2월27·28일 '2·28 민주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혁명봉화 2·28 1주년 기념 학도예술제'의 연극 '밀주' 출연을 계기로 연극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91년 '이필동 연극 30년 기념공연'으로 열린 '수전노' 팸플릿에 적힌 이필동의 출연작 100개 가운데서도 '밀주'는 그의 1번 작품으로 기록돼 있다. 이필동이 연극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1960년대는 대구 사람들에 의한 연극운동이 싹트는 시점이었다. 6·25전쟁으로 대구에 터를 잡았던 국립극장이 1957년 서울로 떠난 이후 대구 연극계는 대구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탄생해야 했다. 이필동은 1960년대 초 서울에서 공연하며 경력을 쌓았지만, 연극 인생의 출발점인 대구로 돌아온다. 1967년부터는 본격 기성 극단인 인간무대 대표로 활동했다. 10여 명의 단원 대부분이 학생극 및 대학극 출신 신인들로 구성된 극단 인간무대는 당시 대구 연극계에 참신한 바람을 일으켰다. 문화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어려운 시기였지만 이필동과 배우들은 열정 하나만으로 무대를 마련했다. 이필동의 저서 '대구연극사'에 따르면 1960년대는 극단 사무실은 꿈조차 꿀 수 없었고 빈 대학 강의실이나 운동장에서 연극 연습을 하던 시절이었다. 이후에도 이필동은 대구 연극계 통합에 주력하는 등 대구 연극 발전을 위한 남다른 노력을 펼쳤다. 대구 연극에 대한 이필동의 고집스러운 애정은 타 지역 연극인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원로 연극배우 오현경은 연극 '수전노'(1991년) 축사에서 "타협하지 않는 고집을 신앙처럼 가슴에 간직한 채 대구 연극계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식을 서울에서 꾸준히 전해 들으면서 연극에 대한 이(李)형의 열정과 애정을 짐작하였고(중략) 언젠가 내가 이형에게 '이형! 이제 나와 함께 서울에서 연극을 해보자'고 권유했을 때 그는 '대구에서 연극을 해야지요'라고 웃으며 거절하였다"라며 이필동에 대해 적었다.이필동 역시 2007년 한 매체의 칼럼에서 "내가 평소에 가진 지론 중 하나가 대구 연극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관객과 배우가 같이 늙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분장하지 않고도 노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많아야 대구 연극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밝히며 대구 연극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다.◆이론가이자 수집가 이필동이필동은 배우뿐만 아니라 연극 및 연출 이론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연극 등 공연예술에 대한 그의 탐구정신은 남달랐고, 이는 그의 역작으로 남은 저서 '대구연극사'와 '무대예술입문'으로 존재한다. 특히 대구연극사의 경우 지역 연극인들과 지역 연극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이필동이 연극 이론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5년 한국연극협회 경북지부장을 맡은 직후다. 당시 연극협회에서는 광복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연극사를 펴내기 위해 자료를 준비했지만, 자료 묶음이 도난당해 아쉬움이 컸다. 한참 후인 1993년 예총 대구지회 발간 '예총 30년사'의 연극 부분을 이필동이 집필했고, 이것을 계기로 대구연극사가 정리되면서 1995년 대구연극사가 발간된 것이다.대구연극사는 1918년 대구 최초극단인 신극좌가 생긴 이후부터 1994년까지 시대별 연극계 특성과 각 극단의 활동, 연극 전반에 얽힌 뒷이야기 등 대구연극사 전반을 정리했다. 2005년에는 대구연극사 증보판인 '새로 쓴 대구연극사'를 펴냈다. 80여쪽을 보강했는데 전작 소개에서 빠졌던 배우들에 대한 기록을 대거 추가했다. 당시 이필동은 "연극에서 진짜 고생하는 사람은 출연배우인데도 당시 책에는 이에 대한 것을 세밀히 다루지 않았다"며 증보판 출판 이유를 밝혔다.1983년 발간된 '무대예술입문'은 연극을 처음 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아마추어 연극을 지도하려는 사람, 그리고 연기와 연출에 대해 깊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이다. 이필동은 책 머리말에서 "체계적 연극 수업을 하였거나 연극을 전공한 사람이 극히 드문 지방의 현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지방 연극의 발전이 느리고 다른 분야의 예술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도 또한 사실"이라며 '배우 동선 배치도' 등 다양한 시각 자료들까지 첨부해 책을 완성했다.이필동은 문화예술 사료를 모으는 컬렉터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컬렉션은 각종 잡지 창간호 300여 권과 신문 창간호까지 망라된 문화 관련 발행물로 총 1천여 점에 달한다. 현재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가 유족으로부터 컬렉션을 기증받아 정리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의 수집벽은 대구연극사 집필 과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필동은 1995년 대구연극사 발간 당시 "대구연극사를 집필하면서 자료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나마 체계적 정리가 된 지역 일간신문을 창간호부터 샅샅이 훑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2000년 5월 월간 대구문화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대구 뮤지컬 콘텐츠 자리매김에 일조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의 태동부터 남다른 애정으로 함께해온 이필동은 2005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조직위원회 발족 당시 초대 조직위원장이자 2007년 제1회 축제의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했다.당시 이필동은 "미래 공연시장을 주도할 것은 뮤지컬 콘텐츠가 될 것. 지역을 위해 일조할 수 있다면 큰 보람"이라고 전하며 뮤지컬이 지역의 콘텐츠로 자리 잡기 위해 헌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에 DIMF는 이필동 타계 10주기를 맞아 2018년 제12회 DIMF 어워즈부터 그의 호를 딴 '아성 크리에이터' 상을 특별상으로 제정하고 두각을 나타낸 크리에이터(창작자)에게 수여하고 있다. DIMF 관계자는 "이는 평생 수많은 작품 연출가로 활약하며 무대 뒤에서 고생하는 스태프들을 챙겼던 이필동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이자 DIMF의 시작부터 많은 열정과 노고로 이끌어온 그의 예술정신을 기억하고자 함에 있다"고 밝혔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참고문헌=대구연극사·무대예술입문·월간 대구문화이필동의 연극 인생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연극 '수전노'에서 아르빠공 역으로 출연한 이필동(오른쪽).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1963년 11월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감찰관'에서 스비스뚜노프 역으로 출연한 고 이필동.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이필동 저 '대구연극사'의 증보판인 '새로 쓴 대구연극사' 〈영남일보DB〉이필동의 1983년 저서 '무대예술입문' 표지.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2021.05.10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9] 이장희, 섬세·감각적 표현으로 근대시 새 지평 '활짝'
고월 이장희(1900~1929) 시인은 같은 대구 출신으로 동시대에 활동한 이상화 시인과 비교하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지역 출신 문인이다. 봄을 고양이에 빗댄 시 '봄은 고양이로다'가 유일하게 잘 알려진 그의 시다. 1920년대 활동했던 이장희는 당시 보기 드물었던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현으로 한국 근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시인으로이장희는 1900년 11월9일 대구 중구 서성로1가 103번지에서 이병학과 박금련 사이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 자료에는 그의 생가를 서성로1가 103번지 또는 105번지로 적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이병학이 여러 채의 집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장희의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로 중추원참의를 지내기도 했다.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영리했던 이장희는 1906년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착실하며 예의 바른 모범생이었다.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귀국해 목사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한다. 이후 아버지는 이장희에게 총독부 관리가 되기를 요구했지만 이장희는 이를 거부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순응해 집안을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뜻이 강했던 아버지와 이장희는 늘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그를 버린 자식으로 보기까지 이르렀다.교토중학교 시절부터 이장희는 글을 썼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1924년 친구인 목우 백기만의 주선으로 '금성(金星)' 동인이 되면서부터다. 이장희는 1924년 5월 '금성 3호'에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발표했다. 금성을 통해 시를 발표한 이후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이장희는 '금성' 동인이 된 1924년 5월부터 1929년 11월까지 총 4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발굴된 건 34편이다. 게재지별로 보면 '금성' 5편, '신여성' 2편, '문예공론' 3편, '신민' 13편, '중앙일보' 1편, '여시' 1편, '생장' 2편, '여명' 3편, '조선문단' 1편이 있고, 이외에 3편은 어디에 게재됐는지 알 수 없다.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해 '상화(尙火)와 고월(古月)' '씨뿌린 사람들'을 낸 백기만 시인에 따르면, 유고 8편은 출판을 기대하고 이상화의 사랑방 천장에 숨겨뒀으나 이상화가 가택 수사를 받는 바람에 이장희의 유고 8편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감각적인 시어와 시각화"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의 시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봄은 고양이로다'이다. 당시 이장희는 1920년대 시단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고양이를 시적 대상으로 삼았다. '봄' 하면 대부분 진달래·개나리 등의 꽃을 떠올리지만, 그는 이처럼 평범한 시적 대상을 채택하지 않았다. 고월의 또 다른 시 '고양이의 꿈'에도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시인이 꿈에 본 고양이를 환각적으로 그렸는데 밝은, 푸른, 검은 등의 색상이 절묘하게 배합된다.그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순환에 따라 변하는 자연을 시각화해 시로 표현했다. '실바람 지나간 뒤' '비오는 날' 등의 시에선 봄의 감각을 회화화했으며, 여름을 소재로 한 시는 '하일소경' '봉선화' '여름밤' 등이 있다. '벌레우는 소리' '귀뚜라미' '쓸쓸한 시절' 등 가을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가을의 차가운 느낌과 쓸쓸한 정서를 담고 있다. '겨울밤' '겨울의 모경' '연' 등의 시는 겨울을 소재로 했다. ◆쓸쓸함, 고독의 시인이장희의 시에는 '쓸쓸한' '서늘한' '싸늘한'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고양이의 꿈'에선 그의 시적 주체가 머무는 공간은 '쓸쓸한 모래 우'로 표현된다. 이장희는 멀리서 들려오는 '쓸쓸한 벌레소리'(시 '벌레 우는 소리')에 귀 기울였고 '쓸쓸한 심령'(시 '청천의 유방')의 소유자였다. 이 같은 쓸쓸한 정서는 어쩌면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장희의 삶을 되짚어보면 '쓸쓸한 장면'이 적지 않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형제·누이 등 여러 번 가족의 죽음을 목격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어야 할 집은 그에게는 휴식처가 되지 못했다. 이장희는 돈과 명예밖에 모르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뜻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켰다.이장희의 시에서 드러나는 쓸쓸함은 저녁을 배경으로 한 12편의 시에서도 느껴진다. 대표적인 시는 '동경' '석양구' '겨울밤' '겨울의 모경' '귀뚜라미' 등이다. 그가 저녁을 노래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주로 저녁에 외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상순은 '고월과 고양이'에서 "그의 외출시간은 거의 일몰 후였다. 그 이유는 주로 거리에 넘쳐흐르는 속인(俗人) 속물(俗物)의 추악한 표정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기 전까지도 그는 쓸쓸하게 지냈다. 2~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던 이장희는 부친의 서울 장사동 살림집 사랑에서 외롭게 지내다 세상을 떠나기 3~4개월 전 고향 대구로 내려왔지만 외출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 행랑채에 머무르며 2~3일간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금붕어만 그리다 1929년 11월3일 음독자살한다. ◆시로 자신의 존재 증명노동과 직업 같은 근대적인 제도와 규율, 가족과 문단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배제시켰던 이장희에게 시는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아버지가 제안한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시인의 삶을 택했던 그에게는 시가 전부였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국현대시인연구(김재홍)는 "고월은 남을 위해 시를 쓴 시인이 아니다. 비록 그의 시가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의식하고 시를 쓰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백기만의 회상을 통해서 이장희의 시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시를 비방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이장희는 "시는 푸라치나(platina: 백금·팔라듐·이리듐 등의 자연 합금) 선이라야 한다. 광채 없고 탄력성 없고 자극성 없는 굵다란 철사 선은 시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장희가 시를 대하는 방식은 오상순의 '고월과 고양이'에서도 나타난다."고월의 시작에 대한 태도는 시의 테마를 하나 잡으면 뼈를 깎고 피를 말려가면서 며칠씩 밤을 새워 그 완벽을 기필하고 마치 쥐를 노리는 고양이, 알을 품은 암탉의 태도요 자세였다. 우리들의 고월은 평생 시밖에 몰랐다. 고월은 시에 나서, 시에 살고, 시에 죽은 진실로 고고한 시인이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참고문헌=대구 문단 인물사(윤장근), 한국현대시인연구 7-이장희(김재홍 편저), 한국문예비평연구-고월 이장희의 시와 감각어적 특징(장도준), 한국현대문학연구 37-이장희의 시, 우울의 '기원'(조은주), 논문 '고월 이장희 시 연구'(정우택)1951년 백기만이 이상화와 이장희의 작품을 모아 발간한 '상화와 고월'.
2021.04.26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8] 이여성(上)…민족해방·조국 통일위해 선각자로 파란만장 삶
이여성(李如星·1901~?)은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화가, 역사학자, 미술사가, 평론가, 사회주의 이론가, 체육인(역도) 등 근대 시기 여러 방면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월북화가 이쾌대의 친형이기도 한 그는 1958년 북한에서 숙청될 때까지 민족해방운동과 통일 조국 달성을 위해 선각자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이여성의 출생과 독립운동가로서의 성장이여성의 출생지에 관해선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 수성구 지산동 498), 중구 계산동,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49 등 세 곳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용균 고려대 연구교수는 대구를 출생지로 보고 있다.이여성은 1901년 창원현감을 지낸 만석꾼 이경옥과 윤정렬의 2남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로 대지주였다. 일찍이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개화사상을 수용했다. 이여성은 8세 때 서울로 가 보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4학년(16세) 때 동맹휴학을 주도해 일제에 저항하다 자퇴하고 중앙학교로 편입했다. 이때 중앙학교 동기생인 평생 동지 김원봉·김두전을 만나 의형제를 맺게 된다. 독립지사인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가 이때 셋에게 각각 '조국 산천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산과 같이(若山)' '물과 같이(若水)' '별과 같이(如星)'라는 호를 지어줬다고 알려진다. 셋은 김약수와 같은 부산 동래 출신인 연안파 김두봉과 함께 해방공간 후 월북, 북한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6·25전쟁 책임 및 종파주의 활동 죄목으로 김일성에 의해 거의 동시에 권력에서 축출됐다. 이즈음 이여성은 같은 대구출신 월북화가이며 미술평론 및 미술사학자인 김용준(전 서울대 미대 학장)에 의해 철저히 비판받는다.이여성의 청소년시절은 조국독립을 향한 질풍노도의 시기다. 17세 때 부모 몰래 토지를 팔아 거금 6만원(일제기록 4만5천원)을 마련, 김원봉·김약수와 함께 중국 난징으로 가 금릉(金陵)대학(현 난징대)에 입학한다. 그 돈으로 만주 길림 신장에 둔전병제를 본뜬 무장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로 했다. 고등학생 나이에 지금의 수 백억원이나 되는 독립자금을 들고 만주로 가 제2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이보다 1년 앞선 1917년 21세 대구 청년 이종암도 은행 돈 1만900원을 빼돌려 의열단 창단자금으로 쓴다.이여성은 그러나 국내에서 벌어진 3·1운동으로 독립기지 건설의 뜻을 접고 대구로 왔다. 대구3·8독립만세운동 후 최재화·김수길·이영식·이덕생 등과 독립단체인 혜성단을 조직해 대구에서 악덕 관리들에게는 '암살 경고'를, 민족자본가들에게는 '독립운동자금 요구'를 하는 강력한 반일투쟁을 펼치다 발각됐다. 이에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여성은 출소 후 22세 때 일본으로 유학 가 이듬해 릿쿄대 예과에 입학한다. 그는 김약수와 문경출신 박열 등이 주도한 흑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아나키즘과 결별하고, 김약수와 함께 북성회를 만들어 기관지 '척후대'를 발행한다. 이후 김약수·안광천 등과 일월회를 창립해 '사상운동'과 '대중신문'을 창간하는 등 간부로서 활동하며 민족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했다.이여성은 1923년 7~8월 재도쿄조선유학생 학우회 순회강연회 연사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대구에서 또다시 기소됐으나 풀려났다. 25년 릿쿄대 예과를 졸업하고 상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일본 경찰의 요주의 불령선인으로 분류돼 퇴학당한다.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저항한 이유에서다. 그는 더 이상 일본에서의 장기체류가 어려워지자 26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여기서 일본 유학시절 열애에 빠졌던 성악가 박경희와 신접살림을 차리고 매제인 사회주의독립운동가 김세용(대구고보 퇴학-경성의전-모스크바대 수학)과 함께 생활한다. 이후에도 이여성은 김세용과 사상적 인연을 이어간다.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이여성은 3년간 중국생활을 하면서 민족운동의 방법을 모색하던 중 언론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의 30대는 언론인으로서 역할이 뚜렷하다. 29년 말 귀국한 이여성은 이듬해 1월부터 서울에서 김세용과 함께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한다. 그해 봄 사회부장으로 승진했지만, 기자동맹 사건으로 사회부장에서 조사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32년 조선일보사를 퇴사할 때까지 조사부장으로 일했다. 안재홍·홍명희·문일평 등과 함께 사설을 썼고, 유대인과 터키·베트남·필리핀·아일랜드 등 약소 민족운동 연구에 힘쓰며 지면에 연재했다. 특히 베트남민족 운동에 관해선 9회에 걸쳐 시리즈를 이어갔다. 이 밖에 조선·동아일보 조사부장 재직 기간인 31년부터 35년까지 김세용과 함께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전 5집)를 출간했다. 이 책은 농업, 공업, 상업, 정치, 법률, 교육, 농민, 노동자 등 일제 식민통치 전 영역에서의 조선총독부 통계자료가 조선인을 수탈하기 위한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조선의 실제 사정을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조선인들이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여성은 각 분야의 통계를 분석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조선, 재조선 일본인과 식민지조선인의 통계 수치를 비교해 각 부분에서 조선의 열악한 처지를 증명했으며, 식민통치의 허구성과 조선과 조선인의 궁핍과 고난을 실증했다. 일제강점기 차별정책을 통계적으로 비판한 이 연구서는 우리나라 출판물 중 최초로 끝에 색인을 실은 역작으로 알려진다.하지만 이여성의 현장 취재 경력은 적다. 1931년 만주에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의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7월4일 만주로 파견됐다. 그는 당시 '국자가'로 불리던 조선인 집거지 중국 연길(현 옌지시)에서 '국자가(局子街)의 밤'이라는 시를 써 후일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이여성은 32년 말 조선일보를 떠나 동아일보로 직장을 옮겨 사설을 쓰고 숫자조선연구 연재를 이어갔다. 이듬해 조선경제학회를 창립, 재무간사와 조사위원회 상무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조사부장으로서 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제패 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퇴직했다. 당시 조사부의 청전 이상범 화백과 대구출신 빙허 현진건 사회부장은 구속됐다. 이상범은 이여성과 2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이상범은 현진건, 이여성과 달리 후일 '매일신보'에 일제의 징병제를 축하하는 삽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을 그려 친일미술인으로 오명을 덮어쓰게 된다.◆해방공간에서의 정치활동 이여성은 몽양 여운형의 중도좌파적 정치 행보와 궤적을 같이한다. 1935년 동아일보 재직 시 '숫자조선연구'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 출판기념회 준비위원회의 발기인 10명 중 한 명이 여운형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1944년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결성했을 때 함께했다. 이여성과 여운형의 개인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둘은 언론에 종사했고 체육활동에 열심이었다.광복 후 이여성은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조선인민당, 민주주의 민족전선,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의 중앙 간부로 활동했다. 이때 대구출신 이상화 시인의 동생 이상백도 함께한다. 이여성은 민족연합전선운동을 통한 건국을 원했으나 실패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가 휴회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은 좌우합작과 삼당 합당운동을 전개했으나 인민당은 좌우파로 분열되었다. 이여성은 인민당 우파로서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을 창당해 제2차 미소공위에 대응했다. 이여성은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당한 뒤 체포됐으나 풀려났다. 그는 남한에서의 정치적 활동에 제약을 느끼고, 1948년 초 가족에 "분실한 역사화를 찾기 위해 북으로 간다"고 말하고 월북했다. 그해 8월 해주에서 남북한 요인 57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서열 77위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이후 북에선 정치적 활동을 접고 김일성대학 역사학부 교수를 하면서 한민족의 복식 및 미술사 연구에 매진한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대구광역시▨참고문헌=대구미술 100년사(대구미술협회),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이중희·동아문화), 대구독립운동사(광복회 대구지부), 신용균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 박사학위 논문(2013)이여성 '무제(연도미상)' 28x36, 비단에 채색. 이여성의 가족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뒷줄 가운데 부부가 이여성·박경희이며, 앞줄 가운데 부부가 동생 이쾌대와 그의 부인 유갑봉이다. 1945년 8월16일 홍수 피해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서울 휘문중 교정에 들어서는 이상백·여운형·이여성.
2021.04.12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7] 김진만…서화가이며 독립운동가, 지역서 기명절지화 선도
긍석(肯石) 김진만(1876~1934)은 국내외에 시서화로 이름을 떨치던 영남 서화계 중심 인물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의 수제자로, 서화가이며 독립운동가였다. 서병오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서화가로서 그는 서병오의 영향을 받은 화풍의 사군자 그림도 물론 그렸지만, 특히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를 많이 남겨 대구 서화계에서 기명절지화가 성행하게 되는 선구자가 되었다. 김진만은 기명절지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도상들을 섭렵하였으며, 품격 높은 사의화풍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수묵을 위주로 하면서 약간의 담채를 사용, 사의적 표현과 사실적 묘사를 적절히 혼용함으로써 화훼와 기물을 개성적으로 표현했다.독립운동가로서 김진만은 1916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자신의 장인 집에 침입한 대구 권총사건으로 세인을 놀라게 한 주인공이다. 김진만의 집안은 그의 아들과 손자 3대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한, 보기 드문 가문이다.서병오는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렸던 만큼 분야마다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그중 서화계의 대표적 제자가 김진만이다. 서병오는 김진만의 예술에 대한 자질과 인품에 반해 자신의 호에서 '석(石)'자를 가져와 '긍석'이라는 아호를 특별히 지어주었으며, 화제를 통해 그를 '벗(友)'으로 표현하기도 했다.◆서병오의 수제자였던 김진만 서병오의 제자인 우송(又松) 신대식(1918~85)은 자신이 엮은 책 '석재 서병오'에서 김진만에 관해 '석재 선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석재 선생의 수제자로서 문기 넘치는 탁월한 서화가였다. 석재 선생보다는 10여 세 연하이고, 석재 선생 댁에는 매일같이 왕래하였으며, 선생의 애호를 많이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김진만이 먼저 별세하자 서병오는 추모시 '만긍석진만(輓肯石鎭萬)'을 통해 그에 대해 각별한 감회를 드러냈다.'옛날 그대와 함께 만리 길 간 것 생각하네(憶昔同君萬里行)/ 초나라와 오나라 산하 이리저리 다녔지(楚山吳水路縱橫)/ 위해(威海) 뱃머리에서 이별하던 일 기억하는가(奇曾威海船頭別)/ 눈물 어린 눈에서 가고 멈춘 정을 보았지(淚眼相看去住情)// 마음 따라 붓 한 자루 휘두르니(隨意揮來筆一枝)/ 동파의 서체요 사정의 시로다(東坡書體士亭詩)/ 그대 옥과 같고 삼절을 겸했으니(其人如玉兼三絶)/ 글씨 쓰는 이 헤아려 봐도 누가 다시 있는가(歷數臨池更有誰)// 난초와 계수나무 꺾인 소식 차마 못 듣겠네(蘭桂折不堪聞)/ 인간의 모든 일 뜬구름 되었구나(萬事人間盡化雲)/ 슬프다 영혼마저 부를 길 없는데(靈魂招不得)/ 옛산에 낙엽만 비오듯하네(舊山黃葉雨紛紛).'1876년 8월 대구에서 태어난 김진만은 부유한 집안에서 한학과 서화를 배우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김진만은 서병오의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주유를 모두 함께했다. 1차 주유(1898~1902) 때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등을 석재와 함께 다니며 여러 유명 예술인과 정치인 등을 만나 교유했고, 2차 주유 때(1908~1911)도 석재를 수행해 상하이와 칭다오(靑島) 등을 돌며 포화, 손문, 제백석 등 많은 현지 인사들과 교유했다.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주유는 김진만의 작품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그러던 김진만은 1915년 (대한)광복회에 가입,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에 역점을 두면서, 친일부호 처단 등도 당면과제로 삼았다. 경북 풍기에서 발족된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가 모여 1915년 7월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 맡았다.그는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1916년 8월 총사령으로부터 받은 권총을 휴대하고 동생 김진우와 정운일, 최병규 등과 함께 대구 부호 서우순(김진만의 장인)의 집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그의 집사가 달려와 격투가 벌어지면서 김진우가 권총을 발사한 뒤 도망가게 되었다. 일행은 일단 탈출했으나 곧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유명한 '대구 권총사건'이다.그는 1년 후 이 사건의 주모자로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8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 6월 출옥했다. 출옥 후에도 서병오의 사랑채를 드나들며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꾸려갔다. 1931년에는 팔공산 동화사 사적비 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34년 초 대구 자택에서 서병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진만은 감옥에서 나온 후 서화로 말년을 보내지만, 둘째 아들 김영우가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돼 옥고를 치른 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런 일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옥고로 인한 건강 훼손으로 일찍 별세하게 되었다. 손자 김일식은 대구고보 재학 중 동맹휴학을 이끌다 퇴학당한 뒤 대구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1977년 김진만의 독립운동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김진만의 작품세계김진만은 오랜 기간 독립운동과 옥중생활을 했기 때문에 서화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남아있는 작품도 그리 많지 않다. 1905년부터 40세가 되던 1916년 대구 권총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하느라 작품활동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작업에 전념한 기간은 출옥 후 별세할 때까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소수의 작품들만으로도 대구 서화계에 남긴 발자취는 누구 못지않다. 그가 남긴 작품은 기명절지와 묵죽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명절지화는 구도 감각과 묘사력이 요구되는 분야로, 작품을 보면 그가 남다른 회화적 소질도 지녔음을 알 수 있다.김진만의 작품세계와 예술관은 그의 작품에 사용된 화제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서법에는 두 가지 도가 있으니, 하나는 그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고, 하나는 정신을 그리는 것이다. 모방은 쉬우나 정신을 그리기는 어렵다(書法二道 一是模其形者也 一是寫其神者也 模也易寫神難)'.서화 작업에 있어 기교나 기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정신세계의 품격이 핵심임을 강조했다.지조·절개 등을 상징하는 대나무는 사군자 중에서도 문인화가들이 특히 좋아했다. 김진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작품에 쓴 화제에서도 그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절개를 품으면 서리와 눈을 맞아도 고치지 않고, 죽림을 이루어 마침내 봉황과 더불어 함께할 것을 기약하네(抱節不爲霜雪改 成林終與鳳凰期)'.김진만의 묵죽은 서화 작품 중에서도 특히 그의 성품을 드러내듯 강직하며 기교를 찾아볼 수 없는 필법을 보여준다. 그는 기능이나 기교에는 별 관심이 없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자신의 의지와 곧은 절개를 드러내는 것이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진만은 서화작품 중 기명절지 그림을 비교적 많이 남긴 서화가다. 당대 서화가로는 기명절지화를 많이 그리고 잘 그렸던 작가로 꼽힌다. 서병오가 기명절지화를 수묵화의 화풍으로 소화해 대구화단에 소개했지만 많이 그리지는 않았다. 반면 김진만은 기명절지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집중함으로써 자신만의 화풍을 이루었다. 기명절지화는 학식 있는 문인의 품격을 나타내는 고대 청동기나 도자기, 부귀와 장수 등 길상적인 의미를 가진 꽃, 과일, 괴석(怪石) 등을 함께 그린 일종의 정물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승업(1843∼97)이 중국 그림을 참고하여 새로운 형식의 기명절지화를 창안하였고, 근대 화단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기명절지화는 점차 궁중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활발히 제작되었다.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공동기획 대구광역시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묵죽, 기명절지, 갈대와 게.
2021.03.29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6] 이규환…대구출신 한국대표감독 리얼리즘 영화의 대가
대구출신 영화감독 성파(星波) 이규환(李圭煥. 1904~1982)은 국내 영화 초창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손꼽힌다. 1930~70년대를 무대로 활동한 이규환은 향토색 짙은 리얼리즘(사실주의) 영화의 대가로 총 23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계의 '귀재'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1902~1937)와 더불어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옛 영화 평론가들 사이에서 "북한에 회령 출신의 나운규가 있다면, 남한에는 대구 출신의 이규환 감독이 있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이 감독이 한국 영화사에 남긴 족적은 크다.◆영화를 동경했던 소년이규환은 190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보정학교와 휘문의숙을 다니다 대구로 내려와 계성중에 편입했다. 학창시절부터 극장가 주변에 머물며 무성영화의 변사(辯士) 흉내를 내는 등 영화에 관심이 컸다. 계성중 재학 당시 3·1운동에 가담했던 이규환은 경남 밀양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가 대구로 돌아온 후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품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에서 3·1운동이 벌어졌을 당시의 옛 기사를 살펴보면 '이규환'이라는 이름이 최연소(15세)로 이름이 올라 있다. 체포된 인물이 영화감독 이규환과 같은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이가 같고 행적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어쨌든 이규환의 3·1운동 참여는 훗날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상력의 모티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영화에 대한 열정은 이규환을 조선 밖으로 이끌었다. 1923년 영화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향한 이규환은 도쿄의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서 기초 수련을 받았으며, 1927년에는 미국 할리우드행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28년 일본 교토 신흥키네마촬영소에 들어가 3년 가까이 연출수업을 받은 후 영화인으로서 역량을 다졌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대가 이규환의 감독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임자 없는 나룻배'의 배경은 고향 대구다. 1932년 단성사가 개봉한 '임자 없는 나룻배'는 대구 달성 사문진나루터에서 촬영됐다. 이는 탄탄했던 대구의 영화 제작 기반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시 대구에는 1922년 조선 자본으로 지어진 만경관 극장이 자리해 있었으며, 이 극장을 중심으로 영화계의 인적·물적 자원이 집중됐기 때문이다.'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표현할 수 없던 민족의 아픔을 우회적인 상징 기법을 통해 보여주었다. 현대 문명의 상징인 철도와 뱃사공을 통해 나라를 잃은 국민의 비애를 보여주는 등 당시 시대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국내 1세대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 중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과 더불어 대표적인 사실주의 영화다. 뱃사공 부녀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침탈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열차는 '문명의 이기', 나룻배를 통해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뱃사공은 '조선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대변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족의 비애를 담은 리얼리즘의 출발점이 '아리랑'이었다면 '임자 없는 나룻배'는 '아리랑'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이규환 역시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자 없는 나룻배'에 대해 "항일정신과 문명비판을 다뤄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영화 개봉 당시 변사들이 일본 경찰을 '검둥이'로 표현하다 고초를 겪었다는 일화는 감독이 영화 속에서 의도했던 바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임자 없는 나룻배'의 캐스팅도 화려하다. 당대 최고 배우 나운규가 출연했으며, 당시 16세로 훗날 무성영화계 스타로 떠오른 문예봉의 데뷔작이다. 특히 나운규는 '아리랑' 이후 조선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후속 작품의 흥행 부진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각종 스캔들에 휘말리며 어려움을 겪던 나운규는 이규환이 메가폰을 잡은 '임자 없는 나룻배'를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역사의 변곡점마다 영화 발전 기폭제를 터트리다특히 이규환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 등 역사의 변곡점마다 국내 영화 발전의 기폭제를 터트린 대표적 영화인으로 거론된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개봉한 '나그네' 또한 '임자 없는 나룻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리얼리즘 영화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대의 영화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이규환은 광복 후에도 한국영화의 부활을 이끈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이규환의 1946년 작품인 어린이 영화 '똘똘이의 모험'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피폐했던 국내 영화계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이규환은 1955년 사극 영화 '춘향전'을 통해 전후 한국 영화 중흥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춘향전'은 서울에서만 12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당시 기준으로 대단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김종원 평론가는 "이규환은 국내 영화 역사의 전환기마다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춘향전'은 한국 영화도 외국 영화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춘향전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사극 열풍이 불었고, 예술성에 중점을 둔 문예영화의 부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규환의 리얼리즘 영화는 후대의 감독들에게도 계승됐다. 한국 고전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오발탄'(1961)의 유현목 감독이 '춘향전'의 조감독으로 이규환 감독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역사의 굴곡을 넘어최근에는 이규환이 일제강점기 친일활동에 가담했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당시 시대 상황으로 미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란 의견이 평단의 대체적 평가로 보인다. 이규환은 서광제 감독의 1938년 친일영화 '군용열차'의 시나리오 집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김종원 평론가는 "이규환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큰어른이다. 당시를 살아간 누구에게나 굴절된 모습이 있을 것이다. 종합예술로 분업이 필수적인 영화의 특성 때문에 이규환도 어쩔 수 없이 (친일영화 촬영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친일영화) 시나리오 집필에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이규환 감독의 역사적 평가를 절하시킬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규환 감독 등 문화계에 족적을 남긴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계명대 언론광고학부 서정남 교수는 "대구는 영화에 대한 뿌리가 깊은 도시다. 앞으로 '성파 영화제'를 만드는 등 지역문화의 원형을 보존하고 기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공동기획 대구광역시▨사진 출처=대구문화재단·영남일보DB ▨도움말 =김종원 영화평론가·서성희 대구영상미디어센터장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 주막촌 입구에 세워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촬영지 표지석. 〈영남일보DB〉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 주막촌 입구에 세워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스틸컷. 〈영남일보DB〉
2021.03.15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5>] 김상규, 법관 되라는 부모 뜻 불구 무용가 길 선택…일본서 현대무용 배우고 귀국 후 신무용연구소 설립
여성들이 무용하는 것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았던 시기, 대구 현대무용의 기반을 만들어나간 남성 무용가가 있었다. 무용가 김상규(1922~1989)다. 김상규는 현대무용의 개념을 정립해나가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고, 무용 교육가로서 무용을 발전시키는 데도 힘썼다. 그는 전국 최초의 국공립현대무용단인 대구시립무용단이 만들어지는 데도 역할을 했다. 남성 무용가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김상규의 무용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무용가 활동 힘든 시기현대무용 개념 정립하고국공립무용단 창설 도움◆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무용가김상규는 1922년 5월25일 군위에서 부농인 김병호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그는 1934년 대구로 유학 와 수창초등을 다녔다.김상규가 무용에 눈을 뜨게 된 건 1935~36년쯤이었다. 당시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이었던 최승희와 조택원의 대구 공연을 본 김상규의 마음에는 무용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그러나 법관이 되기를 기대했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14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도쿄전기학교와 와세다대 법학과를 다녔지만, 마음 한쪽에는 무용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김상규는 도쿄에 있는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를 찾아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이 됐다.귀국 이듬해인 1946년 5월 김상규는 '김상규 신무용연구소'를 열었다. 49년에는 한국전력(당시 남선전기회사)에 입사해 근무를 시작했으나 무용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는 사무실 옥상에서도 연습했고, 저녁이면 사무실 책상을 치우고, 춤 연습을 하고 연구생들을 가르쳤다. 연구생이 늘어나자 49년 김상규는 첫 번째 발표회를 사흘간 만경관에서 오후 1·8시 두 차례 공연했다. 대구지역에서 생소한 현대무용 공연이었던 탓에 관객과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선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모친의 상심도 컸다. 김상규의 모친은 "아들을 낳아서 판검사 시키려고 일본에 유학 보냈지 춤쟁이 만들려고 보낸 것이 아니다"라며 별세하기까지 아들의 발표회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발표회에서 연주하는 악사들을 위해 음식을 해와 "우리 아들 공연 잘하게 연주 잘해달라"고 부탁하며 뒷바라지에 힘썼다.◆창작활동 외에 교육자로도 활동김상규는 첫 발표회를 포함해 1978년까지 13차례 개인 발표회를 열고 여러 무용 작품을 발표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키네마극장)에서 주로 공연을 했다. 발표회를 통해 소개된 그의 작품은 크게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킨 작품, 우리 전통문화와 민족성을 담은 작품, 불교적 색채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나뉜다.그는 작품 발표뿐만 아니라 무용발전을 위한 활동도 펼쳤다. 1957년부터 한국예총이 설립되기 이전인 61년까지 경북무용가협회를 만들어 이끌었다. 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결성되면서 한국무용협회 대구경북지부에서도 활동했다. 59년부터 61년까지는 대구대학(현 영남대 전신)에서, 60년부터 62년까지 경북여자사범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등 교육자로서의 활동도 활발했다. 66년부터 88년까지 22년 동안 안동교대에 재직하면서도 그의 창작활동은 이어졌다. 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는 '회귀(回歸)'라는 작품으로 참가해 우수상을 받고, 87년에 대본을 쓴 '산하'(안무 주연희)가 제9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안무상을 수상했다.무용 분야에서 전방위적 활동을 펼쳤던 김상규는 89년 지병으로 안동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세가 악화하면서 경북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그해 숨을 거뒀다.◆다른 예술인과의 교류도 활발1950년대 김상규의 활동에서 눈에 띄는 건 예술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다. 김상규는 6·25 전쟁 당시 대구에서 설치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에 참여하며 시인 조지훈·구상·모윤숙·유치환·이영도·마해송 등의 문인을 비롯해 무용가들과 활동했다.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면서 공연 연습으로 바빠지자 1955년쯤 직장인 한국전력을 그만두고 연구소 활동에 주력했다. 당시 그는 연구소를 마치면, 대구지역 예술인들이 모이는 향촌동 물랑루즈 다방, 돌체다방, 백조다방에 나가 막걸리를 마시며 예술인들과 교류했다.그는 자신이 교류하던 시인 등 문인의 작품을 바탕으로 무용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53년 제3회 발표회 때는 구상 시인의 시로 '희생(犧牲)'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이 '조국을 그리며 희생하는 겨레의 절개를 그린 춤'으로 소개가 되자, 경찰서에 불려가 조서를 받은 후에야 공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활발했던 활동과 무용계에 남긴 업적에 비해 김상규의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혈육 중 현대무용을 했던 고(故) 김소라 대구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의 집에 불이 나면서 보관 중이던 자료들이 상당 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이인석 르리앙 대표가 사진과 팸플릿 등 김상규 무용가 관련 자료를 문화예술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 중인 대구시에 기증했다. 이로써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김상규 무용가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이 대표가 기증한 자료에는 김상규 무용가의 대표적인 활동인 1950년대 무용 발표회의 팸플릿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기증된 팸플릿에 실린 사진으로 당시 김상규의 활동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팸플릿에는 후원사로 영남일보가 이름을 올렸던 흔적도 확인된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공동기획 대구광역시▨참고=한국 근대춤 인물사Ⅰ, 대구시사(1995), 대구예술30년사김상규 작품 '잃어버린 마음'. 1953년 6월4~6일 중앙국립극장에서 열린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 팸플릿.
2021.02.22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4>] 이쾌대...인물 표정묘사·탁월한 조형감각 통해 고난받는 민족현실 적나라하게 표출
대구미술관이 지난 9일부터 오는 5월30일까지 '때와 땅' 기획전의 하나로 '이인성과 이쾌대' 코너를 선보이고 있다. 2011년 12월에도 대구미술관은 4개월간 '이쾌대 원화'전을 열었다. 월북화가인 그는 1988년 정부로부터 해금된 뒤 90년 해금작가유화전(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김용준, 김주경, 김만형, 길진섭, 최재덕, 배운성 등과 함께 처음으로 남한에 소개됐다. 이쾌대는 91년(서울 신세계미술관, 부산 눌원갤러리), 92년(대구 동아미술관), 93년(수원 문화예술회관), 95년(대구 대백갤러리)에 각각 개인전으로 재조명됐다.월북화가 해금조치로 90년 남한에 첫 소개 개인전으로 '재조명'◆남북이 외면한 천재화가이쾌대(1913~65)는 20세기 한국이 낳은 대표적 서양화가이지만, 월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북한에서도 예술·사상적 주류인 '주체미술'에서 밀려나 '민족허무주의'란 비판 속에 금기시됐으나 99년에서야 겨우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념에 의해 남과 북에서 희생양이 된 작가이지만 1930~40년 대 그처럼 많은 유화작품을 남긴 작가는 드물다. 이는 1980년 작고한 부인 유갑봉씨와 아들 한우씨의 노력 덕분이다. 현재 이쾌대의 유화작품은 60점 정도로 드로잉 등을 포함해 300점이 남아있다고 알려진다.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39 웃갓마을에서 태어났다. 1921년 신동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10세 때 대구로 와 한 살 위 같은 학년인 한국 근대 화단의 개척자 이인성과 함께 수창학교를 다녔다. 대구에서의 생활은 5년, 그는 1928년 서울 휘문고보로 진학한 뒤 34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쾌대는 48년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설립했다. 6·25전쟁 때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해 서울에서 북으로 가던 도중 체포돼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됐으나, 53년 휴전 후 남북포로교환 당시 스스로 북을 선택했다. 그는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해 살다가 1965년 위벽에 구멍이 생기는 위천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이쾌대는 창원현감을 지낸 대지주 이경옥의 2남4녀 중 막내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 학자, 화가인 여성(如星) 이명건이 그의 형이다. 그림을 잘 그린 12살 터울인 형은 이쾌대의 정신적 스승이자 멘토였다. 휘문고보에 진학해 야구에 몰입했던 이쾌대는 1학년 담임교사이자 미술교사 장발(장면 전 총리 동생)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는다. 고교 시절 정물화로 '전조선남녀학생전람회' 입선(1930) 및 입상(1932),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등 화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드러낸 그는 33년 유갑봉과 결혼 후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유갑봉은 남편의 드로잉과 회화에 숱하게 등장하는 인물이다. '빨간 외투 입은 여인' '쪽 진 머리 부인' 등 근대미술가 중 부인을 이쾌대만큼 자주 작품 속에 등장시킨 화가가 없을 정도다.◆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의 활동도쿄제국미술학교(현 도쿄 무사시노 미술대) 서양화과 재학 중에는 주로 인물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제국미술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하라츠바회'의 양화전람회에 연속 출품하고, 37년 로쿠호샤(綠包社)전으로 이름이 바뀐 제4회전에 '부인상'(1937)을, 제5회전에 '무희의 휴식(1937)'을 출품해 입선했다. 또 일본 재야의 진보적인 미술가들이 참여한 이과전(二科展)에 출품, 연 3회에 걸쳐 입선(운명·1938, 석양소풍·1939, 그네·1940)했다. 한국인으로서 이과전에 참여한 작가는 김환기, 구본웅, 김종태, 박상욱 등이 있다. 이쾌대는 일본 유학시절 심형구, 김인승, 김학준, 서진달, 장욱진, 박고석 등 한국 유학생과 교류하며 민족적 색채를 띤 백우회(白牛會)에 가입해 활동했다.김영동 미술평론가는 "이인성이 대체로 풍경을 주제로 대상의 감각적 인상 포착에 뛰어난 그림을 그렸다면 이쾌대는 정물이나 인물을 주제로 대상의 메스를 화면구축에 맞춰 충실히 재현하고 구성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쾌대는 인물의 표정 묘사와 균형 잡힌 인체의 비례를 구축하는 데 더 뛰어난 조형감각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이어 "이쾌대는 일제 말까지 관전이나 보수적인 화단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었다"고 했다.39년 귀국한 그는 왕성하게 활동했다. 41년엔 이중섭, 최재덕, 문학수, 김종찬, 김학준, 진환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 결성을 이끌었고 43년 첫 개인전(서울 화신화랑), 44년 10인전(서울 종로화랑)을 여는 등 암울했던 민족의 한과 울분을 향토색 짙은 회화로 표출하고자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군상시리즈'는 해방공간 1947~48년작으로 추정된다. 49년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선정돼 작품 '추과'를 출품했다.이중희 미술평론가는 이쾌대를 대구에서 '향토회' 창립을 주도한 김용준과 형 이여성과 함께 '지역(대구경북)' '그림' '민족주의' '월북'이라는 공통분모 속에 넣고 있다. 그는 고난에 처한 민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회화사에서 이쾌대를 '독보적인 존재'라고 평가하고 있다.광복 후 이쾌대는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서양화부 위원장을 맡는다. 오광수 미술평론가에 따르면 47년 2월호 '신천지'에 '북조선미술계보고'를 쓴 점으로 미뤄 이즈음 전 그가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쾌대는 북한에서 미술이 이데올로기의 전위가 돼 선전·선동 도구로 전락했음에 실망하고, 47년 순수 창작활동을 지향하는 '미술문화협회'를 창립한다. 이쾌대를 중심으로 이규상, 김인승, 홍일표, 박영선, 이봉상, 남관, 이인성 등 비교적 온건한 작가들이 참여했다.이 무렵 이쾌대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설립하고 미술 지망생들을 지도했다. 물방울화가로 유명한 김창렬(2020년 타계)을 비롯해 김서봉, 김숙진, 이용환, 심죽자, 전뢰진 등이 제자들이다. 김창렬은 2011년 대구미술관의 '이쾌대 원화'전에도 들렀다. 이쾌대는 서울 남산에도 본격적인 미술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월북 이후 작품과 사후 평가월북 이후 이쾌대는 조선미술가동맹 소속 화가로 활동했다. 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에 '삼일운동'을 발표하고, 전국미술전람회에 '농악'을 출품했다. 58년 월북화가 김진항과 함께 중국 인민지원군 우의탑에 벽화를 제작했으며, 61년에는 국가미술전람회에 '송아지'를 출품해 2등상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남한에 남은 이쾌대의 유작은 '군상Ⅰ(해방고지)Ⅱ Ⅲ, 군상Ⅳ(조난)'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부인도' '봄처녀' '무희의 휴식' '걸인' '부녀도' '상황' '2인 초상' '이여성 초상' 등 회화와 수백여점의 드로잉이 있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이쾌대의 작품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민족적 정서를 강하게 드러낸 경향으로 일관했다. 특히 해방공간에선 사회의식이 반영된 현실적 주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군중을 주제로 한 인물작품과는 달리 한국인 특히 여인의 이상적 모델을 추구했다. 정물이나 풍경도 간간이 있지만 모티브의 중심은 인물"이라고 했다. 또한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긴 점에서 한국화가라는 자부심과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윤범모 미술평론가는 "해방공간 이쾌대는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신시대 회화운동을 강조한 바 활동상은 독보적이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시대 상황과 직결되면서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을 예술적 토대로 구축했다. 구체적 도달점은 낭만주의와 진보적 리얼리즘이며, 그 정점에서 독자적 예술세계를 이끈 대가형 화가"라고 평가했다. 한편, 대구 북구와 경북 칠곡군이 '이쾌대미술관' 건립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통일 후 남북통합과 화합의 예술적 상징 인물로 그만한 화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참고문헌=대구미술 100년사 <대구미술협회>, LEEQUEDE <DAEGU ART MUSEUM>,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 <이중희·동아문화>, 대구독립운동사 <광복회 대구지부>이쾌대 '군상(조난)'이쾌대 '2인 초상'
2021.02.15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 서병오…대구 출신 '해동제일' 서화가, 中·日 예술가도 칭송
대구가 낳은 대표적 예술가 중 서화가로는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가 단연 우뚝하다. 당대에 그와 필적할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난 삼절(三絶)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대구·경북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걸출한 문인이자 예술가이며, 중국과 일본의 최고 지식인·예술가들도 탄복하게 한 서화가였다. 그들은 이런 서병오를 '화국지재(華國之才)'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며 칭송했다.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린 걸출한 예술가서병오는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데다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 덕분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 아래서 어릴 적부터 학문과 예술을 두루 섭렵,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10대 후반의 서병오를 처음 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그 재능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인 '석파(石坡)'에서 '석' 자를 떼어 '석재(石齋)'라는 호를 지어주고 침실까지 같이 사용할 정도로 아꼈다. 서병오가 설립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에 왕래하던 문인 중 한 사람인 춘원 이광수는 그를 '희대의 천재'라며 찬탄했다.서병오는 시·서·화는 물론이고 거문고(琴), 바둑(棋), 장기(博), 의술(醫), 구변(辯)에도 뛰어나 '팔능거사(八能居士)'라 불렸다. 이 모든 분야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서화가 구룡산인 김용진(1878~1968)은 "역대 사군자를 논하는 데 있어 석재의 사군자는 추사나 석파에 비할 바가 아니다"고 평가했다. 사군자화 중 대나무 그림은 그 이전의 묵죽과는 확연히 다른, 거침없고 호방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해 일가를 이루었으며 '석재죽(石齋竹)'이라 불리었다. 그가 우리나라 문인화 발전에 끼친 공로는 조선 전기의 탄은(灘隱) 이정(1554~1626),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의술에 대한 조예 또한 깊어 중국에서까지 '조선의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다.서병오는 이처럼 다방면에서 워낙 뛰어나 살아서 이미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이런 그는 당대 중국과 일본의 최고 지식인들도 놀라게 하고, 그들은 다투어 서병오와 사귀려고 했다. 서병오는 1898년과 1908년 두 차례 중국으로 건너가 수년 동안 상하이, 쑤저우, 난징 등 곳곳을 주유하며 제백석(齊白石), 오창석(吳昌碩), 포화(蒲華), 손문(孫文) 등 유명 서화가와 정치인 등을 만나 교유하게 된다.중국에서도 서병오의 재능은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저절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흥취가 오른 서병오가 즉흥 자작시를 지어 화제로 쓰곤 할 때마다 탄복하며 '한국의 두보요 이백'이라 평가했다. 중국 대가들의 서화를 바로 자신의 색깔로 소화해 내는 것을 보고는 '여시필적(汝是筆賊)'이라며 부러워했다. 중국 주유는 그의 서화 수준과 차원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그는 일본에도 3차례 건너가 일본의 석학·예술인들과 문묵(文墨) 교류를 통해 그들을 감탄시킴으로써 '세기의 위재(偉才)'라는 격찬을 받았다.◆흥선대원군의 각별한 사랑서병오는 1862년 6월 대구 동성로에서 대부호인 서상민(1833~1918)의 4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나중에 숙부 서상혜(1837~1909)의 양자로 들어갔다. 숙부 역시 만석꾼 부자였다.어린 시절 '서동(徐童)'으로 불리던 그는 남달리 총명했다. 그의 제자 신대식(1918~1985)은 '어려서부터 비범·총명하였고, 취학하니 초륜(超倫)하여 일문(一聞)하면 해오(解悟)요, 일견(一見)이면 강기(强記)하여 제예(諸藝)에 있어서 능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절세(絶世)의 천재라 하였다. 10세 미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시·서·화·기(詩·書·畵·棋)에도 초인적 재조(才操)를 여지없이 발휘해 세인을 놀라게 했다'고 표현했다.1874년에는 당대의 대표적 서예가인 팔하(八下) 서석지(1826~1906)에게 중국과 우리나라 명가의 글씨를 배우게 된다. 서석지에게 서예를 배우던 무렵 그는 영남의 거유(巨儒)이자 문장가인 방산 허훈(1836~1907)과 면우 곽종석(1846~1919)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과 문장도 연마했다. 남달리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석재는 부친의 각별한 교육열 속에서 여러 석학과 예술 대가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아들이면서 그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런 그의 실력과 재능은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0대 후반에는 서울까지 그 소문이 났다. 당시 풍류와 권세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 운현궁의 흥선대원군 귀에도 그런 소식이 들렸던 모양이다. 1879년 대원군은 그를 운현궁으로 불러들였고, 그에게 '鴨東初有之才(압동초유지재: 압록강 동쪽에서는 처음 난 인재)'라는 글씨를 비단에 써 주고, 중국 명필의 진품을 선물하는 등 각별하게 아꼈다.◆'대구삼절(大邱三絶)'로 유명서병오는 1922년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창설한다. 1922년 1월22일 첫 총회를 열어 발족한 교남시서화연구회는 1922년 5월 제1회 전람회를 열었다.교남시서화연구회는 대구 문화를 활성화한 주요 거점이었다. 후진 양성뿐만이 아니었다. 전통 시서화 교양을 지녔거나 애호하는, 대구를 비롯한 전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교류하는 장이 되었다. 전람회와 휘호회, 한시 공모전 등을 통해 지역 간 시서화 교류가 이뤄지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이런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전국 명사들이 모이는 명소로 발전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당시 '대구삼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달성토성(달성공원)과 석재 서병오, 명기 염농산이 대구삼절이다. 대구를 찾는 사람들은 이 삼절을 접하기를 원했는데,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찾아가야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서병오는 1906년 대구 자강단체인 광문사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07년 금연상채회(禁烟償債會) 평의원이 되어 국채보상운동 발기인 17인으로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1930년에는 이육사가 그의 제자로 입문했다. 1932년에는 대구 유림 강회소인 문우관(文友觀) 관장을 맡기도 했고, 1933년 7월에는 대구 유지들과 함께 서양화가 이인성을 위한 전시회 '천재 소년화가 이인성군 개인전'을 열어주었다.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불우하게 보낸 서병오는 1936년에 별세한다. 1936년 3월30일 자 동아일보 보도다. '대구의 한시서화 거벽인 석재 서병오옹은 향년 74세를 일기로 28일 정오에 동성정(東城町)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씨는 작년 말부터 노환으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던 바 이번에 그와 같이 별세한 것이라 한다.'서병오는 '내가 죽거든 관 위 명정에는 진사나 신령군수 등 관직은 쓰지 말고, 석재서병오지구(石齋徐丙五之柩)라고만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서병오는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 서화가였지만, 대구에 지금까지 그의 기념관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를 아는 대구 서화가들은 물론이고 전국 다른 지역 예술인들도 이런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석재 서병오 작 '노근란'. 1910년 작품으로 항일의 의미를 담은 작품으로 해석된다.석재 서병오 작 '냉로무성'. 1910년대 작품.1983년 6월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석재서병오선생예술비'. '석재(石齋)'의 '석(石)'자를 형상화했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2021.02.01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 홍해성…대한민국 최초 근대극 연출가, 사실주의 도입
홍해성(본명 홍주식·1894~1957)은 대구가 낳은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극 연출가다.사실주의에 입각한 연출을 처음 도입해 서구 근대극 수용의 기틀을 잡았고, 신연극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싹 틔우기 위해 일생을 던진 국내 연극계의 큰 별이다.1910년대와 1920년대에도 연출가 역할을 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개 독자적인 연출가이기보다는 배우에다 극단 단장이나 기획·운영을 겸한 지도적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는 유명 배우가 중심이 되던 시기였다. 홍해성은 한국 연극사에서 1930년대 초 연출가의 존재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대한민국 근대극의 선구자이요 선각자이다.◆법학도에서 연극 연출가로애초 그는 법학도였다. 대구 덕산동 229번지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 대구 대남학교, 계성중을 다닌 그는 법관의 뜻을 품고 일본 쥬우오(中央)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하지만 유학시절 극작가 김우진을 만난 것이 계기가 돼 법학도에서 연극인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홍해성의 제자인 고(故) 고설봉 배우의 증언에 따르면 홍해성과 절친했던 김우진이 "식민지 청년이 법학을 공부하면 성공한다고 해도 동족 차별밖에 더하겠는가. 자신은 극장 운영을 공부해 조선에 돌아가서 가산을 처분, 극장을 짓겠으니 그곳에서 활용할 연극 지식을 공부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렇게 홍해성은 일본대학 예술학과로 편입해 연극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이후 김우진과 와세다대학 동창이자 일본 근대극 배우로 명성이 높았던 도모타의 도움으로 일본 근대극 최고 극단인 '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 입단한다. 축지소극장이 결성된 1924년 6월부터 극단이 분열된 1929년 3월까지 약 5년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연출과 연기 수업을 받으며 전속배우로 활약했다. 직접 출연한 작품이 초연만도 50여 편에 이르고, 재출연까지 합치면 80여 편에 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26년 절친 김우진이 현해탄에서 유명을 달리하면서 홍해성은 실의에 빠졌고, 두 사람이 조선에서 함께 이루려 했던 연극에 대한 꿈도 수포로 돌아갔다. 김우진이 살아있었다면 홍해성이 국내 연극계에서 미친 영향력과 입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근대극 발전 토대 '극예술연구회'홍해성은 일본 축지소극장의 창설자이자 그의 연극 스승인 오사나이가 죽자 단원이 양분되면서 1930년 6월에 귀국한다. 그의 귀국 소식에 조선 문화계는 크게 환영했다. 그해 8월 동향(同鄕)의 시인 이상화의 지원을 받고 경성소극장 창단을 시도했으나 이상화의 출자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실패하기도 했다.1930년대 전반기는 우리나라 연극시장에서 대중극이 널리 공연되던 시기였다. 대중극은 극본의 부족, 신파조 연기, 부실한 무대장치, 막간 여흥의 지나친 확대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홍해성은 종래 신파극을 비판하고 새로운 연극의 필요성을 전제로 근대극 운동을 벌였다. 1931년 7월 결성돼 신극(사실극·연구극) 발전을 주도했던 '극예술연구회'(이하 극연)는 우리 연극사에 있어 진정한 의미의 근대극을 이룬 시발점이 된다.극연은 1920년대 후반기 일본에서 유학했던 지식인들이 발족한 단체다. 홍해성을 비롯해 윤백남, 서항석, 김진섭, 이헌구, 이하윤, 장기제, 정인섭, 유치진, 조희순, 최정우, 함대훈 등 12명이 발기 회원이었다.홍해성은 극연의 초기 연출을 전담했다. 극연에서 첫 연출한 작품인 고골리의 '검찰관'을 시작으로 어빙의 '관대한 애인', 그레고리 부인의 '옥문' 등 총 9편을 연출했다. 극연에서 홍해성의 연출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근대극 수립의 토대와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연출한 번역극은 일본 축지소극장 배우 시절에 직접 출연했던 작품이어서 모방과 재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도 있지만, 이는 신극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평가도 있다.◆동양극장 전속 연출가로 자리 옮겨홍해성은 1935년 11월 당시 조선 최고의 흥행극단인 동양극장이 설립되면서 연출부와 극장 지도자로 자리를 옮긴다.동양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 전속극단을 조직하고 배우 월급제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1943년 사임할 때까지 전속 극단인 청춘좌 등에서 총 6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그런데 극연의 활동을 주도했던 홍해성이 극연과 성격이 다른 동양극장으로 옮긴 까닭은 무엇일까.권원순 홍해성 선생 기념사업회장·미술평론가는 홍해성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기념 세미나 주제발표에서 "이는 홍해성이 동양극장으로 옮겨가기 직전인 1935년 7월 조선일보에 '극장을 가지자'라는 기고글에서 답변의 단서를 짐작할 수 있다"면서 "동양극장의 영입 제의를 수락한 것은 생계 해결과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된 극장의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욕구가 맞물린 결과로 추측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동양극장의 연극은 홍해성이 연출을 담당하면서 흥행을 위해 상업성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나 신파극 식의 낡은 연출 스타일을 개혁하고 사실주의 연극 방법론을 도입해 대중극의 낭만주의와 조화시켰다.그는 1943년 10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연출 활동을 중단한 채 칩거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광복 이후에도 연극계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서울 신촌에서 생활하며 서라벌 예대 강의와 학생 연극 지도에 힘썼다.1957년 7월 국립극장 환도기념 공연인 칼 쇤헬의 '신앙과 고향' 연출을 끝으로 그해 심장마비로 타계한다.◆별명은 시곗바늘, 무대의 호랑이홍해성은 공연할 작품의 연출 대본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만들어 배우에게 언제나 그대로 연습하도록 지도했다. 화술과 동작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으며, 개성을 잘 드러내는 분장법을 직접 지도하고 때로는 손수 해줘 당시 동양극장 배우들은 분장 실력이 매우 앞서 있었다고 한다.1937년 극단 '청춘좌'에 입단했던 고(故) 고설봉 배우는 "홍해성의 별명은 시곗바늘, 무대의 호랑이였다.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낮 공연은 오후 1시, 밤 공연은 오후 7시로 개막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실시했던 영향으로 당시 조선의 모든 극단에서 개막 시간을 엄수하는 관행이 정착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발췌 및 참고=우리 연극 100년, 홍해성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기념세미나 주제발표 자료, 홍해성연극상 시상식 팸플릿공동기획 : 대구광역시홍해성이 연출한 작품. 〈제1회 홍해성연극상 시상식 팸플릿〉
2021.01.18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 이상화..."문학인은 삶을 기록하고 민족언어 지켜야" 시대의 감옥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친 항일시인
영남일보는 새해를 맞아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연재를 진행한다. 문학·미술·음악·영화·무용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며 대구 문화예술의 토대가 된 인물들을 기사를 통해 한 명씩 소개한다. 그 시절 대구 문화예술 선구자들의 이야기는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대구라는 도시를 더욱 매력적이고 예술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즐거움이자 의무다.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첫 번째 순서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대구 출신의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 시인이다.◆대구서 태어나 대구에 잠들다때로는 결기 어린 저항시로, 때로는 감각적인 낭만시로 국민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 이상화.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상화는 1901년 4월5일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상화'(尙火·想華)는 그의 호다. 상화의 맏형이 바로 독립운동가인 이상정 장군이다.그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 사람은 스스로 태어날 시대를 정할 수 없다지만, 하필이면 그 암담하고도 서글픈 시절을 살아야 했던 시인, 지식인의 삶은 어땠을까.상화는 고뇌하고, 방황하고, 저항했다. 1923년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머물렀던 상화는 그해 9월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상화는 '도쿄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 도회의 호사로운/ 거리에서/ 나는 안 잊히는 조선의 하늘이/ 그리워 애달픈 마음에 노래만/ 부르노라"라고 읊조린다.1928년 6월 대구에서 한글의 첫 글자를 딴 이른바 'ㄱ당 사건'(신간회 출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차용·장택원 등이 달성군의 한 부호를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이 터지게 되고, 이 사건에 연루된 상화는 당시 대구경찰서에 구금돼 고초를 겪는다. 그 시기 상화는 자신의 집 사랑방을 '담교장'이라고 불렀는데, 그곳에는 많은 항일 인사들이 출입했다고 한다.1935년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에 갔다 귀국한 상화는 그 후로도 한 차례의 구금과 한 차례의 가택 수색을 당해야 했다. 그는 숙환으로 투병하던 중 1943년 4월25일 만 42세의 나이에 대구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한 채였다. 상화는 사망 두 달 전 친구 백기만에게 "집필하려던 국문학사를 탈고해놓고 죽었으면 했는데, 그것도 틀린 모양"이라고 토로했다.일제강점기라는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감옥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 구절 속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처럼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이었다.◆상화의 작품, 그리고 상화의 흔적들"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누어져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누어져 생각하고 사느니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나 되자."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이별을 하느니'의 한 구절이다. 이상화고택, 수성못에 세워진 시비를 통해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이다.상화가 남긴 시는 시조를 합쳐 60여 편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성격을 시기별로 나눠보면 1922~1923년은 관능·낭만적, 1923~1926년은 경향파적, 1926년 이후는 저항적인 것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상화는 '개벽' 58호에서 자신의 문학관을 이야기한다. "인생의 삶은 충동의 연속이며 충동은 곧 생활 그 자체로서 그것을 기록해 가는 것이 시다."윤장근(1933~2015) 소설가는 저서 '대구 문단 인물사'에서 상화의 시와 문학관에 대해 "문학인은 삶을 기록하기 위해 남다른 책임이 있어야 하고, 그 책임은 곧 민족 언어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 상화의 지론이었다. 또 시인이란 사상의 비판자이며 생활의 선구자이기에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상화의 문학관이 이러하기에 조국 상실을 비통해하는 민족시인으로서 자리 잡을 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이상화 '시인에게' 중) 그렇게 상화는 마지막까지 조선의 땅과 말을 사랑했던 시인이었다.2020년 현재까지 대구 곳곳에 남은 시인의 흔적을 통해 그의 문학적 감수성과 탁월한 감각, 올곧은 저항정신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 상화의 기질은 현재를 살아가는 대구시민의 기질 어딘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이하석 대구문학관장은 "상화는 역사적으로 험난하고 혼란한 시기를 살면서 예술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한 시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두운 현실을 문학을 통해 드러내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쳤다"며 "이 같은 그의 삶은 대구시민이 이상화 시인을 더욱 아끼는 이유가 됐다"고 말했다.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참고='대구 문단 인물사'(윤장근)공동기획 대구광역시이상화와 형제들. 상화(앞줄 왼쪽)는 1901년 4월 대구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문학관·영남일보DB〉이상화(왼쪽) 시인이 중국에서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 함께 찍은 사진.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실루엣만 나오도록 찍어야 했다. 〈출처 정혜주 작가〉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고택.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기거한 곳이다. 노진실기자
2021.01.04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대구권 의대 교수 8명 사직서 제출…정부 대화 촉구에도 의료계 강경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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