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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11] 상주향교, 고려 말 최자의 보한집 최초의 기록...창건은 훨씬 이전 추정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유교의 근본 문헌인 논어의 첫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배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禮)다. 공자가 말하는 예는 주나라의 문물, 사상, 제도, 전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는 곧 문(文)이기도 하다. 공자는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고,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수와 혁신이 공존하는 이러한 유교의 가르침을 외적 질서로 드러낸 곳이 바로 오래된 학교, 향교다. 기교는 없다. 엄격한 질서의 체계는 지엄하나 경직되지 않았다. 질서란 지배적 위계가 아닌 예(禮)로 이루어진 위계다. 상주향교정면 5칸 대성전 국내 세번째 규모조선 중기 건립 당시 원형 잘 간직#1. 상주향교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높고, 또한 남루가 높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2층 구조인 남루는 1층의 가운데 3칸이 누하문으로 상주향교의 외삼문 역할을 하고 있다. 저절로 허리를 굽혀 누하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천천히 명륜당이 떠오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양쪽에는 정면 5칸의 동재와 서재가 단정하고 고요하게 정좌해 있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맹자의 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이곳에서 90명이나 되는 많은 학생들이 공부했다고 한다.명륜당 뒤로 내삼문이 높이 서 있다. 담장으로 구분된 일곽 안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자리한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울 문묘 및 성균관 대성전 다음으로 큰 규모다. 돌을 다듬어 높은 기단을 쌓고 원형의 초석을 놓아 원주를 세웠다. 전면의 반 칸은 퇴칸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가운데 어칸에는 쌍여닫이문, 좌우 협칸에는 외여닫이문을 내었다. 내부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동무와 서무는 정면 10칸, 측면 1.5칸으로 서울 문묘와 경주향교 다음으로 큰 규모다. 기단과 처마도리를 경사지에 맞춰 건물 전체 높이는 같게 하고, 양쪽 끝에 처마도리를 받치는 보조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인방재가 가로·세로로 이루어진 격자형의 골격에 회벽으로 마감한 벽면에 최소한의 창호를 두었다. 대성전과 동·서무는 조선중기에 중창된 뒤 위치의 변경이 없다. 몇 차례의 수리과정이 있었지만 규모와 구조, 형태는 조선 중기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상주향교의 대성전과 동·서무는 지난해 말 보물 제2096호로 지정됐다. 상주향교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상주향교 관련 기록이 최초로 나타나는데 창건은 훨씬 더 이전으로 추정된다. 상주는 고려와 조선시대 동안 상주목으로 경상도 지역의 행정, 사법, 군사의 중심지였다. 때문에 고려 성종 6년인 987년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성종 11년인 992년에는 경학박사 전보인(全輔仁)을 교수로 임명하여 학문을 부흥케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 8년인 1426년에 판목(判牧) 조치(曺致)가 남루(南樓)를 세우고 홍여방이 기(記)를 썼다고 한다. 성종 15년인 1485년에는 목사(牧使) 강구손(姜龜孫)이 성전(聖殿)과 재(齋)와 루(樓)를 중수했다. 하지만 상주향교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 전란 후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목사 정호선(丁好善)이 정경세와 더불어 중수하고 이준(李埈)이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고종 29년인 1892년에 목사 유병주가 다시 중건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의 중수와 보수가 있었다고 전한다. 1949년 9월 1일, 상주향교는 '상주고등공민학교'가 됐다. 1950년 제1회 입학식을 치렀고, 이듬해 '남산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수업을 시작했다. 명륜당은 교무실로 쓰였고 규모가 큰 동무와 서무는 교실로 사용됐다. 그러던 중 1961년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 후 1989년 내삼문 신축, 1991년 명륜당 복원, 1992년에 서재 복원, 1994년 고직사 이건, 1995년 외삼문 신축 등이 이루어져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향교의 규모는 대개 고을의 크기와 비례하는데 건물이 지어진 형식과 규모에 따라 대설위(大設位), 중설위, 소설위의 3등급으로 나누어진다. 상주향교는 대설위 향교다. 또한 경사가 심한 대지를 4단으로 조성한 입면구성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정형화되고 엄격한 배치구성이 돋보인다. 외삼문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위계의 질서는 스스로를 다잡는 긴장을 낳는다. 질서 속에 정좌한 평안한 긴장이다. 대성전 앞에 서면 시선은 마당의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내삼문과 명륜당의 지붕 위로 펼쳐지는 세계와 마주한다. 가슴이 시원하다. 상주향교는 지금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성전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학덕을 추모하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고 있다. 함창향교1417년 조선 태종때 현위치 이건임란 겪으며 소실 여러차례 중수3단 대지에 '전학후묘' 건물 배치#2. 함창 향교상주의 북동부에 위치한 함창읍(咸昌邑)은 아주 옛날 고령가야국(古寧伽耶國)이었다. 신라 시대에는 고동람군, 고령군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현종 때 상주목에 귀속되어 함창이라 했다. 고려 명종 2년인 1172년에는 따로 감무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현령이 파견되는 독자적인 지역이 됐다. 함창읍 교촌리의 경사진 언덕에 함창향교가 자리한다. 초입의 도로가에 함창향교 표지석이 서 있는데 뒷면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사욕과 욕망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민가들을 지나 가파르게 굽어 올라가는 길 가에 외삼문이 높다. 계단 위 솟을대문이라 더욱 높게 느껴진다. 함창향교는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에 객관이 있던 구향리 언덕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고 태종 17년인 1417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을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다시 구향리로 옮겨지었는데, 인조 14년인 1636년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한 번 옮겼다고 한다. 1907년에 현감 이종호(李鍾浩)가 명륜당을 중수했고, 1972년부터 1987년까지 동재와 서재 및 명륜당을 크게 수리했다.내부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명륜당이 자리한다. 경사진 땅을 3단으로 조성하고 남북 축선을 기준으로 남쪽에 명륜당, 북쪽에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 형식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세 칸은 대청, 양쪽 끝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은 누각 형식으로 당당하고 대성전과 마주하는 후면은 단층으로 경사지를 이용한 겸양이 드러나 있다. 대성전 영역은 아주 높다. 내삼문의 맞배지붕 위로 대성전의 맞배지붕이 크고 가지런하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툇간을 설치하고 내부는 장마루를 깔았다. 어칸은 넓은 편으로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양쪽으로 자리해 사각의 안마당을 형성하는데 흔하지 않은 구성이다. 동재와 서재는 석축을 높이 쌓고 정면 2칸, 측면 2칸의 건물을 올렸다. 강당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지만 두 칸의 방에 각기 다른 크기의 문을 달아 조형미가 돋보인다. 외삼문 밖에서 담벼락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향교 관리를 위한 건물과 전사청이 있고 전사청 옆으로는 안마당과 대성전 영역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협문이 있다. 현재 상주 함창 향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한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화재청 누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상주향교 명륜당. 강학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명륜'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상주향교의 제향 공간인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서울 문묘 및 성균관 대성전 다음으로 큰 규모다.상주 함창읍 교촌리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함창향교. 길 옆 고목은 평온한 그늘을 만들고 계단 위 외삼문은 높다. 함창향교는 1398년(태조 7) 객관이 있던 구향리 언덕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함창향교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툇간을 설치하고 내부는 장마루를 깔았다.함창향교 내부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명륜당이 보인다. 누각형식의 전면이 당당하다.
2021.09.13
[인재향 영양. 6]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 오극성·윤성 형제의 탁월한 지략 '난형난제'
큰 내가 흘러 대천이라 했다. 산들이 가까이 늘어서 있지만 들은 부족함 없이 느껴진다. 대천1리 황골 버스정류장 옆으로 좁은 개울을 따라 들어간다. 가지런히 경작된 밭 한 배미를 지나면 산줄기가 동그마하게 내려앉은 자리에 오래된 집이 보인다. 오극성(吳克成) 고택이다. 오극성은 임진왜란 때 아우인 오윤성(吳允成)과 함께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왜적과 싸울 때 형제는 바로 그곳에 있었고, 두려움 없는 기개와 비범한 지혜로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형제의 무훈(武勳)을 난형난제라 칭송했다. 이순신 휘하에서 왜에 맞서 싸워형제가 병법을 익혀 전략도 제시임진왜란때 전국 곳곳서 공 세워사람들은 형제를 '난형난제' 칭송선조때 선전관으로 있던 오극성자진해 전투 벌어지는 전국 돌며전쟁상황 조정에 보고 극찬 받아노량해전땐 군복 허수아비 세워낙향후 문월당서 詩와 술로 보내마음속에는 나라·백성 안위 걱정명량대첩 승리에 일조한 오윤성수십 척의 어선을 군선으로 위장수적 열세극복하고 왜군 물리쳐#1. 오극성·윤성 형제오극성은 명종 14년인 1559년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다. 할아버지는 조선 초기 창신교위 중부장을 지낸 오필(吳필)이다. 아버지는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지낸 경암(敬庵) 오민수(吳敏壽)로 청계(靑溪) 김진(金璡)과 함께 지역 최초의 교육기관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설립한 선비였다. 어머니는 무안박씨 참봉 박붕(朴鵬)의 딸이다. 오극성은 천성이 영민했고 조용히 학문을 닦는 가운데 틈틈이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무인인 할아버지와 문인인 아버지 모두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극성의 아우인 오윤성은 1563년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립(誠立)이고 호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지략이 출중하고 부모형제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 한다. 형제는 함께 공부하며 자랐다. 임진왜란 전인 1591년 3월 즈음, 영천의 정세아(鄭世雅)가 오극성의 집을 찾아왔다. 당시 정세아는 57세, 오극성은 32세였다. 정세아는 오극성의 책상에 있는 병서(兵書)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선비인데 어째서 군사와 관련되는 책을 그리 많이 읽는가?" "제가 비록 선비이지만 병법(兵法)을 잘 안다면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오극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시 정세아는 무(武)와 거리가 멀었지만 오극성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1592년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극성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전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報倭寇)'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며 더욱 병법을 익히고 몸과 마음을 단련시켰다. 당장 출전할 수 없었던 오극성은 선조를 호위하고 있는 윤두수, 예천에서 창의를 준비하고 있는 류복기, 이미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 일원에서 활약 중인 곽재우에게 편지를 보냈다. 윤두수에게는 병사의 모집과 군량미 비축, 무기 제작 방법에 대해 썼고, 류복기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군사를 일으켜 달라고 당부했다. 곽재우에게는 기습 공격이 아군에게 유리한 전술일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김성일에게도 서신을 보냈는데, 경상도를 지키지 못하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는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1594년 1월15일, 오극성과 오윤성은 권무과(勸武科)에 응시해 나란히 급제했다. 오극성은 말을 잘 타고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 임금을 호위하는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아우 오윤성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보좌하는 수군 장수가 됐다. #2. 난형난제의 무훈(武勳)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최대 격전지에서 싸우고 있는 수군통제사 이순신, 도원수 권율(權慄) 등의 상황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도 적들이 우글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오극성은 자진해서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일반 백성의 옷을 입고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이면 산길 등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서 이동하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국을 순회했다. 목숨을 걸고 어려운 임무를 완수한 오극성은 이 일로 조정의 큰 신임을 얻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 사람 참으로 충신이다'라고 극찬했다. 마침내 오극성은 종9품 선전관에서 종6품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가 됐다. 과거에 합격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1596년에는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부임했다. 그는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던 아우 오윤성은 1597년 명량대첩 때 뛰어난 지략으로 승리에 일조했다. 명량대첩은 단 열세 척의 배로 일본군 330척과 맞붙은 격전이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참모였던 오윤성은 판옥선 뒤에 수십 척의 민간인 어선으로 위장해 뒤따르게 하자는 계책을 낸다. 결국 적들은 조선 수군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1598년에는 오극성도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동생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전했다. 오극성은 해안선을 따라가며 군복 차림의 허수아비들을 세웠다. 적들은 허수아비들을 보고 자신들이 포위된 것으로 착각했고 우왕좌왕하던 끝에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군이 공격을 개시해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오극성·윤성 형제의 무훈(武勳)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난형난제'라 칭송했다.#3. 대천리 오극성 고택과 문월당오극성은 이후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과 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역임하고 1602년에는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시독관(侍讀官)이 됐다. 무과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된 예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즈음 한 고위 관리가 더 높은 벼슬을 제안하며 그의 말을 탐냈다고 한다. 오극성은 '나라의 관직과 재물을 어떻게 사고판다는 것이오' 하며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 대천리로 돌아왔다.현재 대천1리 황골(篁谷)에 오극성 고택이 있고 그로부터 백여 걸음 남쪽에 그의 정자인 문월당(問月堂)이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극성이 정자를 짓고 문월당이라 편액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가 귀향하기 전 이미 저택과 정자가 있었다고도 한다. 이후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자 그는 영양 서부리로 이사했고, 다시 수비면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오극성 고택은 1760년경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개수했다. 고택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문월당은 오래 중건되지 못하다가 1969년에 주손인 오창목(吳昌穆)이 주도해 다시 세웠다. 가파른 비탈면에 기대어 정면과 측면에만 담장을 두르고 오른쪽 측면에 2칸 규모의 대문을 내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측으로 2개의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한 칸 대청을 열었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다. 온돌방 상부에 유리창을 내었는데 근대적인 실용성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오극성의 호 '문월'은 이백의 시 '술잔을 잡고 달에 묻는다(把酒問月)'에서 취한 것이다. 그가 남긴 많은 시문 가운데 '제문월당(題問月堂)'이라는 아름답고 저린 시가 있다. '옛날의 달은 지금의 달과 같은데/ 지금 시절은 옛 시절 아니구나/ 술잔을 멈추고 기다린 지 오래인데/ 봉우리에 솟는 일 어찌 그리 늦나.' 그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날마다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지만, 마음에는 늘 충절을 품고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근심했다. 오극성은 선조 38년인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서훈됐고, 광해군 8년인 1616년 11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그는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내 평생 나라에 보답하기를 다하였으나 죽어도 오히려 한이 남는다. 너희는 부지런히 배우고 입신양명하여 임금 섬기기를 아비 섬기듯 하면 아비의 뜻을 체득한 효도가 아니겠느냐.'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왕명으로 편간된 '이충무공전서'에 '오극성은 무과에 급제한 후 현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진중의 무공으로 녹훈하였다'라고 기술되었다. 오윤성은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으며 1627년에 세상을 떠났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영양군 영양읍 대천1리 황골에 자리한 오극성 고택. 1559년 대천리에서 태어난 오극성은 임진왜란 당시 동생 오윤성과 함께 큰 공을 세운 영양의 인재로, 두 형제 모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적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오극성 고택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있다.오극성 고택에서 백여 걸음 남쪽에 위치한 문월당(問月堂). 오극성의 정자로 문월당은 그의 호이다.
2021.09.07
[인재향 영양. 5] 오시준·수눌 부자…무인 가문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때 왜적과 싸워 큰 공 세워
영양의 일월산(日月山)에서 발원한 반변천(半邊川)은 낙동정맥의 남북 방향을 따라 깊은 골짜기를 그리며 흐르다가 영양읍의 남쪽에 이르러 활처럼 굽이지며 서늘한 단애를 세운다. 직립한 벼랑에는 푸른 측백나무들이 창처럼 솟았고 모감주나무와 털댕강나무가 만군으로 뒤따른다. 단애로부터 점차 물러나 구릉을 이룬 땅은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감천(甘川)'이라 한다. 양편이 산으로 둘러싸였지만 양지 바르고 구릉진 땅의 형세 그대로 집들이 들어 앉았고, 기와를 얹은 흙돌담 길은 부드럽게 울렁인다. 감천마을은 낙안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이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오원로와 그의 아들 오시준(吳時俊)이다. 오원로·시준 부자는 영해에서 대대로 세거하다 영양 감천마을로 입향한다. 시기는 1560년경으로 짐작된다. 특히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감천으로 돌아와 단애 앞에 정자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오시준, 용맹스러운 장군이었고 덕과 애민으로 선정을 베푼 현감 백성들 송덕비 세워 선정 기리기도 임기 후 감천에 돌아와 만년 보내 연소정 짓고 정철·김진 등과 교류"나라님 은덕 입었으니 충성하라" 아들 오수눌도 무과 급제후 활약 김성일·권율·곽재우·정기룡 등과 전공은 다투지 않고 전투에 참여 이원익, 경탄하며 명장이라 극찬#1. 오시준과 연소정오시준은 중종 22년인 1527년 영해에서 태어났다. 자는 언중(彦中)이다.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 장군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 가문이었다. 오시준이 언제 감천에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570년경 감천마을의 뒷산 너머 청기면에 청계(靑溪) 김진(金璡)이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청계가 서당 건립을 주창하고 오시준 등 16인이 발기해 곡물을 출자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을 근거로 오시준의 감천 입향은 그보다 앞선 1560년경으로 짐작된다.오시준은 명종 17년인 1562년 무과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됐다. 그는 체력과 용맹이 뛰어났고 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해 전술과 전략 모두에서 출중한 장군이었다고 전해진다. 선조 12년인 1579년에는 창주진관구(昌州鎭管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이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높이 사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하기도 했다. 선조 17년인 1584년에는 칠원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사로 부임해 덕으로 다스리는데 힘썼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백성들은 '오시준현감애민선정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를 세워 그의 선정을 기렸고, 나라에서는 그의 자질을 칭송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웠다고 한다. 임기를 마치고 감천으로 돌아온 그는 정자를 짓고 소일하며 만년을 보냈다. 그의 정자인 연소정(蓮沼亭)이 마을 앞 반변천 변에 있다. 침벽공원 또는 감천유원지라 불리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숲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간다. 측백나무가 숲을 이룬 단애와 함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오솔길 끝 사각의 석축 위에 흙돌담을 두른 연소정이 자리한다. 정자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반변천이 흐르고 북쪽과 서쪽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서쪽의 밭을 가로지르면 감천마을과 가깝게 연결된다. 사주문에 들어서면 정자의 정면과 대청 문 위 두 곳에 걸려 있는 연소정 현판이 보인다. 기백이 넘치는 글씨다. 연소정은 오랜 세월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연소정기(蓮沼亭記)에 따르면 현재의 정자는 1960년 중양절(重陽節)에 중건한 것이다.감천으로 돌아온 오시준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연소정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과 교류했고 청계 김진과 서로 따르며 의좋은 벗으로 지냈다. 특히 송강 정철은 장군 같은 인재가 벼슬에서 물러나 당세(當世)에 크게 등용하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다. 이미 연로한 그는 둘째 아들인 오수눌(吳受訥)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휘하로 보내며 명했다. '우리 가문은 원래 세세무신(世世武臣)으로 나라님의 두터운 은덕을 입었으며, 나도 무과 급제해 특히 손오병서를 하사(下賜) 받자왔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할 오늘날을 당하여 네가 내 뜻을 대행(代行)하되 반드시 몸 바쳐 나라 위해 충성을 다하라.' #2. 오수눌과 국헌종택오시준의 둘째 아들 오수눌은 1565년 감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이다. 감천마을 안쪽에 삼천지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동쪽 제방의 경사진 사면에는 노송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데 깜짝 놀랄 만큼 멋있는 나무들이다. 제방 길은 근래에 정비했지만 연못과 나무들은 아주 오래 마을과 함께한 듯하다. 연못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낙안오씨 종택인 감호헌(鑑湖軒)이 자리한다. '호수에 자신을 비춰 보는 집'이다. 이곳은 오수눌의 종택으로 그의 호를 따 '국헌종택'이라고도 부른다. 종택은 문중에서 1800년대에 건립했고 현재 남은 건물은 기존의 종택 건물을 철거하고 1960년에 신축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오수눌은 27세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김성일의 휘하에서 왜적과 싸워 여러 번 공을 세웠다. 또한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의 창의에 가담해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수십 명을 참수하기도 했다. 당시 의주(義州)에 몽진해 있던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주건(朱楗)·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니 선조가 감탄했다고 한다. 1593년에는 권율(權慄) 장군의 진영에 가담해 공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오수눌은 선조 27년인 1594년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했다. 그해 가을에 곽재우 의병장을 만나 의령에 주둔했는데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배를 타고 동래까지 달려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선무랑군자감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창신교위훈련원판관(彰信校尉訓練院判官), 현신교위훈련원첨정(顯信校尉訓練院僉正) 등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정기룡(鄭起龍)의 부대장으로 28개 군의 관병을 거느리고 고령 녹가전(綠價田)에서 적을 토벌했고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왜적 수만명을 참살했다. 그는 적의 왼쪽 귀를 잘라 달구지에 싣고 체찰사 이원익에게 인계했는데, 이원익은 경탄하며 명장이라 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오수눌은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으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했을 뿐"이라며 전공을 다투지 않았다. 그는 선조 36년인 1603년에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 訓練院 習讀官)을 지냈고 1605년에는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오수눌은 '선무원종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무관으로서 맡겨진 의무를 끝낸 그는 귀향해 부모님을 봉양하며 종신토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어머니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그는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로 어머니를 살려냈다. 한씨는 그로부터 8년을 더 살았다. 아버지 오시준은 광해군 5년인 1613년 감천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87세였다. 오수눌은 1631년 66세 때 감계정사(甘溪精舍)를 짓고 매년 중양절에 오랜 벗들과 함께 국화주로 즐기며 호를 '국헌'이라 했다 한다. 그는 1648년에 세상을 떠났다. 국헌종택 뒤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사당인 충효사(忠孝祠)가 자리한다. 오수눌은 사후 1766년에 정3품 어모장군에 증직되었다. 1799년에는 충효사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다. 아버지 오시준은 무예가 드높았던 장군이었고 덕과 애민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현감이었다. 또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 벗한 선비였으며 고장의 선비를 길러 문풍(文風)을 떨치는데 기여했던 어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인의 기백과 충성심을 아들에게 심어준 아버지였다. 오수눌은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지금 감천마을에는 오수눌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오시준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감천마을로 돌아와 지은 연소정. 그는 연소정에서 송강 정철 등과 교류했고 청계 김진과 서로 따르며 의좋은 벗으로 지냈다. 당시 송강은 오시준과 같은 인재가 벼슬에서 물러나 크게 등용하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국헌종택 뒤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사당인 충효사(忠孝祠)가 자리한다. 오수눌은 사후 1766년에 정3품 어모장군에 증직되었고, 1799년에는 충효사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다.감천마을의 연못 삼천지 오른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감호헌. '호수에 자신을 비춰 보는 집'이란 뜻으로 오수눌의 호를 따 '국헌종택'이라고도 부른다.
2021.08.24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10] 호랑이 곶감빵과 감고을 상주 곶감빵
옛날 옛날에 너무너무 배고픈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마을에 내려와서 먹을 게 있나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들었지요. "자꾸 울면 호랑이한테 물어가라고 한다." 엄마는 아이를 달랬지만 그래도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자 곶감이다, 곶감." 곶감 소리에 아이는 뚝 울음을 멈췄어요. '곶감은 진짜 무서운 녀석인가 봐!' 호랑이는 너무 놀라 허둥지둥 달아났답니다. 전래동화 '호랑이와 곶감'이다.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생각에 꿀꺽 침을 삼킨다. 오감이 꿈틀댄다. 이 동화를 떠올리며 이야기가 흐르는 빵, 이야기에서 맛이 느껴지는 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가 있다. 상주의 호랑이 곶감빵 이야기다.무방부제 신토불이 캐릭터빵올 1월 출시후 전국 입소문'호랑이와 곶감' 동화서 영감 지역의 관광자원·역사 등창작동화에 접목 인기몰이뉴질랜드 수출도 적극 추진쌀가루와 곶감으로 만든'감고을 상주곶감빵'도 나와#1. 호랑이 곶감빵'가을 햇살 입술에 물고, 문장대에 산바람 안고, 분 바른 얼굴마다 드리운 향기, 속살 가득 채웠구나, 주렁주렁 가지 끝에, 익어가는 감을 따서, 하늘에다 매달고, 사랑으로 빚어낸, 쫄깃쫄깃 씹는 그 맛, 꿀보다도 달구나, 천하제일 상주 곶감아, 가을바람 가슴에 품고, 경천대에 물소리 안고, 분 바른 얼굴마다 드리운 향기, 속살 가득 채웠구나.' 호랑이 곶감빵 상자를 열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초겨울 상주 전체를 물들이는 붉은 곶감이 떠오른다. 잘근거리는 식감과 달콤한 맛도 떠오른다. 문장대와 경천대의 먹먹한 아름다움도 눈 앞에 펼쳐진다. 호랑이 곶감빵은 지난 1월에 출시된 신토불이 무방부제 캐릭터 빵이다. 호랑이와 곶감 두가지 모양에 국가중요농업유산인 상주 곶감을 넣어 만들었다. 여기에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창작한 이야기를 입혔다. 주요 스토리는 주인공 민재와 친구들이 상주를 여행하고 모험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배경은 상주 지역의 아름다운 관광자원을 활용했다. 맛과 재미, 지역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상품이다. 호랑이 곶감빵 출시 이후 전국에서 어머니들의 전화 문의가 많다고 한다. 빵 구입은 물론 스토리 공개 일자에도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호랑이 곶감빵 이야기는 현재 4화까지 공개되었으며 21화까지 창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호랑이 곶감빵을 개발한 이는 <주>팜드리의 김보규 대표다. 서울 사람인 그는 건축가였다. 어느 날 퇴근길에 안정적인 삶과 주체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인생의 계획을 장기적으로 세우고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외가가 있는 상주에 땅을 사고 감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2013년 상주로 귀농했다. 처음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강아지 다솜이와 살며 고군분투했다. 먹먹했다. 혼자서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바쁜 일정을 처리하다 보면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듯했고, 막연하게 불안했고, 뭔가 위험 요소가 다가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중요도별로 일정을 세우고, 오늘의 할 일, 내일의 할 일, 월별·연도별 계획을 세우고 차분히 진행해 나가면서 조금씩 자신감과 명확한 길이 보였다. 곶감을 만들면서 결혼을 했다. 그리고 보다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 팜드리를 설립했다. 팜드리는 농장(farm)과 드리(dri)를 합한 이름으로 '농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소비자에게 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보규 대표는 2017년경 상주와 가까운 구미에 40여 평 규모의 팜드리마트를 열었다. 당시 매장 한 편에서 빵을 구워 팔았는데 빵을 굽는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호랑이 곶감빵 스토리를 구상했다. 이후 그는 구미 가게를 접고 상주 농장에 전념한다. 2019년에는 농식품부 주관의 창업콘테스트 '판매왕 챌린지'에 도전해 본선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지난해 상주시농업기술센터 지원 사업인 곶감빵 상품화 기반조성 시범사업에 선정된다. 농업기술실용화재단 덕분에 캐릭터작업, 몰드작업, 시제품 출시 등 기획에서 출시까지 모든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출시된 캐릭터 빵은 '호랑이 곶감빵 오리지널' '호랑이 곶감빵 팥앙금' '호랑이 커피빵' 세가지다. 모양이 무척 예뻐서 눈으로 먼저 먹는다. 오리지널은 고급 버터의 풍미와 함께 쫄깃한 곶감의 식감을 즐길 수 있다. 팥앙금은 달콤한 팥앙금과 고소한 호두와 함께 곶감이 씹힌다. 커피빵은 버터의 풍미와 커피의 향이 어우러진 풍성한 맛이다. 호랑이 곶감빵은 따뜻할 때 보다 식은 후가 더 맛있다. 현재 농협 하나로마트, 코로나 격리자 간식으로 납품 중이다. 최근에는 수출 주문을 받아 1차 샘플을 뉴질랜드에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호랑이 곶감빵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상주를 알리고 싶다는 계획이다.#2. 감고을 상주 곶감빵상주에는 호랑이 곶감빵과 함께 '감고을 상주 곶감빵'도 출시되고 있다. 상주농업기술센터의 곶감빵 상품화 기반조성 사업은 상주시의 농산물을 이용한 가공품을 관광 상품화하기 위해 2018년에 추진된 사업이다. 이 사업을 통해 탄생한 것이 상주의 명물인 곶감과 쌀을 이용해 만든 '감고을 상주 곶감빵'이다. 상주시농업기술센터와 지역의 제과제빵에 종사하는 소상공인, 그리고 고품질의 곶감과 쌀을 생산하는 농부들이 힘을 합쳐 개발해 낸 '속 편한 쌀빵, 건강을 챙겨주는 곶감빵'이다. '감고을 상주 곶감빵'은 팥앙금이나 생크림 대신에 곶감을 사용하고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만든 빵으로 곶감 특유의 단 맛과 쌀가루의 식감을 잘 살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상주 곶감 쌀빵의 개발은 2017년부터 추진됐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글루텐을 함유하지 않아 뭉쳐지지 않는 쌀의 특성과 떫은맛인 탄닌을 함유한 곶감의 물성 때문에 개발은 쉽지 않았다. 개발 연구는 상주가 고향이고 충남 홍성에서 제과제빵 대학에 재직 중인 경영호 교수가 담당했다. 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역의 빵집 사장님들이 곶감 쌀빵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지역 빵집 사장님들은 시식과 품평회를 통해 맛과 작업성 등을 지속적으로 보완 작업했다. 그렇게 베이커리 10종, 관광상품용 7종의 곶감 쌀빵이 탄생했다. 그리고 상표권 1종, 포장박스 디자인권 2종에 대한 지식재산 등록을 2018년 10월에 마쳤다. 쌀은 빵 만들기에 적합한 형태로 가루를 내고, 곶감은 씨를 제거하고 곱게 갈아 한 단계 더 가공과정을 거쳐 롤케이크나 만주, 타르트 등을 굽는 데 사용한다. 같은 재료로 곶감쌀찐빵을 쪄내기도 한다. 부드러움은 밀가루 빵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고소하고 촉촉한 맛은 밀가루 빵에서는 느낄 수 없는 건강한 식감이다. 무엇보다 속이 편안하다. 현재 상주 곶감쌀빵은 미성 베이커리와 로제베이커리에서 맛볼 수 있다. 미성 베이커리에서는 쌀 식빵, 크랜베리 쌀빵, 곶감 쌀롤케이크, 쌀 와플, 쌀 밤식빵, 곶감 먹물 쌀빵 등을 만들고 있다. 로제 베이커리에는 반달 쌀빵, 블루베리 쌀빵, 무화과 건포도 쌀빵, 백설공주 쌀빵, 무화과건포도 쌀빵 등이 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지난 1월 출시된 호랑이 곶감빵은 신토불이 무방부제 캐릭터 빵으로 호랑이와 곶감 두 가지 모양에 상주의 특산물인 곶감을 넣어 만들었다. 주인공 민재와 친구들이 상주를 여행하고 모험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입혀 맛과 재미, 지역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상품이다.호랑이 곶감빵은 '호랑이 곶감빵 오리지널' '호랑이 곶감빵 팥앙금' '호랑이 커피빵' 등 세 가지로, 모양이 무척 예뻐서 인기가 높다.〈주〉팜드리 김보규 대표가 호랑이 곶감빵을 만들고 있다. 현재 농협 하나로마트와 코로나 격리자 간식으로 납품 중이다.
2021.08.23
[인재향 영양. 4] 석계 이시명과 여중군자 장계향...정묘·병자호란때 도토리죽 쒀 굶주린 피란민 수백명 구휼
화사한 화매천(花梅川) 변에 두두룩하게 언덕진 땅이 있다. 그래서 언덕을 뜻하는 우리말로 '두들'이라 했다. 이곳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과 그의 부인 장계향(張桂香)이다. 그들의 시대는 광해군의 난정과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어지러웠다. 석계는 '시대는 어둑어둑 바야흐로 쇠하려 하고 밤은 길고 길어 새벽이 오질 아니했네'라 표현했다. 그는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은거하여 깊이 공부하고 널리 가르쳐 영양의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석계의 부인 장계향은 어려서는 총명했고 커서는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였다. 이웃들에게는 의로써 베푸니 당대 사람들은 그녀를 '여중군자'라 칭하였고 오늘날에는 '의현당(宜賢堂)'이라 부른다. 석계부부 상속지분도 안받고 분가두들마을에 많은 도토리나무 심어가뭄에 힘들었을때 곡식으로 대신지금도 마을뒷산에 도토리나무 무성낙기대서 보릿고개때 식량 나눠줘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의 삶'실천#1. 이시명과 안동장씨 장계향이시명은 선조 23년인 1590년 영해 인량리(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운악(雲嶽) 이함(李涵)의 셋째 아들로 자는 회숙(晦叔)이다. 10대 초반에는 조부를 따라 한양에서 수학했고 1607년 부친이 의령현감에 제수됐을 때는 임지에 따라가 글 읽기에 몰두했다. 이런 이시명을 보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佑)는 '벼슬하는 집 자제들은 노래나 기생, 음주, 도박을 일삼지 아니함이 없는데 지금 네 절조의 높음이 이와 같으니 그 성취할 것은 가히 헤아릴 바가 아니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이시명은 1609년경에 의병장을 지낸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해(金垓)의 딸과 혼인했다. 이후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그때부터 경당에게 묻고 배웠다. 광해군 4년인 1612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 갔지만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향리로 내려왔다. 하지만 1614년 첫 번째 부인 광신 김씨가 어린 1남 1녀를 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616년, 스승 경당의 무남독녀인 19세 장계향과 혼인했다.장계향은 선조 31년인 1598년 경북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경당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도 마다한 채 평생 학문을 논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경당이 서른다섯 살 되던 해에 얻은 아이가 장계향이었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장계향은 '소학'을 통째로 외운 뒤 의심나는 부분을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시도 지었다. 전하는 대표적인 시가 10세 전후에 쓴 '비 내리는 소리(蕭蕭吟)'다. '창밖엔 보슬보슬 비 내리고/ 보슬보슬 빗소리 절로 들려오네/ 저절로 나는 빗소리 듣고 있으면/ 내 마음 어느새 빗소리 되네.' 이 시는 장계향이 '시경(詩經)'의 대아편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딸의 비범함을 눈치 챈 경당은 공부가 오히려 걱정됐다. 그래서 경당은 '예기(禮記)'를 많이 읽도록 권했다. 장계향은 예기에서 '여자는 재능 가진 것이 허물이 된다'는 구절을 발견하고 만다. 이후 그녀는 재능을 감추고 오직 부덕(婦德)을 닦는 데 열중했다.향시합격으로 받은 토지로 농사짓고황무지 개간하며 자식교육·후학 양성일곱아들 모두 학자 '7현자'로 불려#2. 영양 두들에서의 삶시집살이를 하며 장계향은 노비들을 데리고 길쌈으로 옷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빈민들이 겨울 추위에 얼어 죽는 것이 가장 무서운 고통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간단한 의약 처방을 배워 걸인을 도왔다. 1623년 인조가 등극하자 이시명은 다시 과거에 응시한다. 이듬해 그는 향시 별과에서 1등을 차지했다. 아버지 운악은 그런 아들에게 영해와 영양 경계지역의 좋은 논 여섯 마지기를 사주었다. 이시명이 5년 뒤 다시 향시에 합격하자 운악은 이번에도 영양에 논을 구입해 주었다. 그러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장계향은 시아버지 운악과 함께 밀려드는 피란민을 구휼했다. 1631년 이시명·장계향 부부는 영양 두들에 작은 집을 지어 분가했다. 이때 장계향은 마을에 많은 도토리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몇 달 사이 운악이 위독해져 다시 인량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듬해 운악이 타계했다. 이어 1633년 경당마저 세상을 떠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장계향은 시아버지 운악의 빈자리를 스스로 메워 주도적으로 구휼에 나섰다. 곡식이 떨어지자 도토리를 주워 집 밖에 솥을 걸고 죽을 쑤었다. 그렇게 하루 300명을 구휼했다. 이시명은 '숭정처사'라 자처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강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에 비분강개하고 있던 석계는 1640년 두들로 돌아와 은거했다. 석계 위에 집을 짓고 이때 자신의 호를 '석계(石溪)'라고 했다. 그리고 석계초당(石溪草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석계 부부는 분가하면서 상속지분을 전혀 챙기지 않았다. 노력해서 일군 것이 아니면 가지지 않았다. 향시 합격으로 아버지께 받은 토지가 전부였다. 가난한 생활이 시작됐다. 다행히 9년 전 처음 두들에 들어왔을 때 심어두었던 도토리나무가 위안이 되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자식교육에 정성을 쏟았다.석계 부부는 일곱 아들을 뒀는데 첫째는 전처소생인 정묵재(靜默齋) 이상일(李尙逸)이다. 둘째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셋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넷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다섯째 정우재(定于齋) 이정일(李靖逸), 여섯째 평재(平齋) 이융일(李隆逸), 일곱째는 이운일(李雲逸)이다. 모두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라고 불렸다. 장계향은 자식들에게 강조했다. '너희가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지만 나는 그 일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너희들이 선행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기뻐하며 잊지 않을 것이다.' 장계향 일흔다섯에 '음식디미방'작성머리글 빼고 한글로 쓴 최초의 요리서17세기중엽 식생활 실상 알려주는 책#3. 수비에서의 삶, 그리고 다시 두들1653년 석계 부부는 수비(首比)로 터전을 옮겼다. 영양의 동북쪽 끝, 첩첩산중인 두메산골이었다. 수비에서는 '휴문(休問, 묻지 마라)'이라는 편액을 달고 살았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수해와 한해로 창고는 텅 비었네. 온 식구가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아우성이었지만 그 누굴 의지할 수 있었으랴. 도토리를 주워 곡식을 대신했고, 소나무 껍질 벗겨 삶아 먹었네. 이로도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을 만족하며 애오라지 분수로 생각하고 가난을 즐겼네. 요컨대 마음은 어느 곳에 두었는가. 배움에 두었을 뿐이었네. 이 즐거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아노라.' 석계는 거처하는 집을 서산서당(西山書堂)이라 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1655년에는 영산서당 당장(堂長)으로 있으면서 서당의 서원 승격을 추진해 이루어냈다. 자식과 후학들에게 공부에 힘쓰도록 하면서 황무지였던 땅을 개간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석계 부부는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며 20년을 수비에서 살았다. 그리고 1672년 극심한 가뭄으로 나라가 흔들릴 때 일흔 다섯의 장계향은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후손들을 위한 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썼다. 음식디미방은 17세기 중엽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지 식생활의 실상을 알려 주는 책이다. 책에는 무려 146가지 음식 조리법이 나온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것이 있고 스스로 개발한 음식도 있다. 머리글 한시를 빼고는 모두 한글로 썼다. 최초의 한글 요리서다. 석계 부부는 1672년 12월 자손의 성장과 앞날을 생각해 다시 안동 도솔원(兜率院, 안동 풍산읍 수곡리)으로 옮겼다. 마을 이름을 대명동으로 고치고 선비들의 존경을 받으며 후진 양성에 힘쓰던 석계는 그해 운명했다. 그는 경당 장흥효로부터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의 학문을 모두 전수 받았다. 이러한 학통은 다시 아들 이휘일과 이현일에게 전해져 영남학파와 퇴계학파의 발전과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석계가 살던 수비의 유거지에는 훗날 후학들이 세운 '석계이선생수산유허비(石溪李先生首山遺墟碑)'가 남아 있다. 석계가 세상을 뜬 후 장계향은 셋째아들 갈암과 넷째아들 항재와 함께 두들마을로 돌아왔다. 석계의 선업을 이은 이는 항재였고, 그는 아버지의 석계초당에서 강학을 이어나갔다. 훗날 후손들은 석계가 강학하던 석계초당을 퇴락한 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개축해 석천서당(石川書堂)을 세웠다. 서당은 1770년 공사를 시작해 1771년에 완공했다. '계(溪)'자를 '천(川)'자로 바꾼 이유는 감히 석계의 호를 서당 이름으로 붙일 수 없어서였다고 한다.장계향은 1680년 두들에 있는 넷째아들 항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들마을에는 석계부부가 살았던 석계고택이 남아 있다. 또한 장계향을 기리는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와 영정을 모신 존안각(尊安閣), 그녀가 쓴 음식디미방을 체험해볼 수 있는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등이 있다. 화매천변에는 석계가 짓고 항재가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이곳 낙기대에서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에게 구휼식량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부터 시작된 이러한 전통은 광복 직전까지 지속됐다. 두들에는 지금도 그녀가 심은 도토리나무가 400년을 이어 무성하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영양 두들마을에 자리한 음식디미방체험관. 여중군자 장계향이 지은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음식을 직접 맛보고 조리해 볼 수 있다. 장계향은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였고, 이웃들에게는 진심을 다해 베풀어 '여중군자'라 불렸다.장계향을 기리는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석계 부부가 살았던 석계고택.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다.
2021.08.10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9] 서애·우복 학통 이은 도남서원, 조선 유학 전통계승 자부심…낙동강 소금배도 지날때 돛 내려
웅장하고 고요하다. 걸음이 저절로 단정해진다. 그러나 공기는 날듯이 가볍고 마음은 자유롭다. 이런 느낌이 선현들이 말한 호연지기 인가. 계단을 오르고 나면 자꾸만 뒤돌아본다. 지나온 건물들의 반듯한 지붕선 너머로 낙동강이 크다. 강 가운데에 앉아 물살을 어르는 경천섬 너머로 비봉산이 힘차게 솟구친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경천대(擎天臺)가 장대하고, 물길을 따라 흐르면 관수루(觀水樓)가 우뚝하다. 이 모든 경승 가운데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자리한다. 조선시대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한 곳이다. #1. 도남서원임진왜란 후인 1605년, 상주 유림에서는 서원 건립을 의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자리를 정하고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위패를 모셨다. '도남(道南)'이란, 북송의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道)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원호를 도남이라 한 것은 조선 유학의 전통이 바로 영남에 있고 상주가 이를 계승했음을 천명한 것이다. 창건 당시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의 자문을 받아 서원의 위치와 이름을 정했다고 전한다. 광해군 8년인 1616년에는 노수신(盧守愼)과 류성룡을, 인조 13년인 1635에는 정경세(鄭經世)를 추가 배향했다. 숙종 2년인 1676년에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던 도남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초석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1992년 유림에서 일부 복원했고 2002년부터 상주시 유교문화관광개발 사업으로 옛 모습을 찾았다.솟을삼문은 입덕문(入德門)이다. 향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닫혀 있다. 좌측 고직사 옆에 있는 작은 협문인 영귀문(詠歸門)으로 들어간다. 경내가 매우 넓고 반듯하다. 각 건물들은 야트막한 산의 지세에 맞춰 조금씩 단을 높여 자리하고 있다. 누각인 정허루(靜虛樓)가 당당하다. 정허루 옆 'ㄱ'자 모양의 건물에는 '사행당(四行堂)'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이 건물이 가장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정허루 뒤로 두 단 높은 자리에 강당이 정좌해 있다. 팔작지붕은 날아갈 듯하고 겹처마와 창호의 세살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임란후 1605년 상주 유림 건립 결의정몽주·이황·류성룡·정경세 등 배향서원 철폐령으로 훼철…2002년 복원고려때 시작된 '낙강시회' 전통 계승1622년 이준의 낙강범월시회 대표적지금도 해마다 '낙강시제' 열어 명맥'도남서원' 현판 글씨는 어느 마음 곧은 이가 정직하게 쓴 듯 맑다. 강당 앞에는 동재인 손학재(遜學齋)와 서재인 민구재(敏求齋)가 마주 보고 있다. 서재 옆에 있는 1칸의 작은 건물은 장판각이다. 강당 뒤 높은 돌계단 위에 내삼문이 있다. 사당인 도정사(道正祠)가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사당 옆에는 영역을 구분하여 전사청을 두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핵심 기능은 교육과 제향이다. 조선에 서원 제도를 보급, 정착시킨 퇴계는 둘 중 교육을 더 중요시했다. 상주는 우복(愚伏) 정경세, 창석(蒼石) 이준(李埈),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등 영남학파의 적맥을 계승한 학자들의 고장이었다. 이른바 강회를 주관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유수의 학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류성룡의 핵심 문인인 정경세와 이준, 안동에서 이거해 온 서애의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津)이 포진해 있는 서애학맥의 근거지였다. 상주의 서애문인들은 임란 시에는 의병활동을, 임란 후에는 사족을 대변하는 낙사계(洛社契) 결성과 우리나라 최초 사설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 설립, 향약 시행 등 향촌 복구사업 전반을 기획하고 주도하여 그 위상은 남달랐다. 정경세가 세상을 떠난 후 서원에 추가배향이 된 것은 영남학통의 적통 계보를 정립함과 동시에 서애, 우복 학단의 남인계 서원으로서의 성격을 대내외에 분명히 한 것이었다. 도남서원의 초대 원장인 조정(趙靖)의 손자 조릉(趙稜)은 '도학의 연원은 낙수(洛水)에서 찾을 일, 도원은 영남 사림의 으뜸 일세'라고 하여 자부심을 드러냈다. 당시 낙동강에서 안동으로 올라가는 소금배도 서원 앞을 지날 때는 돛을 내려야 했다 한다.#2. 낙강시회솟을삼문 앞 낙동강 가에 '낙강범월시유래비(洛江泛月詩由來碑)'가 서 있다. 옛날 상주의 선비들은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술 마시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그러한 시회(詩會)와 그때의 작품들을 아울러 '낙강범월'이라 한다. 연원은 아주 깊다. 고려 명종 때인 119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로 온 대문호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낙강범주시회(洛江泛舟詩會)'가 그 시작이다. 이후 '낙강시회'는 철종 때인 1862년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시회는 문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행사였다. 정기적인 시모임인 시사(詩社)가 조직되기도 했고 서원의 강회를 전후해 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도남서원에서는 낙성 이듬해인 1607년 9월 처음 배를 띄워 시회를 가졌다. 이때 읊은 시의 내용을 보면 단순한 선유가 아니었다. 참석자들은 임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상주 출신 전·현직 관료들이었고 그날의 시회는 울분의 심정과 우국(憂國)을 추동하는 자리였다.이후 도남서원에서 전개된 시회의 양상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1607년 첫 시회부터 정조 2년인 1778년까지 171년 동안 8차례 개최된 '낙강범월시회'다. 역대 시회에서 나온 상당수의 작품들은 영조 47년인 1771년에 하나의 책자로 묶였는데 바로 상주 시인들의 공동시집인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 일명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이다. 또 하나는 홍여하의 '도남서원강당중수시(道南書院講堂重修詩)'에 대를 이어 차운한 목재시단(木齋詩壇)이다. 목재시단은 현종 4년인 1663년부터 정조 22년인 1798년까지 135년간 서(序) 3편과 시 109수를 남겼다. 그리고 이만부, 권상일, 정종로 등 개별 학자들이 서원 강학 후 진행한 문회 및 시회가 있다. 이 3가지를 통칭해서 '낙강시회'라 부른다. 낙강시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622년 7월에 열린 창석 이준의 낙강범월시회다. 이준은 읍지인 상산지의 편찬, 향약 보급, 학교의 활성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상주를 문향의 반열에 올린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또 당대 문장가답게 많은 시를 남겼는데 청백리로 이름난 이원익도 이준이 보내준 시를 아들에게 가보로 삼게 할 정도로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시회를 열며 '1082년 7월 송나라 소식(蘇軾)이 호북성에서 적벽부(赤壁賦)를 남긴 9갑(甲)을 맞이해 이를 재연하기 위함'이라 했다. 시회에서는 25명이 508연구(聯句)의 공동 장편시를 창작했다. 시집이 완성되자 이준은 서문 끝자락에 중요한 당부를 적었다. '간략히 일의 전말을 써서 책머리에 놓아 도원에 갈무리하여 뒷날 이 놀이를 잇는 자의 선구가 되고자 한다.' 도원을 출입하는 후학들에게 시회의 전통을 계승하기를 피력한 말이다. 실제 도남서원의 후학들은 한말까지 이준의 당부를 충실히 수행하고 전승시켜 나갔다. 이준은 시회를 서원의 전통으로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1723년 도남서원의 원장을 지냈고 정허루기(靜虛樓記)와 일관당중수기(一貫堂重修記) 등을 쓴 정종로는 1816년에 강회를 열었다. 생을 마감하기 3개월 전이었고, 강회에는 수백 명이 참석했다. 그는 강회 후 생전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시 1수를 남겼다.'예전에는 강가 서원에서 이 가을을 만나면, 선배들이 서로 불러 배 띄워 달을 감상했네. 동파의 문장에야 누가 비슷할 수 있겠는가, 교남의 좋은 풍광은 여기가 더욱 좋아라. (중략) 시험 삼아 미인가(美人歌) 한 곡조를 부르며, 서풍에 머리 돌리니 눈물 거두기 어려워라.'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를 읊었던 흥취는 지금도 도남서원에서 매년 개최되는 낙강시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도남서원은 2005년 창석 이준을 추가 배향해 현재 아홉 선현을 모시고 있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 2월, 8월이 하정일(下丁日)이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상주시 누리집. 서원연합회 누리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채광수, 서원의 지식 네트워크 활동의 실제, 상주 도남서원의 시회를 중심으로, 한국서원학보, 2021.조선시대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한 곳인 상주 도남서원. 조선시대 당시 낙동강에서 안동으로 올라가는 소금배도 서원 앞을 지날 때는 돛을 내려야 했을 만큼 위상이 남달랐다. 도남서원 경내 건물들의 반듯한 지붕선 너머로 낙동강이 크고 넓게 펼쳐져 있다.1606년 창건한 도남서원. 원호를 도남이라 한 것은 '조선 유학의 전통이 바로 영남에 있고 상주가 이를 계승했음'을 천명한 뜻이다.도남서원 경내는 매우 넓고 반듯하며 건물들은 야트막한 산의 지세에 맞춰 조금씩 단을 높여 자리하고 있다. 누각인 정허루(靜虛樓)가 당당하다.동재인 손학재(위쪽)와 서재인 민구재.
2021.08.09
[인재향 영양 .3] 젖먹이 둘에 자신의 젖꼭지 물리다...'농사짓는 훈장' 청계 김진의 '눈물의 부성애'
명상에 잠긴 듯한 얼굴에 눈매가 가늘다. 머리에는 테가 넓고 높은 전립을 썼으며 빛바랜 녹색 옷을 입고 가부좌하여 두 손을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홀로 8남매를 키우며 다섯 아들 모두를 과거에 급제시킨 아버지,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73세 때의 초상이다. 청계는 16세기 중반 영양의 서쪽 청기(靑杞)로 들어왔다. 그는 관아에서 개간 허가를 받아 마을을 일구었고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도 나섰다. 오늘날 사람들은 청계를 일컬어 개척자, 교육자, 16세기 농촌 계몽 운동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계는 자애롭고 엄한 아버지였고, 인(仁)과 의(義)의 정신을 대대로 세습하게 한 큰어른이었다.16세기 중반 영양 청기로 들어와 관아에 개간 허가 받아 마을 일궈사립교육기관인 '영산서당' 건립 서원 승격 후 퇴계·학봉 등 배향 홀로 8남매 키우며 교육에 매진 다섯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시켜#1. 청계 김진청계 김진은 연산군 6년인 1500년 2월 안동 천전리 반변천 앞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영중(瑩中), 관향은 의성(義城)으로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金錫)을 시조로 한다. 이후 고려 문예부좌사윤 김태권(金台權)이 흥왕사에서 김용(金鏞)의 난에 순국하자 그의 아들 김거두(金居斗)가 화를 피해 안동으로 이거했다. 천전리 내앞에 처음 기틀을 잡은 이는 조부인 망계(望溪) 김만근(金望溪)이며 청계의 증조는 김한계(金漢溪)로 세조 즉위 후 평생 벼슬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김예범(金禮範), 어머니는 영해신씨(寧海申氏)로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신명창(申命昌)의 딸이다. 청계는 집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6세 때에 청송에 있던 고모할머니의 남편인 권간(權幹)에게서 수학했다. 권간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고 특히 효자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청계는 훗날 자식들이 이름을 날릴 때마다 스승 권간의 가르침 덕분이라 했다. 청계는 청송의 이름난 가문인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세경(閔世卿)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처숙 민세정(閔世貞)을 종유하며 학문과 견문을 더욱 넓혔다. 청계는 26세 때인 1525년에 사마시에 급제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각별한 친교를 맺었고 각지에서 온 명사들과 사귀며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나 청계는 돌연 대과를 포기한다. 그리고 안동 임하(臨河)의 부암(傅巖)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당을 한 칸 지어 자식들과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강 건너 부모님을 문안했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폐하지 않았고 혹 다른 곳에 출타했을 때에는 반드시 부모님이 계신 곳에 먼저 들른 다음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청계는 1540년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1550년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해이하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엄숙했다고 한다. #2. 엄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청계는 8남매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떨쳤다. 맏아들 김극일(金克一)은 1546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다. 둘째 김수일(金守一)은 1555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찰방(察訪)을 지냈다. 셋째 김명일(金明一)은 1564년에 생원시에 급제했고 효행으로 칭송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넷째는 학봉 김성일(金誠一)로 1568년 문과에 급제해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 다섯째 김복일(金復一)은 1570년 문과에 급제해 형조좌랑이 되었다. 청계의 장녀는 전주류씨 류성(柳城)에게 출가했는데 남편이 25세에 요절하자 3년 후 남편을 따라 단식해 자결하니 정려가 내려졌다. 청계는 고아가 된 외손자 형제를 키워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청계는 일찍 홀로 돼 의지할 곳이 없는 처조카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를 거두어 자식들과 함께 가르치고 길렀다. 훗날 민추는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는데 당시 일대의 선비 중 그의 문하에서 배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맏아들 극일이 문과에 급제했던 1546년에 정부인 여흥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청계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는 새 아내를 맞이하지 않고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이 쓴 청계 행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자녀가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강보에 싸여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아이가 어미젖을 찾았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청계는 아무리 나이가 어린 자식이라 하더라도 항상 학당(學堂)에서 공부하게 했다. 때로는 가까이 마주 앉아 옛 사람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일일이 자세하고도 곡진하게 가르쳤다. 그리고 일찍이 '신하된 자는 차라리 옥처럼 부서질지언정 자신의 목숨이나 보전하려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여기겠으나, 소인 노릇을 하며 산다면 나는 죽은 것처럼 여길 것이다'라고 했다. 청계는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3. 영양에서의 삶…조핏골의 흥림초사청계는 자녀들과 향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후손들이 대대로 살 땅을 마련하기 위해 산간 오지 개간에 뛰어들었다. 그는 천전을 기반으로 임하, 신덕, 망천, 추월, 사빈, 송석, 선창, 낙연 등 반변천의 중상류와 멀리 강릉 금광평의 황무지를 개척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땅을 개간해 후손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청계가 영양으로 들어온 것은 1557년경이라 여겨진다. 그는 청기의 동쪽 흥림산(興林山) 아래에 거처를 마련하고 흥림초사(興林草舍)라 이름 붙였다. 사람들은 그 땅을 천옥(天獄)이라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하늘이 만든 감옥이었다. 마을 뒷산에 우거진 조피나무를 베어다 집을 지으니 사람들은 이 마을을 '조핏골'이라 불렀다. 그는 천옥의 땅을 농경지로 개척했다. 당시 청기 일대에서 개간을 통해 얻은 도지(임대료)가 300석이었다고 한다. 1570년경에는 낙후된 교육을 개탄하며 서당 건립을 주창했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매년 향회를 열어 곡식을 모으고 강령과 기강을 세웠다. 그리고 선조 11년인 1578년 마침내 영양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웠다. 1579년 청계의 팔순을 맞아 자녀들과 친척들이 청기에 모였는데, 대과에 오른 아들들과 사위가 영산서당의 향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영산서당은 1655년(효종 6년)에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을 배향했으며, 1694년(숙종 20년)에는 '영산(英山)'이라고 사액됐다. 당시 경내 건물로는 묘우, 강당, 신문, 동재, 서재, 전사청, 주소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됐다. 2018년 6월 영영군이 역사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전통양식으로 복원했다. 영산서원은 영양 유일의 사액서원으로 의미가 깊다.청계는 말년에도 낚시와 밭갈이를 즐거워했고 기력이 강건해 활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명절 때면 시골의 벗들을 불러 모아 술을 마시며 농사짓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고, 술이 몇 순배 돌면 활쏘기를 했다. 활을 단단하게 잡은 모습은 생기가 있었으며 동안(童顔)에 흰 머리카락이 신선과 같았는데 활을 쏘면 반드시 표적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팔십 먹은 늙은이가 과녁 맞춤 다투니, 북소리 둥둥 울려 마른 창자 동케 하네'라 했다. 청계는 81세인 1580년 윤4월에 흥림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 여든이 넘었으니 천수를 누렸다. 하늘이 내게 내린 복이 이처럼 많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하며 태연히 임종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재산은 300석 이상 갖지 말고, 벼슬은 당상관 이상 오르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또한 제사를 위한 토지는 영원히 분배하지 못하도록 했고 제사 음식과 도구는 모두 검소하게 마련하라고 유언했다. 청계가 세상을 뜬 뒤 증손인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穩)이 청기로 들어왔다. 그는 증조부가 서당 휴게실로 쓰던 정자에 돈간재(敦艮齎)라는 현판을 달았다. 돈간재의 '돈'은 두텁다는 뜻과 노력한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간'은 은둔하다는 뜻과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돈간재는 삶의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며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벗 삼아 청빈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본채 마루에 '흥림초사' 현판이 걸려 있다. 주사(廚舍) 대문에 '인(仁)을 머리에 이고, 의(義)를 가슴에 품다'라는 글이 붙어 있다. 부엌문에도 '인'과 '의' 두 글자가 붙어 있다. 청계의 후손들 중 문과 급제자는 24명, 생원 진사는 64명,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는 239명,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는 58명에 이른다. 청계가 강조했던 군자로서의 삶은 자손들의 역사적 삶을 규정하는 규범이 되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영양군 영양읍 현리에 자리한 영산서원. 청계 김진이 1578년 세운 영산서당을 모태로 한 서원으로 영양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됐다가 2018년 6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에 있는 돈간재. 청계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증손 김시온이 청계가 휴게실로 쓰던 정자에 돈간재라는 현판을 달았다.
2021.07.27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8] 전국서 유일하게 남은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는 성주봉이, 맞은편엔 문경과 경계를 이루는 칠봉산이 둘러싸고 있는 땅,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다. 마을 가운데에 초가 4채가 마당을 중심으로 정방형을 이루고 서 있고, 행랑채 가운데로 난 입구에 '동학교당(東學敎堂)' 현판이 걸려 있다. 구한말 흔들리던 이 땅에서 터져 나온 평등의 함성과 기울어 버린 국운을 일으켜 세워보려던 민초들의 자생적 의지가 맺혀 있는 저 '동학'이라는 이름.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동학교당이다. #1. 상주 동학교의 설립 동학(東學)은 조선 철종 11년인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崔濟遇)가 창시한 종교다. 조선시대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주체성과 만인평등사상을 내세운 자생 민족종교다. 초기 동학은 서민층에 유포된 단순한 신앙형태였다. 동학은 경주·대구·울산 등 14곳에 접소(接所)와 접주(接主)를 두고 조직화했는데, 포교 3년 만에 전체 교인의 수가 3천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는 빠르게 성장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864년 최제우를 체포해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로 사형에 처했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지하에 숨어 다니면서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1880년대에 들어서 삼남 일대를 장악하게 되고,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동학은 북접과 남접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접은 최시형을 위시한 동학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는 온건파 세력들이 이끌었으며, 남접은 전봉준(全奉準) 등 동학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 급진파 세력들이 이끌었다.우금치전투서 동학군 활약한 김주희김낙세와 합심 우기리에 교당 건립경전간행사업 등 대대적 교세 확장1943년 日帝 기습에 300여명 끌려가이러한 가운데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지나친 폭정에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이에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동학 교인들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무력투쟁을 전개한다. 동학농민운동이다. 그들이 외친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축멸왜이(逐滅倭夷), 진멸권귀(盡滅權貴)는 동학운동이 혁명적인 사회개혁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고, 이후 남접의 지도자들은 대거 체포돼 처형되었다. 북접 교주 최시형 역시 도피생활 중 1898년 원주에서 체포돼 참형되었다.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천도교(天道敎)가 창시되는데, 이념과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다양한 교단으로 분파를 하게 된다.동학군으로 활약했던 사람 중에 충남 공주 출신의 김주희(金周熙)가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천(敬天), 호(號)는 삼풍(三豊)으로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동학에 입도한 그는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후 속리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했다. 그는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의 이념이 최제우의 사상과 어긋난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남접이라 칭하며 포교를 시작했다. 1904년경에는 십승지의 하나로 알려진 상주 화북면 장암리로 들어가 경천교(敬天敎)를 조직하고 포교활동을 이어나갔다. 김주희는 최제우의 동학 이념을 계승하는 동학교 설립에 뜻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모색하던 중 1910년 무렵 양반 신분의 김낙세를 만나 동학교를 설립하기로 합의한다. 마침내 1915년 6월 상주 은척면 우기리에 교당 터를 잡았다. 상주 동학교당이다. #2. 상주 동학교당상주 동학교당 입구 기둥에 '경주금척동학포태(慶州金尺東學) 상주은척포덕천하(尙州銀尺布德天下)'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경주 금척에서 동학이 처음 일어나고, 상주 은척에서 널리 전파됐다'는 말이다. 그 옆으로 '덕을 널리 베풀고 후천운수가 열리기를 기원하며 국기를 바로 세워 백성들을 편하게 한다'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쓰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재 4동의 건물이 사방에 배치돼 있다. 중심 건물인 북재는 원채·성화실, 사랑채인 동재는 접주실, 안사랑채인 서재는 남녀교도가 각각 반씩 사용했으며, 행랑채인 남재는 남교도가 사용했다. 서재 뒤에 경전 간행소로 쓰였던 별채가 있었는데 소실됐다. 교당 전체가 완성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1922년에는 일제의 문화정책에 따라 조선총독부로부터 보수적인 종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 과정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했으며 인가 후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동학교는 전도사를 각지에 파견해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이 무렵부터 동학 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벌이며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을 꾀했다. 김주희는 초기 동학의 연장선상에서 '하늘의 뜻을 이어 근본을 세운다'는 '계천입극(繼天立極)'을 목적으로 했다. 국가와 백성이 위태로울 때마다 온몸을 던져 구국(救國)·구민(救民)한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동학이다. 그에 비해 상주 동학은 만인평등, 인본사상, 인간존중 등의 동학 정신을 대대손손 전하기 위해 경전 간행사업에 주력했다. 이는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던 또 하나의 동학이었다. 1928년에는 교도 수가 1천500명에 달했고 이러한 교세는 1931년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1936년 일제에 의해 공인 취소돼 해산 통보를 받았다. 교인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모여 별채 가운데 방에 거적을 걸쳐 빛을 가린 채 숨죽여 작업했다. 1943년 일제는 상주 동학교당을 기습했다. 그날은 음력 10월28일로 최제우의 탄신일이었다. 교인들은 상투를 잘린 채 상주경찰서로 줄줄이 끌려갔다. 이날 구치소에는 300여명의 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부주교 김낙세는 1944년 9월 고문으로 옥중 사망했다. 김주희는 충격으로 곡기를 끊고 그해 12월28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때가 되면 다 된다. 걱정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동학교당 가장 안쪽에 근래에 세운 듯한 천황각이 있다. 주련에 '방방곡곡행행진/ 수수산산개개지/ 송송백백청청립/ 지지엽엽만만절'이라 쓰여 있다. 이는 최제우가 쓴 동학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에 나오는 화결시(和訣詩)의 일부다. 그 뜻은 이러하다. '방방곡곡 돌아보니 물마다 산마다 낱낱이 알겠더라. 소나무 잣나무는 푸릇푸릇 서 있는데 가지가지 잎새마다 만만 마디로다.' 동학교당은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돼 있고 지금도 김주희의 후손들이 교당에 거주하고 있다.#3. 상주 동학교당 유물전시관동학교당 바로 옆에 유물전시관이 있다. 일제에 압수당했던 교기, 의례복, 동학경전, 판목 및 당시 생활용품 등을 회수해 전시해 놓은 곳이다. 전시관 중앙에는 '창생을 질곡에서 건져내고 지상천국을 열어 국권을 바로 세우는 것이 동학의 최대 목표'임을 천명한 포교 이념이 김주희의 영정과 나란히 걸려 있다. 유물은 총 289종 1천425점인데, 동학경전을 비롯한 전적류 131점, 동학경서나 가사 등을 나무에 새긴 판목 792점, 의복류 31점, 교기와 인장 등이 130점 등 총 1천84점이 경북도 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돼 있다. 동학 관련 유물이 온전히 보전된 곳은 상주 동학교당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특히 기록물의 사료적 가치와 의의는 대단히 높다. 이는 상주 동학의 차별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구한말 격동기에 상주 동학이 취한 반일 의식과 민족운동의 실상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또한 방대한 가사는 국문학 특히 가사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으며 종교문학과 민족문학, 서민문학 연구 및 동학사상 연구에도 크게 기여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100년 이상의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선명한 각자용 한자와 한글, 조판대, 조판 재료함 등 각종 인쇄용구가 소장돼 있어 우리의 고유한 인쇄문화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데도 긴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상주시 누리집. 한국콘텐츠연구원 누리집. 문화재청 누리집. 김문기, 상주 동학교당 기록물의 사료적 가치, 2014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자리한 상주 동학교당.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동학교당으로, 김주희가 상주를 본거지로 정해 동학의 부흥과 포교에 노력하다가 1915년 지금의 자리에 교당을 세우고 교세 확장에 힘쓴 곳이다.상주 동학교당 중심 건물인 원채(위)와 남교도가 사용한 행랑채.상주 동학교당 바로 옆에 있는 유물전시관. 일제에 압수당했던 교기, 의례복, 동학경전, 판목 및 당시 생활용품 등을 회수해 전시해 놓은 곳이다.
2021.07.26
[인재향 영양 .2] 석문 정영방, 조선 3대 민가 정원…돌·꽃·풀, 모든 물상에 성리학 정신 깃들어
마을 입구에 선바위(立岩)가 솟아 있다. 맞은편에는 거대한 석벽이 치솟았는데,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끝 비단처럼 아름다운 벼랑이라 '자금병(紫錦屛)'이라 불린다. 선바위와 자금병이 마주하여 문을 이루니 석문(石門)이다. 그 아래로 반변천과 청기천(靑杞川) 두 물줄기가 만난다. 남이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남이포다. 청기천을 거슬러 석문이 열어 놓은 세상으로 들어간다. 강이 산을 에워싸고 풀과 나무와 꽃이 무성하다. 맑은 못과 푸른색 절벽은 밝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영양 입암의 연당리(蓮塘里)다. 본래 이름은 생부동(生部洞)이었다.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아 '돌배기'라고도 했다. 마을 이름이 연당리가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한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때부터다.광해군 때 등거리 외교정책에 불만진사시 합격했지만 벼슬 나가지 않아병자호란 후 연당리로 들어와 은거'서석지'로 불리는 별서정원 만들어연못 모든것에 이름 붙이고 詩로 남겨#1.석문 정영방정영방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동래(東萊)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대를 이어온 명문가였다. 정영방의 선조는 고려의 문신인 정목(鄭穆)으로, 시로 이름이 높았고 예부시랑을 거친 문단의 거목이었다. 고조인 정환(鄭渙)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연산군의 혼정을 직간하다 갑자사화에 휘말려 유배지 상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이 즉위해 그의 죽음을 모른 채 벼슬을 내렸는데 이후 후손들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꺼리게 된다. 증조는 성균관 생원인 정윤기(鄭允奇), 조부는 성균관 진사인 정원충(鄭元忠)이다. 아버지는 정식(鄭湜)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정영방은 1577년 지금의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憂忘里)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집안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정영방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열네 살 때인 1590년에 아버지의 사촌 형제였던 정조의 양자가 되어 안동에서 생활했다. 친형제 간 우애가 남달랐던 그는 이를 계기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16세였다. 한창 학문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에 난을 겪은 것이다. 게다가 형수와 누나가 왜적에게 쫓기다 화를 면하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전쟁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정영방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자가 되었다. 우복은 그의 뛰어난 재주와 문학적 재능에 대해 "정영방과 나눈 하룻밤 대화가 자기의 3년 공부보다 낫다"라고 극찬했다. 정영방은 선조 38년인 160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후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존명배청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혼탁했다. 정영방은 광해군이 후금과 명나라를 두고 등거리 외교정책을 펼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혼란한 조선의 정계 속에서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수용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고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공부하리라 마음 먹었다. 결국 그는 영양 연당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1610년부터 초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와 어린아이들 때문에 완전한 이주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40세가 되던 161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정영방은 슬픔으로 병을 얻어 몇 번이나 기절하면서도 부축을 받으며 장례를 치렀다.#2.영양에 은거하다정영방은 연당리 초당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정원 조성 계획을 세웠다. 계획만 10년, 그는 1620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원 공사를 시작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스승 우복 정경세가 이조판서에 재직할 때 천거를 위해 정영방에게 의사를 물었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1627년 후금이 침입해 왔다. 정묘호란이다.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배금(排金) 여론은 격증했다. 조선의 태도를 알게 된 후금은 재침입을 결심한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이 요구한 것 중 하나가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특히 명나라와의 단절은 온 나라 선비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스스로를 '숭정처사'라 자처했다. 정영방도 그들 중 하나였다.정영방은 예천의 가산을 맏아들 정혼에게 맡기고 식구들과 함께 연당리로 완전히 들어왔다. 그리고 주거공간인 수직사(守直舍), 서재인 주일재(主一齋), 정자인 경정(敬亭), 그리고 연못인 서석지(瑞石池)로 이루어진 자신의 별서정원을 완성했다. 그는 석문을 외원이라 하고 자신의 정원을 내원이라 했다. 그리고 석문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논어의 헌문(憲問)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자로가 석문 밖에서 잤다. 다음날 문지기가 물었다. 어디서 오시오? 자로가 말했다. 공씨(孔氏)댁이요. 문지기가 말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하려는 그 사람 말인가요?' 공씨란 공자를 뜻한다. 실현하기 힘들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상적 정치와 문화와 사회관계를 제시하고 추구했던 공자. 정영방은 이 이야기를 의식하면서 호를 지었다. #3.경(敬)의 세계 서석지통칭 서석지로 불리는 정영방의 내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연당리 고샅길에 들어서면 서석지의 담장 너머로 솟아오른 엄청난 은행나무와 맞닥뜨린다. 400년 넘게 이곳에 서 있는 나무는 정영방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사주문에 들어서면 거의 마당 전체가 연못이다. 북쪽에는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동북 모서리에는 물을 끌어들이는 '읍청거'를, 서남 모서리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토예거'를 냈다. 연못 안에는 연못을 조성할 때 나온 크고 작은 돌들을 자연스럽게 두었다. 상서로운 돌, 서석(瑞石)이다. 서석지 이름은 이 돌들에서 왔다. 정영방은 서석에 대해 이렇게 썼다.'서석지의 돌은 속에는 무늬가 있고 밖은 흰데,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져 있다. (중략) 마치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군자와 같고 덕과 의를 쌓으며 저절로 귀함과 실속이 있으니 가히 상서롭다 일컫지 않겠는가.'원림은 반드시 건축물을 향하고 건축물은 그 원림을 끌어들이며 그가 추구하는 도를 상징하는 형태로 지어진다. 연못을 중심으로 서쪽에 경정, 북쪽에 주일재가 배치되어 있다. 정자인 경정은 손님을 맞고 제자를 가르치던 공간으로 서석지의 중심 건물이다. 경정의 경(敬)은 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이다. 퇴계는 경을 도의 관문이고 덕의 기본이라 했다. 주일재는 서재다. '주일'이란 '한 가지 뜻을 받든다'는 뜻으로 경을 실천하는 장소가 된다. 경정 마루에 앉으면 낮은 담 너머로 멀리 1㎞ 넘게 세상이 보였다고 한다. 정영방은 성리학자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꽃과 풀, 모든 물상이 성리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원림을 이루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경정잡영(敬亭雜詠)' 32수를 시로 남겼다.'일이 있으면 도움을 바라지 말고 / 깊은 못에 임한 듯 더욱 조심하라 / 늘 깨어있는 자세로 세상을 관조하며 / 서암승 같이 하지 않고 애쓰리라.' (경정. 한시 해석은 신두환 안동대 교수의 '석문 정영방 선생의 원림과 문학' 참조)사방 온 벽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정영방은 날마다 단정히 앉아 주자와 퇴계를 읽었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이시명(李時明), 조전(趙佺), 조임(趙任), 신즙(申楫) 등과 교유하며 시를 짓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깊고도 넓은 그윽한 골짜기에 / 바르게 앉아서 성정을 다스리니 / 해는 기울어 뜰의 반은 그늘이 들고 / 골짜기 새들과 마주하여 시를 읊노라.'(유간, 그윽한 골짜기)그의 시는 당대에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남극관(南克寬)은 정영방의 시를 가리켜 "체기(體氣)가 높고도 오묘하며 사람을 흥기시킴이 심원하다"고 했고, 권상일(權相一)은 "담박하여 옛 당나라 사람들 시의 품격을 얻었다"고 칭송했다.바람이 순하고 볕이 따뜻하면 지팡이를 짚고 산천을 거닐었다. 바위와 소나무 아래를 배회하고 주위의 자연을 향유하며 그 경치를 시로 노래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신선이라 했다. 1650년 봄, 기력이 쇠해진 정영방은 선영이 있는 안동으로 돌아갔다. 6월에는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7월7일 아들에게 부탁해 머리를 감고 손톱을 깎은 뒤 편안히 운명했다. 74세였다. 그의 문집에는 주옥같은 시편이 470여 편이나 실려 있다. 정영방의 문학은 영조 때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편찬하기 위한 사료로 수집돼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그가 류덕무(柳德茂)에게 보낸 글이 있다. '텅 빈 골짜기 그윽한 난초여 / 구름 사이로 미인을 바라봄이여 / 해는 함지에 떨어지려 하니 / 푸른 계수나무가 시들고 아름다운 꽃이 마르네 / 시절은 다시 좋아지기 어렵도다 / 밝도다 멀리 떠날 수 없음이여.' 백이숙제의 고사를 변용해 암울한 시대를 표현한 것이지만, 현대의 청자에게 이 글은 이제 가고 없는 고집쟁이 시인에 대한 그리운 서정을 느끼게 한다. 이제 7월, 연꽃 피는 시절이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신두환, 석문 정영방의 원림과 문학, 한문고전연구, 2018.정영방이 조성한 서석지. 연못 뒤쪽은 정자인 경정으로 손님을 맞고 제자를 가르치던 공간으로 서석지의 중심 건물이다. 수직사, 주일재, 경정, 서석지로 이뤄진 정영방의 별서정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정영방은 서석지 북쪽에 네모난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사우단 뒤로 서재인 주일재가 보인다.연당리 고샅길에 들어서면 서석지의 담장 너머로 400년 이상 된 은행나무와 맞닥뜨린다. 정영방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2021.07.13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7] 수암 류진의 '위빈명농기'…류성룡 아들 류진 저술…17세기 전반 상주 일대 농법 생생하게 기록
1991년경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씨(豊山柳氏) 서애(西厓) 종가의 충효당에서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 필사본이 발견됐다. 표지를 비롯한 일부분이 훼손돼 있었고 군데군데 탈락된 글자들도 많았지만 '위빈명농기'는 17세기 전반기 경상도 상주(尙州)지역 일대의 농법을 담고 있었다. 앞서 나온 농서의 구조와도 달랐고 당대의 농법 수준이나 논리체계를 따른 것도 아니었다. '위빈명농기'는 지역의 농업 환경에서 유래한 특정한 농업기술과 지역의 내부 또는 외부에서 확보한 특별한 견문(見聞)이 첨가된 현실적인 농법의 지역성을 보여주고 있었다.1617년 중동면 우물리 가실로 분가경험·농부 고견·견문 종합해 편찬이앙법·제초법 등 독특한 기술 소개조카 류원지 1671년 내용 확대 개편#1. 조선시대 지역 농서의 등장우리나라 풍토에 맞춘 최초의 농서(農書)는 세종 때인 1429년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設)'이다. 농사직설은 충청·전라·경상도 등 삼남 지방의 선진 농법과 관행 기술을 조사 정리한 것으로 이는 농사를 장려하는 권농(勸農)의 지침서가 되었고 이후 간행된 여러 가지 농서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16세기까지 조정에서는 권농의 직무를 착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지방 수령에 대한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농서 편찬은 농업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관료(官僚)에 의해 수행됐고, 대부분 난해한 한문으로 돼 있어 최종 수요자인 농민용이라기보다 지도자용이었다.이와 함께 지역의 자연환경과 농법의 차이를 정리하고 편찬할 필요성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점차 고조되었다. 16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지역의 농업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지역농서를 편찬하는 작업이 향촌의 지식인들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러한 지역농서는 향촌의 실제 농업기술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농법을 설명하고 정리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각종 질병과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또한 17세기는 소빙기의 절정으로 냉해와 봄 가뭄, 폭염과 장마 등 이상기후가 이어지면서 농업은 피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지역농서 편찬은 현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의 권농책이나 조세 확보를 겨냥한 농업기술 개선책은 아니었다.#2. 수암 류진의 '위빈명농기''위빈명농기'를 처음 발견하고 외부에 알린 사람은 이수건(李樹健) 영남대 교수다. 그는 이 농서의 저자로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지목했다. 류진은 선조 15년인 1582년 한양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안동 하회마을에서 살았다. 그리고 36세인 1617년에 상주 중동면 우물리 가실(가사리)로 분가했다. 우물리는 팔공산·일월산·속리산 등 세 산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胃川)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터전이다. 가실은 위천에 연한 마을로 개척 당시 가시덩굴이 우거져 '가시리'로 불리다 이후 선비(士)가 많이 배출돼 '가사리(佳士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류진이 가사리에 살던 집은 허술한 초가였다. 그는 위천의 초가에서 '위빈명농기'를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류진의 문집인 '수암집(修巖集)' 권3에 '제위빈명농기후(題渭濱明農記後)'가 있다. 본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위빈명농기'를 저술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애초에 오곡(五穀)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농업기술에 무지했지만 하회에서 상주에 이거(移居)해 생활하면서 점차 농사일에 관심을 가지고 농사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근 노농(老農)에게 밭 갈고 김 매는(耕耘) 방법을 물어서 이를 기록함과 동시에 보고 들은 것을 추가해 위빈명농기를 지었다' 자신의 농사 경험과 노농의 고견(高見), 그리고 이러저러한 견문(見聞)을 종합해 농서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빈명농기'를 저술한 이유를 '식력지계(食力之計)'로 삼고자 한 것이라 했다. '위빈명농기'가 발견된 초기 학계에서는 한동안 저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수암의 조카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의 문집인 졸재집(拙齋集) 권13에 '위빈명농기-전사문(田事門)'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문서들과의 대조와 연구를 통해 현재는 1618년 무렵 류진이 '위빈명농기'를 지었고, 이를 근간으로 조카인 류원지가 여러 지역의 사례 등을 더 보충해 1671년 '전사문(田事門)'으로 확대 개편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류원지는 8세 때 조부 류성룡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부의 타계 후에는 작은아버지인 류진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37세에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나 다음해인 1636년 류진이 세상을 떠나자 귀향했다. 하회의 충효당은 류원지가 지은 것이다. #3. 위빈명농기의 농법위빈명농기의 목차를 보면 종자 준비, 땅 가는 법, 잡초 없애는 법, 밭을 다스려 곡물 파종하는 법, 곡물 파종 적기, 황무지 개간하기, 황무지 판별법, 전답에 거름을 주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법, 올벼 무논 재배법, 건파 재배법, 못자리 거름주기, 늙은 모 되살리기, 모 되심는 법, 화누법, 모 기르는 법, 마른 모 기르는 법, 볍씨, 보리 재배법, 목화 재배법, 녹두, 팥, 콩, 참깨, 잇꽃(紅花), 삼(大麻), 피, 수수 등 27항에 이른다.먼저 종자 준비를 강조하면서 충해를 피하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 땅을 가는 경지법(耕地法)에서는 논밭·갯밭(浦田) 등 토양의 현황에 따라 봄갈이(春耕), 가을갈이(秋耕)의 차이, 단단한 흙(强土)를 약하게 만드는 방법, 무른 흙(弱土)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 등이 소개돼 있다. 그리고 영남 일대의 견문기록을 소개하면서 간 논을 다시 갈아 뒤집는 반경(反耕)을 여러 번 하면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황무지 개간(開墾)에 관련된 내용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갯밭의 개간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드시 소 7~8마리에 대형 쟁기를 메어서 갈아주고, 또한 50여 명의 사람을 써서 풀뿌리를 세밀하게 제거해야만 파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기경(起耕) 방식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실제 농사 현장에서 터득한 생생한 경험과 견문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논농사에 있어서 조선 후기의 가장 특징적이고 대표적인 농법은 이앙법(移秧法)이다. 이앙법은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운 다음에 본논으로 옮겨 심는 재배방법을 말하는데 바로 오늘날의 모내기다. 조선 초기의 이앙법은 가장 불리한 토양에서 한정적으로 행해지던 것이었다. 본답의 모 식재 시기를 상당 기간 미룰 수 있다는 이점은 냉해와 봄 가뭄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이로 인해 물을 채운 논에 직접 씨를 뿌리는 수경직파(水耕直播)가 중심을 이루던 수전농업(水田農法)은 급격하게 이앙법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위빈명농기'의 수전농법도 기본적으로 이앙법을 채택하고 있다. 무논에서 모 기르는 법, 물이 부족해 적시에 모내기를 못해 모가 늙어버렸을 경우 그 모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법, 논에 물이 부족해 잡초가 무성하게 되었을 때의 제초법, 못자리에 비료를 주는 시비법(施肥法), 가뭄이 들었을 때 마른 모 기르는 양건앙법(養乾秧法) 등 이앙법에 관련된 다양한 기술과 방책을 마련했다. 특히 가뭄에 대처할 수 있는 제초법과 못자리 만드는 방법은 다른 농서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새롭고 독특한 기술들이다. 이러한 진전된 이앙법 관련 기술은 1655년 신속이 편찬한 '농가집성(農家集成)'에 경상도에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동일하게 수록돼 있다. 이는 모내기 기술체계의 발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위빈명농기'가 조선 농서 편찬의 흐름을 검토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대단히 의미 깊은 농서임을 말해준다. 수암 류진은 인조반정 이후 학행(學行)으로 추천돼 외직으로는 봉화현감·청도군수를 역임했고, 내직으로는 형조정랑을 지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가실의 초가는 고손자인 류성노(柳聖魯)에 의해 바로 이웃한 우물리 우무실로 옮겨졌다. 현재의 수암종택이다.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등 쟁쟁한 유학자들이 바로 수암종택에서 태어나 퇴계학을 계승하며 풍산류씨 가문의 세력을 높였다. 그리고 상주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주곡(主穀)인 미곡(米穀)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이름 높게 남아 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상주시 누리집. 상주문화원 누리집. 비교민속학회 누리집.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지명유래집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우무실에 있는 수암종택. 수암 류진이 세상을 뜬 후 그가 살던 가실의 초가를 이웃 마을 우무실로 옮겨온 것이 지금의 수암종택이다. 수암종택은 풍산류씨 우천파의 종택으로 류심춘·류후조·류주목 등 쟁쟁한 유학자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가문의 명성을 더 높였다.수암종택의 우천세가 현판.'수암집' 권3에 수록된 '제위빈명농기후(題渭濱明農記後)'. 어떤 과정을 거쳐 위빈명농기를 저술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021.07.12
[인재향 영양 .1] 옥천 조덕린 - 영남유생의 정신적 지주…붕당 폐단 상소 '십조소'로 질곡의 노후
■ 시리즈를 시작하며=영양은 천혜의 자연과 함께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향(人材鄕)으로 손꼽힌다. 여중군자 장계향 과 서석지를 조성한 석문 정영방을 비롯해 국난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오시준·오수눌 부자, 오극성·오윤성 형제, 항일의병장 벽산 김도현,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불꽃처럼 살다간 젊은 독립투사 엄순봉, 천재화가 금경연, 청록파 시인 조지훈, 현대시의 거목 시인 오일도 등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인재들의 고장이 바로 영양이다. 그들의 올곧은 정신문화는 영양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자 '미래 영양'을 이끌어갈 원동력이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영양이 낳은 인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인재향 영양'시리즈를 연재한다. 1편에서는 영남 남인의 상징 옥천 조덕린에 대해 다룬다.영양 일월산 아래 호리병 같은 골짜기에 한양조씨 집성촌인 주실마을이 있다. 마을 뒤로는 일월산에서 흘러온 세 개의 완만한 봉우리가 물 위에 뜬 연꽃 같은 부용봉(芙蓉峯)으로 펼쳐지고, 마을 앞으로는 갈미봉·문필봉·연적봉·흥림산·독산이 서에서 동으로 이어진다. 마을 중앙으로는 장군천이 흘러 양편으로 넉넉한 땅을 이루었다. 문필봉을 독대하고 장군천을 내다보는 마을의 중앙부 가장 안쪽, 일월산의 두 번째 봉우리에서 지맥 하나가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꺾인 구릉지에 옥천종택이 자리한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의 집이다. 그는 영조대 초반 영남의 사론을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안위조차 돌보지 않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영남 남인 질곡의 상징이다. #1. 옥천 조덕린주실에 한양조씨가 터를 잡은 것은 인조 8년인 1630년경이다. 입향조는 호은(壺隱) 조전(趙佺)이다. 옥천 조덕린은 호은의 증손자로 1658년 주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조군(趙 ), 어머니는 풍산류씨 류세장(柳世長)의 딸이다. 옥천은 7세 때부터 숙부인 조병(趙 )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하회 외가에도 드나들며 외조부 류세장 등에게 수학했다. 장성해서는 영남 남인의 영수였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퇴계학의 학맥을 잇게 된다.옥천은 1677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숙종 17년인 1691년에 문과에 합격해 승문원 정자(正字)에 임명됐다. 당시 그는 '근년에 기주관(記注官) 중 많은 인재를 보았으나 기사(記事)가 유창하고 체재(體裁)를 구비한 인재로 조덕린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제원역 찰방,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지내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귀향했다. 그해 겨울 예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 34년인 1708년 옥천은 강원도 도사에 제수되어 다시 관직에 나갔다. 당시 관동지방은 매년 농사를 짓는 정전(正田)과 돌려가면서 농사를 짓는 속전(續田)을 구분하고 정전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사 송정규가 모든 토지를 정전으로 간주하고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해 옥천은 시정을 건의한다. 감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옥천은 사임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조대 초반 영남사론의 대표인물직언서슴지 않고 상소 수없이 올려반대파 미움 받아 관직·귀향 반복고향선 학문 몰두하며 제자들 양성십조소 올렸다가 일흔나이에 유배대의 위해 목숨도 돌보지 않은 충신'영원토록 우러러 볼 어른'이라 칭송이후 고산현감에 제수되었지만 '백수(白首)로 현감의 녹을 먹는 것이 태백산중의 한 끼 밥만 같지 못하다'며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 연간 그가 올린 상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당시는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던 시절이었고 그는 관직생활과 귀향을 거듭했다. 옥천종택 대문이 높다. 구릉지에 지어져 마을에서도 전망 좋은 집이다. 종택은 17세기 말의 전형적인 양반주택으로 살림채인 정침, 글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교 없는 살림집이 검소하고 마루와 석축 아래 디딤돌이 예쁘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지은 초당은 조덕린의 장자인 조희당(趙喜堂)이 부모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게 지었다고 한다. 사당은 1790년에 건립된 3칸 건물로 정침의 우측 뒤편에 자리한다. 종택의 오른편으로 돌계단을 오르면 창주정사(滄洲精舍)에 닿는다. 옥천이 문생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창주는 그의 별호다. 창주정사에 대한 역사는 기록마다 일부 차이가 있다. 이건기에 따르면 옥천이 51세 되던 1708년에 태백산 노고봉 기슭에 세운 것이라 한다. 이후 1720년에 청기면 임산리(霖山里)로 옮겨 문생들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낼 곳으로 삼았다. 150여 년이 흐르면서 정사가 소실되자 사림에서 강당을 재건해 임산서당(霖山書堂)이라 칭하고 유지를 받들어 강학을 이어왔다고 한다.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1990년이다. 옥천선생문집에는 옥천이 73세가 되던 1730년에 태백산 노고봉 기슭에 세웠으며, 그의 사후 후손인 마암 조진도가 사미정 인근으로 이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사가 퇴락하자 19세기 중반 사림에 의해 청기면 정족리로 이건되었으며, 화재로 인해 소실되자 중건하면서 정사의 명칭을 임산서당으로 개칭했다. 서당이 폐쇄되자 199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으며, 명칭 또한 임산서당에서 창주정사로 다시 환원했다. 창주정사 현판은 선생의 유묵을 집자해 새긴 것이다. 마루에는 임산서당과 창주재(滄洲齋) 편액이 걸려 있다. #2. 영남 유생들의 정신적 지주1725년 영조가 등극했다. 그해 옥천은 2월부터 10월까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등에 끊임없이 제수된다. 당시 대신은 옥천을 추천하면서 '40년을 산림에서 독서하여 문장과 경학이 당세 제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옥천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20일 사간직을 사양하면서 붕당 간 대립의 폐단을 논하는 10가지 의견을 상소한다. 이른바 '십조소(十條疏)' 또는 정명론(正明論)이다. '어리석은 말씀을 드리니, 성학(聖學)을 밝게 닦아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실덕(實德)을 닦아서 하늘에 응답하시는 것이며, 적임자를 정선(精選)하여 정사를 세우는 것이며, 백성을 보호하여 근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며,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비용을 줄이는 것이며, 군사(軍事)의 내실을 검토하여 뒷날을 대비하는 것이며, 형옥을 신중히 하여 형벌을 너그러이 하는 것이며, 기강을 진작시켜서 풍속을 권장하는 것이며, 공도(公道)를 넓혀서 사사로움을 없애는 것이며, 이름과 실질을 바르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무릇 이 열 가지는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말이며 시대의 절박한 폐단에 대한 것인데, 신이 곧 감히 일에 관련된 의견을 조목별로 만들었으니 삼가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상소에는 학문 수양, 인재 선발, 백성 보위에 최선을 다하고, 사심이 아닌 공공의 도리를 실현하라는 등의 열 가지 건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지만 이 상소문으로 인해 옥천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함경북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된다. 치열한 정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영조에게 '정명'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정명'은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유가에서는 보편적인 사상이지만 현실 권력을 상대로 했을 때는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왕에게 왕다워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정통성을 흔드는 의도로 비칠 여지가 있었고 반대파 인사들이 집요하게 문제 삼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이로 인해 옥천은 영남 유생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게 된다. 유배지로 떠나는 그에게 도성과 영남의 사대부들은 앞 다투어 돈과 베를 내어 노자를 보탰고 '영원토록 우러러 볼 어른'이라 칭송하였다. 그는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3. '근심 없이 청산에 이제 다시 왔구나'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옥천은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로 의병을 결집해 활약했다. 난이 평정되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된 그는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등 잠시 관직 생활을 하지만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학문에 몰두하며 원근에서 몰려든 제자들을 길렀다. 영조 12년인 1736년 옥천은 서원의 무분별한 건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다시 과거의 '정명론' 상소가 거론되었고 결국 옥천은 노론의 탄핵을 받고 체포된다. 왕은 '조덕린은 보통 죄수와 다르니 수갑을 채우지 말고 가택을 수색하지 말 것이며, 압송 도중에도 노인의 기력을 손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심문이 끝나자 대신 김대로는 '정인군자(正人君子)를 억울하게 해칠 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정명론'이 그의 운명을 흔든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이 사직소를 올리며 스승 갈암 이현일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노론 측에서는 이 기회를 타 다시 옥천의 '정명론'를 거론한 것이다. 결국 왕은 옥천을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을 내린다. 유배지로 향하던 길, 그는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1737년 여름이었고, 그의 나이 80세였다. 그는 '생사에는 한도가 있으니 천명을 어길 수는 없다. 목욕은 깨끗하게 하고 염하고 묶는 것은 반드시 단조롭게 한 후 엷은 판자와 종이상여를 만들어 말에 실어서 돌아가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부고가 주실에 전해지기 전, 족제(族弟)인 주강(株江) 조시광(趙是光)의 장남 조서규(趙瑞圭)가 옥천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속에서 옥천은 선대의 묘 아래에 있는 상원리 비리재 재사를 배회하며 말했다 한다. '근심 없이 청산에 이제 다시 왔구나.'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옥천선생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옥천종택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있는 옥천 조덕린의 집으로 17세기 말의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다. 살림채인 정침, 글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1.06.29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6] 석문사와 보굴암 - '금지된 사랑' 좇아 도피행각 벌인 세조 딸과 김종서 손자
기묘한 바위들이 하얗게 빛나 백악(白岳)이다. 흰 봉우리가 백 개나 돼 백악(百岳)이라고도 한다. 백두대간의 능선에서 갈라져 나와 속리산 문장대에서 화양구곡으로 뻗은 능선에 솟아 있는 백악산이다. 산의 북동쪽 자락인 상주 화북의 입석리 옥양골에 들어서면 계곡물 구르는 소리, 숲을 휘젓는 산새소리, 솔가지 흔드는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그러다 사방이 기암과 솔숲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는 평평한 땅이 나타난다. 그곳에 부처님의 현몽으로 창건된 사찰 석문사(釋門寺)와 오래된 설화가 깃든 보굴암(寶堀岩)이 자리하고 있다.세조에 항거한 공주 숨어 살던 곳서유영의 야담집 '금계필담' 기록암벽 바위틈 문 달아 미륵불 모셔스님이 꿈에 본 장소 석문사 창건절 아래 20m 옥량폭포 자태 절묘#1. 석문사와 보굴암샘처럼 말간 대지에 석문사 극락보전이 서 있다. 팔작지붕이 활짝 팔을 펼친 듯 날렵해 웅장하면서도 상쾌하다. 극락보전은 중요무형문화재 74호인 성재(誠齋) 신응수(申鷹秀) 대목장이 지었다고 한다. 그는 숭례문 해체와 보수작업을 했고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한 장인이다. 오른쪽 뒤편에는 자그마한 산신각이 조용하다. 석문사는 극락세계의 주인인 아미타불을 모신 기도 도량으로 1990년 이굉용(李宏龍)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경내의 큰 바위에 석문사를 창건하게 된 내력이 새겨져 있다.어느 날 스님의 꿈에 가사를 곱게 입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한다. 스님은 부처님과 함께 황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길을 달리고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다가 비탈길을 내려가 어느 들판에 섰다. 부처님이 손수 땅을 파헤치자 땅속에서 청룡과 황룡이 불을 내뿜으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때 부처님이 손가락으로 흰 바위로 뒤덮인 산을 가리켰는데 그곳에 거북 모양의 큰 바위산이 보였다. 바위산으로 향하자 온통 바위투성이인 산에서 길이 열렸다. 부처님이 어느 바위 굴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 팔베개를 한 채 모로 누우니 총과 칼로 무장한 수많은 군인들이 나타나 부처님을 호위했다. 굴 아래에는 작은 초가 한 채가 있었는데 노인 내외가 키질을 하고 있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 위해 쌀을 손질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눈처럼 흰쌀을 수레에 싣고 굴로 향하는 그들을 보며 스님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후 스님은 꿈에서 본 들판과 바위산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입석리 들판이었고, 바위투성이 백악산과 보굴암이었다.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짓고 석문사라 했다. 석문(釋門)은 '부처님을 맞이하러 나아가는 문'이란 뜻이다. 극락보전의 오른편 계곡 다리를 건너 소나무 숲길을 잠시 걸어가면 거대한 바위들이 층을 이룬 암벽의 그늘 아래 약사여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암벽의 바위 틈에 작은 문이 보인다. 보굴이다. 굴 깊은 곳에 미륵불상이 있다고 한다. 그 뒤는 가파른 층벽으로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가면 왼쪽으로 깜깜하고 좁은 통로가 나 있다. 30m쯤 들어가면 뒷굴이 나오는데 방 하나와 부엌 하나가 될 만한 크기라 한다. 다시 위로 오르면 밖으로 나와서 산등으로 오르게 된다. 현재 스님의 거처로 보이는 이곳에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숨어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조에게는 공주 하나가 있었다. 어질고 덕이 많아서 단종이 물러나고 김종서와 육신(六臣)이 죽자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않았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져 옮겨지는 일이 발생하자 공주는 울며 옳지 못한 처사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세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분노했다. 이에 정희대비가 유모를 불러 보석을 주면서 공주를 데리고 도망가도록 했다. 충북 보은에 도착한 공주와 유모는 한 청년을 만나 함께 살게 된다. 그렇게 1년 정도 사는 동안 청년과 공주는 사랑하게 되었다. 둘은 혼인을 하면서 서로의 신분을 밝히게 된다. 공주는 세조의 딸, 청년은 김종서의 손자였다. 이는 고종 때 서유영(徐有英)이 저술한 야담집(野談集)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조는 말년에 사찰을 다니며 참회했는데, 하루는 공주가 사는 마을을 지나다 자신을 몹시 닮은 아이를 만났다고 한다. 그 아이를 따라가 공주를 만난 임금이 크게 기뻐하면서 가마를 보낼 테니 서울로 오라고 했다. 다음날 승지를 보냈지만 공주는 이미 가족과 함께 도망치고 없었다.야사에 의하면 세조는 자신의 딸이 숨어 살고 있음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족보에서 이름을 지웠다고 한다. 더 이상 천륜을 저버리지 않고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었을까. 그들이 숨어 살던 굴은 결국 원수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굴이라 하여 '보배로운 굴'인 '보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세조가 죽은 뒤 그들은 보굴암을 떠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보굴암은 소원을 성취하는 기도처로 이름이 났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는 김만성 스님이 보굴암 아래 초암(草庵)을 짓고 암울하고 흉흉하던 시절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기도처로 삼았다. 초암은 1970년경에 미등록 사찰이라 하여 철거됐다. 보굴 앞에 서면 세상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솔숲 너머로 입석리의 들판과 집들이 애틋하게 평화롭고 첩첩으로 굴곡진 속리산의 능선들이 후련하다. #2. 옥량폭포보굴암 아래쪽에 석문사 깊은 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폭포가 돼 떨어진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돌다리 아래로 숨어든 옥류가 암벽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절묘한 모습이다. 이 천연 돌다리의 자태가 마치 옥(玉)으로 다듬은 대들보(樑) 같다 하여 옥량폭포라 부른다. 옥량은 길이 약 20m, 너비가 약 2m 되는 평평하고 기다란 바위다. 층층의 암반 위에 받침돌이 양쪽으로 놓였고 그 위에 옥량이 걸쳐져 폭포의 수구는 마치 작은 하늘 문 하나를 열어 놓은 듯 환하다. 위에서 오는 물은 큰 바위를 늘여 세워 가리고, 밑으로 흐르는 물은 단애로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바위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강건하지만 물의 흐름 따라 비탈져 다리를 건너려면 매우 조심해야 한다. 계곡물은 옥량 위 바위 밑에 청담(淸潭)을 만들어 한숨 쉬다가 넓은 암반에 잔잔한 비늘을 그리면서 넓게 퍼진다. 그리고는 살며시 옥량 밑으로 모여들어 그대로 떨어진다. 억겁을 떨어지고 또 떨어져 바위는 닳고, 골이 지고, 뚫어져 구멍이 나고, 다시 청담을 이루고 또 흘러간다. 너른 반석과 굵은 바위들이 넘너른하다. 바위 위에는 소나무들이 저마다의 풍취로 섰고, 바위틈에는 산 꽃이 피어난다. 조그마한 모래밭에는 갈대와 땅버들이 흔들린다. 층을 지어 대가 되고, 높이 솟아 누각이 되고, 넓게 펼쳐져 누마루가 되었다. 이 모두가 하늘의 조화다. 폭포 옆에 작은 굴이 있다. 겨우 한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규모다. 내부에는 기괴한 형상의 바위들이 엉켜 있고 한층 위에 외부로 통하는 날목이 있다고 한다. 이 굴이 보굴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야사'는 '민간에서 사사로이 기록한 역사', '야담'은 '야사를 바탕으로 흥미롭게 꾸민 이야기'다. 증거는 없지만 심장을 울리는 이야기, 마음에 무언가가 쿵 부딪는 이야기다. 욕망, 증오, 분노, 용서, 사랑으로 속이 뜨겁다. 숲을 휘젓는 산새 소리에 눈이 맑아지고 솔가지 흔드는 바람에 이마가 상쾌해진다. 계곡물 구르는 소리에 창자가 씻기는 듯 시원하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상주시 누리집. 상주문화원 누리집. 한국지명유래집. 한국콘텐츠진흥원 누리집.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보굴암. 암벽의 바위틈에 작은 문(점선 부분)이 보이고, 거대한 바위들이 층을 이룬 암벽의 그늘 아래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상주 화북면 입석리에 자리한 석문사. 석문은 '부처님을 맞이하러 나아가는 문'이란 뜻이다.석문사 아래쪽에 위치한 옥량폭포. 천연 돌다리의 자태가 마치 옥(玉)으로 다듬은 대들보(樑) 같다 하여 옥량폭포라 부른다.
2021.06.28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5] 화북면 견훤산성...영남~중부지방 잇는 전략 요충지…후백제 견훤이 쌓았다고 전해져
산성은 산봉우리를 휘감아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멀리서 보면 봉우리를 단단하게 묶은 무명 리본처럼 보이기도 해 태평스러운 긴장으로 죄여온다. 경사진 산길을 구부정히 오르다 문득 고개를 들면 갑자기 거인처럼 일어선 장대한 성벽에 시선이 얼어붙는다. 다가갈수록 거인은 점점 까마득해지고 더욱 단단해진다. 이윽고 하나하나의 돌이 확인될 만큼 가까워지면 그 치밀함과 견고함에 감탄한다. 이 산성은 후백제의 맹주 견훤(甄萱)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견훤산성이다. #1. 견훤산성경북 상주의 서북쪽 끝인 화북면은 백두대간 화령을 기준으로 북편에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속리산의 준봉이 줄줄이 뻗어 내리고, 오른쪽으로는 도장산·청화산·대야산이 이어지는 골짜기 땅이다. 서쪽으로는 충북 보은, 동쪽으로는 경북 문경과 접한다. 면의 대부분이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산골짜기지만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용유천변에 좁지만 적당히 농사지을 만한 평지가 펼쳐져 있고 면소재지가 들어서 있다. 천과 나란한 49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둥그런 봉우리와 정상부를 조여맨 성이 보인다. 견훤산성이다. 봉우리는 속리산 문장대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온 해발 541m의 장바위산이다. 49번 도로에서 속리산 시어동 계곡 방향으로 빠져 나가면 장암리 장바위마을이다.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우측에 견훤산성 700m 이정표가 나온다. 나무계단으로 시작되는 산길은 수월찮은 흙길로 이어지고 하늘이 열릴 즈음 수목의 줄기 너머 밝은 성벽이 보인다. 초입에 집채만 한 바위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다. 바위의 꼭대기 위로 고개를 치켜든 성벽이 보이고 그로부터 겹겹이 쌓인 수많은 돌의 무리가 섬밀한 몸체를 이루며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의 입구를 연다. 훅 하고 바람이 덮쳐 온다.전설에 따르면 견훤산성은 후백제 견훤이 성을 쌓고 웅거하며 북쪽에서 경주로 향하는 공납물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상주읍지(尙州邑誌)'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했으며,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대동지지'에는 '상주 서쪽 50리에 있는 화령고현성(化寧古縣城)을 세상에선 견훤산성이라 전하나 잘못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견훤이 쌓은 성이라 전할 뿐 이곳이 그의 근거지였다는 기록은 없다. 성의 입구는 남동쪽에 위치한다. 원래 동문이 있던 자리인 듯하다. 좌우로 산성의 외벽이 명확한 형태를 드러낸다. 강고하고 강경하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처럼 견고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물결처럼 부드러운 곡선이다. 견훤산성은 대체로 남북으로 긴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서쪽 성벽은 장바위산의 정상을 감싸면서 축조돼 있고 북쪽과 남쪽은 9분 능선에서 약간 아래에 걸쳐 축조돼 있다. 전체 길이는 650m, 폭은 4~6m 정도다. 천연의 지형지세를 이용해 푹 꺼진 골짜기는 높이 채우고 솟아오른 암벽에는 그 위에 더해 쌓았다. 그래서 성벽의 높이는 7~15m로 다양하다. 돌들은 손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는 직사각형의 화강석이다. 두께가 10㎝ 내외인 크고 작은 돌들이 정연한 단을 이루며 쌓여 있고 잔돌 끼움도 보인다. 대단한 집중력과 엄청난 공력이다. 성 전체 길이 650m…폭은 4~6m망루 오르면 화북면 일대 한눈에성안서 기와·토기조각 다량 출토학계 신라 한강 진출 교두보 추정#2. 감시와 방어를 위한 요새성안 둘레길을 따라 간다. 집수지(集水池)가 복원돼 있다. 물을 모으는 시설이다. 성벽 아랫 부분에는 배수구(排水口)도 보인다. 성안에서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이는 성내에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오솔길에서 만나는 성안의 대부분은 멋진 정글이다. 성벽은 무너진 곳도 있고 기울어진 곳도 있고 상단이 훼손된 곳도 있다. 몹시 인상적인 것은 계곡부에 협축식(夾築式)으로 쌓아올린 높고 장대한 성벽이다. 협축은 성벽의 안팎에서 성체를 올려쌓는 것을 말한다. 성벽 위에 오르면 성안과 성 밖이 모두 낭떠러지인 형태다. 수직으로 솟구친 이끼 낀 성벽에 매미처럼 붙으면 멋진 정글과 가없는 하늘에 갇힌다.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성문터인 문지(門址)가 2개소, 적의 접근을 관찰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킨 치(雉)가 3개소 있다고 한다. 서문지는 확인된다. 서문지 아래와 동문지 옆의 돌출부는 치로 추측된다. 성의 입구 쪽 일부분만 복원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 시설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일반인의 눈에도 분명한 것은 망대로 여겨지는 말발굽 모양의 곡성(曲城)이다. 망대에 오르면 화북면 일대를 지나는 교통로가 한눈에 보인다. 동북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백두대간의 청화산이다. 산 아래쪽에 보이는 고개는 늘재다. 늘재는 충북 괴산으로 통한다. 동남쪽으로 화북면소재지인 용유동이 훤하다. 용유동 동쪽으로는 용유계곡과 쌍룡계곡의 가파른 벼랑이 문경으로 향한다. 남쪽으로는 갈령 넘어 상주로 이어진다. 과거 경상도 상주와 문경에서 괴산·보은·청주 등 충청도로 가는 길은 현재 49번 지방도로가 가장 수월했다고 한다. 견훤산성은 이 도로의 길목에 위치한다.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성의 축성 연대를 후삼국 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성을 쌓은 방식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거의 유사하다.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때인 470년에 쌓고 소지왕 때인 486년에 개축한 것으로 백제에 대비하고 고구려를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였다. 학계에서는 견훤산성 역시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이자 방어처로서 축성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견훤은 867년 상주 가은현(현재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비장(裨將)으로 활약하다 효공왕 4년인 900년 완산주(完山州·현 전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이후 936년 사망하기까지 그의 흔적은 합천·청도·영천·경주·진주·군위·안동 그리고 상주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견훤산성과 견훤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을 찾을 수는 없지만 또 전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 않을까. 반쯤 허물어진 옛 성벽과 키 큰 소나무가 하늘에 걸려 있다. '가을날 옛 성 마루 흰 구름 가니/ 한 세상 영웅들의 간 곳이 어디메뇨/ 백제의 흥망성쇠 천 년의 한이/ 늦은 산 초동들의 한 가닥 노래로세.' 채주환이라는 이가 노래한 견훤산성이다. 삼국이든 후삼국이든 영웅들의 시대였다면 감시와 방어에 탁월한 요새였겠지만 지금은 전망대로서 일품이다. 무엇보다도 문장대에서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속리산의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성은 1시간 정도면 돌아 볼 수 있다. 오솔길은 그리 쓸쓸하지 않다. 견훤산성은 경북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돼 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상주시 누리집. 상주읍지. 한국지명유래집. 한국콘텐츠진흥원 누리집. 문화재청 누리집. 백영종, 5~6세기 신라산성 연구 : 소백산맥 북부 일원을 중심으로, 2008.▼화서면 청계마을 견훤사당견훤 신위 모신 19세기 전반 건물동제 지내는 민속신앙 구심점 역할견훤산성의 남쪽인 화서면 하송리 청계마을에는 견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한 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간소한 건물이지만 예스럽고 아담한 정취가 있다. 사당은 늦어도 19세기 전반에 창건되었고 초기의 모습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동제를 지낸다. 마을 민속 신앙의 구심점에 견훤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상주 견훤사당은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돼 있다.상주시 화북면에 있는 견훤산성. 후백제 견훤이 성을 쌓고 웅거하며 북쪽에서 경주로 향하는 공납물을 거둬들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축성연대가 후삼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산성 안의 둘레길을 따라가면 물을 모으는 시설인 집수지를 볼 수 있다.견훤의 신위를 모신 견훤사당.
2021.06.14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4] 병풍산 고분군과 병풍산성
반달처럼 둥글고 푸른 무덤들이 있다. 어느 봉분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사람에 의해 훼손된 무덤들도 있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깎여진 봉분, 파헤쳐진 가장자리, 정신이 메마른 자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검은 도굴갱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돌방(석실)이 드러나 있는 무덤도 있다. 벽석에 볕이 들고 개석(뚜껑돌)에는 아름드리 참나무의 뿌리줄기가 드리워져 있다. 무덤이란 어느 날 누군가 생을 다했다는 기록, 또한 사라진 한 세계. 여러 사람들과 그들의 사회가 여기에서 일어났다 스러졌다. 약 1500년 전의 일이라 한다. ◆병풍산 고분군상주시내 동남쪽에 병풍산(屛風山)이 솟아 있다. 산의 동쪽 산록은 낙동강과 맞닿아 있다. 북쪽에는 병성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천 너머는 사벌국면의 너른 들이다. 병풍산 서쪽으로는 25번 국도가 지나간다. 옛 영남대로다. 또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국도와 교차하며 놓여 있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상주IC가 자리한다. 봉우리는 두 개다. 정상은 해발 365.6m로 서쪽에서 상주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그보다 낮은 봉우리는 294.8m로 동쪽에서 낙동강과 강 너머 중동면의 너른 들판을 조망한다. 두 산봉우리 사이에는 북쪽으로 물을 내려 보내는 큰 골짜기가 있고 이를 에워싼 오래된 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사벌국 고성은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사벌국의 왕릉이라 한다.'병풍산의 북동쪽에서 북서쪽에 이르는 모든 능선에 무덤들이 무리지어 누워있다. 국도가 지나가는 서쪽의 성동고개에도 길 양쪽으로 고분이 산재해 있다. 봉분들은 침착하고 고요하게 솟아 있다.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이다. 1996년 이 고분들에 대한 일부 조사가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발굴은 1999년경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 때 이루어졌다. 당시 석관묘와 석실묘, 옹관묘, 구덩이 모양의 집터(수혈유구), 고려시대 이후의 목관묘 등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조선 시대의 자기조각도 채집되었고, 초기 철기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와 원형점토대토기도 발견되었다. 그 중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삼국시대의 석관묘와 석실묘였다. 이후 2010년 체계적인 복원과 정비를 위해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총 862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무덤은 직경 29m, 높이 10m의 초대형에서부터 직경 7~8m의 봉분까지 다양하다. 상주에는 고분군이 많다. 그중에서도 병풍산 고분군은 상주 최대 규모의 분묘유적이다. 이들은 5~6세기경 신라시대 상주지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병풍산에서 북서쪽으로 길게 뻗어나 간 산줄기를 '검등'이라 부른다. 검등은 '성서로운 언덕' 또는 '큰 언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직경 20m 내외, 최대 34m 규모의 봉분들이 능선을 따라 산재해 있는데 특히 대형 고분이 밀집해 있다.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었다. 그러나 파괴되고 파헤쳐진 가운데서도 봉분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 몇몇 무덤 주변에는 호석(둘레돌)과 할석(깬돌)이 노출되어 있고 대형분에는 서너 개의 도굴갱이 뚫려 있기도 하다. 도굴갱 속으로 내부가 보인다. 편평한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벽과 치석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덮개돌, 그리고 빈 공간. 죽은 자의 방이라는 이 삭막한 명징 앞으로 현재의 삶이 펼쳐진다. 마을이 있고, 밭이 있다. 도로와 자동차가 달리고 병성천 너머 사벌들이 풍요롭다.사벌(沙伐). 병풍산 고분군은 기록에서처럼 '사벌국의 왕릉'일까. 사벌국은 삼한시대 현재의 사벌국면에 존재했던 소국이다. 초기 철기시대는 사벌국의 여명기라 할 수 있다. 사벌국은 3세기에 신라에 복속되었지만 4세기까지 그 세력을 유지했다. 5세기 전반에도 토착 세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신라의 중앙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병풍산과 마주 보는 들 저편 둔진산에는 사벌국의 고성으로 알려져 있는 이부곡토성과 전(傳)사벌왕릉, 그리고 삼국시대의 것인 화달리 고분군이 있다. 기록은 없으나 전 사벌왕릉은 신라 경명왕의 다섯 번째 왕자인 박언창의 묘라고 전해진다. 그는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후에 독립하여 국호를 '후사벌(後沙伐)'로 정하고 스스로 '후사벌왕'이라 칭했다 한다. 그리고 929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패망하고 이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병풍산 고분군이 사벌국의 왕릉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병풍산의 지정학적 위치와 사벌국 초기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유물유적으로 추정컨대 당시 사벌 땅 최고 위계의 수장 묘역임은 분명해 보인다. ◆병풍산성 '사벌국 고성'이라 전해지는 병풍산성은 흙과 돌을 섞어 산의 정상부에 테를 두른 듯 쌓은 테뫼식 토석 산성이다. 언제 누가 축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벌주 대군 박언창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명치 않고, 사벌국의 중심세력이나 삼국시대 상주지역의 지방 유지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상산지'에는 '병풍산에 옛성이 있는데 옛날부터 전하기를 사벌왕이 쌓았다고 한다. 성안에는 못1개소와 샘물 3곳이 있다. 동쪽 성 밖은 백질이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 성안에 물이 떨어지면 절벽 밑에 낙동강 물을 끌어다 먹었다. 그 남쪽 수리에 소금 창고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병풍산성에 웅거하며 박언창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918년 아자개는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했다. 그때 그가 머물던 곳이 병풍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병풍산성은 아자개성으로도 불린다. 산성의 둘레는 약 1.864㎞다. 성벽은 상당부분 허물어지고 매몰되었지만 북문지와 남문지, 망대로 추정되는 곡성과 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치성, 건물지, 샘 등이 확인된다. 성벽을 따라 크고 작은 평탄부가 있고, 특히 북문지와 남문지 안에는 매우 넓은 평탄부가 계단상으로 남아 있다. 평탄부에서는 무문, 어골문, 합성문, 태선문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것들로 여겨지는 다양한 문양의 기와편이 채집되었다. 이는 성내 시설 및 건물이 있었다는 의미다. 샘은 북문지 내에 남아 있는데 풍부한 샘물이 계곡의 저지대를 습지로 만들고 있다. 성안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수하고 개암나무, 산초나무, 찔래, 칡덩굴, 청미래덩굴도 자라나 있다. 여기저기 산벚나무가 드물게 서 있고 동쪽 봉우리에는 철쭉이 무리지어 피어난다. 습지대에는 왕버들이 자생하고 고마리가 집단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무성한 수풀 속에 옛 오솔길의 흔적이 여러 갈래 숨어있다. 산성에서는 상주시내와 넓은 들판, 굽이치는 낙동강 물길과 함께 국수봉, 속리산, 대야산, 백화산, 주흘산 등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경작지와 산계, 수계가 모두 조망되는 천혜의 요새다. 병풍산 일대의 사벌국 거점은 7~8세기경에 지금의 상주시가지 일대로 옮겨갔다고 여겨진다. '해동지도'에는 수문장처럼 상주목 읍치의 수구처를 지키는 병풍산이 묘사되어 있다. 고령의 지산동고분군 정상에 주산성이 있다. 성주의 성산동고분군 정상에는 성산산성이 있다. 병풍산고분군과 병풍산성의 관계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다.사벌국은 온통 미지다. 뚜렷한 길은 거의 없다. 분명한 것은 1500여 년 전 누군가 생을 다했고, 그들의 사회가 여기에서 일어났다 스러졌다는 것이다. 수풀을 헤쳐 옛 오솔길을 찾아낸다. 봉분의 가장자리에서 두세 걸음 물러나 고대의 시간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둥글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걷는다. 오늘의 걸음이 내일의 선명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상주시 누리집. 한국지명유래집.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상주 병성동·헌신동고분군, 2001.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 병성동고분군, 2001. 상주박물관, 상주 병풍산고분군 지표조사 보고서, 2010. 전옥연, 병풍산고분군의 정비와 활용방안, 2012병풍산 고분군은 5~6세기경 신라시대 상주지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2010년 체계적인 복원과 정비를 위해 지표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총 862기의 고분이 확인됐다. 현재는 일부 고분만 복원과 정비를 마쳤다.병풍산 고분군의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었고, 어느 봉분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파괴되고 파헤쳐진 가운데서도 봉분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고분이 산재해 있는 병풍산. 산의 북동쪽에서 북서쪽에 이르는 모든 능선에 무덤들이 무리지어 누워있다.
2021.05.31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5·끝> 김주영의 '영덕 울티재의 산적과 샘물'
영덕군 영해 버스 터미널에서 내륙 쪽으로 가다보면, 창수면 사무소와 나옹왕사 반송유적지를 만나게 된다. 그 앞으로 영양군과 만나는 918번 도로가 조용히 누워있다. 이 곳에서 영양군 경내로 진입하기 직전에 오른편으로 해발 684미터의 독경산 기슭에 있는 서읍령(西泣嶺)이 바라보이는데, 민간에서는 이 고개를 울티재라 부른다. 지금의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 옛날에는 영해 도호부에서 40리에 있는 독경산 지맥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지금은 산골에 있는 작은 고갯길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영해도호부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 지방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나 보부상들은 이 고갯길이 아니면 한양으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나 대소관리들조차 이 고개를 영해관문인양 하고 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시절 이 험준했던 고갯길에는 산적들이 고갯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나그네들과 보부상들 그리고 관원들의 행차를 불문하고 위협하여 약탈과 아녀자 겁간을 일삼았다. 심지어 신혼행차가 멋모르고 고개를 넘다가 새 신부가 산적에 끌려가는 봉변을 당기도 하였다. 그래서 보부상들은 이 고개 아래에서 며칠씩 지체하며 일행들의 수효가 이 삼 십 명으로 불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처럼 모두들 이 고개를 울고 넘는다하여 울티재라 부르게 되었다. 그칠 날이 없는 산적들의 폐해로 가근방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견디다 못한 영해부에서는 포졸들을 풀어 산적들의 은신처인 소굴을 수색하여 소탕하려 하였다. 그러나 산적들이 은거하고 있는 소굴은 찾아 나설 때마다 오리무중이어서 전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심지어 자객과 첩자까지 풀어 은밀히 산적의 행적을 뒤좇았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 울티재에 지금은 위정 관광 농원이라든지 위정 약수터라는 이름으로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위정사(葦井寺)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의 오른쪽 계곡에 한 암자가 있었다. 그 암자에는 <가라두치>라는 한 스님이 기거하며 정진하고 있었는데, 이 스님의 성정이 평소에도 매우 고약하고 거칠고 불순해서 위정사 주지 스님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이 스님이 처음 절간에 행자로 들어왔을 때는 몸도 연약하고 마음씨도 매우 착하여 측은하게 여긴 주지 스님이 슬하에 거두기로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쩐 셈인지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고 행동거지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수행자로서의 법도를 전혀 지키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대낮에 법당 한가운데 네 활개를 쭉 뻗고 코를 골며 낮잠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가 지면 공양이나 염불은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새벽이 되면 암자로 돌아와 늘어지게 잠들곤 하였다. 가라두치의 수상한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주지 스님은 은밀히 그의 뒤를 밟기 시작하여 그의 정체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가라두치는 그가 기거하는 암자 바로 옆 후미진 곳에 토굴을 파고 십 여명의 산적들을 은신시켜 놓고 그들의 두목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절간 바로 코앞에 토굴을 파 놓았기 때문에 포졸들의 삼엄한 수색을 그때마다 손쉽게 따돌릴 수 있었다. 절간 바로 앞에 산적의 소굴이 존재한다는 것은 포졸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일이었다. 산적들은 그 곳에서 십 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많은 행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물론 아녀자들을 잡아다가 첩으로 삼았다가 싫증나면 목숨을 빼앗고, 다시 아녀자들을 잡아들이는 횡포를 일 삼았다. 그런데도 가라두치는 자신의 신변을 위장하여 낮에는 절로 돌아와 승복을 입고 수행하는 척하다가 밤이 되면 산적 두목으로 돌변하여 울티재를 장악하였다. 주지 스님의 미행으로 가라두치의 정체는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었으나 그의 완력과 담력이 워낙 드세어 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뒤를 밟다보면 언젠가는 가라두치를 처치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는 것을 믿고, 계속 뒤밟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암자를 나선 가라두치가 암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계곡으로 내려가는 것이 발견되었다. 주지 스님은 재빨리 그의 뒤를 좇았다. 계곡으로 내려간 가라두치는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큰 바위를 밀치고 그 아래 고인 샘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을 한껏 마신 그는 누가 볼세라, 다시 바위로 샘물을 가리고 주위를 치워 위장한 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지켜보던 주지 스님이 그 자리에 도착하여 진땀을 흘려가며 가까스로 바위를 밀쳐냈다. 과연 그 바위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무언가 짐작이 들었던 주지스님은 그 샘물에 엎드려 한껏 물을 마셨다. 그렇게 하기를 달포 동안 쉬지 않고 계곡으로 찾아가 주야로 몰래 샘물을 마셨다.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주지 스님이 어렴풋이 예상했던 대로 난데없이 기운이 솟고 몸이 불어나며 어떤 괴력을 가진 자와 마주친다 하더라도 물리칠 것 같은 담력과 완력이 생겨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험삼아서 샘물을 덮고 있는 바위를 손으로 밀쳐 보았다. 바위는 일 같잖게 옆으로 밀려났다. 자신감을 얻게된 주지 스님은 암자에 있는 가라두치를 찾아갔다. "네 이놈, 밖으로 썩 나서지 못하겠느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난데없이 호통을 치는 주지의 내심을 헤아릴 줄 몰랐던 가라두치는 속내를 숨기고 물었다. "주지스님께선 어인 일로 소승에게 호통을 치십니까? 고정하시지요." "네 이놈, 네가 암자 곁에 소굴을 파고 은신하고 있는 산적의 두목이란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것을 몰랐더냐?"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가라두치는 다시 한 번 능청을 떨었다. "스님 어인 일로 노망을 하신 것입니까. 소승과 힘 겨루기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인지요?" "내가 늙은 몸이라 할지라도 길손들을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욕보이는 도적 한 놈쯤은 숨통을 끊어 놓을 근력이 있다. 어서 밖으로 나와, 나와 겨뤄 보자." "정말 입니까, 스님?" "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느냐." "어디 한 번 해 봅시다." 그제야 가라두치가 벌떡 일어나 암자의 뜰로 나섰다. 두 사람이 맞붙어서 세 시간 이상 겨루게 되었는데, 그 장소가 청수면 인량동 앞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천지가 진동할 것 같은 벼락이 마른하늘에서 번뜩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번개로부터 섬광이 떨어져 가라두치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고 말았다. 부처님의 힘으로 가라두치를 처단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창수면 독경산에서 흘러내리는 샘물은 지금껏 맑고 차서 마시고 나면 기운차기로 유명하다. 김주영<소설가>연필일러스트=김성태 화백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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